fake and slash

2019 여름호
작성자
보노
작성일
2020-11-11 11:01
조회
3


시즌 중반으로 접어들며 치열해진 순위경쟁에 휴식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장부터 야수조 최고참까지 특타 예정이라는 소식에 빈도 빠질 수는 없었다. 열한시가 넘어 끝난 일요일 경기에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도 못한 빈은 퉁퉁 부은 얼굴로 야구장에 나타났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으로 선배들에게 꾸벅꾸벅 구십도로 인사를 한 빈이 제 라커를 열어 들고 온 가방이며 배트를 집어 넣었다. 훈련할 준비를 모두 마치고나니 선수들은 라커룸 한 가운데 모여 텔레비전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뭡니까, 저거."

"오늘 일차지명 있는 날인거 모르냐?"

"아....."

 

프로 데뷔 후 처음 갖는 풀타임 시즌이다보니 체력관리며 이것저것 정신이 있을 틈이 없었다.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된 모양이다. 빈은 어쩐지 무거운 얼굴로 텔레비전 화면을 쳐다보았다. 신나게 잡담 중인 선배들과 동기, 후배들 틈 사이로 조그맣게 보이는 평면 티비의 화면 안에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순서를 기다리는 신인들이 비춰졌다. 몇 팀 빼고는 이미 누가 지명을 받을 지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으므로 원래 1차지명이란 그렇게 긴장되는 이벤트는 아니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빈이 소속되어 있는 팀은 벌써 작년부터 지명이 확정되어 있는 수순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린 고등학생이 낫겠냐고들 했겠지만 올해의 지명엔 대부분이 이견이 없었다. 그 해 대학리그를 초토화시킨 장본인. 작년 순위에 따라 운영팀장들이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짖궂은 방송사는 벌써부터 그의 자리를 은근슬쩍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저를 잡는 걸 눈치채자 긴장감이라곤 하나도 없이 렌즈를 향해 빙긋 웃어보이기까지 하는 그는 사실 외관만 놓고 보면 운동선수라기보단 연예인에 가까웠다.

 

[발표하겠습니다. 저희 팀은 A대 4학년 좌완투수 차은우를 지명하겠습니다.]

 

화면 바깥 라커룸 여기저기서 질투 섞인 탄성이 튀어나왔다. 저새끼, 저거 생긴거만 보면 완전 기생오라비인데. 정완아, 너 긴장해야겠다? 야수조 선배들의 투수들을 향한 장난섞인 놀림이 이어졌다. 팀 순서가 끝나자 고참이 텔레비전의 버튼을 끄며 잔소리를 했다. 이딴 걸 뭐하러 보냐, 누구 좋으라고. 어차피 다 니들 라이벌이야, 임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야, 안 가냐?"

"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있어."

"아, 아냐...."

"졸라 짜증난다, 야. 쟤는 연예인이나 하지 뭔 야구선수를 한다고 지랄이냐."

"....."

"너 야까부터 근데 진짜 이상하다? 뭔 일 있냐?"

 

쓴 입을 뒤로하고 트레이닝실로 향하던 윤철이 빈의 표정을 살폈다. 너도 심란하냐, 근데 나만큼 심란하냐고. 넌 포지션이라도 안 겹치지. 윤철이 알만 하다는듯 혀를 찼다. 싱숭생숭한 라커룸 안 분위기 속에서 빈도 절대 웃지 못했지만,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fake and slash

주제 : 풋사랑

 

 

"포수 해 볼 생각 없냐구요?"

 

야구 명문이라 널리 알려졌지만, 그만큼 내부 기강도 강하고 규율도 엄격했다. 입학하고 난 뒤 적응하는데만해도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던 빈은 난데없는 감독의 호출에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행여나 이번주 제가 실수한 것이 있었나 열심히 기억을 더듬으며 잽싸게 달려나간 빈은 뜬금없는 제안에 어안이 벙벙했다. 중학교 때 처음 야구를 시작한 이래로 포수 포지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원래는 육상을 하다가 코치의 제안으로 야구부에 들어간 것처럼 빈은 주로 주력이 뛰어난 포지션을 맡았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중견수라던지, 외야수 포지션의.

 

"너, 너네 학년에 차은우 알지."

"아...예."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콧대높기로 유명한 K고의 감독 이하 코치진이 영입을 위해 은밀히 물밑작전을 펼쳤다는 소문까지 있을정도로 리틀리그에서도 차은우의 명성은 자그마한 일간지에 실릴 정도였다. 소문이 뜬소문은 아니듯 은우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K고가 있는 쪽 지역 중학교로 부랴부랴 전학을 왔다. 굳이 실력이 아니더라도 촌티를 못 벗어 고만고만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은우는 마치 도련님마냥 눈에 띄었다.

 

감독의 제안은 단순했다. 고등학생치고 너무 빠른 구속 탓에 은우의 공을 받아줄 수 있는 포수는 없었다. 그나마 3학년의 주전포수가 그럭저럭 가능은 했지만 매 시합마다 따로 호흡을 맞춰야 하는 주전포수가 고작 일학년 신입생만을 위해 전담포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그래도 없는 몇 명없는 포수들이 너도나도 안하겠다 내빼는 바람에 감독도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었다.

 

"당분간만이라도 포수 맡아주면, 시합 출전은 보장해줄게."

"예?"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감독의 일방적인 제안에 쭈뼛거리며 말을 돌리던 빈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확실히 파격적인 제안이긴 했다. 출전은 커녕 시합이 있는 날 버스에 자리가 없어 경기장에 따라가지도 못하는 게 신입생이었다. 그저그런 일학년인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 빈은 대답대신 크게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빈이야?"

 

모래바람이 이는 운동장을 배경으로 초여름 바람에 살짝씩 흩날리는 머리칼은 마치 종이 만화책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이 비현실적이었다. 빈 또한 중학교 때부터 나름 잘생긴 얼굴로 유명해 경기가 있는 날이면 같은 학교 여학생들이 제법 따라다니곤 했었지만 은우는 어쩐지 별개의 시간에서 사는 사람 같았다. 왔는데 왜 말을 안 해.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말투는 그렇지 못했다. 빈은 네 얼굴에 충격받아 하던 걸 멈췄노라 사실대로 고할 순 없었다.

 

"감독님한테 들었어, 잘 해보자."

"...어, 어..."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 잡았다. 저보다 한마디쯤 커다란 손은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투박했다.

 

삼학년 선배들도 못 받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했다는 건 단순한 소문은 아니었다. 호흡을 맞춰보자며 설렁설렁 던진 공에도 빈은 마치 명치를 정면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야구를 시작한 이래로 포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요령이 없어서 더했다. 점점 굼뜨는 빈의 반응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은우가 글러브를 손에 낀 채 가까이로 다가왔다. 왜? 못 하겠어? 약간의 짜증이 묻은 예민한 얼굴이 오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라....빈은 차마 못 하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등번호도 익숙하지 않은 일학년 신입생의 이름은 조금씩 입 위로 오르내렸다. 이름보다는 아직은 '차은우네 포수'라는 기묘한 호칭으로 불릴때가 많았지만. 이 정도는 예쁘게 포장한 수준이었다. '차은우 따까리' '걔 싸가지네 꼬봉' 정도는 예사였다. 시합이 있는 날이면 빈은 은우의 옆 자리에 구겨져 앉아 선배들의 눈치를 봐야했다. 곱지 않은 시선은 단순히 갑작스럽게 얻은 빈의 기회를 질투하는 건 아니었다. 선배들은 차은우를 미워했다. 일학년 주제에 등판 앞 순위 인 것도 그랬고, 자기들보다 훨씬 잘하는 은우의 재능을 질투하고 미워했다. 어차피 선배들에게 빈은 '재수없는 차은우 덕분에 운좋게 시합에 나오는 녀석'정도였다. 뭘해도 빈의 이름 옆엔 은우가 따라다녔다.

 

어쨌든 감독의 약속대로 시합 기회를 보장받은 빈은 그냥 그 자체로 기뻤다. 평소엔 꿈도 꾸지 못하던 청룡기며 황금사자기같은 주말리그에 발이라도 한 번 디뎌보는 것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 몰랐다. 물론 기쁨의 댓가는 혹독했다. 가족들이 있는 곳에선 옷도 함부로 벗을 수 없었다. 빈의 허연 가슴팍엔 언제나 시퍼렇고 노란 멍들이 가득했다.

 

"아퍼?"

"어? 아니....."

"그거 말구, 다른 데 안 아프냐고."

 

일학년인 탓에 샤워는 항상 맨 마지막이었다. 시합에 뛰는 일학년들은 아주 극소수였고 어떤 날엔 은우와 빈 단 둘인날도 많았다. 어느새 평상복으로 옷을 갈아 입은 은우가 라커에 기대 빈을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은우의 노골적인 말에 괜히 민망해져 멍이 든 가슴팍을 가리려던 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빈이 라커를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가방을 꺼냈다. 라커룸 안엔 은우와 본인 둘 뿐이었다. 나름 투수와 포수, 배터리 사이였지만 이상하게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남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 은우의 행동 탓도 있긴 했지만 빈에게 오히려 일정 이상으로 선을 긋는 듯한 태도 때문도 있었다. 덜 말린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갈아 입을 속옷이 젖어들었다. 빈은 마음 속으로 욕을 내 뱉으며 얼른 속옷을 다리에 끼워입었다.

 

색 예쁘다.

뭐?

파랗고 노랗고, 꽃 같잖아.

 

별 또라이 같은 말을 다 하네, 빈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커에 기대 선 은우가 빈의 가슴팍에 달린 멍을 슬쩍 눌렀다. 아, 아파! 뭐 하는 거야? 본인도 양심이 있으면 이런 짓은 안 해야되는 게 맞았다. 꽃 같다고? 좆같겠지. 140키로 이상의 강속구를 매일같이 가슴팍으로 수십번 받아야 하는 빈에겐 어쩔 수 없는 상처였다. 심지어 제 가슴팍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께서 미안하다 한 마디 하지는 못 할망정 꽃 같다니. 역시 정상인은 아니었다. 물론, 고의는 아니겠지만.

 

아퍼?

그럼, 아프지 안 아프냐?

이거 내가 만든 상처잖아.

알긴 아네.

그렇게 생각하니 꼴린다.

.....너 미쳤냐?

빈아, 근데 너는 왜 섰어?

 

맞으면서 흥분하는 변태는 절대 아니라고, 그건 단지 과도하게 잘생긴 얼굴로 뚫어지게 쳐다본 네 탓이라고, 나중에 변명이랍시고 한 말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빈이는 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는구나. 눈깔 달린 생물체라면 모두 다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당연한 말을 저렇게 하니까 더 재수없었다.

 

결론적으로 둘은 그 날 잤다. 축축하고 냄새나는 낡은 라커룸에서. 잘 하지도 못하면서 힘만 무식하게 세고 무식하게 큰 차은우 때문에 빈은 뒤가 찢어져 한동안 심하게 고생을 했다. 너무 가혹하지 않냐. 매일 이렇게 쭈그려 앉아 있는 포수에게. 양심이 있으면 네가 대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빈의 불만 섞인 반문에 은우는 재수없게 웃었고 그 얼굴마저 재수없게 잘생겨 빈은 또 한번 패배감을 느꼈다. 투포수는 항상 한호흡으로 숨 쉬어야 할 정도로 가까워야 한다는 감독의 조언이 우습게 둘은 다른 방향으로 가까워져갔다. 한 번 붙은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건 라커룸일때도 있었고, 학교 화장실일때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일때도 있었다.

 

은우는 삽입 후면 항상 빈의 가슴팍에 있는 멍 자국을 꾹꾹 누르곤 했다. 안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어쩌려고 이러는지 하지말라 몇 번씩이나 역정을 냈지만 도무지 그 버릇은 고쳐지지가 않았다. 예뻐서 자꾸 만지게 되잖아. 그리고 빈은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은우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는 것으로 화를 삭혔다.

 

이학년 겨울, 은우에게도 빈에게도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그리고 은우는 이학년 겨울방학 어깨 회전근 수술을 받았다. 빈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부상이었다. 인터넷을 뒤지며 읽는 글마다 투수에게는 치명적인 부상이며 백퍼센트 회복은 힘들고 완치는 불가능하다, 라고 적혀 있었다. 모두들 촉망받는 어린 천재에게 안타까운 동정을 보냈다.

 

감독님 면회도 거부한대. 수술은 다행히 무사히 끝난 모양이었다. 다만 반년 정도는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가족 이외에는 아무도 은우를 만날 수 없었다. 재수없는 새끼, 지가 뭐라고. 천재에 쏟아지는 동정도 있었지만 어린 치기에 천재의 몰락을 고소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잘난 척 하더니. 하루는 신나게 은우의 뒷담을 까던 학생 하나가 빈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학교나 가지."

"나 정학 먹었어."

"자랑이다."

 

환자복을 입은 은우는 겉으로는 매우 멀쩡해 보였다. 볼살이 다 내려 얼굴이 조금 날카로워진 것 빼고는. 빈도 만나지 않겠다는 걸 무작정 버팅기다 빈을 아는 은우의 어머니가 들여보내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학교는 언제와?"

"안 가."

"지랄한다. 쎈 척하네."

"진짜 안 가."

 

헐렁한 환자복 상의가 내려가 어깨 부분이 슬쩍 보였다. 왼쪽 어깨에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빈은 겨우 이를 못본 척 했다. 차마 괜찮냐는 말은 할 수도 없었다. 빈은 은우의 병실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두 병 얻어먹고 학교 안 가서 부럽다고 한참 성질을 부린 다음에야 일어섰다. 너도 학교 안 간다며. 이틀 뒤면 가거든. 불퉁한 빈의 표정에 은우가 어이없다는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은우가 자퇴한다는 소식은 이틀 뒤 학교에 나간 뒤에야 알았다. 빈은 감독에게 달려가 진짜냐 물었다. 감독도 그닥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벌써 일주일 전이야, 임마. 일주일 전에 은우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와 자퇴서를 내고 간 모양이었다. 빈은 마치 뒤통수를 뭐로 후려 맞은 것 같았다. 자신에게 한 마디도 없이, 정말 한 마디도 없이...... 정학에서 풀린 지 얼마나 됐다고 수업도 재쳐놓고 은우가 입원 해 있는 병원으로 뛰어갔다. 차은우 환자, 퇴원했어요. 이번엔 빈도 은우를 만날 수 없었다.

 

빈은 자신이 텅 빈 것 같았다. 결국에는 차은우와 나는. 이년 동안 은우와 함께 있었던 시간들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어쩔땐 가족보다도 가까운....... 투수랑 포수는 말이야, 숨소리만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야 한 단 말이야. 투포수는, 한 몸이야. 한 선수라고.

 

그래서 난 너한테 뭐 였는데.

아니, 나한테 넌 뭐였는데.

 

삼학년이 된 빈은 포지션을 옮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딱히 포수를 고집할 만큼 빈의 포수로써의 능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다. 순전 은우의 공을 받을 수 있을 사람이 본인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은우가 사라진 이상, 그건 빈에게도 큰 의미는 없었다.

 

 

 

"너 차은우랑 같은 학교 나왔더라?"

"아, 예....."

"알던 사이야?"

"아뇨, 그냥...."

 

은우가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을 갔다는 건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우연히 인터넷 스포츠란에서 발견한 은우는 빈에게는 이미 낯선 얼굴이었다. 이미 대학리그를 평정한 은우는 아마츄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정도였지만 빈은 의도적으로 은우에 대한 모든 것을 못 본 척 했다. 뜬금없이 은우의 이야기를 꺼낸 팀 선배는 더이상 묻지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본인의 새 여자친구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개막 후 일주일, 은우가 있는 팀과 첫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이미 포털란엔 대형 루키의 첫 선발 등판에 대해 기대감을 숨기지 못하는 기사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날은 꼭 이겨야 된다, 지면 진짜 평생 자료화면으로 남는거야, 알아? 벌써부터 전의에 불탄 선수들이 오늘따라 어깨에 한참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빈만 별 말 없이 묵묵히 스트레칭을 했다.

 

갑자기 배트가방을 라커룸에 놔두고 왔다는 선배 때문에 빈은 숨 고를 시간도 없이 심부름을 하러 자리를 떠야했다. 지어진지 한참 된 홈구장은 낡아빠진 나머지 졸지에 홈팀은 원정팀과 라커룸을 반씩 나눠 써야만 했다. 한참을 돌아 라커룸에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선배의 배트가방을 낚아 챈 빈이 집합 시간에 늦을새라 발걸음을 빨리했다.

 

복도 끄트머리에서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빈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적어도 오늘 선발투수 정도는 시합 전에 굳이 만날 필요는 없을텐데. 우스운 변명이었다. 차콜색 유니폼이 새하얀 피부와 우습게도 잘 어울렸다. 물론, 어떤 색을 입어도 모두 잘 어울릴테지만. 고등학교 시절, 아무리 햇빛 아래 같이 굴러도 그을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하얀 은우의 피부를 선배들은 평소에 얼마나 유난을 떨면 저러냐며 흉을 봤다. 하지만 선배들이 얼굴이 탄다며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를때에도 은우는 신경 하나 쓰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잘 있었냐? 연락 좀 하지."

"....."

"이야, 축하한다. 집안 경사네. 티비에서 봤어. 계약금 얼마 받았냐? 한 턱 쏴야겠네."

 

아주 만약에 다시 마주치게 된다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할 지 생각하던 시간들이 있었다. 무작정 주먹부터 날려볼까, 아님 왜 그때 아무말도 없이 사라졌냐고 진지하게 물어야할까. 그것도 아니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처음엔 서운하고 허망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희석되어 남게되는 건, 어쩌면 단순한 슬픔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시간은, 그마저도 모두 지운다. 꼬박 5년만의 만남이치고는, 너무 가볍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빈은 자신에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모두 자신은 모르는 언어들 같았다.

 

"문빈."

 

그리고 차은우는 어떤 말을 할지를. 매일 밤 눈을 감으면 악몽처럼 떠오르던 왜곡된 기억들이 있었다.

 

"보기보다 참을성이 없네."

 

빳빳한 모자챙 아래로 은우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나무랄데 없이 아름다운 호선이 빈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운동선수에게 있어 자존심과 경쟁의식은 필수불가결이다. 프로 5년차, 빈도 어쨌든 운동선수였다. 처음엔 시합 전 주장의 멘트가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넋이 나가 있었지만 플레이볼 시그널을 들었을때쯤엔 남은 건 악이었다.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은우에게는.

 

물론, 현실도 결과도 참담했다. 두 타석 모조리 삼진만 두개 당한 빈은 심지어 세번째 타석에선 인내심이 바닥 난 감독에 의해서 교체당했다. 은우에게 멋지게 카운터펀치라도 날리고 싶었던 빈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벤치에 앉아 본인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은 같은 팀 통료들이 프로 1년차 신인 투수에게 속절없이 당하는 걸 지켜보는 것 밖엔 없었다. 빈도 팀원들도 그토록 원하지 않았던 영원한 자료화면행으로 남았다.

 

"집에 가는 거야?"

"......어."

"타, 한턱 쏘라며."

 

계약금을 어마어마하게 받은 건 맞는지, 빈의 옆에 멈춰선 값비싼 외제차는 은우의 것이었다. 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등 뒤에 원정팀 버스를 한 번, 은우의 외제차를 한 번 쳐다보았다. 감독님이 집에 다녀오라고 허락해주셨어. 빈이 알기로 은우네 가족들은 모조리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을텐데 신인 주제에 거짓말할 배짱도 좋은 모양이었다.

 

열두시가 가까워진 술집엔 사람이 드문드문 없었다. 경기가 막 끝난 직후라 둘의 얼굴을 알아본 사람들이 다가와 싸인도 몇 번 요청했지만 그마저도 점점 줄어들어 종국엔 만취한 취객들 서넛 이외엔 은우와 빈 단 둘이었다. 넌 내일 경기 안 뛰지만 난 내일도 경기 뛰는데. 내일 출전도 못하게 할 작정인지 끊임없이 빈에게 술을 따르는 은우는 도통 속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았던가, 빈은 천상 운동선수였다. 안 마시겠다며 피해야 할 자존심은 없었다.

 

필름이 잠깐 끊겼다. 그나마 술이 쎄서 다행이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이미 다음날로 날짜를 넘기고도 남았음이다. 어차피 시간은 하루를 넘겨 이미 새벽이었다. 빈이 눈을 떴을땐 이미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본인이 착실하게 물고 빤 흔적이 바로 눈 앞에 보였다. 이 미친 욕정의 노예야. 성공할때까진 아무도 안 만나겠다며 본의 아니게 금욕한 결과물이 이렇게 부메랑으로 돌아오는구나. 밀어내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알코올에 절여진 뇌는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뇌 보다는 미쳐버린 본능이 먼저일 것이다.

 

5년 간의 공백이 무색하게 모든 게 너무 쉬웠다. 오히려 자신의 뇌가 은우의 얼굴을 기억하는 것보다 자신의 몸이 은우를 기억하는 것이 더 빠른 모양이었다. 자그마치 2년이다. 2년 간을 미친듯이 붙어먹는데, 내가 어떻게 잊어. 울컥치고 올라오는 서러움이 빈을 데웠다. 빈은 이 와중에도 신중하지 못한 손길로 무지막지하게 뒤를 넓히던 은우의 어깨를 발로 차 밀었다. 은우는 갑작스런 가격에 피하지도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왜."

"왜?"

 

그럼 뭐라고 답할까. 뻔뻔스럽게 눈을 맞춰오는 눈동자가 한치의 탁함 없이 맑았다. 신이 공평하지 못한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너 울어? 빈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불공평한 신이 다시 한 번 차은우의 손을 들어준다. 침대 위로 성큼 다시 올라온 은우가 소리죽여 우는 빈의 눈가를 커다란 엄지로 닦아주었다.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뻔뻔한 주제에 쓸데없이 다정한 손길이라니, 신은 역시 불공평하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어떤 게."

"......대체 너한테 난 뭐야?"

 

말도없이 떠나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만나 이렇게 아무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입 맞추는 게 대체 무슨 관계이길래. 수많은 밤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고르고 또 골랐지만 사실 묻고 싶은 건 하나 뿐이었다. 우리는 대체 뭐야.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답 대신 부드러운 입술이 빈을 덮었다. 빈은 다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은우에게서 답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은 질문이라고.

 

마치 싸움 같았던 섹스 끝에 빈은 말없이 잠드는 쪽을 택했다. 피로가 빈을 집어 삼켰지만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깊히 잠든 척을 해본다. 분명히 자신은 이 지리멸렬한 관계에 먼저 선을 그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재활하면서, 너 경기 뛰는 거 봤어."

"....."

"2년 내내 포수로 뛰던 애가 외야수로 나오는 거 보고 솔직히 기분 좋더라."

 

넌 내 공만 받는 거지?

....뭐, 그런 셈이지.

그거 엄청 야하게 들린다.

씨발, 이새낀 뇌에 뭔 음란마귀만 꼈나.

왜, 다들 그러던데. 감독님도 그러잖아. 차은우 전담, 차은우 꺼.

존나 개소리를 해요, 또.

 

"나한테 넌 뭐냐고?"

 

등 뒤로 더운 숨이 닿는다. 그건 5년 전에 물었어야 했다.

 

"넌 내 꺼지."

 

우리가 서로에게 조금 일찍 대답했으면 달라졌을까. 빈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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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트리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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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말
콩떡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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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聯)
익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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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친구사이 상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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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친구사이 하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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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다
오각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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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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