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아시스

2019 여름호
작성자
로빈
작성일
2020-11-11 11:02
조회
5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몇 년 째 알바생활을 전전하며 취준생 딱지를 달고 있던 문빈, 그에게도 드디어 꿈같은 취직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냥 기회도 아닌, 요새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간다는 C그룹 간부의 비서직을 맡게 될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생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가. 어쩌다 우연히 공고를 발견하고 될 대로 돼라 식으로 지원했던 곳인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른 곳은 다 떨어지고 C그룹만 1차 서류 합격을 받았다. 분명히 페이도 꽤나 받을 테고, 직업이 비서라니, 왠지 간지나잖아.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날려버릴 천치는 없었다.

 

면접은 그냥저냥 보고 왔다고 생각했다. 분위기도 좋았고, 예상했던 질문도 나왔고. 다만 걸리는게… 마지막 질문이 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질문이랄까. 혹시 성 정체성이 어떻게 되냐니, 보통 면접에서 그런 걸 물어보나? 처음 보는 면접관 앞에서 그걸 어떻게 솔직히 말하냐고. 피곤해지기 싫어 당연하게도 빈은 이성애자라고 말하고 왔지만. 사실 빈은 게이였다. 그걸 깨달은 건 고2 여름이었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거짓말을 한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으나, 원래 자소서랑 면접은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로 하는 거라고들 하지 않는가.

 

하여간 빈은 C그룹이 자신을 붙여줄거란 허무맹랑한 근자감에 휩싸인 채 몇 시간째 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아, 내 합격통보 언제 와. 신경쓰지 않으려 티비를 틀어놨으나 온 신경이 휴대폰에 쏠려있던 탓에 정신을 차리니 프로그램 하나가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로 끝나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쉰 빈이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을 껐다.

 

진짜로 연락 안 오나. 괜히 기대했잖아. 눈꺼풀이 무거웠다. 씨이, 분명 면접 분위기 좋았는데…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구만.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갔다. 정말 오랜만의 피곤한 날이었다. 이내 색색대는 숨소리만이 들려오기 시작한 빈의 방은, 별안간 화면이 켜진 탓에 몇 초간 어둠을 밝히던 휴대폰 조명마저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온전한 어둠을 맞이했다.

 

**

 

암막 커튼을 칠 틈도 없이 잠들어버린 탓에 아침햇살이 빈의 얼굴에 따갑게 내리꽂혔다. 빈은 애써 무시하려고 버텨보았으나 결국에는 따가운 햇살에 굴복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이, 진짜. 몇시야… 오전 8시 20분. 빈이 다시 쓰러져 잠들려던 찰나, 습관적으로 갖다댄 지문에 잠금이 자동으로 풀린 탓에 보이는 문자메시지 팝업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뭐, 뭐야 이거…

 

-아, 문빈 씨. 연락 주셨네요. 어젯밤에 연락 없으시길래 다른 지원자분 찾아보려던 참이었는데.

“아아아! 아니! 아니예요 절대! 그게, 답변을 안 한 게 아니라 제가 잠이 좀 많아서… 정말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깜빡 잠들어버렸어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늦은 시간에 연락하면 도대체 누가 본다고 그러냐! 따지고 싶은 마음이 혀끝까지 올라왔지만 겨우 이성에 힘을 주고 참았다. 죄송한 마음 역시 개미 코털만큼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은 자본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노예였다. 내가 이렇게까지 굽히고 들어가는데 나를 비서로 써 줘.

 

-그래요? 그러면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와, 미친. 하마터면 폰을 손에서 놓을 뻔 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님… 진짜 감사합니다.

 

 

 

[은콩] 오아시스

w. 로빈

 

 

 

면접을 보러 이미 한 번 온 적이 있는 건물인데도 겉부터 그 위용을 뽐내는 건물에 빈이 다시 한 번 움츠러들었다.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내가 와도 되는 건가… 로비 바닥은 거울이라도 되는 것 마냥 모습이 그대로 비쳐보였고, 사방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품격 있어 보였다. 쫄지 마, 문빈. 너도 지금 정장 입었다고. 빈이 괜히 어깨를 한번 펴는 사이 빈의 시야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어, 저 사람은 면접관으로 들어왔던… 헉, 이쪽으로 오잖아?

 

“문빈 씨. 맞으시죠?”

 

그 남자는 자기를 박진우라고 소개했다. 면접 때 내내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기만 하더니, 다 컨셉이었는지 지금 이렇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웃고 있으니까 약간 그… 편의점에서 파는 바나나우유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원래 은… 아니 이사님 비서였는데 이번에 옮기게 되어서요.”

“아, 네.”

“그래서 급하게 새로 비서를 뽑은 건데, 빈 씨처럼 좋으신 분이 뽑혀서 다행이예요.”

 

다 돈 때문에 하는 일인데요, 뭘.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본심을 꾹꾹 눌러담은 채 해사하게 웃어넘긴 빈이 진우의 악수를 양 손으로 받았다.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자켓을 걸쳐입는 진우의 행동에 여유가 넘쳤다.

 

“이사님께서 오늘 사전에 한 번 만나 뵙고 싶다고 하셨으니까 이사실로 가시면 돼요. 아, 이사실은 맨 꼭대기층이니까 저쪽 코너 돌면 딱 하나 있는 엘리베이터 쓰면 될 거예요.”

“아, 네! 감사합니다. 바로 가 볼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어쨌든… 앞으로 이사님 잘 부탁드려요. 이건 제 명함이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진우가 가르쳐준 엘리베이터가 보일 때 즈음 빈은 깨달았다. 아, 이사실 몇 층인지 못 들었는데.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라고는 했지만, 이런 걸로 연락하는 건 역시 좀 그렇겠지. 무작정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무섭게 빈의 고민은 해결되었다. 버튼이 로비와 스카이라운지, 단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와, C그룹 장난 아니다… 다른 회사도 다 이런가? 통유리로 된 엘리베이터가 바깥 풍경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띵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도착을 알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펼쳐진 긴 복도가 빈을 반겼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구두와 바닥이 부딪혀 또각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빈의 귀에 울렸다. 끝이 없을 것처럼 길던 복도 끝에 이사실이 있었다. 이사실 앞에 도착한 빈이 매무새를 가다듬고 숨을 골랐다. 좋든 싫든 앞으로 제가 모셔야 할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제발 좋은 사람이기를, 속으로 빌며 이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목소리가 왠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사람 목소리가 다 거기서 거기니까, 이런 목소리는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을 거라고. 그래서 아닐 거라 생각했다. 떨리는 손으로 이사실의 문을 열자 뒤돌아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빈을 바라보았다.

 

“어서 와요.”

 

잔인하게도 신은 빈의 편이 아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지금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분명, 차은우였다.

 

**

 

문빈이 차은우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더운 날씨 탓에 아무도 신청하지 않아 떠밀려 나가게 된 교외봉사활동에서였다. 원체 몸에 열이 많은 빈은 한 발짝을 뗄 때마다 이마에서 땀을 한바가지씩 흘리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흘러 눈에도 계속 들어가는 탓에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목장갑을 낀 손으로 흐르는 땀을 훔치기에도 바빴다. 그 덕에 빈의 쓰레기 수거 봉투는 아직 반절도 채 차지 못한 상태로 바람이 부는대로 나부끼고 있었다.

 

-다 채운 봉투는 여기 놔두면 돼요?

 

멀리서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와, 쟤는 벌써 다 했나보네. 부럽다. 제 손에 들린 봉투를 허망히 보고 있던 빈은 그냥 공원 쓰레기통 뒤져서라도 채우고 끝낼까. 싶은 생각뿐이었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땀이 눈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쨍한 햇빛 사이로 하얀 뭉게구름이 몽실몽실 떠다니고 있었다. 날씨는 참 더럽게도 좋네.

 

“뭐해?”

 

별안간 제 앞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원상복구시키자 웬 처음 보는 남자애가 서 있었다. 차은우. 명찰에 쓰여진 이름을 보니 생각났다. 학기 초 전학왔을 때부터 잘생겼다고 여러 입에서 오르내리던 걔. 딱히 관심이 없어 한 번도 보러간 적은 없지만 이렇게 보니 참 잘생기긴 했네 싶었다.

 

“왜 물어봐?”

 

그러자 차은우는 머쓱한 듯 말했다.

 

“아니, 인솔자분께서 다 했으면 너 좀 도와주라고 하셔서.”

“아, 그래? 도와주면 나야 좋지.”

 

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반도 채워지지 못한 쓰레기봉투를 짤랑 흔들었다. 빈의 머리칼이 여름 바람에 사르르 흩날렸다. 은우는 그 장면을 잠시 바라보다 눈을 휘어 살짝 웃었다. 빈의 쓰레기봉투가 차곡차곡 채워짐에 따라 둘의 사이도 가까워졌다. 생긴 것만 보면 전혀 어울려 다닐 것 같지 않은 둘은 생각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운동을 좋아했으며 영화 취향도, 감성적인 문장이나 시를 좋아하는 점마저 같았다. 알고 보니 사는 동네도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은우는 6시 반에 학교로 나서는 반면 빈은 지각 마감 시간에 맞춰 겨우 등교했기 때문이었다.

 

차은우와 문빈은 그날 이후로 하교를 같이 하기 시작했다. 마침 같이 하교하는 친구들은 전부 반대 방향에 살아서 혼자 가기 심심했던 참이었다. 혼자 집에 갈 때는 천 리처럼 느껴지던 길이었으나, 이제는 집이 가까워지는 게 아쉬울 정도로 하굣길이 즐거워졌다. 아이스크림도 밥 먹듯이 먹었다. 은우는 누가 옆에서 말리지 않으면 혼자 5개도 먹는다고 했다. 차은우는 바닐라 아이스크림 같은 걸 좋아하게 생겨서는 의외로 팥이 들어간 붕어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차은우는 알면 알수록 의외인 면이 많았다. 그래서 자꾸만 사람을 궁금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차은우를 언제부터 좋아했느냐고 물어보면 감히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었다는 말이 가장 적당한 표현인 것 같았다. 그냥 한 번 보면 두 번 보고 싶고, 하굣길에 나란히 걷다가 손이라도 맞부딪히면 괜히 혼자 설레하고, 차은우가 웃는 걸 보고 있으면 어느새 저절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차은우에 대한 마음은 더위와 함께 뜨겁게 끓어갔다.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차은우를 볼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그럴 때마다 하복 셔츠가 구겨지도록 심장께를 꽉 쥐고 심호흡을 세 번 정도 한 뒤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은우는 매번 늦는 내가 짜증나지도 않는지 사슴같은 눈을 예쁘게 접으며 웃어주었다. 차은우의 검은 머리칼이 여름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그렇게 짝사랑으로 끓었던 무더운 여름이 느즈막이 끝나갈 때 즈음, 빈은 은우에게 고백했다. 여느 날과 같이 아이스크림을 각자 하나씩 물고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나란히 앉은 채였다. 유난히 하늘은 새파랬고 떠다니는 뭉게구름처럼 마음이 벅차올랐다. 솜사탕처럼 크게 부푼 마음이 비로소 입 밖으로 나오는 때였다.

 

“은우야.”

“응.”

“좋아해.”

 

날씨가 좋아서, 바람이 상쾌해서, 지금 이 순간이 영원처럼 행복해서. 여름의 산들바람처럼, 그냥 그렇게 물 흐르듯이 흘려보낸 고백이었다. 매일밤 잠들기 전 은우에게 고백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것과는 달리 아주 명료하고 담백한 고백이었다.

 

“빈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였으나 빈은 직감했다. 평소와 같은 관계가 더 이상 이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방금 자신이 그 마지막 선을 넘어가버린 것임을. 은우가 부른 빈의 이름, 그 한 마디 뒤에 나올 그 다음 말이 두려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제 이름이 불린 순간부터 이미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차은우가 끊어버리기 전에 제가 먼저 끊어버리는 게 상처를 덜 받는 길이라 생각했다. 눈물이 고이기 일보직전인 눈으로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괜찮아, 은우야.”

“빈아.”

“이해해. 흔한 일도 아니고,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게…”

“….”

“역시, 좀 그렇지? 하하, 나도 참, 바보같이….”

“빈아 그게,”

“나, 나 그럼 이만 가 볼게. 오늘도 고마웠어, 은우야.”

 

빈이 은우의 반대방향으로 뒤돌았다. 귓가에 스쳐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빨랐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다리가 멋대로 뜀박질하고 있었다. 눈물이 빠르게 방울져 빈이 달리는 반대방향으로 떨어져나갔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열여덟, 빈의 열렬하고 절절했던 짝사랑의 결말이었다.

 

이게 뭐야, 혼자 사랑하고 혼자 이별하고…. 지금 제 꼴이 참 우습다 싶었다. 생각해보면 저 혼자만 느꼈던 설렘일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혼자서만 안고 갈 감정이었다. 왜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감정이라 생각했는지, 항상 저를 보며 웃어주던 그 미소가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이럴거면 그렇게 따뜻하게 웃어주지 말지, 매일 집 앞까지 데리러 오지 말지, 깜빡하고 마이를 가져오지 않은 날, 나한테 자기 마이 주고 대신 벌점 받지 말지, 그냥, 그냥 처음부터 나한테 잘해주지 말지…. 은우를 원망하려고 떠올린 기억들이 전부 좋아서, 그래서 가슴이 더 깨어질 듯 아팠다. 얼마나 엉엉 울었는지 목이 건조해 까슬한 느낌이 났다.

 

집에 놀러가도 되느냐 물으면 사람 좋은 미소로 ‘다음에.’라고 말하며 웃던 것도, 걷다가 몸이 맞닿으면 은근히 거리유지를 하던 것도 전부, 은우는 어쩌면 벽을 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냥 그런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사실 차은우에게 문빈이란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달하자 눈물 대신 자조적 웃음이 나왔다. 지난 몇 달 간 혼자 느꼈던 감정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설렘에 밤잠 설치고, 귀찮아서 통 안 하던 옷 쇼핑도 하고, 얼굴에 뾰루지가 난 날은 괜히 거울 앞에서 몇 십분을 씨름하고, 하루하루 네 생각에 살아가던 날들이, 그 시간들이 아스라이 멀어져갔다. 너는 왜 그렇게 다정해,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텐데. 차은우를 원망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루하루를 눈물로 지샜다. 그래, 너는 꼭 내게 열병 같은 사랑이었다. 한여름에 찾아온, 지독하게 뜨거운 열병.

 

거짓말처럼 빈은 꼬박 일주일을 열병으로 끙끙 앓았다. 원체 건강한 체질이라 감기 한 번 심하게 앓아본 적 없는 빈이기에 생소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었다. 속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흐르고, 세상이 핑핑 도는 것마냥 머리가 울렸다. 그 와중에도 차은우가 보고 싶는 생각이 지배하는 무의식이 두려웠다.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은 열 때문인지, 아니면 차은우 때문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며칠을 앓다가 겨우 정신을 약간 차렸을 때에는 열을 식혀주기라도 하는 듯 불어오는 상쾌한 여름바람이 빈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저도 모르게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었다. 은우를 처음 만난 날처럼 유난히 푸른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자꾸만 보고 있으면 또 은우가 생각날까봐 그냥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리고 이 열병이 끝나면 차은우도 저에게서 떨어져나가기를, 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

 

그런데 살면서 이런 식으로 차은우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C 그룹이 차 씨 일가라는 건 어디서 얼핏 들은 것 같았는데, 설마 그 차 씨 안에 차은우도 포함돼 있을거라고는, 아니, 이게 정상적인 일반인의 사고임이 틀림없었다. 알고 보니 재벌인 차은우가 예상 밖이어도 한참 밖의 인간인 것 뿐이었다. 빈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이사실 구석구석을 배회했다. 은우가 한참동안 비서 일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통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아,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

“네, 말씀하세요.”

“매일 아침에 모닝콜 해줘야 해요.”

“네?”

“모닝콜이요. 혹시 뭔지 몰라요?”

 

내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겠냐. 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거, 지금 나 제대로 엿먹이려는거 맞지? 매일같이 그렇게 일찍 일어나는 놈이 모닝콜을 해 달라고? 몇 년 살아가면서 생활패턴이 바뀔 수야 있는 일이지만 빈의 아침잠이 코알라 수준으로 많다는 걸 뻔히 아는 차은우가 저딴 식으로 구는 게 속이 투명히 보이는 것 같아 괘씸했다. 제 앞에 서 있는 저 잘난 얼굴을 보니 이건 분명 자기를 있는대로 괴롭히겠다는 게 틀림없었다. 이미 늦은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아니요, 잘 알죠, 모닝콜.”

 

누구 덕분에요. 몇 년 전에는 자기가 모닝콜 해줬으면서. 집 앞까지 데리러도 왔으면서. 나쁜 놈.

 

“그래요, 그럼 매일 아침 5시 30분에 모닝콜 부탁해요.”

 

5시 30분? 문빈이 살면서 해외여행갈 때 조차도 단 한 번도 일어나본 적 없는 시간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까지 안 자는 한이 있어도 그 시간에 일어나는 건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굽히기에는 자존심이 감히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최고의 모닝콜을 해 주지. 기대해라, 차은우.

 

**

 

삐삐삑- 삐삐삑-

 

미친 듯이 울리는 알람소리를 무시하고 싶었다. 5분 후에 또 울리게 설정해놨으니까 5분만 더… 무거운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다가 번쩍 떠졌다. 전화. 전화해야해. 보통 모닝콜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급하게 휴대폰 시계를 확인했다. 5시 27분. 차은우, 그 개새끼에게 모닝콜을 하기 3분 전이었다. 빈이 채 정신도 차리지 못한 상태로 은우의 전화번호를 다이얼에 입력했다. 자연스럽게 전화번호 11자리를 입력하고 나자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매뉴얼이라도 되는 듯이 움직이는대로 놀린 손가락이 차은우의 전화번호를 정확하게도 입력했다. 어째서 제 손가락은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은우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는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괜히 원망스럽게 시계만 노려보다 디지털 시계의 숫자가 30으로 바뀌기 무섭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이럴거면 바래다 주었던 그 날 밤, 넌 나를 안아주지 말았어야지―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려왔다. 동시에 기억의 파편들이 빈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이건 분명 빈이 은우에게 추천해주었던 노래였다. 한때 가사가 꼭 자기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넌지시 추천했던 곡이었다. 눈치 빠른 차은우가 못 알아먹었을 리가 없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 노래를 추천한 18살의 제가 참 어리석었구나 싶었다. 갑자기 차은우가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컬러링을 이 노래로 해 놨는지, 차은우랑 더럽게 안 어울리는데. 흘러나오는 노래는 차은우가 아니라, 차은우에게 보기 좋게 거절당한 구질구질한 나한테나 어울리는 노래인것 같아 괜히 짜증이 났다. 나는 거절했으면서 내가 추천해준 노래는 마음에 들었나보지? 나쁜 새끼…. 왠지 노래에게 진 기분이 들어 빈이 속으로 잔뜩 꿍얼대는 사이 노래가 끊기고 상대편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 이사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자고 일어나 목소리도 가다듬지 못한 탓에 삑사리가 그대로 전화기를 타고 나갔다. 아이씨, 개쪽팔려…. 빈이 자체 음소거를 한 채 머리를 쥐어뜯는 와중에 수화기 저편에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화기 멀리 떼고 웃으면 안 들릴 줄 알았나보지? 휴대폰을 침대에 던지고 악을 질르고 싶었다. 아악 짜증나! 차은우 진짜 짜증나….

 

-일어났어요. 이따 회사에서 봐요, 빈 씨.

“네, 이사님.”

-아, 빈씨.

“네, 말씀하세요.”

-출근하는 길에 카페라떼 한 잔 부탁해도 될까요. 커피 들고 이사실에 들어와 있어요.

“네, 알겠습니다.”

 

그 대답을 끝으로 전화가 칼같이 끊겼다. 아침잠이 많아 과연 빈이 모닝콜을 하루라도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용케 일어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모닝콜을 순순히 하는 게 꽤나 웃겼다. 차은우는 액정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홀로 웃음참기 챌린지 중이었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당연하게도 차은우는 모닝콜 같은건 필요 없었다. 차은우 자체가 인간 모닝콜인데 굳이 또 모닝콜이 필요할 리가 있겠는가. 빈의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이미 옷을 갈아입고 아침을 먹기 직전이었다.

 

전화가 끊긴 지 오래인 검은 액정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아침을 먹었다. 이 휴대전화에 두 번 다시 네 이름이 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괜히 들뜨는 기분에 평소에는 잘 뿌리지도 않는 향수를 두어 번 뿌리고 차에 올랐다.

 

“오늘 기분이 좋으신가봅니다, 이사님.”

“아, 그런가요.”

 

은우가 제 얼굴을 매만지자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는지 광대가 볼록 솟아 있었다. 이런 적은 몇 년 만에 처음인 것 같았다. 보고 싶었어, 빈아.

 

**

 

빈의 고백을 들었을 당시의 은우는 혼란스러웠고, 위태로웠다. 당시 은우의 집은 사업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정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은우의 아버지는 은우가 회사를 물려받았으면 했지만 은우는 그걸 원치 않았다. 겉으로 보여주기식의 피곤한 인간관계와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 돈 때문에 주변을 맴돌며 콩고물이라도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치들…. 생각만으로도 혐오스러웠다. 은우는 사람들을 밟고 군림하기보다는 단지 사랑하는 사람과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집에 들어가면 느껴지는 압박에 목이 졸렸다. 사람과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싫었다. 마음을 열고 다가갔을 때 역시 이 사람도 목적에 의해 친해지려고 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참해지는 기분이 싫어 학교에서도 되도록 혼자 다녔다. 주변에 사람은 넘쳤지만 늘 외로웠다.

 

그러던 중 한여름의 더위마냥 성큼 다가온 빈은 은우의 안정제였다. 같이 있으면 누구보다 편안했고, 무언가 할 때면 자꾸 생각이 났다. 다음에 빈이랑 같이 해야지, 빈이랑 같이 와야지, 빈이랑 같이 봐야지…. 빈을 알아가면 알수록 함께하고 싶은 것들은 늘어만 갔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는 은우조차도 이게 사랑이구나,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마음이었다. 빈에게 받은 고백에 세상을 가진 기분이었으나 열여덟의 차은우는 사랑 하나에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용기있지 못했고, 감정적이지 않았으며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았다.

 

빈에게는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다. 혹여나 집에서 받은 압박감과 스트레스를 자칫 빈에게 풀어버릴까 겁이 났다. 빈을 누구보다 원했으나 빈을 온전히 마음에 품을 자신이 없었다. 행복하게만 해 줄 자신이 없었다. 그게 두려워서, 빈을 잃기가 무서워서 그냥 자연스레 빈의 손을 놓아버렸다. 그 애절한 마음을 모르는 척 끊어냈다. 빈이 돌아서기 전 찰나의 상처받은 표정에 더 상처받은 쪽은 은우였다.

 

목이 말라 곧 죽을 것만 같을 때 구원처럼 다가온 네가, 가까이 다가가면 신기루처럼 흩날리듯 사라질까 두려웠다. 사방으로 죄어 오는 압박감 속에서도 앞만 보고 걸어갈 수 있게, 희망을 잃지 않게 지표가 되어주는 너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 같았다. 그러나 비로소 오아시스에 다다랐을 때에 거기서 멈추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리고 오아시스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너에게로 한 발짝 다가가는 것을 망설여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아시스에 영원히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곳이 낙원이었다는 것을.

 

**

 

이사실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에 괜히 숨을 한 번 골랐다. 안에 빈이 와 있겠지. 문을 덜컥 열고 들어가자 따스한 커피향이 은우를 반겼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여전한 묘한 하이톤의 목소리였다. 양복을 입고 서 있는 빈의 형체가 몇 년 전 교복을 입고 있던 여름의 그것과 겹쳐보여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커피는 책상 위에 올려뒀습니다.”

“빈 씨 마셔요. 오늘 업무 첫 날이라 힘들텐데.”

“아, 저는 괜찮….”

“아뇨, 거절하지 말고 마셔요. 빈 씨 주려고 사오라고 한 거예요.”

“아…. 그럼 감사히 잘 마시겠습니다.”

 

가볍게 목례를 한 빈이 비서실로 향했다. 달칵, 비서실이 닫히자 은우가 아쉬운 듯 닫힌 비서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앞으로 매일 손 닿을 거리에 빈이 있다는 사실에 한결 마음이 놓였다.

 

**

 

비서실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와이셔츠가 구깃해지도록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마치 몇 년 전 집 앞에서 저를 기다리던 차은우를 봤을 때처럼 가슴이 시큰했다. 분명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열병을 떨쳐내면서 같이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제 심장이 고장난 게 틀림없었다.

 

차은우 너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 출근 하루만에 빈은 다짐했다. 아무래도 퇴사를 해야겠어.

 

그러나 그 결심은 오래지 않아 깨졌다. 집에 가는 길에 소주나 한 병 사려다 혹시나 해서 확인한 통장 잔고가 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편하려고 일 하냐. 돈 벌려고 일 하지. 내가 진짜 더럽고 치사해서… 소주 대신 냉장고에 넣어둔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찹찹했다.

 

**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김없이 모닝콜은 이루어졌다. 매일 아침의 시작부터 퇴근하기 전까지 하루의 전부가 차은우로 이루어지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일찍 일어나는 건 해도 해도 도무지 적응되지가 않았다. 20년 넘게 살아오던 생활 패턴을 억지로 바꾸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차은우가 매일 아침 사 오라고 시키는 커피는 사 오는 족족 빈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럴 거면 왜 사오라고 하는 거야, 공짜커피 없어도 되니까 그냥 안 사오고 안 먹으면 안 되나. 커피 사 올 시간에 잠을 더 자면 이때까지 아낀 수면시간이 얼마야…. 밑져야 본전이다 싶었다. 싸가지 없다고 잘리면 차은우도 안 보고 좋지, 뭐.

 

“이사님.”

“네, 말씀하세요.”

“저… 커피 매일 사오라고 시켜서 저 주시는거, 왜 그러시는 거예요?”

“네?”

“아, 아니 그게…. 궁금해서요.”

 

은우가 웃었다. 빈도 머쓱한 듯 웃었다.

 

“궁금해요?”

“네!”

“비밀입니다.”

 

엑? 빈이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은우는 살풋 웃다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서류나 검토해와요. 빈은 속으로 꿍얼대며 서류를 착착 넘겼다. 씨이… 네, 존나 잘 알겠습니다. 씩씩대며 뒤돌아 가는 빈의 뒷모습을 보는 은우의 입꼬리가 한껏 올라가 있다는 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빈이 침대에 늘어졌다. 하루종일 바쁘게 일하고 퇴근길에는 지하철에서 조느라 한 번도 확인하지 못한 휴대폰에 알림창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중 눈에 띄는 연락 하나.

 

[집주인입니다. 계약 건 만료가 당겨질 것 같아 방문했는데 부재중이셔서 문자 남깁니다. 보시면 바로 연락 부탁드려요.]

 

침대에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른 빈에게 돌아온 말은 2주 안에 집을 비워주셔야겠다는 말 뿐이었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냐고 따져도 보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똑같았다. 아직 월급이 들어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다시 침대에 누워 팔로 눈을 가렸다. 아, 어떡하지…. 갑자기 찾아온 고민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스르르 잠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새벽이었다.

 

밝은 아침햇살에 빈이 부스스 눈을 떴다. 정신이 약간 들자마자 쎄한 느낌이 등 뒤에서부터 올라왔다. 에이, 아닐거야. 자기위로를 하며 본 휴대폰 시계는 딱 생각했던 것만큼 절망스러웠다. 거의 9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눈 앞이 아득했다. 일단 차은우, 차은우에게 전화를….

 

컬러링에서 노래 한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일단 무조건 빌고 보자.

 

“아, 저, 이사님, 그… 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일어나서, 어제 사정이 있어서 늦게 잠드는 바람에….”

-빈 씨, 어디 아픈 건 아니죠?

“네?”

-걱정했어요.

“아, 가, 감사… 최대한 빨리 가겠습니다.”

-그래요, 천천히 와도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와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빈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차은우가 왠지 저를 걱정해주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항상 사무적으로만 대하던 인간인데…. 멍하니 머리를 감다가 눈에 샴푸가 들어가는 줄도 몰랐다.

 

회사까지 어떻게 도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휘몰아치듯 정신없이 와보니 회사에 도착해 있었다. 이사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자 차은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이사님. 절대 지각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괜찮아요. 오늘 그렇게 급한 일 없었으니까. 힘들텐데 물 좀 마시고 쉬어요.”

“네, 감사합니다.”

 

한숨 돌린 빈이 비서실로 향하려 등을 돌리자 은우가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빈 씨.”

“네?”

“그 사정이라는 게 뭡니까?”

“사정이요?”

“어제 사정이 있어서 늦게 잤다면서요.”

“아, 그게….”

 

평소 같았으면 별 거 아니라고 하고 넘겼을텐데 왠지 오늘만큼은 다 말하고 싶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서였는지, 하소연이 하고싶었던 건지, 아니면 이제 차은우가 조금은 편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 물흐르듯 술술 흘러나왔다. 집 계약이 앞당겨져서 막막하다는 것과 돈이 없어 조만간 길바닥에 나앉게 될 신세라는 것, 그리고 혹시 월급 날짜를 조금 당길 수 없냐는 것까지. 원래라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그만큼 급박했기에 말할 수 있었다. 은우는 진지한 표정으로 빈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빈씨.”

“….”

“그럼, 우리 집에서 같이 사는 건 어때요?”

“네에?”

“역시 좀… 그런가요. 나름 꽤 고민하고 말한건데.”

 

은우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대답하는 빈의 목에서 삑사리가 났다.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아니, 세상에 자기 상사랑 같이 사는 미친 놈이 어디 있어. 게다가, 게다가… 예전에 고백했다 차인 사람한테 같이 살자니, 도대체 얘는 나를 뭘로 보는 걸까 싶었다. 또 허망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울컥해서 대답을 내뱉었다. 넌 항상 뭐가 그렇게 쉬워.

 

“저, 이사님,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요.”

“빈 씨.”

“네?”

“혹시… 제가 불편한가요?”

 

당연하지, 너라면 안 불편하게 생겼냐? 지금 입을 열었다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차마 입을 떼지는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차은우를 노려봤다.

 

“빈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몇 년만에 차은우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었다. 살면서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줄로만 알았던 그 목소리였다.

 

“내가… 불편해?”

“어. 불편해.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너랑 같이 있어야 하는 것도 불편하고, 너한테 존댓말 써야 하는 것도 불편하고, 너랑 마주 보고 웃는 것도 힘들어. 나, 이게 네 비서 일이었다는 걸 알았으면, 그랬으면 절대 지원하지 않았을 거야. 진심으로. 너는, 너는 왜 자꾸만…”

 

 

울컥하는 마음에 입에서 나오는대로 쏘아붙였다. 몇 년간 묵혀왔던 감정들이 한 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눈에서 눈물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따위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차은우가 당황하며 닦아주려 한 걸 보면 아무래도 울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빈아, 나는 그냥 네가 힘들까봐…”

“은우야, 나는,”

 

나는 너 때문에 힘들어.

 

결국 목이 메어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뭔데 이래라저래라야? 왜 자꾸 잘해줘? 왜 자꾸 웃어줘? 왜, 왜 자꾸 설레게 해? 이러니까 착각을 하게 되는거잖아. 너도 어쩌면 나를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멍청한 생각 속에 빠져서 또 혼자 주인공이라도 된 듯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거잖아. 더 이상 비참해지기 싫었다. 차은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제 마음은 이리도 따라주지 않는지. 그 잘난 얼굴을 볼 때마다 보란 듯이 무너지는 마음의 벽이 야속했다. 마주보고 말할 자신이 없어 뒤돌아 나가려다 말고 목소리를 짜내어 한 마디를 겨우 뱉었다.

 

“이사님, 저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그건, 그냥 제가 챙겨주고 싶어서 그런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아니, 그래도 하지 마세요, 이사님. 그런 거 이제… 하지 마, 은우야.”

“….”

“나, 나 너무 힘들다.”

 

고개를 돌린 빈의 눈에서 흘러내려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얼굴에 매달린 눈물이 아슬했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빈이 제게 고백을 했던 그 날 이후로 두 번 다시는 빈의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고 다짐했는데 문빈이 또 자신으로 인해 울고 있었다. 어떻게 자신은 저 흘러내리는 눈물마저 닦아줄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인지. 올라가려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차마 빈을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은우는 빈이 나간 이사실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스르륵 주저앉았다. 양복이 구겨지는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사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를 뒤돌아 가던 그 뒷모습이 몇 년 전의 빈과 겹쳐보여서, 그리고 빈을 또다시 붙잡지 못한 제가 바보같아서 자조적 웃음이 나왔다. 나는, 우리는 또 결국 이렇게 되는걸까, 사랑 참 힘들다, 빈아.

 

**

 

진우는 휴대폰에 나란히 뜬 알림 두 개를 보고 한참을 고민했다. 하나는 빈에게서, 하나는 은우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문 비서님

[박 비서님, 보시면 전화 한 통만 부탁드릴게요.]

차동구

[형, 오늘 나랑 술 좀 먹어주라. 보면 연락 줘.]

 

이것들이 쌍으로 뭐하는 거야. 일단 몇 년지기 하찮은 동생과의 술 약속보다는 문 비서 쪽이 더 궁금했기에 곧장 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빈 씨, 무슨 일이예요?”

-아, 그게… 저,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혹시,

 

-비서직, 그만둘 수 있을까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생각보다 훨씬 이른 연락이었다. 차은우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은우와 함께 비서직 지원 이력서를 검토하던 날이 떠올랐다. 이력서 뭉텅이를 차라락 넘기다 말고 멈춘 손끝과 동시에 토끼눈이 되어 이력서를 빼어들고 세 번을 훑어보던 차은우는 다급히 저를 불렀다.

 

“혀, 형. 이 사람.”

“누군데?”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 무조건 이 사람으로 뽑아. 아니면 나 비서 안 써.”

“어, 어어…. 그래, 그럼.”

 

생전 처음 듣는 은우의 고집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차은우가 까다로운 안목으로 어련히 잘 골랐겠거니 싶었다. 빈이 비서로 온 날 이후로 유달리 행복해보이는 은우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빈이 은우에게 특별한 사람이었겠거니 지레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 번에 양쪽에게 다 연락이 오는지.

 

“혀엉.”

“뭐야, 벌써 혼자 마시고 있었어?”

“힘들어서 그랬지이…. 힘들어서.”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빈 씨가 그만두겠다고 연락 왔던데.”

 

순간 테이블에 늘어져 있던 은우가 정신을 확 차린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빈이가 그래? 그만두겠대?”

“빈이?”

“어, 빈이.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우리 빈이. 좋다 못해 사랑하는 우리 문빈이.”

“가지가지 한다. 언젠가 말해주겠지 하고 기다렸는데, 너 도대체 빈 씨랑 무슨 사이야?”

“혀엉, 그걸 몰라? 빈이는 말이야…”

 

빈이는, 내 첫사랑이야, 형.

 

“근데, 근데 빈이가 이제 내가 불편하대, 형. 돌고 돌아서 빈이랑 겨우 다시 만났는데… 이젠 내가 싫대. 형, 나 어떻게 해야 할까, 응? 나 어떻게 해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눈물을 쏟아내는 은우 때문에 더 당황한 쪽은 진우였다. 길을 잃어버린 아이마냥 양 뺨을 가득 적시며 엉엉 우는 은우가 그 어느 때보다도 애처로워보여서 그저 등을 토닥여줄 수밖에 없었다.

 

“흐끅, 혀엉, 나, 빈이 없으면 안된단 말이야… 이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았는데 이제는 정말 빈이 없이는 못 살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형….”

 

그 이후로 울다가 술 마시다가, 울다가 술 마시기를 반복하던 은우가 결국 테이블에 쓰러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은우한테 지독하게 시달린 데다가 그 커다란 애를 들쳐메고 집까지 데려다놓느라 진우는 몸이 녹초처럼 흐늘흐늘해진 것 같았다. 그나저나 차은우랑 몇 년째 보는데 그렇게 목 놓아 우는 건 처음 보네. 진우는 아무래도 이번 한 번만 딱 눈 감고 사랑의 큐피드 역할을 자처해야겠다 마음먹으며 눈을 감았다.

 

**

 

박 비서님

[빈 씨, 저희 오늘 끝나고 밥 한 끼 하지 않을래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모닝콜을 하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난 빈이 눈을 뜨자마자 확인한 문자였다. 박 비서님이 웬일이지. 나 그만둔다고 밥이라도 사 주시는건가. 알겠다고 편한 시간에 연락 주시라고 답장을 남긴 빈이 망설임없이 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똑같은 컬러링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노래, 도대체 언제까지 해 놓을 셈이지. 그런데 이상하게 항상 칼같이 전화를 받던 은우가 컬러링이 다 끝나고 다시 반복될 때까지 받질 않았다. 웬일이지, 평소 같았으면 한 소절도 끝나기 전에 받아야 정상인데. 빈이 의아해하며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다시 한 번 더 전화를 걸었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거라던데, 괜히 걱정되게 왜 이래.

 

[이사님 무슨 일 있으세요? 전화를 안 받으시길래... 보시면 답장 주세요.]

 

그래, 비서로서 이정도 신경 정도는 써 줘야 되는거야. 나는 차은우의 비서니까, 그래서 그런거라고… 애써 자기 합리화를 하며 문자 한 통을 남긴 빈이 부랴부랴 출근 준비를 했다. 이젠 시키지 않아도 출근길에 알아서 커피를 샀다. 어차피 저에게 마시라고 줄 은우였기에 마음대로 저가 마시고 싶은 음료로 골랐다. 그리고 이사실 문을 열었을 때에는 그 곳에 있어야 할 은우가 없었다. 순간 당황했다. 은우가 있어야 저에게도 할 일이 있는데. 소파에 앉아 두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은우의 모습에 슬슬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입사 이후로는 계속 차은우랑만 같이 있었던 탓에 다른 간부들은 잘 모를뿐더러 은우의 안부를 물어볼만큼 친한 사람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빈은 진우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박 비서님. 그게… 다름이 아니라 이사님께서 출근을 아직 안 하셔서요.”

-네? 그 자식… 아니 이사님이 출근을 안 했다고요? 아… 어떡하지.

“왜요? 이사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건 저도 모르겠는데… 저, 빈씨. 혹시 이사님 집에 좀 가 줄 수 있어요? 원래같으면 제가 확인하러 가야하는데, 제가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주소는 지금 문자로 알려줄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확인하러 가 볼게요.”

-고마워요, 빈 씨. 바로 문자 보낼게요.

 

[주소는 사진으로 보내놨어요. 비밀번호는 980126이예요. 밥은 다음에 먹는 걸로 해요.]

 

문자를 보고 제 눈을 의심했다. 저 숫자 배열은 제 민증에나 박혀있는 숫자인데. 저게 진짜일 리 없어. 박 비서님께서 뭔가 단단히 착각하신 게 틀림없다. 떨리는 손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네, 빈씨.

“저, 혹시 저 비밀번호… 잘못된 게 아닌가 해서요.

-비밀번호요? 저거 맞아요. 저 자식… 아니 이사님 몇 년 째 저 비밀번호만 쓰거든요.

“아, 아아…. 아, 네. 제가 뭔가 잘못 생각했나봐요. 감사합니다.”

-네, 이사님 잘 부탁드려요, 빈 씨.

 

두근대는 심장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렸을까 걱정될 정도로 빠르게 울렸다. 980126. 분명 제 생년월일 여섯자리였다. 우연히 그 숫자로 비밀번호를 설정할 확률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대답은 아니, 였다. 분명 우연이 아니다. 우연에서 필연으로 넘어가는 그 확신의 순간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은우의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지금 당장 차은우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꾹꾹 누르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볼을 꼬집었을 때 아픈 걸 보면 분명 꿈은 아니었다. 들판마냥 넓은 집에 쿨럭대는 기침소리만이 울렸다. 긴 복도 끝까지 걸어 반쯤 열려있는 문을 밀자 침대에 누워있는 은우가 보였다.

 

“차은우, 괜찮아?”

“빈아….”

“어, 어. 은우야.”

“빈아… 진짜 빈이야?”

 

열 때문에 정신도 못 차리는 주제에 저부터 찾는 게 안쓰러우면서도 웃음이 났다. 꼭 차은우로 인한 지독한 열병을 앓던 고등학교 2학년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럼 내가 진짜 문빈이지 가짜겠어.”

“빈아, 빈아….”

“응, 은우야.”

“어디 가지마…. 계속 내 옆에 있어줘….”

 

회사에서 보던 차 이사의 날카롭고 단호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애처롭게 주인을 찾는 강아지 같았다. 땀으로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손으로 넘겨주었다. 차은우는 참 잘났다. 이렇게 아픈 와중에도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이마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넘겨지자 제가 좋아하는 눈썹 뼈와 짙은 눈썹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이렇게 가까이서 차은우를 마음대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에 웃음이 났다.

 

계속 옆에 있어줘.

 

그 한마디가 좋아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고 또 되뇌었다. 은우야, 넌 모르지. 네가 그렇게 말 안해도 난, 항상 네 곁에 있고 싶은걸. 열려있는 창문 틈으로 시원한 여름 바람이 불어왔다. 몇 년 전 사랑에 열병을 지독하게 앓던 그 때가 떠올랐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은, 그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함께 있다는 것. 어느새 맞잡은 손이 따뜻했다. 몇 년 간 묵혀왔던 서로에 대한 갈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에 오아시스에서 잠시 쉬어가는 것이 아닌, 오아시스를 찾기 위해 사막으로 가는 사람이 존재할까. 오아시스를 향해 가려 발을 디딘 모래밭길이 뜨겁고 아플지라도, 중간에 신기루처럼 사라져 없어지더라도 결국 오아시스는 그 자리에 남아있으며 언제든 찾아가면 된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멀리 돌고 돌아 겨우 다시 만난 나의 오아시스. 부디 나의 오아시스가 사라지지 않고 신기루처럼 곁에 계속 남아 어느 날의 그 여름날처럼 영원토록 푸르기를. 그렇게 빈은 빌었다.

 

 

 

오아시스 fin.

전체 0

전체 11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
계간은콩 2019 가을호 후기
계간은콩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2
계간은콩 2020.11.12 0 12
2
세이렌의 유혹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0
2020.11.12 0 10
3
Dear my blue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0
2020.11.12 0 10
4
비밀글 결핍(惡意)
떡트리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떡트리 2020.11.12 0 1
5
귓속말
콩떡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5
콩떡이 2020.11.12 0 15
6
연(聯)
익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1
익먕 2020.11.12 0 11
7
비밀글 친구사이 상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8
비밀글 친구사이 하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9
사랑에 빠지다
오각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4
오각형 2020.11.12 0 14
10
비밀글 발자국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2020.11.12 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