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維夏)

2019 여름호
작성자
몬트
작성일
2020-11-11 11:06
조회
4


유하(維夏)

초여름




달이 동그랗게 비치는 수면을 바라보던 빈이 꼴깍 침을 삼키고 연못 가까이 몸을 숙였다. 유하流下에 뜨는 보름달은 소원을 이루어준다던 골목길의 할멈을 떠올리다 번쩍 몸을 일으켰다. 요새 사람 홀리는 여우들이 그리 많다던데, 그 할멈이 여우였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홀랑 연못까지 와서는. 별로 든 것도 없이 가볍기만 하던 봇짐이 문득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 별것이 다 무겁다 이가 듬성듬성 박힌 잇몸을 드러내며 웃더라니 실로 여우였으면 어쩐다. 약관이 넘도록 혼인도 하지 못하였으니 무어라도 보탬이 되어야 한다 웃으며 던진 농에 할멈이 히쭉히쭉 웃다 말고 벌컥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었다.


‘예끼, 못난 놈! 어느 집 처자가 정신이 나가서 명줄 짧은 놈이랑 혼인을 하고 싶어할꼬? 껍데기만 그럴듯하게 생겼지 명줄이 턱없이 짧으니 당장 지금 길거리에서 뒈져도 놀랍지 않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명줄이 짧다니요? 곧 제가 죽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 못난 놈아! 살고 싶으냐? 허면 오늘 밤이야. 딱 오늘 밤뿐이 없어! 꼭 오늘, 연못에 가서….’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올라왔는지도 모르겠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울리는 주변을 둘러보던 빈은 할멈이 일러준 방법을 다시 되짚었다. 오동나무 잎을 연못에 띄우고 소원을 빌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바람이 풀숲을 스치는 소리에도 움찔거리던 빈이 손에 꼭 쥔 오동나무 잎을 연못 위로 띄웠다. 제 소원은… 살려주세요! 오래 살고 싶어요. 혼인도 못해봤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운명의 짝도 만나게 해주시고…. 둥둥 떠가던 잎이 달 그림자 위를 흘러가다가 연못 아래로 쑥 빠졌다.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수면 아래로 빠지는 게 좋은 징조는 또 아닌 것 같아 빈이 어깨를 들썩거리고 있을 때였다.


무언가가 물살을 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청량한 소리가 퍽 무섭게 들려 빈의 목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바라본 곳에는, 그의 공포를 부풀리기에 딱 좋은 흰 옷의 인영이 앉아있었다. 악! 소리와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진 빈은 자리에 주저앉아 달달 떨며 그 인영을 계속 살폈다. 최대한 조용히 자리를 벗어나려고 뒷걸음질치다가 손끝으로 마른 나뭇가지라도 눌렀는지 별안간 뚝! 소리가 울렸다. 정적을 깨는 그 소리에 또 퍼뜩 놀란 빈의 시선이 절로 인영에서 바닥으로 향했다. 부러진 나뭇가지를 보고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물을 뒤척이던 인영이 보이지 않았다. 빈은 겁에 질려 인영이 앉았던 자리만 노려봤다. 아…. 역시 그 할멈의 말을 믿지 말았어야 해. 바쁘게 뛰어 도망칠 요령으로 번쩍 일어섰을 때, 빈은 옆에서 들린 말소리에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이고, 사내가 되어서는 어찌 그리 놀라신단 말입니까. 소인이 더 놀랐습니다.”

“그, 그쪽이 갑자기 튀어나오니까….”

“바닥에 그리 주저앉아 계시니 세족 중에 보건대 혹 길을 잃어 예까지 왔는가 염려가 되어 그랬지요. 여기까지 그런 비단옷을 입고 오는 이는 호랑이 먹잇감이 되고자 작정한 머저리들 말곤 없으니까요.”

“비단옷….”


그러고 보니 갑자기 튀어나온 그 남자의 옷이 제법 낡은 무명천이었다. 그래도 풀을 먹여 잘 다린 덕인지 빳빳하게 주름이 진 것이 어딘가 고고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천천히 시선을 올리니 달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빛나는 얼굴이 보였다. 청초하다. 그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홀린 듯 남자의 얼굴—굵고 진한 눈썹부터 달빛에 긴 그림자를 드리운 속눈썹, 선이 또렷한 쌍꺼풀과 도톰한 눈 밑, 오똑하고 높은데 동글동글한 콧망울, 반듯하고 달처럼 고운 곡선을 그린 입술—을 쳐다보던 빈이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남자를 따라 일어났다. 손을 놓고 서려던 빈은 아!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했다. 넘어질 뻔했다는 건, 그러니까 넘어지기 전에 남자가 빈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아 고정했다는 뜻이다. 스무 해를 살면서 누가 제 몸을 잡아주는, 아니 안아주는 경험이 퍽 처음이었던 빈은 단숨에 얼굴을 붉히고 입만 벙긋거렸다. 싱글 웃은 남자가 팔을 풀고 빈을 내려놓았다.


“길을 잃으신 것이지요?”


마냥 해사하게 웃는 남자, 그것도 칠칠맞은 것으로 비쳤을 게 뻔한 남자 앞에서 못에 소원을 빌러 왔노라고 말하기는 쉽지 않았다. 빈은 어쩔까 하다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도 훤히 다닐 만치 잘 아는 곳이니, 소인이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혹 호랑이 밥이 되고 싶어 오신 것은 아니시지요?”


빈이 열렬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레 웃은 그는 빈의 손목을 답삭 쥐었다.


“여긴 달빛이 휘영청 밝대도 조금만 들어가면 나무가 울창하여 바로 앞에 걸어가는 것도 놓치기 쉬우니 손을 잡고 내려갑시다.”

“잠깐, 잠깐….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대 이름이라도….”


고마우니 후에 사례라도 하겠노라 떠듬떠듬 말을 잇는 빈을 빤히 보던 남자가 다시 달빛, 아무튼 무슨 빛을 닮은 얼굴로 웃어보였다.


“차은우라 하옵니다.”

“나는….”

“문 대감 댁 첫째 도련님이시지요?”

“어찌 아셨소?”

“이 고을에 도련님 미모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답니까. 이름대로 빛이 난다 다들 그러지요.”

“뉘가 그런다고, 또. 거짓부렁을.”

“소인도 거짓부렁이리라 생각하였는데 이리 가까이서 뵈니 실로 달빛을 닮으셨습니다.”


확 다가오는 얼굴에는 그만 또 평정심을 잃고 발을 뒤로 물리고 말았다. 붉어진 빈의 얼굴을 보던 은우가 낭랑한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리 자주 재미있느냐 하문하고 싶었으나 빈은 그것도 또 우습게 비칠까 싶어 다만 큼큼 헛기침과 함께 숨을 골랐다. 걸음을 서두릅시다, 하며 빈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단단히 엮은 은우가 숲길을 빠르게 헤치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스락바스락 주변 풀을 헤치며 걷는 소리에 빈이 이따금씩 몸을 떨었다. 


“잘 올라오셔놓고, 무얼 그리 겁을 내십니까.”

“…그때는.”

“소인이 도련님 곁에 있지 않아요.”


말도 안 되는 말인데 묘하게 안심이 됐다. 무서우면 눈을 잠깐 감고 있으라기에 빈은 은우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슷슷하고 바람 헤치는 소리와 함께 풀잎이나 나뭇가지 따위가 피부를 쓸고 지나가는 느낌, 산짐승 우는 소리 따위에 빈이 몸을 움츠렸다. 얼핏 바람소리 비슷한 웃음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도련님, 눈을 떠보세요. 눈두덩이 저릿하도록 눈을 꾹 감고 있던 빈이 낭랑한 목소리에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올렸다. 금방이지요? 하고 웃던 은우가 그의 손목을 당겼다. 산길을 다 내려왔으니 이만 놓아도 된다 말을 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빈은 쭈뼛대며 은우의 뒤만 따랐다. 마을이 보이는 산길 초입을 내려오다가 은우가 다 허물어져 가는 집 하나를 가리켰다.


“저곳이 소인이 사는 집이랍니다, 도련님. 대감 댁은 조금 더 내려가야 하고요. 얼른 내려가시지요.”


해진 무명옷부터 볏짚이 다 삭은 지붕까지 눈에 밟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은우의 손에 이끌려 길을 가면서도 그 집이 눈에 밟혀 빈이 자꾸 뒤를 돌아봤다. 넓은 돌담 끄트머리에 다다랐을 즈음 은우가 드디어 빈의 손을 놓았다. 빈이 결심이라도 한 듯 갓을 벗고 상투에 꽂혀있던 동곳을 뽑아 은우에게 내밀었다. 유순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은우가 빈의 손과 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동곳은 빈이 약관이 넘었을 때에 선물 받은 것으로, 전체는 옥이었으며 머리 부분에는 홍옥과 진주를 올려 화려하고 값어치가 제법 나가는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따뜻한 옷을 지어 입을 정도는 될 거라 생각하며 빈이 은우의 손을 잡고 손바닥을 펼쳐 그 위에 동곳을 놓아주었다.


“은인을 빈 손으로 돌려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닌 듯하여 이러는 것이니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더 제대로 사례를 하고는 싶으나….”


말이 끊긴 것은 은우가 돌연 빈에게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입술만 비비는 것이 아니고 벌어진 빈의 입술 사이로 온도 높은 살덩이를 집어넣은 은우가 제멋대로 빈의 입안을 휘젓고 다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빳빳하게 굳은 빈의 혀를 간질이는가 싶더니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는 중에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이 입안을 굴러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빈이 놀라 파드득 어깨를 떠는 중에 입술을 떼어낸 은우가 큰 손으로 빈의 입을 덮었다. 구슬을 입에서 데록데록 굴리고 있으려니 은우가 웃으며 속삭였다.


“도련님, 삼키셔야 합니다.”


꿀꺽 넘기면 그 커다란 것이 목에 걸릴까 싶어 고개를 내젓던 빈은 은우가 한번 더 삼키라고 말을 하기에 눈을 감고 구슬을 삼키려고… 했다. 뭘 힘을 주기도 전에 사라졌지만.


“방, 방금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인이 가진 패물입니다. 귀한 것이니 분명 도련님께도 쓸모가 있을 것 같아 드리는 것이니 받아두세요.”


세상에 뉘가 패물을 입으로 주고받아 내장에 간직한다더냐 묻고 싶었으나 달빛을 받은 얼굴이 또 해사하게 빛나는 통에 그러지 못하였다. 인사를 나누고 방 안에 들어와서도 빈은 쾅쾅 뛰는 심장이 시끄러워 얼굴을 붉힌 채로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서책을 뒤적여도 자꾸 달빛 닮은 얼굴이 보이고, 겹쳐졌던 입술 촉감이 자꾸 생각나고. 빈은 입술을 문지르며 몇 번 째인지 모를 한숨을 또 쉬었다. 마당을 쓸던 돌쇠가 빗자루를 쥐고 도련님, 하고 빈의 얼굴을 기웃거렸다.


“도련님. 어찌 한숨을 그리 푹푹 쉬십니까요? 무어 고민이라도 있으신 겝니까?”

“별일 아니다.”

“별일이 아니기는, 쇤네가 도련님 모신 세월이 몇 년인데요. 한숨을 벌써 몇 번이나 쉬셨는지 모릅니다요. 어제 저잣거리에 다녀오신 이후로 쭉 그러시니 걱정이 되어 그럽니다.”

“돌쇠야. 뉘 웃는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데, 이는 혹 내가 천치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냐? 입술을 겹치면 천치가 되는 병이 있다지 않던? 들어본 적 없느냐?”


‘입술을 겹치면…’ 이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돌쇠가 싸리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냉큼 마루로 걸어와 앉았다. 엉덩이를 걸친 돌쇠가 바쁘게 입술을 겹치다니요, 뉘랑요? 어떠셨습니까요? 하고 재잘재잘 여러 가지를 물어왔다. 어땠냐니, 혼이 쏙 빠질 것만 같았고… 구슬을 건네주더라. 혹 그게 엿 같은 것일까 하여 입에서 굴려보아도 단맛은 나질 않고, 삼키라기에 삼키려고 힘을 주었더니 삼킨 줄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 버렸더란 말이야. 그것이 뭐였겠느냐? 원래 입을 맞추면 다 그런 것이냐? 이야기를 듣던 돌쇠는 침을 꼴깍 삼켰더랬다. 우리 도련님이 보아하니 구미호에게 홀린 것 같으니 이를 어찌할꼬, 어이할꼬. 암만 봐도 우리 순진한 도련님에게 구미호들이 사람 기를 빨아먹고 혼을 빼낼 때 쓴다던 그 여우 구슬을 집어넣은 것이 참말 틀림없는데, 그것을 말했다가는 우리 어린 도련님이 깜짝 놀라실 것만 같고. 돌쇠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선 엉덩이를 마루 안으로 바짝 당겨 앉았다.


“허믄, 그 처자가 또 만나자고 그러지 않덥니까?”

“처자가 아니라 쩌어기, 우리 느티나무 반만 하게 큰 남정네였는데.”


돌쇠의 시선이 스르르 담장 근처에 심긴 느티나무로 닿았다. 대감 댁이 이 집에서만 몇 대를 사셨는데 그 때에도 저 나무가 작지 않았다 하니 족히 백 년은 묵은 나무일 텐데 저것 반만치 큰 사내라고 하면…. 헌데 사내 앞에 커다란 사내 몰골로 구미호가 나타났단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어 돌쇠가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빈이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리 천진한 우리 도련님을 어찌 구미호가. 결연한 표정으로 발딱 일어난 돌쇠가 무릎으로 마루를 기어 빈 가까이로 다가서서 손짓하였다.


“도련님, 도련님. 쇤네가 듣기로 그 사내가 요망한 구미호는 아닐까 싶습니다. 도련님이 삼키신 고 구슬이 고것들이 사람 홀려다가 기를 쪽 빼먹고 기가 다 빨린 사람 혼을 쏙 빨아먹어 꼬리 떼고 산짐승 아닌 사람인 척하려 그러는 게지요.”

“허나… 혼을 빨아먹고 싶었으면 산에서 마주쳤을 때부터 홀려 잡아먹었음 될 것이 아니냐?”

“그래서 말씀 드리지 않아요. 기를 쪽 빼먹구선 그담에 혼을 쏙 빼간다구요!”


돌쇠가 하 으스스하게 말하는 바람에 겁에 질린 빈이 몸을 한껏 움츠렸다. 오늘 밤부턴 절대 어디 가지 마시고 누가 불러도 모른 척하세요, 아시겠지요? 도련님, 그리 하셔야 삽니다! 넋이 반쯤 나간 빈의 어깨를 붙잡고 돌쇠가 그리 외쳤다. 돌쇠가 넋 나간 빈의 표정을 보고선 온 집안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바람에, 빈은 금줄이 둘둘 둘린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혀야 했다. 방 밖을 지키는 사병 둘은 우락부락하고 험악하게 생겨선 빈이 문을 조금 열고 밖만 내다보아도 눈을 부라리기 바빴다. 심란하여 잠이 오지 않아 서책만 뒤적이길 사나흘, 곤하여 까무룩 잠에 든 빈이 그날따라 삿삿거리며 옷깃이 스치는 바람 소리에 잠을 깼다. 잠만 들면 뉘가 업어가도 모르겠다며 돌쇠도 빈에게 깨우기 어렵다 혀를 내두르곤 하였었는데, 고작 바람소리에. 빈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도 귀를 문 가까이 붙였다.


“도련님, 도련님.”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에 빈이 힉 소리를 내며 문에서 떨어졌다. 돌쇠가 구미호라던, 입에 구슬을 집어넣은 그 사내 아닌가! 빈이 어떡하지 어떡하지 발만 동동 구를 적에 도련님, 하고 또 애달픈 소리가 담 너머서 들렸다. 주무십니까? 하고 물어오던 목소리에 게 누구냐며 호통을 쳐야 마땅한 사병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는 또 어찌된 일인가. 바닥을 기어 겨우 침상에 다시 누운 빈이 이불을 홱 뒤집어쓰곤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도련님, 하고 구슬프게 몇 번을 더 부르던 목소리는 이내 들리지 않았다. 아마 빈이 기절하듯 잠에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날이 밝고 나서 돌쇠를 부르려 문을 활짝 연 빈은 발끝에 뭐가 채여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그때 빈이 사내의 손에 쥐여준 동곳이었다. 동곳을 집어 든 빈은 동곳에 종이가 둘둘 말려 묶여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위를 휘휘 살핀 빈이 동곳을 꼭 쥐고 다시 문을 확 밀어 닫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심스럽게 동곳을 감싼 종이를 풀어내어 펼쳤다. 그것은 예상대로 은우가 빈에게 쓴 서찰이었다.


「도련님, 은우입니다.

주신 동곳은 손에 꼭 쥐고 있다가 집으로 가져와 내내 바라보며 생각해보았으나 역시 소인보다는 도련님의 곁에 있을 때 더 아름답겠습니다. 하여 다시 돌려드리러 왔습니다. 그날 밤, 제게 동곳과 함께 주신 도련님의 마음만 소중히 간직하도록 하겠나이다.

입을 맞춘 밤 이후로 도련님의 생각만 하면 공중에 둥실 떠있는 것 같고 몸에 쭉 힘이 빠집니다. 소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넋을 놓게 되니, 도련님께서 혹 소인을 홀리신 것은 아닙니까?

도련님 댁의 담장만 보아도 그날의 입맞춤 같은 기적을 자꾸 바라게 되니 어찌합니까. 도련님께서는 소인을 욕심쟁이로 만드셨습니다. 또 도련님을 닮은 달이 뜨면 찾아오겠나이다.」


공중에 둥실 떠있는 것 같고 몸에 쭉 힘이 빠진다니…. 볼이 발그레해진 빈이 서찰을 품에 끌어안고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 돌쇠를 불렀다. 벼루와 먹을 가져오라고 하기 위함이었다. 동곳을 손에 꽉 쥐고 고민하던 빈이 벼루 위에 슬근슬근 먹을 갈기 시작했다. 먹을 갈면서 빈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담장 앞 감나무에 돌쇠가 종이를 묶어놓는 것까지 확인을 했고, 돌쇠가 서찰을 풀리지 않게 잘 매어놓는 것도 확인했는데 바람이 세게 불면 서찰이 날아갈까 뉘 은우가 오기 전에 그 서찰을 먼저 풀어가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어 빈은 서책을 읽다가 한 시진 간격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우락부락한 사병들이 저들끼리 떠드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어느 틈엔가 먼지 위에 물이라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 갑작스러운 침묵에 의아해진 빈이 슬그머니 문을 열고 바깥을 내다본다. 휘영청 밝은 흰 달 위로 구름이 드리운 밤이었다.


“도련님!”


낭랑한 목소리가 담장 너머에서 들렸다. 빈은 깜짝 놀라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살짝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빈이 주변을 둘러보는데, 사병들이 바닥에 제멋대로 널브러져선 코나 골고 있는 것이다. 담장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쿨쿨대는 것이 정말 구미호에게 홀리기라도 했나 싶어 빈이 침을 꼴깍 삼켰다. 은우는 담장 앞을 사박사박 걷다가 감나무에 매인 서신을 발견했는지 바람소리 비슷한 소리로 웃으며 감나무로 다가서는 모양이었다. 잠깐 소리가 들리지 않아 또 담장을 기웃대던 찰나, ‘도련님!’하고 빈을 부르는 소리에 빈이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쁩니다.”


담장에 팔을 걸친 은우가 제 상투를 가리키고 빙글 웃었다. 아까 꽂은 동곳을 말하는 줄 금방 알아들은 빈이 얼굴을 또 붉혔다. 은우가 하늘을 한번 바라보며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얀 무명 두루마기가 그 흰 얼굴에 제법 잘 어울렸다.


“달빛이 밝습니다. 함께 조금 걸으시지요.”


얼굴에 영험한 힘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빛을 받아 예쁘게 웃는 얼굴에 또 어쩔 줄을 모르고 그러자고 해버린 것이다. 빈은 옷매무새를 비다듬으며 숨을 고르고 대문을 슬쩍 밀었다. 시도때도 없이 끽끽거리던 대문이 웬일로 문을 여는 동안도 조용하였다. 대문 앞에 뒷짐을 지고 선 은우를 바라보던 빈이 성큼성큼 다가가 덥석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돌아보던 은우가 배시시 웃어보였다. 빈도 덩달아 웃었다. 은우가 실로 구미호라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약관이 넘도록 혼인을 하지 못하였다고 천둥벌거숭이 취급을 다 받는다니까요.”

“전 도련님이 혼인을 하지 않으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는데.”


은우가 중얼거린 말에 빈이 또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돌리는 턱 위로 달린 귀 끝이 새빨개진 것이 달빛 아래서도 보여 은우가 혼자 소리를 죽여 웃었다. 슬쩍 뒷짐을 지고 멀어지는 등으로 가까이 다가가 손 하나를 잡은 은우는 제 손보다 빈의 손이 많이 작다는 생각을 했다. 긴장으로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끼는데 손가락 사이가 제법 뻑뻑한 것이, 얼굴만치 귀여운 손을 가졌다는 생각에 또 웃음이 샜다. 한편 손을 붙들린 빈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은우가 이끄는 대로 또 끌려나갔다.


“연이 닿지 않은 이를 찾기가 쉽지 않더란 말입니다.”

“예?”

“정인이 없는 이를 찾기가요. 지학志學만 조금 지나도 자녀가 있는 세상이니 퍽 어려웠지요. 그런데 도련님을 뵙게 되어 어찌나 기쁘고 설레었던지 모릅니다.”


뜻모를 말에 빈이 눈만 깜빡이다 하얗게 질렸다. 정인이 없는 이를 찾기 어려웠다고? 이는 나를 홀려 잡아먹겠다는 뜻이 아닌가. 덩달아 새하얗게 바래는 머리 저편에서 돌쇠가 향낭에 부적을 접어 넣어주며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것이 암만 요물이래도 닭 피에는 정신을 못 차린다 하니 이것을 항시 지니고 다니세요, 도련님. 필히 또 도련님을 노리러 올 것이니 그때에 이 부적을 보여주고 얼른 도망치면….’


막상 그러려고 하니 떨려서 그럴 수가 있어야지. 몰래 향낭을 뒤적여 부적을 쥐는데 은우가 잡은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빈의 가슴이 또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경면주사에 닭 피를 섞어 부적을 쓴 것이라 효과가 확실하지만 지속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으니 부적을 붙이고 죽어라 뛰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별 쓰잘데기 없는 걱정도 많다 하하 웃어넘겼던 지난날의 자신이 퍽 원망스러웠다. 빈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필히 스스로를 쥐어박으리라 생각하며 어색한 웃음을 띄우고 향낭을 다시 뒤적거렸다. 그리고 은우가 도련님, 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을 질끈 감고 그를 향해 꼭 쥐었던 부적을 내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빈은 질끈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을 때, 미동도 않고 그대로 굳어있는 은우를 발견했다. 부적이 효과를 나타낸 듯 싶었다. 침을 꿀꺽 삼킨 빈은 부적을 붙이기 위해 손을 더 뻗었고, 그 순간 은우가 빈의 팔목을 억세게 붙잡았다. 빈은 으악! 소리를 내지르며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하, 닭 피?”


은우가 부적을 바라보다가 눈만 굴려 시선을 빈에게로 옮겼다. 그 까만 눈동자랑 시선이 닿자마자 빈은 혼절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손아귀에 단단히 잡혔음에도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선 빈의 손에서 가볍게 부적을 빼낸 은우가 부적을 가까이서 살펴보고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걸로는 소인을 잡지 못합니다, 도련님. 왜냐하면.”

“이, 이, 이러지 마시오.”

“저는 구미호 같은 잡귀가 아니고 그보다 신력이 세니까요. 소인이 생각하기로는 도련님 입술이 부적보다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은근한 희롱조의 말투에 희게 굳었던 빈의 얼굴이 이상한 모양으로 뒤틀렸다. 그것을 본 은우가 허리까지 꺾어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느라 빈의 손목을 놓은 탓에 다리에 힘이 풀린 빈이 그대로 풀숲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빈을 본 은우가 그 옆에 탈싹 주저앉아 시선을 맞붙였다.


“구슬을 넣어주었다고 뉘가 소인을 더러 구미호라 하더이까?”

“구미호가 아니라면, 연이 닿지 않는 이를 찾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도련님, 바다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고개를 휘휘 내젓는 빈의 둥근 코끝을 톡 건드린 은우가 빈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도련님, 소인은 본디 바다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며 이어지는 말에 빈이 귀를 기울였다.


동해를 다스리시는 청룡 광덕왕께서는 소인을 포함하여 아들이 셋 있나이다. 소인은 개중 둘째로 태어나 왕위와는 영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허나 저의 형 되는 용이 심히 오만방자하여 그 추태가 바다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시끄럽게 하매 아버님께서 노하시어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겠다 하셨지요. 하루는 세 아들을 대전에 모두 불러모아 하문하시기를,


“내 아들들아, 듣거라. 너희는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그에 첫째는 ‘힘’, 소인은 ‘열린 귀와 지혜’, 셋째는 ‘멀리 보는 안목’이라 답하였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저희 삼형제의 대답을 듣고 흡족하게 웃으셨지요.


“맞다, 부강한 나라를 만들려면 나라를 지킬 힘도, 그 누구의 말도 허투루 듣지 아니하는 열린 귀와 지혜도, 두루 살필 수 있는 안목도 모두 필요하단다. 허나 과인이 원하는 대답은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형제들은 모두 조아렸던 고개를 들고 서로를 살피고, 아버님을 살피며 의아해하였지요. 아버님께서는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라 하셨답니다. 그리 말씀하시며 너희는 누군가에게 목숨을 내어줄 만큼 애틋하게 생각해본 일이 있느냐 물으시되, 삼형제 모두 그런 일이 없어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이라야 과인의 뒤를 이을 수 있다 말씀하시고는 우릴 모두 궁에서 나가 알아보라 내쫓으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라니, 그 말이 왜 그렇게 어렵던지요. 하늘, 바다, 육지의 것을 가리지 않고 지식만 쌓기를 백 년 가까이하였는데도 말입니다. 도련님, 용이 어찌해야 죽는지 아십니까? 용은 쉬이 죽지 않습니다. 여의주가 상하지 아니한다면요. 그러니까 아버님 말씀은, 여의주를 내어줄 정도로 사랑하는 이를 찾아 데려오너라 그런 말씀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용왕의 핏줄에게 내려지는 여의주는 그 바다와 용왕의 기운이 쌓여 대가 지날수록 영험한 신력을 지니게 된다 하더이다. 허니 우리 형제들의 여의주를 노리는 이들이 바다에도 잔뜩인데, 여의주를 잃거든 꼼짝없이 죽게 되니 어찌 감히 여의주를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리 고민을 하다가 육지에 사시는 제 스승님을 만나 뵈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앞에 가는 노파의 봇짐이 보통 무겁게 보이는 것이 아니길래 가는 길까지 그 봇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헌데 그 노파가 봇짐을 내려놓은 후에 갑자기 그러는 겁니다.


“연이 닿지 않은 이를 반려로 맞이해야 할 것이다.”

“연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부부의 연 말이야! 똑똑한 줄로 알았더니 순 헛똑똑이가 따로 없도다. 연이 닿지 않은 이를 찾아!”


그리 말하고는 가버렸습니다. 연이 닿지 않은 이를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바다에서 멀리 이 고을까지 오게 된 것이지요. 물이 그리워 못에 갔다가 도련님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헌데 도련님을 뵙고 보니 부부의 연은 없으되 도련님 삶에 남은 날도 보이지 않으니, 도련님 정해진 명이 짧다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달빛 아래 하얗고 말간 얼굴을 보는데 힘들게 만난 내 인연을 채 알기도 전에 잃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아 덥석 여의주를 물려드린 것입니다. 여의주를 받고 나면 육지의 인과관계에 얽매이지 아니하게 되니 더 이상 명부가 적어둔 수명에 얽매이지 않지요. 그 날은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를 범했다면서 남의 손을 쥐고 계속 매만지는 것은 무슨 경우란 말인가. 무어라 지청구를 놓으려던 빈이 숫접게 웃는 은우의 얼굴을 보고 또 하려던 말만 쭉 올근거렸다. 연이 닿지 않은 이가 본인인 것도, 은우가 제게 여의주를 건네준 것도 퍽 다행처럼 느껴졌다.


“무례라고 생각지 않았… 습니다.”

“도련님, 소인을 실로 내쫓으실 생각이십니까? 저는 도련님이 없으면 이제 죽은 목숨입니다. 뉘가 칼로 찌르면 그대로 피를 흘려 죽을 것이고 독을 먹이면 내장이 다 흐무러져 피를 토해 죽을 터인데, 정녕 내쫓으실 것입니까?”


속눈썹을 팔랑이며 하는 말이 숫제 너 없으면 나는 죽겠다는 말로 들려 빈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왕이 되어야 한다는데, 없으면 죽는다는 여의주를 처음 보는 이 살리겠다고 덥석 넘겨주었다는데.


“내쫓지 아니하면 어찌 되는데요?”

“그야… 도련님께서 소인을 평생 반려로 삼으시는 것이지요.”


확고한 눈빛에 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구미호가 내 간을 빼먹으려고 다 지어낸 얘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잠시나마 들었으나 은우가 턱을 감싸며 하는 말에 잠깐의 걱정도 죄 잊고 말았다.


“한번 더 무례를 저질러도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례가 아니랬는데도. 입술을 물고 늘어지는 것이 끈덕졌다. 처음에는 살덩이나 입술만 조금 비비적대다가 떨어지는 것이 전부더니 이제는 날숨도 다 삼킬 듯 빈틈없고 흉포하게 몰아치곤 한다. 결국 숨이 모자라 눈을 번쩍 떴을 때는 흰 속곳 차림에 상투도 틀지 않은 광덕왕과 눈이 마주쳤다.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반들거리는 입술로 잘 잤느냐 물어오는 꼴이 우스운데 또 잘난 탓에 빈의 입매가 스르르 휘었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리 행복한 얼굴로 뒤척이는지, 혹 외간남자라도 꿈에서 만난 것은 아닐까 투기가 나서 깨웠다. 어떤 꿈을 꾸었느냐?”

“청룡이라 그런가, 용하십니다. 남자를 만나긴 하였는데.”


은우의 얼굴이 확 뒤틀렸다. 박박 구겨진 얼굴을 보다가 빈은 웃음을 터뜨렸다. 올라탄 단단한 몸을 밀어내며 상체를 일으킨 빈이 은우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리 얼굴을 구기셔도 잘생기셨습니다. 왕을 닮아 능청이 는 빈이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침상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동글동글한 발이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빈의 허리를 낚아챈 은우가 다시 침상에 그를 눕혔다.


“어딜 가려고. 누굴 만났더냐? 그대는 아직도 과인을 그리 몰라. 그대 반려는 투기가 심하고 성정이 거칠기 짝이 없으니 함부로 자극해서는 아니 될 것인데. 과인이 정무로 바빠 조금 외롭게 하였다고 비가 토라진 모양이로다. 내 비를 꿈에서 만난 이가 뉘인지 궁금하니 속히 말해보라.”

“더럽게 잘생긴 사내 하나 있습니다. 어릴 때 만났는데요….”


얼굴이 더 구겨지는데 그게 심상치 않아서 놀리는 것도 이쯤 해야겠다 싶었다. 빈은 손을 뻗어 왕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름은 차은우라고, 그런 사내를 하나 만났습니다.”

“그랬더냐. 만나서 무얼 했는고?”

“무례를 두 번이나 저지르지 뭡니까. 달라고도 안 했는데 덥석 여의주를 넘겨주더니 내쫓기면 죽는다고 살려달라 반려로 맞아달라 어찌나 애걸복걸하던지, 그러자고 했습니다.”

“비가 많이 곤란했겠구나. 또? 해서 그 치의 반려가 되어주기로 하였느냐?”

“예. 평생을 저 하나만 바라봐달라 책임지겠다 하는 눈이 보통 곱던 것이 아니라서 따라 깊숙한 바다 수정궁까지 따라오지 않았겠습니까.”


은우가 킥킥 웃으며 고개를 숙여 빈의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옆으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려 온통 은우밖에 보이지 않았다. 입을 맞춘 뒤에는 빈을 끌어안아 제 다리 위에 앉혀놓고 궁인이 떠다 놓은 소셋물을 천에 적셔 직접 얼굴을 닦아주었다. 빈도 스스로 세안할 줄 안다 혼인 후 몇 년은 욱대겨보았으나 나보다 백 살은 어린 아기가 소셋물에 코라도 매울까 염려가 되어 그런다는 소리에 몸만 바르르 떨게 될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좋으면 잘 때도 내 꿈을 꿔?”


아침부터 기분이 유난히 좋아 보이더라니 그런 이유였던가 보다. 빈은 반론을 제기해봤자 본인만 또 뺨을 붉히고 몸이나 떨게 될 것이 뻔해 묵묵히 들던 조반이나 마저 들었다. 빈이 수저를 달강대는 모습을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바라보던 은우가 또 히죽히죽 웃었다.


“빈아, 과인이 그리 좋으냐?”

“예.”

“나도 그대가 사무치게 좋다.”


…밥 먹다 말구. 빈이 또 뺨을 붉히고 입에 잔뜩 욱여넣은 밥을 올근거렸다. 멀리 떨어진 내관을 굳이 근처까지 불러놓은 은우가 보아라 비가 먹는 모습이 퍽 귀엽지 않으냐 어찌 먹는 모습도 저리 복스럽단 말이냐 떠들기 시작했다. 흔히 있는 일이라 내관이 꼭 준비라도 한 듯 예, 실로 그렇사옵니다. 동해가 참으로 복이 많지요… 따위의 대답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빈도 이런 일이 익숙해서 이번에는 귀만 붉히고 밥을 먹는 것에 성공했다. 실로 태평하고, 이따금 숨 가쁜 나날이었다. 그릇을 치우는 궁인들 몰래 빈이 은우를 향해 한 쪽 눈을 찡긋거렸다. 은우가 또 예쁘게 마주 웃었다. 심장을 꽉 옭아매는 듯하고 빛을 담은 듯 해사한 저 웃음을 좋아한다. 언제나 웃을 일만 있었으면 좋겠고, 언제나 저 웃음을 마주보는 이가 나였으면 좋겠고. 빈은 그런 생각에 잠겼다가 은우의 발이 슬그머니 제 종아리를 긁는 것을 느끼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또, 숨이 가빠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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