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2019 여름호
작성자
작성일
2020-11-11 11:15
조회
4

[은콩] 열대야

w. 담




늘 그렇게 매미는 울고, 어젯밤 열대야에 잠을 뒤척였다며 투덜거리고, 손부채를 열심히 부쳐가며 다른 한 손으로는 또 아이스크림 바를 꽉 쥐고.

해는 유난히도 가까이 와있는지, 피부가 따가웠고, 그 따가움의 와중에도 눅진하게 달라붙어오는 수분에 괜히 짜증이 몰려오는, 여느 떄와 같은 여름.

그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더위 속에서 네가 중얼거렸다.


"차은우."


네가 입을 달싹거린다. 눈을 감았다. 너는 아직도 이 여름에 있구나.

몇 일 짼지도 모를 그 기억에 잠시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눈을 뜬다.

알람이 시끄러웠다.


-


하루는 짧다. 삼십 일이나 되는 달의 고작 한 조각에, 1년의 365분의 1. 그 정도의 찰나. 그렇다고 이 하루가 또 한숨 한 번에 날아 갈만큼 가볍단 소리는 못 됐다.


"윽."


목젖을 제대로 찔렀다. 켁켁거리면서 양칫물을 뱉어냈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다. 아님 차라리 그냥 재수가 죽어라 없어서,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나가면 어떻게 되어버릴 거 같으니 오늘만큼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있었으면 하는 심정일 수도 있었다.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 그냥 걸리고 말지. 전기세가 걱정돼 딱 1시간 틀어 놓았던 에어컨 바람은 그렇게도 열심히 꽁꽁 싸매놓은 창문의 틈새로 잘도 빠져나갔는지, 금방 또 후덥지근해져 잠에서 깼었다. 밤새 틀어놓은 선풍기는 그만 좀 굴려대라며 뜨겁게 익어선 더운 바람을 토해내고 있었고. 가을은 바라지도 않는다. 차라리 겨울이었으면 했다. 그 때 되면 또 춥다고 여름을 바랄테고, 그 다음의 여름엔 또 겨울을 바라겠지만.

그냥 그랬다. 그 여름에도 그랬고.


곧바로 머리를 흔들었다. 미친 놈. 칫솔로 이빨이나 벅벅 문질렀다. 그런다고 지워질 기억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었다. 입을 헹궜다. 잇몸에선 피가 좀 흘렀다.


"다녀오겠습니다."


허공에 늘 그런 인사나 한 번 내뱉고 말았다. 되돌아올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공기 중에 꽉 차,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다며 피부에 달라붙어 오는 수분과는 달리 여긴 좀 텅 비어 있었으니까. 비어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 당하고 마는 법이다. 잠깐 허공을 노려봤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제 3년 차였다. 청년창업 힘들단 소리 무시하고 이 회사에 들어오게 된 게. 그냥 그 에너지가 좋았던 것 같다. 다 같이 함께 뭔갈 만들어 나가 보자는 그 분위기가 사람을 좀 벅차 오르게 했던 것 같다. 휴일이라고는 하지만 휴일이 또 없었고, 문제가 터지면 또 뛰어와 같이 머릴 맞대야만 했지만.

싫은 게 아니었다. 그냥 좀 지친 것 같았다. 아니, 지쳤다.


좀 때려치고 쉴까. 그 생각을 못 해봤을 리가. 그렇다고 회식만 하면 술에 취해선 눈물 뚝뚝 흘리며 고맙단 말만 중얼거리는 진우 형을 놔두고 떠나기도 그랬고, 제일 막내로 들어와선 꼭 총알받이처럼 일해대는 산하를 생각해서도 좀 그랬다. 공사 구분 철저해야 한다지만, 굴리는 사람이 5명밖에 안 되는데다 죄다 학과 선후배에, 원래 친한 사람들끼리 시작한 이 회사에 애초에 공사 구분이 되는 게 더 웃긴 일일 수도 있었다. 술 먹을 사람 없으면 오는 게 회사고, 막차 끊기면 자러 가는 게 제일 가까운 진우 형 집이고.


"야, 솔직히 말해. 너네 그냥 우리 깨볶는 게 보기 싫은 거지?"


하도 뺀질나게 드나들었더니 명준 형한테 이런 소리까지 들었었다. 둘은 벌써 사귄지 3년이다. 고백 멘트가 회사 같이 하지 않겠냐는 소리였다고 들었다. 그것도 손발 벌벌 떨면서. 술 한 잔도 못하는 명준 형이 술도 안 먹고 저 혼자 신나선 진우 형 없을 때 떠든 얘기였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이나 씻었는데도 몸이 찐득거렸다. 아무리 씻어낸다고 한들 이미 몸에 촉촉히도 배어 있는 피로가 씻겨 내려갈 리가 없었다. 이미 염장이 될 대로 됐다. 어젯밤 보고 잤던 유투브 영상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염장이 끝나 뒤집혀 널부러져 있던 생닭. 종교를 믿어볼까. 교회나 성당.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다가, 다녀보겠답시고 마음 먹곤 마음 먹은 그 다음 주부터 아침 미사 놓쳤던 게 기억났다.


사람 쉽게 안 변해. 진우 형은 곧잘 중얼거리곤 했다. 형은 진짜 어떻게 이렇게 안 변하냐. 뭐래, 주정뱅이가. 야, 쫑이다 쫑. 사장이 취했으니 오늘 회식 쫑. 명준 형의 휘적거리는 손짓을 뒤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며칠 전을 떠올렸다.


사람 쉽게 안 변한댔다. 변하는 거라곤 갈수록 높아지는 빌딩과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무서운 기세로 올라가고 있는 하루최고기온, 거세지는 매미 울음정도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그것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쨍하니 떠서 이게 낮인가 아침인가 싶은 해를 원망하듯 한 번 쳐다봤다. 불쾌지수가 높을 예정이라-. 어젯밤 일기예보가 딱 정확했다. 온통 거지 같았다.


"형."


에어컨이 맛갔다는데. 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잘못 들었나? 믿고 싶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쳐다봤더니, 민혁이 애매한 미소를 보내왔다.


"너 진짜 치사하게... 혼자 쓰냐?"


"아니, 내 돈 주고 샀거든요?"


명준 형이 산하의 손선풍기를 뻇어들었다. 어디서 샀는데. 요 앞 편의점에도 팔아요. 얼마에? 아, 기억 안 나는데. 한 칠팔 천원 줬었나. 사야겠네. 에어컨이 고장났단 소리를 들어서인지 괜히 더 더워진 기분이다. 털썩 소리가 나게 의자에 주저앉았다. 의자 시트에도 수분이 무겁게 내려앉아서 진득하게 달라붙어 오는 것 같았다. 팔걸이에 아무 생각 없이 팔을 올렸다가 놀래서 바로 뗐다.


"아, 네.....밀려서, 아....네. 알겠습니다."


"뭐래?"


명준 형이 진우 형에게 물어왔다. 진우 형이 뒷목을 긁적이는게 영 불안했다. 그게, 지금 한창 고장날 땐가봐. 그래서 언제쯤 온다는데. 내일이나 되어야 되겠다는데. 얘들아, 파업이다. 형이 사장인데요. 산하의 대꾸에 민혁이 빵 터졌다. 웃음이 나오니, 지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나오긴 나오는구나.


"일단 제일 급한 게 뭐지?"


"다요."


그래, 그렇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그랬지만 맞는 말만 하는 산하가 오늘은 특히 더 얄미웠다. 어디서 난 건지 손선풍기로 얼굴에 바람을 쐬고 있던 민혁이 얘기했다.


"형, 저희 그냥 형들 집 가서 일하면 안돼요?


"민혁아."


"안되나?"


"천재야, 너."


가자, 집으로! 명준 형이 외쳤다. 졸지에 출근한지 5분만에 다시 퇴근하는 기분이어서 그런지 발걸음은 가벼웠다.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자 마자 정수리를 뜨겁게 덥히는 해 때문에 잠깐 멈칫하긴 했다.


-


2인용으로 쓰기엔 좀 넓은 식탁에 세 명, 탁자 펴 놓고 마룻바닥에 한 명, 소파 위에 쿠션 껴안고 또 한 명. 그렇게 한참 일을 하던 도중에 어디서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누구 껀가 싶어 쳐다보니 명준 형 꺼다. 몇 달 후 박람회 때문에 회사 브로셔 새로 디자인하기로 한 거 외주 맡기러 나가야 한 댔다.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아는 동생이라 조금 늦게 돌아올 수도 있다 말해오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는 명준 형의 뒤에서 진우 형이 괜히 한 마디 던졌다. 아는 동생 진짜 많지. 어, 아는 동생 진우야. 진짜 너무하네. 마침 슬슬 집중력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커피라도 사 올까.


"형, 멀리 가요?"


"아니, 요 바로 앞 사거리에 있는 데."


"같이 나가요. 커피 좀 사오게."


"아, 그럼 전 딸기스무디요."


"저도 저거."


"진우 형, 형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엉. 갔다 와라."


메모앱에 딸기 스무디 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적어놓고 명준 형을 따라나섰다. 나오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아스팔트 위의 아지렁이는 후회부터 불러왔지만.


카페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에어컨 바람에 숨통이 좀 트였다. 아주 사서 고생이지 차은우. 돌아갈 걸 생각했더니 없던 현기증이 도졌다. 이걸 어쩌냐. 형은 잠깐 두리번거렸다. 안쪽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깄네. 아무 생각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야아, 몇 년만이야!"


"지난 주에 봤잖아요, 형."


술도 못하면서 동아리 회식 오셔놓고는. 아이, 고기 먹으러 간 거지.

그 장면이 얼마나 느리게 지나갔는지 몰랐다. 그냥 닮은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에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냥 눈이나 껌뻑이며 서 있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매미 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서로 바라보기까지의 찰나에도 애가 탔다. 귓가에 침 삼키는 소리가 울렸다.


"아, 이쪽은 같이 일하는 차은우 씨."


"어?"


차은우? 차은우 맞아? 그렇게 물어오는 네게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잠시 주춤거렸다 손을 내밀었다. 미소가 제대로 지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젠 10년이 다되어가는 그 순간이 어제 같았다. 밖도 아닌데 밖에 있는 것처럼 땀이 흘렀다. 매미 소리도 창문을 뚫고 들어온다.


은우야. 차은우.


네가 맞았다.


-


아, 진짜 덥지 않냐. 내일 더 덥다던데. 휴교 왜 안 하지. 나 고모한테 베라 쿠폰 받았는데, 같이 갈래? 니가 친구다, 은우야. 이럴 때만 친구지. 뭐 먹지, 고민 되네. 난 그냥 무난하게 엄마는 외계인. 도전정신이 없네, 난 이번 신상 먹어본다. 맛 없으면 가 다 먹어. 정 없게 진짜.


고등학교 입학 때만 하더라도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품이 남았던 와이셔츠 핏이 딱 알맞아졌을 무렵엔 이미 졸업이나 손꼽아 기다릴 때였다. 졸업보다도 더 얼마 남지 않은 수능에 집 학교 독서실을 오가는 딱 그 때.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또 의욕이 곧잘 나진 않았던. 정신 붙잡아야 한단 생각은 들어도 막상 붙잡을 힘도 의욕도 생기지 않았을, 딱 그 무렵.

매미울음 소리에 질려하며 그 다음 시간 걱정은 안하고 땀 한 바가지씩 흘리며 일주일에 한 시간밖에 없는 체육시간을 보내고, 독서실 가는 길엔 쭈쭈바 하나씩 입에 물고 가는 게 일상이라면 일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때 그 옆 자리엔 무조건 네가 있었는데. 네가 없으면 나보다도 주변 사람들이 더 웬일이냐며 허전해했던 게 기억이 났다.


버스 타고 집에 가는 길이면 네가 두 정거장 앞에서 내리고, 외로운 차은우 귀가길 지켜줄 노래라며 블루투스로 제가 요즘 듣고 있는 노래를 보내주기도 했었는데. 그렇게 모인 노래만 벌써 몇십 곡이 넘었었다. 집 앞 정거장에서 내릴 때면 문자로 노래 좋은데, 하고 하나 보내보고, 그러면 문자 너머러도 너는 들뜸을 숨기지 못하고 역시 디제이 문빈 솜씨 어디 안 간다며 보내왔었다. 인디 노래에 관심도 없었는데 그 이후로는 괜히 길을 걷다가도 혹시 이 노래 그 노래 아니냐며 맞춰낼 정도로 나는 네게 좀 많이 물들었던 것 같다.

수능 끝나지도 않았으면서 둘이서 일본 놀러갈 계획도 세웠었고,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집중이 안 될 때 휴게실에 나와선 가위바위보로 음료수 내기했던 것도 기억났다. 나 이번에 주먹 낸다. 심리전이라면서 맨날 그런 소리나 했다. 매번 가위를 내며 진다고 툴툴거리길래, 몇 번은 네 뜻대로 보자기를 내줬었다. 그럴 때면 차은우 너 날 너무 믿은 거 아니냐던가, 했었는데. 예, 예. 대충 대꾸해주고 데미소다 하나 뽑아줬던 기억이 있다.


그날은 어땠더라.


독서실로 향하는 길에 기프티콘 받아놨던 게 생각나서 아이스크림을 샀었고, 덥긴 해도 독서실에 들어가긴 또 싫어서 그 앞 공원 벤치에서 먹고 가자는 얘기가 나왔었던 것 같은데. 무슨 얘기를 했더라. 그냥 평소처럼 쓸데 없는 얘기나 했던 것 같다. 먹어보자 해서 같이 담았던 신상 아이스크림이 생각보다 괜찮다는 얘기라던지. 너는 티나게 어깨를 으쓱했고, 나도 그런 널 따라 티나게 웃었던 것 같은데. 공원에 있는 제일 큰 나무 그늘 아래 벤치였던 것 같았다. 운이 좋았지. 평소같으면 장기니 바둑이니 둔답시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들로 북적였을텐데, 그 날은 신기하게도 공원이 텅텅 비었었다. 아, 잎 사이사이로 비춰 들어오는 햇빛에 네 얼굴에도 얼룩덜룩한 그림자가 졌던 것도.


"독서실 들어가기 싫다."


"나도."


한숨 섞어 내뱉은 말에 네가 대꾸해왔었다. 어째 이 기억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 선명한지. 구름이 좀 움직였는지, 방향을 튼 그림자가 네 위에서 작게 움직였다. 둘이서 헛소리 하던 걸 멈추고 가만히 정적 속에서 멍이나 때리고 있었는데, 네가 날 불렀다.


"차은우."


왜애. 갑자기 또 찾아온 무기력증에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손에 쥔 아이스크림 통을 놓쳐버릴까 겁이 나 다시 만지작거리며 제대로 고쳐 쥐었다. 산 지 얼마 됐다고 벌써 녹아버려선 색색이 섞여나간 아이스크림을 괜히 스푼으로 휘젓기나 하면서.


"좋아해."


고쳐 쥔 게 별 의미가 없었다.


-


이게 뭐하고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잘 지냈냐, 오랜만이다, 하는 형식적인 인삿말을 평소보다 더 딱딱히 내뱉고 명함을 주고받았을 때였다. 와, 너 팀장이야? 우리 회사 들어오면 빈이 너도 팀장 달 수 있어. 들어오실? 명준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빈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좋죠. 써주시면 저야 완전 땡큐.


웃어대는 둘을 따라 어색하게 웃어봤다. 느껴졌다. 안면 근육이 한 박자씩 늦는게.

그 날의 여름 이후 우린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을 나누지 않았다. 결국 그 순간 내가 겨우 입을 떼 한다는 말은 그거였다. 가자, 독서실. 말은 뱉어놓고 그대로 굳어 있었는데, 네가 먼저 일어났다. 가방을 고쳐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오히려는 좀 오버스럽게 벌써 이 시간이냐고, 얼른 가자고 그랬었다. 집중이 되질 않아 자주 들락날락 거린 휴게실, 그 한 순간에도 널 마주친 적이 없었다. 평소엔 어떻게 그렇게까지 타이밍이 맞을 수 있는지 자주도 마주쳐서, 오히려 없으면 괜히 섭섭하고 그럴 정도였는데. 어쩌면 내가 휴게실에서 널 생각하고 있는 동안 넌 그 작지만 작지 않은 독서실 책상 한 칸에서 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돌아가는 길, 널 불러야 하나마나 문자메시지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1층에서 널 기다리고 있었는데, 넌 평소처럼 비상구 계단을 타고 내려왔었다. 고삼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운동하냐면서. 난 그 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무 말 없이 정류장으로 걸어가는데, 네가 말했다.


"나 앞으로 좀 더 있다가 가려고."


"......그래?"


"어,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고."


네가 앞만 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먼저 가라는 소리였다. 그래, 그럼. 난 또 그것밖에 말할 줄 모르고. 평소처럼 나란히 앉은 너는 그 날은 노래를 듣질 않았다. 나는 노래를 들었다. 여전히 네가 내게 추천해준 노래들로 가득 찬 플레이리스트를.

나 내린다, 잘 가라.

넌 그 마지막 날 그 두 정거장 앞의 지점에서 그렇게 말했다.


애초에 반이 달라 누가 먼저 찾아가거나 하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었기에 내가 널 피하는 건 쉬웠다. 네가 날 피하는 게 쉬웠던 만큼이나. 그냥 혼란스러웠다. 난 널 친구로만 생각한다느니, 그런 뻔한 말이라도 내뱉으려면 내뱉을 수 있었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혼란스러웠다. 네 그 담담할 만큼 담담한 고백을 똑같이 담담하게 거절할 수 있을만큼 친구로만 생각한다는 말을 내뱉기까지 필요한 어떤 확신이 없었다. 너네 뭐냐. 싸웠어? 그런 질문이 점점 쌓여갔다. 난 그냥 웃고 말았고, 너도 그냥 웃고 말았나 보다. 야, 풀 거면 일찍 풀어. 너네 몇 개월째냐, 말 안 한 게. 급식 먹다 그런 얘기도 나왔었다. 그 때도 난 그냥 웃고 말았고, 넌 그 때쯤엔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했다고 들었다.


"야, 차은우!"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명준 형이 어깨를 찰싹 때려왔다. 네 거 진동벨 울린다고. 그제야 사무소 식구 챙겨줄 거 챙긴다고 샀던 게 생각이 났다. 무슨 정신으로 주문을 했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데 또 눈이 마주쳤다.


"어, 잘 가라."


네가 살짝 웃고 손을 흔들어왔다. 입꼬리를 올려보려 애를 썼다. 문을 나서자마자 눈을 찔러오는 햇빛을 피한다고 작게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어디까지 돌아본 건지.

형, 더위 먹었어요? 혼이 나갔는데. 산하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어보이고 음료를 건넸다.


"엥, 딸기 스무디 없대요?"


"나 뭐 사왔는데?


"커핀지 휘핑크림 덩어린지도 모르겠네. 형 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거 있잖아요."


하나를 꺼내든 산하의 손에 들려있는 건 분명 카라멜 마끼아또였다. 그 순간 지나치게 당이 떨어졌었나보다. 네 잔을 죄다 이걸 사오다니, 넋이 나가도 제대로 나갔나 보지. 더위 먹어서 그런 것 같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괜찮아요 형 저 이것도 좋아함. 근데 휘핑크림은 좀 건져내야겠다. 산하가 손에 든 하나를 들고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단 거 아예 못먹는 사람은 또 없단 거였다. 손에 남은 내 몫의 한 잔을 노려봤다. 더위에 얼음이 녹았는지 둥근 플라스틱 뚜껑으로 커핏물이 좀 차올라있었다. 둥글게도 돌아가는 휘핑크림의 끝자락을 찾아보려 눈을 좀 굴렸다. 이게 다 뭐하는짓인가 싶어 이내 포기하곤 휘핑크림을 신경질적으로 빨대로 찔러봤다.


"이 형 이거 더위 제대로 먹었네."


그제서야 한 입 떠먹었다. 더럽게 달다, 진짜.


-


오전부터 영 집중을 못했다. 진짜 더위를 먹기라도 한 건지 기력이 없었다. 열대야에 뒤척여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도 있긴 했는데, 회사에 도착하고 오니 그래도 어젠 좀 시원해서 잘 만했다는 얘기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언제쯤의 열대야에 취해있었던 건지. 가물가물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의 기억 정도로 치부해버렸던 것이 실은 추억이었고, 결국 다시금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걸 귓가에서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죽어라 외쳐대고 있었다.

신경이 예민할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어제 하루 지나치게 감각을 혹사시킨 덕일 거였다. 사실 지금도 감각을 혹사시키는 중이긴 했다. 오전부터 사무실에 문빈이 와있었다.

어제 오후 내가 사오지 못한 딸기 스무디와 이것저것을 사 들고.


"우엉차는 없더라."


다른 차는 있던데. 그래서 그냥 네 건 그냥 아메리카노. 머리를 제대로 두들겨 맞았다. 아니 무슨 우엉차를 돈 내고 사먹냐? 안 사먹을수록 좋지, 그거 아직도 비인기상품이라 원플러스원하거든. 하여튼 신기한 새끼. 뭐. 왜. 뭐. 또 생각이 났다. 이건 그 여름보다 한 칸 앞의 기억이었다.


"잘 먹을게."


그걸 받아든게 불과 30분전이었다. 진도가 영 나가질 않았다. 뭔가 의무감에 하고 있긴 한데 아무것도 되고 있질 않단 느낌. 점심 시간이 코앞이었다. 이렇게된거 밥이라도 빨리 먹고 들어와서 정신 다시 차려야겠단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또 그때였다.


"오늘 점심 순두부찌개 어때."


"형 어제 술먹었죠."


"역시 막내. 눈치가 빠른데."


이대로 점심은 순두부찌개 먹고 오게 생겼다. 생각해보니 어차피 다 같이 나갈거면 따라 나가는 게 나았다. 주변이 죄다 회사라 점심시간에 마음 편하게 혼밥할 곳이 없었다.


"빈아, 점심 약속있냐?"


"아뇨, 왜요?"


"없음 밥 같이 먹자고."


"어......."


"빈이 두부 못먹어요."


졸지에 나섰다. 어쩌지 하는 표정이 신경쓰여서. 너는 내 쪽을 돌아보며 조금 웃어보이곤 명준 형에게 말했다. 먹긴 하는데, 그 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게 보였다. 그 와중에 명준 형 고딩 동창 짬바 어디 안 간다고 하는데 그 말에 괜히 또 어색하게 맞부딪치는 시선에 난 또 숨어버렸다. 그럼 국밥은 어때. 여기 돼지 국밥 엄청 잘하는 집있거든. 형, 거기 갈거면 지금 나가야돼요. 사람 많아서. 민혁이 거들었다. 다들 짠 것처럼 하나 둘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지갑을 챙긴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딘가 시선이 느껴져 돌아봤더니 너다. 눈이 마주쳤다가, 네가 보내오는 어색한 웃음에 똑닮은 어색함으로 마주해봤다. 아, 형. 저 생각해보니까 작업할 게 좀 있어서요.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 보자. 네가 가져온 메신저백을 어깨에 고쳐매는 게 보였다. 나도 손에 쥔 지갑을 한 번 고쳐쥐었다. 그 여름 고쳐쥐었던 그 아이스크림 통같이.


이거면 된거다. 그 여름은 이젠 이렇게 다시 한 번 고쳐쥘 뿐인 생각인 것으로,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네가 잠깐 웅얼거렸다. 먼저 가볼게. 그래. 짤막한 대답. 이거면 됐다. 저 어딘가 좀 쿡쿡 찔려오긴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이미 너와 난 꽤 멀찍이도 서서 그 여름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렇다고 아예 바라보지 않는 건 또 못해서 어색한 시선이 그 거리감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먼저 계단을 내려간 네 뒤를 따라 우르르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불 끄고 나와라-. 저 아래서 진우 형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 서서 하나씩 불을 꺼나간다. 문을 닫기 전, 또 괜히 한 번쯤 뒤를 돌아봤다.


내려갔더니 아무도 없다. 진짜 너무하네. 그걸 안 기다려주나. 속으로 한 번 툴툴거리면서 횡단보도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차은우."


"깜, 짝아."


놀랬어? 미안.

어깨를 툭툭 쳐오는 손길에 놀라 뒤를 돌아보니 너였다. 메신저백 끈을 한 손으로 꽉 부여잡고, 내 앞에서 또 입을 뗐다 붙였다 반복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좀 머뭇대다가 겨우 뭔가 결심이 들었는지 그제서야 시선을 내게 맞춰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어."


입이 먼저 반응했다. 나도 모르게 좀 앞으로 튀어나간 몸을 도로 수습하면서 오만가지 생각을 다했다. 괜찮아, 시간 완전 괜찮아. 이걸로 끝이다 마음 먹은 게 불과 몇 분도 안된 것도 다 까먹고 온통 그런 생각뿐이다. 갑자기 불쑥 다가온 나 때문에 놀란 건지 네가 눈을 깜빡였다. 몇 시쯤 마치냐는 너의 물음에 일 없으면 여섯시라고 대답했다. 이걸로 끝이긴 뭐가 끝이야. 궁상 맞은 새끼. 퇴근 시간 지옥철이 둘 다 영 꺼려져서 넉넉하게 일곱시에나 만나기로 했다. 불금이니까 홍대쪽은 너무 북적대지 않겠냔 내 말에 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내가 이리로 다시 올게. 괜찮아? 어, 홍대보다 여기가 더 가깝기도 하고. 그래, 그럼. 솔직히 얼떨떨했다. 십 년 가까이의 침묵이 이렇게 단숨에 깨질 줄은 몰랐으니까.


"형 진짜 더위 먹었죠."


왜 실실 웃어요, 사람 겁나게. 산하의 말에 민혁이 대꾸했다. 그니까, 나 저 형 혼자 웃고 있을 때가 제일 무서워.


"밥이나 먹어."


국밥이 잘도 넘어갔다. 하여튼 음흉한 놈. 뭔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명준 형이 혀를 끌끌 차는 소리를 웃음으로 흘러넘겼다.


-


생각해보니까 문빈 전화번호도 없었다. 혹시 몰라서 저 옛날 전화번호는 휴대폰 바꿀때마다 백업해서 넣어놨었는데. 새삼스레 오래되기도 오래됐단 생각을 했다. 스무살되면 뭐하지 고민하던 게 엊그제같은데 이젠 서른이 코앞이었으니까. 생각해보니까 12월 31일날 밤새고 1월 1일 바로 편의점 가서 맥주 한 캔씩 사오자는 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날 차은우, 독감에 걸려서 골골거린다고 아무것도 못했다. 정신 좀 차리고 보니 1월 1일 오후 한 시였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 허탈해서 또렷하게도 기억했다.

집에 들렀다 옷 갈아입고 나오는 건 또 괜히 유난 떠는 것 같아서 혼자 사무실에 남아 의자나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향수는 뿌렸지만. 머리도, 좀 만지작거렸고. 이 번호로라도 네게 전화를 걸어야하나마나 고민하느라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텅 빈 사무실에서 동네 피시방 망할 때 싸게 가져왔다는 좀 낡은 회전의자가 끽끽 울어댔다. 30분이나 남았나. 손목시계를 들여다봤다,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올려다봤다가 휴대폰 시계를 들여다봤다.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시간이 더럽게 안갔다. 평소같으면 유투브라도 봤을 텐데, 영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전화나 해볼까. 번호 바뀐거면 명함에 아마 적혀 있을테니 거기로 전화해보면 될 거다. 신호가 갔다.


-네, 여보세요. 문빈입니다.


"......전화번호 바뀐 줄 알았는데."


-외우기 귀찮아서. 아, 너 지금 어디야?


"사무실. 어디 쯤인데?"


-아, 가고 있어. 다행이다.


생각해보니까 아까 만날 장소도 안 정했더라고. 혹시 엇갈렸나 했네. 네가 웃음을 흘렸다. 거기 가만히 있어, 나 여기 지하철역입구. 금방 갈게.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그 목소릴 들으니 시간이 더 안 가서, 일어나선 사무실을 몇 바퀴나 돌았다. 서른 다섯. 그만큼 돌아다녔을쯤, 문이 열렸다.


"아직도 안갔어요?"


"왜 너야."


"인성 봐. 지갑 놔두고 가서요."


산하였다. 죄도 없는데 그냥 원망스레 쳐다봤다. 너무 들떠서 지갑 놔두고 간 것도 까먹었지 뭐에요. 아, 다행. 있다, 있다. 지갑을 찾아든 산하가 빠른 걸음으로 다시 문을 향했다. 가봅니다, 좋은 불금요. 어, 너도. 대충 대꾸해줬다. 문이 닫혔다. 그 이후론 뭔가 힘이 빠져서 그냥 진우 형 의자에 앉아 다시 의자나 돌려댔다.


"미안, 오래 기다렸어?"


"아니."


마침 할 일도 있었고. 의자에서 튀어오르듯 일어났다. 흰 티에 청바지, 검은 모자. 딱 주말에 독서실 갈 때 그 차림이었다. 근데 우리 어디가? 너 술 잘 먹어? 못 먹는 건 아닌데. 그럼 됐다.


-


이끌려 온 곳은 회사 근처 삼겹살집이었다. 단체 회식이라도 나온 건지 온통 정장차림이다. 편하게 해, 편하게! 퍽도 편하겠다. 신입 사원으로 보이는 앳된 남자 하나에게 소주를 따라주는 걸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회사 못나가는 이유 하나 더 있다면, 딱 저거 때문이었다. 저런 꼴 겪기 싫어서.

어떻게 또 구석 자리 하나가 남아있어서 냉큼 앉았다. 문빈은 앉자마자 생수 가져다주는 알바생에게 소주 세 병부터 부탁했다. 고기는 시키지도 않고.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불금 저녁 시간대 삼겹살집 알바생의 지침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에 여기 일단 삼겹살 6인분만 시킬까, 하고 네가 물어왔다. 그걸로 되겠어? 뭐래, 나 위장 줄었거든. 그럼 일단 그렇게 주세요. 이상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안 어색해질 줄은 몰랐는데. 그러고보니 문빈이랑 술 마셔보는 것도 처음이다. 반찬 나오기도 전에 먼저 받아든 소주를 익숙한듯 흔드는 게 영 낯설었다. 아마 내 기억속에 넌 아직 그 19살의 여름에 갇혀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넌 묵묵히 술이나 따랐다. 내 몫의 한 잔을 따르고 나서야 입을 뗐다.


"차은우."


"왜."


"그, 아....."


"뭔데?"


"아......안되겠다."


뭐가 안되겠냐 물어볼 틈도 없이 넌 소주를 털어넣었다. 털어넣곤 또 슬쩍 눈치를 보고, 또 한 잔 따랐다. 고개를 잠깐 젓고, 다시 한 잔을 털어넣는다. 페이스 너무 빠른 거 아냐? 그제서야 난 내 몫의 한잔을 막 입에 갖다대고 있었다. 그걸 넌 몇 잔이고 반복했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냈을 땐 걱정돼서 천천히 마시라고 무슨 일 있냐고 물었는데, 급히 마신 술 때문인지 벌써 좀 붉어진 얼굴을 들어올리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고는 또 소주 한 잔 털어넣었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답답해서라도 나도 한 잔 털어넣었다. 온 테이블이 시끌벅적하다. 여기만 고요했다. 그 날 매미 울음이 잠깐 멎었던 것처럼. 한 잔 두 잔 비워내는 사이 고기는 또 나와서 그 침묵 속에서 집게나 쥐어들었다. 불판 위로 올려진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며 겨우겨우 이 정적을 깨트리고 있는 중이었다. 정적관 달리 머리는 복잡했다. 멍하니 불판이나 보고 있는데, 네 목소리가 들려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고기 탄다. "


".....왜 미안해."


"그냥, 그렇잖아. 그때부터. "


괜히 내가 고백해서 껄끄럽게 만들어버린 거 같아서, 너랑 나. 넌 또 샐쭉 웃어보였다. 그 앞에서 뭔가 말하고 싶은 건 많은데 정리가 안됐다. 사실 아직도 이 감정이 뭔지 명확히 답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일까. 아무 생각도 못하겠어서 그냥 고기나 뒤집었다. 조금 탔다. 네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그냥 한 순간 착각했었나봐. 신경 쓰게 해서.....미안."


"......"


"원래 그 때가 한창...무슨 소린지 알지? 그, 이것저것 뒤죽박죽할 때잖아. "


"......"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하여튼, 그렇다고."


그래도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반갑다. 연락 좀 하고 살자. 고기는 익을 대로 익었다. 무언가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고기를 잘랐다. 다시금 찾아온 적막에 네가 어색해하는 게 싫어서 그냥 또 툭 내뱉고 말았다.


"넌 그걸로 괜찮아?"


"......뭐가?"


"......아무것도 아냐."


나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그리고 그거 미안해 할 필요없어.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고기 몇 점을 네 앞접시에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네 눈을 보면 뭔가 울컥하고 터져나오는 게 있을 것만 같아서 시선은 고기에만 뒀다. 사람 일 진짜 모르겠네. 네가 어떻게 디자인을 하고 있냐. 난 니가 교과서에 그렸던 파이리 아직도 못 잊는데. 말을 돌렸다. 둘 다 편한 주제로 눈을 돌렸다. 넌 언제적 애기를 하고 있는 거냐고 타박을 줬다. 그러게, 난 대체 언제적에 멈춰있었던 걸까. 답은 지나치게 명백했다. 날 좋아한다는 문빈이 있던 그 시절에. 그 공원 은행나무가 만들었던 그늘 아래, 또 그 매미 소리 아래. 속이 타서 술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꿀꺽꿀꺽 삼켜댔다. 고기 진짜 못 굽네, 줘 봐. 내게서 집게를 뻇어간 네가 능숙하게 고기를 구워댔다. 네 눈을 바라보기가 힘들어서 그냥 고기 굽는 거나 보고 있었더니 고깃집 알바도 했어서 이 정도는 껌이라고 말했었다. 난 웃었다. 소주병은 금방금방 동이 났다.

서로 몰라 온 10년 가까이의 세월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직장 생활 영 못해먹겠어서 프리랜서로 전향했다고 들었다. 광고 회사 다닐 때 고생했던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컴공과를 갔다고 하니 너는 좀 놀란 눈치였다. 너 맨날 샤프 부숴먹지 않았냐고 그러길래 그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해줬다. 그것도 부숴먹는 놈이 어떻게 컴퓨터는 안 부숴먹고 잘 돌리냐 했다. 파이리가 사돈 남 말 하는 거냐고 얘기했더니 자꾸 그러기 있냐고, 쪼잔한 놈이라고 했다. 친하게 지내던 고등학교 동창 얘기가 나와서 걔는 결혼한 지 몇 년 되었다고 얘기했더니, 눈이 휘둥그레져선 제일 결혼 못 할 것 같은 놈이 제일 먼저 갔다고, 사람 일 진짜 어떻게 될 지 모른다고. 기름진 삼겹살 한 입에 소주 한 번 털어넣길 반복하면서 우린 깔깔댔다. 둘 다 평소 주량보다 오버해서 마셔댔다. 라면 두 개 시켰다. 먹다 남은 삼겹살을 집어 넣고 휘적댔다. 그렇게 또 라면을 안주 삼아 한 병 더. 무슨 얘기 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래봤자 아마 했던 얘기의 반복이었을 거다. 옛 추억을 끄집어 내어서 한 잔씩 마셨다. 2차 가잔 소리를 했다. 너였나 나였나 모르겠다. 둘 다 비틀거리는 발걸음, 꼬이는 스텝을 억지로 풀어대면서 그렇게 걸었다. 그 거리에서 우린 웃었다. 웃고, 또 웃고, 또또 웃고.......


-


눈이 마주치고, 나도 모르게 그 눈높이에 고개를 맞추고, 거리감에 숨이 막혔는지 입을 뻐끔댔다가 숨구멍을 좇아 네 입술로 자연스레 시선이 향했다. 허락받듯이 눈을 다시 마주치고, 느리게 깜빡거리고, 너는 고개를 돌리고, 나는 그 지나침이 싫어서 다시 돌아간 시선을 따라 고개를 갸우뚱대고. 아랫니로 꽉 깨물은 윗입술에 그대로 입술을 부딪친다. 매미가 울었다. 좀 울고 싶었다. 이것저것 소란스런 밤이다. 애가 탔다. 아쉬웠다. 뭐가? 꽉 깨문 네 입술이? 그 틈새를 비집고 숨 한 번 제대로 쉬어보려고 하는 내 발버둥이?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서러웠다. 뭐가 서러운 건지도 몰랐다. 한껏 유치해지고 싶었다. 한껏 유치해지는 중이었다. 나 좀 좋아해줘, 좋아해줘, 빈아. 사랑해줘, 빈아, 응? 나 좀만, 예뻐해줘, 빈아. 그때처럼.


-


꿈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일어났다. 이제 와서 뭘 어쩔건데. 숙취로 머리는 한창 지끈거려왔다. 이정도로 필름 끊겨본건 진짜 처음이다. 신입생 환영회 때도 그 분위기가 숨막혀서 술 잘 못 먹는다고 거짓말하고 맥주 한 잔 몇 시간 째 앞에 놔둬놓으면서 혼자 멀쩡한 정신으로 술게임을 했었으니까. 이 나이 먹고도 술버릇이 뭔지 모른다는 게 웃기기도 한데, 또 괜한 술버릇이 알려지는 게 싫어서 기분 좋은 상태가 되면 늘 잔을 놨었다.


"어젠 정신을 놔버렸네."


허탈하게 웃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에 섞여 나온 숨이 아직 분해되지 못한 알콜을 실어와 다시 코를 떄리는게 영 불쾌했다. 샤워부터 해야겠다. 그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거짓말같지만 진짜 그제서야 이게 우리 집이 아닌 걸 깨달았다. 좀 비좁다 싶었더니 옆에 네가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이 소리는 또 그리 얇지 못해서 바스락바스락 우렁차게도 내뱉으며 널 깨웠다. 손으로 눈을 비비며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맞춰오는 네가 일어났냐 물어왔다. 안경 좀 집어달라길래 침대 옆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검은 뿔테 안경을 네게 건네 주었다. 넌 아직도 이걸 끼는구나. 아니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제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거리에서 깔깔대던 게 끝이었다. 당황한 게 눈에 보였나 보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난 네가 잠깐 웃음을 지어보이더니 중얼거렸다.


"아무일도 없었어, 병신아."


"......진짜, 아무일도 없었어?"


"진짜."


굳이 또 물어본 내 구질구질한 질문에 넌 딱 잘라 대답했다. 물어보고 나서야 후회한 질문이었다. 이 관계는 뭘까. 고등학교 동창. 좋아했었고, 이젠 좋아하지 않는 사이. 그럼 다시 친구인건가? 애초에 아무일도 없었단 게 어떤 의미인지도 잘 모르겠었다. 어떤 의미의 아무 일인데? 온갖 물음으로 숙취가 덜 간 머리가 삐걱삐걱 힘겹게도 움직여댔다. 멍하니 널 바라보는 내 시선에 넌 짧게 답을 해주곤 옷을 던져왔다. 시야에서 네가 사라지고 뭔지도 모를 걸로 뒤덮인 게 갑작스러워서 이렇다 할 대처도 못하고 그대로 맞았다. 그것도 못 받냐. 정장의 가려진 시야 너머로 타박이 들려왔다.


"자, 양말."


"몇 시야?"


"열 시 반."


머리 위로 쌓인 양복을 끌어내렸더니 침대 위로 덩그라니 올려진 양말이 보였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오랜만에 청소나 해야겠다. 네가 중얼거렸다. 도와줄까 물어보니 혼자 하는 게 편하다며 식탁으로 가 이것저것 치우기 시작했다. 뻘쭘해서 양말 신는 거에나 집중했다. 그럼 나 가볼게. 어, 그래. 재워줘서 고맙다. 그래그래. 어째 어제보다 더 어색해진 기분이다. 도어락이 닫히는 소리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왔다.


생각해보니 여기가 어딘지도 몰랐다. 지하철역을 찾으려고 휴대폰으로 검색해보는데, 좀 멀긴 했지만 술도 깰겸 걸어가보자 했다가 금방 죽일듯 내려쬐는 햇살에 후회했다. 늘 이렇다. 왜 후회할 건 미리 모르는건지. 몰라서 후회인건지. 술이 덜 깬 김에 아직 새벽에 있는 줄 아나보다. 이런 생각이나 주구장창했다. 그냥 포기하고 버스 타는 게 나을 것 같아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자리 선정도 기가 막혔다. 거기 딱 콩나물 국밥 집이 있을 줄은 몰랐지. 홀린 듯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맞이해주는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좀 지끈거렸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제일 기본으로 하나 주문했다. 주말 오전이라 사람이라곤 몇 테이블 없었다. 명준 형이랑 진우 형이 챙겨보고 있다는 주말 막장드라마 재방이 한창이었다. 언젠가 휴식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국밥은 금방 나왔다. 보자마자 꼬르륵 소리가 나서 식당 아주머니와 어색하게 눈이 마주쳤다. 밥은 무한리필이라고 저기서 푸면 된다고 해주길래 좀 귀에 열이 차올라선 고개 끄덕거리며 감사합니다, 했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간당간당해서 일단 껐다. 한동안 정신 없이 먹다가, 휴대폰도 없으니 자연스레 티비나 보게 됐는데, 나도 모르게 푹 빠져서, 남은 몇 숟가락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형들 미안, 이거 재밌네요.


하도 먹어대서 국밥 바닥이 보일 때쯤이었다. 와, 이 순간에 뜬금 없이 키스신? 키스?


"미친."


설마. 설마, 그건 아닐 거야. 차은우, 그건 아니어야 해. 부정하면 할수록 선명히 떠오르는 게 진짜 울고 싶었다. 이럴 수는 없었다. 마음 없단 말을 들은지 하루도 안 됐었다. 선명히도 떠오르기 시작한다. 진짜 망했다. 국밥 국물이 얼마 남지도 않아서 코박고 죽을 수도 없었다. 대신 바로 옆 벽에 머리를 퍽퍽 박아봤다. 미친 놈 아냐, 이거. 좋아해줘? 사랑해줘? 진짜 죽어버리고 싶었다. 요즘 아침드라마도 저런 구닥다리 대사는 안 쓸 거였다. 형 약간 혼자 10년 전쯤에 살고 있는 거 같아요. 산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언제적 개그야, 진짜.


총체적으로 아주 망했다. 차라리 뭔가 멋진 말이라도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거다. 좀 사랑해줘? 다 필요없고 좀 죽자. 이젠 정말로 문빈 볼 낯이 없어졌다. 청소한다고 한 것도 뭔가 날 쫓아내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기분좋은 포만감이 더부룩함으로 바뀌어갔다.


"......"


그 입맞춤 이후로 네가 내게 뭔갈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것만 딱 기억이 없다. 뭐였지. 네가 날 보면서 무슨 얘기를 했었지. 여기까지 기억해냈으면 이것도 기억해내라고 뇌를 닦달했다. 식당 테이블에서 혼자 머리를 감싸쥐었다. 이젠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진짜 눈물날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다시 들어가라니까, 뭘 잘했다고 나오려고. 주말 아침부터 해장한다고 들어온 24시간 콩나물 국밥집 구석 테이블 한 칸에 앉아서 이러고 있는게 웃긴데 또 서럽고 서러운데 또 웃겨서 정말 미쳐 가고 있었다.


문득 매미소리가 들렸다. 기댄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울음 소리가 한 번 더.

난 이제야 기억이 났다. 그때 그 그늘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던 네 붉어진 귀가, 이제야.


왜, 이제야, 왔어.


그 말이 이제는 기억이 났다.


-


초인종을 누르는 손이 다급했다. 버스 정류장까지도 지도를 보면서 찾아온 거라 돌아가는 길이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덕분에 한참 헤매다가, 지나가던 할아버지를 붙잡고 어디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완전히 반대로 왔단 걸 알았다. 꼴은 안 봐도 거지일 게 뻔했다. 뭔가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쳐올라왔다. 그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그늘 한 번 없이 태양빛 온전히 받으며 뛰어오느라 온 몸에 열이 찼다. 문이 열린다. 의아한 듯 날 바라보는 그 눈빛에도 어딘가 벅차올라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달려오는 동안 제대로 내뱉지도 못한 숨을 몰아내쉬면서 간신히 내뱉었다.


"무슨 일, 있었잖아."


우리. 그 말을 끝맺기도 전에 네가 말했다.


"실수야."


자근자근 밟듯이 읊는다. 너나 나나. 한 글자 한 글자씩 제대로 박히게, 또렷이 읊어왔다. 신경쓰지말고, 가. 너는 또 신경 쓰지 말라고 그랬다.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뭘, 어디까지, 얼마나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 건데. 분명히 문빈이라는 사람을 잘 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정말 그동안의 착각이었단 게 들켜버린 순간이었다. 왜 이제야 왔어. 네가 했던 말을 너처럼 다시 한 번 자근자근 밟듯이 읊어봤다. 말이란 건 참 희한하지. 난 내가 바라는 대로만 읽어왔다. 제멋대로 굴지 말자고 그렇게 중얼거렸던 28년인데, 충분히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유치하기 짝이 없을 수도 없었다.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햇빛은 강하게도 내리쬐어왔다. '우리'와 '너나 나나'. 속으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실수. 그것도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으로 속이 가득 차서 어떻게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껍데기를 겨우 유지하는 중이었다. 시끄러이 이쪽 저쪽 튕겨져 나오고 튕겨져 들어가며 돌아다닌다.

붙잡았어야 했었구나. 그 때 그 순간에. 혹은 이보다 더 이른 순간에.


주먹이나 폈다 쥐었다 하며 걸어가다 보니 멀어서 무리라고 했던 지하철역이 코앞에 있다. 무슨 힘인지 어떻게 또 지하철 플랫폼까진 잘도 내려왔다. 슬슬 주말 오후가 시작되려는 시간이었다. 지하철역 벤치에 쓰러지듯 앉았다. 내려앉은건 좀 되었는데, 내려놓을 줄 모르고 걸어왔던 것도 이젠 내려놓아야만 했다. 지하철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며 사람들을 간헐적으로 토해냈다. 지나침이 지나쳐서 눈을 감았다. 그 떄의 여름을 또 다시 떠올린다. 너는 이제 그 그늘 아래, 그 벤치에, 내 옆에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안 거다.


나만 아직도 그 여름에 살고 있구나. 너는 몇바퀴의 계절을 돌았는줄도 모르고.

멍하니 몇 번의 지하철을 보냈다. 그렇게라도 그 여름에서 벗어나길 바랬다가, 또 바라지 않았다 했다. 더위 먹은 몸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녹고 있었다. 한때 손을 적셔왔던 아이스크림처럼 조용히, 매미의 울음을 뒤로 하고 고요히.

귓가에서 모기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목덜미를 내주었다.


-



"...그래서."


"그랬다고."


"이게 끝?"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로부터 도망쳐온지 딱 일주일이 된 그 날이었다. 더위를 제대로 먹어서 한 주를 영 비실비실한 상태로 보내고, 그래도 회사에선 티내기 싫어 억지로 가린다고 가렸는데 눈치 좋은 명준 형에게는 못 당했다. 오지랖 부리는 거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 하면서도 남 챙겨주기 제일 잘 하는 형이었다. 때마침 난 착실히 쌓아온 무너져내림에 이젠 정말 남은 게 얼마 없었고, 무너져내린 잔해들은 곱게도 빻아져 가는 중이었다. 실수였단 네 말에 잘근잘근 씹히듯이, 밟히듯이. 쪼잔하고 찌질해서 웃겼다가 또 우울해졌다가 아주 혼자 다했다. 명준 형이 뒷머리를 긁어대다 신경질적으로 나 안주 먹고 싶은데, 하고 내뱉는 순간 솔직히 고마웠다. 술 한 잔도 채 하지 못하는 형이 내 얘기를 들어주겠다는 소리었다. 대학 다닐 때도 딱 이랬는데. 본인 귀찮은 거 안 하려고 하면서도 본인 귀찮은 만큼 남 귀찮은 거에 신경쓰는 사람.


"그냥 너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 거네."


그렇다고 마냥 다정한 사람이란 얘기는 안 했다.


"......그렇지, 뭐."


"그래서 어쩔건데."


진짜 이걸로 끝? 안주로 시킨 치킨 다리를 뜯으며 명준 형이 다시 물어왔다. 목이 타서 맥주나 들이켰다. 야 다리 둘 다 내가 먹는다. 형, 남은 거 형 혼자 다 먹어도 돼요. 그럼 나야 좋고. 형이 닭다리를 들고 우물 거렸다. 형 표현이 딱 맞았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한 거. 아주 제대로 유난 떨어버렸다. 술 먹고 좋아해 달라느니 사랑해 달라느니. 키스도 하고 아주. 아주아주 미친 놈. 테이블에 머리를 쾅쾅 박았다. 쪽팔린다. 궁상만 떨고 있을거면 나 가고.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래서 어쩔거냐고."


"어쩔까."


"대답해줘?"


"어......아니."


"어쩌란 거야 진짜."


저도 모르겠어요.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애초에 난 문빈이랑 어쩌고 싶은 거지? 잘되고 싶은 건가? 그냥 예전처럼 어색하지 않은, 친한 사이로 돌아가고 싶은 건가? 아직까지도 헷갈렸다. 이 마음이 널 향하고 있단 건 확실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욕심을 내도 되는 건지 몰라서 더 그랬다. 날 좋아하는 문빈. 날 좋아해줬던 문빈. 왜 이제 왔느냐는 말은 뭐였을까. 다 끝난 일에 구차하게 굴지 말란 뜻이었을까.

어젯밤 늦게 잤더니 영 술이 받질 않았다. 금새 취기가 올라 헛소리를 내뱉는 중이었다.


"형."


"뭐."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막......유치해지고 속도 좁아지고, 그래?"


"언제는 되게 어른이었냐."


와, 형은 진짜 형이다. 알다가도 모르겠어. 난 네가 제일 알다가도 모르겠다, 임마. 일어나, 취한 백팔십대 키다리 들 힘 없어. 바로 치고 들어오는 타박을 무시하고 계속 엎드려 있었다. 명준 형이 다시 치킨을 베어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넌 뭘 하고 싶은 건데. 명준 형이 물었다. 속으로 삼켰다. 속에서 떠다니는 질문이 이렇게 하나 더 늘었다. 삐쭉한 모서리로 여기저기 찔러대며 튕겨다니느라 온 몸이 따끔따끔했다. 지난주 주말 지하철역에서 모기에게 물린 곳은 아직도 제대로 낫질 않아서 간지러웠다. 간지러워서 자꾸 손을 댄 탓이었다. 물린 뒷목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지금 내가 남의 연애 상담 해줄 처지가 아닌데. 명준 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북적이는 주변 소음에 묻히는 듯 묻히지 않는 긴 한숨이었다. 나도 따라서 한 번 내 쉬어 봤다.

문득 또 그 날 네 입술에 맞닿았던 순간이 기억났다. 그냥 맞닿아 있고 싶었다. 사랑이니 좋아한다느니, 그날 밤 지껄여댔던 그 모든 바램은 어쩌면 뭘 하고 싶은지 몰라서 그 주변의 아무거나 툭툭 내뱉었던 거였던 거 같았다. 그냥 같이 있고 싶었다. 그걸로는 안될까. 보고 싶었다고, 미안했다고. 그렇게 옆에서 얘기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그래서 후회했다. 쭉 그래왔다. 욕심이 너무 많아서 붙잡았어야 했던 것들을 뒤돌아보는데 온 신경을 다 썼다. 죽어라고 복기했다. 네가 보내줬던 노래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버스 창가에서 같이 봤던 풍경. 매미 소리, 은행나무 그늘. 벤치, 아이스크림. 보고 싶었다고.


"형, 진정하고 들어봐."


"내가 뭘 진정해.”


"지금 찾아가는 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들어올린 시야에 명준 형이 휴대폰을 확인하는 게 보였다. 민폐지. 콜라를 따르고 꿀꺽 들이마신다. 저기요, 남은 거 포장해주세요. 아, 양념이랑 반반으로 해서 한마리 더 포장해주시구요. 옆에 놓인 이쑤시개를 집어 드는 게 보였다. 어차피 갈 거면 계산이나 해주고 가. 너 때문에 진우랑 미드 몰아 보기로 한 약속도 미뤘어.


밖으로 나오니 열대야가 딱 맞았다. 그것도 괜히 반가웠다.


-


이번엔 한 번에 제대로 찾아왔다. 제대로 찾아가야만 했다. 밤바람 하나 없는 열대야의 눅눅함에 몸은 진득하게 눌어붙어가는 중이었는데 오히려 정신은 맑았다. 내쳐질지 모른다는 걸 알고서라도 전할 게 있었다. 제대로 알아야 할 게 있었다. 물어봐야만 했다. 나는 아직 그 여름이라고. 너도 혹시 아직 그 여름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열대야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투덜거렸던 거라던가, 만족스러울 만큼 시원한 바람은 되돌아오질 않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던 손부채질이라던지.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그 공원 은행나무는 아직까지도 그곳에 멀쩡히 살아 굳게도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너는 그 때 날 얼마나 좋아했는지, 어떻게 좋아하게 된 건지. 이제와서라도 네가 날 여전히 사랑하고 있었으면 하는 걸 바라는 게, 웃긴 일이지만 혹시, 정말 혹시 그래도 되는지. 아니. 아니다. 네가 아니면 답해주지 못하는 이 모든 물음 이전에 꼭 말해줘야만 하는 게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초인종을 눌렸다. 충동적인 짓이라는 거 잘 안다. 내일이면 떠올리는 매 순간순간 이불 차야 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도. 솔직히 겁이 났다. 너 혼자 북치고 장구쳤던 거네. 막상 지금 와서 또 겁이 났다. 울렸다 되돌아오는 초인종 소리가 지나치게 길었다.


혹시 자고 있는 거 아냐?


차은우 이 미친. 전화도 안 하고 찾아오는 게 어디 있냐. 아 차은우, 아. 그제서야 이게 충동적인 짓이라는 게 확 실감이 났다. 수분 한껏 머금은 밤공기는 무겁게도 내려앉았다. 돌아오는 답이 없어서 그냥 걸음을 돌렸다. 술김에 미친 짓할 뻔 했던 거, 안 하고 잘 됐다. 다행이다. 좀 더 준비를 하고, 제대로 된 상태에서, 좀 더 알맞은 날에.


"차은우?"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


"......뭐 먹을래."


메로나랑, 보석바. 보석바 아직 나와? 그런가봐. 나도 신기해서 사왔네. 그럼 나 메로나.

현관문 앞에서 돌아가려는 내게 얘기 좀 하자 먼저 얘기한 건 너였다. 어차피 집에 에어컨 고장나서 안 나와. 그러고는 뒤돌아 가는 네 뒤를 졸졸 뒤쫓았다. 열대야라 그런지 이 새벽에도 사람이 좀 있었다. 그렇다고 또 많은 건 아니라, 딱 애매한 한적함이었다. 지금 우리 사이에 차 있는 그런 애매함.


아이스크림을 받아들었다. 그새 좀 녹았다. 네가 옆에서 아이스바를 깨무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한 입 베어물었다. 각자의 몫을 다 먹을 때까지 우린 말이 없었다. 네 보석바가 줄어드는 걸 바라보며 비슷한 속도로 내 몫을 해치웠다. 쓰레기 줘. 내 걸 받아들더니, 너는 일어나 휘적거리는 발걸음으로 쓰레기통 근처에서 비닐을 던져넣었다. 털썩 몸을 앉힌 탓에 좀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벤치 등받침대가 작게 끼익, 하는 소리를 냈다. 너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나도 그 심호흡을 따라 속으로 작게 후, 하, 내뱉었다.


"차은우."


"......"


"자격지심일 수도 있단 거 잘 아는데,"


"......말해봐."


"나 너 좋아했고, 그래서 그런 말도 했었던 거 맞아."


"......"


"그렇다고, 나 좀 좋아해 달라고 한 건 아니었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양 손가락은 자기들끼리 장난이나 치고 있었고.

혹시 책임감 느끼는 거면, 안 그래도 돼. 나 이제 너 안 좋아해. 네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그래서 더 그냥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 앞에서 섣불리 그 때 여름을 기억하냐고 내뱉을 자신이 없었다. 말하지도 못한 감정이 부정 당해 죽어버려 저 밑에 쌓인 걸 알면서도, 또 파릇파릇하게도 돋아나서 어쩌지를 못하고 널 찾아온 건데, 이젠 완전히 죽어버렸다. 케이오였다. 완전 녹다운. 삼, 이, 일. 다시 못 일어났다.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억지로 입가에 웃음을 띄었다. 경련이 올 거 같은 건지, 울음이 올 거 같은 건지. 너 빼고 다 왔다. 구질구질한 표현이 늘어만 갔다.


"......너."


"응?"


"대체 뭐가 그렇게......아니다."


"말해주면 안돼?"


"......뭐가 그렇게 슬퍼."


티가 다 났나 보다.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신경 쓰게 만들고 싶었다. 솔직히 신경 써줘서 고마웠다. 독서실 가자는 둥, 나처럼 피해버리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이젠 진짜 지금이 아니면 대답할 기회가 없을 게 분명했다. 앞으로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 내가 어떻게 될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그 속에서 저거 하나만 반짝였다.


"좋아해, 빈아."


"......왜 그러는 건데."


한참 말이 없었다. 사람은 없었다. 매미가 미약하게나마 울어댔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숨이 막혀서 또 네 입술을 좇았다. 네 입술이 달싹거렸다.


"...너, 뭐. 착각, 하는 거야."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그걸로 됐잖아."


"그걸로는 안 돼서."


술의 힘을 좀 빌린 게 다행이었다. 지금도 이렇게 네 얼굴을 바라 보기는 커녕 바닥에다 한 줄씩 떨어트리고 있었는데. 하하, 빈이 짧게 웃는 게 들렸다. 조금 울먹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왜, 그걸로는 안 됐어."


"......"


"개새끼."


나는, 너. 네가 말을 잇다 말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네 얼굴 위에서 살짝 움직였다. 밤바람이었다. 어디서 불어온 건지도 모르는, 뜬금없는 타이밍의. 그 바람을 신호로 네가 울었다. 잇새로 조금씩 울음 소리가 흩어져 나온다. 매미 울음은 잦아들었다. 네가 울 차례를 양보해 주듯. 넌 울음소리를 내기 싫어서 였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너는. 이 상황에 닦으라고 전해줄 휴지 한 장도 없었다. 가방 저 구석에 넣어두었던 손수건이 기억났는데, 꺼내 주려니 너무 더러웠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손을 뻗어 네 눈물을 닦아 주기엔, 그 눈물이 다 나 때문이라는 걸 알아서 또 손바닥만 쥐었다 폈다 했다.


네 것이 바닥에 떨어지며 만드는 자국이 만들어지는 게 조금 잦아들었다. 네가 그제서야 입을 뗐다.


"너무 늦었어, 너."


"......미안해."


"진짜 싫다, 차은우."


그 말을 하며 너는 짧게 웃었다. 덜 흩어진 울음이 섞여서 꼭 우는 듯한 소리였다. 그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는 게 미안했다. 너무 늦었다는 네 말이 꼭 맞았다. 10년이 다 되어갔다. 혼자 타고 돌아오기 시작한 밤의 버스가, 갱신되지 않는 플레이리스트도. 그 때처럼 나는 꼭 맞아 떨어지게 이기적이었다. 혹은 그보다 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


"……"


"맘 같아서는 뺨 한 대 때리고 싶은데, 얼굴에 상처 남을까 그럴 수도 없고."


"때려도 되는데."


"됐거든."


웃긴다, 진짜. 맘 겨우 잡았더니 그 새를 못 참고 비집고 들어오네. 너는 또 웃었다. 아까 울었던 걸 보상받겠다는 듯이 우렁차게도 웃었다. 네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어딜? 자리에서 일어난 네게 눈짓으로 물어보니 네가 짓궂게 웃었다. 홱 하니 고개를 돌리곤 먼저 걸음을 뗀다.


"독서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급히 뒤를 좇았다. 하여튼 더워 죽겠는데 열 받게 해서 더 덥게 만든다는 네 옆에 붙어 열심히 손부채를 부쳐가면서. 괘씸해 죽겠네, 진짜. 그러곤 퍽, 소리 나게 내 옆구리를 치는 네 주먹을 받아가면서.

굳이 또 안달이 나서 가능성 있는 걸로 봐도 되는 건가, 중얼거리는 내게 노력해보던가, 툭 내뱉곤 귀를 붉히는 널 좇으면서.


매미 울음이 그제서야 다시 우렁찼다.

아직,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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