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 voyage

2019 여름호
작성자
달함
작성일
2020-11-11 11:24
조회
4

 

 

 

 

w. 달 함

 

 

 

 

 

 어김없이 찾아온 계절에 난 또 당신을 찾으러 갑니다.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러 갑니다. 난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납니다. 함께했던 날의 공기가 어땠는지, 당신의 기분이 어땠는지, 뭐 그런 것들을,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가슴이 다시금 뛰어옵니다. 난 항상 그 날 그 시간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도 있었으면 합니다. 당신도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

 

 

 

 

 

 진득하게 더운 여름날 숨 막히도록 더운 곳으로 떠났다. 하던 아르바이트도 관두고 당장 다음 주에 떠나는 패키지여행을 예약했다. 돌아오는 표는 예약하지 않았다. 도피...는 아니었고 나에게 주는 선물? 아니면 훈련 같은 거였다. 일명 '여름이랑 친해지기' 어쩌면 스스로에게 주는 벌일 수도.

 

 속옷 반 티셔츠 반인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향했다. 터질 것 같은 지갑과 현금 봉투는 힙색에,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다. 공항버스 안에서 힙색을 몇 번이고 열고 닫았던 것 같다. 전날 통장에 있던 돈을 모두 빼 환전했다. 한국 돈으로도 만져 본 적 없는 두툼함에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돈일지 몰라도 오늘 나에게 한정된 행복이었다. 돈이 다 떨어지면 한국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국행 티켓 살 돈을 빼고도 주어진 며칠 혹은 몇 주 안에 쓰기에도 사치스러운 돈이었다. 이렇게 쓰려고 마음먹고 모은 돈은 아니었으니까.

 

3번 게이트, 편의점 옆에, 빨간 깃발.

 

엉성하게 모여있는 무리가 단번에 패키지여행 그룹이라는 것을 설명해줬다. 열심히 안내하는 가이드가 무색해질 정도로 사람들은 산만했다.

 

"젊은 놈이 왜 혼자 왔어."

"...하하..."

"내 총각 시절에는 말이야•••."

 

 지금이라도 환불할까.

 

 그냥 살던 대로 열심히 살았다. 입학 전엔 입학하기 위해 학기 중엔 다음 학기를 위해 또 다음 학기를 위해 또... 방학이 되면 일주일을 아르바이트에 바쳤다. 그렇게 두 달 반을 일하면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벌어 먹고살았다. 먹고 살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방학 동안 개같이 벌면 학교에 헌납하고 학기 중 버는 몇 푼의 푼돈으로 생활을 해결해야 했다. 이런 삶에 그런대로 적응해서 살고 있었다. 아니 적응한 줄 알았다. 현타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인생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홀연히 세상 속에서 삭제되어 살고 싶었다. 나를 아는 누군가로부터 내 존재를 지워버리고 사라져버리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 새로운 이름으로, 다른 사람처럼, 다시 태어난 것처럼 살고 싶다 생각했었다. 다들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하지만 그러기엔 깡이 부족했다. 아니지 돈만 있으면 쉽게 되는 거 아닌가. 항상 돈이 없다는 핑계로 살던 인생을 마저 살기로 결론을 짓는다.

 

 가이드가 설명을 하고 질문을 받는 틈에 의자에 앉아 사람 구경을 했다. 공항을 천천히 둘러보다 초점이 가장 가깝게 맞은 곳에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파란 깃발의 무리 중 혼자였다. 또 다른 패키지여행인 것 같았다. 나 같은 젊은 총각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위로가 됐다. 그 남자도 아마 같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던 것 같다.

 

"자자- 다들 티켓이랑 여권 잘 챙겨주시고요. 이제 타러 들어가실게요."

 

 그 남자에게 짧게 눈인사를 하고 캐리어를 끌었다. 

 

 이번 여행은 아마 '세미 삭제', '삭제 맛보기' 정도랄까. 나도 내 낭만이라는 걸 실현하고 싶었다. 일탈 좀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다 문득 학교를 10년 동안 다녔다고 자랑하고 다닌 학원 선생이 생각났다. 다음 학기 까짓거 꼴리면 안 다녀도 되는 건데 뭘 그렇게 열심히 살았나 싶다. 10년이나 학교에 다닌 그 선생이나 다른 생각 하나 없이 기계적으로 살았던 나나 다른 방향에서 참 웃긴 사람들이다.

 

 가져온 짐은 정말 옷 몇 벌과 돈이 전부였다. 패키지 여행자라 쉽게 통과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혼자 왔으면 아마 조금 의심받지 않았을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주로 도망칠 때 돈과 옷 몇 벌만 가지고 튀어 버리지 않는가.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드 없는 인생을 산 것치고는 속으로 꽤 무언가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던 것 같다.

 

 탑승 게이트를 확인하고 한 두 시간 남짓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남은 한국 돈이 없다는 핑계로 면세점 근처에 가보지도 않고 게이트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창밖으로 비행기가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전망이었다. 저 멀리서 파란 깃발의 무리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그 젊은 총각도 있었다.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가는 일행이 있어 보였다. 그 사람과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살풋 웃으며 일행과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뭔가... 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쳇.

 

"몇 시 비행기세요?"

 

 불쑥 들어온 질문에 조금, 아니 좀 많이 당황했지만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잠복 경찰인가. 아까 그 검색대에서 나를 의심하고 설마? 쓸데없는 망상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낭만이 좀 과했나보다. 대답하고 보니 아까 그 젊은 총각이었다. 느끼한 선글라스를 쓴, 올블랙의, 좀... 잘생긴 것도 같은.

 

"열한 시 반이요."

"오, 그럼 저랑 같은 비행기겠네요."

"아, 네..."

 

당황스러웠다. 상대보다는 내가 문제였다. 쓰잘데없는 내향성이 어김없이 도졌다.

 

"WM투어 레드팀 맞죠? 전 블루팀인데."

"그러시구나."

"아마 코스가 많이 겹칠 거예요."

"아…”

"자주 봬요."

 

 세미 삭제라더니 다른 사람 되기는 진즉에 그른 것 같다. 친근하게 걸어오는 한마디 대꾸도 제대로 못 해준 것이 마음에 괜히 걸렸다. 자주 보자는 말도. 다음에 정말 만나게 된다면 먼저 말 걸어야지 했다. 그냥, 다음에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

 

 돈 주고 가는 패키지여행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안전한 도피를 꿈꿨을지도 모른다. 도피라고 하기가 무색할 정도로 익숙한 공간으로 떠났다. 책이었으면 이미 닳고 닳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자주 가는 장소다. 아니 또 자주 갔다고 하기가 무색하게 일 년에 한 번 가는 곳이다. 7월 말 즈음이 되면 때맞춰 과도기가 찾아왔다. 매년 도피하듯 한국을 떴다. 목적지는 항상 같지만 그것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질려버린 익숙함을 떠나 찾아온 새로운 익숙함이랄까. 뭐, 비슷하진 않지만 아마, 제2의 고향 같은 것일 거다.

 

 언제 떠날지 몰라 미리 싸놓았던 캐리어를 들고 공항으로 나섰다. 언제 떠날지 몰라 대기하고 있는 내 캐리어는 매년 같은 곳으로 간다. 나에게 두 번은 없을 낭만을 선사해준 나라로, 그때와 같은 날 떠나 같은 날 돌아온다. 좀처럼 마르지 않는 설렘을 가득 안고 떠나 미련없이 훌훌 털고 온다. 그래야 내년에 또 찾아올 수 있으니까.

 

 이 패키지는 실은 내가 기획한 것이다. 내가 떠나고 싶어서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나와 같은 설렘과 두근거림을 보여주고 싶어서. 난 이곳에 갔을 때 이랬는데 당신들은 어떠신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와 토시 하나까지 같은 스케쥴을 가진 것은 블루코스, 축소판은 레드코스로 나눠 마케팅을 했다. 직접 참가하고 싶은 마음에 답사는 일부러 직원들을 보냈다. 팀원들과 현지 가이드들에게 생각 외로 좋은 반응이 나와 쉽게 런칭할 수 있었다. 아마 일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공항에 도착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옆에서 하는 대화를 열심히 주워들었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 비만 안 오기를••• 하는 등의 반응들. 레드코스의 반응도 살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저 멀리 레드코스에 앳된 얼굴이 혼자 무상하게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앳된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그때의 내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행에 대한 기대보다 다른 무언가에 대한 갈망, 아직 남아있는 회의감 같은 복합적인 무언가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네 감정이 무엇인지 알아 하고 아는 척하고 싶어졌다. 스스로가 너무 꼰대 같아 포기하려 했는데 이미 그 애의 앞이었다.

 

"몇 시 비행기세요?"

 

 너무 어색한가. 느끼한가. 이상한 플러팅 같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무래도 너무 느끼했던 것 같다. 비행기 안에서 몇 년 치 이불킥감이 될 것을 예상했다. 화장실을 갔다 오면서 보이는 작은 통수가 반갑고 귀여웠다. 짧은 비행에 그새 잠이 든 그 아이의 사연이 궁금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고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이다. 이튿날까지의 코스는 거의 일치하니까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다음에 만났을 땐 좀... 덜 느끼해야 할 텐데.

 

-

 

 도착하고 나니 후회가 몰려왔다. 공항의 게이트를 나서자마자 훅 끼치는 습기에 절로 몸서리쳤다. 여름이랑 친해지기는 개뿔 별다른 이유가 있겠나 싸고 가까워서 예약했다. 열기가 온몸을 압박하는 듯했다. 숨이 턱턱 막히고 답답했다. 더운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체로라도 다니고 싶은 심경이었다. 다 필요 없고 일단 숙소에 너무 가고 싶었다.

 

"숙소로 먼저 이동해서 짐 풀고 다시 만나실게요~!"

 

'감사합니다. 알고 있는 스케쥴이었지만 고맙습니다.'

 

 자주 보자던 파란 깃발은 공항에서 나오자마자 버스를 타고 홀랑 사라져버렸다. 뭔 차이일까. 알 바 아니고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셔틀버스 안에 있는 에어컨을 모두 내 방향으로 맞춰놓고 가고 싶었지만 하나로도 충분했다. 바깥의 공기에 비하면 정말 천상의 것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방키를 받고 구경할 새도 없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부터 했다. 머리 위에 때리듯이 떨어지는 찬물에 들끓던 속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걱정 반 기대 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더위나 먹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 흔한 손풍기 하나 안 챙기고 달랑 몸만 오는 바람에 정신줄은 이미 한 발 내 몸에서 물러나 있었다. 하필 따라다닐 깃발도 빨간색이다. 더워.

 

 씻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화장실 안이 침대에서 보였다. 아니 뭔 호텔 화장실이 이래. 괜스레 얼굴이 더워지는 것만 같아 에어컨 온도를 낮췄다. 아까 그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멘트 느끼한 거 빼면 얼굴은 진짜 잘생겼던데. 다음에 만나면 뭐라고 인사하지.

 

"혼자 오신 거예요? ...미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하."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비웃었다. 온갖 버터 바른 멘트는 내가 다하게 생겼잖아. 하다 하다 친구 사귀는 방법도 까먹었나보다.

 

 첫 코스부터 블루팀과 일정이 겹쳤다. 그 사람을 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여행도 여행인데 그 사람이 더 눈에 들어왔다. 저 올블랙의 사람은 이미 이 여행의 목표가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게 이유였나보다. 하나 장애물이 있다면 그 사람과 다른 팀인 거. 레드팀에도 또래가 다수 있었지만 굳이 저 사람인 건 먼저 말을 걸어줬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곧 죽어도 먼저 말은 못 걸 것 같았다.

 

 생각보다 바쁜 일정에 잦은 눈인사만 오갔다. 저녁 시간 식당에서야 겨우 말을 틀 수 있었다. 다짐이 무색해지게 그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오늘 어땠어요?"

"덥고... 좋았어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에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뭐가 웃긴지 그 사람은 내 얼굴만 보면 웃는다. 내가 웃긴가. 아,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차은우예요."

"전 문빈이에요."

"이름도 귀엽네."

 

이름을 듣고 또 웃는다. 멘트도... 진짜 안 어울리게 느끼하다니까. 한 번 멋쩍게 웃고 먹던 국물을 들이켰다. 잊고 있던 김치가 그리워졌다.

 

"저녁 시간 끝나고 뭐하실 거예요?"

"걍.. 방에 있지 않을까요."

"할 거 없으면 나랑 같이 나갈래요?"

 

 할 거 없으면-. 할 거 없다는 말이 듣기 좋았다. 아니, 행복했는지도 모른다. 할 게 없어서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뭘 입고 나갈까 한참을 생각했다. 가져온 게 옷밖에 없는데 입고 나갈 옷이 없었다. 갈아입고 나가면 좀... 작위적인가. 다시 나갈 건데 샤워한 것도 좀 웃기고. 왜 이러지. 나 그새 좀 바뀌었나. 은우 씨랑 많이 친해지고 싶었던 것으로 결론 내렸다. 누구누구 씨라는 호칭도 왜 이리 어색한지.

 

 은우를 기다리면서 일정에 바빠 하지 못했던 호텔 로비를 찬찬히 둘러봤다. 시작한 지 아직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이 여행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밝은 이곳이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은... 내 집인 것처럼 굴어야지.

 

 엘리베이터 앞에서부터 걸어오는 은우가 보여 손을 흔들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너무 친한 척했나 싶어 후회했다. 만난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사람을 의심도 않고 반가워하는 건 무슨 마음인지 궁금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근데 우리 어디 가요?"

 

"그냥… 호텔 산책...?"

 

 호텔 근처에 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기로 했다. 시장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소음과 불빛을 가졌었다. 우리는 음료 하나 사 들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별말 없이 걷기만 했는데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았던 것 같다. 신기한 사람이다. 원래 같았으면 어색해 몸이 베베 꽈졌을텐데.

 

"나도 빈이 씨만 할 때 여기 처음 왔어요. 오늘... 이제 7번째인가."

"응? ...에? 거짓말.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진짜예요. 민증 보여줄까?"

"함 까봐요."

"참나. 여기."

"...진짜네."

"그럼 빈이 씨 나이도 맞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그 정도?"

"아마… 네."

 

 떨떠름했다. 얼굴 보고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다.

 

"그때 날 보는 것 같아서, 동생 같아서 친한 척 좀 했어요. 괜찮죠?"

 

우리는 생각보다 더 가까워졌다. 난 은우를 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은우 형은 나를 빈으로 부르게 될 만큼, 꽤 많이 친해진 것 같았다. 착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래 타지에서 만난 동포에게 더 쉽게 정을 주게 되지 않나. 두 번째 날에도 블루팀과 코스가 많이 겹쳐서인지 형은 몇 번 팀을 이탈해 나와 함께 다녔다. 투닥투닥 장난을 치면서 친구처럼. 아니지 이미 유일한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형 이래도 되는 거에요? 가이드님 불쌍..."

"왜 스릴있고 재밌잖아." 

"난 몰라요. 모르는 일이야."

 

-

 

 모르는 일이라며 먼저 횅 가버리는 통수가 또 그렇게 귀여웠다. 이튿날 일정이 끝나기 전 블루팀과 레드팀 가이드에게 부탁을 했다.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여행자 고객 한 분 일정을 레드에서 블루로 바꿀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가이드들은 고민하는 듯싶더니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수락했다. 레드팀 가이드는 조금 좋아하는 눈치였다. 데리고 다닐 사람 하나 줄었으니 아주 조금은 가벼워졌겠지. 빈과 내 방을 빼고 침대 두 개짜리 방으로 옮겼다. 호텔은 남는 방이 있다며 업그레이드를 해주었다. 뭔가 이번 여행에 있어서 운이 많이 통하는 듯했다.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요?"

 

 보여주고 싶었다. 나는 너와 같은 시절에 여기서 이랬노라 하고.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줄은. 그때 이후로 내 여름은 항상 혼자였는데.

 

 넌 참 특별하다 생각했다.

 

"네가 특별해서."

"날 언제 봤다고."

"그러게."

"형은 여기가 그렇게 좋아요? 일곱 번이나 올 정도면 안 가본 데가 없겠다."

"안 가본데 많아. 같은데 또 가고 또 가고."

"왜요?"

 

어쩌다 여길 처음 왔는지, 어쩌다 그 사람을 만났는지, 그 사람과 어땠는지, 왜 여기에 매년 오는지 속속들이 말해주었다. 왜냐며 묻는 것도, 그것에 답하는 것도 네가 처음이었다.

 

"웃기지. 사람 하나 못 잊어서 매번 오는 거.”

"... 부러워요. 형도, 그분도."

 

지긋이 맞춰오는 눈을 부러 피하지는 않았다. 머쓱해진 빈이 엉거주춤 시선을 거두기 전까지.

 

"그냥, 그렇잖아요. 누군가를 잊지 않는 사람이나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사람, 둘 다 멋있잖아요. 영화 같고.

"..."

"그 사람 만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게..."

 

 매번 여기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고민했다. 당신을 만나면 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당신을 잊어본 적 없다며 반겨야 할지, 추억으로 묻은 채 외면해야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정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점점 답이 생겨가는 것 같았다. 당신의 뒷모습, 당신의 그림자 정도만 저 멀리서 바라보기로 했다. 그저 당신에 대한 생각일지라도 난 그 앞에서 한없이 어려진다.

 

“그럼 나 때문에 일정 틀어지는 거 아니에요?"

"전혀."

"되게 아닌 척 계획적이네요."

"칭찬이지?"

"당연하죠."

 

 어쩌면 내년부턴 이곳에 오는 이유가 변할 것만 같았다. 빈이와 나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주일을 보냈다. 이곳에서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도 그때 이후 처음이었고 모든 게 새로워진 여행이었다. 내가 매년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이 패키지를 기획하지 않았다면, 내가 여기에 돈 주고 오지 않았다면... 우연에 우연이 겹쳐 만난 인연인 빈이었다. 빈은 생각보다 더 깊이 내 안에서 소중해져 있었다.

 

 일주일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었다. 물기 어린 창가 넘어 비친 야경은 더욱 선명한 빛을 띠었다.

 

"여기 미니바 무료야."

"그걸 왜 지금 말해요!"

"안 알아보고 온 네 탓은 안 해?"

"아... 하하... 형은 뭐 마실래요?"

"아무거나."

"받아요."

"그걸 던지게?!"

"직접 고르지 않은 형 탓은 안 하는 건가?"

 

 에어컨의 선선한 바람과 캔맥주는 언제나 옳았다. 룸서비스로 시켜놓은 안주는 아껴 먹어서 좀 불어 터지고 식어야 제맛이고. 룸서비스로 맥주 몇 캔을 더 시키고 빈이 기념품으로 산 고량주까지 깠다. 몇 잔 마시다 보니 얼굴이 뜨거워진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술기운이었다. 

 

"널 보고 있으면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노래를 듣는 것 같아.

"..."

"그런데 노래는 처음과 끝이 확실하잖아."

"내 끝을 본 것처럼 말하네요."

"음... 이 여행은 언젠가 끝날 거고 그럼 이 관계도 끝나겠지. 너라는 노래도 끝날테고."

 

방금 진짜 느끼했다. 술김에, 못하는 말이 없다.

 

“... 끝... 안 내면 되잖아요. 난 노래가 아니니까."

 

꽤나 진지하게 받아치는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넌 참 알면 알수록 새롭다.

 

"나는 내일 가."

"왜요?"

"항상 그랬으니까?"

"나랑 더 있어요."

 

어쩌면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던 것일 지도 모른다. 이 여행의 처음과 끝을 다시 정의하기로.

 

"그래."

 

내 대답을 듣고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네가 얼마나 귀여웠는지, 넌 모를 거다.

 

지금 이 감정이 착각일지라도 나에게는 사랑이었음을. 난 또 기약 없이 기억하겠지.

 

 

 

 

 

-

 

 

 

 

 

습습한 여름이 끝날쯤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의 복귀였지만 조금은 달라진 것 같았다. 과제와 알바에 얽매이고 있지도 않고 있고, 은우 형도 생겼고, 무엇보다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이 좋았다.  여행 때 가져갈까 고민했던 비상금을 급한 대로 월세로 내버렸다.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비상금이지.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정말 그곳에서 다 쓰고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 미니바가 유료만 아니었어도... 며칠은 더... 할많하않... 은우 형에게 말해볼까 싶었지만 또 다 퍼줄 듯이 앞장서서 해결하려 할까봐 월세 밀릴 뻔한 이야기는 혼자만 알고 있기로 했다. 오늘 알바가 끝나면 형네에서 만나기로 했다. 한국에 와서 몇 번 같이 간 술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형은 항상 같은 곳, 같은 그 자리에서 날 기다린다. 언제 가도 항상, 반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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