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2019 여름호
작성자
딸기우유
작성일
2020-11-11 11:39
조회
3

열대야

W. 딸기우유




삐걱이는 문을 열고 텅 빈 교실에 들어선 은우가 품에 가득 안고 있던 종이 뭉치를 교탁에 내려놓았다. 뭐 이렇게 시킬 일이 많은 지 담임은 방과 후에도 종종 잡다한 일을 부탁하곤 했다. 반장이 호구라도 되는 줄 아나. 부탁이라기 보다는 떠넘김에 가까웠지만 맡긴 일은 뚝딱 해내는 바르고 성실한,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한 반장을 자처한 자신의 업보겠거니 했다.

38도를 육박하는 7월말의 날씨는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 은우의 땀샘을 자극하기에도 충분했다. 구렛나루를 타고 떨어지는 땀을 쓱 닦아내고 하루 종일 갑갑하게 잠겨 있던 목부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이제야 좀 트이는 숨통에 교탁에 손을 짚고 한숨 돌리고 있으니 교실 밖에서 출발을 알리는 신호총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보니 날도 더운데 얘는 괜찮으려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우는 운동장을 내려다보기 위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운동장에는 열기 가득한 빨간 트랙위를 빠르게 내달리는 빈이 보였다. 하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운동장 전체를 쉬지도 않고 도는 빈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저러다 쓰러지는 거 아니야. 더위를 많이 타지 않는 은우도 이런 날씨에 운동은 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저보다 더위를 곱절로 타는 빈은 오죽할까 했지만 빈은 지치지도 않는지 훈련시간만 되면 날아다녔다. 수업시간에는 선풍기가 돌아가는 교실안에서도 좀비 마냥 잠만 자던 빈이 생기를 찾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한참이나 훈련을 받는 빈을 구경하다 시간이 꽤 지난 듯해 손목에 걸쳐진 시계를 들여다봤다. 6시 16분. 빈의 훈련이 끝나는 7시까지는 아직도 사십분이 넘게 남았다. 다른 친구들이 모두 하교하고 혼자 해가 질 즈음 아무도 없는 길거리를 지나 집에 돌아가야 하는 것은 괜히 좀 서글플 때가 있었다. 혼자라서 외로웠던 건 아닌데, 그 시간대 쯤의 저녁노을은 사람을 괜히 울적하게 했다. 그래서 빈이 육상부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했을 때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내심 반가웠었다. 담임이 시킨 일이 늦게 끝나 시간이 애매하다는 핑계로 빈을 기다린게 한 번, 두 번. 어느 순간부터는 빈도 훈련이 일찍 끝나는 날이면 빈교실에서 은우를 기다렸다. 그렇게 먼저 끝난 사람이 다른 쪽을 기다리는게 자연스러워지고 은우와 빈은 거의 매일의 하교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평소 같았으면 훈련을 마친 빈이 교실문을 열고 저를 찾을 때까지 책을 펴 공부를 했겠지만 오늘은 빈을 지켜보기로 했다. 구기종목을 좋아하는 은우와 달리 빈은 유독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가끔, 남들보다 몇 발치씩 앞서 달리는 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뭘 향해 저렇게 달리는 걸까 싶었다. 빈의 달리기는 빈을 닮았다. 순수하고 맹목적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달리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생각? 글쎄. 생각하면서 달리기엔 너무 짧은 시간 아닌가.. 아무 생각 안 하는 거 같은데.

그럼 왜 육상을 하기로 했어?

아, 그게 좋은걸지도 모르겠네. 달리는 중에는 아무 생각 안 할 수 있는 거. 구기 종목만 해도 경기 중에 팀 전략에서 자기 포지션에 대한 생각을 계속해야 되잖아. 생각하는 거 머리 아파. 너는 머리 좋으니까 공에도 소질 있나보네. 뭐 머리만 좋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고 보면 너도 참 사기야 —


참 문빈스러운 답변이라고 생각했다.






2층에서 내려다보는 빈은 꽤 멀었고, 생각보단 가까웠다. 자신이 느끼는 자신과 빈의 거리 같았다. 남들이 들으면 뭔 소리냐고 할 만했지만 이것보다 자신과 빈의 관계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등교할 때, 밥 먹을 때, 매점 갈 때나 이동수업을 갈 때도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의 관계를 유지했다. 친하다고 해서 여느 남자애들처럼 욕을 툭툭 내뱉거나 서로의 바운더리를 침범하는 행위는 두 사람 중 누구도 먼저 하지 않고 선을 지켰다.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그렇기에 둘만 아는 긴장감이 존재했다. 은우도, 빈도 남들보다 가까운 서로의 관계에 있어 조심스러웠다. 둘의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섬세했다. 빈은 몰라도 은우는 그랬다. 빈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빈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냥 이대로가 가장 좋았다. 해질녘 빈교실에서 트랙위를 달리는 문빈을 볼 수 있는 이 정도의 거리가 평화롭고 만족스러웠다. 더 욕심 낸 적은 없었다.


"차은우, 가자. "


시침이 7시 20분을 가리키자 어김없이 은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을 깨는 소리에 넋 놓고 빈과 저의 관계에 대해 정의 내리던 생각이 머리속으로 흩어졌다. 곧이어 뒷문을 열고 교실에 들어선 빈이 문을 다시 닫고 자물쇠를 채웠다.


"뭐야? 오늘은 공부 안하고 있었네. 웬일이야 니가?"

"그냥. 오늘은 손에 안 잡혀서."

"너도 그런 날이 있어?"

"너는 내가 공부하는 기곈줄 아냐."

"맞잖아. 차파고."


자신이 싫어하는 별명을 부르며 개구지게 웃는 빈에 헛웃음이 입술사이를 삐져나왔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에 고인 눈물을 닦으면서 앞문을 통해 복도로 향하는 빈을 따라 은우도 교실을 나섰다. 앞 문을 잠그던 은우에게 빈이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내기를 걸어왔다.


"아이스크림 콜?"

"그래."

"내기하자. 진 사람이 쏘는 거."

"무슨 내기?"

"정문까지 먼저 도착하기."


말을 끝냄과 동시에 빈이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를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와서 또 뛰고 싶을까 생각하며 가방 끈을 고쳐 멘 은우가 빈을 뒤쫓았다. 같이 가! 은우의 외침이 빈 복도를 가득 메웠다.


"치사하게 먼저 가는 게 어딨어."

"심판이 신호총 카운트 세고 쏘는 거 봤어?"


정문 앞에서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빈에게 은우가 숨을 고르며 투덜대니 얄밉지만 반박 못할 대답이 돌아왔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나란히 정문을 지나 내리막길을 걷다보면 금세 슈퍼가 보였다. 작은 슈퍼 앞, 경사가 가파른 돌계단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려간 빈이 중간 쯤에 멈춰 가방을 내려놓고 앉아 밉지 않게 약을 올렸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 다녀와, 반장.”


손을 흔드는 빈을 뒤로하고 슈퍼로 들어간 은우가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섰다. 문틈에 꽤나 두껍게 서린 얼음 탓에 힘을 주어 문을 여니 아이스크림들 위로 후두둑 떨어지는 얼음소리와 함께 시원한 기운이 몰려왔다. 뒤죽박죽 섞여 있는 아이스크림들 사이를 뒤져 익숙하게 캔디바 하나와 붕어싸만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은우가 아이스크림이 녹을세라,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는 빈에게 캔디바를 건넸다. 빈 역시 익숙하다는 듯 받아 들고 껍질을 까 입에 물었다. 둘이 먹는 아이스크림은 항상 변함이 없었다.


너는 왜 맨날 캔디바만 먹어? 그거 우리 아빠만 먹는 건데.

이게 우유맛 많이 나서 좋아. 그러는 지는 붕어싸만코만 먹으면서. 완전 아재템.

니가 팥을 안 좋아해서 그래.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 받는 동안에도 더운 날씨에 맥을 못추린 아이스크림이 빈의 손을 타고 계속 녹아내렸다. 빈의 엄지와 검지 사이를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에 은우는 괜히 침을 한번 삼겼냈다. 녹아내리는 하얀 액체가 꼭 달리기 후의 말간 빈 같았다. 아이스크림이 범벅 되어있는 제 검지 손가락을 빈이 쪽 빨았다. 그 순간 빈에게 닿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은우의 머리속에는 주의보가 울렸다. 가만히 보고 있다가는 어찌 될지 모르겠어서 급하게 눈을 돌렸다. 괜히 발치의 작은 돌멩이를 괴롭히는데 빈이 이내 엉덩이르 툭툭 털고 일어났다.


"집 가서 손 닦아야겠네. 가자, 이제."

"빈아, 잠깐만."


은우가 빈을 부르자 앞서 내려가려던 빈이 은우를 돌아봤다.


"왜?"

"가위바위보로 내려가기 하자."

"뭐야… 애냐?"

"아까 너가 하자는 내기 했으니까 이번엔 내가 하자는 거 해."


이대로 집에 가기는 아쉬웠다.


"너 가위바위보 못 하잖아."

"오늘은 잘 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빨리"

"아잇… 알았어."




가위바위보! 에이 졌네. 마지막으로 비장하게 냈던 주먹을 아쉽게 보던 빈이 남은 계단을 빠르게 내려왔다.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다 자그마한 돌부리에 걸린 빈의 몸이 은우쪽으로 기울었다. 갑작스레 빈을 품에 안은 모양새가 된 은우가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해 잡은 손을 놓는 것도 잊은 채 얼었다. 훅 끼쳐오는 빈의 땀내음이 섞인 체향과 캔디바의 약한 단내가 머리를 어지럽혀 아무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괜찮은데… 놔 줘."

"아, 어... 조심해…"

"으응.."


얼마나 이 상태로 얼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은우는 그 잠깐이 한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빈의 말에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손목과 허리를 놔준 은우의 머리속은 이제 경보가 발령됐다.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둘 사이에 다시 긴장감이 찾아왔다. 빈의 손목을 잡았던 손바닥은 빈의 체온이 그대로 옮겨진 듯 뜨거웠고 빈의 손에 묻어 있던 아이스크림의 끈적함이 손에 남아 기분이 이상했다. 긴장감으로 이어진 침묵에 은우는 괜히 끈적이는 손바닥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추스리고 조금 걸었을까. 목을 가다듬은 빈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그래서 무슨 내기였는데?"

"어, 어?"

"가위바위보 말이야. 니가 이겼잖아. 무슨 소원이었냐구."


생각지도 못했다. 내기가 목적이 아니라, 빈과 조금 더 있고 싶어서 집 가는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없을까 하는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제안한 거였다. 가위바위보를 어지간히 못하는 자신을 알기에 특별히 소원을 생각해 놓지 않았다. 대부분 내기의 소원은 빈의 몫이었으니까.


"아.. 글쎄. 나중에 써도 돼?"

"뭐야. 생각도 안하고 내기하자고 한 거야? 너 달리기 진 거 억울해서 뭐라도 이겨볼려고 그런거지? 여튼 승부욕은 알아줘야돼, 차은우. 안 그런 것 같으면서 은근 지는 거 못 참는다니까."


그저 소원을 바라고 한 내기가 아니어서 미룬 것뿐이었는데 빈은 은우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남들은 은우가 타고나길 잘나서, 공부도, 운동도, 친구관계 뭐하나 놓치는 게 없는 거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빈은 웃는 얼굴 뒤에 지기 싫어하는 노력형 천재 차은우의 모습을 알았기 때문에 이것마저 그 욕심의 일부라고 생각한 듯했다. 빈은 은우에 대해 남보다 많은 걸 알았지만 그건 몰랐다. 그 승부욕의 범주에서 문빈은 제외라는 것. 너한테는 몇 번을 져도 괜찮다고. 그게 너라서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마저도 네가 말하면 그게 맞는 거지. 네가 그렇다는데, 그럼 그런거겠지 하고 수긍했다.






***






"하... 미쳤지 차은우."

속옷이 축축했다. 이제 갓 성에 눈 뜬 중학생도 아니고 쪽팔리게 웬 몽정인가 싶었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 대상이 빈이라는 거였다. 낮에 빈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던 아이스크림과 빈이 넘어졌을 때 닿았던 화끈거림이 분명 자극적이긴 했지만, 이렇게 꿈에 나올 정도로 무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을 줄은 몰랐다. 아님 답도 없는 욕구불만이던가. 혼란스러웠다.






빈을 상대로 이상한 꿈을 꾼 탓에 학교에서도 빈의 눈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빈의 해맑은 눈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빈을 상대로 못할 짓을 한 것만 같았다. 자의는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렇다고 타의도 아니었기 때문에 탓할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다. 결국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빈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이건 너무 심했나 싶을 정도로 눈에 띄게 피해 다녔으니 주변 사람은 말 할 것도 없고 눈치제로인 빈도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빈이 틈을 타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바쁜 척 자리를 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붙어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모조리 붙어다니던 학교안에서의 일상은 물론, 매일 함께 하던 하교길 또한 함께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빈은 보고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빈의 눈을 마주보기는 어려워졌지만 오히려 빈을 보고싶은 마음은 점점 깊어져 갔다. 그래서 빈이 곯아 떨어지는 수업시간이나 빈의 훈련시간처럼 빈은 은우를 볼 수 없지만 은우는 빈을 볼 수 있는 시간에는 놓치지 않고 빈을 훔쳐봤다. 훔쳐봤다고 하니 더욱 죄 지은사람 같았지만 훔쳐봤다는 말 밖에는 자신이 지금 빈을 대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자신은 빈을 대상으로 시커먼 속내를 품었는데 빈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순수한 빛으로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다고 했던가. 여전히 빈과 마주보고 밥을 먹지 못할 것 같아 담임의 심부름을 다 끝내고 느즈막히 급식실에 내려가 혼자 밥을 먹었다. 손은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지만 눈은 음식을 보지 않고 빈을 좇았다. 밥을 다 먹고 잔반을 버린 빈이 물 한잔을 마시다 말고 급식실을 두리번거렸다. 그 때 눈치채고 빠르게 눈을 돌렸어야 했는데. 저를 찾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은우가 그제야 눈길도 안 주던 젓가락 사이에 끼어 있는 음식을 보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은 상태였다. 빈과 눈이 마주친 은우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흔들렸다. 빈은 은우와 눈이 마주치자 마자 잘 걸렸다 싶은 눈으로 은우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야, 차은우! "


결국 꼬리를 밟혔다. 속으로는 망했다고 생각했지만 빈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불렀어?"

"그럼 여기 차은우가 너 말고 또 있어? 너 요즘 이상하다? 왜 자꾸 나 피해?"

"내가 뭘 피했다고 그래..."

"훈련 끝나고 같이 갈 줄 알았더니 집에도 홀랑 먼저 가버리고."

"아.. 그건..!"


핑계거리가 없었다. 그 똑똑한 전교 1등 차은우는 어디 가고 이상하게 빈 앞에만 서면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지진이 난 눈동자로 머리를 굴리는 동안 누군가 멀리서 빈을 불렀다. 문빈! 코치님이 너 오래! 곤란한 은우를 구제해줄 호출이었다. 빈이 자신의 이름이 들린 쪽을 흘끔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발을 떼면서 급식실이 떠나가라 외쳤다.


"아잇… 암튼 너 오늘은 먼저 가지 말고 꼭 기다려! 알겠지? 아이스크림 사줄게!! 먼저가면 안된다!!!"






***






어느덧 파란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들었다. 해가 져도 무더위는 사라질 줄 몰랐다. 이제 우리나라도 열대야라더니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싶었다. 옆에 어김없이 캔디바를 물고 있는 빈의 얼굴을 조심스레 쳐다봤다. 죄책감으로 가득 차 이 눈을 마주하는게 너무 괴로웠지만, 역시 빈과 함께 하지 못했던 그 며칠의 순간이 곱절로 괴로웠다는 걸 깨달았다.





"오늘은 왜 캔디바래? 붕싸가 캔디바보다 비싸긴 하지만 내가 그것도 못 사줄 정돈 아닌데"

"알아. 그냥 너가 하도 이것만 먹으니까 무슨 맛인가 궁금해서."

"싱겁긴... 자. 이제 말해봐. 그 동안 나 왜 피했는지."

"... 피한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내 눈이나 제대로 보고 거짓말하던가. 됐어. 말하기 싫음 말아."


그 말과 동시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빈의 올 곧은 눈동자가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뭔가를 알지만 먼저 말하기 전에는 굳이 캐내지 않겠다는 눈빛이 다시금 적당한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문득 경계선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밀어내지는 자신과 빈이 거리가 약간은 원망스러워졌다. 빈은 그런 은우를 눈치 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갔다.


"경기 날짜 잡혔어. 8월 29일. 그거 때문에 나 당분간 학교에서 합숙하면서 집중 훈련 들어가. 그래서 경기 끝날 때까지 집에 같이 못 갈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니가 자꾸 나 피해서 말을 못했잖아. 그 전까지만이라도 같이 놀고 싶었는데 이제 당장 합숙 내일부터라 오늘도 말 못했으면 너 아예 알지도 못 했을거 아니야."

"미안.."

"말했으니 됐어. 나 없다고 혼자 친구없는 애처럼 다니지 말고."

"내가 친구도 하나 없을까봐… 그래도 학교에서는 같이 다닐 수 있는거잖아."

"참나. 피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예전만큼 못 붙어 지낼거야, 아마."

"그렇구나. 알겠어. 훈련 잘 받고."

"경기... 와 줄 거지? 엄마 다음으로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한 건데...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와 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갈 거였다. 네 첫 경긴데 어떻게 안가. 가장 빛나는 순간의 너를 내가 왜 놓쳐. 분명히 많은 사람들의 환호속에서 누구보다 먼저 결승선을 지나겠지. 가장 빛나는 순간을 함께 해달라고 말하는 그 예쁜 입술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참을 수 없어졌다.


"빈아, 나 그때 안 쓴 소원 지금 쓸게."

"소원? 아.. 그 가위바위보? 지금? 뭐야 뜬금없이. 묻는 말에 대답은 안하고... "

"들어줄거야?"

"참나... 그거야 무슨 소원이냐에 따라 다르지."

"그냥 들어주라."

"뭐..? 야—"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물려던 빈의 손목을 약하게 잡고 저지해 빈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은우의 입술사이로 빈의 말이 먹혀 들었다.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이 빈의 손을 지나 은우의 손에 까지 흘러 내렸다. 잠깐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이 달았다. 꿈에서 맛 본 그 맛이었다. 캔디바가 단건지, 빈의 입술이 단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자신의 입속에서 나는 맛과 같은 맛이 빈의 입술에서도 났다. 몰아치는 단내에 머리가 아팠다.


"좋아해. 좋아해, 빈아."


참지 못하고 쏟아지듯 입 밖을 새어 나오는 마음이 속절없이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 같았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왜 피했냐 묻는다면, 이게 그에 대한 답이었다. 주먹으로 한 대 맞아도 싸다는 생각으로 일단 저질렀는데 입술을 떼고 일분이 지나도, 오분이 지나도 뺨으로 주먹이 날아오진 않았다. 오히려 줄곧 망설임이 없던 빈의 올곧은 시선이 약간 흐뜨러졌다. 할 말을 잃은 건지, 적당한 대답을 찾는지 망설이는 빈의 귀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가만히 빈의 대답을 기다리던 은우에게 빈이 다시 눈을 맞춰왔다.


"... 경기 보러 와. 그 때 내 답 줄게."


무더운 여름 핑크빛 저녁 하늘에 희미하게 떠오른 달이 찬란하게 푸르렀다.

못해도 이 여름은, 이 여름만큼은 서로가 함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 들었다.











epilogue




와아아아아--

작렬하는 태양이 뜨거웠다. 청소년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경기라 그런지 생각보다 많은 관중이 자리를 채웠다. 4번 트랙의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약간은 긴장된 모습의 빈이 보였다. 빈 못지 않게 긴장한 은우는 잠시도 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400m, 트랙 단 한 바퀴로 빈의 그간의 노력이 모두 빛을 발할 것이라는 걸 빈도, 은우도 의심치 않았다. 준비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빈이 자세를 고쳤고 곧이어 출발을 알리는 신호총 소리가 들리자 트랙위를 내달리는 선수들에게로 관중들의 응원과 함성이 쏟아졌다. 항상 그렇듯 누구보다 빠르게 신호 소리에 반응한 빈은 나머지 선수들을 제치고 선두에 섰다. 반바퀴를 돌아 거의 100m쯤을 남겨두고 2번트랙을 달리던 선수와 빈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은우는 점점 결승선에 가까이 뛰어오는 빈을 따라 관중석 밑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눈은 단 한순간도 떼지 않았다.

관중들의 환호소리와 함께 간발의 차이로 빈이 결승선을 먼저 통과했다. 빈과 함께 한바퀴를 달린 것 마냥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자신을 향해 뛰어드는 코치와 친구들을 제치고 빈이 속도를 줄이며 누군가를 찾는듯 두리번거렸다. 빈을 향해 뛰어 내려온 은우는 자신을 찾던 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대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빈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나는 네가, 너는 내가 서로 이 끝에 서로가 있을 거라는 걸 알았던거야. 달려오는 빈이 아직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눈에 은우를 담고 세상 가장 빛나는 미소로 웃으며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했다. 가깝지 않은 거리에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빈이 하는 말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좋아해. 나도.



fin.


전체 0

전체 11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1
계간은콩 2019 가을호 후기
계간은콩 | 2020.11.12 | 추천 0 | 조회 7
계간은콩 2020.11.12 0 7
2
세이렌의 유혹
| 2020.11.12 | 추천 0 | 조회 3
2020.11.12 0 3
3
Dear my blue
| 2020.11.12 | 추천 0 | 조회 8
2020.11.12 0 8
4
비밀글 결핍(惡意)
떡트리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떡트리 2020.11.12 0 1
5
귓속말
콩떡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4
콩떡이 2020.11.12 0 4
6
연(聯)
익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5
익먕 2020.11.12 0 5
7
비밀글 친구사이 상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8
비밀글 친구사이 하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9
사랑에 빠지다
오각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4
오각형 2020.11.12 0 4
10
비밀글 발자국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2020.11.12 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