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시간

2019 여름호
작성자
온더
작성일
2020-11-11 11:41
조회
3

인과 연을 담은 붉은 빛에 스산한 어둠이 안녕을 고한다. 일광의 찬란했던 빛깔은 어느새 제 자취를 감춘 체 모르는 척 월광에 침묵한다. 하늘의 주인이 바뀌는 시간이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 우리는 이것을 황혼이라 부른다.



     



“어찌하여 이 늦은 시간에 이런 곳에 계십니까.”

“그러는 너는 무슨 일이더냐.”





     

어둠이 내려앉은 밤, 위태로운 월광 아래 펼쳐진 광야에 작은 꽃이 수줍게 고개를 내민다. 잠이 오지 않아 나왔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빈의 머리칼이 달빛에 비쳐 반짝인다. 은우님은 무슨 연유로 이런 곳까지 오셨습니까. 나잇대가 비슷함에도 먼저 화랑에 오른 은우에 빈이 예를 갖추어 대답하자 은우가 살풋 미소 짓는다.







“확인을 좀 하러 왔다.”

“무엇을 말입니까?”







은우가 손짓으로 발아래 쪽을 가리키자 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한다. 그것은 물망초가 아닙니까. 작게 핀 푸른 꽃에 빈이 의아하며 대답한다. 이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확인을 하러 왔다. 그에 빈이 은우를 바라보며 묻는다. 은우님께서 기르신 것입니까. 어느새 꽃 앞에 앉아 신기한지 가까이하는 빈을 보며 은우가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그냥 좋아해서 보러왔다. 그런 은우에 빈이 손을 뻗어 꽃잎을 매만진다.







“참 어여쁜 꽃입니다.”







달빛을 받으며 작게 미소 짓는 빈의 행동 하나하나가 꽃과 어우러져 정경(情景)을 이룬다. 그에 은우가 아무것도,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멀뚱히 서서 빈을 지켜본다. 은우가 대답이 없자 고개를 돌린 빈에 둘의 시선이 교차한다. 마주친 눈동자에 선명하게 새겨진 제 모습에 은우가 급히 고개를 돌린다. 귀에 이명이 고동칠 정도로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치 요동친다. 그러한 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빈이 다시 시선을 꽃으로 향한다.







“예쁘지 않습니까.”







달과 하나라도 된 양 절경을 이루는 빈의 모습을 은우가 자신도 모르게 넋이 나간 체 바라보다 이내 작게 읊조린다. 







“그러게.”



“예쁘구나.”







주인을 찾지 못한 말이 공허에 흩어져 사라진다. 제 짝에 닿지 못한 소리가 어둠에 침식한다. 월 하의 밤이 유독 안쓰러운 날이다.







“화랑도는 어때, 잘 지낼만하더냐”

“한낱 낭도가 무엇을 가늠하겠습니까. 사군이충(事君以忠)으로써 나라의 덕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뿐입니다.”

“당대 최고 무도를 하는 이치고 겸손한 말을 하는구나.”







저를 높이 하는 말이 익숙지 않은지 발개진 얼굴이 부끄러워 빈이 고개를 숙인다. 내일은 무예 대회가 있는 날이구나.







“기대해도 되겠느냐?”







웃으며 말하는 은우를 따라 빈이 살며시 미소 짓는다. 대대로 무술가 집안에서 자란 빈에게 무예란 숨 쉬는 것과 같이 당연한 일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무도인이라는 말에 걸맞은 화려한 춤사위는 이루 말할 것 없을 정도이니, 이러한 그를 칭송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빈을 나비가 나는 것과도 같다 하여 ‘협설(蛺䎈)’ 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저희 문호가 제일임을 보여주고 오겠습니다.”





 

그것참 듣기 좋구나. 당연한 듯 자신 있게 말하는 빈의 눈이 월광을 비추며 잠시 금빛으로 반짝이는듯하였나, 그의 요연한 자태에 은우의 시선이 빈에게서 떼어나지 못하고 한동안 머물렀다.







“그나저나 이 꽃에는 그 흔한 나비 하나도 날아들지 않는구나.”

“밤이라 그런 것이지 않겠습니까. 이미 왔다 떠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비는 한곳에 머물지 않으니 말입니다. 빈이 자리를 털며 일어나 은우를 바라본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만 돌아가는 것을 권하는 빈에 은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미련이 남은 것인지 가는 길에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하는 은우에 빈이 신경 쓰이는지 말을 덧붙인다. 나비가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빈에 은우가 살풋 웃으며 빈을 바라본다. 신경 써주니 고맙구나. 



어느새 거처에 다다르자 어두워진 길가에 하나둘, 미세한 불이 들어온다. 오늘은 잠 못 드는 이가 많은가 보구나. 밤의 세상은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월광에 비춰 고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광경은 아름답다 못해 찬란하다.







“그럼, 내일 미시(未時)에 대회에서 뵙겠습니다.”







그렇게 빈을 먼저 들여보낸 은우가 좀처럼 오지 않는 잠을 청하며 침실에 몸을 뉘었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머리칼을 간질이며 자장가라도 되는 듯 귓가에 귀뚜라미 소리가 규칙적으로 맴돈다. 유난한 날이다. 유난히도 잠에들기 어려운 날이다.









-









대회 날이라 여러 인파가 모여 크고 작은 소음이 공간을 어우른다. 은우가 화랑으로서 심사 석에 앉아 지루한 듯 땅만 바라보고 있으니 옆에 앉은 다른 이가 말을 걸어온다.







“지루한가?”







딱히. 그에 책상에 턱을 괴며 대답한 은우가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빈을 찾는다. 빈을 보기 위해 대회 심사관 자리를 승낙한 거였다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빈은 어찌 된 일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에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은우가 한 시진도 잠을 이루지 못한 어젯밤을 후회하며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다음 순서는 자타 공인 화랑도 최고의 무도인 협설, 문빈. 준비하시오.”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은우가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든다. 그러자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인지 빈과 눈이 마주쳤고, 그런 은우를 보며 빈이 활짝 미소 짓는다.







“글월 문에 빛날 빈, 인사드리겠습니다.”







다음 순서를 알리는 북소리가 널리 울려 퍼지고, 무예 대회 최고의 관심사라 할 수 있는 빈이 소리에 맞추어 무도를 시작한다. 가야금 소리와 북소리에 어우러지는 빈의 움직임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을 정도임이 분명하였고, 모든 이의 넋을 나가게 하듯 그 특유의 오묘함이 분위기를 압도한다. 손끝에서부터 마치 풍향이 이르는듯한 우아한 자태가 호흡을 멈추게 하며 주객을 전도하는 빈에 심사관들은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감히 그 누가 이를 평가한단 말인가. 빈이 손에 든 부채는 이미 빈과 한몸이라도 된 듯 그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더욱 이목을 집중시킨다. 







“과연 협설이라 불릴 만한 춤사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빈 낭도는 그쪽 산하이지 않습니까, 부럽습니다.”







이번 대회 우승은 역시나 빈 낭도겠군요. 빈을 칭찬하는 다른 화랑들의 말에 은우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다. 천운이지요. 그렇게 은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체 지워지기도 전에 빈의 순서를 끝으로 대회는 마무리되었으며, 당연하게도 우승을 차지한 빈이 은우에게로 다가온다. 저, 우승했습니다. 







“잘 보았다. 역시 협설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더구나.”

“과찬이십니다.”

“혹여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거라.”

“아...그러면 혹시 약조하나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부탁인지 꽤 뜸을 들이는 빈에 은우가 무엇이든 괜찮다고 하며 미소 짓는다. 그에 빈이 몇 차례 더 망설이다 이내 다짐한 듯 결의를 표하며 말한다.







“교전국의 국방을 살피는 일에 가담하고 싶습니다.”







곧 전쟁이 다시 발발하리라는 것은 어찌 알았는지 무모한 부탁을 하는 빈에 은우가 당황하며 대답한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말하는 것이냐. 살짝 찡그린 인상이 은우의 입장을 대신하자 빈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면 참전하게 해주십시오. 의지를 굽히지 않는 빈이 야속하기만 한 은우가 속이 타들어 가는 듯 깊게 한숨을 내뱉으며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린다.







“어찌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목숨을 바치는 것이냐.”

“나라의 안위를 위하는 것이 제가 화랑도에 들어온 이유이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장군이 되어 전방에 서는 포부를 이루기 위해서 이 또한 작은 밑거름이 될 테지요."







자기 뜻이 확고한 이 만큼 설득하기 어려운 일도 없구나. 애석하게도 힘든 길을 택하는 빈에 은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이 있는듯해 보이는 빈의 태도에 은우가 마지못해 수락한다. 어서 처소에 가서 간단히 짐을 싸 나오거라. 오늘부터 단체수련에 들게 될 것이다. 단념한 듯 말하는 은우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오자 빈이 걱정하지 말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문제없습니다.



그렇게 빈이 군사훈련에 합류하여 소규모로 이루어진 화랑과 몇몇 낭도 집단에 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급히 달려와 다급하게 적국 국방탐사의 총지휘를 담당하는 은우를 찾는 이에 훈련소 안에 싸늘한 긴장감이 팽배해진다. 좋지 않은 예감이 온몸을 감싼다.







“신라의 국방이 위태롭습니다.”

“그게 무슨, 어느 정도입니까.”

“당장 내일이라도 탐사대를 파견하여 적국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야 합니다.”







제기랄. 교섭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을 터인데 갑자기 협상결렬이라니. 지도가 펼쳐진 탁상을 큰 소리가 나게 내려친 은우가 복잡한 심경에 주먹을 세게 쥐며 되묻는다. 당장 파송이 가능한 곳은 몇 군데나 있습니까.







“혹시 모를 최전방 전투를 사수해야 하여 현재로써는 이곳과 다른 화랑도원으로 이루어진 곳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도 아직 준비가,”







문밖에까지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말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내 잠잠해지곤 은우가 나온다. 평소라면 다들 훈련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다 모인 인원이 제각기 다른 형태로 긴장감을 띠며 자신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될 은우의 말을 기다린다.







“계획이 변경되었다. 내일 동이 틀 때 즈음에 출발한다.”







예상보다 열흘이나 앞당겨진 일정에 다들 적잖아 놀란 눈치를 보인다. 개중 훈련에 합류한 지 이제 막 열흘 남짓한 빈은 특히나 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에 은우가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와 사기를 올리듯 상세 계획을 설명하며 다독인다.







“다들 알고 있다시피 훈련했던 대로 2인 1조로 하여 각각 동서남북을 중점으로 움직인다.”



“화랑도 내 최정예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니 긴말 하지 않겠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비록 임전무퇴(臨戰無退)라 하지만 위협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할 때도, 때로는 상황에 따라 후퇴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살아서 다시 이곳에서 보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며 결의를 다지는 은우에 빈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짧은 구호로 대답을 대신한다.







“묘시(卯時)에 이곳으로 모여 출발하도록 한다. 다들 그전까지 편히 쉬도록 하여라.”







은우의 말을 끝으로 다들 뿔뿔이 흩어진다. 그에 갈 길을 잃고 어색하게 서 있던 빈이 천천히 은우에게 다가간다. 걱정되십니까. 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든 은우의 표정에 그림자가 드리운 듯 근심이 가득하다. 원래대로라면 만발의 준비가 되어 아군의 우세가 확연할 때 가야 할 터였기에, 우세는커녕 열세에 몰리는 상황에 적진에 들어간다는 것은 자결이나 다름없었다. 은우가 손을 들어 어느새 눈을 찌르는 길이까지 온 빈의 앞머리를 정리해주며 묻는다. 그러는 너는 걱정되지 않느냐.







“은우님과 같은 조가 되었는데 어찌 걱정되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구나.”







한껏 경직된 어깨가 풀리는 듯 긴장감이 가시자 은우가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빈을 바라본다. 갈 길이 멀 테니 좀 쉬고 있거라. 그에 빈이 살짝 묵례하며 자리를 벗어나자 은우가 마루에 걸터앉아 적막한 하늘을 바라본다. 더운 바람을 타고 비명이 들려오는 듯하다. 오랜 기간 걸쳐 지속해온 교전이 이제야 끝을 보이려는지 서글픈 듯 달빛이 애처롭게 통곡한다. 끝을 앞둔 하늘은 어느새 찬란하던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









“다들 모였으니 출발한다. 적진까지 나절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니 해 질 녘 즈음에 도착할 것이다.”







어두운 하늘에 살며시 붉은 빛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자 두어 명씩 짝을 지어 적진으로 향한다. 목울대를 넘어가는 침소리 마저 들릴 정도로 침묵이 흐르니, 빈과 은우 사이에 묘한 기운이 스며든다. 곤두선 신경이 온통 서로에게 쏠려있는 듯 산 일대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도 괜스레 열기가 달아올라 빈이 손으로 부채질한다.







“이 일이 마무리되면 난 더는 화랑도에 없겠구나.”







먼저 성년을 맞이하게 되어 화랑도를 떠날 은우에 빈이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영영 떠나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런 빈에 은우가 그런 것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국선(國仙)이 되려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디로 가시렵니까.”

“군에 들어갈 것이다. 6정(六停)의 대당(大幢)에 들어 세속오계의 뜻을 이어가려 한다.”

“은우님이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화랑은 아마 네 몫이 될 터이니 궁금한 게 있거든 언제든 찾아오거라.”







됐습니다. 남으시는 다른 화랑님들도 계십니다. 은우의 호의에 빈이 고개를 돌리며 툴툴거리자 은우가 살풋 웃는다. 떠나지 않기를 바라여 그러느냐. 다정하게 웃으며 물어오는 은우에 빈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괜히 허리춤에 찬 칼집만 만지작거린다.







“네가 가지 말라 하면 가지 않겠다.”

“농이 심하십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떠나길 바라느냐?”







은우의 질문에 빈이 대답을 망설이다 이내 입을 다문다. 그런 빈에 은우도 장난을 거두곤 다시 산을 오르는 데에 열중한다. 아까와는 다른 정적이 둘 사이에 흐르며 멀기만 한 행선지에 다다르기를 기다린 지 오래, 작게 들리는 인기척에 은우가 빈을 멈춰 세운다. 각자 나무 뒤에 몸을 숨긴 체 숨을 죽이고 기척이 들린 곳을 주의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적군의 병사로 보이는 두 명이 보초를 서려는 것인지 자리를 잡고 거동을 멈춘다.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건만 발이 묶이게 된 상황에 빈이 은우를 쳐다보자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은우가 빈에게 무어라 손짓한다. 그에 빈이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은우가 활을 꺼내 들며 고갯짓으로 적군을 가리킨다. 그런 은우에 그제야 알겠다며 고개를 작게 끄덕인 빈이 자신의 활을 꺼내 들어 적을 겨냥한다. 활을 쏘는 것이라면 수백 번을 넘게 연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 오는 위압감이 숨통을 죄인다. 전장에서 살생은 불가피한 것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갑작스레 올지 몰랐다. 긴장감 때문인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전율에 휩싸이게 할 뿐이었다. 



빈이 은우의 눈치를 보며 신호를 기다리자 활시위를 잡아당긴 은우가 빈에게 눈짓한다. 그에 둘의 손을 떠난 화살이 각각 적군의 목과 심장 부근에 박힌다. 짧은 신음과 함께 쓰러진 병사들에게 은우가 먼저 다가가 숨이 멎은 것을 확인하며 빈에게 손짓하자 빈이 천천히 그들에게로 다가간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화살을 아껴야 했기에 적군의 심장에 박힌 화살을 빼내야 했다. 손에 힘을 주어 화살을 빼내자 검붉은 혈액이 빈의 손에 번진다. 기분 나쁜 기시감에 침수된 것만 같다. 빈이 자신의 손에 묻은 혈흔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한다.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





그러냐. 은우가 시선을 빈의 손에 고정한 체 대답한다. 덤덤한 말투였으나 숙연한 마음이 엿보이는 듯 서글픈 표정이 역력하다. 익숙해질 것이다. 자신의 옷깃을 끌어 빈의 손에 묻은 혈흔을 닦는 은우에 빈의 시선 또한 은우를 향한다. 하지만 너는 익숙해지지 않았으면 하는구나. 다시 한 번 정적이 흐른다.







“어찌하여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고요한 적막을 깨는 빈의 물음에 어긋난 시선이 교착한다. 마주친 시선 끝에 서로가 서로를 탐한다. 다 되었다. 이만 가야겠구나. 하지만 먼저 시선을 피한 은우가 혈흔이 묻은 화살을 닦아내며 앞장선다. 그에 빈 또한 아무 말 없이 뒤를 따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적진이 점점 가까워 짐에 따라 은우와 빈이 피해야 하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예상과 다른 적군의 태세에 계획이 틀어진 것인지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자 빈이 그런 은우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린다.







“...돌아가도록 하지. 이 이상은 위험하다.”

“괜찮습니다.”







척 봐도 저를 위한 것이 분명한 은우의 태도에 빈이 강건하게 자기 뜻을 피력한다.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런 은우에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말하는 빈에 은우가 적잖게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괜찮다는 빈의 의사를 거부한 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기에는 일분일초가 급한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저를 붙잡는 불안감은 떨쳐낼 수가 없을 정도로 저를 좀먹어온다. 기분 나쁜 기운이 복잡한 마음에 뒤엉켜 숨을 죄어온다.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국이 위험해 지겠지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빈에 은우가 마지못해 시선을 피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왜 이렇게까지 눈에 밟히는지, 왜 이렇게까지 해주고 싶은지 본인조차 알지 못하는 감정의 향연이었다. 어렴풋이 짓는 미소가 왜 그리 눈에 거슬리는지 알지 못할 터였다. 그저 빈의 뜻대로 적진으로 향하는 것 이외에 은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왜 네게 잘해주는 것인지 물었더냐.”

“...예.”







침이 마르는 입을 축이며 은우가 뜸을 들인다. 자신을 바라보는 빈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려 해보았으나 이미 넘칠 대로 넘쳐버린 감정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틈을 비집고 나와버렸다. 연모한다.







“월광에 비친 네 모습이 좋다.”



“웃을 때 들어가는 네 보조개가 좋다.”



“내 모든 순간에 스며든 네가 좋다.”







시간이 멈춘 듯 따스히 불어오던 바람도 그 기척을 거둔다. 오직 세상에 둘뿐인 양 진지한 은우의 목소리가 빈의 귓가에 잔잔히 울려 퍼진다. 침묵이 무겁다. 기대치 못 한 행복은 언제나 준비되지 못한 자에겐 과분할 뿐이었다.







“네가 이것을 우애라 부른다면 나는 이것을 우애라 부를 것이고,”



“혹여 네가 이를 정애라 부른다면 나 또한 이 마음을 정애라 부를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은우의 눈빛이 발끝에서부터 저를 옭아매는 듯하여 빈이 뒷걸음질 친다. 우애와 정애에 차이를 두기에는 은우를 향한 마음을 형용할 자신이 없었다. 은우를 보면 드는 이질적인 간지러움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마음을 선뜻 그와 같은 마음이라 치중하기에는 그 마음이 너무 커서, 함부로 그에게 짐을 덜고 싶지 않았다. 당신을 향한 마음에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버릴까 두려워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붉은 하늘이 이런 저의 마음을 대변하듯 새까맣게 물들어 간다. 황혼이 깃든 하늘이 부끄럽게 물든 내 볼을 숨겨준다. 



다시 한 번 짧은 침묵이 흐른다. 그에 순간의 감정을 헤아리기 벅차 오래도록 쌓아왔던 울분을 한 번에 쏟아부은 탓이었을까, 적진에 들어섰다는 것을 안일하게 생각한 탓이었을까. 주변에서 인기척을 느낄 틈도 없이 느닷없이 날아든 화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우습게도 여태껏 숨겨온 마음을 전하자마자 안녕을 고하게 되었구나. 하지만 이상하게도 고통은커녕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슬쩍 뜬 눈앞에는 네가 있었다.







“왜...어째서 네가…”







은우에게 날아온 활을 대신 맞으려 한 듯 급하게 달려온 빈의 심장을 정확하게 관통한 화살 끝에 붉은 혈액이 새벽이슬만치 맺힌다. 역류한 감정이 이성을 잃고 흘러내린다. 끝내 붙잡고 있던 눈물이 처연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끌어안은 빈의 몸이 안쓰럽게 떨린다.







“겨우... 전해졌다 생각했는데…”







빈을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탓에 온몸에 한이 서린다. 마지막은 언제나 찬란하다고 누가 그랬는가, 그 어느 누가 황혼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하였는가. 애통한 하늘마저 나를 불쌍히 여기려는지 가는 빗방울을 시작으로 잗다란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울지 마십시오.”

“빈아…”







억지로 울음소리를 참으며 흐느끼는 은우에 빈이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그제 밤에는 물망초에도 작은 나비가 하나 왔다 갔습니다. 그런 빈에 은우가 고개를 들자 빈이 눈을 맞춰오며 미소 짓는다. 







“다음에... 같이 보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떨리는 눈동자가 땅거미 진 하늘을 비춘다. 기약 없는 약속을 건내는 말이 야속하기만 하다. 가랑비에 젖은 옷이 어느새 온몸에 스며들었다. 비 덕분인지 더 이상의 화살은 날아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어느새 차갑게 식은 빈의 몸이 힘없이 은우에게 기대온다. 축축해져 엉망이 된 어깨에 닿는 빈의 머리카락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쇠퇴한 기운이 그 운명을 다 해 꺼져가는 불씨처럼 그 끝을 예견한다. 끝내 부여잡은 빈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니 종말의 끝에 선 삶이 생에 안녕을 고한다. 


인과 연을 담은 붉은 빛이 사라진다. 일광의 찬란했던 빛깔이 월광에 침묵한다. 하늘의 주인이 바뀌자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우리의 황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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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