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기억 속에서 외친다

2019 여름호
작성자
온기
작성일
2020-11-11 11:45
조회
3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소재를 사용한 글입니다.



●REC.

자, 편하게 이야기해주시면 돼요. 카메라는 신경쓰지 마시고요.

일단 무엇 때문에 찾아 오셨는지부터 얘기해볼까요?


볼펜을 딸각이며 두 손으로 깍지를 낀 의사의 말에 빈은 불안하게 카메라를 흘긋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그간 많이 상했는지 낯빛이 어두웠다.


기억을 지우고 싶어요.

누구와의 기억이죠?

제 애인이었던 차은우와의 기억이요.





차은우를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졸업식 때였다. 3년 내내 엮인 적 없고, 얼굴에 이름만 아는 사이. 나와 차은우는 그런 사이였다. 졸업식에서 같은 상을 받지 않았다면, 가끔씩 문득 떠오르는 얼굴 정도 그 이상도 아니었던 사이.

[신의성실상] …………… 차은우 문빈.

신의성실이라, 난 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성실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받는 사람이 의아한 상이라니. 알고 보니 차은우 혼자 받는 상이었는데 애들 졸업장에 상장 하나라도 더 들려보내고 싶으셨는지 인원을 더 늘려 나까지 받게 된 상인 것 같았다. 거기에 차은우가 전교 1등, 학생회장이다 하셔서 교장선생님이 직접 상을 주신다 하여 얼결에 나도 같이 단상에 올라가서 받게 됐다. 그렇게 우린 학교오는 마지막 날까지도 길고 지루한 교장의 훈화만 끝나길 기다리며 단상 앞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걔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학처럼 하얗고 고고하게 앉아있길래 지루하지도 않나 슬쩍 흘겨봐도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결국 양 세는 것도 지루해져서 옆에서 쳐다보면서 속눈썹이 되게 기네, 같은 쓸데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는데 옆을 돌아보는 눈과 딱 마주쳤다. 그 순간 머리가 굳었다. 마주친 두 눈망울이 반달모양으로 휘어졌다.

“안녕.”

잠깐동안 그 얼굴로 말을 걸어올 줄은 몰라서 화들짝 놀라서 버벅였다.

“어, 아, 안녕.”

“아까부터 뭘 그렇게 봐?”

“어…. 어?”

씨익 웃는 얼굴에 말이 자꾸 더듬였다. 뭐, 뭐야.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겨. 차은우에게서 시원하고 좋은 향이 났다. 귀로 올라오던 열이 얼굴에 확 올라왔다. 하얗고 까만 눈동자가 잔뜩 반짝이면서 별무리가 쏟아졌다.

“지루하지. 나도. 너가 계속 흘깃흘깃 보길래 말이라도 거는 줄 알았네.”

“나 알아?”

“문빈, 맞지? 아니면 뭐, 지금부터 알면 되지.”


처음 제대로 보는 얼굴이라 그 얼굴에 웃는 것엔 면역이 없어서 또 씩 웃는 낯에 말이 막혔다. 차은우는 내가 예전부터 친했던 절친한 친구인마냥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물어보고 얘기하더니 결국 전화번호까지 주고받았다. 웃기게도 학교에서 보내는 마지막 순간에. 그리고 우연인지 인연인지, 몇 달 뒤에 같은 대학교 캠퍼스에서 또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렇게 여기서 또 보네.”


장학금을 받으려고 하향지원해서 들어왔다고 했다. 전교 1등이면 충분히 골라서 갈 수도 있었을텐데 왜 서울권 턱걸이 대학으로 왔냐고 물으니 집안사정이 어려워 전액장학금을 준다는 학교로 왔다고 한다. 그렇게 우연한 만남이 한번이 되고 두 번이 되다가 같이 술도 마시고, 서로 자취방에 같이 가고. 그리고 은우가 전역한 스물두살의 해 가을에, 내 자쥐방에서 은우가 고백했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첫 연애는 정말 달콤했고, 행복했다. 방학 때 같이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돈으로 같이 여행도 가고, 여름밤에 맥주 두 캔 사들고 영화도 같이 보고, 한 침대에서 몸을 맞대고 밤새 얘기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둘만 있으면, 다 행복한 줄 알았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우리도 끝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은우는 바로 직장에 취직했지만, 나는 면접을 계속 다녀도 번번이 떨어졌다. 은우는 그때마다 걱정하지 말라며 날 위로해줬지만 계속 면접에서 떨어지자 나는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다. 은우의 위로하는 말 한마디에도 점점 예민해졌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은우에게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만나는 날도 점점 줄어들었다. 은우도 그런 나를 눈치했는지 내 자취방에 계속 찾아와서 얘기해보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차은우를 계속 밀어냈다. 말다툼이 점점 잦아졌고, 그럴수록 우리 사이의 말수는 더 줄어들었다. 숨기는 것도 더 많아졌다. 그게 이미 우리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그날은 친구를 만나서 늦게까지 술을 먹고 들어간 날이었다. 현관 앞에 서있는 은우를 한번 바라보곤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일이 좀 늦게 끝났어.”

“무슨 일인데.”

“있어. 그리고 나 좀 피곤한데.”

“왜 전화도 안 받아.”

“하… 못 봤어. 진짜로.”

부재중 전화가 10통이 넘어가는 핸드폰 화면을 뒤늦게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나 이제 진짜 들어가도 될까, 오늘은 얘기할 기분 아닌데.”

“너는 다 쉽지?”


머리가 어지러워 이마를 짚다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섰다.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은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대로 목덜미에 닿았다.

그게 소름끼쳤다.


“뭐..?”

그대로 돌아서니 은우는 내가 한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뭔 말이 하고 싶은건데.”

“난 다 힘들고 어려운데 넌 다 쉬운 것 같아서.”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내 말에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던 은우는 입을 뗐다.

“빈아,”


우리 그만하자.


다정도

노력이야, 빈아.


그 날 그렇게 그늘이 가득한 눈으로 나간 은우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든 자리는 모르고, 난 자리는 안다더니, 그 난 자리가 너무 컸다. 그동안 은우가 애써 참았을 수많은 말들을 생각하면 더 힘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던 중에, 우편함에서 명함 하나를 발견했다.


「기억을 지워드립니다. 지우고 싶은 기억들, 사연들 다 없애드립니다.

예약 010-xxxx-xxxx 」


평소 같았다면 말도 안 된다며 던져버렸을 명함일텐데, 우편함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집에까지 들고 와버렸다. 만약, 진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나는 차은우와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정말로, 그게 가능하다면. 떨리는 손으로 든 전화의 신호음이 울려퍼졌다.


그곳에 가서 의사라고 부르는 사람을 만난 다음날, 기억을 지워주는 기술자라는 사람이 집으로 찾아왔다.

“저는 그냥 김 선생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기억을 지우시면 다 잊어버리시겠지만, 일단기억을 지우기 전까지는 부르실 이름이 필요할테니까요.”

그 사람 ‘김 선생’ 은 살짝 웃고는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기억과 관련된 모든 물건을 다 찾아서 모아두면, 그걸 통해서 뇌파탐지기를 통해 기억들을 지우는 것이라고 했다. 기억을 다 지우고 나면 모든 물건들은 다 회수해 갈 예정이고 그 다음부터는 깔끔하고 개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요.”

“기억을 지우고 난 후의 일은 저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일단 기억을 지우겠다고 결심하시면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의뢰하신 고객님 책임이기 때문에 다 감수하실 생각이 없다면 의뢰를 받지 않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감수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문빈 씨가 할 일은 내일 아침 개운하게 일어나셔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손가락을 딱 튕기는 소리에 스르륵 눈이 감겼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거슬러 올라갈 거에요. 기억이 지워지는 순서는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많이 바뀔 수도 있어요.”

남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

눈을 뜨자 나는 집 앞에 서있었고 현관 앞에는 은우가 서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오늘이 그날이구나. 내가 차은우와 헤어지는 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어제 본 얼굴 같아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인데.”

이 기억에서 빨리 벗어나려면 얼른 본론부터 얘기하고 끝내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말다툼하기 싫어서 먼저 말을 꺼내려고 고개를 들고 입을 떼려는데,

그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눈을 봐버리고 말았다.

“왜 전화도 안 받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너는 헤어지는 날까지도 그렇게 나를 걱정한 눈빛으로 쳐다봐. 나는 화만 냈는데, 넌 왜 끝까지 한번도 화내지를 않아.

“…. 미안해. 내가 확인을 못했나보다. 걱정…했어...?”

“당연히 걱정했지. 어디서 술 취해서 바닥에 누워있는 거 아닌가, 내가 데리러 가야되나, 근데 연락도 한 통 안 받고.”

“미안해 진짜로…. 은우야 내가 다 미안해….”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눈물이 터져버렸다. 은우는 당황해서 급하게 나를 달랬다.

“왜 그래. 잘 왔으면 됐지. 너가 뭐가 미안해. 내가 더 일찍 연락할걸…”

내가 그렇게 신경질만 안냈어도 우린 아직 함께였을까. 이렇게 생생한데 내 기억 속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우리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할까? ”

애써 눈물을 참고 은우를 다시 바라보자 은우는 환하게 웃으며 현관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왜 그래?”

“…너네 집 비밀번호를 까먹었어.”

“내 생일이잖아. 그걸 어떻게 까먹어.”

“지금 너 기억 속에는 집안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었거든.”

아…. 머리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절대 중간에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건 내 기억 속이고 은우도 내 기억 속의 은우고 여기서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은우야, 여기서 나가야 돼.”

“무슨 소리야. 우리 이미 나와있는데?”

“나가야 돼. 최대한 빨리!!”

자취방 현관문이 벌써 종잇장처럼 구겨지고 있었다. 은우의 손을 잡아끌고 최대한 빨리 달렸다. 제발, 이 기억이 끝나면 어떻게 되는거지. 다시는 오늘의 은우를 볼 수 없는 거잖아. 휙휙 지나가는 배경의 색이 물감처럼 번지고 도로가 뒤틀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눈코입이 없었다.

“빈아, 우리 대체 어딜 가는거야!!”

돌아본 은우 얼굴이 눈물 때문에 번져서 안보이는 건지, 은우도 사라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흐려져서 질끈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내 방 침대에 앉아있었다.


“안녕.”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데 옆에서 나지막한 은우 목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은우가 내 옆에 누워있었다. 샤워가운에 안경 쓴 은우라… 몸을 살펴보니 나도 샤워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이거 분명 우리 첫날 밤인데.

“이거 내 기억 속이지.”

“응.”

“이 다음에 너가 키스하나?”

“그럴걸? 그 다음엔 내가 너 앞섬을… ”

“우리 여기서 나가야 돼.”

바싹 붙어온 은우 팔을 턱 잡았다. 벌써 방 벽면이 잘게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내가 빠져나가려고 하는 걸 알았는지 기억이 무너지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이 차림으로?”

“뭐 어때? 내 기억 속인데.”

우리는 호텔 방 복도를 샤워가운만 입고 뛰었다. 얼굴없는 사람들이 놀라면서 길을 비켜줬다. 눈도 없으면서 놀라기는. 씨익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순간 눈앞이 번쩍하고 화면이 또 바뀌었다.

그렇게 셀 수도 없이 도망쳤지만 우린 벗어나진 못했다. 대신 은우와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나란히 뛰었다. 몇번째 뛰어가는 건지 모를때쯤 눈앞이 또 번쩍하고 눈을 뜨자 나는 교복을 입고 앉아있었다.

“… 뭐야…..”


졸업식 날이었다. 나와 차은우의 첫 기억.

그리고 아마도, 가장 마지막으로 남은 기억.

“안녕.”

“어…안녕.”

내 기억 속의 은우는 정말 많이 앳되보였다. 교장의 목소리가 강당 안에 잔잔하게 깔렸다. 은우와 얘기할 때라 그런지 기억 속 목소리는 웅웅거리며 뭉개져서 들렸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쳐다봐?”

“…너.”

“나도 너 봤는데. 문빈 맞지.”

휘어지게 웃는 눈매는 여전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은우야.”

“…이게 마지막 기억이야?”

“그런 것 같아..”

“내가 기억 속에서 버텨보고 있을게. 너가 깨고 나면 크게 외쳐볼게. 나 아직 남아있다고.”

“……..”

“아, 문빈 기억 속에서 이렇게 남을 거였으면 그때 좀만 더 얘기 많이 할걸. 졸업식 끝나고 나서도 만났어야 됐는데.”

“…내가 기억해볼게.”

“너 잊으면 안 된다. 이 얼굴. 눈동자. 별이 쏟아진다면서.”

“아무리 내 기억 속의 너라도 너 너무 뻔뻔하다…”

“당연하지. 너랑 있을 때만 이렇게 뻔뻔한데.”


강당도 벌써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들도 점점 눈코입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은우가 나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내가 너 기억 속에 박혀 있다가, 있는 힘껏 외쳐볼게. 너한테 들리도록.”

“그러니까 너도 꼭 알아봐야 돼. 알았지?”

내 손을 잡은 은우의 교복 소매가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

머리가 어지러웠다. 간밤에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오래 전에 만난 사람이 나왔던 것 같은데 생각해내려고 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제 가위라도 눌렸나…”

물이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려고 침대에서 내려오니 종이 한 장이 팔랑하고 떨어졌다.

<새로운 삶, 이번엔 후회없이 사시길 바랍니다.>

“뭐야..? 언제 이런 걸….”

종이를 앞뒤로 뒤적여봐도 다른 건 없었다. 전단지를 집에 들고 왔나보다 생각하고 쓰레기통에 던지고 기지개를 쭉 펴니 그래도 몸은 개운한 것 같았다. 그럼 모처럼 개운한데 주말에 오랜만에 방 청소라도 해볼까 싶어서 서랍장을 열어보니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내가 청소를 했었나…?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에 쓰레기통에 걸려있던 쪽지 한 장이 눈에 보였다.


[빈아, 졸지 마 -은우]



은우가 누구였지…?


내가

너 기억 속에서

외쳐볼게

그러니까 너도 꼭, 알아봐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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