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후광음(別後光陰)

2019 여름호
작성자
몬트
작성일
2020-11-11 12:02
조회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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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덥다.


버스에서 내려 땅거미 진 골목길을 걸었다. 회색 아스팔트를 제멋대로 쥐어 붙이고 날카로운 유리병 조각을 심어둔 험악한 담을 몇 개 지나고, 주황색 능소화가 흐드러진 빨간 벽돌담을 또 지나 한참 걸음을 옮겨야 비로소 우리 집 골목에 도달한다. 때마침 시들기 시작해 갈변하며 말라비틀어진 능소화 덩굴에 날파리 떼가 엉겨 가로등 불빛이 뜨거운 밤공기 사이로 어지럽게 산란했다. 그 더러운 꼴을 피해 험악한 아스팔트 담에 바짝 붙어 걷는다. 이미 해가 졌음에도 불구하고 눅눅하고 뜨끈한 밤공기가 내 살에 달라붙었다. 견디다 못해 몸에 착 달라붙은 티셔츠를 벗어버리는 대신 손으로 쥐고 팔락거렸을 때 공기 중에 내내 머물렀을 열기가 몸에 훅 끼쳐온 탓에 한숨이 샜다. 그건 마치 싫어하는 사람이 내 몸에 대고 입김을 부는 느낌과도 비슷해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낡아 녹슨 전봇대와 고장으로 깜빡이는 가로등 두어 개를 지나면 여름에도 제법 서늘한 기운이 도는 우리 집에 드디어 도착한다. 그러나 최근의 이상고온 현상으로 여름에도 서늘하단 장점은 상실한 지가 제법 되었다. 나는 어서 들어가 오래 쓴 탓에 버튼을 누를 때마다 골골 소리를 내는 선풍기 바람을 쐴 생각뿐이었다.


걸음을 크게 내딛던 때, 어두컴컴한 집 앞에 우두커니 선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나는 또 옆집 아저씨가 술에 꼴아 길을 잘못 든 줄 알고 아저씨! 하고 그를 부르며 달리듯 걸었다. 그는 자주 길을 착각해 열리지 않는 우리 집 문에 욕을 하거나 걷어차거나 문고리를 쉬지 않고 달칵거렸다. 덕분에 시끄러운 건 내 귀고 고장 나기 직전까지 삐걱대는 건 우리 집 문이라서, 나는 그를 말릴 작정으로 계속 아저씨! 하고 외쳐댔다. 인영이 스르르 고개를 들었다.


“좀, 집 좀 제대로 찾아… 누구세요?”


옆집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 앞을 막고 서있는 건 훤칠한 키의 남자였다. 기대어 구부정하게 서 있으니 몰랐던 거지만 허리를 일으켜 세우니 꽤 큰 축에 속하는 나보다도 조금 더 큰 키였다. 죽상을 짓고 있던 남자는 내가 나타나자마자 눈을 번쩍 뜨고 빈아,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처음 보는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가에 대해 묻기도 전에 그가 내 어깨를 덥석 붙잡아서 나는 꽥 비명을 지르며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나는 무슨 대리석을 걷어찬 줄 알았다. 아니, 솔직히 대리석도 그 정도로 걷어찼으면 깨지고도 남았을걸?


얻어맞은 남자가 쓰러지긴커녕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낯선 상대를 힘껏 걷어찬 내 발등이 부푸는 게 말이나 되는 전개냐고요.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찬 뒤 악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나를 안아 올린 남자가─그것도 무슨 첫날 밤 신랑이 신부 침대로 모셔가듯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많이 아프냐고 다치진 않았냐며 쓰러진 나보다 더 호들갑이었다. 내려달라고 있는 힘껏 버둥거리는데도 꿈쩍 않는 게, 어디 가서 완력으로는 져본 일 없던 내 자존심을 무참히 구기기까지. 내려놓으라고 퍽퍽 어깨를 때린 손도 빨갛게 붓기 시작한 것을 본 남자가 또 발을 동동 굴렀다. 나는 또 비명을 악 질렀고.


“그러니까, 무슨 용건으로 오셨는데요.”

“빈아. …빈아.”

“제가 빈은 맞는데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 거예요?”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어.”


아까부터 이런 식이라 대화가 되긴커녕 헛돌기만 했다. 마지막 대답은 다소 소름이 돋기까지. 남자는 감격해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으로 빈아, 빈아. 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혼자 상념에 젖었다가 빈아, 하고 다시 내 손을 빤히 쳐다보면서 손을 내밀었다가 빈아! 하고 와락 나를 끌어안거나 했다. 진짜 무슨 변태 아냐? 딱딱한 대리석 같은 팔 안에 안긴 채로 나는 나를 도대체 어떻게 아시냐고 물었다. 그는 무척 섭섭한 표정으로 안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커다란 눈을 슴벅이며 입매를 잔뜩 끌어내린 딱한 표정을 짓는 탓에 나는 죄인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나 정말 모르겠어?”


그가 기어이 축축한 눈망울로 물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눈을 본 적도 없지만 만약 본다면 딱 그런 눈일 것 같아서 나는 순간 알 것 같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렇지만 저런 눈에 대고 거짓말을 하기도 양심에 찔려서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그 눈 그대로 내게 웃어 보였다.


"빈아, 난 다시 가봐야 해."

"예? 네, 그러세요."

"가기 전에 뭐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곤란하게 하지는 않을게."

"…그러세요. 뭔데요?"

"한번만, 안아보자."


싫다고 거절할 틈도 없이 그가 단단한 팔로 다시 내 몸을 휘감았다. 놀라서 입만 벙긋거리던 나는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스킨쉽은 곤란하다고 하면 어떡하려고? 떨어지라고 욕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내 어깨의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는 느낌과 훌쩍이는 소리에 결국 손을 천천히 뻗어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는 또 얼마간 나를 끌어안고 있다가 시선을 맞춰왔다.


"다시 만나면 그땐 꼭 내 이름 불러주기야."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 흘러내릴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하고 눈을 깜빡이고 나니 그는 사라지고 난 후였다. 뭐지? 꿈을 꿨나? 아니,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없어져? 나는 당황해 집을 두리번거리고 문을 열어 바깥을 내다보기도 했으나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역시 알바를 하나 줄여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목 뒤를 매만지는데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 위로 손이 닿았다. 여태 욱신대는 발목도. 꿈이 아니라면 그 남자는, 대체 뭐였지?


자고 일어나면 남자가 금방 잊혀질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 근방에서, 아니 거리나 어느 미디어에서도 좀처럼 접하기 힘든 외모였던 터라 남자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어느 연예인의 꿈을 꾼 건 아닐까 싶어 눈에 불을 켜고 뒤진 포털 사이트에서도 그 남자는커녕 그와 닮은 사람 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도록 도와준 것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가난이었다. 야간 일을 마치고 조용한 거리를 걷다가 문득 밀려오는 피곤함에 크게 하품을 하며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비가 온 이후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습한 공기가 폐부로 스몄다. 그렇게 걷다 보니 문득 또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던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린 것만 같았다. 누가 내 이름을 그렇게 애달픈 목소리로 불러준 적이 까마득하다는 게, 낯선 남자가 부른 목소리에서 반가움을 사무치게 느끼고 있다는 게 문득 서러워서 웃음이 샜다. 그래 어쩌면, 그도 길을 잘못 찾았다는 걸 알고 황급히 돌아간 걸지도 모르겠다. 다른 빈이랑 착각했던 거겠지. 끈적한 뒷목을 매만지던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슴벅이며 다시 길게 하품을 뱉었다.


한번만 안아보자고 그랬는데. 잘못 찾은 건 아닌 것 같던데. 불쑥 속에서 치미는 생각을 되씹다 말고 나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것을 보고 무심코 한발을 내딛던 나는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번뜩 머리를 들었다가, 옆에서 비치는 밝은 빛에 놀라 인상을 찌푸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다.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미끄러지던 트럭 운전사는 무척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트럭에 부딪힌 나는 텅 소리와 함께 느껴본 적 없는 고통을 느끼며 도로 위로 떨어졌다. 온몸의 뼈가 다 부서진 기분이었다. 어지럽고 뿌옇게 부서진 시야로 누가 다급히 뛰어들었다. 나를 안아 든 인영은 내 몸을 살폈다. 밀려오는 피곤함에 나는 눈을 감고 싶었다. 아프고 피곤해 견딜 수가 없어 눈을 감으려는데 인영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불렀다.


“빈아!”


그건 내가 지난 몇 주 간 잊지 못하고 계속 되뇌었던 그 목소리였다. 깜빡 어두워지려는 눈에 힘을 주어 치켜 떴을 때, 나는 울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아무리 봐도 익숙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얼굴을 갑자기 머릿속에서 만들어낼 정도로 상상력이 풍부하지도, 누군가와 착각할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지도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는 충동이 불쑥 치밀 만큼 그가 서럽게 소리 내어 울다가 나를 제 품에 끌어안았다. 울지 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입에서 색색 바람 소리나 겨우 새어나올 뿐 다른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말 너무 아파, 피곤해. 나는 좀 자야겠어. 멀어지는 의식을 따라 눈을 감으며 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여전히 내 이름을 부르며 애타게 울고 있었다. 그래, 나도 너를 알아. …그런데 넌 누구였지?


“…헉!”


뭐 이런 미친 꿈을 다 꿔. 나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입시 스트레스로 인해 삶이 뒤숭숭하기로서니 꿈에서 죽을 필요는 없잖은가. 더운 여름날 다 시든 능소화가 흐드러진 골목을 걷던 기억이, 이름 모를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차던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힘이 하얗게 들어간 손이 저릿했다.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교복 바지 위에 대충 문지르다가 펼쳐놓은 문제집의 어느 문단에 시선이 닿았다. ‘능소화가 흐드러진…’ 험악한 꿈의 출처는 아마도 이것인 모양이다. 샤프심으로 죽죽 그어놓은 밑줄을 쳐다보던 나는 책장을 덮고 일어섰다. 험악한 꿈을 꿔서 더 이상 공부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다. 어쩐지 써늘한 기분이 들어 팔뚝을 문지르며 독서실 건물을 나섰다. 열두 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이라 가로등만 켜진 길거리가 오늘따라 낯설기 짝이 없었다. 택시를 탈까 싶었으나 골목길로 질러가면 10분 만에 도착하는 거리라 역시 돈이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터벅터벅 어두운 골목길을 가로지르는데 누가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다.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어느 날부턴가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따끈한 쌀밥을 한 술 퍼서 입에 넣고 씹으면 찰기 있는 모래가 입 안을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고 까만 문제가 빽빽하게 적힌 종이 위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내 손과 곧장 답을 유추해내는 내 머리가 도저히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나날이 반복되었다. 입시 부담감에 어느 높은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내 또래들의 소식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곧 부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겐 몸을 던질 용기 따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겹다. 사각사각 글씨를 적고 책장을 팔락거리는 소음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에 나처럼 고개를 든 애는 걸리지 않았다. A4 용지보다 조금 커다랗고 글자가 가득한 내 세상에 다시 시선을 내리며 나는 피로한 눈을 감았다. 작은 세상에 빽빽하게 들어찬 글씨들이 벌레처럼 기어 내 시야 바깥으로 사라졌다. 몸 위로 그 벌레들이 옮겨 붙기라도 한 모양인지 피부가 근질거렸다. 모래가 굴러다니는 듯 서걱거리는 눈두덩을 꾹 누르며 앞으로 내게 남겨진 밤들에 대해 생각한다. 밤은 까맣고, 차갑고, 길고…. 혼자 보낼 끝없는 밤들의 무게가 목을 짓눌러 숨이 막혔다. …끝없는 밤? 뇌를 송곳으로 콱 찌른 듯한 예리한 두통에 관자놀이를 짚었다.


손목이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여린 살 위로 녹슬고 무거운 수갑이 절그렁대는 소리와 함께 미끄러졌다. 거친 쇠에 쓸려 까지고 부은 살갗에서는 진물이 배어 나왔다. 다쳤다고 비명을 지르듯 쓰라린 상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딱딱한 돌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 것이 내게 허락된 진통의 전부였다. 진물이 묻어나는 상처는 곧 곪아 터지고 이내 썩어 문드러지고 말겠지만 쉽게 죽지 않는 육신은 금방 썩어 벗겨진 살을 차오르게 하고 터진 상처를 없었던 일처럼 메우려 할 것이다. 그러나 살 위를 긁고 찢는 이 녹슨 수갑은 그를 허락하지 않을 테고 나는 내게 남은 영원한 시간 동안 고통에 신음하며…. 그런 고통을 내내 느껴야 한다는 것보다 빛도 제대로 들지 않는 축축한 곳에 홀로 남겨졌다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


나는 누군가가 몹시 그리웠다. 분노와 원망으로 애간장이 들끓었다가 막막함과 두려움으로 차게 얼어붙기를 반복했다. 바깥과 안을 구분할 것 없이 너덜거리며 악취를 풍기는 주제에 나는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했다. 또다시 관자놀이를 예리한 것으로 후벼파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몸을 웅크렸을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번뜩 꿈에서 깨어난 나는 놀라 주변을 다시 두리번거렸으나 축축하고 차가운 돌벽과 녹슨 수갑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할머니 말대로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손바닥 몇 개를 합친 작은 나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좁은 돌벽들과 작은 글씨들이 빽빽한 문제집이 놓인 책상, 둘 중에 어느 것이 썩 낫다고 꼽긴 어려웠다.


“성적 떨어졌네?”

“…….”

“너한테 들이는 돈이 얼만데 이래. 정신 안 차릴래?”


차라리 내 눈이라도 보고 얘기하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낮아지기만 한 목소리가 두려울 리 없었다. 엄마, 하고 불러도 미동조차 않는 옆모습을 그저 바라보다가 잠긴 목을 쥐어짜 겨우 죄송하다는 말이나 뱉었다. 여전히 내게는 일말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벌떡 일어선 엄마는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상의를 들고 그대로 나가버렸다. 옷을 가지러 왔던 모양이다. 어쩐지 견딜 수 없는 서러움이 치밀어 그녀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나는 망연히 치민 감정을 곱씹었다. 어릴 때에는 내가 뭐든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해주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옆집에 살던 형이 부모 대신 내게 그런 말을 해줬다. 뭐든 할 수 있고, 착하고 예쁘고 똑똑하다고. 그런 말을 곧잘 타이르듯 속삭여주곤 했다.


그 말이 담고 있던 큰 의미를 읽어내기에 그때 나는 너무 어렸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시간을 죽이던 일곱 살 어느 해에 그 형은 멀리 가야 한다며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고 그랬다. 그러면서 일러주었던 이름, 그건 또 뭐였더라. 즐거웠던 기억을 눈 씻고 찾아봐도 그 어릴 때라니, 길지 않은 인생이래도 불쌍해서 헛웃음이 다 났다.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신용카드를 쳐다보다가 차가운 유리 위로 이마를 묻었다. 살아남으면, 억지로 버티면 정말 과거를 헤집지 않아도 행복한 순간이 올까?


그렇지 않으리라는 강한 확신에 휩싸여 나는 엄마가 그랬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향한 곳은 베란다였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새카만 어둠 아래 가로등만 몇 개 보였다. 바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차라리 다행이었다. 심연을 바라보던 나는 난간을 쥐고 바깥으로 넘어가 섰다. 끝없는 밤과 남겨진 삶의 무게를 재단해보던 나는 곧 난간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귓가로는 거센 바람소리만 휭휭 울렸다. 그러다가 얼핏 나는 내 이름을 들은 것 같았다. 빈아, 하고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 그러나 나는 나를 그토록 절박하게 불러줄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안다.


“빈아!”


다시 들린 목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손을 뻗어 애타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가 나를 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나는 빠르게 추락하고 있었고 곧 바닥에 부딪힐 거였으니까. 그가 곧 눈물을 터뜨릴 법한 표정으로 다시 내게 손을 뻗었다. 문득 속에서 처음 보는 그를 향한 원망이 치미는 것이다. 나를 구하러 올 수 있었으면서. 은우 너는, 나를 지킬 수 있었으면서. …은우? 다시 예리한 두통이 느껴졌다. 뇌피질을 찌르고 헤집는 듯한 격렬한 통증에 신음하다가, 나는 늦었음을 알면서도 은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격렬한 통증과 함께 의식이 끊겼다.


Current Fin.



목을 비틀거나 사지를 움직일 때마다 듣기 싫게 절그럭대기나 할 뿐 꼼짝도 않는 사슬을 노려보던 그가 다시 포효하며 그를 가둔 철창에 머리를 박았다. 쿵! 하고 둔중한 소리와 함께 감옥 전체가 진동했으나 그 진동을 알은 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분노와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어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찧었다. 찧을 때마다 살점이 찢어지고 피가 튀고 어두운 감옥 전체에 그 소리가 울렸으나 여전히 듣는 이가 없었다. 곧 눈에서 흐른 눈물이 상처 위로 흘러 상처가 따끔거렸으나 그는 그것을 느낄 틈도 없이 계속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이어 늘어졌던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가 의미 없는 반항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공중에 매달린 채로 그는 목이 터져라 포효했다.


그가 재판을 받기로 된 것은 내일 동이 트기 전 새벽이었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끌려온 그의 세계는, 전부는, 또 생명은. 세계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가 끓고 울분이 시시때때로 치밀었다. 아무 죄 없는 이를 그렇게. 채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전에, 그렇게. 그는 눈을 감고 세계를 처음 만나던 날에 대해 떠올렸다. 일자로 다물렸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ㆍㆍㆍ


그 빌어먹을 정원에서 길을 잃는 이들은 흔했다. 정원의 복잡한 구조는 침입자를 막기 위한 방편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저 처박혀 남의 운명이나 들여다보길 좋아하는 절대자들이 좋을 대로 처박히기 위해 만든 장치임을 오가는 신, 천사, 전령 전부가 알았다. 구조만 복잡한 게 아니고 절대자들이 환장하는 아름다운 장미를 사시사철 피우기 위해서는 가공할 노동력이 들어갔는데, 바로 선택 받은—나는 저주라고 생각했다—천사들의 손길이었다. 어떻게 내가 이런 것들을 상세하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나는 이 또한 저주라고 생각했다—, 내가 바람과 비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다 할 이름을 지어줄 친구조차 사귀지 못하게 절대자들은 나를 열렬히 부려먹었다. 물론 전령을 이용해 친히 부르는 것은 아니고, 머릿속에 불현듯 정원을 띄워주는 식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머나먼 서쪽 바다 위에 떠다니며 비를 뿌리던.  불현듯 떠오른 빌어먹을 정원 장미덩굴에 욕지기를 씹으며 바쁘게 하늘을 달려 정원 입구에 다다랐다. 들리는 말로 천사들은 영원히 꽃이 지지 않는다고 이 정원에 영원의 정원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했다. 영원히 일이나 하는 저주에 걸린 정원이겠지. 나는 내내 속으로 비아냥거리며 장미향이 지독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담벽을 따라 초록색 잎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핀 장미들이 뿜어내는 향기가 내겐 꼭 비명 같았다.


“누구세요?”


커다란 송이들 사이에 깔려 덜 자란 장미 하나가 눈에 밟혀 그 꽃송이를 매만지던 중이었다. 예민하고 날 선 목소리가 침묵을 그으며 귓가로 파고들었다. 나는 소리가 돌린 쪽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꽃을 함부로 만지면 안 돼요.”

“꽃이 아파 보여도요?”


그 말에는 선뜻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서야 탐스러운 다른 꽃송이들보다 조금 작은 것에 빛이 들었다. 다른 꽃보다 색이 진한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는 말에 괜히 반기를 들고 싶어 다시 미끄러운 꽃잎을 매만졌다. 천사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에 웃음이 비식 샜다.


“바라지 않은 손길은 도움이 아니라… 침범이잖아요.”


정원엔 가뭄과 그늘을 모르는 맹추 같은 것들만 모여 사는 줄 알았다. 그제서야 그를 돌아볼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지금껏 어루더듬은 장미 꽃잎의 색을 띤 분홍빛 뺨, 바라지 않은 침범으로 인한 두려움에 꽉 말아 쥔 손이 그제서야 보였다. 달싹이던 입술이 경계로 꾹 다물린 것, 곧은 눈썹이 솟아오른 모양, 씨앗이 머무르는 땅을 닮은 갈색의 눈동자와 매끄러운 눈 아래로 도톰하게 도드라진 살 따위에도. 그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으나 뜻하지 않았던 침략 이후로 대신 흉터라도 남은 것처럼 자꾸 신경이 쓰이고 간지러워서 나는 정원을 틈이 날 때마다 드나들게 됐다. 빨갛게 물든 장미보다 발긋한 뺨으로 가르쳐주는 저 꽃과 이 꽃의 이름이, 모양에 관심이 생겼다. 더 나아가서는 꽃의 이름을 발음하는 그 입술에 관심이 생겼다. 하잘 것 없는 꽃들이 지닌 이름이 질투가 났다. 캄파넬라, 줄리엣, 피오니… 고운 입술이 둥글게 말리며 마침내 바깥으로 꽃봉오리가 개화하듯 터져 나오는 소리가 부러웠다.


“난 이름이 없어.”

“왜?”

“글쎄, 바람과 비는 부르지 않아도 곧잘 찾아오니까?”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정원에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로 내 사정을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느라 일그러진 미간이 그렇게 예뻤다. 활짝 만개한 작약만큼. 그 어느 꽃잎의 주름, 깊이, 잎맥보다 고운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정원에 사는 절대자의 꽃에게  입을 맞췄다. 빈은 나를 은우라고 불렀다. 그날 우리가 입을 맞출 때 연못 위로 비쳤던 은색 달빛, 비를 몰고 다니는 나를 꼽아서 지은 이름이라고 알려주었다. 은우. 나는 그가 아끼고 돌보는 꽃이 된 기분이었다. 그 이름이 참을 수 없이 마음에 들었다. 빈을 끌어안고 소리가 피어나는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댄 뒤 내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달라 졸랐다. 착한 빈은 싫은 기색도 없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몇 번이고 은우야, 은우야. 은우야. 다른 소리로 나를 피워냈다. 만개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


불공평함을 알게 된 이후로 나는 크게 후회했다. 빈이 꽃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정원 바깥을 사랑하지 않는 게 그들의 맹세이리라 결단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다. 나는 빈의 세계를 침범했고 헤집고 무너뜨린 게 되는 셈이었다. 그가 열심히 나를 재정립하고 명명하고 애정을 담아 불러줄 동안 그를 파괴했다. 어떻게 그랬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는, 나는 그래선 안됐다. 서둘러 빈을 찾아 사과를 전하고 절대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려 했으나 빈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불공평함을 익히 알아 숨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입을 맞추고 살을 비비는 일련의 행위들이 내밀한 곳에서 샘솟은 애정을 달랠 길이 없어 소리 대신 나누는 몸짓이었다는 걸 알고 겁에 질렸을지도. 밤낮으로 빈을 기다리고 찾았지만 빈을 봤다는 이야기가 하나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가 밤에 몰래 숨어든 정원, 그 장미덩굴 앞에 서서 빈을 생각했다. 그새 내가 헤집었던 꽃송이가 활짝 피어 눈에 띄었다. 작고 색만 진하더니 햇빛을 받았다고 남들보다 화려하게 꽃잎을 펼친 자태가 달빛 아래에서도 유난히 불그스름했다. 나는 작은 이파리 하나가 그 꽃잎을 가린 것이 아쉬워 검지로 이파리를 밀었다. 뒤늦게 만개한 꽃이 잘 보이도록.


“바라지 않은 손길은 침범이야.”


애타게 찾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빠르게 옮겼다. 빈이었다. 그토록 찾고 싶었던. 그는 바라지 않은 침범으로 잘게 떨고 있었다.


“빈아.”

“우리가 하는 맹세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

“…응, 알아.”

“난 정원만을 사랑하겠다 맹세하면서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어. 알고 싶지도 않았고 알게 되어도 나를 지킬 자신이 있었던 거야.”

“빈아.”

“멍청하다고 생각했어. 맹세를 어기면 날개를 잘리고 추방을 당하게 되니까. 그냥, 나를 죄다 빼앗긴 채로 겨우 껍질만 남아 쫓겨나고 마는 거야. 이해가 안 되잖아. 나를 모조리 내어줘도 좋을 무언가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어? 내가 볼 수 없는 세계는 무의미한데.”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잘게 떨리던 어깨가 큰 파동으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를 안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은우야, 있더라. 다 내어줘도 좋은 게 진짜 있었어.”


빈이 한 발짝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이파리를 밀어낸 것처럼 그의 눈썹을 덮은 앞머리를 손끝으로 넘겨주었다. 나는 그게 뭐였느냐 묻고 싶었으나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괴로운 표정으로 서있었다. 손을 잡아주고 싶었으나 또 그의 세계가 침범에 괴로울까 걱정이 되어 어쩌지 못하고 서성였다.


“사랑해.”


문득 고통스러운 신음이 뱉어지듯 들린 말에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무게를 재어본 적 없던 말이 생에 들은 어떤 말보다 무거워서, 빈이 내게 덜컥 내어준 마음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서 나는 마냥 붙박인 채로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잖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행복한 시간들을 더듬는 동안 어둠이 짙게 깔렸던 감옥 안이 서서히 밝아졌다. 빈이 그립고 안타까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장미꽃이 몰래 숨겨놓은 가시에 찔려도 크게 놀라는 일이 많은데, 정말 그 여린 날개를 잘라 내동댕이쳤는지, 내게 그 모든 벌을 내리고 그에게는 용서를 줄 수 없었는지 그들이 원망스러워 다시 몸부림쳤다. 빈아, 보고 싶어. 내 세계, 내 전부, 나를 이름 지어준 너. 보고 싶어, 빈아.


ㆍㆍㆍ


사지를 결박한 사슬이 답답하고 차가웠다. 아니, 곧 내 체온이 묻어 따뜻해졌다. 빈의 곁에 내내 머물렀을 온기가 햇빛이 아니고 그의 자유를 속박하는 이 쇳덩어리들이었을 걸 생각하니 이가 갈렸다. 내 고개가 숙여지는 것을 본 간수가 사슬을 확 당겨 고개가 떨어지지 않게 제지했다.


“그대는 고개를 들라.”


고개를 들 생각이야 없었으나 고개를 숙인 채로 둘 리가 만무했다. 머리채가 당겨지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며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표정이 없는 조각상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죄를 익히 알겠지. 그대는 정원을 어지럽혔을 뿐만 아니라 그대의 의무를 저버렸잖아.”

“빈이는… 어떻게 됐습니까.”

“대도시 하나가 말라 비틀어질 동안, 그 곳에 사는 생명이 다 시들 동안 그대는 무얼 했지? 그 천사를 꾀여내기나 했어.”


이어지는 추궁에도 은우는 조각상을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배심원 자격으로 참석했을 것들이 수런거렸다. 빈아, 빈아. 이름의 주인이 없는 곳에서 기도문이라도 읊듯 은우가 연신 빈의 이름을 뇌까렸다. 수런대는 목소리들이 점점 커졌다.


“그대는… 정말로 그 천사를 사랑하나 봐.”

“그에게 무슨 벌을 내리셨습니까.”

“진리를 깨닫도록 날개를 찢고 기억을 헤집어 다른 세상에 보내놓았지.”


이어 들려오는 소음들은 빈이 머무르는 그 세계의 소음인 듯 했다. 가만히 들려오는 소음들을 아무리 곱씹어도 빈에게 좋은 말을 건네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다정하고 착한 이를. 은우가 다시 이를 까득 씹었다. 왜 나만 이런 일을 자꾸 겪어야 하지, 빈의 목소리가 푸념하듯 들렸다. 제아무리 벌이라지만.


“그대의 권능과 자유를 걸고, 저 천사를 찾으라면 그대는 찾을 수 있을까?”


은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나랑 네 존재를 걸고 내기를 하는 거야. 저 천사는 앞으로 서른 번은 더 환생을 하게 될 텐데, 형벌로 주어진 삶이니 일찍 죽거나 억울하게 죽는 일도 잦겠지. 물론 여기서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깊이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도 다 잊어버렸어. 그게 저 천사의 벌이거든. 날 이기고 저 천사랑 행복하게 다시 살고 싶거든… 쟤가 앞으로 열 번 죽기 전에 널 떠올리게 해 봐. 어때, 걸래?”


존재를 걸라고 했으니 은우가 내기에서 진다면 소멸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은우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을 찾으러 가겠다고. 서서히 죽는 기분을 느껴 봐. 그 말과 함께 격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물살이 빠른 강을 지나가듯 새까맣고 휘황찬란한 공간에서 혼자 눈을 떴을 때, 은우는 그게 헤집어야 하는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빈의 목소리를 찾는 거였다. 그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몸이 조각나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시간을 헤집어 빈을 찾아내면 반가움에 말도 하지 못하고 빈의 이름만 부르는 때가 많았다. 빈은 한결같이 우는 은우를 영문도 모르고 달래주었다. 기억도 하지 못하면서. 그게 은우의 첫 번째 형벌이었다.


은우를 만났으나 기억해내지 못한 빈은 곧 죽는다. 운이 나쁘면 은우가 도착하기 전에 빈이 죽는 일도 많았다.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고 헤집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때로 너무 빨리 도착해 빈을 찾지 못하고 다시 시간 속으로 몸을 던지기도 여러 번이었다. 차라리 만나지 못한 때는 더 나았다. 빈이 죽는 걸 지켜볼 필요는 없었으니까. 비와 구름을 호령하고 기도를 듣던 때와는 달랐다. 시간을 찢을수록, 빈이 그를 기억하지 못할수록 권능을 잃어 무능력하게 빈의 죽음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게 은우의 두 번째 형벌이었다. 구해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 위태로운 상황이면 손을 뻗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은 그의 앞에서 자꾸 죽었다. 죽어가면서도 빈은 은우의 눈물을 훔쳐주려고 했다. 지나치게 다정하고 사랑이 많은 내 연인, 차마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씹으며 힘없는 손을 붙잡아 입맞추는 게 고작이었다.


단지 사랑했다는 이유로 받는 형벌이라고 하기엔 일련의 과정들이 지나치게 끔찍했다. 간발의 차이로 그는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는 빈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또 죽어가는 모습만 봐야 했다. 자꾸만 고통을 겪게 하는 것이 미안해 그는 차가워진 빈을 끌어안고 울었다. 길게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다른 시간에 나타날 빈을 찾아야 했으니까.


시간을 헤집을 때마다 고통이 더 날카로워지고 오래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점차 신의 권능을 잃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두 번.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빈이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해 보내는 낯선 시선이 더 아프고 무서웠다. 너의 은우인데. 네가 사랑했던 은우인데. 밤하늘 사이를 찢으며 따끔거리는 손을 은우가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다음에 만나면, 얼마나 소중했는지 보고 싶었는지 꼭 말해주겠다고 다짐하면서.


"다시 만나면 그땐 꼭 내 이름 불러주기야."


절규를 닮은 부탁이었다. 빈이 기억해내지 못하면 또 죽는 모습을 봐야 했으니까. 그러나 여태 그랬듯 빈은 은우를 기억하지 못했다. 생명이 다 꺼져가는 몸을 안고 빈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속삭이다가 은우는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하얀 얼굴 위로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승산이 없는 게임이야.]

“응, 알아.”

[그냥 잘못했다고 빌고 그 천사는 잊어. 어차피 기억은 잃겠지만 다시 돌아오게 될 거고, 너 진짜로 ‘늙고’ 있어. 내기 자체가 너한테 불리한 게임이었다니까!]


알고 있다.

멍청한 짓이라는 것도, 승산이 없다는 것도, 패배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점점 권능을 잃고 있다는 것도. 시간을 더듬을 때마다 저릿하던 손에는 사나운 시간이 할퀸 흉터들이 가득했고, 몇 개는 아물기도 전에 또 상처가 나는 바람에 몰골이 제법 험악했다.


“겁이 많아. 그냥 어두운 것도 싫어하고, 아픈 것도 무서워해. 아프다는 게 뭔지 잘 몰라서 더.”

[…실패하면? 이번에도 걔가 널 기억하지 못하면 넌 없었던 존재가 되는 거야.]

 “그래도 가.”

[…….]

“백만 분의 하나라도 내가 성공할 확률이 있으면, 빈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으면.”


그렇게 소멸한다면 그게 마지막 형벌이겠지. 은우는 시간 틈새로 흐릿하게 비치는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 대답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불필요한 침범이었으니 그것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 침범 때문에 날개가 꺾였던 사실도 잊고, 전부를 내어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도 잊고. 다시는 천사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도록… 행복하게. 덜 아문 살이 너덜거리는 손으로 은우가 다시 시간을 헤집었다. 쑥 공간으로 빨려 든 몸이 어딘가에 내던져졌다. 균형을 잃어 넘어지지 않도록 몸에 힘을 주고 선 몸이 바람에 휙 흔들렸다. 은우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욱신대는 손을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그가 우뚝 멈췄다. 건너편 건물에서 난간을 짚고 선 인영을 봤기 때문이었다. 위태로운 자세로 선 인영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빈이었다. 뒷목을 타고 바싹 소름이 기어올랐다. 빈아! 은우가 빈을 부르며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빈이 잠깐 움찔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내젓곤 그대로 난간을 잡았던 손을 놓아버렸다. 바람이 많이 불어 떨어지는 빈에게 가까이 닿는 것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빈아! 빈아… 내내 그리워했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거리에 애가 닳아 힘을 준 손끝에 피가 맺혔다. 은우가 마침내 빈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손을 잡았을 때, 빈의 눈이 커졌다. 빈아, 왜 이런 선택을 했어? 빈아. 빈아, 왜 하필 이런 방법이었어? 여러 가지 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였다.


“차은… 우?”


빈이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자세히 듣지 않았으면 바람소리에 흩어져 들리지 않았을 소리였다. 놀란 은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빈이 바닥과 충돌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뱉지 못한 말들과 비명 대신 은우가 다시 이름을 불렀다. 빈아, 그 목소리에 채 대답하기도 전에 빈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Past fin.



그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궁금했다. 취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얼굴에선 취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나를 범죄의 표적으로 삼은 걸까 어림짐작하기엔 우리 집과 나를 통틀어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거라곤 내 신장 두 쪽이 고작이라, 왜 나를 그렇게 애틋한 얼굴로 보는지 내 이름을 그토록 아프게 부르는지 궁금했다.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어.’


한편으로는 그럼 더 일찍 찾아와주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항상 고약한 외로움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엄만 내가 독립적인 성향에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싸가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애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래야 엄마가 내게 죄책감을 덜 가지기 때문에 그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행동했을 뿐이었다. 우리 빈이, 혼자 있을 수 있지? 그게 어린 내게는 꼭 사형선고처럼 들렸는데. 혼자 남겨진 집안에 누우면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죽이려고 할 것 같고, 경첩이 말썽인 장롱에서 끽끽대는 문을 열고 머리를 늘어뜨린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밤이 두려웠었다. 그렇게 외로움에 떨지 않도록 더 빨리 날 만나러 오지. 장롱엔 귀신이 없고 엄마는 나를 혼자 두어야 하지만 나를 많이 사랑하고 내가 너랑 있으니 널 공격하러 올 괴물 같은 건 들어오지도 못한다고, 그렇게 말도 해주지.


‘나 정말 모르겠어?’


정말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니, 알았던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익숙하기도 했다. 아마 고약한 외로움에서 비롯되었을 원망이 툭 튀어나와 때로 곤란했었다. 그런데, 그거 꿈 아니었나? 이 다음에 사고를 당해 죽는.


‘다시 만나면 그땐 꼭 내 이름 불러주기야.’


이름도 가르쳐주지 않았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 그게 우스운데 한편으론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하도 간절해 보이고 애틋해서, 이름이 뭐냐고 물어보려 했었지. 그래서 눈에 밟혔고, 생각하다가 차에 치였고… 그게 꿈의 내용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내게 손을 뻗었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때였다. 꿈에서 만난 그 남자였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은우. …은우, 은우. 왜 알고 있지?


발목 근처를 찰랑거리는 수면을 휘적휘적 걸으며 나는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남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은우, 은우. 그 이름을 계속 곱씹다가 어두컴컴한 곳을 홀로 걷는 게 무서워 이내 그 이름을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쩡쩡 내 목소리가 울리기나 할 뿐 남자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그 남자를 알고 있지? 꿈이 아니었나? 그러면 내가 차 사고로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있지? 꿈에서의 집은 우리 집과 달랐다. 나는 그렇게 허물어져가는 집에 살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럼, 뭐지?


‘꽃이 아파 보여도요?’


웃음기가 묻은 은우의 목소리. 또 머리를 찌르고 후벼파는 듯한 격렬한 두통이 밀려왔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쥐며 신음하다가, 찰랑거리는 물 위로 넘어졌을 때에야 돌연 무언가를 떠올렸다. 내가 은우를 사랑했다는 것. 그 이후로 밀려드는 기억을 감당하기 위해 나는 물 속을 굴러다니며 고통을 참으려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나는 형벌을 받는 중이었다. 모든 기억을 빼앗기고 빌어먹을 절대자에게 속죄하는 의미로 망각과 죽음을 선고 받았지. 망각, 그게 제일 괴로웠다. 그의 이름을 지어준 것도 기억하는 것도 나 하나 밖에 없는데, 내가 이름을 잊어버리면. 아주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면 남겨진 그는, 내 은우는. 꽃보다 더 소중해진 내 다른 정원은. 나는 그를 다시 만나야 했다. 잠깐이나마 미워해서 미안하다고, 사실은 아직도 너를 제일 사랑한다고, 벌을 받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니까 나를 찾지 말고 용서를 빌라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는데? 난 여기 갇혔잖아. 물 속을 기면서 은우를 몇 번 불렀을 때였다. 빈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그게 꼭 구원 같았다. 내 세계의 절대자는 은우고 그의 목소리가 내겐 빛이고 길이며 구원이 됐다. 다시는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았다. 그가 내 진리가 되어줄 거니까, 내가 그의 경전이 되고 지도가 되어줄 거니까. 나는 희미하게 들리는 그의 목소리를 따라 허공을 더듬었다. 어딘가에 닿았을 때 그의 목소리가 좀 더 크게 들렸다. 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린 곳을 주먹으로 콱 쳤다. 발로 차고 긁다가,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을 때 손을 찔러넣었다. 쩍 소리를 내며 어둠이 갈라지는 게 보였다.


“…헉!”

“빈아!”


눈을 뜨자마자 나는 답답함에 컥 소리를 내며 단단한 팔을 콱 때렸다. 빈아, 빈아.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듯 열렬히 내 이름을 부르던 은우의 목소리 끝이 먹먹하게 뭉개지는가 싶더니 정말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이것 좀 놓아보라고 말을 하려다가 말고 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다가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여야 했다.


“내가 정말 죽은 줄 알았어?”

“난… 내가, 손을 미끄러뜨려서… 너를, 널….”

“어차피 죽게 되어있었잖아. 살렸어도 죽었을 거야.”

“나, 나. 나 기억나? 빈아, 나 누군지 알겠어?”


얼굴을 떼어내고 내 어깨를 움켜쥔 그가 젖은 눈으로 시선을 부딪혀왔다. 조금 놀려줄까 싶었던 마음이 돌연 와르르 무너진 까닭은 그의 얼굴에 가득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젖은 뺨을 감싸쥐고 이마를 맞댔다. 이어 닿는 코끝도 축축하긴 매한가지였다.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어디 있어.”

“…….”

“은우야, 내 정원. 나 그래도 약속 지켰지? 다음에 만나면 이름 불러주기로 했었잖아.”


비의 신 아니랄까 봐 만지는 곳마다 죄다 축축한 게 우습고 귀여웠다. 동그래진 눈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붙이려는데 먼저 입술을 부딪혀 온 그가 성급하게 굴었다. 정말 내가 살아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밀어붙여오는 것에 뒤로 떠밀릴 뻔했다. 고개를 비틀어 입술에서 빠져나와 웃음을 터뜨렸다. 많이 무서웠구나. 내가 그랬던 만큼. 그러다간 찢어지고 터진 손에 눈길이 닿았다. 공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나는 그 손을 쥐어 올려 그곳에도 입을 맞춰주었다.


“많이 보고 싶었어.”

“나도, 빈아.”

“우리 이제 같이 있어도 돼?”

“이제 다시는 안 놓칠 거야.”


그가 내 뺨을 붙잡았다. 놔달라고 한다거나 도망갈 생각도 없는데, 제가 코 꿰인 걸 모르고 하는 말이다. 나는 그게 웃겨서 또 피식 웃었다. 침범 어쩌고 하면서 처음부터 머물러야 할 핑계를 내민 건 나였는데.


“내게 얼마의 시간이 더 주어지든지 널 기억하는데 다 쓸 거야, 은우야.”

“사랑해.”

“사랑해.”


동시에 뱉어진 고백이 전처럼 무겁지 않아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고백의 무게를 함께 나눠 가졌기 때문이겠다. 사랑해, 사랑해. 이름에 고백을 숨겨 불렀던 어느 날의 억울함을 덜어내듯 서로를 끌어안고 마주 보며 내내 속삭였다. 퇴색되기도 쉽고 그 무게를 잃기도 쉬운 말이라던데 말하면 말할수록 자꾸 심장에 누가 바람을 불어넣은 듯 자꾸 부풀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예 심장이 뜨거워졌다가 아주 녹아버린 것도 같았다. 그 무엇보다 강렬하고 바꿀 수 없는 나의 꽃, 정원, 절대자. 나는 그 이름을 평생 섬기겠다고 새로 맹세했다.


“결국 그대와 그대의 천사가 이겼군. 내가 졌으니 둘이 행복하게 살도록 내버려둬야겠네.”

“…….”

“표정 좀 풀지? 이겼으면서. 내가 내기에서 진 건 처음이라 나한테 한 가지 부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어. 신중하게 사용하도록 해.”

“지금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될 거 없지.”


조각상을 바라보던 은우가 옆에 선 내 손을 잡았다.


“하늘이 아니라 사람들의 세상에서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습니다.”


ㆍㆍㆍ


“아!”

“빈아! 조심해.”


핸드폰으로 켜둔 레시피를 보면서 조리하다가 하마터면 내 손가락까지 자를 뻔했다. 결국 베이기는 했지만. 이제 잘 낫는 몸도 아닌데 좀 조심하라고 쉬지 않고 지청구를 놓으며 은우가 피가 나는 내 손가락을 덥석 물고 쭉쭉 빨았다. 입에 뭘 물리면 조용해질 줄 알았는데 눈으로 항의하는 꼴이 어쩐지 시끄러워 손을 뻗어 그의 귀를 쥐고 쭉 당겼다.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거 해주고 싶었는데.”


너 요리 못하잖아. 그가 눈으로 또 뭐라고 대꾸하는 듯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물린 손가락을 확 빼냈다. 깊이 베인 건 아니었는지 벌써 피가 멎었다. 침이 묻은 손가락을 앞치마에 쓱 닦아내고 홱 돌아섰다. 누가 요리 못하는 거 몰라, 내려와서 처음 맞는 기념일이니까 맛있는 거 해주고 싶어서 그러지. 입술을 비죽대며 도마 위를 정리하는 사이 은우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나 먹고 싶은 거 있는데 그거 해주라, 그럼.”

“…들어보고.”

“너.”


빙글 뒤를 돌아 미쳤냐고 어깨를 내리치려다 손목이 붙들렸다. 그는 내 손목을 잡아당겨 퍼즐 조각을 맞추듯 당연히 입술을 포개왔다. 상으로 받은 나날들은 결코 내내 평온하거나 완벽하지만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괜찮아, 날 녹여주고 더 뜨겁게 하는 완벽한 내 꽃이 언제나 내 곁에 피어있을 거니까. 닿은 코끝만큼 부푼 마음이 간지러워 나는 입술을 맞춘 채로 웃고 말았다. 덩달아 그도 웃었다. 나는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시선과 마음이 이렇게 맞닿아있게 해달라고.


Future Fin.




별후광음(別後光陰)

이별 후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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