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령

2019 가을호
작성자
까마
작성일
2020-11-12 16:27
조회
3

먼 옛날, 화호봉(華狐峯)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여우신이 있었단다. 산의 이름과 같이, 아름답게 빛이 나는 자애로운 신(神)이었지. 그 분을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을 잃었지만 깨어나면 입을 모아 말했다더구나. 황홀한 달빛, 그리고 방울 소리... 마을 사람들에겐 그저 환상과도 같은 분이었단다. 여우신의 덕에 마을은 굶주리는 이도, 억울하게 죽는 이도 없이 평화로웠지.

 

 

여우신께선 분명, 인간을 사랑하셨을 게야.

 

 

 

 

 

***

 

 

 

 

 

푸른 달이 밝다. 마당의 평상 위에 누워 하늘을 마주한 은우는 손을 뻗어 하늘 가득 뜨겁게 빛나는 별들을 그러쥐듯 허공을 잡았다. 마치 그럼으로써 차게 식은 저의 손을 덥힐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마른 바람으로 잿빛이 된 마음을 채울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거진 10년만에 찾은 고향 화호리(華狐里)는 가슴이 먹먹해질 만큼이나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였다. 제각각 옅고 짙은 잎새를 한 몸에 품고 있는 화호봉도, 어린 은우의 머리맡을 지켜주던 그의 조모도, 그녀의 낡고 둥근 집 지붕과 도자기를 굽는 가마 속 흙의 향도 전부 은우의 그리움이 그려내던 것들과 꼭 같았다. 그들이 은우를 기다려 주었던 것인지, 아니면 잊어버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제자리에 머물러 조용히 자신들을 지켜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고맙고 대견스러운 은우였다.

 

 

"변한 건 나 뿐인가."

 

 

가만히 한숨을 뱉는 은우의 마음이 끝도 없이 공허함으로 팽창한다. 그의 마음이 꽃이라면 그 꽃은 이미 메마른 잎사귀를 떨군 후일 것이고, 그의 마음이 방이라면 그 방에서는 그 누구도 잠을 청하지 못할 것이리라. 애초에 속에 담지도 않았던 소중한 무언가가 너무도 간절해서, 무너져 가는 방 속에는 웅크린 은우와 먼지가 된 꽃만이 깔려 있었다. 정체모를 것을 향한 갈증이 그를 발 끝부터 휘감아 더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었다. 당연히 그에겐 알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형용모순적 갈증을 해결할 방안이 없었고, 제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절망에 맞닿으면 으레 그리하여왔듯이 웃음으로 덮어 묻어버릴 뿐이었다. 툭 치면 바스라질 것만 같은 마음을 적셔 단단히 만들어 줄 누군가를 그저 기다리면서.

 

 

"아가, 자야지."

 

 

불쑥 청년이 되어 돌아온 은우에게 조모는 한결같이 따스했다. 아가. 어찌나 다정스런 사랑으로 두텁게 감싸인 말이던지. 또래보다 키도 크고 훤칠한 열아홉 소년에겐 과할 법도 하건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애정을 전했고, 은우 또한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린 기억 속의 어렴풋한 것이 아닌, 피부로 느껴지는 조모의 사랑은 그를 편안케 했다. 비로소 내가 집에 왔구나, 내게도 집이 있었구나. 내가 갈망했던 그것도, 이 곳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아가."

 

 

대충 쌓아두었던 짐 꾸러미를 조심스레 건너 방문 앞에 선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당겼다. 끼익,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소음이 잇다르고, 그의 눈에 변한 것 하나 없이 정갈한 방이 들어왔다. 날 기다렸구나. 가슴이 벅차오른다. 독서를 좋아하는 은우를 위해 조모가 글자를 직접 외워가며 먼 시내 책방까지 나가서 구해다 준 책들, 조모가 빚어 구워 준 도자기 인형들, 벽 한켠 가득 붙어있는 은우의 낙서들. 은우는 낙서가 붙어있는 벽에 다가섰다. 낙서 속의 그는 모두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도자기 물레를 만지며, 조모의 무릎에 앉아,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가족과 나들이를 가서... 하나하나 손으로 쓸어 가며 기억을 더듬던 그는 더이상 과거의 행복을 바라볼 면목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전부 떼어 버려야겠다. 지금은, 지금은 그림 속 은우가 조금만 더 웃을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내버려 두고.

 

 

습관처럼 예쁜 웃음을 쓰게 지으며 그는 벽에 등을 돌린 채 잠자리에 든다. 작은 등불 하나 없이 캄캄한 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이유는 풀벌레 소리가 귀에 울려 그런 것이라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

 

 

 

 

 

"다녀오겠습니다."

 

 

어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해서인지, 꿈자리가 사나웠던 것인지 답지 않게 평소보다 늦게 눈이 떠졌다. 새로 다니게 될 학교에 늦지 않기 위해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느라 벽의 낙서를 떼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진돗개 동구가 꼬리를 흔들며 그의 다리에 몸을 부빈다. 지금은 안 돼. 이따가 놀아줄게. 그래, 착하지.

 

 

"잘 다녀오너라. 선상님 말씀 잘 듣고, 아들이랑 잘 놀고!"

 

 

대답 없는 공기 속에 홀로 인사하는 것이 익숙한 은우에게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없이 어린아이나 들을 법한 잔소리를 하는 조모에, 입가에 담뿍 미소가 지어진다. 네, 할머니. 씩씩하게 외치고 대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이 가볍다.

 

 

학교는 마을에 난 외길을 따라 이십 분 정도를 쭉 걷다 보면 나왔다. 시골 마을의 작은 학교였으므로 등교길은 어색할 정도로 휑했고, 간혹 동네 사람들이 기르는 누런 개들이 쫄래쫄래 따라오다가 저들끼리 맞붙어 장난질이나 치는 광경이 전부였다. 초여름의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자 학교에서 물려받아 몸에 익지 않은 교복 와이셔츠에 살이 스치는 느낌이 신경쓰인다. 문득, 밤새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그 지겨운 갈증이 비로소 풀리고 청량한 푸르름이 그를 감싸안는 꿈. 분명 누군가 은우를 쓰다듬었고, 말을 건네왔다. 그 목소리를 듣는 저는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며 기억나지 않는 그의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이게 꿈은 아니겠죠? 간절히 묻는 은우에게 목소리는 답했다. 아니야. 꿈 아니야.

 

 

"꿈 아니라더니..."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리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은우의 머릿속에는 푸른 달빛만이 그득했다. 걷어낼 수 없는 안개가 들어찬 것처럼, 그의 목소리조차 희미해져간다. 그렇게 은우에게 남는 것은,

 

딸랑-

 

저 멀리 은빛 머리카락이 반짝인다.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 맑고 날카로운 방울 소리. 은우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하고, 은우는 꿈 속의 그것과 똑 닮은 방울 소리에 홀린 듯이 작고 흰 뒤통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기...!"

 

 

딸랑-

 

드디어 손이 닿을 것이라 생각했을 때, 방울 소리와 함께 달빛 조각은 사그라들어갔다. 그 사람을 붙잡으려 내민 손에는 별을 잡지 못한 어젯밤처럼 허공만이 얌전히 들려 있을 뿐이었다. 뭐지, 귀신이었나. 갑자기 밀려오는 오한과 두려움에 다급히 돌아서는 그의 발에 무언가 채인다. 작은 나무 패였다.

 

- 文 彬 -

 

"글월 문, 빛날 빈...? 이게 무슨 뜻이야."

 

 

초승달 모양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 주인이 있는 듯 싶어, 은우는 마을 파출소에라도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무 패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폭발적으로 퍼져나갔다.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의 흙길은 간데없고 웬 숲 속에 은우 혼자 덩그러니 놓여진 것이 아닌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생각에 은우는 거의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무리 튼튼하고 건장한 소년이라도, 귀신은.. 무서우니까. 다리가 저절로 움직여 달음박질을 치기 시작한다.

 

 

누가 쫓아올 새라 길도 모르는 산 속을 무작정 뛰어 내려가면서도 은우는 방울 소리와 달빛, 그리고 새하얀 머리칼을 잊지 않으려 계속해서 머릿속에 되뇌었다. 숲은 생각보다 넓고 거칠었다. 우거진 나무와 덤불 사이를 헤치고 달리느라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지만, 그 때마다 누군가 잡아주기라도 하듯 다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자 거짓말처럼 산 아래에 다다랐고, 산을 빠져나오자마자 학교는 보란 듯이 바로 앞에 우뚝 서 있었다.

 

 

아침부터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것에 비해 시간은 넉넉했기 때문에 은우는 늦지 않게 교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고 낡은 학교의 내부는 부드러운 나무 향을 풍겨 꽤나 아늑했다. 담임은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이었다. 그가 몇 가지 설명을 마친 뒤 은우를 교실로 안내하자 교실 속의 둥그런 눈들이 일제히 은우에게 향했다. 저마다 빛나는 눈동자처럼 둥그런 궁금증이 뚝뚝 흐르는 관심에 은우는 고개를 돌렸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고, 남은 아이들은 가업을 잇기 위해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경우가 많았기에 이런 애매한 시기에 이런 애매한 곳으로 전학 온 은우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온 차은우라고 한다. 어릴 땐 화호리에 살았다니까 괜히 텃세 부리지 말고. 은우 한 마디 할래?"

 

"...잘 부탁해."

 

 

마지못해 웃으며 건넨 한 마디에 반 아이들은 약속한 것처럼 박수를 쳐댔다. 그 맑은 뜻과 순박한 소리는 참, 따스했다. 종례가 끝나자 모두들 은우의 주변에 우루루 몰려드는 모양도 퍽 귀엽다. 은우야, 서울 어디에서 왔어? 고향은 여기야? 너 눈 진짜 예쁘다. 은우야, 너 공부 잘 해? 우와, 그럼 대학도 가겠네. 은우야, 은우야... 어린아이처럼 앞다투어 조잘대는 아이들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고, 은우는 그 사이에서 빠져나오기까지 몇 번이고 속 없는 웃음을 둘러써야 했다.

 

 

"잠시만."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벗어난 은우는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에 가득하던 소음이 무색하리만치 마음이 허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이 넘치고 사랑이 충만한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그는 끝끝내 채워지지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모자라서. 답답한 기분에 멍하니 세면대 물의 흐름을 응시하다가, 괜스레 흐르는 물이 원망스러워 손으로 막아본다. 손가락 틈을 뚫고 물은 계속해서 터져나왔다. 나의 막힌 곳도 언젠가 터져버릴까, 생각한 그 때, 작은 손이 다가와 수도를 잠갔다. 아아, 물이 끊기고 말았다.

 

 

"이거 못 먹는 물이야."

 

"...?"

 

"마시려고 했던 거 아냐?"

 

 

뚱딴지같은 말을 잇는 목소리가 가늘고 앳되다. 은우는 뭐 하는 녀석인가 싶어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다시 소름이 돋아 다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은우의 곁에는 차가운 푸르름이 천천히 가라앉고 있을 뿐이었다. 낯설지만 익숙한, 이 빛은.

 

딸랑.

 

역시나. 달빛을 동반한 방울 소리가 희미하게 울린다. 이제는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고 뭐고 방울 소리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만이 은우를 사로잡았다. 저 녀석을 반드시 내 손으로 붙잡고야 말겠노라, 비장하게 다짐하며 교실로 향하는 은우였다.

 

 

 

 

 

***

 

 

 

 

 

"응? 우리 학교에 그런 애 없어."

 

"그래? 이상하네. 분명히 봤는데."

 

"은우 너, 설마... 교감 선생님 말하는 건 이니지?"

 

"응?"

 

"우리 학교에 머리 하얀 사람은 교감 선생님밖에 없어."

 

"..."

 

 

은우는 주머니 속 나무 패에 새겨진 글자를 손 끝으로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지었다. 말을 튼 거의 모든 친구들에게 은발의 소년에 대해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모두 같았다. 모르겠다, 혹은 교감 선생님이 아니냐. 덕분에 교감 선생님의 성명과 인상착의, 심지어 차종과 키우는 멍멍이 이름까지 온갖 불필요하고 궁금하지도 않았던 정보를 알게 되어버린 은우는 낭비한 시간과 뇌 용량이 아까워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로서 한 가지 가설은 확실에 근접해져 가고 있었다. 그 소년은, 화호리 사람이 아니라는 것.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수업을 마치고 학교를 나서며 운동장 너머에 위치한 화호봉을 흘긋 돌아보았다. 예로부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산의 빛깔이 바뀌는 것이 장관으로 유명해 신성시되던 산이었다. 화호봉에는 여우신이 살고 있다는 오래된 전설도 있을 만큼 마을의 자랑이었지만, 도시에서 오가는 관광객이 생기면서 화호봉의 나무는 줄어들고 터널은 늘어갔다.

여우신의 안위를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농사만으로는 만져보기 힘든 수익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산의 흙을 도로로 덮는 다섯 번째 공사 도중, 산사태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공사는 중단되고 관광객들의 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이후, 전에 없이 산의 동물들이 사람을 해치거나 밤중에 원인 모를 산불이 나는 등의 크고 작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화호봉을 지키던 신이 노하신 것이라며 뒤늦게 제사를 지내 보기도 했지만, 소용은 없었다. 화호봉의 흙은 버석해졌고 산이 지닌 빛은 명성을 잃어갔다. 이제 화호봉을 찾는 관광객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정말 신이 떠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산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산등성이를 막 넘어가는 여린 태양과 맞은편의 손톱달은 서로를 향해 저들의 은은한 빛을 내며 마주하고, 화호봉은 햇빛과 달빛을 동시에 받아내며 저만의 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조심스런 조화는 보는 이를 아릿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띄워내는 것처럼.

 

 

"다녀왔습니다."

 

 

대문을 열자 신이 난 동구가 뛰쳐나와 은우에게 달려들었다. 눈도 못 뜨던 새끼였던 것이 눈에 훤한데, 어느 새 핏덩이 여덟을 훌륭한 강아지로 키워낸 동구였다. 은우가 화호리를 떠나기 한 해 전, 동생이 생겼다고 들떠 직접 동구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우유도 먹여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일 년간을 정말 형제처럼 함께 자라다가 울며불며 생이별을 했더랬다. 은우를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건만 여전히 정도 많고 그를 잘 따르는 것이 뿌듯할 따름이었다. 저녁까지 은우를 기다리는 일에 꽤나 애가 탔는지 넘어진 그의 위에 올라타 열심히 얼굴을 핥으며 끼잉 낑 울어댄다. 아침에 약속한 대로 한참이나 공을 던져 놀아주고 나서야 드디어 은우는 지친 동구를 재우고 쉴 수 있었다.

 

 

"아가."

 

"안 주무셨네요."

 

"내 새끼덜 노는 소리에 깼지. 이리 누워 보련."

 

 

마루에서 조모가 다리를 톡톡 두드린다. 은우는 쭈뼛거리며 살포시 그녀의 마른 다리에 머리를 대고 모로 누웠다. 옆으로 기운 세상이 눈에 들어오고,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손길이 닿는다. 은우는 시선을 내리며 커다란 눈을 천천히 감았다. 온통 낯설기만 했던 삶 속에서 처음으로, 눈을 감고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 강아지. 언제 이리 컸을꼬."

 

"진짜 강아지도 많이 컸던데요."

 

"저 아는 내 손에서 크지 않혔냐. 우리 동민이는... 할미가 미안한 것이 너무 많아."

 

"할머니, 저 이제 은우예요. 동민이 아니고."

 

 

조모의 손이 멈추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틀어 조용히 바라보는 은우에게, 그녀는 주름진 웃음을 지어 주었다.

 

 

"나헌테 손주는, 이동민이밖에 없어."

 

"네에. 그럼 동민이 할게요."

 

 

은우도 마주 웃었다. 찌르르, 풀벌레 소리가 이제 막 여름에 접어든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어제는 잠을 방해하던 그 소리가,  이상스레 오늘은 잔잔히도 들린다.

 

 

잘 준비를 마친 은우는 방 안에 들어섰다. 조모와는 간만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친구들을 사귀었는지, 어릴 적 화호리의 추억은 어떻게 남았었는지, 얼마나 그리웠는지. 와 보니 어떻드나, 좋아요. 시시콜콜한 말이 오갔지만, 은우는 부러 가족에 대한 말은 꺼내지 않았다. 조모 역시 캐묻지 않았다. 그 새 은우의 부모는 암묵적인 금기어라도 된 것처럼, 또는 그들의 기억 속에서 도려내어져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흘려보내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서울에서의 일은 없었던 일로, 차은우는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저는 다시금 이동민으로.

 

 

하지만 당장에 벽에 붙은 낙서만 보아도 입술이 꾹 다물어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행복한 은우, 아니 동민은 그림 속에서 말없이 그를 바라본다. 깊게 반짝이는 눈으로. 손을 뻗어 그림 한 장을 떼어내었다. 온 신경을 기울여 조심히 뜯었음에도, 한 번 달라붙었던 것은 끝내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애초에 붙이지 말아야 했는데. 떼어낸 종이가 한 장 한 장 쌓여가며 은우의 속에도 상처가 쌓인다.

 

 

"어..? 이건 뭐지?"

 

 

마지막 그림을 떼고 무심코 바라본 종이의 뒷면에는, 낯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제 그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림 속에는 온통 새하얀 여우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종이 귀퉁이에 작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두 글자, 문 빈. 분명 어디선가... 아.

 

 

은우는 떨리는 손으로 교복 주머니에서 초승달 모양 패를 꺼내들었다. 이 글자가 대체 왜, 어릴 적의 낙서에 적혀있는 거지? 방울 소리는 뭐고, 흰 머리카락의 소년은 누구며... 그림 속 여우는 무슨 뜻일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대답 없는 물음들을 한참 곱씹던 은우는 이내 그림을 손에 쥔 채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할머니, 주무세요?"

 

"아니, 안 잔다."

 

 

은우는 희미한 전등불 아래 그림을 내밀었다. 조모의 눈이 가늘어졌다.

 

 

"할머니 혹시 이거, 무슨 그림인지... 아세요?"

 

"으응, 그럼. 알다마다. 아가 네가 여우신을 만났다면서 그렸던 게 아니더냐."

 

"네? 여우신이요?"

 

"그래. 우리 동민이가 가장 좋아하던 이야기 속 주인공이었잖니. 기억 안 나는 게냐? 날도 추운 겨울에 네가 며칠이나 없어져서 마을이 발칵 뒤집혔는데, 돌아와서 하는 말이 여우신을 만났다지 뭐냐. 그러고선 내리 사흘을 열병을 앓았었단다. 그 때 할미가 얼마나 속이 곯았던지. 간만에 보니 이리 새록새록하구나."

 

내가 여우신을 만났다고?

 

 

"할머니, 그럼 여기 써있는 글자는 무슨 뜻이예요?"

 

"으이? 무슨 글자?"

 

"여기 구석에요. 「문 빈」이라고 써 있는데..."

 

"예끼, 이 녀석. 아무리 할미가 까막눈이기로서니 글자가 뭔지도 모를까. 아무 것도 없지 않니. 놀리는 게냐?"

 

"네? 그게 아니라,"

 

"이제 늦었으니 어서 자려무나. 간만에 동민이 좋아하는 여우신 이야기나 해 주랴?"

 

 

낙서에 적힌 「문 빈」이 여우신과 관련된 말이라면, 주웠던 패는 여우신의 것일까. 왜 할머니께는 보이지 않는 거지. 나는 진짜 여우신을 만났던 것일까. 꿈이 아니었을까... 기억이 없다. 물음표는 풀리기는 커녕 더욱 늘어만 가고, 조모는 어리둥절한 은우의 어깨를 감싸 자리에 뉘여주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을 부드럽게 토닥이며 잔잔한 목소리로 노래하듯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 옛날, 화호봉에는 마을을 수호하는 여우신이 있었단다. 산의 이름과 같이, 아름답게 빛이 나는 자애로운 신이었지. 그 분을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기억을 잃었지만 깨어나면 입을 모아 말했다더구나. 황홀한 달빛, 그리고 방울 소리.

 

 

'방울 소리...'

 

 

아득해져가는 정신으로, 깊은 뜻도 없이 단어를 머릿속에 반복하여 적어 본다. 까무룩 잠이 드는 그 순간까지, 제가 무엇을 떠올리는 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다음 날부터 며칠간의 등교는 보다 수월했다. 방울 소리도, 은발의 소년도, 새들의 이상한 움직임이나 정신을 차려보니 생뚱맞은 곳에 와 있는 일도 없었다. 순박한 아이들은 벌써 은우에게 친근하게 대해 주었고, 도시의 학교들에 비해 교과 진도가 조금 느린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급식은 원래 다니던 사립학교보다 더 신선하고 맛있는 느낌이었다. 역시 여우신의 마을은 평화롭구나... 점심을 먹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는 아이들을 보자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은우는 빈 교실의 창가 자리에 앉아 운동장을 내다 보았다.

 

 

"잘들 노네."

 

 

걱정 하나 없어 뵈는 맑은 웃음들이 운동장 위를 누빈다. 커튼까지 친 답답한 교실 속을 메웠던 아이들의 땀냄새와 짜증이 아득한 옛날 일만 같다.

 

 

"그러게."

 

"응?"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하얀 남자가 서 있었다. 덥지도 않은지 기다란 두루마기를 걸친, 전래동화에 나올 법한 신선 같은 사람. 며칠 전 학교 근처에서 보았던 바로 그였다.

 

 

"누구세요?"

 

"나?"

 

 

그가 웃으며 다가온다. 은우와 남자를 감싼 모든 배경이 부옇게 흐려지고, 은우의 눈 속에는 시리도록 푸른 달빛만이 강하게 비친다. 은우의 발치에 다가선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네가 훔친 그거 주인."

 

"네?"

 

"돌려 줘. 중요한 거니까."

 

"제가 뭘 훔쳐요?"

 

 

이 무슨 난데없이 생사람 잡는 소리람. 억울함과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은우가 벌떡 일어나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했다.

 

 

"학교 관계자분 아니시면 선생님께 말씀드릴 겁니다. 허가는 받고 들어오신 건가요?"

 

"아이, 그.. 아니."

 

 

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우습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일까. 나는 그런 거는 잘 모르고오... 어쨌든 내 걸 찾으러.. 눈을 굴리며 웅얼거리는 남자에게 마음이 누그러진 은우가 말했다.

 

 

"대체 뭘 찾는 건데요?"

 

"그거 있잖아... 달 모양.. 산에서 주웠자나.."

 

"그, 나무 패요? 문 빈이라고 써있는 거?"

 

"뭐? 그것도 보여??"

 

남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은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혹시."

 

그의 시선은 은우의 명찰을 향해 있었다. 은우는 황당함의 연속 속에서도 왜인지 붙잡힌 어깨를 뿌리칠 마음은 들지 않아 한참 동안이나 제 가슴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남자를 그대로 두었다. 그의 눈빛에 간절함과 실망의 감정이 차례로 스치고, 이내 은우를 놓아주었다. 손이 닿았던 모양대로 교복 어깻죽지에 진 주름이 보인다.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이미 충분히 했기에, 은우는 굳이 무얼 한 거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 패가 당신 거라는 증거가 있나요?"

 

"응. 내 이름 써 있잖아."

 

"문빈이 당신 이름이라고요?"

 

"응."

 

"그럼... 당신이 여우신님이라는 거예요?"

 

"응. 그러니까 얼른..."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니, 진짜라고!!!"

 

 

그 때 점심시간이 끝나는 종이 치고, 빈은 환장하겠다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친구들이 우루루 몰려오는 발소리 사이로 딸랑, 조금은 익숙해진 소리가 희미하게 울린다.

 

 

 

 

 

***

 

 

 

 

 

그 후로 빈은 매일같이 은우를 찾아와 명패를 내놓으라고 닦달했다. 처음에는 여우신의 물건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거절했지만, 나날이 빈의 반응을 보는 재미를 알아가고 마는 은우였다. 그렇게 은우의 일상에 빈이 불쑥 들어선 몇 주가, 몇 달이 훌쩍 지나갔다.

 

 

그 동안 은우가 알게 된 빈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겉모습은 은우의 또래였으나 속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었고, 그 어린아이는 항상 어딘가, 텅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야, 차은우. 일어나. 학교 안 가?"

 

"...오늘 토요일인데요."

 

 

이젠 빈도 거의 친구 집에 놀러 오는 폼새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방 문을 벌컥 열고 멋대로 들어와 은우를 깨웠고, 명패를 돌려달라 하기보단 그 날 있었던 일을 일기라도 쓰듯 늘어놓기를 더 즐기는 것 같았다. 은우야, 나 오늘 고라니가 다람쥐 걷어차는 거 봤다. 고라니가 다람쥐 도토리를 밟고 있어서 옆에서 알짱대던 건데, 실수인지 뒷발로 뻥... 남의 간섭을 달가워하지 않는 은우였지만, 귀여운 얼굴로 꾸준히 찾아와 조잘대는 빈에 그냥 강아지 한 마리 더 생긴 거지, 하고 넘겨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문제라면 시간 감각이 어찌 된 것인지 매일 은우를 깨우는 시각이 몹시 불규칙적이라는 것. 덕분에 은우는 주말에도 꼭두새벽에 눈을 뜨는 날이 늘어갔다.

 

 

"명패 안 줄 거예요."

 

 

은우가 하품을 하며 선수를 쳤다. 이 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정말 끈질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은 아니지. 빈은 은우 외의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애초에 다른 이가 오는 낌새가 보이면 방울 소리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은우는 빈을 여우신의 물건을 탐내는 요괴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아, 왜! 아직도 내 말 못 믿는 거야?"

 

"네. 여우도 아닌데 어떻게 믿어요?"

 

"여우거든!"

 

"누가 봐도 사람이거든요."

 

"넌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우씨, 보여 줘?"

 

 

그리곤 뿅, 정말로 빈의 모습이 사라졌다. 뻘쭘해서 도망친 건가.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은우의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가 닿았다.

 

 

"으아?"

 

 

희고 보드라운 털복숭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컁컁 짖어대는 것이 분명 빈이 맞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이 털뭉치는... 여우보다는 조그마한 강아지에 더 가까운 것 같은데. 은우는 이게 무슨 여우냐며 빈을 안아들고 웃음을 터뜨렸다. 화가 난 빈이 꼬리를 거세게 흔들면서 발버둥쳤지만, 은우의 심장을 제외한 세상 무엇에도 해가 되지 않을 것만 같은 귀여운 몸짓일 뿐이었다.

 

 

"꼭 동구 아기 때 같다."

 

 

은우는 털뭉치를 그러안고 얼굴을 부비다가, 참지 못하고 동그란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놀란 빈의 꼬리가 팡 터지고, 저도 모르게 세운 발톱으로 은우를 할퀴었다. 은우가 반사적으로 빈을 놓치고 다급하게 받쳐 들으려 손을 뻗었지만 손에 닿는 것은 흰 얼굴 가득히 붉은 물을 들인 사람 모습의 빈이었다. 왜인지, 평소보다 위태로워 보이는.

 

 

"미, 미쳤냐?!"

 

 

딸랑. 사람으로 돌아온 모습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빈은 사라져버렸다. 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은우의 곁에는 늘 그렇듯 방울 소리와 흩어진 빛 조각, 그리고...

 

 

"오늘은 이것도 두고 갔네."

 

 

피식 웃음이 배어나온다. 은우의 손에는 그새 빠진 여우 털과 피가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한 얕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빈의 말대로 일단 여우이긴 했는데, 그렇다고 정말 여우신일까. 아무리 어릴 적에 그렸다지만 그림 속 여우신과 빈은 너무도 달랐다. 은우가 상상했던 여우신은 훨씬 더 크고, 신비롭고, 멋있는.. 그런 모습이었건만. 빈은 강아지와 별 다를 것 없이 작고 귀여운 새끼여우였던 것이다. 회청색 눈이 예쁘고, 털이 몹시도 부드럽고 꼬리가 풍성하고.. 귀엽고, 귀여워. 그렇게 귀여운 줄 알았다면 진작 보여 달랄 걸 그랬어. 앞으로 매일 볼 수 있겠지.

 

그러나 그 날 이후, 빈은 더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첫 하루는 해방감이었고, 다음 며칠은 걱정이었고, 그 뒤론 퍽퍽한 고통 뿐이었다. 은우의 하루하루를 매웠던 빈이 뽑혀나간 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그 자리에 패인 상처는 끔찍히도 깊었다. 지독한 갈증이 또다시 밀려왔다. 빈이 함께일 적에는 왜 자각하지 못했던 걸까. 내 갈증이 향한 이름모를 그것은 벌써 문빈으로 정의내려져 누구도 채울 수 없던 마음에 넘칠 듯이 차 있었는데. 뒤늦은 허망의 눈물이 빈이 없는 나날들을 대신한다.

 

 

주인을 잃고 먼지 속에 처박힌 지우개마냥, 그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이 주 하고도 사흘. 더는 어디까지가 먼지고 어디까지가 지우개인지, 온 마음이 검게 변해 분간도 되지 않을 무렵에서야 은우는 직접 빈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야위어가는 은우를 염려하던 조모에게는 인사할 자신이 없어, 동구의 등만 몇번 쓸어주고 집을 떠났다. 끼잉 쇳소리를 내는 동구의 털은 부드러웠다. 빈만 보면 그렇게 짖어대던 동구였는데. 손바닥에 묻은 강아지 냄새에 빈이 더욱 간절해졌다.

 

 

"얼른 여우 보고 싶다."

 

 

발이 닿는 대로 화호봉의 곳곳을 뒤졌다. 그가 늘 좇아왔던 철저한 계획 속의 안정은, 이제 더는 중요치 않았다. 길은 잃어버린 지 한참이었고, 빽빽한 나무들 새로 닿는 것이 햇빛인지 달빛인지도 모른 채 며칠을 빈의 이름만 외쳐댔다. 이상스럽게도 산짐승들은 은우를 공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숲은 그의 걸음을 반기는 듯 걷기 쉬운 길을 열어주고 깨끗한 시냇물을 흘려 주었다.

 

 

"빈아."

 

 

숲의 안내에 따라 헤맨 끝에 비로소 찾아낸 빈은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 눈을 감고 있었다.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해진 채로.

 

 

"왜 갑자기 반말이야."

 

"빈아."

 

"...응."

 

"이거... 꿈, 아니지."

 

"응. 꿈 아니야."

 

 

빈이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은우의 떨리는 손이 흐릿한 빈의 손에 포개지고, 그대로 통과하여 바닥에 떨어진다. 빈은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었다.

 

 

"나, 그 명패 없으면 죽어. 내가 여우신이었다는 유일한 증거거든."

 

"그럼 가져가요. 이제 필요 없어. 돌려줄게요. 내가 다 잘못했어요. 떠나지 말아요, 제발..."

 

"가져갈 수 있었으면 진작 뺏어갔지. 은우 네가 주운 순간부터, 난 그걸 잃은 거였어. 찾아갔던 건, 괜히 투정부렸건 거야. 네가... 내가 많이 보고 싶었던 사람을 닮아서."

 

"역시 내가, 줍지 말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미안해요..."

 

"널 만나서 후회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어. 난 많이 지쳤고..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

 

 

빈은 마르지도 않고 방울방울 흐르는 은우의 눈물을 닦아주려 뺨을 쓸었지만, 닿을 수 없었다. 난 정말 사라지는 거야. 빈의 눈가에도 맑은 반짝임이 맺혔다. 결국 그 아일 보지 못하고 가는구나. 날 끝까지 믿어주었던, 그 아이.

 

 

"사랑해요."

 

 

감히 끝을 헤아릴 수 없이 무거운 말이 고요한 숲 속에 퍼졌다. 눈물에 젖은 새빨간 얼굴로, 숨을 막는 울음 사이로, 제 몸을 지탱하기도 힘겨워 보이는 소년이 사랑을 말한다. 아아, 이대로 죽어도 좋다고, 미련은 접어두겠다고 그토록 어렵게 나를 속여왔는데. 이 소년은 끝내 내가 살고 싶게 만들고야 만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뜨거운 오열이 터져나온다. 만져지지 않는 서로를 찾아 허공을 끌어안고 더듬으며, 빈의 몸이 흩어지고 바람 속에 달빛만이 부서지게 될 때까지 둘은 미친 사람처럼 울음을 삼켰다.

 

 

빈은 사라졌다. 이젠 은우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그 흔한 방울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

 

 

 

 

 

"오랜만이구려."

 

"어어, 뭐야. 죽어도 여기로 와?"

 

"그대가 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섭리가 아니겠는가."

 

"재수없는 영감탱이."

 

 

빈이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닦으며 투덜대자 커다란 의자에 앉아 빈을 내려다 보던 풍채 좋은 노인이 껄껄 웃었다. 노인은 인간계의 신들을 관장하는 절대자였다. 그가 얼굴의 반을 덮은 수염을 손등으로 쓸다가 입을 열었다.

 

 

"재미난 이를 만났더군."

 

"남들 막 엿보지 말랬지. 변태야?"

 

"허허, 내 전지전능하여 보고 싶지 않아도 만물이 절로 눈에 뵈는 것을 어찌하란 말이오."

 

 

빈은 그를 한 번 흘겨보고는 눈을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절대자가 매여 있는 천계는 사십여년 전, 그리고 천년 전과도 다를 것이 없었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곳. 노래하는 새들도, 뛰노는 아이들도, 따뜻한 온기도 찾아볼 수 없는, 소름끼치도록 순수한 공백만이 존재하는 곳. 절대자는 이 곳을 벗어날 수 없다. 모든 신들과 세상 모든 것들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그임에도 불구하고.

 

 

"그래, 이제는 날 위해 일하여 줄 것이오?"

 

"싫다고 하면 보내 줄 거야?"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해서인가?"

 

"아니,"

 

그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어찌 이리도 어리석을꼬. 인간과 연을 맺은 것이 그리 떳떳한 일이오?"

 

"..."

 

"인간에게 정을 내주는 일은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 아이를 잊었듯 지내다 보면 그 이도 잊힐 것이오."

 

"잊은 적 없어!!"

 

 

빈이 소리쳤다. 계속해서 솟는 눈물 틈으로 푸른 눈을 번뜩이는 빈에 절대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을 연모한다는 것인가. 생각보다 추저분한 취향이구려."

 

"아, 그런 게 아니고!"

 

 

결국 눈썹을 일그러뜨린 절대자는 수염을 들썩이는가 싶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혼나고 있던 빈은 저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싶어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대는 재미있어. 어찌 제가 정을 준 인간을 그토록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오."

 

"무슨 소리야?"

 

"자네가 반한 그 이가, 이동민이라는 말이오."

 

"엥? 뭐? 아냐, 걔 이름 차은우야."

 

"차은우가 이동민이라고."

 

"어? 어? 왜???"

 

 

당황한 빈의 목에서는 음이 엇나간 소리가 멍청하게 흘러 나왔다. 절대자는 배를 부여잡고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그대의 연정은 그 아이의 이름만을 향했나 보오."

 

 

충격을 받은 빈에게는 끝까지 놀려대는 절대자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차은우가 이동민이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닮았다는 느낌은 확연히 있었지만, 분명 이동민은 내 허리춤에도 닿지 않는 어린아이였는데. 몆  년 안 됐을 텐데 그렇게 자랐을 리가... 천 년을 살아오며 망가진 저의 시간 감각과 인간들의 개명 문화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빈이었다.

 

 

빈이 아직 동민이었던 은우를 만난 것은 12년 전, 빈이 마지막을 보냈던 고목나무 아래에서였다.

 

 

바람 한 점 없이도 금세 코 끝이 빨개질 만큼 추운 겨울날 밤. 눈은 소복히 쌓여 달빛을 받아내고 있었고, 빈은 하루 종일 폭신한 눈밭에 누워 잠을 자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버섯을 따서 우걱우걱 씹어먹는 중이었다. 깜깜한 하늘은 고요했다. 지나가던 새끼 살쾡이 몇 마리가 추위에 떨며 다가오더니, 빈의 무릎에 폭 안기며 인사했다.

 

 

"안녕, 문빈 님!"

 

"안녕, 안녕!"

 

"엉, 안녕. 날이 많이 춥지."

 

"맞아요! 그래서 엄마가 멀리 가지 말랬어요!"

 

"근데 왜 여기까지 왔어."

 

"그치만 눈 위를 걸으면 자꾸만 눈이 말을 거는걸요."

 

"응! 응! 신기해요, 문빈 님!"

 

 

살쾡이들은 서로의 발에 붙은 눈을 핥으며 꺄르르 웃었다. 빈도 희미하게나마 씁쓸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미안하다. 전에는 겨울에도 이렇게 춥지 않았는데. 내가 힘이 없어서..."

 

"왜 문빈 님이 미안해요! 엄마도, 아빠도 문빈 님은 잘못이 없다고 했어요."

 

"맞아요! 잉간들이 나쁜 거야!"

 

"그리고 우린 추운 거 조아요! 차가운 눈도 재밌어!"

 

 

아이들이 빈의 따뜻한 손에 얼굴을 비비며 조잘대자 빈은 고개를 숙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천 년의 시간동안 화호봉을 지켜온 여우신으로, 한 때 온 인간과 짐승들의 존경을 받으며 살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인간들은 변해갔다. 여우신을 모시는 제사에는 빈을 향한 믿음과 존경보다 저들의 잇속을 챙기는 욕망의 뜻이 더 깊어졌고, 여우신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나날이 늘어갔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금기를 어기고 화호봉마저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천 년의 평온을 이어온 화호봉에, 빈의 하나뿐인 벗이자 지켜야 할 가족과도 같은 땅에, 하나 둘 구멍이 뚫렸다. 맑은 공기에 매연이 고이고 동물들의 보금자리에는 쓰레기가 쌓여갔지만 빈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화호리의 수호신인 빈이 당위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것엔 산 뿐만 아니라 인간들도 있었기에.

 

 

빈의 매일매일이 회의로 가득했다. 신이라면서 소중한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미웠고, 자신을 이리 내보낸 절대자가 미웠고, 그 무엇보다도 신을 저버리고 화호봉을 해치는 인간들이 미웠다. 신의 손을 떠난 인간들의 욕심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산을 깎아내고 나면 도로가 깔렸고, 나무를 베어내고 나면 새로운 터널을 지었다. 산이 구멍투성이가 되어갈수록 빈의 마음 또한 바스라졌다. 인간들의 손에 산이 다치고, 짐승들이 다치는 장면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신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날, 빈은 처음으로 인간을 죽게 했다.

 

뉴스에 보도될 만큼 큰 사고였다. 이후 화호리를 찾는 관광객은 눈에 띄게 줄었지만 빈의 울분은 풀리지 않았다. 온 산의 터널이 부서지고 모든 도로가 흙으로 덮일 때까지, 빈은 산을 무너뜨렸다. 처음 보는 빈의 분노한 모습에 산짐승들은 두려워하며 울부짖었고, 마을은 연속적인 재앙에 떨었다. 빈이 능력을 소진하고 지쳐 쓰러졌을 때, 절대자는 그를 데려가 신의 자격을 박탈했다.

 

 

그리하여 빈은 인간을 해한 벌로 백 년간 여우령의 형태로 남아 화호봉을 떠돌게 되었다. 여우령으로 전추한 빈은 여우신이었을 적 이름을 새긴 명패의 영력에 의존하여 연명하는 신세였다. 수호자를 잃은 화호봉의 아름답던 빛은 바래갔고, 화호리에는 혼란과 갈등이 이어졌다. 그토록 원망했던 신의 자격이, 그토록 그리워질 수가 없었다. 내 실수로, 소중한 걸 정말로 지키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구나.. 난 언제까지나 무능하고 어리석구나.

 

 

그 후로 30년 가량이 흘러 마을은 어느 정도 정비가 되었고 동물들은 여전히 빈을 사랑했으나, 빈의 마음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마을에 문제가 생길 적마다, 동물들이 불편함을 느낄 적마다 전부 제 탓으로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빈은 백 년을 채울 자신이 없었다. 백 년을 채운 뒤에 다시 신 노릇을 할 자신도 없었다. 점점 지쳐만 가는 몸을, 이제는 좀 쉬게 두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문빈 님은 안 추워요? 털도 별로 없자나."

 

"괜찮아. 난 원래 따뜻하니까."

 

"그건 그래요! 히히.. 근데 아까, 털도 없고 차가운 애를 봤어요!"

 

"맞아요! 엄청 추워 보였어요!"

 

"...어디에서?"

 

 

살쾡이들이 일러준 고목나무 아래에는 한 인간 아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아이의 입술은 떨림조차 없어 숨을 확인하고 나서야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빈은 죽어가는 아이를 따뜻하게 보호해 줄 곳을 찾았지만 겨울의 산 속에서 약한 인간 아이가 안전한 장소는 없었다. 화호봉에서 가장 따뜻한 것은 빈의 몸이었고, 빈은 별 수 없이 아이의 몸이 녹아 깨어나기를 기다리며 언제까지고 품에 안고 있어야 했다. 인간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화호봉의 동물들도 차갑게 언 아이를 제 몸으로 녹이는 빈을 차마 막지 못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아이는 빈의 품 속에서 이틀 째가 되던 날, 드디어 눈을 떴다.

 

 

"어, 일어났다."

 

"여기가 어디..."

 

 

작은 몸을 꼬물대며 주변을 살피던 아이의 시선이 빈에게서 멎었다. 빈 역시 아이의 얼굴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틀만에 처음 보는 아이의 커다란 눈은 밝은 태양을 닮은 빛이었다. 눈이 부셔도 왜인지 눈을 뗄 수 없는, 찬란한.

 

 

"여우신님.. 이세요?"

 

 

아이의 자그마한 입이, 그리 말한다. 수십년간 잊고 있었던, 아니 잊고 싶었던 이름. 다신 그리 불리지 않길 바랐고 다신 그리 불릴 수 없으리라 생각해왔기에 빈은 할 말을 잃었다. 죽을 뻔했다가 겨우 깨어나서는, 무슨 맹랑한 소릴 하는 겐지. 빈은 웃어 넘기려 노력했지만 입꼬리에는 작은 떨림만이 머물렀다.

 

 

"..아니."

 

다행인지 퍽 덤덤한 목소리가 나간다.

 

"맞는 것 같은데.. 화호봉의 수호신님."

 

"이젠 아니야. 버렸어, 그 이름."

 

"..."

 

 

아이는 잠이 덜 가신 몽롱한 눈으로 빈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 속의 태양빛이 너무도 강렬해서, 빈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연 아이가 빈의 품을 벗어나 벌떡 일어섰다. 약해진 다리 탓에 잠시 휘청거리던 아이는 곧 허리를 꼿꼿이 펴고선, 활짝 웃었다.

 

 

"전 이동민이예요. 일곱 살! 취미는 독서, 좋아하는 건 여우신님입니다!"

 

"뭐? 여우신을 언제 봤다고 좋아해?"

 

"매일 자기 전에 할머니가 여우신님 이야기를 들려주셔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거든요."

 

뭐야 얘.. 이상해... 여우신 설화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빈은 갑작스러운 여우신 덕후 이동민 어린이의 등장에 당혹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었다. 은우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친구들과 숲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다가 나무에 난 구멍 속에서 잠들어 버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는 것이었다. 내려가는 길을 찾으려고 산을 헤매다가 추위에 쓰러져 있던 것을 빈이 찾아낸 모양이었다. 은우를 내려보내기엔 깡깡 얼어 험한 산길에 거센 눈발이 합세하여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고민 끝에 빈은 동물들의 합의를 얻어 잠시 머물 산굴을 구하고선 은우를 맡아 보살피게 되었다.

 

 

은우는 죽을 고비를 넘긴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했다. 빈을 꼬박꼬박 여우신님, 하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곧장 물어본 뒤 홀로 생각에 잠기곤 했다. 늘 할 일 없이 화호봉을 떠돌던 빈에게는 벗으로서 적격인 셈이었다. 사실상 얼결에 떠맡은 아이였지만, 본래 추위를 많이 타서 춥다며 안겨올 때면 빈도 싫지 않은 감정이 들어 가만히 은우를 안아주었다. 그들은 빠르게 서로에게 젖어들어갔고, 빈은 천 년을 지내며 그리 많이 웃었던 적은 처음이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며칠 뒤 날이 풀려 은우가 마을로 돌아갈 때까지, 둘은 많은 것을 함께 보고 많은 일을 함께했다.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이 온 몸에 떠돌아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을 정도로.

 

떠나는 날, 은우는 작은 손으로 빈의 손을 쥐고 말했다. 그의 어린 눈은 여전히 밝게 타올랐다.

 

 

"여우신님은, 영원히 여우신님이예요. 이동민이 가장 좋아하는, 화호봉의 신."

 

"..."

 

"사랑해요."

 

 

은우는 빈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빈의 마음 깊이 새겨진, 찬란히 빛나는 은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돌아갈래."

 

"어차피 보내 주려 했소. 그대의 원성이라면 지겹게도 들었으니."

 

"어? 이렇게 쉽게? 진짜로? 절대자가 그래도 돼?"

 

"나는 온 세상이 손에 스치는 자요. 굳이 그대의 모든 것을 빼앗을 필요는 없지 않겠소."

 

"어어..."

 

"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초를, 헤아릴 수 있겠소?"

 

절대자의 음성이 낮게 하늘을 울렸다. 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대만큼은 이를 헤아리지 않아도 되길 바라오. 그대는,"

 

"..."

 

"참으로 잘 자라 주었구려."

 

"...고마워."

 

그의 윤곽이 흐려진다. 빛 투성이였던 공간이 일그러지며 빈의 시야가 아득해졌다.

 

"고마워... 아버지."

 

 

해가 쨍쨍하다. 이제 바람이 제법 찬 가을이 한창인데, 태양만은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끈덕지게 피부를 훑는다. 따가운 느낌에 비로소 다시 살아 내려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은우는 뭐 하고 있으려나. 천계의 시간은 인간계의 흐름과 엇갈림이 있기에, 아마도 빈이 사라지고 몇 주는 지났을 터였다. 빈은 무작정 은우의 집에 찾아갔지만, 은우는 없었다.

 

 

"학교 갔나?"

 

 

어서 보고 싶으면서도 은우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빈은 함부로 걸음을 서두르지 못했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새 다른 사람이 생겼으면 어쩌지. 내가 질렸으면 어쩌지. 날... 잊었으면 어쩌지.

 

 

저 멀리 작게 보이던 학교가 가까워지자 운동장의 아이들이 보였다. 빠르게 얼굴을 살피며 은우를 찾던 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고, 그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은우는 잘 있었다. 다만 한 소녀가 수줍게 서서 손을 내밀고 있었고, 은우는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가 보아도 작위적인 연출이 감이된 장면이었지만 새하얘진 빈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야! 차은우!! 너 뭐 하는 거야!"

 

 

은우는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빈이 떠나고 난 후 매일 밤, 은우의 꿈에는 빈이 나와 우는 그를 달래 주었다. 사실 모두 꿈인 걸 알면서도 은우는 꿈이 아니라는 빈의 말을 믿었다. 꿈이라도 좋으니 깨어나지 않길 기도하며, 눈물을 머금고 활짝 웃으며. 빈이 간절했던 만큼 꿈에서 깨어났을 때의 절망은 커져 은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넣었다. 은우에게 빈의 얼굴을 보는 일은 더없는 행복이자 고통이 되었다. 이 꿈에서 깨면, 또 절망의 늪이 날 기다리고 있겠지. 은우는 저를 향해 달려오는 빈을 보며 웃었다. 슬픈 빛을 띤 태양의, 고통을 억누른 웃음을, 큰 눈이 반달이 되고 초승달이 될 만큼. 빈이 그의 등짝을 후려갈기기 전까지, 계속해서 예쁜 웃음을 지었다.

 

 

"악! 비, 빈아... 이거 꿈, 아니.. 아아."

 

 

온 등판에 선연히 퍼지는 통증에 어깨를 비틀면서도, 은우는 빈이 만져진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빈을 정신없이 쓰다듬었다. 결국 빈의 짜증스러운 주먹에 한 대 더 얻어맞고 나서야 현실임을 자각한 은우가 빈을 와락 끌어안았다. 옆에 서 있던 여자아이가 어찌나 당황했던지, 빈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하지만 빈의 목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던 은우는 한 술 더 떠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은우를 토닥이며 제발 닥치라고 속삭이는 빈도 눈물 범벅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건 진짜 꿈 아닌 거죠."

 

"아니라고."

 

 

빈이 은우가 사준 아이스 바를 빨면서 툴툴댔다. 읍내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산 아이스크림이었다. 은우는 하나 먹고도 춥다며 빈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빈은 벌써 세 번째 아이스크림을 거의 다 먹어가고 있었다. 둘이 나란히 앉은 벤치 위로 나른한 햇볕이 둥글게 비친다.

 

 

"그래서, 아까 걔는 뭐야."

 

"으에?"

 

"너 걔한테 뽀, 뽀뽀 했잖아!"

 

"아아. 그거 연극 연습한 건데요."

 

"뭐? 너 고삼이라며. 그딴 걸 왜 시켜?!"

 

"후배인데 연습 도와달라길래 해준 거예요."

 

 

은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빈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빈의 턱이 절로 가슴께까지 움츠려들고,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올 기세인 심장 소리가 행여 은우에게 들릴까 신경이 곤두선다.

 

 

"하는 척만 한건데. 혹시.. 질투나요?"

 

"아니? 아니거든? 전혀."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부정하는 빈의 모습에 은우가 미소지었다.

 

"나는 나는데, 질투."

 

"뭐가?"

 

"나보고 누구 닮았다고 했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억울해서. 나는 그 사람 대용이예요?"

 

"음... 그런 셈이지."

 

"뭐라고요?"

 

"넌 이동민 대용이야."

 

 

한순간 은우의 표정이 맹해졌다. 여우신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는데요. 너, 기억 안 나는구나. 이동민은 내가 여우신이라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 고마운 꼬마였거든. 은우에게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고 말하던 빈이 눈을 떴다. 또렷한 태양이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말, 어쩜 이 눈을 못 알아봤을까. 이리도 한결같이 뜨겁게 나를 향해 있는데.

 

 

"넌 어쩌다 이름이 바뀐 거야?"

 

"나는.. 원래 아빠가 없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엄마와 같은 성씨였고, 가족은 할머니와 엄마 뿐이었죠. 그래도 난 행복했어요."

 

 

은우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빠가 필요한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런데, 엄만 그렇지 않았나 봐요.  엄마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새 남편을 얻었어요. 도시에 살고, 돈도 많고, 뭐. 대충 그런 사람요. 그 때부터 난 이동민이 아니라 차은우가 되었어요. 처음으로 도시에 있는 학교에 갔을 때도, 계부의 사업이 망했을 때도, 그가 술에 취해 엄마를 밀쳤을 때도, 그의 음주운전으로 뒤늦게 얻었던 '부모'를 너무 일찍 잃었을 때도. 난, 전부 차은우였어요.

 

 

"사고 당시에 엄마는 나한테 전화를 걸고 계셨어요. 갑자기 끊어지기에 다시 걸어 보아도, 아무도 받지 않았죠. 뒤늦게 걸려온 전화에서는 엄마가 아닌 이의 목소리가 엄마의 사망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차라리... 엄마의 울음소리가 더 듣기 나았어요."

 

 

말을 마친 은우의 눈에 새로운 눈물방울이 솟았다. 둘의 부은 눈을 가라앉히려는 용도였던 아이스크림은 이미 빈이 다 먹어버렸기에, 빈은 안절부절 못하다가 살며시 은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울지 마, 울지 마. 할 말을 찾지 못해 손길로 마음을 전하는 빈의 애정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은우는 제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빈의 손을 잡았다.

 

 

"내게 소중했던 사람들은 너무 쉽게 날 떠났어요. 여우신님도 그럴까 봐, 무서웠어요."

 

 

은우가 맞잡은 빈의 손을 끌어다 입을 맞추었다. 손등, 손바닥,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 소중히. 빈의 얼굴에는 가을 하늘의 노을 만큼이나 짙은 분홍빛이 퍼져 갔다. 은우의 입술이 빈의 팔을 타고 쇄골에 닿고, 목 뒤부터 코 끝과 이마까지 구석구석을 스친다.

 

 

"사랑해요."

 

 

소년의 세 번째 고백이었다. 둘의 입술이 포개어진다. 조금은 어리숙하게, 조금은 가슴 아리도록 깊게. 간절히 빈의 숨을 파고들던 은우의 입술이 떨어지자 빈은 소년에게 첫 번째 대답을 속삭였다.

 

 

"사랑해, 은우야."

 

 

딸랑, 은우만이 들을 수 있는, 은우만을 위한 방울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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