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

2019 가을호
작성자
나비담
작성일
2020-11-12 16:28
조회
4

W. 나비담

 

 

***

 

 

‘그럼 저희는 성시경의 두 사람을 끝으로 오늘의 라디오를 마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빈아, 나랑 사귈래?”

 

2007년, 그 해 봄, 나는 너와 만났다.

 

***

 

 

 새 학기가 되었고 풋풋한 신입생들과 같이 가는 엠티의 계절이 왔다. 엠티 장소로 출발하기 전, 학교에 모여서 다 같이 출발하기로 했다. 나는 들뜬 마음에 약속 시간보다 꽤 일찍 도착했고 학교에는 오티 때 봤던 신입생들이 몇몇 모여 있었다. 내가 그들만큼 들뜬 것 같다는 생각에 왠지 모르게 민망해졌다. 어느덧 약속시간이 가까워져가자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출발 직전 나는 친한 동기와 근처 난간에 앉아있었고 마지막으로 총대가 도착하자 우리는 차에 탈 준비를 했다. 나는 맨 뒷자리를 좋아하는지라 서둘러 차로 튀어 들어갔다. 나와 친한 동기는 나와 다른 차에 탔고 아무와 앉아도 상관없다 생각을 한 후에 차에 탔다 그 차에 맨 뒷자리에는 한 남자가 타고 있었다. 우리 과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자연광을 받아 밝게 빛나는 외모에 절로 감탄이 나왔고 저런 얼굴은 내 동기 중에는 없다는 것이 떠올라 나는 신입생으로 생각을 하고 그의 옆에 앉았다.

 

“안녕? 너 신입생이지?”

 

 내 인사에 그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봤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그를 찬찬히 훑었다. 하얀 피부, 큰 눈, 오뚝한 코, 붉은 입술이 누가 봐도 인정할 미남 상이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 사이로 보이는 귀에 꽂힌 하얀 이어폰. 노래 듣고 있는 다고 내가 한 말이 안 들렸구나. 나는 그와 꼭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그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어 다시 그에게 말을 건넸다.

 

“안녕? 너 신입생 맞지?”

“어... 저요?”

“여기에 너 말고 누가 있어~”

“아닌데요”

“응?”

“저 신입생 아니라구요. 저 05학번인데...”

“어?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내가 과 행사 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동기인 것에 놀란 것도 있지만 신입생인 줄 알고 의기양양했던 나의 모습에 심히 민망해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차는 출발을 했고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신나는 노래를 틀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달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그는 아주 조용했다. 아니 조용해서 뒷자리에 앉은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조용하잖아...!! 나의 옆에서 여전히 조용히 창밖을 보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이름이 뭐야?”

“...”

“아니 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름이라도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해서 아니 뭐 싫으면 말고...”

“차은우.”

“어? 뭐라고?”

“차은우라고 내 이름”

“나는 문빈!”

“알아. 너 많이 봤어”

 

 너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나를 굉장히 잘 안다는 듯 확신에 찬 목소리에 놀랐다. 내가 그렇게 유명했나... 라는 의구심이 들쯤에 너는 나에게 손을 건넸다. 내가 그 손을 보고 너를 보자 “친구 된 기념 악수” 라는 말을 했고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알겠다며 너의 손을 잡았다. 나의 손보다 더 크고 굵직한 너의 손을 꽉 잡고 너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자 가슴 한 편에서 몽글몽글한 이상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서 슬슬 열기가 느껴지자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손을 놓고는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근데 너 무슨 노래 듣고 있었어?”

“아- 들어볼래?”
“그래도 돼?”

“응, 듣고 무슨 노래인지 맞춰 봐”

“오오- 맞추면 뭐 주나?”

“그건 보고”

 

 너는 나에게 네가 끼고 있던 이어폰을 끼워줬다. 그리고 네가 MP3를 만지작거리더니 노래가 재생되었다. 모르는 노래였다. 하지만 따뜻하게 귓속에 들려오는 가수의 음성과 나를 여전히 빤히 바라보는 너의 눈에 순간 설렐 뻔했다. 어느덧 노래가 끝나감과 동시에 숨 막힐 듯 달달했던 4분은 끝이 났다. 나는 노래가 끝나자 이어폰을 빼내어 너에게 줬다.

 

“무슨 노래인지 알아?”

“아니... 모르는데, 그... 좋다... 노래가!! 응 노래가 좋네-”

“ㅋㅋㅋ 누가 뭐래? 왜 말을 더듬어”

“아니 노래가 너무 좋아서!!”
“ㅋㅋㅋㅋ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들려주고 싶었던 노래기도 하고”

 

 네가 뱉은 말에는 이상한 기운이 스며있었다.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건가... 너에게 설렌다는 느낌을 받은 후 들은 오묘한 말이라 그런 것 같았다. 노래도 설렜고 너의 눈빛도 설렜다. 그냥 지금 이 분위기가 설렌다. 너와 맨 뒷자리에 같이 앉은 것도, 나는 너를 모르지만 네가 나를 알고 있던 것도, 네가 듣고 있던 노래도, 지금 이 시끄러운 차 안에 너와 나만 있는 것 같은 기분도. 이 모든 것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 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이 달달한 분위기를 연출해내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 갔을까. 차는 휴게소에서 멈췄고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친한 동기가 있는 차에 탔다. 그저 혼란스럽다는 마음에 너를 피해버린 내가 이상했다. 친한 동기는 나에게 왜 왔냐고 물었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며 비어있는 뒷자리로 가서 누웠다. 어느 순간 나는 잠에 들었다. 친한 동기는 도착했다며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몽롱한 상태로 차에서 내렸고 짐을 챙겨 바로 미리 잡아둔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너무 피곤했던 것일까 짐을 풀고 방을 찾아 들어가 바로 누워 다시 잠에 들었다.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지만 나는 꼼짝도 안 한 채 깊은 잠에 빠졌다.

 

“빈아- 일어나 봐”

“으응...”

“애들 술 마시기 시작했어- 얼른 일어나 봐”

 

 나는 누군가에 의해 일어나야 했고 일어나 보니 네가 내 눈 앞에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너를 보자 잠이 확 깸과 동시에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이 났다. 나는 부끄럽고 오묘한 마음에 헛기침을 몇 번 하자 너는 나에게 물 컵을 건넸다. 그리고 나에게 빨리 나오라며 먼저 나갔다. 나는 네가 준 물을 홀짝이고 밖으로 나갔다. 술판을 시작 한지 꽤 됐는지 이미 몇 명이 고꾸라져있었다. 나는 볼이 붉어진 친한 동기의 옆자리에 앉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점점 몸속으로 들어오는 알코올로 인해 알딸딸해지자 어디선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 시선을 따라가자 네가 보였고 나의 풀려가는 눈을 본건지 망설임 없이 내 쪽으로 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거의 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이기에 누가 나가고 말고는 신경 쓰지 않았기에 너와 나는 숙소 밖으로 나왔다.

 

 밤이어서 그런지 꽤 쌀쌀한 공기가 맴돌았고 너는 나의 어께에 얇은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너는 나에게 조금 걷자고 했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너를 따라갔다.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왔고 밤의 추위에 귀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너의 뒤를 졸졸 따라가다 숙소와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왔고 그 근처에는 라디오 하나와 벤치가 있었다. 너는 나의 눈치를 보다 벤치에 앉았고 나는 자연스레 너의 옆에 앉았다. 나는 찬 공기에 술에 깬지 오래였고 너와 같이 앉아 있는 지금이 마냥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는 라디오를 켜 주파수를 맞췄다. 네가 튼 라디오 방송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느새 마지막 사연만이 남아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사연입니다. ‘안녕하세요- DJ님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 학교 잔디에서 친구들과 노는 그 사람들 발견했습니다. 맑은 햇살 아래에서 맑게 웃는 그 모습을 보고 저는 그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사람의 웃는 모습이 더욱 선명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고백을 하기 위해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과 엠티를 가려고 합니다. 제 고백이 잘 전해질 수 있게 응원 부탁드립니다. 신청곡은 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성시경의 두 사람 신청합니다.’ 라고 보내주셨네요- 첫 사랑에게 하는 고백. 부디 성공하길 바랍니다. 그럼 저희는 성시경의 두 사람을 끝으로 오늘의 라디오를 마치겠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너와 나는 사연이 끝날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사연이 끝나고 오전에 네가 들려줬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노래. 너와 나는 노래가 중반부로 흘러 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너는 조심스럽게 입을 때었다.

 

“빈아. 이 사연 내가 보낸 거야. 눈치 챘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고. 2년 동안 한 번도 안 왔던 엠티. 너랑 있으려고 왔어.”

“...”

“그래서 말인데 빈아, 나랑 사귈래?”

 

 이미 술기운은 사라졌고 너의 말은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너의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너의 눈빛이 어떨지 너무 잘 예정이 되어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나는 너를 오늘 처음 만났다. 그리고 나는 너에게서 오묘한 감정을 느꼈고 설렘도 느끼게 되었다. 그 느낌이 생소해서 너를 피했지만 알 수는 있었다. 나 역시 너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것을. 한없이 차게 느껴지는 공기는 너의 고백으로 인해 달콤하게 나의 코로 넘어왔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너의 눈을 봤다. 너의 눈은 나를 향한 진심으로 가득 차있었고 너의 눈빛을 닮은 노래는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노래가 끝나가자 나는 차가운 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네가 반했던 맑은 웃음을 지으며 너의 고백에 대한 답을 했고 너는 너의 손을 잡고 있는 나의 손을 꽉 쥐고는 말했다.

 

“사랑해- 빈아.”

 

달 빛 아래 두 사람. 하나의 그림자. 맞잡은 두 손.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너와 만들어 갈 수많은 추억의 첫 페이지.

 

 

 

 

===

 

 

 

 

 우리는 그 날 이후 공식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은 언제나 같이 있었다. 시험기간에 도서관에서도, 수업시간에도, 내가 싫어하는 교수한테 혼났을 때도, 해가 두 번 지나갈 때도, 너의 생일과 나의 생일 때도, 철이 바뀔 때마다 가는 바다에서도. 우리는 한 날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똑같은 노래만 들었다. 내 친구들은 그걸 우리의 테마 곡이라고 불렀다. 네가 나에게 고백할 때 들려줬던 노래. 그 노래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때가 있고 혼자 그 노래를 들으면 네가 한없이 보고 싶어지고 그런다. 그리고 우리가 같이 맞이할 2번째 봄이 왔고 우리는 매번 가던 바다에 가기로 했다. 바다에 가기로 한 날, 나는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로 해가 넘어오기 전 바다에 가려고 했지만 연말이어서 그런지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 사느라 못 가서 더 오랜만에 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는 유독 더 설레어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너는 나와 약속한 시간이 다 되도록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연락 한통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타나지도 연락도 없는 너에 화를 냈지만 시간이 더 늦어지면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너의 집으로 갈까라는 생각을 했을 때,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그 번호의 주인은 근처 병원이었고 네가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왔다며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지만 너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병원으로 급히 달려갔다. 병원 응급실에서 너를 찾으니 너는 머쓱하게 웃고만 있었다. 나는 그 웃음에 이유 모를 안도감을 느끼며 너를 가볍게 때렸다.

 

“웃음이 나오냐?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데!!”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무리하게 신호등 건너려다가 살짝 부딪힌 거야”

“왜 무리하게 건너는데! 너는 맨날 나보고 조심하라면서 너는 안 하냐고!”

“미안... 너 기다린다는 생각에 급해져서...”

 

 정말 경미한 사고였는지 너는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날 우리는 바다에 가지 못 하고 너의 집에서 놀기만 했다. 너에게 그 일이 있고 너는 차를 조금 멀리하게 됐다. 신호등도 아주 조심히 건너는 너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그렇게 조심히 신호등을 건너 과 동기들과 만나기로 한 호프집으로 향했다. 자정이 넘어가도록 우리는 술을 마셨다. 그 사이에 너는 화장실을 가려는지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를 잡고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나는 그게 술에 취해 그런 줄로만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너의 증상은 점점 심해져갔다. 결국 우리는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최근 있었던 교통사고에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힐 때 뇌에 손상이 온 것 같다며 말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며 너에게 자신이 외국에 아는 의사에게 얘기를 해놓을 테니 가서 치료 받을 것을 권하였다. 나는 고민을 하는 너에게 다녀오라 했지만 너는 거절을 하였다. 나는 그런 너에게 화를 냈다.

 

“왜 치료 안 받으려는 건데? 여기서는 수술도 안 된다잖아”

“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너 놔두고 어떻게 가...”

“기다릴게, 나 너 기다릴 수 있어-”

“하... 빨리 다녀올게 완치 되면 바로 달려올게”

“당연히 그래야지! 안 올 생각이었냐?”

 

 너는 결국 미국으로 가게 되었고 네가 가기 전, 1주일 동안 우리는 더 많은 애정을 쏟으며 사랑을 했다. 그리고 네가 미국으로 가는 날, 나는 너를 배웅해주러, 너는 치료를 받으러 공항으로 갔다. 너와 함께 수속을 마치기 전부터 속에서 울컥하고 뭔가 차오르는 느낌이 났다. 그리고 네가 공항 검색대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결국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절대 네 앞에서는 안 울려고 했지만 너의 다정한 손길과 걱정 어린 눈빛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너는 그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진짜 빨리 올게... 너 많이 안 기다리게 할 게 미안해 내가...”

“네가 왜 미안해... 조심해서 다녀와 얼른 나아서 오고”

“사랑해 빈아”

“나도 사랑해 은우야”

 

너와의 마지막 키스를 끝으로 너를 떠나보내야 했고 5년이 지나도록 너는 돌아오지 않았다.

 

 

 

===

 

 

 

 서울 고층 빌딩에 위치한 한 회사. 늦은 밤이 되도록 열심히 야근을 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밝은 컴퓨터의 빛 때문에 눈이 아픈 듯 쓰고 있는 두꺼운 안경을 벗어 미간을 꾹 눌렀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에 놓인 이름. 문빈. 빈은 졸업한지 1년도 되지 않아 운 좋게 좋은 회사에 취업을 했고 4년 동안 성실히 일 하며 대리로 쭉쭉 승진한 아주 운 좋은 케이스다. 사실 빈이 운이 좋은 것도 있지만 빈이 그만큼 열심히 일 한 것도 한 몫을 했다. 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은우가 돌아오면 떳떳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다. 그러는 중에 빈은 취업을 했고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빈은 바빠도 은우와 같이 갔던 바다를 빼놓지 않고 갔다. 이번엔 혼자 오더라도 다음에는 같이 오기를 바라며 3년을 그렇게 은우와의 추억 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4년이 지나도 은우는 돌아오지 않았고 빈은 그런 은우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그때 하필 회사 회식이 잦았던 탓에 빈은 자신의 몸은 생각도 안하고 은우를 잊으려 술을 왕창 마시고 취하면 은우만 찾았고 회사에서는 은우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살다가 그렇게 살다가 5년이 지난 지금 빈은 은우를 완전히 잊은 듯 했고 은우를 열병처럼 앓았던 그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이 다 사라진 것만 같았다. 번듯한 직장을 다니며 무수히 쏟아지는 업무에 치이는 빈의 마음속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은우를 지운 채로 살다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거하게 취하고 말았다. 이제 빈은 취해도 더 이상 은우를 찾지 않는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비틀거리는 발걸음만 빼면 아주 멀쩡했으니까. 하지만 현관문을 열어 집으로 들어와 텅 빈 거실을 묵묵히 바라보다 금세 눈물을 쏟아냈다. 가볍게 풀린 두 눈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눈물이 감당이 안 된 건지 빈은 신발도 벗지 못한 채 현관에 주저앉고 말았다. 물기 가득한 목소리에서 나오는 한 사람의 이름. 은우였다. 평생을 잊은 줄 알았던 은우를 제 자신도 모르게 가슴 속 깊숙한 곳에 욱여넣어 둔 후에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혼자만 있을 때 가끔 꺼내보는 빈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은우를 향한 열병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빈이 은우를 잊겠다고 다짐한지 몇 년이 지나도 눈물을 흘리며 은우를 부르는 꼴이 자기 스스로에게는 참으로 우스웠다. 그러면서 먼 타지로 떠난 은우의 생사조차 알 수 없기에 느껴지는 설움에 응어리처럼 쌓아뒀던 눈물을 뱉어내며 밤을 지새웠다. 빈은 그렇게 하루를 견뎌냈고 그 다음 날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또 하루를 살아갔다.

 

 은우를 보낸 지 10년이 된 해. 빈은 은우를 잊었다. 전처럼 어설프게 잊은 것이 아닌 정말 머릿속에서 지우고 말았다. 빈은 은우를 너무 열심히 사랑했고 너무 아프게 기다렸다. 그 아픈 열병에 빈은 너무나 지치고 힘들어서 잊는 것이 힘들 것이라 했지만 시간이 지나, 모든 추억이 바래지고 사라지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34살이 된 빈은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올라왔고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빈의 동생이 빈의 집을 찾아왔고 빈은 동생을 아주 밝게 맞이했다.

 

“오빠. 좀 치우고 살아! 집 꼬라지가 이게 뭐야...”

“야- 너는 오자마자 잔소리냐? 어?”

“잔소리가 안 나오게 하든지!”

“아이- 가만히 놔둬! 내 물건들은 제자리에 있어야 예쁜 법이야~”

“오빠 맞냐?”

 

빈의 동생은 중얼중얼 잔소리를 하며 빈의 더러운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어느덧 발 디딜 틈 없었던 빈의 집이 깔끔해져가고 있었다. 빈은 동생이 치우는 것을 다 돕고 소파에 앉아 티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 동생은 빈의 서재 안 창고에서 묵직한 무언가를 꺼내온다.

 

“와 이거 고물 아님?”

“응? 뭔데?”

“이거. 10년 전 거 같은데?”

“... 제자리에 갖다 놔”

“왜애- 요새 레트로 유행인 거 몰라?”

“아니... 하”

 

 동생이 들고 나온 것은 오래된 라디오였다. 빈은 그 라디오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어졌고 동생에게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지만 동생은 그 말을 들은 척도 안 하고 라디오에 쌓인 먼지를 닦아냈다. 동생이 라디오에 쌓인 먼지를 닦아내는 동안 빈은 그런 동생을 애써 무시했다. 동생은 먼지를 닦아내는 동안 계속해서 감탄을 했다. 그리고 동생은 서툴게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췄다. 하지만 라디오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빈은 라디오 앞에 실망해 있는 동생을 달래며 내보냈다. 동생이 간지 얼마 되지 않아 빈의 눈에는 자꾸만 오래된 라디오가 보였다.

 

“젠장...”

 

 빈은 라디오 앞에 앉았다. 지금 무슨 생각으로 앉았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추억 속으로 진하게 빠지고 싶다는 생각에 무작정 앉아 익숙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기 시작했다. 라디오는 지직거리는 추억이 가득한 소리와 함께 용케도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라디오에서 소리가 나자 빈은 기쁨과 뭉클함이 동시에 밀려와 형용하기 힘든 표정을 하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디제이의 음성을 듣고 있다. 12년 전처럼 디제이는 사연을 읽고 있다. 곧 결혼을 한다는 새신랑이 자신의 아내가 될 사람에게 쓴 사연. 그리고 그때와 같은 신청곡. 그 노래의 전주가 흘러나오자 갑자기 훅 끼쳐오는 은우와 관련된 추억들에 빈은 정신을 못 차렸다. 정신없이 떨어트린 눈물 한 방울. 깨끗한 마룻바닥에 동그란 물방울이 지기 시작하고 빈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은우야...”

 

 빈은 숨이 넘어가면서 우는 중에도 은우의 이름을 부르려 애를 썼다. 노래가 끝이 나도 빈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지쳐 잠에 들었다. 다음 날이 되자 빈은 바쁜 아침을 맞이했다. 조촐하게 짐을 챙기고 역으로 향했다. 빈은 부산행 기차를 탔다. 은우와의 추억이 가득 서린 그곳을 가기 위해서 혼자 기차를 타고 부산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우가 떠난 후부터 빈은 은우와 자주 갔던 바다를 가지 않았다. 은우가 보고 싶어질 까봐 은우가 그리워질 까봐. 하지만 지금 빈은 그 바다에서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은우와 연결된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빈은 자신의 폰에 있는 그 노래를 무한재생을 해놓았고 기차는 출발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서 빈은 은우와 있었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 기억을 피하지 않고 바라봤고 어느새 빈의 눈가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렸을까 기차는 부산에 도착했고 빈은 어색하게 부산의 바람을 맞았다. 빈은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로 해수욕장을 찾아갔다. 해가 저물어 갈쯤의 바다는 아련한 가을 같은 느낌이었다. 붉게 물들어 빛나는 바다를 보며 빈은 이제 이별할 수 있겠다며 마음을 털어버리려 눈을 꼭 감았다.

 

“빈아”

“...”

“나 돌아왔어”

 

 

 빈은 꼭 감았던 눈을 떠 자신의 이름이 불린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10년 전과는 조금 달라진 은우가 서있었다. 빈의 눈에선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렸고 은우는 성큼성큼 다가와 빈을 꼭 안아주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붉은 바다가 밝게 빛나는 시간에 다시 만난 은우와 빈은 서로의 품에 안겨 앞으로 있을 많은 시간을 서로에게 쉴 곳이 되어주며,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 주며 살아가자고 서로의 마음을 맞대고 약속했다. 비어있던 10년을 채우기 위한 여정을 그곳에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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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