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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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2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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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씨 삼천이면 되나. 하하. 삼천이 무슨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어이 형씨. 아 깜짝아. 아 네, 네에. 제발 부탁이니까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가까이 오지 마세요. 막무가내로 아이스크림 쪽쪽 빨던 놈 끌고 오더니 겁이란 겁은 다 주고 있네. 장기매매라도 당하는 줄 알고 살려달라며 두 손 모아 싹싹 빌기도 전에 지장을 찍고 계좌까지 넘겼다. 빨간 인주가 묻은 엄지손가락을 벅벅 닦아내기도 전에 어깨를 붙들려 질질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산 중턱 사람 하나 죽어도 모를 창고를 벗어나 어느새 집 대문 앞에까지 도착해서 열리는 문에 터덜터덜 차에서 내렸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체감상으로는 반나절이나 지난 줄이나 알았지 왔다 갔다 한지 고작 삼십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는 걸 해가 뉘엿뉘엿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 그러고 보니 이 새끼들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지. 벌써 신상까지 털렸나 봐. 딱 봐도 조폭같이 생겼던데 진짜 장기매매 당하는 거 아니ㅇ, 아. 아 시발.



그래 조폭. 조폭이구나 이 새끼들.



 동시에 까마득한 기억 속 한 부분이 마치 커다란 구름을 만드는 듯 몽글몽글 떠오르기 시작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아도 이미 완벽하게 그려지는 걸 어떡하나. 허어, 허...... 터져 나오는 실소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하. 깡패였구나. 깡패란 말이지.



"......시발."



 우르릉, 쾅쾅. 천둥이 크게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쿵쿵. 잘생긴 얼굴을 떠올리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생전 겪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치가 떨렸다. 괜히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지랄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래 잘생긴 놈. 빈은 똑똑히 기억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한 달 전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대문 밖에 쓰러져 있던 남자를.





w. 늉





 빈은 머리가 좋았다. 그 좋은 머리로 부모님은 자신들의 위선을 세워 줄 직업을 갖길 원했다. 시시콜콜 잔소리에 공부해라, 넌 지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네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감정적인 싸움으로 이어지기라도 하면 지체 없이 휘두르는 손찌검에 방구석에 숨죽여 울었다. 좆같이 휘둘리면서 살 바엔 차라리 뒤지는 게 낫지. 쓸데없는 오기에 굴러다니는 커터 칼로 찔끔찔끔 상처를 냈다가 존나 아파서 찌질하게 엉엉 울었다. 바닥으로 내팽개친 칼날이 챙 하고 토막 났다. 쫄보 새끼. 할 줄 아는 게 뭐냐 대체.



 불행 아닌 불행은 뒤늦게서야 찾아왔다. 빈소가 마련된 날 비가 우수수 쏟아졌다. 장례시장에 찾아오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인기척 없이 텅 비어있었다. 힘을 잃은 눈동자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걸린 영정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선하고 말끔한 인상.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진 악한 사람들. 비통함, 참담함, 그리고, 그리고......



 빈은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던 날에도 임종을 지키던 날에도 납골당에 부모님의 사진이 걸리던 날에도 그 흔한 눈물 한 번 쏟아내지 않았다. 불효자라 손가락질 받는 한이 있더라도 울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이렇게 망가트리고 떠나버렸다. 그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사치였다. 빈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더욱 악착같이 공부했다. 한두 번의 좌절 끝에 의사라는 타이틀을 손에 쥔 날 빈은 처음으로 부모님의 납골당을 찾아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당신들이 바라던 거 내가 다 이뤘어요. 이제 난 뭘 해야 해요? 어떻게 해야 해?



 빈은 그리웠다. 차라리 더 모질게 대해주지 그랬어요. 왜 나를 이렇게 망가트렸어요. 끝까지 모질게 대해주지 사랑한다는 말을 왜 했어요. 왜 나를 사랑한다고 했어. 이렇게, 이렇게 날 망가트려놓고...... 사소한 다정함이 빈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꿈에라도 찾아올까 눈에 보이는 액자란 액자는 다 치워버렸다. 동시에 잃어버린 방향성에 대해 좌절했다. 왜, 왜 갑자기 가버려서. 떠나버려서. 이렇게 살아가는 게 과연 맞는걸까. 빈이 원하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혼동이 확신으로 변하자 빈은 깔끔하게 스스로 손을 뗐다. 좆같이 휘둘리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내 좆대로 살다 좆대로 죽자고. 사직서를 내고 포장마차에 들러 오징어 다리에 어묵만 질겅질겅.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뚫고 도착한 집 대문 앞에서 빈은 악 비명을 지를 뻔 했다.



 비에 홀딱 젖은 까만 놈. 어둠 속 선명히 보이는 핏자국. 의사 아니 방금 전까지 의사였던 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창백할 몰골이 죽은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명감이라는 게 있지. 폰 배터리는 나갔고 이대로 두면 이 남자는 죽는다. 빈은 망설임 없이 남자를 등에 들쳐맸다. 아, 아 시발 무거워. 물에 젖어서 그런지 원래 덩치가 있는 건지 키는 저보다 한참 커서 겨우 질질 끌어 집문을 열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미약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급해졌다.




-




"일어났어요?"

"..."

"눈 한번 깜빡 안 하길래 죽은 줄 알았네."



 상처 부분의 옷을 가위로 잘라내고 처음 상처를 보자마자 헤에엑 시발 칼빵이다. 깔끔하게 포기다. 이건 못해. 어디, 핸드폰이... 119가...... 우왕좌왕 정신없는 빈의 팔을 덥석 잡은 건 남자의 손이었다.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까만 눈동자를 마주치자마자 비명 지를뻔한 걸 얼굴을 자세히 보자마자 쏙 들어갔다. 왜냐고? 존나 잘생겨서. 빈은 태어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이질감에 숨이 턱 막혔다. 이게, 이게 지금...... 말을 채 꺼내기도 전 남자의 끊어질 듯한 목소리가 들려서 더, 더 가까이 다가갔다. 뭐, 뭐요? 병원...... 병원은 가면 안 된다고? 뭐래. 뒤지면 어쩌려고.



 어디, 어디 보자...... 필요한 게 다 있나. 빈은 남자의 고집에 항복했다. 까무룩 눈을 까뒤집고 정신을 잃은 남자는 여전히 빈의 손목을 붙들고 있었다. 빈은 이걸 빼 말아 고민하다 아 몰라 난 모른다. 그나저나 마취 없이 하면 존나 아플텐데. 그래도 일단 살려야 하니까. 큰 걱정과는 다르게 소독을 하고 바늘을 콕 찌르는 순간까지도 미동 한 번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순간 죽은 줄 알고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가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니 간지럽히는 숨소리에 하아, 아...... 쫄려 뒤지겠네. 겨우 마무리를 짓고 주변 정리도 끝낸 후에 막 보일러도 틀었다. 이 야밤에 환자를 내쫓을 순 없지 아무렴. 뜨뜬히 열이 오른 바닥에 이불을 펴고 상체를 들던 순간 어...... 일어났어요? 까만 눈을 마주쳤다.



"움직이면 거기 터져요."

"..."

"기본적인 응급처치만 해둔 거니까 나중에 큰 병원 꼭 가보시고요."



 빈은 말을 마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남자의 눈동자가 빈이 행동하는 족족 뒤를 따랐다.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시선에 죽을 맛이었다. 그냥 눈 마주쳐? 확 물어봐? 아니. 빈은 쫄보였다. 단 1%도 행동으로 옮길 생각이 없었다. 자고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생기 없는 눈조차 어찌나 빛나던지. 아니. 티 내지 말자. 티 내서 뭐해. 어차피 이 사람한텐 난 아무것도 아닌데. 내일이면 빠이빠이 할 사인데. 어어 그보다 아직 일어나면 안 되는데. 아니 거기 터진다니까. 구라 깐 거 아닌데. 시발 저거 봐 터졌어. 아아. 콩깍지 쓰였던 눈이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처럼 열이 올랐다가 애써 화를 식히기 위해 질끈 감았다 떴다. 기어코 침대를 벗어난 남자는 막 나갈 것처럼 굴더니 몸을 틀어 빈과 마주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고 난 몰라...... 아무리 봐도 시뻘건 피는 적응되지 않는다. 양손으로 눈을 가리자 남자는 가만히 손을 올려 상처 위를 막았다. 그래봤자 손틈으로 다 삐져나오는걸. 이름. 네? 이름 알려줘요.



 푹 잠긴 남자의 목소리는 낮지 않으면서도 중압감이 시려있었다. 빈은 뜬금없는 물음에 정신이 멍해졌다. 이름, 이름...... 순간 제 이름을 까먹을 정도로.



"아, 아 이름......"



 빈, 문빈이요. 항상 긴장할 때마다 말 끝에 삑사리가 났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시발 하필 이럴 때. 남자가 웃었다. 더불어 터진 웃음소리에 입이 바싹 말랐다. 낯선 떨림이 적응되지 않았다. 아 원래 심장 뛰는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심장 소리가 남자의 귀까지 전해져 들릴까 부끄러움에 귀가 달아오름을 느꼈다. 문빈. 빈 씨. 빈의 이름이 불렸다. 차은우에요. 네, 네? 내 이름.



"오늘 고마웠어요."

"아, 아 저기 진짜 움직이면 안 되는데......"

"또 봐요."



또 봐요 우리.




-




 아니 근데 이런 식으로 보자고 말한 적은 없었잖아요.



"오랜만이에요 빈 씨."

"아 네 안녕하세요."



 그래. 차라리 사람 한 명 죽어도 모를 산골짜기보단 사치스러운 고급 호텔에서 보는 게 낫지. 아무렴. 빈은 한 달 전 상황이 새록새록 선명하게 그려지는 순간부터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을 때마다 은우의 웃는 얼굴이 떠올라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차라리 연락이나 하지 말지. 또 보자고 하지나 말지. 괜히 사람 설레게. 희미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얼굴이,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은근한 기대감에 문이 열리고 자신의 앞까지 걸어오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빈 씨. 아. 다시 봐도 정말. 환상이 아니었구나.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네, 네?"

"난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훅 들어오면 심장이...... 아, 쿵쿵, 쿵. 또 시작이다. 붉어진 얼굴에서부터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까지 괜히 들키면 어쩌나, 눈치채면 어쩌나. 속을 달래느라 헛기침을 연신 뱉어냈다. 마셔요. 커피 안 좋아할 거 같아서 코코아로 준비했어요. 어쩜 다 알아. 쓴 건 딱 질색이라 카페를 가도 초콜릿, 마끼아또 종류만 족족 시키던 빈을 은우는 다 안다는 듯이 굴었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하하. 정말 뒷조사한 거 아니야?



"일단 빈 씨가 여기서 해줄 건 많지 않아요."

"..."

"내가 지난번처럼 다쳐서 올 일도 거의 없을 거고."

"..."

"그냥 빈 씨가 제 옆에 있어줬으면 해요."



 왜요? 제가 뭐라고? 빈은 되물으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오늘로 딱 두 번 보는 건데 왜 자신을 필요한 것처럼 구는지.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나를 왜 곁에 두려 하냐고. 혼자 설레발치고 난리 치는 건 나 하나로도 족한데 왜 더 부추기려 드는지 모르겠다. 은우의 말에 부정의 의미를 내포하지 못한 건 딱 하나. 빈은 은우가 마음에 들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했다. 애매하게 마음먹고 있으면 불안했으니까. 그러나 동시에 두려웠다. 또, 또 사라지지는 않을까. 없어지진 않을까.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주기가 서툴러 망가진 속에 억지로 욱여넣었다.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기 위함에 한참을 망설이는 걸 은우는 잠시 대화 주제를 돌렸다. 애들이 친절하게 대해줬어요? 빈 씨 무서워할 거 같아서 최대한 상낭하게 말도 예쁘게 해주라고 했는데. 총이나 칼도 챙겨가지 말라고 했어요. 혹시 봤어요? 아뇨. 못 봤어요. 사실 주변 둘러볼 겨를도 없이 잔뜩 긴장해서 굳어있던 빈이 무언가를 발견할 틈도 없었다.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입을 열었다. 은우 씨. 네 빈 씨. 우리 오늘로 두 번째 보는 건데. 왜, 왜 자꾸 다정하게 대해주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빈 씨.



"빈 씨는,"

"..."

"빛 같아요."

"..."

"나한테만큼은."



 찰나의 순간 빈의 눈에 비친 은우의 모습은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롭고 기댈 곳이 필요한, 불안정한 존재. 빈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 그 존재는 자신을 빛이라 여겼다. 기댈 수 있게 해줄래요. 희미하게 지은 미소가 그리 물었다. 나는, 난...... 빛이 될 수 있을까.



"다치지 않기로 약속해요."

"약속할게요."



아. 나 너무 쉽다.




-




 주기적인 만남에 빈은 들떴다. 뭐 조폭이라고 그날 한 약속은 싸그리 잊어버리고 온몸에 상처나 주렁주렁 매달고 올 줄 알았지 매번 반듯한 얼굴에 칼이나 총은 온데간데 본 적도 없고 빈 씨. 오늘 좀 와줘요. 부름에 택시 잡고 후다닥 방문 열고 들어가면 이미 상 위로 예쁘게 세팅된 빵에 마카롱에...... 유명한 디저트 가게라고 해서 한 번 사 와봤어요. 빈 씨 좋아할 거 같아서. 은우 씨. 네 빈 씨. 조폭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우물우물. 왜 매번 내가 좋아하는 것만 사 오는 거지. 근데 또 맛있어서 토씨 하나 남긴 적이 없다. 괜히 멋쩍은 듯 아니 너무 맛있어서...... 유명하다더니 먹을만하네요. 차은우가 뭘 먹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마지막 남은 마카롱을 얼굴 앞에 불쑥 들이밀곤 은우 씨 먹어요. 직접 먹여주기엔 괜히 손만 달달 덜려서 손에 쥐여주면 빈 씨. 아 해 봐요. 아 헙. 그래. 항상 이런 식이지. 입안으로 쏘옥 들어온 레몬향에 괜히 투덜투덜.  은우 씨는 왜 안 먹어요. 맨날 나 혼자 다 먹고...... 빈 씨 먹으라고 사온 거예요. 그리고 난 단 거 안 좋아해서. 빈 씨 다 먹어요. 우유도 마시고. 이런 말 하기 좀 그랬지만 약간... 사육 당하는 느낌이다. 꾸역꾸역 쑤셔 넣고 우유도 꼴깍꼴깍.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컵에 입을 떼지 않은 채 눈을 껌뻑였다. 왜 보냐는 듯이. 예뻐서요. 푸학. 시발 뿜었다.



 내가 잘못한 거 아니에요 은우 씨가, 괜히 이상한 말 해서... 아니 그래도 뭐, 미안해요.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뿜은 우유가 그대로 차은우의 얼굴에 튀고 난리가 나고...... 괜찮다며 손수건을 꺼내는 걸 낚아채 제가, 제가 닦아줄게요. 그러길래 누가 그런 말을 해......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괜히 눈 주변만 한참을 닦았다. 얇은 천 조각 사이 느껴지는 얼굴 윤곽에 손끝 떨림이 느껴질까 쩔쩔매던 빈을 아는지 모르는지 괜찮아요. 닦으면 되는걸. 따위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해서 빈은 더 쪽팔렸다.



 빈은 거의 살다시피 호텔에 눌러붙었다. 빈대도 아니고. 이제껏 살아오면서 번 돈도 적금통장에 다달이 쌓여 새집 마련이니 적당한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은우의 설득이 한몫했다. 은우는 막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 빈을 붙들었다. 빈 씨 어차피 집에 혼자 살잖아요. 여기 들어와서 같이 살아요. 오고 가기도 불편할 텐데. 내가 빈 씨 더 가까이서 보고 싶기도 하고. 빈은 마지막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또, 또. 희망고문. 다 큰 남정네 둘이서 어떻게 같은 방에서 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이 넓은 호텔에 빈 씨 방 하나 없을 거 같아요? 하도 편해져서 돈 많은 조폭이라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일주일에 반 이상은 보는 얼굴이 익숙해지기 시작해서 처음 이름 한 번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저기, 그쪽으로 부르던 호칭이 이제는 은우 씨, 차은우 씨 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설렜다. 빈껍데기 속에 홀로 살아오던 공간에 온기가 느껴졌다. 살아옴에 있어 스스로 자처하여 곁에 있어주지 않았으니까. 아마 조금은 많이 그리웠을 수도 있었겠다고 가끔 생각했다. 필요한 것만 챙겨서 와요. 빈 씨가 원하는 모든 것들 전부 줄 자신 있어요. 나 믿고 들어와요. 목소리엔 강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그보다 빈을 더욱 미치게 만든 건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잠들기 직전까지 은우를 하루 종일 본다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요즘 자제하고 있는 마음이 더욱 들뜨기 시작해서 벌써부터 심장은 터질 듯이 발악하고 있었다. 이걸, 이걸 어째. 빈은 기어코 은우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그럼 내일 애들 보낼까요? 짐 많을 텐데 혼자 들고 오긴 힘들잖아요. 빈은 휴대폰을 꺼내드는 은우의 손목을 붙들고 제지했다. 아뇨. 제발 그 덩치들 보내지 마세요.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이 이리도 행복한 것이구나. 외롭지 않아. 더 이상 무너지고 싶지 않아. 웃음이 늘었다. 빈 스스로 자각하기에도 가벼운 변화였다. 내가 웃음이 이렇게 많았나. 가끔 은우와 대화하다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너무 경박스럽게 웃었나 싶어 아 미안해요. 너무 들떴다 나. 빈 씨는 웃는 게 예뻐요. 웃어줘요. 대화의 흐름은 언제가 빈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더불어 은우를 향한 빈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고 동시에 두려웠다. 들키면 안 된다. 들키면 또, 또 버려질 테니까. 빈은 은우를 잃고 싶지 않았다. 



 선을 넘지 말았어야 했다.



 은우 씨는 계속 혼자였어요? 가족이라든지 친구라든지. 커피향과 코코아 향이 섞인 묘한 향이 한참 들뜨던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방향성을 잃었다. 은우가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빈의 심장도 덜컹 내려앉았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선을 넘었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시에 고개를 떨궜다. 화났겠지. 내가, 내가 괜한 걸 물어봐서. 고개를 떨구기 전 본 은우의 얼굴이 뇌리에 박혔다. 복잡한 표정으로 굳어진 미간이 꿈틀거리는 걸 그 찰나의 순간에 확인한 빈은 얼굴로 피가 쏠리는 것을 느꼈다.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 혼자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들뜨고 친해졌다 생각하고 멋대로 행동했다. 상처를 줬다. 또, 또 버려지겠구나. 죄책감과 우울감이 가득 물든 얼굴을 끝내 들 수가 없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푹신했던 소파의 감촉이 돌덩이 같았다. 죄송해요. 먼저 들어갈게요. 은우 씨도, 일찍 자요. 목소리에 삑사리가 나고 고스란히 전해지는 떨림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돌아서는 순간 손목이 잡혔다. 막 두 걸음 내딛고 그대로 굳어버린 빈의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 은우와 마주했다.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아. 왜 우냐. 뭘 잘했다고 울어. 나 봐요 빈 씨. 이 꼴로 고개를 들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들면 곧바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왜 울어요. 예쁜 얼굴 다 망가지게. 운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은우는 푹 떨군 빈의 양 볼을 잡고 축축이 젖은 볼을 닦아줬다. 다정함에 기어코 눈물이 터졌다.



"왜,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요,"

"울지 마요. 빈 씨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는데, 미안해서 그래서,"

"빈 씨. 울지 말고 나 봐요."



 나 하나도 상처받지 않았어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냥, 그냥...... 아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화난 거 절대 아니에요. 다 내 잘못이에요. 울지 마요. 울지 마요 빈아.



 처음에는 몸을 뒤로 빼면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더니 품에 끌어안은 채 힘을 꽈악 주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아예 소리 내어 엉엉 운다. 가슴팍이 눈물로 축축하게 젖든 말든 은우는 한참을 다독였다. 다정한 손길에 말투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차은우가 뭣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는 빈을 어르고 달랬다. 빈은 그게 참 슬펐다. 나만 의지하고 있구나. 자신이 은우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을 필요로 하다던 은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생각에 빈은 더욱 서러웠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울지 말라는 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이 꺼졌다. 은우는 품에 안겨 잠이 든 빈을 방으로 데려다주지 않고 자신의 침대에 눕혀 마주 보고 누워 품에 끌어안았다.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쫓아오는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저 멀리 손을 뻗어오는 그림자에 비명을 지른다. 왜. 왜 날 죽인 게냐. 대체 왜. 차은우는 무너졌고 막다른 길에 몸을 기대고 잔뜩 몸을 웅크렸다. 검은 그림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차은우를 덮치려던 검은 그림자가 바스러지듯 사라지고 어둠이 점차 빛으로 밝혀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쿵, 쿵.



 괜찮아요. 다 괜찮아. 떨림이 잦아드는 순간까지 빈은 한참이나 은우의 등을 토닥였다. 왜 자신이 여기에서 자고 있는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품속에 안긴 은우의 악몽을 쫓아내려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모든 의문을 뒤로하고 쿵쿵 뛰는 심장 가까이 은우를 끌어안는다. 왜 아파해요. 왜 자꾸, 왜 자꾸만. 스스로 자각했으면서도 어리숙한 감정은 제대로 된 길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엇나갔다.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가 왜 이리 어려운지, 답답하기만 한 건지. 끝내 밝혀내지 못한 답답한 마음은 눈물로 쏟아져 나왔다. 흐려져가는 시야에 은우의 고통 어린 신음 소리가 잦아들었다. 놓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존재. 그 존재를 위해 내 모든 것을 버린다 하더라도. 절대로.




-




'오늘도 늦어요?'

'미안해요. 일이 좀 많아서.'

'......알겠어요.'

'먼저 자고 있어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은 미련 없이 흘러갔다. 빈은 착잡했다. 은우의 얼굴을 보지 못한지도 이 주가 넘어갔다. 그래. 하루 이틀이면 뭐 일이 많이 바쁜가 보다, 또 어디서 어떤 못돼먹은 놈들을 신나게 패고 있을까 하고 생각했겠지만. 차마 직접 물어보기도 꺼린 것이 그날 이후로 묘한 거리감이 생겨서. 빈은 하루 종일 울적했다. 어떻게 그 잘생긴 얼굴 한 번을 못 보냐고.



 그러나 빈은 몰랐다. 새벽 어리숙한 달빛이 창문에 반사되어 비칠 때 미처 닦아내지 못한 핏내음 가득한 몰골로 제일 먼저 빈의 방을 찾아 손을 뻗었다 피로 가득 물든 제 손을 내려다보고 그대로 거두어 방을 빠져나가는 축 늘어진 은우의 뒷모습을. 새벽잠이 많은 빈이 알 리가 없었다. 가끔 눈이라도 뜨고 있으면 좋으련만. 은우도 은우 나름대로 생기를 잃었다. 그 맑은 눈동자를 보지 못한지 시간이 꽤 흘렀다. 복잡했다. 내 어둠으로 인해 밝은 네가 망가지는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내 욕심일까. 그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얼굴을 그리고 그리며 사랑을 갈구했다. 그 거리가 너무 멀어 미처 전해지지 못했을 뿐. 타이밍이 정확히 들어맞았을 땐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상황이 벌어질 줄은 알지 못했다.




-




 한밤중 빈은 달렸다. 이를 악물고 잠에서 깨기 위해 노력했다. 형님, 형님이 많이 다치셨습니다. 빨리 어떻게 좀 해보십쇼. 우리 형님 죽으면 안 됩니다. 덩치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다르게 잔뜩 상기된 얼굴로 빈에게 빌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으면서.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이런 몰골로 내 앞에 나타났다는 거지 지금. 처참한 몰골에 빈은 기어코 꾹꾹 억눌렀던 울음을 토해냈다. 며칠 동안 그 잘난 얼굴 코빼기도 안 보여주더니만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게 어딨어요. 존나 나쁜 새끼. 나쁜 차은우. 손이 닿는 곳마다 핏물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빈은 곧바로 상체 셔츠를 찢듯이 벗겨내 상처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눈 아래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처음 만났던 그날 다쳤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처들에 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핏기 없는 얼굴을 쓸었다. 얼굴 곳곳이 차게 식었다. 입에 손수건을 물렀다. 상처에 손을 갖다 대는 족족 미간이 찡그러진다. 고통스럽게 흐르는 신음소리를 듣고서도 움직이는 손길을 멈출 순 없었다. 살려야 했다. 후회스러웠다. 차라리. 차라리 보고 싶다고 투정이라도 부려볼걸. 눈물이 뚝뚝 떨어져 흐려지는 시야에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 거칠게 눈가를 닦아냈다. 비벼낸 눈 주변으로 피가 묻어났다. 눈가에 뜨뜬한 열기가 올랐다. 살아야 해 당신은. 죽으면 안 돼. 죽지 마. 제발.




 아직 좋아한단 말도 못 했단 말이야.




-




 일주일이 넘도록 침대에서 꼼짝하지 않고 뜬눈으로 막연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 말인즉슨 은우를 보지 못한 지 일주일이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빈은 은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푹 잠든 거예요. 상처는 잘 낫는 중이고 때가 되면 깨어날 테니까 걱정 마세요. 일어나면 누워있으라고 해요. 움직이면 덧나니까. 피를 닦아낼 생각도 못 하고 제 침대로 돌아온 빈은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뻐근함에 앓아누웠다. 막상 보고 싶었던 얼굴을 저 꼴로 보게 되니 심장이 미친 듯이 아렸다. 마음은 먹고 있었는데. 언젠가 크게 다쳐서 올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는데.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그 충격은 더했다. 이 상황에서 다시 얼굴을 마주한다면 일주일 전 상황이 오버랩 될까 두려워 애써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상황들을 억지로 지워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게 이토록 가슴 아픈 일인 줄은 몰랐다. 흘릴 눈물조차 말라버린 듯 겨우 잠만 청했다. 잊자. 다 지워버리자 하고.



 느즈막한 새벽의 밤공기에 부스스 잠에서 깼다. 빈아. 환청이라도 들리는 것인지 정신은 말끔하게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거운 눈은 떠지지 않았다. 아니 뜰 수가 없었다. 만약 환청이 아니라면?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얼굴 위로 피가 쏠렸다. 눈과 이어진 신경 마디마디가 전부 쓰라리고 시린 것만 같았다. 아아. 또 눈물이 나려나 보다. 눈가를 비집고 새어 나오는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흐르는 것을 따뜻한 손길이 훔치고 지나갔다. 빈은 그제서야 꾹 다문 입새로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왜 울어요 빈아. 환청이 아니구나. 차라리 환청이기를 바랐는데. 그래야 내가 또 이렇게 미련하게 울 일은 없었을 거 아니에요.



"왜, 왜 일어났어요."

"..."

"움직이면 안 된다고 내가 분명, 말했는데,"

"이렇게 또 울고 있을까 봐."

"..."

"그리고."




 보고 싶어서요.



 보고 싶었단 한마디에 저 마음 깊은 곳 꾹꾹 억눌렀던 서러움과 가슴 절절한 사랑 고백이 봇물 터지듯 튀어나왔다. 내가, 내가 잘못했어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은우 씨.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런 흔한 사랑 고백 말고 보고 싶었다는 그 한 마디 하기 어려워서 빈은 하루 종일 속앓이를 했다. 이게 뭐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아픈 사람 저 멀리 두고 나 혼자 아프다며 쩔쩔매고 있던 꼴이 우스웠다. 정작 상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하는데.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진짜, 나쁜 거 알죠,"

"알아요. 나 나쁜 거."



 약속 못 지켜서 벌받았나 봐요. 나한테 벌은 빈 씨 우는 거 보는 건데. 자꾸 우네. 예쁜 얼굴 다 망가지게. 누구 때문에 킁, 우는데요. 눈물 콧물 질질 쏟아내고 뒤늦게서야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걸 알고 경악하며 품에서 달아났다. 빨리, 누워있어요 방에 가서 아니, 아니다 여기 누워요. 움직이면 상처 터진다고 내가 처음에도 말했는데 왜. 왜 자꾸 말을 안 들어요. 진짜 말 안 들어. 또 괜찮다며 사양할 거 같더니만 순순히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눕는다. 불편할 거 같으니 내려가 있어야지 하고 돌아서려는 몸이 허억 하고 돌아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눈동자만 떼굴떼굴 굴리다 일으키려 하면 그냥 누워 있어요. 빈 씨 얼굴 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굳어버린 몸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조물조물대는 손길에 조금씩 숨이 트였다. 정적 속 한숨이 터졌다. 빈이 고개를 들어 은우의 눈을 마주했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할까 당신은.



"부모님은 둘 다 돌아가셨어요."

"..."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리고 아마 나도 죽을 뻔했지만."

"..."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죽였고,"

"......은우 씨."

"우리 아버지는,"



내가 죽였어요.



 은우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잔혹했던 아버지, 아버지의 손에 죽은 어머니.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던 어린 자신. 사람은 어떻게든 죽는단다. 네 어미도 마찬가지고. 그 후로 기억은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칼에 찔려 죽은 아버지와 붉게 충혈된 눈에 손부터 시작하여 옷 이곳저곳에 튄 핏자국. 죽기 직전까지도 욕망에 번들거리던 눈은 감기지 않았다. 은우는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직을 이끌었다. 세력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높은 위치, 높은 권력을 손에 쥐고 살아왔지만 실상은 무기력함의 극치를 달렸다. 그날 어머니가 죽지 않았더라면, 여태껏 자신의 곁에 남아줬더라면. 자신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두지 않고 그저 작은 손길의 토닥거림 하나 바라왔을 뿐인데. 조금이라도 나 자신을 이해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줄 존재. 그 존재가 필요했을 뿐인데. 사람 하나 죽어나가는 것쯤이야 별거 아닌 암흑 같은 세상 속에서 버텨왔던 건 오로지 허무하게 죽어버린 제 어머니 하나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악물고 버텼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신에게 뻗어 줄 존재 하나만을 생각하며 버텼다. 그 존재를 은우는 빛이라 생각했다. 나를 밝혀줄 단 하나의 빛.



'빈 씨는,'

'빛 같아요.'

'나한테만큼은.'



 빈은 그날 은우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자신을 빛이라 여겼다. 고작 나 같은 게 빛이라니. 라고 생각했던 그날의 기억들. 자신의 과거를 얘기할 때마다 중간중간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했고 덩달아 숨이 턱턱 막혀오는 느낌에 은우를 품에 끌어안고 한참 토닥였다. 힘들었구나. 많이 외로웠구나. 왜 혼자 힘들게 버텼어요. 내가, 이제 내가 있는데. 한때 자신이 쓸모없다 느껴졌던 때가 있었다. 고작 나 같은 게 뭐라고. 대체 뭐라고. 나 같은 걸 왜 곁에 두려 하는지, 왜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만들었는지. 나 자신을 잡아먹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내가 당신의 빛이구나. 항상 빛나고 있구나.



"악몽을 꿔요."

"..."

"매번 죽고 또 죽고,"

"..."

"항상 죽어요 난."



 차은우가 운다. 울었다. 죽음이란 너에게 어떤 존재일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고 버티면서도 매번 쓰러지고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켜야 하는 고달픈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며 살아왔는지. 일정하게 뛰는 심장 가까이 은우를 묻는다. 눈물이 축축하게 젖어 묻어나도 상관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한 안식처. 빈은 더 이상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니까.




선명하게 들렸어요. 빈 씨 심장소리가.




 어두웠는데. 한순간에 밝아졌어요. 악몽을 꾸지 않아요. 빈 씨 덕분에. 그러니까,




계속 내 곁에 있어줄래요?



 어둠을 밝혀주는 것은 빛이고 내 세상에 빛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오늘도 품에 안겨 잠이 든다. 서로의 품에 안겨 온기를 묻는다. 더 이상 어둠도 악몽도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빛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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