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

2019 가을호
작성자
달함
작성일
2020-11-12 16:30
조회
3




 사막의 모래에는 아주 많은 씨앗들이 있다. 그 씨앗들은 피어날 날을 한 없이 기다린다. 자신을 피울 수 있게 도와줄 물이 올 때까지 시간을 세는 그 숫자가 무색할 만큼이나마 오래 기다린다. 마침내 비가 오고 씨방을 터뜨려 스스로가 꽃이 되었을 때 사막은 아름다운 수만송이의 꽃밭이 된다. 푸석하기 그지없는 죽음의 땅인 줄 알았던 사막이 그 누구보다도 강하게 살아 숨쉰다. 더없는 찬란함을 뽐내다 금방 셀 수 없는 기다림에 빠진다. 그리고 그 희박하고도 강한 생명력을 기다리는 것은 사막 혼자만은 아니다.

 물 만난 물고기라는 말은 잔인하다. 그런 것 같다. 죽어가는 것에 물을 주는 것은 신선도를 높이기 위함일 뿐이다. 내가 기다리는 물이라는 것은 살기 위함이다. 더 없이 찬란한, 찬란해질 나를 뽐내기 위함이다. 태어나기 위함이고 지나가는 시간에서 물러나기 위함이다. 단 한 번의 개화라 할지라도 피어나고 싶은 욕망은 어쩔 수 없으니까.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 만난 씨앗이 되기 위해.

 다만 무서운 것이 있다면 내가 특별히 원하지 않는 날에 물을 만날까 두렵다. 바람이 불어서 안락한 이곳을 어쩔 수 없이 떠나 나와 내 동지들이 날아가 다른 모래섬을 쌓아야 할 때. 모나지 않은 내 몸이 터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면? 난 아마 물방울과 뒤섞여 곧장 추락할 것이고 그 충격에 싹도 틔우지 못하게 된다면? 난 정말 슬플거야. 그렇게 내 기다림은 좌절로 끝나고 마는거야.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은 모르겠지. 비가 오고 꽃이 피었으니까. 그게 나의 가장 큰 공포다.




 

 

 

 

 

 

더 무서운 건 아마

 

 

 

나도 모르게 내 꽃이 지고 있는 걸지도 몰라

 

 

 

아니

 

 

 

모른 척 했겠지

 

 

 

내 꽃잎이 시들어 떨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

 집으로 가는 길 끝에 누군가가 보인다. 마음이 급해진다. 분명 한 두 발짝 빨리 갔는데 뒤로만 간다. 달리면 달릴수록 얼굴은 선명해지는데 하염없이 더 멀어진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때쯤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가 나를 붙잡는다.

삐비빅- 삐비빅- 삐비빅-

알람을 끄면 널 만날 수 있다. 잡았다. 이제 됐다. 잡았다. 잡았다? 깼다. 꿈이었구나.

 난 아마 너 없이도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젠 네 아침전화 없이도 잘 일어나고 잘 치우고 잘 씻고 잘 잔다. 너의 확인전화 없이도 집에 잘 들어간다. 더이상 네 외로움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영상통화를 한 것이 작년 여름 이후로 한 번도 없다. 아니, 내 의지로 먼저 다이얼을 누르는 일이 거의 없다.

난 잘 살고 있다.

 지긋지긋한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급하게 다가온 그 때쯤, 그 날이 벌써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찾아왔다. 가을이 되면 너와 같이 입으려고 샀던 트렌치코트의 포장을 뜯어보지도 못한 채로 버렸어야 했다. 미련을 반품하고 돈으로 돌려받을 수는 없었으니까. 차라리 미련 같은 거 버리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랬던 게 더 미련했다는 것을 안다. 옷을 버리기 위해 반팔 차림으로 밖에 잠깐 나갔다가 오한이 들어 열이 펄펄 끓었던 것도 벌써 일 년이나 지났다는 것이다.

어느 무렵부터 너에게서 나던 서늘한 담배의 향이 이제 나에게도 나는 듯싶다. 차갑디 차가워진 관계가 피부로 느껴져서, 체향으로 느껴지는 것 같아서 싫어했던 그 지독하던 냄새가 이제 나한테도 난다. 몸에 좋지 않은 것은 생각이라도 하지 않았던 너에게서 나던 그 담배의 쇠냄새가 궁금해 피우기 시작한지가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나는 그 흡연이란 것의 서늘함을 느낄 수 없게 됐다.

 어쩐지 오늘은 네 생각이 멈추지를 않는다. 가끔씩 이런 날이 있는데 그럼 그냥 그렇게 네 생각에 하루를 다 써버린다. 원망으로 시작해서 복수를 꿈꾸다가 체념한다. 시작이 어찌됐든 끝은 항상 체념이다. 생각한대로 된다면 여기서 네 생각만 하고 있지않을 것이라는, 지금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다 부질 없는 것들이라는 그런 체념들.

맥주 뚜껑을 딸 때 탄산 소리와 함께 삐져나온 맥주의 향이 역하다고 느껴지면 그 것을 깊게 훔쳐 곧장 폐로 집어넣는다. 그 향은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듯이. 네가 그렇게 가버린 후 난 항상 맥주의 향을 맡았다. 그 역한 것을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면 머리속은 맹탕이 되었으니까.

-

 널 처음 봤던 그 때 쯤 네 이름이 왜 동민인가 혼자 궁금해 했다. 네 가족이 지었으니 넌 그 이름이 되었겠지. 그 평범한 이름에 어떻게 널 모두 담을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래서 네 이름의 뜻이 궁금했다. 한자를 물어보면 되겠지만 그냥 혼자 생각해봤다. 네 얼굴을 떠올려봤다. 동글동글해서 동민인가. 그럼 민은… 똑똑하니까… 민… 영민하다의 민… 그게 내 어휘의 한계였다. 아무튼 넌 동민이라는 예쁜 꽃을 가지고 있었다.

언제부터 내 옆에 있는 네가 자연스러워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종종 시작이 언제였는지 궁금해졌을 때 네게 기억이 나냐고 물으면 항상

"처음부터."

 라고 답했다. 어디서부터가 처음인지 이제야 좀 알 것만 같다. 문을 열고 네가 그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넌 항상 날 보고 있었다. 내가 널 애써 외면했던 것마저 다 알고 있었다.

맑고 소중했던 동민이는 내 알람이 되어 아침을 깨우고 함께 마음에 점을 찍고 저녁을 같이 보냈다. 뽀얗고 동그랗던 그 얼굴은 이유모를 슬픔에 가득 차있다가도 금새 투명해졌다. 그런 너는 내 삶에 스며들었다. 너는 곧 내 세계에도 스며들었다. 그리고는 새로운 씨앗을 준비했다.

 동민은 나를 만나고 두번째 꽃을 피웠다. 아니, 씨앗에 알아서 물을 주고 싹을 틔우고 꽃망울을 빼꼼 보이더니 어느새 더할 나위 없는 꽃이 되었다. 은우라는 이름은 네 두번째 꽃을 담고 또 나를 담는다. 어쩌면 그저 나의 바람일지도 모른다. 네 한 송이 꽃, 개중 하나의 꽃잎, 안 되면 이파리라도 되기를 바라는. 그런데 어느샌가부터 동민이는 보이지 않았다. 동민이는 없어진게 아니었다. 숨어있었다. 상처받게 하지 않기 위해서 은우가 꼭 숨겨준 것이다. 동민이는 은우에게 물을 주었고 은우는 동민에게 안식처를 마련해 주었다. 나는 그 안식처가 나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두번째 꽃이 피고 난 후 얼마나 흘렀을까. 내가 은우인 동민이를 마주하는지 동민이인 은우를 마주하는지 알 수 없게 된 때가 찾아왔다. 난 헷갈리기 시작했고 넌 네 두 꽃을 모두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갈 곳 없는 두 꽃의 모래가 되어주었다. 그래서인지 내 꽃은 나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나 몰래. 따거운 햇빛이 있고, 살랑대는 바람이 불고, 적당한 비가 내리는 땅으로 갔다. 나는 알고도 놔주었다. 내 꽃의 정착지는 너였으니. 안심하고 보내주었다.

 내 꽃은 그렇게 네 세계의 태양만을 바라보았다. 해가 고개를 드는 방향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숙일 때 같이 고개를 숙였다. 네 모든 것이 탐스러웠기에 네 세계에서 흐드러지게 피어서 더 찬란해지기 보다 너를 갖는데 열중했다. 미처 몰랐던 것이다. 내 세계에 이미 네 두 꽃이 존재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닌데 난 항상 네 짝이 되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둘은 붙어있었다. 운명의 짝꿍 뭐 이런건가 싶을 정도로. 서로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항상 당연하게 곁에 있었다. 당연한 건 금새 익숙해졌고 익숙한 것이 그렇게 포근하고 좋았다. 우리가 가족보다 더 가까운 친구 뭐 이런걸로는 정의할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말로 표현하기를 아꼈다. 내 생각엔 네가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넌 훨씬 이전부터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고 부러 티내지는 않았다. 대신 절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마음이든 몸이든 언제나 내 옆에는 네가 있었다. 내가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넌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그렇게 늦게 깨달아 버렸다.

내가 네게 답을 줬을 때,

윤기가 흐르는 꽃잎은 서로 엉겼고 옆의 것들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다. 줄기는 베베 꼬였고 두 송이의 꽃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

우리는 찬란했다. 찬란함의 유효기간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희박한 땅에서 피어난 꽃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그만큼 서로를 너무나 사랑했다.

으스러질까 살포시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언젠가 손끝이 아닌 손톱으로 널 스친적이 있다.

괜찮다고 했는데 그 때 난 상처가 시발점이 되어 네 이파리들은 하나 둘 낡아가기 시작했다.

낡아가는 꽃잎들이 안쓰러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었다.

나도

시들어 가고 있었으니까.

꽃은 언제나 시들기 마련인데

왜 그걸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꽃은 언제나 시들기 마련인데.

-

 언제나 그랬듯 넌 내 아침을 깨웠다. 함께 마음에 점을 찍고 저녁을 같이 보냈다.

그날따라 좀처럼 햇빛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비가 쏟아진 것도 아니었고.

그럼 바람이 좀 많이 불었나.

넌 결국 고개를 숙였고 남아있는 마지막 습기를 떨궜다.

나도 고개를 떨궜고 더이상 널 볼 수 없었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으니까.

시든 채로라도 더 살아보려고, 살아보라고

서로를 위해 돌아보지 않았다.

 끝이 있을거라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오히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마지막이 불안해서 더 구체적으로 상상했었다. 나를 찾는 무대가 더이상 없어진다면. 더이상 무대에 설 이유가 없어진다면… 그런 생각들 사이에도 넌 항상 있었는데 담배의 서늘함이 피부로 느껴질 때쯤 네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우리의 관계에 어떻게든 마지막이 있는 것이었다.

애석하게도 사랑이라는 것이 영원할거라는 순수한 믿음은 애초에 없었다. 사랑이 끝나면 의무만이 남는다고 믿었다. 상대방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 지금 내 감정 하나 때문에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내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의무. 변질된 나의 사랑은 네 말 한마디에 져버렸다. 아니지. 내가 애써 붙잡고 있던 내 의무들을 넌 한 순간에 놓아버렸다. 나를 위해서라는 말로. 네가 놓아 버렸으니 난 그것들과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라면, 그래서 내린 결정이라면, 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너의 말이었으니까.

그렇게 내 첫번째 꽃이 졌다. 입을 다물었고, 고개를 숙였고, 물기가 빠져 시들었고, 썩어서, 금새 사막이 되었다.

-

 꽃을 피우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마음대로 피지 않고 쉽게 죽지도 않는다.

조그마한 상처에 금방 생명력을 잃을 것 같지만 금방 그것을 떨궈내고 다시 파릇해질 수도 있다.

꽃은 그냥 본인의 기력이 다할 때 시드는 것 뿐이다.

지켜보는 이는 마음 아플 일이겠지만

꽃은 충분히 자신의 찬란함을 뽐냈을 것이다.

행복했을 것이다.

네가 물을 줘서, 햇빛을 볼 수 있게 해줘서, 선선한 바람을 느낄 수 있게 해줘서,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꽃은 네가 모르는 곳에 새로운 씨앗을 하나 떨어뜨렸을 것이다.

-

 내 모래섬은 잠복 중이다. 두번째 꽃을 피우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씨앗을 감춰두면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씨앗이 되어 끝없는 모래섬 사이를 걷는다. 오아시스를 찾아서. 비를 기다리기에는 내 마음이 조금 급해서, 사막을 헤집고 다닌다. 오아시스를 찾으면 그 주위를 서성이다 날이 좋-고, 기분이 조금 좋을 때 그 큰 연못에 퐁당하고 빠질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연못도 귀 한 번 긁고 말아버릴, 그 정도로 모르게. 그럼 물을 흠뻑 빨아들인 후에 뭍으로 올라와 물가의 조약돌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내 조그만 떡잎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다음 꽃이 되어서 네 덕에 이리 예쁘게 피었노라 하며 연못에게 말을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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