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함

2019 가을호
작성자
작성일
2020-11-12 16:31
조회
4

 

 

귀가 간지럽다. 마지막의 마지막, 예의 차린답시고 어떻게 끼고 온 귀걸이가 이제 와서야 은독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익숙치 않은 걸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거고, 그 당연한 걸 굳이 거슬러서라도 낯섦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당연했다. 처음엔 피도 나고, 자리잡기까지 몇 번이나 곪아버리는 바람에 어지간히도 귀찮은 걸 알면서도 이미 품어버린 묘한 기대 때문에.

 

빼고 싶다면 언제든 뺄 수 있다. 그건 내 몫이다. 분명히,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빼질 못하고 조금만 더 있으면 완전히 자리 잡힐 거라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만큼이나 아주 잘.

나도 모르게 중심부를 건드리는 아픔에 놀랄 때도 있다. 그 순간도 분명 내 몫. 그 아픔 하나하나가 쌓이더라도 만지작거림을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고.

 

그래도 또 익숙해진다.

그게 또 나였고, 하필 또 너였고.

 

네 사랑에 익숙해지고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게 된 것에 굳이 다 그렇게 되는 거라며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비슷한 속도로 타올랐던 게 더 빠른 속도로 꺼져가게 된 건 여전히 타고 있는 네 탓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한쪽 몸을 물에 담그고 있는 내 탓이 맞았다. 날 탓해준다면 차라리 더 좋을 것만 같은데...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걸 잘 아는 나는 자책을 해야만 했다. 결국은 다 나 좋으라고 하는 짓이다.

 

아까워서, 또 여태 이 연애에 쏟아부은 것들 하나하나가 아쉬워서. 어느 순간부터 시작된 무너짐을 저 이유 하나만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는 걸 너도 알아챘나보다. 비슷한 무렵부터 더 다정해질 것도 없는 줄 알았던 네가, 그 이상의 숨막힐듯한 다정함을 부어오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런 널 따라 노력하면 다 될 줄 알았나보다. 남들 연애에 그리 잦다는 다툼 한 번 없이 고요하게도 흘러갔던 우리니까 더더욱. 이 관계를 붙잡고 있을 노력은 하나도 닳지 않은 신상이었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삐까번쩍한 노력을 꺼내 신어본 후에야 깨달은 것들이 있다. 노력도 결국은 해본 놈이 할 줄 안다는 것과, 우리의 연애는 그 흔한 노력도 할 새 없이 순탄하게도 흘러갔다는 것. 닳고 안 닳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다만 생각보다 높고 좁아, 까딱하면 떨어져 모든 게 끝장날 수밖에 없는 끈 한 줄 위에서 고공행진을 하는 이 위태로움에 적응하질 못했던 거다. 웃음을 지어낼 여유도 없었다. 손발이 달달 떨려서.

 

밑을 보지 말고 앞을 보라고 했었나...근데 앞이 하나도 안 보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쩔 수 없이 시선이 또 떨어지고 마는 거다. 다시 또 그 높이에 기겁할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움찔거리며 심장 졸이는 수밖엔.

언젠가 끊어질지 모르는 외줄타기였는데, 그게 마침 오늘 끊어진 거였다. 여태 고민해온 걸 생각하면 그냥 담담히 받아들일 법도 했는데 그건 또 어려운 게 웃겼다.

 

 

내 의지로 네가 준 사랑의 단편을 귀에서 빼내는 순간, 아마 허전해서 뒤척이느라 잠을 못 이룰 게 분명했다. 텅 비어버린 자리가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귀를 죽어라 만지작거릴테고,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선 침 한 번 꿀꺽 삼키고 모른 체 다시 그 한 조각을 찔러넣을 것도 대충 예상이 갔다. 표정에 다 드러나. 네가 줄곧 그렇게 말해왔던 것처럼 난 그렇게 뻔한 짓을 할 거였다. 문득 또 미안해서 죽을 거 같았다. 내 표정에, 시선에, 손짓에 노력이 담긴 걸 알아챈 순간 너는 얼마나.

 

미안해서 눈물이 나는 건지 아까워서 눈물이 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울고 있다는 거 하나는 잘 알았다. 그것도 아주 궁상맞게, 거의 막차에 가까운 버스 맨 뒷좌석에서 다리를 달달 떨면서, 간간이 울음 소리도 섞어 가면서 그렇게 울고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 너.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아니다. 이 연애가 아쉬워서 우는 게 아니었다. 널 다시 보고 싶어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근데 또 누군가 왜 우냐고 물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아마 보고싶다고 말할 거다. 그 시작점의 우리가 너무 보고 싶다고. 네 말투, 손짓, 버릇. 뭐든 좋아서 혼자 심장 뛰어가며, 숨가쁘게 지냈던 그 시절이 너무너무 보고싶다고.

 

끝의 끝에서 그대로인 건 너였고, 변해버린 건 나였지만, 나는 또 말도 안되는 투정을 부리고 있다. 그토록 준비했던 이별의 순간이었는데 나한테 죄책감 지워주기가 싫어서 먼저 헤어지자 말해오는 너 때문에 하나도 제대로 되는 게 없었다. 널 탓할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마냥 탓하고만 싶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은우야. 왜 마지막까지 내가 네 다정함에 기대게 했어. 달달 떠는 내 손을, 왜 잡아줬어. 왜 미안하다고 했어. 더 잘해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중얼거렸어. 왜 네가 다 잘못한 것처럼 그랬어.

 

내가 짊어지고 싶었던 헤어짐인데 그 짐조차 무거울까 싶어 먼저 들어준 네가 마냥 미워서라도 속으로 네 이름을 죽어라 불러댔다. 왜 그랬어 차은우. 왜 그랬어, 왜.

 

 

불똥이 사방으로 튄다. 옮겨붙고, 빠르게도 번진다. 자책하고 싶다면서도 또 내 쪽으로 먼저 불어오지는 않는 불이다. 그걸 주위에 빙 둘러놓은 채 버스 맨 뒷좌석에서 훌쩍거렸다. 평소엔 멀리만 느껴졌던 집이 한순간이다.

들어가면 혼자일 걸 알아서, 혼자밖에 없는 빌라촌 오르막을 몇 번이나 올라갔다 내려갔다했다. 다리가 아팠다. 숨 같이 헥헥 쉬어줄 네가 없어서 외로웠다. 모두 다 괜찮아질 거라며 준비해 온 마지막의 그 후에서, 나는 하나도 괜찮지 못했다.

 

"꼴 좋다, 문빈."

 

사 년 가까이의 짝사랑, 이 년 즈음의 연애가 그렇게 끝났다.

귀걸이가 지독히도 무거웠다.

 

-

 

"...사귈까."

"뭐?"

 

무슨 말이야, 그게. 귓가까지 심장소리가 벅차오른다는 게 무슨 소리가 했다. 그날 깨달았다. 평소보다 영 제대로 말을 내뱉질 못하는 널 향해 재촉했던 기억도 있다. 응? 은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신경 끝까지 전해오던 술렁임, 조금만 다가가면 터질 것만 같은 웅성거림, 소란스러움. 그리고 그 사이 적막.

 

속으로 카운트를 셌다. 하나, 둘, 둘 반, 둘 반하고 반의 반, 또 반의 반의 반. 그리고 또 반의 반의 반의-

 

 

 

그때 속으로 내뱉지 못한 나머지 16분의 1박을 어제 그리고 왔나보다. 뭐만 하면 실감이 안난다하던 네 말버릇이 옮은건지 현실감이 없었다. 사실은 그냥 내 멋대로 도피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어쩔 수 없어. 한 번 중얼거리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나아진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아질 것들에 대해서도. 아직 열손가락을 다 접지도 못했다. 사실은 다섯 손가락도 지나치게 많다 싶었다. 좋았던 순간들은 이미 발가락 열 개까지 합쳐 세어도 훨씬 남고도 흘러내리는데.

 

늘 그랬듯 이놈의 변덕이 문제다. 떠올리려고 하면 떠올릴수록 함께했던 순간들이 끼어들어 방해하길래, 나아질 거라 중얼거리며 주문을 내리고만 있었다. 내가 해리포터가 못되는 건 잘 안다. 그게 좀 슬펐다. 그래도 이렇게 끼어드는 헛생각은 반가웠다. 고마웠고.

 

보통 시원섭섭해진다고들 하던데, 진짠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첫 이별이어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른다. 게다가 아직 1일차였다. 굳이 따지자면 하루까진 안 됐고, 열두시간 정도. 밤은 꼬박 샜다. 엉엉 울고 나면 지쳐서라도 잠에 편히 들 줄 알고 그냥 앞뒤 생각없이 계속 울어댔는데, 지칠대로 지친 와중에 맘편히 가라앉을대로 가라앉아도 되는건지, 그러다간 다시 떠오르지 못하는 건 아닌지.

 

어디에서 이별을 배워야할지 모르겠어서 뮤직비디오를 죽어라 보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 사랑 노래는 넘쳐나고, 이별 노래는 특히나 더 그래서 다행이었다. 좋은 노래들을 몇 곡 알아간다. 족족 플레이리스트에 하나씩 추가했다. 무언가 규칙적으로 할 일이 생기는 게 좋았다. 의무감에 그토록 짓눌러져 있던 건 언제고, 또 벗어나고 나니 이렇게 가벼울 수가 없어서 불안해지나 보다. 어디까지 떠오를 지가 겁이 나서도 있었고, 그렇게 떠오르고 나서 저 위에서 한 순간 떨어져 내릴 게 무서워서라도.

한동안 옆으로 돌아누워 뮤비 구경하고, 노래 추가하고를 반복하다보니 팔이 저려왔다. 그즈음되어선 배가 고파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마지막 끼니가 어제 저녁밥이었다. 그것도 널 만나러 간단 생각에 다 먹지 못하고 조금 남긴 라면.

겨우 이불에서 벗어났다.

 

어제 내팽겨친 설거지를 한다. 갑자기 이것저것 의욕이 생기는 기분이다. 좀 괜찮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그렇게 큰일이 아니었구나. 엄살 피운 거였나, 그런 생각도 해보고.

뭔가 욱하니 차오를 땐 그냥 밥 한 숟갈씩 넘겼는데.

 

"어떻게 된 게 집에 소화제 하나도 없냐..."

 

밖으로 나왔다. 가을 바람이 선선하고, 또 좋아서라도 맥주 한 캔 샀다.

우엉차가 원플러스원하길래, 또 찔끔 눈물이 났다.

여전히 맛은 죽어라 없었다.

 

-

 

이틀 째다. 그저께보다 훨씬 나았다. 맥주 한 캔 마시고 잔 게 괜찮았나보다. 그래서 오늘도 사왔다. 세일하길래 혹해서 여섯캔짜리로.

 

무슨 냉장고에 맥주밖에 없어.

 

냉장고에 한 캔씩 집어넣고 있는데, 어디선가 네가 툭 튀어나와선 끼어들었다. 안되겠다. 장보러 가자, 응? 불과 일주일밖에 안 된 대화였다. 술 한 모금 없이 입이 썼다.

물풍선을 터뜨린 거지, 내가. 가위로 도려내고 치울 문제가 아니였던 거지. 온통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걸 보며 그런 생각도 했다.

 

 

노래 하나에 꽂혀선 그것만 죽어라 들었다. 살짝 멜로디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됐길래 집에 오는 길에 코인 노래방 들렀다가, 방음이 잘 안 되는지 옆방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7년간의 사랑에 또 줄줄 눈물이 났다. 급히 인기차트에서 아무노래나 골라 틀었는데, 가사가 또 하필 헤어질 걸 잘 안다는 내용이어서. 운도 없지.

남은 두 곡은 일부러 신나는 노래를 예약했다. 평소보다 영 못 부른다.

 

'좀 더 빡세게 불러야 될 거래요. 힘내래요.'

 

점수 제거 까먹었나보다. 뺀질나게 들락날락거렸던 코인 노래방에서 네가 이걸 따라 하던 순간도 기억이 났다. 생각보다 잘해서 어이없었는데. 개웃긴 차은우.

 

밖으로 나와보니 여름은 어디가고 쌩쌩 칼바람이 불어댄다. 반팔 아래로 돋은 소름을 슥슥 문질러대며 집으로 뛰어갔다. 내일부터는 저 안쪽에 걸어뒀던 갈색 반코트를 꺼내야지. 지금 아니면 또 못 입을 걸 알았다.

날이 갈수록 가을이 짧아지는 게 아쉽다. 더워서 헥헥 대고 쓰러져 있으면 어느새 추워서 입 돌아갈 거 같은게 요즘 유행이었으니까. 너와 헤어진 후폭풍도 이렇게 쭉 반코트 꺼내입을 날씨 정도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적당히 알맞은 열병이 들이닥쳐 살짝 몽롱한 기분. 쓰러질 정도는 아니고, 그렇다고 몸을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적당히 실감은 나는 거.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는 잦았다지만, 그리 오래도록 아파보지는 않았던 몸이 이 이별에도 알아서 대처를 해줬나보다. 맛있는 걸로 보상해줘야지. 집에 오는 길 닭강정 집에서 순한맛으로 한 컵 정도 사먹었다.

배불러서 그런가 따 놓은 맥주 한 캔은 다 못먹고 랩으로 입구를 막을 수밖에 없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살살 들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았다. 선풍기 바람을 끄고 그대로 맞닥뜨렸다.

금방 잠에 들었다.

 

-

 

삼 일째. 시간이 휙휙 넘어간다. 할 일이 많았다. 질질 끌던 연애의 무기력증에 물들어 미뤄뒀던 일들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 해야할 것들을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생각해보다가 집에 오는 대로 포스트잇에 끄적거려나갔다. 꽤 큰 포스트잇이 두 세 장씩 넘어간다. 너 진짜 막 살았구나. 아니, 막 산 건 아닌데, 여하튼 부지런하지는 못했다.

 

할 일들이 눈에 들어오니 또 이놈의 청소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옷도 제대로 안 갈아입고 당장 뛰어들었다. 애초에 이러려던게 아니었는데 뭔가 마음에 안들어서 책 꽂힌 순서를 바꾸다보니 주위가 온통 너질러져 있고, 그런 거. 원래 주위 어지럽혀 가면서 청소하는 게 버릇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너는 정리해가면서 청소하는 편이었는데.

간간이 치고 들어오는 기억들에 가슴이 찌르르하고 그러진 않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사실 확인하는 기분. 그냥, 떠올리는 것들. 근데 좀 많았다. 짝사랑부터 헤어짐까지 장장 6년이니까, 인생에 속속들이 네 흔적이 배일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거였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받아들일 힘이 있었다, 아직은. 언제 이게 꺾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은 견딘단 느낌보다는 흘려 보내는 기분으로 널 떠올리는 중인 걸로 만족하기로.

 

쌓아져 올라가는 책들 사이사이에 네가 숨어있다. 사랑이 가라앉기 시작했던 무렵, 방 곳곳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사진들 속 널 마주칠 때마다 죄책감에 어쩌질 못하고 끼워둔 것들이다. 이거 말고, 그건, 어디 끼워 놨었지. 잘 나왔으면 한 장 줘, 했던 내게 웃으며 건네 줬던 민증 사진.

혼자 하는 사랑 몰래 품어나 보자 해서 이미 망한 버블티 전문점 쿠폰 뒤, 저 안 쪽에 꽂아놨던 거였는데, 그 무게가 또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어서 충동적으로 꺼내 어디 책 사이에 끼워뒀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찾으러 올게, 나중에 찾으러 올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되뇌이면서, 일부러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정말 아무 책이나 빼서 꽂아 넣어뒀던 건데 온 책을 꺼내 뒤적이고 흔들어봐도 딱 그거 하나만 없다. 다른 사진은 다 찾았는데, 딱 그것만.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이것도. 충동적으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구멍 막히지 않게 꽂아넣어놓은 말랑한 투명 마개 뚜껑 감촉만 느껴져 온다. 이게, 아니고. 이게 아닌데.

 

귀걸이, 어디에 뒀지.

귀에 열이 차오른다. 분명히 그 날 울면서 와선...그 다음 날엔 귀걸이 안 끼고 있었는데. 빌라촌 아래위로 왕복해 갔을 때만 하더라도 귀걸이 만지작거리며 훌쩍였던 기억이 있다. 급히 이곳저곳을 뒤적여 보는데 그러고보니 둘쨋날 아침, 나가기 전에 욕실에서 투명한 걸로 바꿨던 기억이 있다. 욕실로 뛰쳐들어갔다. 다행히 칫솔 꽂이 앞에 있긴 했다. 한 짝만.

 

 

너질러진 책을 어쩌지도 못하고 침대 위로 쓰러지듯 몸을 내던졌다. 가을 옷 꺼내놔야 되는데. 여름 옷이랑 바꿔야 되는데. 내일 입고 나갈 옷, 없는데. 추울 텐데.

 

"이게 아닌데..."

 

뭐가 그렇게 지친 건지 금방 잠에 들었다. 방은 너질러지고, 입고 온 옷은 구겨지고, 내일 입을 옷은 없고. 잘 하는 짓이다, 아주.

 

 

가을 바람이 차서 중간에 깼다. 벌써 또 겨울인가 싶어서 울었다.

 

-

 

사 일째, 오 일째, 육 일째....하루만 더 있으면 일주일이 다 되어갔다. 뭐하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귀걸이는 아직도 한 쪽을 못 찾았고, 그 때 그 민증 사진도 아직이다. 그렇게 크지 않은 작은 책장이라 한 번은 다 뒤적여본 거 같은데 어디 갔는지 보이지를 않는다. 몰아치듯 찾아보면 허무함이 커진다는 걸 알아서 하루에 몇 개씩만 뒤적이는 걸로 했다. 가을 옷도 아직 귀찮아서 안 꺼내다 보니 좀 얇은 여름용 긴팔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다행인 건 요즘따라 뭐 먹지도 않았는데 몸에 자꾸 열이 차올라서 쌩쌩 불어오는 가을 바람이 시원하기만 했다는 거였다. 그러고보니 아직 환절기 감기도 찾아오질 않았다.

 

계절마다 감기 한 번씩 앓아주는 건 3개월마다 있는 행사같은 거였다. 아무리 조심해도 어쩔 수 없이 집에만 꼼짝 없이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이틀쯤이 삼 개월마다 돌아왔다. 이번엔 이렇게 넘어가나...

좋긴 했는데, 꾸준히 찾아오던 게 찾아오질 않으니 애가 타기라도 한 건지. 은근히 기다리는 중이었나 보다. 대체 뭘?

 

어질러져 있는 방 꼴은 그대로 둬가면서 지갑 속 이리저리 박혀있는 영수증을 찢어 버리고 있었다. 와, 언제적 거야, 이거. 딱히 지갑을 바꾸고 그러질 않았더니 꾸깃꾸깃 구겨져 있는 것들이 여기저기에서 빠져나왔다. 많이도 썼네. 다이소에서 충동적으로 사온 무드등도 있었다. 켜놓고 잠들기엔 소음이 너무 심해서 저 어디 던져놨다. 저것도 버려야지. 생각 날 때 버리고, 이게 여기 있었구나 싶었을 때 미리 따로 잘 보이는 데에 두는 게 맞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거슬리고, 찾을 때 없고 하니까. 그걸 알면서도 기막히게 말을 알아듣지 않는게 또 나란 것도 잘 알았다. 오늘도 그 버릇 남 못 주고 그냥저냥 살아보는 중이었다. 지갑이나 뒤적이고, 가을 옷은 아직도 안 꺼내놨고, 방은 너저분한 상태고.

 

"사진은 못 찾았고, 귀걸이도..."

 

말로 내뱉고 나니까 더 참담하다.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참담하게 느낄 필요도 없는 건데, 아까워서 이런 건가. 그래도 나름 이 2년의 연애, 4년의 짝사랑 흔적을 남겨놓고 싶어서? 생각할수록 우울하기만 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지갑을 뒤적였다. 영수증 몇 장 없어졌다고 홀쭉해진 지갑을 보며 좀 홀가분했다. 맥주 한 잔 할까 싶어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그 때 덜 마시고 랩을 씌워놓은 게 보여서 좀 머뭇거렸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이만큼 놔두면 그냥 버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쥐여져오는 게 제법 묵직해서. 마실까...

 

 

김 다 빠졌길래 그냥 버렸다.

 

-

 

열 흘 째. 집을 못 나갔다. 생각해보니 지난번에 윤산하 폴킴 콘서트 간다고 오후 수업 대리 뛰어줬던 게 기억이 나서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어, 윤산하... 심리학의 이해 듣지."

 

"네, 좀 있다가요. 왜요?"

 

"나 출석 좀...그때 폴킴 그거 이걸로 퉁치자."

 

"네, 뭐. 근데 왜요? 뭔 일 있어요?"


"몸살감기..."

 

"어이구...일단 알겠어요. "

 

"감사..."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숨이 가빠와서 살 수가 없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게, 이러다간 층간 소음이라고 신고가 들어오는 건 아닐까 겁이 날 정도로 너무, 막.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진을 찾았다. 지갑 저 안쪽 주머니에서였다. 결국 품고 있던 거다. 떠나보낸 줄만 알았는데.

 

숨이 턱하니 막혀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바깥 공기가 너무 차고, 바람이 너무 세고, 웅웅거렸다. 결국 여전히 난 너 떄문에 숨가쁘고 쿵쿵 뛰고 그랬다. 보고 싶었던 것들이 예상치도 않은 순간에 빠르게 찾아오는데, 너만 없었다. 이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게 너무 화가 나서 또 귀에 열이 차올랐는데, 몸엔 한기가 돌대로 돌아서 이불로 뛰쳐오는 것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혹은 그것밖에 할 수 없다고 변명을 하고 있는 걸지도.

 

집에 와서야 꽉 쥐었던 손아귀에서 힘을 풀고 널 만났다. 지금보단 확실히 앳된 얼굴이었지만, 네가 맞았다. 네가 맞아서 화가 났고, 네가 맞아서 반갑고. 어쩌라고, 어쩌려고.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이것저것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려와서 발이 꼬이는 바람에 살짝 휘청거리기도 했다. 찾을 땐 없더니, 왜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곳에 숨어선 날 반기고, 이제와서야 폐를 꽉 죄어오고.

 

속으로 네 이름을 죽어라 불렀다가, 밖으로도 널 불렀다가, 방바닥에 어지럽혀 놓은 책들과 그 사이 간간이 삐죽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진들이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다시 숨을 삼킨다. 이제와서 이럴 자격이 없단 걸 알았고,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그 끝에서는 몰랐다. 이해하지 못했던 이별뮤비 속 울부짖는 사람들을 따라 엉엉 소리내면서 울어 본다. 귀걸이 한 쪽을 잃어버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거다. 난 이미 반이나 없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수도 있었다. 남은 한 쪽의 귀걸이도 잃어버릴까 겁이 나서 손에 넣고 꽉 쥐었다. 이것만큼은 안 된다. 나는 그러면 안 됐고, 너는.

 

이 와중에도 널 탓하려고 하길래 귀걸이를 더 꽉 쥐었다. 고개를 돌려 반대로 누웠는데, 이미 축축해질대로 축축해진 베개의 감촉에 괜히 더 눈물이 나오는 중인게 웃겼다.

 

어디 외칠 곳도 하나 없고, 그럴 수도 없어서 서로만 알던 사랑이다. 네게 받은 귀걸이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겐 혹시 들킬까봐 네가 줬다고도 못하고 생일선물로 받았다고만 그랬었다. 누구한테 받았냐고 물어와서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니 여자친구라도 생겼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무슨 얘기 중이에요? 차은우, 문빈 여친 생겼나봐. 귀걸이 선물 누구한테 받았냐는데 대답을 못해.

그 날 너무 속상하고 미안해서 엉엉 울었다. 너도 못지 않게 미안해했다. 좋아해서 미안하단 말도 했던 거 같다. 그런 말을 내뱉는 네가 싫어서 입술이나 부비고 말았던 걸로 기억한다.

 

일상 사이사이에 네가 박혀 있어 문득 떠올리는 거라 믿었던 건 다 착각이었다. 그냥 네가 내 일상이었고, 기념일이었고, 다 그랬는데. 그러니까, 그냥 잃은 후에야 안다는 그런 것들.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안녕, 여기 앉아도 돼? 어? 어, 그래. 다행이다. 아는 애들 하나도 없을까봐 걱정이었는데. 첫 인사를 나눴던 고1 무렵을 생각한다. 눈 한번 깜빡거릴 때마다 순간 순간이 지나치고,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다 지나치게 소중해서 몸을 웅크렸다. 펼치면 이 기억이 하나씩 빠져나갈 것만 같았다. 귀걸이는 양 손으로 쥐고 있었다. 숨 가빠왔던 순간들이 보고싶다며 울어댈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선 숨이 너무 가빠와서 울고 있었다. 채 터지지 못하는 숨결이 목구멍 근처에서 간질거리며 안쪽을 긁어대었다. 목이 칼칼했다. 목감기가 찾아온단 뜻이었다.

 

가을 바람 시원하다 착각하게 만들었던 열기가 깨닫고 보니깐 그냥 감기 기운이었던 거다. 헤어진 날부터 그냥 주욱 나는 아팠던 거고, 다만 그걸 알지 못해서 그냥 불어오는 바람 다 맞아보며 괜찮다 중얼거리다보니 착각했던 거다.

춥다. 이불을 끌어와 몸을 숨겼다. 여름 홑이불이라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꺼내지 못한 가을옷. 다시 집어 넣지 못한 여름옷. 얇은 이불. 저 안에 들어있는 좀 널찍한 담요. 하지만 여기에서 팔을 뻗는다고 꺼낼 수 있는게 아닌데, 여기에서 죽어라 외친다고 들을 수 있는게 아닌데, 네가.

 

가라앉아 모르고 있던 것들이 사진 한 장만으로 휘저어져 금새 시끄러이 물들여 가는 걸 바라본다. 고요한 끝, 남은 시끄러움. 그냥 그런 것들. 목구멍을 간지럽히며 나올락말락하는 울음을 내보냈다.

 

괜찮아질거야.

괜찮아질까?

 

*

 

갑자기 또 춥다. 딱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다 싶었다. 낮엔 덥고, 밤엔 싸늘하고. 어디 정신 빼놓고 다니다가 감기에 걸렸다. 요령 하나 없으면서 요령껏 이별을 받아들인다고 설쳐보더니 병이 났나 보다.

 

기침이 잦아서 마스크를 샀다. 머리가 살짝 뜨끈해져 오는게, 열도 좀 있는 거 같은데. 원래도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어서 그런지 더 추운 기분. 바람막이 입고 나올 걸. 바람이 이렇게 많이 부는 줄 몰랐지. 고갤 수그리고 가디건 속에 좀 더 파고 들었다.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알았는데, 수업이 하나 있었다. 잔기침을 뱉으며 도달한 편의점에선 꿀차 하나를 산다. 그 와중에 작년 이맘때 세게 불어닥친 환절기 감기에 걸려 넘어졌던 게 떠올랐다. 그 때 붙잡아 줬던 온기를 생각하며 꿀차 하나를 사 손에 꼭 쥐었는데, 생각보다 미끌거리고 부피감만 지나치게 크길래 그냥 가방에 집어넣었다.

 

"어, 은우형."


안녕하세요. 산하가 인사를 건네왔다. 손 흔들어주니 다가와선 의외라는 듯 물어온다.

 

"뭐에요. 형도 감기?"

 

"어...왜?"

 

"아니, 빈이 형도 감기라고 해서요."

 

하긴 그럴 때가 맞았다. 꼬박꼬박 철마다 감기 한 번 앓지 않으면 영 아쉽다는 너였으니까. 애써 그래, 하고 아무렇지 않은듯 내뱉어봤다. 마스크를 써서 다행이다.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문빈......문빈 학생."

 

감기가 심하게 왔나보다, 또. 올라오려는 걱정을 꾹꾹 눌려댔다.

 

이제와서 뭘 더 어떻게 하려는 마음은 없다. 그건 그 날 내 입으로 헤어질까, 뱉은 이후로 할 수도 없는 얘기였다. 되게 슬플 줄 알았는데, 착실히 준비를 해나가는 것 같은 널 보다보니 익숙해졌나보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내뱉고 말았다. 내 눈치를 보며 쩔쩔 매는 널 더 보고있기가 그랬다.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는 법이다.

 

지친 건가....그건 또 아닌데. 노력하라면 더 노력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먼저 이별을 말한 건 내 노력이 널 더 궁지로 몰아가는 것만 같아서 보고 있기가 좀 그랬던 거다. 아직 널 사랑하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있는데, 네가 날 다시 사랑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엔 확신이 없었다.

 

솔직히 네가 미웠다. 근데 또 속으로라도 네게 돌을 던질 자신은 없었다. 그러기엔 너는 날 너무 좋아해줬으니까. 시선을 느낀 건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서였고, 시선이 얽힌 건 제작년부터다. 나만 죽어라 봐오는 네게 호기심이 생겼던 게 시작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샌가 나도 널 좇고 있어서.

마음을 알고 나서부터는 너와 있을 때 일부러 더 오버해서 네게 붙어댔다. 너는 당황해서 도망쳤고, 나는 그럼 또 가만히 기다리고. 내 눈치를 보며 원래 거리로 돌아오면, 다시 한 걸음 걸어보고.

그걸 반복하다 어느새 코 맞닿는 거리가 되었을 때 입을 맞췄는데, 그 이후로는 보이지도 않는 거리로 줄행랑을 쳐서 좀 답답하기도 했었고. 너는, 어, 막, 그, 뽀, 뽀뽀같은 거, 그렇게, 아무한테나...해? 술을 마신건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내 앞에 와선 그렇게 물어오던 날을 떠올린다. 아니, 너랑만 했는데.

 

"진짜? 거짓말."

 

"...됐어. 거짓말 아니래도 안 믿을 거잖아."

 

좀 심통이 나서 그렇게 내뱉었는데, 헤헤 웃으면서 삐졌대요, 삐졌대요. 차은우 삐졌대요. 노래 불러오는 네게 어깨를 붙잡혔었다. 그게 두번째. 술이 깨고 나선 기억이 났는지 더 필사적으로 날 피하길래, 이번엔 안 기다리고 뛰어봤고, 그 끝에서야 넌 순순히 잡혀줬다. 왜 우냐니깐 너무 좋아서, 하고 더 울어버리길래 쩔쩔 매면서 늦어서 미안하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그런 얘기도 했었는데.

 

순탄했다. 지나칠 정도로.

싸움 한 번 없이 2년을 보냈고, 차은우를 너무 좋아하는 문빈과 문빈을 좋아하는 차은우가 만나서 잘 글러가고 있었던 연애다. 언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사람의 뇌엔, 특정 상대에 대한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호르몬이, 3년을 기한으로 훅 줄어든다는 거. 아직 2년인데. 남은 1년은 어디로 간 거냐고 속으로 따져보기도 했다. 그럼 내 속의 문빈은 늘 같은 말을 해온다.

너무 오래해서. 그래서 지쳤나봐.

 

내가 시선을 느끼기 시작한 것부터 세어보면 넌 장장 5년째였다. 그것도 반 이상이 짝사랑인 걸로. 네 시선을 알아서 굳이 여지 주는 듯이 다정하게 굴지 않았던 3년이었는데도 너는 그냥 인간 차은우가 너무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나 보다. 나한테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갈수록 널 이해하려고만 했다. 차라리 속으로 네게 욕을 내뱉는게 나 편한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영 그럴 수가 없어서 또 널 생각하는 중이다.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오질 않았다. 맨 뒤에 앉아서 늦게라도 들어오는 사람이 있을까봐 몇 번이고 출입문을 기웃거렸는데, 열릴 때마다 너는 없었다. 감기기운에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생각이 나서 가방 속을 뒤적여보니 꿀차는 벌써 다 식어있었다.


"어, 진우형. 웬일이에요."

 

"아니, 빈이한테 줄 거 있어서...안 왔나보네?"

 

"아픈가봐요. 전화도 해봤는데 안 받고."

 

"그래? 많이 아픈가..."

 

허투루 듣자. 허투루 듣고 넘기자...제발. 나도 아프다. 감기 기운이 온몸을 정복해서 머리를 꽝꽝 때리고, 숨도 뜨겁다. 한기 때문에 소름도 돋았다. 신경쓰지 말고 넘기자. 집에 가서 일찍 자기나 하자. 약도 먹고.

 

"또 안 받네...어, 은우야."

 

허투루 넘기자고. 제발, 차은우.

 

"제가 갔다올까요?"

 

이놈의 입이 또.

 

-

 

같은 동네라서요. 뭐 전해줄 거 있어요? 아뇨, 형. 안 멀어요. 진짜 가까워요. 저 그래서 빈이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잖아요.

 

말이 지나쳤다. 감기 때문이다, 이게 다. 미친 차은우. 어쩔건데, 어쩌려고. 어떡할 거냐고. 그렇게 급한 건 아니라서, 하고 말꼬리를 늘이는 진우 형에게 급히 일찍 갖다주면 좋은 거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그 결과, 지금 차은우 손에는 문빈이 동방에 놓고 간 USB가 있다 이 말이다. 쟁취했다. 혹시 과제물 출력한다고 동방 컴퓨터에 꽂아놓고 간 건가 싶기도 하다면서 하긴 그게 나을 수도 있겠다, 하는 진우 형 덕에 얻어낸 USB였다. 헤어진지 얼마됐다고 전애인 집에 찾아가는건가 싶긴 한데, 어차피 명분도 있었고, 이렇게라도 그냥 좀 보고 싶었나 보다. 그 날 이후의 너는 두 번째 입맞춤 이후보다도 더 멀리 뛰어가버린 느낌이었으니까. 있다 없으니까 영 허전해서 안되겠다. 그냥 안된다. 아니...근데, 진짜 갈 거야? 어쩔거야. USB 줘야될 거 아냐. 아니, 근데 진짜로? 아 그럼 어떡할건데. 안에 빈이 당장 내일 내야하는 과제 들어있으면 어떡하려고. 애 감긴데 다시 찾으러 학교까지 오게 할 거야?

 

"아니 형...근데 형도 장난 아니게 아파보이는데요."

 

"집 가는 길에 있는 빌라라서 괜찮아."

 

개뻥이다. 문빈 자취방은 사거리 건너서 저 반대쪽 골목에 있다. 경사도 엄청 져서 숨 헥헥 대며 올라가야 한다. 마스크 안에서 더운 숨을 훅훅 뱉어내면서 손을 내밀었다.


지나가는 길에 죽집이 열었길래 잠깐 머뭇거렸다. 오반가? 오바야? 죽까지 사주는 건 좀 오반가? 어떻게 생각해. 아 몰라, 일단 사. 사고 생각하자. 나중에 얼굴 보고 못 줄거 같으면 그냥 내가 먹자. 네가 맛있다고 했었던 소고기죽을 샀다. 매실도 한 통. 장조림도 추가로 하나 넣어달라고 했다. 살짝 몽롱한게, 발걸음은 또 가볍다. 문제의 그 언덕으로 올라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감기약을 샀다. 목감기부터 해열제까지, 이것저것. 이온음료도 하나 챙기고. 못 주면 그냥 내가 먹자. 갑자기 찾아온 감기 몸살에 재수도 없다 생각했는데 그 덕에 핑계가 생겼네. 진짜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힘차게 언덕을 올랐다. 감기 기운에 평소보다 더 쌕쌕거리며 숨이 터져나왔는데, 마스크에 부딪쳐선 입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생각보다 머네. 둘이 같이 오를 땐 몰랐는데.

잃어버릴까 싶어 니트 주머니에 넣고 꼭 쥐고온 USB를 다시 한 번 매만졌다. 이건 다 감기 탓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괜찮다. 열기운에 정신 없었다고 하자.

 

어느새 다다른 문빈 집 앞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냥 초인종 누르기엔 좀 그랬다. 핸드폰이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

 

"...어쩌지."

 

일단 초인종을 누르고 본다. 어쩌지 되뇌면서도 충동적으로 굴게 되는게, 확실히 아프긴 아픈가보다. 그래도 갑자기 가까이서 내 얼굴을 봤다간 놀랠까 싶어서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죽을 줘야하나. 약은, 어쩌지. 일단 얼굴 보이고 영 안되겠다 싶으면 USB만 주자.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답이 없다. 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눌러본다. 제대로 누른 게 아닌가 싶어서 이번엔 좀 더 꾸욱, 힘을 실어서. 안에서 약하게 띵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

 

*

 

머리가 지끈거려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다가 겨우 잠에 들었는데, 밖에서 자꾸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시야가 핑 돌길래 휘청거리다 책상을 붙잡았다. 집안 꼴이 말도 아니다. 책은 뒤집혀져 있고, 옷장은 정리하다가 포기한 채로 엉켜있고. 감기 나으면 청소부터 해야겠다. 택배 시킨 거 없는데...영 으슬으슬해서 담요를 뒤집어 쓰고 나갔다.

 

"누구......"

 

"아, 어, 그게."

 

내가 열기운에 잘못 본 건가 싶어서 다시 들여다봤는데, 너였다. 안녕, 하고 말해오는 거엔 당황스러워서라도 대답을 못해줬다.

 

"그 진우 형이, 너 동방에 USB 놔두고 간 거 같다길래, 그, 갖다주라고."

 

"......미안. 번거롭게 해서."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입을 달싹거리면서 아래를 쳐다보다 그런 말을 한다.

 

"미안....사실은, 걱정돼서."

 

"......"

 

"알아, 아는데.... 감기 걸렸다길래...콜록."

 

마스크를 황급히 다시 올려 쓰곤 살짝 웃어보이는데, 그냥 어딘가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용량 초과다. 결국 말이 또 튀어나왔다.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내가...너는, 진짜 그 날부터..."


또 원망하고 있었다. 날 미워하면 미워했지 걱정된다며 찾아온 이 사랑에 나는 또 그런 말이나 내뱉고 있었다. 애꿎은 화풀이라는 걸 알아서 말이 더 이상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코를 훌쩍하고, 그냥 가만히 서 있다. 네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양 손을 내려다보니 뭐가 한가득이다. 죽집 로고가 박힌 종이 봉투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너도 그 시선을 느낀건지 그걸 살짝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날 보고 또 살짝 웃어보이면서.

귀걸이를 잃어버린 게 기억이 났다. 미안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토록 속으로 외쳐댔던 네 이름이 입에서는 그리 쉽게 튀어나오지를 못한다. 대신 핑 돈 눈물이 이때다 싶어 자리를 박차곤 시야를 그득히 채워온다. 아, 이거 떨어지면 안 되는데. 급히 고개를 숙였다.

 

"부담스러웠으면 미안. 아직은, 신경이 쓰여서."

 

말 사이사이에 네 기침소리가 옅게 깔린다. 목이 좀 잠긴 건지 조금은 투박한 소리다. 또 그게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고, 또 날 아직 신경써준단 얘기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귀걸이를 잃어버려서 그렇게 또.

 

"나, 귀걸이."

 

"응?"

 

"귀걸이......잃어버렸어."

 

그렇게 쉽게 잃어버릴게 아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손에서 빠져나가 있었다. 이렇게 잃어버리면 또 쉽게 되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근데 그게 맞는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다 편해질줄 알았다, 나는. 지갑 안에서 결국은 빼놓지 못한 네 사진만큼이나 저 구석에 밀려 웅크려 앉아있던 사랑을 본다. 이제 와서 날 왜 이리 구석에 처박아 두었냐고 화풀이하는 이 열병을 본다. 눈시울만큼이나 머리가 뜨끈해져왔다.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너 원망해서도 미안하고, 이제와서 널 사랑하고 있단 걸 깨달아서 미안하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말이 안 나온다. 대신 울음이 나올 거 같아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프게 쥔 주먹 안, 아직도 품고 있는 귀걸이 한 짝이 아프게 살을 파고들었다. 내가 선택한 아픔이라는 걸 알았다. 그 와중에 네게 할 그 많은 말들을 다 건너 뛰고 저 말부터 나오는 게 어이가 없었다. 내 걱정에 왔다고 붙여주는 말이 고마웠고, 내가 사랑하는 차은우의 단편이 아니라, 차은우라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단편들을 또 하나 쌓아올리게 해줘서 사랑스럽고, 애틋하고. 복잡하다.

손바닥을 찔러대는 귀걸이 끝이 아프다. 깊게 들어가 피를 내진 않지만, 진한 자국을 남겨 한동안 사라지질 않을 정도로 잡아봤다. 네가 가고 나면 그 자국을 보면서 이 순간을 다시 곱씹어보려고 그랬을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터뜨리는 게 열병 끝의 헛소리인지 뭔지.

 

"한쪽은, 한쪽은 찾았는데......한쪽만. 미안."

 

"뭐가 미안해."

 

"그게, 이건...네 거잖아. 네가 준...그러니까, 미안. 나는...나는."


"빈아."

무슨 말이야, 그게.

귓가까지 심장소리가 벅차오른다는 게 무슨 소리가 했었다. 그 날 깨달았다. 평소보다 영 제대로 말을 내뱉질 못하는 널 향해 재촉할대로 재촉했던 기억도 있다. 응? 은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온 신경 끝자락 하나하나에 심장이 달려있는 것만 같았던, 딱 그 날. 까딱하면 터질 거 같은 웅성거림, 소란스러움. 그리고 그 사이 적막. 속으로 카운트를 셌었다. 다만 지금은 그냥 적막이다. 카운트 셀 것도 없이 흘러나온 울먹거림이 그 적막을 깨트린다. 손바닥을 펴 네게 보였다.

 

"......귀걸이 끼워주면 안될까, 다시."

 

빙빙 돌려 말한 사랑이 네게 제대로 전해졌는지 확인도 안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속으로 카운트를 센다. 하나, 둘, 둘 반, 둘 반하고 반의 반, 또 반의 반의 반. 그러고 또 반의 반의 반의,

 

"빈아."

 

"......"

 

"문빈, 나 봐."

 

겨우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시야는 흐려질대로 흐려져서 네가 보이질 않았다. 널 보고 싶어서 눈을 깜빡인다. 편 손바닥을 다시 접어주는 네 온기에 온 몸에 힘이 다 빠졌다. 너무 늦었구나, 내가. 웃어보이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맘처럼 되질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성큼 다가온 네게 얼굴이 붙잡혔다. 갑자기 볼을 쭉 늘어당긴다.

 

"맨날 잃어버리지, 하여튼."

 

아프지. 어......아니. 아프잖아. 조금.

뺨이 살짝 얼얼해져 올때까지 쭉 잡아당기며 너는 말을 이었다. 제대로 찾아본 거 맞아? 응? 너 원래 네가 잃어버린 거 잘 못 찾잖아.

 

"들어가자."

 

찾아보자, 나랑. 안 되면 하나 더 사지, 뭐. 그게 뭐 대수라고.

네 손길이 닿았다 떨어진 뺨을 문질렀다. 현실감이 없었다. 진짜? 정말로?

 

"으, 추워. 복도 왜이렇게 추워. 들어가, 들어가. 나도 감기야."

 

"그래도 돼?"

 

"그럼 어떡해."

 

잃어버렸으면 찾아야지. 찾다보면 나올 거고. 죽 식었겠다. 너 좋아하는 소고기죽. 아, 그리고 이건 감기약, 이온음료도 있고.

그제서야 뒤로 감춰오던 봉지를 쭉 내민다.

 

"안 들여보내줄거야?"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무슨 사랑 싸움 한 번 그리 요란하게 하냐고 물어오는 옆집 누나의 말에 그냥 한 번 씩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 날 도어락 뒤에서 널 웃게 한 한 마디가 제대로 외쳐졌나 싶어서.

 

"들렸어요?"

 

 

 

-

 

고함. 크게 외치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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