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있는 곳

2019 가을호
작성자
사해
작성일
2020-11-12 16:46
조회
4

"야 문빈, 우리 진짜 간다?"

 

벌써 도대체 몇 번째인지, 고작 빈의 너희끼리 놀라고-라는 말 하나를 못 알아들어서 이 사단이다. 때가 아닌 눈치 게임 끝에 드디어 친구들을 밖으로 쫓아낸 빈은 이미 사람이 앉아있는 자리 옆의 의자를 한 손으로 질질 빼 앉았다. 낡은 의자가 미끄러운 바닥에 지지직-끌리는 소리 덕분에 옆 사람의 시선은 금방 빈에게 향했다.

"어서와, 빈아."

 

 

 

 

 

 

 

 

"빈아, 너 농구 좋아하지않아?"

시선이 닿고 잠깐의 침묵 뒤에 은우가 말을 걸어왔다.

"아잇, 안 좋아해. 그냥 분위기상 몇번 같이 했던거지. 나 농구 잘하지도 못해."

아까 떠난 친구들의 손에 얹어져 있던 농구공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은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와 급한 마음에 말이 술술 나왔다. 뭐, 틀린말은 아니긴 한데 뒤에 올 말을 좀 생략하기는 했다. 점심을 안 먹겠다라는 폭탄선언으로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놓았으면서 어떻게 두고 가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급히 말을 끊고 마무리했다. 말하기에는 내용이 내가 생각해도 너무 우스웠다. 다른 애들도 축구경기가 있다거나 배가 안고프다며 밥을 거르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홀랑 버리고 급식실로 튀어 나갔던 장본인인데. 이상하게 은우랑만 있으면 예외가 생겼다. 처음 사귀어보는 타입의 친구라서 그런가 싶기도 한게 은우는 가끔가다 나 왜 얘랑 다니고 있지?라는 생각이 종종 들 정도로 나와 생활방식이 달랐다. 무리에서 남들 다 놀 때도 혼자 꼬박꼬박 공부하는 모습이며, 온갖 좋은 수식어란 수식어를 다 갖다 붙여도 찰떡같이 어울리는 외모 탓에 일주일에 한 번꼴로 고백도 받아오는 것까지 옆에서 보고있으면 학교생활이 여간 힘들어보이는게 아니었다. 근데 그렇다고해서 또 나와 엄청나게 안맞는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은우랑은 생각외로 관심사도 비슷했고 조용해 보이지만 나와 말할 때만큼은 교실의 누구보다도 크게 웃는 사람도 역시 은우였다.

 

 어찌 되었든 지금 은우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학원 숙제 때문에 남아있는 거니까, 다른 애들이랑 다르게 너무 불쌍하니까, 같이 남아주는 거다. 나랑 제일 친하기도 하고. 이 정도면 완전히 예외적인 상황 아닌가? 사실은 아무도, 하물며 은우도 왜 여기있느냐고 물어본 적도 없는데 괜히 나만 대답을 열심히 생각하다 보니 좀 회의감이 들어 다시 열심히 손을 놀리는 은우쪽으로 힐끔 눈을 돌렸다.

"이거 다 해가야 하는 거야?"

은우가 곱게 펴둔 책의 두께가 예사롭지 않아 나도 모르게 힉-소리를 내며 물었지만 정작 은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저번 달에 너무 많이 빠져서 벌이라고 내주셨어."

"천하의 차은우가 학원을 빠졌었어?"

순간 줄곧 책에 향해있던 은우의 눈이 나와 마주쳤다. 잠깐 머뭇거리던 은우는 약간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거 다 네가 시험 끝났다며 놀러 가자고 한 거잖아, 빈아."

"아...그랬나? 미안.."

저번 달에 유독 은우를 끌고 여기저기 쏘다닌 기억이 뒤늦게 났다. 손을 슬그머니 목에 댄 채로 은우의 표정을 살폈다. 화났나 싶었는데 얼굴을 구기긴 커녕 은근한 미소를 띤 은우는 볼펜을 들지 않은 손으로 나의 어깨를 두어 번 쓰담어주었다.평소랑 비슷한 손길이지만 오스스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은우의 손을 겹쳐 잡았다.

"빈아, 너무 춥게 입고다니는거 아니야?"

무심하게 부는 바람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차가워진 지도 한참 되었다는 것은 나도 인지하고 있으나, 추위를 많이 타는 반아이들의 손에 의해 솟구치는 우리반의 실내온도는 나에게는 항상 더웠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는 일부러 와이셔츠위에 조끼와 마이 대신 얇은 맨투맨만 걸치게 된 건데, 히터 온도가 평소보다 낮은데다가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은 생각보다 서늘했다.

"음, 좀 춥기는 하다."

"내 옷 입을래?"

"어? 너 추위 많이 타잖아. 그냥 입고 있어, 참을만해!"

몸이 으슬으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한겨울이면 핫팩을 주머니에 꼭 두 개씩 넣고 퉁퉁한 패딩을 절대로 벗지 않았던 은우의 모습이 떠올라 고개를 저으며 두 팔을 단단히 겹쳐 책상에 얹었다. 아, 차가- 얇은 소매 사이를 뚫는 찬기에 잠깐 움찔한 것을 본 은우의 미간이 슬쩍 좁아지더니 곧바로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나의 어깨에 단단히 걸쳐 주었다.

"아냐, 난 마이만으로도 충분해. 괜히 또 감기 걸리지 말고 입어. 아님 걸치기라도 해. 보는 내가 다 춥다."

"으응, 고마워"

괜찮다는데 더 거절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얌전히 덮임을 당하며 스르르 상체를 책상에 붙였다. 그거 하나 덮었다고 이렇게나 따뜻할 일인가, 기분 좋은 따스함에 조금 노곤해져 고개를 조금씩 움직이며 편한 자세를 찾았다.

"빈아, 너 지금 완전 아기 여우 같아."

"아, 차으누 빨리 숙제나 해."

쟤는 저런 말도 안되는 비유들을 가끔 하곤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때쯤에는 '차은우 피셜 문빈이 닮은 동물들' 데리고 동물원 하나 차릴 수 있을 정도. 물론 그만큼 나에게 집중해주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지만, 자꾸만 길어지는 눈 맞춤과 말들이 어쩐지 낯간지러워져 괜히 아까와 같은 페이지인 은우의 교재를 손으로 툭툭 쳐댔다. 은우는 한번 피식 웃더니 펜을 다잡고 집중하는 듯해서 손은 얼마 안가 다시 거두었다.

 

 조금 지나자 교실은 고요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집에 있을 때는 적막함의 무게에 몸을 눌리다 음악을 귀에 욱여넣는 게 일상이었기에 흔치 않은 가볍고도 잔잔한 공기가 사뭇 반가웠다. 이제는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얼굴을 책상 가까이에 붙이고 은우를 구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자 백색소음 정도로만 들렸던 은우의 펜 소리가 판판한 책상을 타고 제법 커다랗게 들려왔다. 사각사각-얇은 펜심이 종이에 미끄러졌다, 멈추고 직-끌렸다가도 또 멈추는 소리가 언뜻 규칙적이게 들리며 운행 중인 차 안에 있는 것처럼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어느새 나는 숨까지 죽이고 소리에 집중한채 조용히 눈만 움직여 부지런히 움직이는 은우의 펜 끝을 쫓았다. 허공에서 휘적휘적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음악회에 초청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금방 줄어들 리가 없는 걸 잘 알면서도 푸른 끼가 돌다 못해 기름과 맞닿은 경계가 하늘색으로 흐려진 잉크에 눈이 가는 건 막을 수가 없었다. 저 펜은 몇 번째일까. 검은색과 파란색 사이, 대충 감색쯤 되는 색을 쉴새없이 내뿜는 저 펜은 은우가 즐겨 쓰는 펜이었다. 나한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법이다. 작년 이맘때쯤, 단지 학년 뒤에 붙는 반만 같을 뿐 접점이 좀처럼 없던 은우와 나 사이에 촉매가 되어준 것도 저 펜이었다. 지금보다 책상 간의 간격이 넓어 볼펜 하나쯤은 빠지고도 남을 그런 시기에 말이다. 

 

아침 자습시간이라 약간의 웅성거림만 존재하던 교실 속 은우의 손에서 떨어진 펜은 데구르르-탁 따위의 소리를 요란하게 내었기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충분했었다. 떨어트린 게 아니라 일부러 던진 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힘차게 떨구어진 펜은 굴러 굴러 내 발밑에 채였고, 같은 반 친구로서 마땅히 주워준것뿐인데도 은우는 지금 생각하면 좀 과할 정도로 고마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노는 무리가 달라 수업시간 외에는 말 몇 번 해보지도 않아서 어색해할 만도 했는데 은우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볼펜을 받아들었다. 그때 은우는 고마워, 빈아-하며 내 이름을 불러주었는데 그게 또 기분이 그렇게 좋았고, 보답이라며 사주는 초콜릿 음료는 유독 더 달아서 받는 족족 분리수거가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버렸고, 그러다 나중에는 아예 나란히 손잡고 매점을 다녔다는 이야기다. 

 

 

"무슨 생각해?"

"어?"

나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었는지 은우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조용한 와중에 음성이 퍼지자 나도 모르게 팔을 몸 안쪽으로 움추렸다.

"별로..아무생각 안했어. 근데 너는 책보는데도 내 표정이 보여?"

"..응"

짧은 대답과는 다르게 꽤나 길게 이어지는 은우의 눈을 피해 은우가 써놓은 글씨로 급히 시선을 옮겼다. 아, 또다. 얘는 왜 이렇게 사람 눈을 오래 쳐다봐서 이상한 기분을 들게하는지 모르겠다.

"와..아, 야 너는 어떻게 글씨도 잘 쓰냐? 부럽다.. 근데 너 바쁘다면서 이렇게 또박또박 쓸 시간이 있었어?"

엎드려있을때도 얼핏 보았지만 등을 조금 세워서 보니 더욱더 반듯하게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악필이 넘쳐나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글씨 좀 쓴다는 애가 은우였다. 평소에 흘려쓸때도 잘 썼던거 같은데 오늘따라 글자 하나하나의 획들이 더 깔끔했다.

"ㅋㅋ시비거는거야?"

"아니이! 시비가 아니라아...왜그래애...너 평소에 수업 필기할때는 날려쓰잖아.. 가뜩이나 바쁘다며.."

"아...근데 너..큽"

"야, 왜 웃어? 웃지마. 아 웃지말라고오!"

짜증 내는 줄 알고 잔뜩 쫄았건만, 웃길만한 대화가 전혀 아닌데 저 혼자 웃는 은우도 어이가 없지만 걔를 따라 같이 웃는 내 자신이 더 어이가 없었다. 웃고 있는 은우 얼굴을 보니 그냥 웃겼다, 이유도 없이. 은우도 마찬가지였는지 고개를 잠깐 들었다가 다시 킥킥대며 수그리고를 반복했다. 굴러가는 낙엽 하나에도 웃을 나이라서 그런가 계절이 계절인 만큼 낙엽은 넘쳐나서 교실을 가득 채웠다.

"아, 배아파. 그만, 그만."

"니가 먼저 웃었잖아. 아니 진짜 왜 웃었는데?"

"너 말투랑 표정이..웃겨서"

"내가?"

은우는 또 대답을 훌쩍 생략하고는 웃었다. 이번에는 소리 없이, 입꼬리로만. 살짝 빈정이 상하려던 찰나 은우가 뻣뻣한 마이 소매를 약간 걷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방금 전 웃음의 여파로 내 어깨에서 조금 밀려나있는 잠바를 다시 올려주었다.

"너 낮잠시간이다."

"아, 어감이 별로야."

"왜? 맞잖아."

또 슬며시 웃는 게 왜 이렇게 얄미운지. 은우 말대로 일주일에 두어번 점심시간이 30분 남을때쯤 교실에서 엎드려 잠을 청하는 게 내 습관이라면 습관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쯤부터 밥 먹고 점심시간부터 내리 자다가 깨보면 한두 교시는 훌쩍 지나있는 게 퍽 마음에 들어서 그랬던 것 같다. 선생님들도 내가 수업 시간에 옆 친구까지 끌어들여 떠드느니 엎어져서 잠이나 자는 걸 훨씬 좋아하실 것 같고. 물론 그것도 다 옛말이다. 은우랑 친구가 된 후로는 얘는 내가 부족한 수면 보충쯤으로 잠깐 자는 줄 아는지 점심시간 예비 종이 울리면 꼬박꼬박 깨워주는 바람에 이어서 잘 수가 없었다. 진짜 못 일어나는 편이라 깨우기 쉽지도 않을 텐데 왜 깨웠냐고 화내기가 좀 그랬다. 눈뜨자마자 보는게 은우 얼굴인게 나쁘지않기도 했고. 그러다보니 습관으로 굳은거다.

"오늘은 안자?"

분명 그닥 졸리지 않았었는데 은우의 말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몸이 차분해지고 졸음이 조금씩 몰려왔다. 진짜 웃기는게, 가끔보면 내 몸이 주인인 나보다도 은우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오는 잠을 돌아가라고 할 마음도, 이유도 없었기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팔에 묻으니 은우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는게 느껴졌다. 

"그럴줄 알았어. 잘자."

약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은우의 펜뚜껑이 딸각-하고 열리는 소리를 듣고 몽롱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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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나는 마시멜로야~'

오늘 급식에는 분명 마시멜로의 'ㅁ'도 없었는데 은색 식판에 올라가있는 마시멜로는 나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아, 이거 꿈이구나. 꿔도 뭐 이런꿈을 다 꾼담.

'여기봐 빈아!'

마시멜로 주제에 내 관심도 끌려고하는게 웃기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몸을 던져 나에게로 날라왔다.

"쪽"

심지어 부딪히기까지. 마시멜로와 얼떨결에 입맞춤을 한 나는 평소 식감 그대로인 꿈속의 마시멜로를 한입 콱 깨어물며 생각했다.

"아..!"

요즘 마시멜로는 목소리도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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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빈아. 문빈!"

갑자기 밝아진 교실에 눈을 찡그리며 깨어보니 아까 농구하러 갔던 친구들이 돌아와있었다. 내 어깨를 흔들어대던 손을 터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가 요상한 꿈을 꾸는동안 계속해서 날 깨운듯 했다.

"은우는?"

"걔 화장실 갔어. 너도 참 징하다."

"뭐가?"

"지금 학교 끝났어."

"어???"

커져버린 내 동공을 뒤로하고 서둘러 주위을 둘러보니 빈 교탁과 반쯤은 앉고 나머지는 서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점심시간의 느릿한 시간은 짧은 꿈마냥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귀를 찌르는 듯이 탁하게 섞인 목소리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늘 시간표가 분명 5교시부터 수학, 윤사, 영어... 이 시간을 다 잠으로 넘겼다고? 특히 윤사쌤은 애들 자는꼴을 절대 못보는데?

"아 오늘 대박이였지, 윤사가 너 깨우는거 포기했잖아. 어제 뭐 했냐?"

"ㅋㅋㅋㅋ맞아 진짜 빡쳐보이더라."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 교무실로 안불린게 다행인거 같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흐트러진 머리를 손으로 대충 정리하면서 핸드폰 전원을 눌러보니 담임쌤이 종례를 하러 오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덕분에 나를 둘러싸고 각자 핸드폰을 하나씩 쥔채 게임을 하고있는 친구녀석들은 지금 자신들 손에 얹어져있는게 뭔지 까먹은것마냥 -끝나고 피씨방?-따위를 외쳐댔다.

"야야, 차은우 왔다."

"어, 빈이 일어났네?"

뒷문이 열리며 나타난 은우는 조용히 비어진 내 옆자리에 앉아서 어깨를 내쪽으로 살짝 내었다. 무슨 뜻인지 금방 알아챈 내가 머리를 조심히 어깨에 올리자 은우가 반대편 손으로 아까 그 책을 또다시 책상위로 꺼냈다. 하지만 형식상 꺼내놓은건지 필통에는 손도 대지않았다. 

"문빈, 오늘 피씨방 갈거지?"

"아, 나 그냥.."

"빈이 나랑 학원 가기 전에 같이 밥먹기로 해서, 미안."

은우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꺽어 내 머리칼과 닿자 은우가 자주 쓰는 가벼운 탈취제 향이 조금 간지럽게 코를 스쳤다. 말하는 속도가 거의 내 말을 빼앗아간거나 다름없었다. 말을 꺼낸 친구가 고개를 위로 살짝 올리며 나를 보는게 나에게 사실여부를 묻는 듯 해서 작게 끄덕여주었다.

"은우 너 오늘 학원 숙제때문에 바쁘다며?"

"아, 그거? 걱정안해줘도 돼ㅎㅎ 다했어, 다했어"

그게 어디 하루에 할 수 있는 양이기는 했던가. 친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래 우리끼리 가지,뭐-라며 은우의 어깨에 손을 한번 얹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타이밍 좋게 교탁에 출석부를 내려놓은 담임쌤 덕택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한데서 단호한 은우의 말투때문에 분위기가 꺼림칙해져 안그래도 수습하기 애매했는데 다행이다싶어 남몰래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내일이 되면 은우도 저 녀석도 또 금방 까먹을 거다. 그나저나 은우랑은 몇주전에 새로 생긴 떡볶이집을 가기로 했던거 같은데. 또 눈물 질질 흘리면서 헤롱거리는건 아닐까, 안매운 메뉴들 위주로 시켜주면 괜찮으려나라는 생각을 하자 기분이 괜히 들떴다.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김밥 두 줄이랑..."

종례가 끝나자마자 달려와서인지 아니면 오픈한지 꽤 지나서 그런건지 은우가 주문하는 동안 둘러본 넓직한 내부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덕분에 약간 구석의 4인 테이블에 눈치보지않고 앉을 수 있었던 우리는 주문도 테이블 크기에 맞는 양을 했다. 시간이 꽤나 걸릴거라는 종업원의 말을 듣고 은우의 손은 자연스럽게 가방을 뒤적였다. 또 책을 꺼내려나 보다 싶었는데 가방을 빠져나온 은우의 손에는 검정색 가죽지갑만 들려있었고 가방 지퍼를 채우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학원 몇시야?"

"8시, 왜? 같이 가주게?"

"뭐래, 아까랑 다르게 숙제 별로 안급해보이길래 그런다."

"다들 내 숙제에 관심이 많네. 진짜 신경 안써도 돼."

은우가 내 쪽에 놓여있던 물병을 들어 컵 하나에 물을 따르면서 말했다.

"어차피 다음주까지라. 자, 여기."

너무 자연스러워 그래-하고 넘길뻔했지만 이내 정신줄을 붙잡고 되물었다. 지나치게 평온했던 이유가 여기 있었구만. 당황스러운 마음에 은우가 조용히 넘겨주는 물컵을 받아들고 홀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난 오늘까지라고 안했는데? 미리 해두면 좋으니까 그냥 한거야."

"아니 너가 숙제하느라 밥도 안먹었으니깐.."

"응, 어차피 학교 끝나고 너랑 밥먹기로 했었으니까~ 그리고 너 나랑 3교시 끝나고 매점갔던거 기억안나?"

"아잇, 기억은 나는데!"

하나하나 되짚어보면 은우가 자기 입으로 오늘까지 해야한다고 말한적은 없지만 누가 기한도 넉넉한 숙제를 밥까지 거르고 하냐는거다. 맥락상 급한 일인줄 아는게 어쩌면 당연한데 실실 놀리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은우가 딱 꿀밤 한대 먹이고 싶을정도로만 얄미웠다.

"하.. 그래, 착각해서 대단히 미안하다?"

"ㅋㅋㅋㅋ삐졌어?"

"안삐졌어."

"진짜?'

탁자를 팔꿈치로 짚고 내 표정을 살피러 오는 은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한숨 한번 쉬어주고 어-라고 시크하게 대답해주려는 순간 억양이 조금 달라졌다.

"어? 야, 너 이거 다친거야?"

내 목소리에 당황한 은우가 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는것을 양 손으로 얼굴을 잡아 저지했다. 가까이서 보니 역시나 은우의 입술에 작게 피가 맺혀있었다. 은우가 별거 아니라는 듯 입술을 엄지로 쓸어내렸지만 단순히 입술이 튼게 문제가 아니였는지 한 부분만 유독 붉어져있었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우의 귀도 조금.

"별거 아냐."

"진짜...?"

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재차 손등으로 피를 쿡쿡 찍어내자 잠깐의 적막이 감돌았다. 

"근데, 너무 기분 나빠하지는 마. 숙제는 그냥... 내가 교실에 남는다 그러면 니가 같이 있어줄 것 같아서 그랬어."

이야기를 다시 끌고온 은우의 눈동자가 내 옆에 있는 벽의 메뉴판을 향하나 싶더니 머뭇거리며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 내 눈꺼풀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는 않나 신경쓰였다. 분위기상 왜? 밥먹으러 가더라도 같이 있잖아-라고 말하면 안될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럴 것 같았는데?"

왜-라고 발음할때쯤 이유없이 목이 메여 약간의 삑사리가 났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게..."

은우의 손이 테이블 밑으로 내려가는 걸 보고 있자니 목이 타는 것 같아 물컵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은우는 조용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우는 약간 숙여진 내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은우의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요동치는게 얼핏 보였다.

"아마도, 니가 날 좋아해서. 아니야?"

쿵, 심장이 너무 크게 뛰는 것 같아 벌려져있던 입을 꾸욱 닫았다. 은우의 눈에서 의도를 읽어내려고 해봐도 너무나도 맑아 도리어 내가 한없이 멍해지기만 했다. 의자에 앉아있어서 다행이다. 아니였으면 다리에 힘이 풀린게 그대로 드러날뻔 했으니. 이런 저런 핑계로 빠져나가며 굳이 정의하지 않았던 내 감정을 남의 입으로, 아니 은우의 입으로 듣고 있자니 아무 생각도 들지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일말의 부정의 여지도 남겨놓지않은 은우의 질문에 할 수 있는 말을 추리고 추리자 정작 꺼내놓을 수 있는 말은 보잘 것 없었다.

"어.. 그런가봐"

바보같은 대답인건 알지만 내 쪽에서는 최선이였다. 입을 다시 다물고 눈썹 사이에 힘을 밀어넣자 은우가 나의 손을 천천히 쥐어잡는게 느껴졌다.

"빈아, 나 좀 봐줘라, 응?"

"..야, 차은우 웃긴다. 왜 니가 우냐, 들킨건 난데. 내가 그렇게 싫어?"

날 쳐다보는 은우의 눈동자가 너무나 촉촉해서 저린 가슴을 부여잡고 부정의 대답이 돌아오길 간절히 빌며 말을 뱉었다. 나오려던 눈물을 말아넣자 대신 입이 비쭉비쭉 나오는게 느껴졌다. 나를 더 물러날 자리도 없게 만든 이유를, 대답을 난 꼭 들어야겠으니까.

"제발...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나는.. 너랑 친구 되기전부터 너 좋아했어."

순간 막힌 숨을 한꺼번에 뱉어버린 나를 은우가 여전히 글썽이며 쳐다보았다. 

"지금 꿈같아, 난."

은우의 양쪽 입꼬리가 올라가자 눈물은 은우의 속눈썹을 타고 투둑 떨어졌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웠을까. 열이 올라 붉어진 내 얼굴 중에서도 가장 붉은 피부에 은우의 아주 약간 차가운 입술이 포개어지자 서로의 체온에 동화되듯, 방금까지의 긴장과 두려움이 노근하게 풀렸다. 아주 달고 달아 눈물이 맺히는 가을의 첫키스였다.

 

 

 

 

 

 

 

 

 

 

 

 

 

그후 따끈따끈한 음식이 나왔지만 그대로 내 옆을 지키는 은우가 뒤늦게 털어놓은 사실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내가 잠결에 잔뜩 씹어놓은 마시멜로가 사실은 자신이였다고. 아직도 훌쩍이는 내 눈두덩이에 혹시나 아플까 살짝식 대주는 은우의 손등은 차가웠지만 은우의 귀는 뜨거워보였다. 은우 앞에서 펑펑 울었다는 쪽팔림이 가시기도 전에 내가 자는 내내 나를 보느라 문제는 사실 열문제도 못 풀었다는 말까지 하는 은우를 보니 덩달아 내 귀까지 새빨개진 것만 같았다. 그래도 나만 부끄러운건 아닐 걸 알기때문에, 그저 은우의 손을 조금 더 세게 부여잡았다. 

"아, 빈아 잠깐만."

은우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부스럭거리더니 펜을 꺼내 아직은 어느정도 하얀색을 유지하고 있는 벽면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잠깐의 펜 소리가 스치고 지나간 벽 외곽에 푸른글씨가 새겨졌다.

"아이..너무 유치하잖아.."

"뭐 어때, 재밌잖아."

'은우♡빈'

이런건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써놓으니 나도 모르게 손으로 계속 문지르고 싶어졌다. 같은 행동도 좋아하는 사람이 하면 뭔가 달라지는걸까. 은우가 있는 곳을 굳이 따라다니지 않아도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나를 보고있는 은우가 있다는건 새삼 벅차는 일이였다.

"은우야."

"응?"

"한번만 더."

얼굴에 열이 오르는게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가을바람이 식혀주겠거니, 하고 입술을 조금 내밀자 곧 몰랑한 마시멜로가 닿는게 느껴졌다. 떡볶이가 식어가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오늘은 매콤한 것보다는 달콤한게 더 끌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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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은콩 2019 가을호 후기
계간은콩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2
계간은콩 2020.11.12 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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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렌의 유혹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0
2020.11.12 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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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y blue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0
2020.11.12 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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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결핍(惡意)
떡트리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떡트리 2020.11.12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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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말
콩떡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5
콩떡이 2020.11.12 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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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聯)
익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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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친구사이 상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8
비밀글 친구사이 하
은죽빈살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은죽빈살 2020.11.12 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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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다
오각형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4
오각형 2020.11.12 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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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글 발자국
| 2020.11.12 | 추천 0 | 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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