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비가 지나면

2019 가을호
작성자
소빈
작성일
2020-11-12 16:48
조회
3

 ‘톡 톡 톡’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비는 우울한 기억만을 불러온다. 비가 와서 되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문빈의 인생에서는. 엊그제 남자 친구와 헤어질 때도 내린 비는 그치지도 않고 지겹게 내린다. 일기예보에서 가을장마가 시작이라고 했던 것 같다.

‘나쁜 놈.’

문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전 남자 친구는 결국 여자가 더 좋다면서 그를 찼다. 문빈의 게이 인생은 항상 그랬다. 언제나 좋아하면 헤테로 아님 바이. 결국, 사귀게 돼도 모두 여자가 좋다면서 떠났다. 매번 그런 똥차만 골라잡는 것도 능력이면 능력이라고 명준이 형이 항상 비꼬더랬다. 그놈들이 나쁜 거지. 내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라고 누누이 되뇌어 봐도 마음이 쓰리고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문빈은 어두운 생각을 털어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별해서 마음이 아파도 시간은 지나고 돈은 나가며 헤어짐보다 더 무서운 건 카드값과 각종 고지서였다.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문밖을 나서자마자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을 굴뚝같았지만 걸음을 내디뎠다. 채 3M도 걷지 않았는데 문빈은 달려오던 사람에게 부딪쳐 우산을 놓쳐버렸다. 그로 인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아 버렸다.

“아…씨…”

가뜩이나 우울한데 비까지 맞아버려서 짜증이 난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근데 웬 잘생긴 미남이 눈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네, 괜찮아요.”

“죄송해요. 바빠서 뛰느라 앞을 제대로 못 보았네요. 여기는 제 명함이에요. 세탁비는 물어드릴게요. 꼭 전화 주세요.”

미남은 명함을 주고 문빈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산을 들고 문빈을 자신에 손에 쥐어진 명함을 바라보았다.

회계사 ‘차은우’

문빈은 ‘차은우’ 그 세 글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명함을 만지작거리면서 문빈은 자신이 일하는 카페로 들어갔다.

“빈아, 왔냐? 근데 너 왜 다 젖었냐?”

명준이 문빈을 반기면서 물어보았다. 안에 있던 진우가 명준이가 말하는 소리에 수건을 가지고 나왔다. 진우에게 수건을 받아든 문빈이 머리를 털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명함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 이거 뭐야? 명함?”

명준이 호기심을 보이면서 명함을 들었고 진우랑 같이 명함을 보았다.

“회계사 차은우…은우씨?”

진우의 반응에 문빈이 머리를 털다 멈추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아는 사람이야?”

“응, 우리 가게 세금이랑 이런 거 은우씨한테 맡기거든.”

“그래? 몰랐네….”

“애들아, 우리 카페 오픈 안 할 거냐…. 지금 한시가 급하다아~”

명준이가 카페 오픈을 재촉하는 소리에 진우와 문빈은 서둘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서 오픈 준비를 하였다. 문빈이 일하는 이 카페는 명준이 소유의 카페로 밤에는 펍으로도 이용되기도 했다. 문빈은 바리스타였고 진우는 카페 매니저 겸 바텐더이기도 했다. 명준이가 카페를 연다고 했을 때 문빈은 솔직히 잘될까 싶었지만 자기 돈도 아니고 취직도 시켜준다고 하니 오픈 멤버로서 지금까지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커피에 관심도 가지게 되고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지금은 자신만의 카페를 오픈하는 것이 문빈의 꿈이었다.

“안녕히 가세요~”

마지막 손님을 보내고 난 후, 문빈은 녹초가 되어 탁상에 누워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구 남친 놈이었다. 헤어질 때는 쿨하게 굴더니 헤어지고 나서는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지, 헤어질 때도 구질구질했다.

‘미안, 빈아. 나는 아무래도 여자가 더 좋다, 솔직히 언제까지 우리가 사귀겠냐. 주변에서 결혼하라고 하는데…. 그래도 결혼은 여자랑 해야하지 않겠냐. 솔직히 친구사이 었을 때가 더 좋은거 같아. 앞으로 그냥 친구처럼 지내자.’

구 남친이 문빈에게 건넨 이별의 말은 그저 자신의 현실만을 돌아보기 급급하고 문빈의 감정 따윈 고려조차 하지 않은 이기적인 말이었다. 그로 인해 상처받은 문빈에게 상대는 너무 당연하게 친구로 돌아가자고 말했고 그 말은 문빈에 대한 그의 감정이 그 정도로 가벼웠다는 일종의 통보였다.

문빈은 친구로 돌아갈 수 없었다. 문빈이 가지고 있던 감정은 이미 친구 이상이었고 그래서 그와 사귀게 되었을 때 이번엔 꼭 함께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네 말이 뭔지 알겠어. 그렇지만 난 친구가 되어 줄 순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안 봤으면 좋겠으니까. 연락은 하지 마.’

문빈이 이렇게 말하고 돌아섰을 때, 구 남친은 문빈을 잡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 좋았잖아. 그냥 친구로도 만났으면 좋겠다. 연락할게. 무시는 하지 마. 나 네가 싫어서 떠나는 거 아니야. 그냥 현실이 무서워서 그런 거야. 나 너 그래도 보고 싶어.’

문빈은 손을 뿌리치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다시는 볼 생각이 없었다. 구질구질한 헤어짐. 구질구질한 비. 구질구질한 문빈. 그래도 그런 자식을 아직도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 구질구질하고 비참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장마처럼 문빈의 마음 속은 여전히 비가 내리는 와중에 구 남친 놈은 전화를 한 거였다. 문빈은 전화를 들고 끊지도 받지도 못하면서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었다. 전화가 끊기고 부재중 알람이 떴을 때 문빈은 깨달았다. 자신이 숨도 쉬고 있지 않았단 사실을. 어째서 자신만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건지. 그게 자신이 게이라서 그런 건지. 부정적인 생각이 쌓여만 갔다. 오늘은 술을 마셔야겠다. 이별 후에 술 안 마시겠다고 했지만 오늘만큼 술이 간절한 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술을 샀고 집에서 혼자 먹고 싶지는 않아서 편의점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땅콩과 오징어 안주 그리고 소주. 시원하게 내리는 저 밖의 비처럼 소주가 쭉쭉 들어갔다. 먹으려고 산 안주지만 안주는 손에도 대지 않은 채였다. 한참을 그렇게 혼자서 술을 마시고 술기운이 돌 때쯤이었다. 누군가 문빈이 앉아있는 의자를 쳤다. 문빈은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고 아침에 봤던 미남이 서 있는 걸 보았다.

“죄송합니다.”

“아, 차은우씨다.”

“절 아세요?”

“아침에 나 치고 갔으면서 기억도 못 하고……. 지금도 쳤으면서…….”

“아침이요…? 아!!! 혹시?”

“아침에 당신이 쳐서 나 비 맞았잖아요!!! 명함만 주고 덜렁 가버리고선!!”

“아침 그분이시구나. 옷 많이 젖으셨던데 괜찮으셨어요? 죄송해요. 아침엔 그렇게 가버려서…”

“죄송하면 나랑 술 상대나 해줘요. 여기 앉아요. 나는 문빈이에요. 문빈.”

술기운에 문빈은 은우와 자신이 거의 초면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은우를 자신 앞에 앉혔다. 차은우는 당황해했으나 이내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앉았다. 솔직히 아침에 자신이 잘못한 건 맞으니 얘기 들어주는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겠다고 생각했다. 앞에 앉은 차은우를 물끄러미 보던 문빈이 중얼거렸다.

“아…. 진짜 잘생겼다.”

“뭐라고요?’

“그쪽 잘 생겼다고요. 솔직히 본인도 알죠?”

“아니…. 뭐…고맙습니다.”

“있잖아요. 난 비 오는 날이 너무 싫어요. 습해서 싫고 축축해서 싫고 구질구질한 게 나 같아서 싫어요.”

차은우는 말없이 문빈의 말을 들어줬다. 술도 들어갔고 들어주는 사람도 있어서인지 문빈은 차은우가 묻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사실 차은우가 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냥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새끼 진짜 좋아했거든요. 근데 걔는 여자가 더 좋대요. 나랑은 결혼할 수 없어서 안 되겠대요. 웃기죠. 난 그냥 사랑한 건데 성별 때문에 안된데요. 그러고선 나랑 친구로 돌아가서 계속 보재요. 이게 말이 돼요? 진짜 구질구질해…….”

“문빈씨. 많이 취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차은우씨도 내가 귀찮죠?”

“귀찮은 게 아니라 너무 취했어요. 그만 마셔요. 몸에도 안 좋아요.”

“나쁜 놈…진짜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어. 친구로 보자니…”

“그런 놈 잊어버려요. 문빈씨가 너무 아까워요. 다른 더 좋은 사람 만나면 되죠.”

“못 만나면요…걔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도 그랬어요…일방적으로 이별 통보하고…사실은 무서워서 못 만나겠어요. 다음은 정말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게 맞을까요?”

차은우가 뭐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문빈은 주량을 넘긴 지 한참이었고 앞선 대화를 기점으로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찌어찌 집에는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지만 엄습해오는 기억 때문에 문빈은 한동안 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문빈은 만나면 사과하려고 했지만, 그날 그렇게 만났던 것이 거짓말처럼 차은우를 볼 수 없었다. 시간을 속절없이 흘러갔고 문빈은 차은우의 명함을 보고 전화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렇게 망설이다가 연락도 못 하고 2주가 흘러갔다.

‘딸랑’

“어서오세…차은우씨?”

“아, 문빈씨. 여기서 일하셨어요? 왜 한 번도 못 봤죠?”

“일한 지 꽤 됐는데…근데 무슨 일로?”

“아…세금 관련해서 사장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요. 우연히 세 번이나 마주치다니 운명인가 봐요. 문빈씨랑 저. 조금 있다가 시간 돼요?”

“일 끝나고요?”

“네, 언제든지요. 사장님 좀 불러주시겠어요?”

“일 끝나고 되요. 그때 봬요. 잠시만요. 명준이형!! 손님 왔어요.”

“누군데? 아, 은우씨네. 무슨 일 있어요?”

“아, 세금 처리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요.”

은우와 명준이 일 문제로 사라졌다. 문빈은 갑자기 약속을 청해 온 차은우로 인해 불안해졌다.

‘저번에 술 마신 거로 그러는 거 같은데…. 먼저 문자라도 보낼 걸 그랬나 봐…’

약간은 미안한 감정과 불안한 감정으로 일을 마쳤을 때는 차은우가 카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빈은 준비한 커피를 들고 차 은우에게로 갔다.

“문빈씨, 끝났어요?”

“네, 이건 별거 아니지만 저기…. 저번엔 폐 끼쳐서 죄송해요.”

“아, 커피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근데 무슨 할 말….”

“밥 먹었어요? 배고픈데…밥 먹으러 갈래요?”

“네? 네.”

“이 근처에 맛있는 식당 있어요. 같이 식사해요.”

문빈은 제대로 말도 못 붙이고 은우가 가자고 하는 식당으로 끌려갔다. 아니, 문빈 역시 식사는 하고 싶었으니 따라갔다고 하는 게 맞았다. 식당은 적당히 분위기가 좋았고 음식은 맛있었다. 정갈하게 놓인 반찬들이 식욕을 돋우게 만들었다. 식사를 다 마쳐갈 때쯤 차은우가 문빈에게 말했다.

“빈씨.”

“네?”

“아까도 말했지만 세 번 우연히 만나면 운명이라고. 혹시 나랑 만나 볼 생각 없어요?”

“뭐라-구요? 켈록”

문빈은 당황해서 사레가 들려버렸다. 솔직히 저번에 술 마신 것 때문에 만난 줄 알았는데……. 만나보자고 하다니……. 그리고 차은우는 문빈 기준에서 지나지게 미남이었다. 아니, 솔직히 문빈 기준이 아니어도 너무 미남이었다. 근데 그 미남이 자기한테 만나보자고 한다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문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이별하고 아직 다른 사람을 만날 준비도 안 됐을 뿐더러 자신은 차은우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차은우는 세 번을 우연히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했으나 문빈입장에선 차은우가 자신이 일하는 카페의 세무 일을 봐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우연도 아니었다.

“은우씨…만나자고 해준 거 매우 고마워요. 근데…. 제가 아직 다른 사람을 만나 준비가 안 됐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저도 바로 긍정적인 답이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냥 문빈씨랑 헤어지고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상처받은 모습 보고 싶지 않았어요. 이후에 또 마주치면 반드시 번호 물어보겠다고 했는데 오늘 우연히 보니까 좋더라고요. 문빈씨가 좋은가 봐요, 저. 많이 당황스러울 것도 알지만 말하고 싶었어요. 내 마음. 앞으로 알아가요. 지금 준비가 안 된 거지. 나 완전히 찬 건 아니죠?”

“찼다니요?!! 아니 제가 어떻게…. 그냥 너무 당황스럽고 차은우씨랑은 만난 지도 얼마 안 됐고 모르는 것도 많잖아요…망설여져요.”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문빈씨 번호 알려줄래요?”

“아, 핸드폰 주세요.”

문빈은 차은우의 핸드폰을 받아서 자신의 번호를 저장했다. 둘은 한참을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을 물어가면서 서로를 알아갔다. 밤이 깊어 둘은 헤어졌다.

“빈씨, 아무 때나 연락해도 되요. 제가 필요하면 연락해요. 나갈게요.”

차은우는 헤어지면서 이렇게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문빈은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문빈은 그조차도 자각 못 할 정도로 오늘 하루가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후 문빈은 은우와 톡을 하기도 하고 전화를 하기도 하고 둘이 따로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빈은 자신의 삶에 차은우가 자연스레 스며들었다는 걸 느꼈다. 그 감정은 차마 말로 못할 벅참이었다. 그 순간 자신의 감정을 차은우에게 알려야겠다고 느낀 문빈은 차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은우씨, 지금 뭐해요? 나 지금 거기로 가도 돼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빈씨가 온다면 환영이에요.”

은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빈은 신발을 신고 현관을 나섰다. 뛰어가는 문빈의 뒤로 어느새 비가 갠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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