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聯)

2019 가을호
작성자
익먕
작성일
2020-11-12 16:54
조회
6

 

 

 

  

연(聯)

글. 익먕

 

 

 

 

 

 사랑하는 당신께.

 

 건강히 잘 계신가요. 이 곳은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졌다 멀어짐을 반복하지만, 당신에게만은 공중에 떠다니는 작은 먼지만큼의 악한 기운조차 닿지 않기를 오늘도 기도합니다. 어제의 전우가 오늘은 더 이상 곁에 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있음에 저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신의 안녕만이 저의 바람이고, 행복이고, 제 전부입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는 항상 안녕하시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저는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합니다. 당신의 새하얀 얼굴을 기억합니다. 당신의 푹 패인 보조개를 기억합니다. 당신의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꼬리를 기억합니다. 어렸던 저였지만, 사랑이라는 건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보며 웃어 주셨을 때, 저는 당신을 위해 제 인생을 바치리라 하늘에 걸고 맹세했습니다. 당신의 천진한 미소가 우울로 물들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당신의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슬픔으로 가득하지 않도록 하겠노라고, 당신의 무구한 눈꼬리에 눈물 맺히는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그렇게 맹세했습니다. 당신께서는 알고 계시는 지요. 사랑한다 내뱉는 한 마디의 마음이 너무도 무거워 차마 당신께 말하지 못했던 그 긴 시간이 저는 너무도 원망스럽습니다. 하루라도 더 많이 당신께 사랑한다 표현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만 남습니다. 제가 기차를 타고 이 곳으로 오기 전, 당신에게 했던 인사가 마지막이 아니기를, 부디 저에게 단 십 분의 시간이라도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원합니다. 그 순간이 오면 넘쳐 흐를 것 같은 제 마음을 당신께 전할 수 있겠지요.

 

 사랑하는 제 연인. 저는 밤마다 당신의 보드라운 살결을 떠올립니다. 당신께서 곤히 잠에 드셨을 때면, 저는 몰래 일어나 당신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당신의 둥그런 코끝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당신은 모르시겠지요. 잠꼬대를 하며 오물거리는 입술이 얼마나 어여쁜지 당신은 알지 못하시겠지요. 제게는 사치라는 것을 알지만, 당신의 그런 모습들은 영원히 저만이 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물거리는 입이 귀여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면, 얼굴을 찌푸리며 제 품으로 파고드는 당신께 제가 밤마다 청혼하는 것 또한 기억하지 못하시겠지요. 남들과 똑같은 흔하디 흔한 말이었습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는 날까지 함께하자는,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고, 깊은 주름이 얼굴 가득 패여도 두 손 꼭 잡고 있자는 그런 말을 달빛 아래에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가볍지는 않게 읊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가 달빛보다 무겁더군요. 한 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한 날 한시에 생을 마감했으면 하는 것이 저의 염원이었습니다. 아니, 당신보다 딱 십 분만 더 살았으면 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까지도 제가 지켜줄 수 있도록요. 그것이 어찌 그리 과한 소원이라고 제게서 마지막 희망까지 빼앗아 가시는 것인지, 미천한 저는 하늘의 뜻을 도저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저희가 처음 정을 통했던 날,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저는 생생히 기억합니다. 바르르 떨리는 등불과 함께 떨렸던 당신의 눈꺼풀에 입을 맞추었지요. 당신이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이라도 되는 양 너무도 소중해 함부로 만질 수조차 없었습니다. 깨져버릴까 두려워 차마 넘지 못했던 그 선을 당신께서 이끌어 주셨기에 겨우 한 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양 볼 가득히 발갛게 달아오른 당신이 어여뻐 웃었더니, 부끄럽다며 불을 꺼 달라 하셨지요. 기억하십니까? 등불을 끄니 새하얀 달빛 아래 희미하게 보이는 당신의 얼굴과 속살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조심스레 셔츠의 단추를 풀어 당신의 얇은 허리를 움켜쥐었을 때 당신께서는 허리를 비틀며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신음을 흘리셨지요. 꿈에서만 그리던 것보다 훨씬 더 꿈 같았습니다. 그 누구도 닿지 않았을 당신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제 손과 입술이 닿았던 것을 기억하시는 지요. 당신의 모든 곳에 입을 맞추고, 그 모든 곳을 전부 달콤하게 핥았습니다. 사탕보다 더 달콤해 혹여 당신께서 녹아 내릴까 무서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을 맛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이 순간이 마지막은 아닐까, 꿈은 아닐까 두려워 당신을 놓아줄 수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차가운 밤공기를 몰아내며 뜨거운 숨이 방 안을 가득히 채워나가고, 백옥 같은 당신의 피부에는 아름다운 꽃이 한 송이 한 송이 피어났지요. 혹여 소리가 새어 나갈까 얇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당신께서 흘리는 신음 섞인 숨소리는 마치 천상의 노래 같았습니다. 당신께서 달뜬 목소리로 불러주신 제 이름이 너무도 황홀해 끊임없이 이름을 불러달라 부탁드렸던 일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끝이 동그란 손가락이 손톱을 세워 제 어깨와 등으로 파고 들어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습니다. 제 입술이 닿은 곳에 붉은 꽃이 피어나듯, 당신의 손 끝이 닿은 곳에도 붉은 꽃잎이 휘날리는 것일 테지요. 당신께서 남겨주신 그 모든 것이 제게는 선물과도 같았습니다. 숨소리 섞인 목소리, 눈물 젖은 눈동자, 발갛게 달아오른 볼과 비단보다 부드러운 속살, 그리고 당신의… 처음.

 

 우리가 마침내 하나가 되었던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매일 밤 당신을 꿈꾸며 속옷을 더럽혔던 것을 모르셨겠지요. 꿈 속에서 당신은 제 목에 팔을 감은 채로 귓가에 속삭이셨습니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당신의 안에 파정하며 꿈에서 깨어나, 당신을 향한 숨길 수 없는 마음과 함께 죄책감에 휩싸였던 그 때의 저를 모르시겠지요. 당신께서 저와 같은 마음이기를 얼마나 오랜 시간 바라 왔는지, 당신께서는 알지 못하시겠지요. 당신의 안은 꿈보다 뜨거웠고, 상상보다 달콤했습니다. 당신의 팔이 제 목을 감싸고, 다리로는 제 허리를 감싸 안으셨지요. 당신께서 힘겨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 흘리는 일 없게 하겠다 맹세하였건만, 당신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도 그만둘 수가 없었습니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보면서도 저로 인해 우는 당신이 너무도 아름다워 그저 눈물 자국을 따라 입을 맞출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방울 방울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핥으며, 붉게 물든 눈꼬리에도 입을 맞추며 예쁘다 말하였더니, 당신께서는 달빛보다 새하얗게 웃어 주셨지요.

 

 당신께서 잠이 들었던 그 밤에 저는 처음으로 당신께 청혼을 했습니다. 몇 번을 파정했던지, 어스름한 달빛을 저 멀리 떠오르는 햇빛이 몰아낼 즈음에야 당신께서는 지쳐 쓰러지듯 잠에 드셨지요. 쌕쌕 소리를 내며 숨을 들이쉬고 내실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가슴팍을 가만히 바라보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만 간직하고 있던 말을 힘겹게 내뱉었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이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받는 이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그러니 저와 평생을 함께 해 달라고 그렇게 청혼을 했습니다. 대답을 듣지 못해도 좋았습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당신께서 태어난 겨울,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가장 완벽한 날을 기다릴 수 있었으니까요. 함박눈이 떨어지는 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을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 다가와도, 우리가 함께 있다면 서로의 온기로 그 어떤 겨울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당신의 해사한 미소가 있다면 눈으로 뒤덮인 얼어붙은 세상에도 금방 들꽃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봄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이후로 매일 밤 당신께 청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내 사랑.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당신의 자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저에게는 후회로 남습니다.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사랑해 마지않는 내 사랑, 내 연인, 내 전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도 저 멀리서 따가운 총성이 공기를 가르고, 귀가 찢어질 듯한 폭발음이 울려 퍼집니다. 당신과 함께 올려다보았던 푸른 하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매캐한 연기만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을 뿐입니다. 곳곳에서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다친 전우의 썩어가는 상처에는 구더기가 드글거리고, 시체가 타는 지독한 냄새에 더 이상 당신의 향기를 맡을 수조차 없습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는 반쯤 죽어버린 목소리와 함께, 회색 하늘과 타 들어간 나무에는 까마귀가 가득합니다. 눈이 내리지 않은 지 벌써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곳은 눈 대신 회색의 재가 휘날립니다. 아마 다가올 겨울에도 이 곳에는 순백의 눈 대신 잿더미와 시체와 죄와 죽음만이 쌓이겠지요. 죽음은 너무도 가까이 있고, 사랑은 너무도 멀리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겨울을 맞지 못할 것을 알았더라면, 당신과 함께할 찬란한 미래조차 생각지 말 것을요. 당신께 사랑한다 말하지 않고, 당신과의 행복한 하루하루를 상상조차 말 것을요. 비록 당신께서 듣지 못하셨다 하더라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제 입으로 내뱉지 조차 말 것을요. 당신을, 당신을 사랑조차 하지 말 것을요.

 

 아아. 그 모든 것이 헛된 희망이고 헛된 꿈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이미 제 손을 떠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는 지금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한 그 모든 시간을 후회합니다. 당신을 알지 못했더라면, 제게 지킬 것이 하나도 없었더라면, 미련 없이 이 생을 놓아줄 수 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후회가 아니라 미련인 것을요. 지금도 저는 당신의 온기가 그립습니다. 당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만이 저를 살아있게 만들어줍니다. 당신의 미소가 저를 웃게 만들고, 당신의 눈물이 저의 용기가 됩니다. 제 인생은 오롯이 당신의 것. 그렇기에 더더욱 당신께서는 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셨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 부디 저를 떠올리며 눈물짓지 말아 주세요. 당신께는 항상 즐겁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기를, 당신께서는 항상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오니, 저를 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 주십시오.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은 바다와 같습니다. 바다의 아름답고 웅장한 풍경에 마음을 뺏기었다 하더라도, 사람은 평생을 바다에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닷물에 젖어버린 옷은 시간이 지나면 햇빛에 바싹 마를 테고, 추억 속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풍경만이 남겠지요. 하지만 추억은 언제나 아름답게만 기억될 뿐임을 명심해 주세요. 내 사랑, 바라건대 어둠이 내려앉은 바닷가에 머무르지 말아주세요. 어둠 속에서는 어디까지가 물이고, 어디까지가 뭍인지 분간할 수 없으니 파도에 휩쓸려 깊은 곳으로 빠져 죽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부디 달이 환하게 뜬 밤에만, 아주 아주 멀리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을 바다를 떠올려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바다는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니, 달빛을 받은 바다는 분명 애처롭고 아름다울 것입니다.

 

 당신께 편지를 쓸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편지 또한 당신께 닿지 못한 채 재가 되어 흩날리겠지요. 하지만 이 안에 담긴 제 마음만큼은 하늘을 날아 날아 고스란히 당신께 전해 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음은 불에 타지도, 물에 젖지도, 녹이 슬지도, 찢어 지지도 않습니다. 비록 형체는 없을지라도 한낱 글자에 담긴 것보다 더 깊은 마음이 있사오니, 먼 곳에 계신 당신께 무사히 도착하기를 바라옵니다. 보고 싶은 내 사랑, 아른거리는 당신의 웃는 얼굴 뒤로 색이 없는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 새까만 재가 되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 곳에서는 당신과의 기억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운 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마저도 죽음의 냄새에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 버립니다. 목 놓아 불러도 닿지 않을 나의 연인. 제가 이 곳에서 그 명이 다한다 하더라도,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습니다… 빈아.

 

 당신의 안녕을 바라며.

 

 

 

 

 

 

 

 보고 싶은 내 연인.

 

 당신께서 돌아오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떠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살이 조금 빠지셨다 말하니 푸스스 웃으며 제게 여전히 아름답다 말씀하시는 그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 너무도 생생합니다. 살이 빠진 볼과 조금 굵어진 선이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지만, 잘생긴 얼굴만큼은 여전하시더군요. 기억하십니까? 당신의 그 잘생긴 얼굴에 반했었지요. 당신께서는 얼굴 말고 다른 것은 좋아하지 않느냐고 늘 물으셨지만, 사실은 당신의 모든 것을 다 사랑했기에 부끄러워 차마 말하지 못했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꼭 늙고 주름져 못생겨지면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 것이냐 또 한 번 물으셨지요. 그 투정 아닌 투정이 귀여워 미래는 모르는 일이 아니냐 얘기했지만, 제가 어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다정을 사랑하고, 당신의 무구를 사랑하는 것을요. 제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의 젊음이나 외모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신께서 안아 주신 그 온기가 아직도 제 주변을 맴도는 것 같습니다. 당신의 손은 그 무엇보다 뜨거웠고, 당신의 숨결은 그 무엇보다 포근했습니다. 당신의 시선은 사랑으로 가득했고, 그 안에서 저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다정하게 사랑을 노래했고, 우리는 완벽한 화음을 이루며 절정에 이르렀지요. 그 절정의 순간에, 제 안을 가득 채운 당신께서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렇게 꿈에서 깨어나니, 차갑게 식은 당신의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졌습니다. 밤은 길고, 외로움은 끝이 없더군요. 어둠 속에서 피어난 불안은 끝없이 저에게 달려들어 한 줄기 희망 마저도 빼앗아가려 했습니다. 달빛이 방 안으로 가득 흘러 들어오는 새벽에 저는 홀로 당신을 그리며 울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울고 있으면 어느 샌가 옆으로 다가와 다독여 주셨지요. 그래서인지 당신이 더욱 그리워지는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울어도, 아무리 당신의 이름을 불러도, 당신께서는 제게로 돌아오시지 않으시더군요.

 

 당신께서 전쟁터로 떠난 이후로 저는 더 이상 밤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올려다보았던 반짝이는 아름다운 밤하늘을 보지 못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밤하늘을 보면 별을 가져다 박은 듯한 당신의 눈망울이 생각나 더 이상 올려다 보지도 못하는 것을 알고는 계신지요. 당신께서는 제게 달 같이 아름답다 말씀하셨지요. 그 때문에 더 이상 달도 사랑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없는 밤은 제게 그저 어둠일 뿐입니다. 저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불길한 생각들과 우울한 사념들과 싸워야 하는 시간일 뿐입니다. 잠에 들지 못하는 괴로운 하루하루 속에서 어쩌다 꿈을 꾸면 당신께서 찾아오시지요. 그저 꿈에서만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습니다. 살아있는 이들은 하나 둘 돌아오고, 제 발로 올 수 없는 이들은 하다못해 부고로라도 제 소식을 전하는데, 당신께서는 살아 계신지, 하늘로 떠나셨는지, 혹은 새로운 연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셨는지 알지 못하는 저로써는 무작정 기다리는 것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당신께서 계신 곳을 몰라 부치지 못한 편지가 산이 되어 하늘을 찌를 것 같습니다. 어디 계신지, 살아는 계신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타고 흘러 흘러 소식 하나라도 들려오면 좋으련만… 아무런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저를 당신께서는 미련하다 하실까요, 어리석다 하실까요. 아마 돌아오신다면 기다리게 해 미안하다며 먼저 눈물을 쏟으시겠지요.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만의 하나라도 제 품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신다면, 저는, 저는…

 

 빈은 조심스럽게 펜을 내려놓았다. 매일을 쓰는 일기와도 같은 편지였지만, 그 모든 편지에는 항상 진심이 가득 담겼다. 그 마음이 이제는 애정인지 애증인지 스스로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은우를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을 향한 어떤 미움과도 같은 무언가도 분명 섞여 있었다.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키고자 숨을 크게 들이켜 보았지만, 어느 새 편지 위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부치지 못할 편지였다. 받을 사람은 분명 있으나 그 사람이 산 자인지, 망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편지였다. 책상 옆으로는 큼직한 함 안에 편지가 가득했다. 수없이 많은 편지 봉투에는 그저 날짜와 받는 이만이 적혀 있었다. 은우, 가슴 절절한 두 글자에 빈이 오랜 시간 겪은 부정과 원망과 슬픔과 체념이 묻어나는 듯 했다. 그 쓸쓸한 이름을 놓지 못해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빈이었다.

 

 차라리 죽어 몸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로 돌아갔다면, 그 사실을 자신은 알 수 있으리라 빈은 믿었다. 온 마을을 휘감았던 죽음의 냄새 속에서도 은우의 죽음만은 느끼지 못했기에, 그래서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믿었다. 빈은 매달렸다. 은우가 이토록 쉽게 그 생을 마감했을 리가 없다고, 그 아름다운 이를 세상이 이렇게나 빨리 데려갔을 리가 없다고, 그 알 수 없는 확신에 매달렸다. 아니, 확신이 아닌 맹신이었다. 죽음보다 뜨겁게 사랑했으니, 연인의 생과 사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탓인지 바람에 실려오는 희미한 탄내조차 은우가 아닐까 하는 하루하루였다. 반나절조차 견디기 힘든 하루가 쌓이고 쌓여 몇 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어냈다. 빈은 신을 믿지 않았다.

 

 빈은 다시금 펜을 쥐었다. 눈물을 훔치고, 젖은 편지지를 소매 끝으로 몇 번 꾹꾹 눌러내고 나서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쉬었다. 눈물 자국에 번진 글씨가 괜스레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았다. 젖은 종이가 우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으나, 펜을 고쳐 잡고는 다시 글을 써 내렸다.

 

 저는 군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놀라 마당으로 뛰어 나갑니다. 당신께서 제게로 돌아오셨기를 바라며, 그 발소리의 주인이 당신이기를 바라면서요. 당신께서는 어쩜 그리 야속하십니까? 어찌 한 마디의 언질도 없이 제 곁으로 돌아오지 않으십니까? 어찌 당신의 소식 하나 제 귀에 들려오는 것이 없습니까? 야속하고도 야속한 내 사랑. 저는 당신을 미워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내 생에서 도려내 버리고 싶습니다. 당신을, 당신을 만나지 않았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제 남은 시간을 다 갖다 바친 대도 소원이 없을 테지요.

 

 하지만, 압니다. 저는 평생을 그러지 못할 것을요. 저는 그저 당신을 품은 채로 남은 평생을 살아내겠지요. 그러나 당신이 곁에 없는 그 삶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눈부신 나의 태양. 당신의 빛에 차라리 눈이 멀어버렸다면 좋았을 것을요. 당신의 뜨거움에 차라리 타 죽어 버렸더라면 좋았을 것을요. 당신과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은 기다림에 비해 너무도 짧았습니다. 당신의 햇살 같은 사랑 없이 제가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사랑을 받아야만 그 생명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를 그렇게 만드셨지요. 당신은 정말로 못된 사람입니다. 제가 이리도 힘들어 할 것을 아시면서 왜 저를 사랑하셨습니까? 왜 제게 사랑을 속삭이고, 왜 제가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하셨습니까? 왜 제게 당신의 온기를 나눠 주셨습니까? 왜 제게 입을 맞추고, 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맛 보여주셨습니까? 왜, 왜, 왜? 대체 왜요? 그 모든 시간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요? 이별을 위한 것이었나요? 아픔을 위한 것이었나요? 슬픔을 위한 것이었나요? 제발, 한 마디 대답이라도 해 주실 수 없나요?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저의 이 형체 없는 원망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저도 더 이상은 알 수 없는 것을요. 당신을 향한 것인지, 저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이 세상을 향한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은 당신을 원망하지 않으렵니다.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잘못이 아닌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저 원망이라도 하지 않으면, 붙잡고 있을 것이 없어서, 그래서 당신을 향한 원망을 붙들고 있었을 뿐인 것을 압니다. 그 감정의 끈이 너무도 위태롭게 버티고 있습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그 끈이 우리를 연결해주는 마지막이라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여야만 하겠지요.

 

 끈이

 끊어져

 버

 리

 네

 요

 ,

 

 가엾은 내 사랑.

 

 

 

 

 

 문 밖에서 들리는 군화 소리에 빈은 놀라 펜을 떨어뜨렸다. 까만 잉크가 투둑, 떨어지며 종이에 작은 점을 여럿 그려 내었다. 익숙한 냄새가 섞인 발걸음이었다. 그 발소리가 빈이 있는 문 앞에서 멈추었다. 설마. 빈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꿈 속에서 그렇게나 그리던 이가 서 있었다. 목발을 짚은 채로 군복을 입고 서 있는 은우의 뒤로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었다. 몇 년의 시간이 은우에게만은 고스란히 비껴간 것인지, 기억 속 그대로인 하나도 늙지 않은 모습에 빈은 참았던 눈물을 모조리 쏟아내었다. 꺽꺽거리며 우는 빈을, 은우는 달빛 아래서 사랑을 속삭이던 그 시절이 마치 어제였던 마냥 빈을 끌어안았다. 그 포근한 체온에 빈은 마음이 다 녹아 내릴 것만 같았다. 가슴 속에 가득 담겼던 응어리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리는 기분이었다.

 

 “왜 이제야… 왜 이제야 오셨습니까…”

 “많이 기다리셨지요. 제게 다리가 하나 없어 당신께 오는 길이 너무도 멀었습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언질이라도 주셨어야지요.”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닿지 않았나 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난 것을 보니.”

 

 은우는 빈의 어깨를 몇 번 조심스럽게 다독이고는 고개를 숙여 빈의 이마에, 동그란 코끝에, 눈물 맺힌 눈꺼풀에 한 번씩 입을 맞추었다. 그제야 빈은 살아있는 것 같았다.

 

 “울지 마세요… 이제 우리는 항상 함께 있을 겁니다.”

 “평생… 같이 있어 주실 거죠?”

 “아뇨.”

 

 은우는 빈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뺨에 닿는 은우의 손길이 너무도 부드럽고 따스해 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 부드러운 감촉은 눈물조차 잊게 했다. 은우의 손길에 슬픔은 옅어지고, 그 비어버린 마음을 채우는 충만한 무언가가 있었다. 빈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더 이상 외롭지도 않았다. 가슴 가득 차오르는 행복과 환희만이 존재했다. 은우의 손길이 멀어지고 빈이 눈을 뜨자, 그 앞에는 은우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우리 영원을 이야기합시다. 이제, 같이 가자, 빈아.”

 

 빈은 태양을 등에 업은 은우의 손을 잡았다. 은우와 함께라면 그 곳이 지옥이라도 같이 갈 것이라 그렇게 생각했다. 집 마당을 지나 대문을 나서는데, 어쩐지 발걸음이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한 쪽 다리가 없는 은우는 짚고 있던 목발도 던져 버린 채 둘은 나란히 걸었다. 빈은 어쩐지 자꾸만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은우는 앞만 보고 걷자 했다. 빈은 은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태양을 향해 걸었다. 그 빛에 눈이 멀어 버린다 해도 손을 꽈악 잡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있으니 그 앞에 펼쳐진 것이 무엇이건 상관 없었다. 빛에 닿기 전, 빈은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테였다. 집 마당에서 구슬피 우는 동생들 사이로 대들보에 매달린 채 있는 무언가가 보였다. 빈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은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은우는 떠나기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빙긋, 그 때와 똑같은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으로 온다 했던가? 빈은 그것으로 족했다. 그리 미워하고, 원망하려 해보았지만 결국 은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자신을 이제는 더 이상 미워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를 마주본 채로 환하게 웃으며 빛 속으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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