귓속말

2019 가을호
작성자
콩떡이
작성일
2020-11-12 16:56
조회
14

「사람은 모든일에 적응이 필요하지만

 

  항상 모든것에 익숙해 질수는 없다.」

 

 

 

 

"놀이공원에 마지막으로 온게 언제였더라.."

 

 

 위아래로 흰셔츠에 정장까지 빼입고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빈에게 집중됐다. 힐끗힐끗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눈빛에 머쓱해질 무렵 아무리 할로윈이라고 해도 정장은 너무 무리였나 싶은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할로윈 분장을 한 사람들도 있었건만 빈에게 오는 시선은 그칠 줄을 몰랐다. 더러는 저들끼리 귓속말하며 웃는 모습에 빈의 눈썹이 하늘을 향했다. 하지만 별 다른 방법없이 이리저리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놀이공원에 온 주목적이었던 좀비가 나온다는 할로윈 퍼레이드까지 보고가야지라는 생각에 차마 표값을 날리고서까지 놀이공원에서 나갈 엄두도 못냈다. 그렇게 한참을 목적지 없이 방황하던 빈이 놀이공원 구석진 곳에 할로윈 분장을 해주는 부스 앞에서 발걸음을 머뭇거렸다.

 

 

 

"어차피 놀이기구도 안 탈건데..정장까지 입었고 할로윈인데 분장까지 할까..아까 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이 하던데"

 

 

 부스 앞에서 깊게 고민하던 빈이 마침내 결정했다는 듯이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이미 안에서는 원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분장을 받고있는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저가 고른 피분장 정도는 저 분장에 비해 새발의 피겠다 싶은 생각에 과감히 입옆의 흐르는 피분장에 피눈물까지 추가해 결제한 빈이 부스 안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부스에 붙여진 팻말을 보니 의상도 유료로 빌려주는 듯 했다. 저렇게 옷을 빌릴 수 있는거면 정장 안입고 오는건데 후회도 잠시 제 얼굴에 닿는 붓에 퍼뜩 정신줄을 잡은 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게 몸에 빳빳이 힘을 주고 있는지 몇분이 지났을까 제법 그럴싸 하게 그려진 얼굴의 분장에 흡족한 빈이 거울을 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입 옆의 피도 진짜 상처 같아 신기해하던 빈이 감사인사까지 마치고 부스를 나와 아까보다는 시선을 즐기는 듯이 당당한 발걸음으로 놀이공원을 누볐다. 하지만 그건도 잠시 놀이공원에 온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놀이기구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간식만 사먹던 빈이 점점 놀이공원에 머무는 것에 지쳐하고 있었다. 

 

 

 

핸드폰 화면만 껐다 켰다 반복하며 시간을 확인하던 빈이 그대로 근처에 있던 벤치에 앉아 졸기 시작했다. 목이 안 아플까 걱정될 정도로 팔짱을 낀채 꾸벅꾸벅 졸던 빈은 순간 옆으로 몸이 기우뚱거리나 싶더니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당황한 듯 턱을 긁적이며 주위를 둘러보던 빈의 시야에 뱀파이어 분장을 한 남자가 보였다. 설마 다 봤나 싶어 빤히 남자를 주시하던 빈이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또 한 번 화들짝 놀라며 휙 시선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저가 왜 피하나 싶다가도 저를 무표정한 표정에 차분한 눈길로 바라보던 남자의 눈빛을 떠올리던 빈이 

 

 

"엄청 잘생겼어"

 

 

 라고 중얼거렸다. 얼굴 전체를 덮는 짙은 분장에도 나 잘생겼어요를 외치던 남자의 얼굴에 빈은 지금 저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나 알아차리지도 못 할 정도였다.

 

 

"졸지만 않았으면 말이라도 거는건데."

 

 

그런데 왜 그 얼굴이 둥둥 떠다니며 지워지질 않는건지 제 뺨을 소리나게 짝짝 친 빈이 음료수나 마시자 하고 붉으스름하게 해가 지는 모습을 보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그토록 기다리던 좀비들이 나타날 시간이었다. 그래 언제 또 놀이공원에 올지도 모르는데 끝까지 보고가야지 다짐한 빈이 인증샷이라도 찍어가겠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퍼레이드를 가까이서 보려면 중앙에까지 가야했다. 퍼레이드를 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생각도 안한 빈이 뒤늦게 길게 늘어선 줄에 섰다. 이러다 늦으면 어쩌지 싶어 동동거리던 빈이 일종의 이벤트 인듯 줄 옆으로 지나가는 좀비들에 눈을 반짝였다. 좀비를 보랴 줄을 따라 점점 앞으로 가랴 정신없는 와중에 빈의 어깨를 누군가 톡톡 치더니 순간 귓속말을 걸어왔다. 

 

 

"차은우, 제 이름이요. 말 거는 좀비는 흔하지 않죠?"

 

 

 귓가가 간질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린 빈이 동그래진 눈으로 은우의 얼굴을 돌아봤다.

 

 

"어? 아까 벤치에 앉아서 쳐다보고 있던 사람..."

 

 

저를 알아보는 빈에 웃음을 지은 은우가 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빈의 손목을 잡고 사람이 많아 움직이기도 버거운 줄 밖 자신의 쪽으로 빈을 끌어왔다. 

 

 

"기억하네요? 졸다가 깨서 못 알아볼 줄 알았는데, 지금 방금 제 이름 알려줬는데 까먹은거 아니죠?"

 

 

"아 은우, 차은우 씨..전 문빈이에요 성이 문 이름이 빈." 

 

 

옆에서는 퍼레이드를 보려 준을 선 사람들로 인산인해인데 은우와 빈만 저들의 세상에 있는 듯 간질간질거렸다. 빈은 아까 잘생겼다고 생각한 사람이 갑자기 저에게 이름을 알려줘서 기분이 날아갈 듯하면서도 갑자기 왜 저에게 이름을 알려주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고는 눈을 깜박깜박 거리며 은우를 쳐다봤다. 그런 빈의 생각을 읽은 마냥 은우가 말을 이어갔다.

 

 

"갑자기 왜 말 거나 궁금한거죠? 음..벤치에서 조는 것도 놀라는 것도 귀여워서요. 지금 진짜 용기내서 말 거는건데.. 혹시 퍼레이드 보러가야해서 잡으면 안 되는건가요?"

 

 

"어..보러 가야하긴 하는데 괜찮아요..아마도?"

 

 

귀엽다는 말에 빈의 손이 턱을 긁적이다가 목을 툭툭 쳤다. 당황하면 나오는 빈의 습관이었다. 하지만 빈도 자신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 자신에게 관심있다는 듯한 은우의 당당한 태도에 얼굴이 달아올라 화끈거릴 뿐이었다. 자신의 할말을 똑바로 말하는 은우에 비해 빈은 자신이 지금 당황했다, 부끄럽다는 감정이 말과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은우도 눈치를 챌 정도였다. 빈의 대답을 들은 은우가 길게 이어진 줄을 한 번 제 손에 꼭 잡힌 빈의 손목을 한 번 보더니 빈을 이끌고 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은우의 좀비 알바 특권이 써질줄이야. 정장으로 빼입고 분장을 한 빈의 모습도 한 몫 톡톡히 했다. 누가봐도 아, 좀비 알바하시는 분들이네 싶었다. 이벤트로 사람들 옆을 지나가던 좀비들이 할 일이 끝난 듯 줄줄이 중앙으로 발길을 돌리자 그에 섞여 은우와 빈이 함께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빈은 자신이 여기 껴서 지나가도 되나 눈치를 보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보내주는 스태프들에 머쓱해 하며 은우의 뒤를 따라갔다. 아직 저도 은우에게 할 말이 남아있던지라 은우를 따라가는 것이 당연했다. 좀비 퍼레이드가 열리는 중앙에 다다르자 은우가 익숙한 듯이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빈은 은우가 앉자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여기가 퍼레이드 제일 잘 보이는 쪽이에요. 원래 저는 여기 있으면 안되는데 오늘만 비밀로 해요."

 

 

사람들이 많아 시끌시끌한 분위기에 은우가 빈에게 가까이 붙어 귓속말로 말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달아오른 얼굴과 귀에 빈이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손 부채질하다가 얼굴 좀 식히고 와야겠다 싶어 은우에게 말했다.

 

 

"여기 앉아있어요. 음료수라도 사올게요."

 

 

하고 일어서려 했으나 손목을 잡는 은우에 빈이 자세를 낮춰 쭈구려 앉았다. 은우는 잡은 빈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빈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 자리 뺏기면 어떡해요. 그냥 같이 앉아있어요. 좀 있으면 시작하는데. 할 말도 많고.."

 

 

"아, 그쵸? 사람도 많네. 좀 이따 마시면 되죠. 급한것도 아니고."

 

 

 무의식 중에 귀 뒤로 머리를 쓱 넘긴 빈이 은우를 응시했다. 은우의 웃고 있는 모습에 입을 달싹거리는 빈에게 은우가 계속해 말을 붙였다. 그러다 빈의 얼굴이 붉어지면 은우는 그것이 또 귀여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 둘이 뿜어내는 심상치 않은 분홍빛 분위기가 어두운 할로윈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

 

 

 

 

 

 

  할로윈 기점으로 은우와 빈은 누구도 말릴 수 없이 서로 죽고못사는 연인 사이가 되었다. 둘이 사귀게 된 후 빈은 은우가 의외로 좀비를 무서워해 저의 손을 잡아오던 것에 숨이 넘어갈듯 웃으며 놀렸고 사귀기로 한 후 빈에게서 벤치에서 너무 잘생긴 사람이 저가 자는 모습을 보고 있어 부끄러웠다는 말을 들은 은우는 또 어화둥둥 오구오구 빈을 귀여워해 빈의 얼굴이 붉어져 한바탕 난리였다. 솔직하게 말해 은우는 빈이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어도, 지금 막 일어나 얼굴이 부어있어도 언제나 빈을 귀여워했다. 그리고 은우는 빈에게 항상 습관처럼 귓속말을 자주했다. 처음에는 간질거림을 참지 못해 적응하지 못하던 빈도 조금씩 익숙해하더니 이제 둘이 밖에 있노라면 꼭 귓속말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 정작 주위 사람들은 무슨 얘긴데 둘만 하냐고 답답해 했지만 말이다. 

 

 

 

 

 

 은우와 빈은 신기하게도 같은 대학교 학생이었다. 이 사실을 안 둘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지 하다가도 그러니까 우리가 천생연분인거지 하고 좋아했다. 마침 통학으로 학교를 다니던 은우는 빈과 함께 자취를 하기 시작했고 이 둘의 모습은 신혼부부를 연상시키기 마련이었다. 아침에 쉽게 못 일어나서 고생이던 빈도 은우가 깨워주면 웃으며 아침을 맞이했고 누구 한 명이 공강이라 더 늦게 나갈 상황이면 둘은 또 같이 못 간다고 울상이었다. 그러다가도 둘이 같이 듣는 교양수업이 될 때 쯤이면 그렇게도 좋은지 붕방거려 왜 이렇게 난리냐고 친구들한테 경멸의 눈빛도 여러번 받았지만 역시나 둘은 그런 시선쯤은 눈곱만큼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서로 좋아죽는 둘도 싸우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

 

 

 

 

 

 

 

 

 

 은우와 빈이 사귄지 일 년이 되었을 때 둘은 서로가 만났던 놀이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옷도 빼입고 분장도 하고 말이다. 그 때처럼 하고 둘이 마주했을 때 은우와 빈은 심장이 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어떻게 일 년이나 됐는데 제 연인에게는 익숙해지질 않는 건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가 둘은 생각했다. 서로 보고있자니 긴장이 되어서, 자꾸 땀이 나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거렸다.

 

 

"나 잠깐 화장실 갔다가 올게. 길 잃어버리지 말고 기다려."

 

 

 은우가 먼저 화장실에 가버리고 혼자 밖에서 기다리던 빈은 또다시 몰려오는 배고픔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길 잃어버리지 말고 있으라니 저를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는 은우의 말에 빈은 그말만 계속해 곱씹으며 양손에 간식을 하나씩 사들었다. 이 정도면 나눠먹을 수 있겠지하고 다시 은우에게로 돌아가려던 빈은 뒤를 돌아서자 당황하고 말았다. 분명 아까 간식을 사러 올 때까지만 해도 길 쯤이야 찾을 수 있지 하며 간식을 고르던 빈이었지만 막상 다시 가려고 하니 길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길도 왔던 것 같고..저쪽 길로 가는거였나? 은우한테 전화할까 하다가도 그럼 또 어린아이 혼내는 듯 저를 타이를 은우의 모습이 떠올라 핸드폰을 꺼내들기가 망설여졌다. 확실한 건 저 다리 쪽은 안 건넌 것이었으니 이쪽으로 가다보면 나오겠지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

 

 

 

 

 

 

"야, 차은우 왜 우리랑 같이 알바했던 잘생긴 애 말이야. 걔 오늘 자기 애인 데리고 여기 왔대. 근데 그 애인이 누군지 알아? 작년 할로윈 때 우리끼리 내기했을 때 걔래. 웃기지 않냐?"

 

 

 은우가 있는 화장실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내기? 무슨 내기를 말하는 건지, 자기가 아는 그 차은우를 말하는 게 맞는지 빈은 전혀 믿을 수가 없었다. 이걸 모르는 척 해야하나? 은우는 그럼 지금까지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가? 머리가 멍해졌다. 저의 손에서 꽤 쌀쌀한 날씨에도 흘러내리는 와플의 생크림이 빈의 마음을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게 그 자리에 발이 붙은 듯 서있던 빈의 앞으로 은우가 인상을 찌푸리고 다가왔다. 그러는 은우의 모습을 빈은 또 멍하니 초점없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빈아, 내가 길 잃어버리지 말고 있으랬지. 사람들이 많아서 길을 잃으면 내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 응? 빈아, 대답해봐. 빈아..무슨 일 있었어?"

 

 

 은우의 타이름, 걱정 그 어떤 말에도 빈은 집중이 되질 않았다. 누군가가 자신의 귀에 물을 채워놓은 듯 귀가 웅웅거렸다. 빈의 팔을 붙잡고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은우는 빈이 아무말도 하지 않자 자신이 너무 화를 냈나 괜히 머쩍어 했고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마침내 빈이 입을 열었다.

 

 

"은우야,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내가 잘못들은 거지? 너 내기로 나랑 사귀는 거 아니지? 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거지?"

 

 

 곧 울 것 같은 빈의 눈에 은우의 머리가 점점 새하얗게 비워졌다. 손 끝부터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저의 손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기라니 무슨 내기를 말하는건지 머릿속을 이리저리 뒤지던 은우의 머릿속에 한 가지가 퍼뜩 기억났다. 설마 그 내기를 말하는건가? 빈을 만난 후 생각나는 내기라고는 작년 그 때의 내기밖에 없었다. 할로윈 날 하루했던 좀비알바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내기였다. 어쩌다 자신이 내기를 하게 되었던 건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내기 내용하나 만큼은 또렷히 기억났다. 

 

 

'오늘 하루 알바하면서 관심이 가는 사람에게 말걸기'

 

 

 은우는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고 그 내기 때문에 빈에게 말을 건 것도 조금은 맞지만 은우에게 있어서 빈과 연이 사이가 된 것은 정말 행운이라고 조금의 고민없이도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내기가 일년이 지나 발목을 잡다니 머리가 띵해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주지 떨궈졌던 고개를 들고 빈을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단단히 오해를 하고있는 듯했다. 어떤 내기였는지까지 알고 있는걸까..빈을 붙잡았던 손에 힘이 점점 풀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 빈아, 내 말 좀 들어봐. 너 어떤 내기였는지 모르..."

 

 

"뭐야 진짜 내기로 나 만나는 거였어? 은우야 이러면 안 되는거잖아. 일 년 동안 나한테 말도 안 해주고 귀띔도 안해주고."

 

 

"아니 빈아, 내 말 들어봐."

 

 

 빈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뚝 흘렀다. 소리없이 눈물만 뚝뚝 흐르는 게 묘했다. 빈이 은우에게서 서서히 멀어졌다. 빈의 손에 들려있던 와플과 회오리 감자도 쓰레기통 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빈의 손을 떠난 간식들이 처참히 쓰레기들과 섞이는 중에 은우는 빈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저 빈이 울며 뒤돌아 가는 모습, 점점 작아지는 뒷모습을 빈의 팔을 잡던 손을 그대로 허공에 멈춘 채 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사귀면서 한 번도 떨어지는, 멀어지는 일은 단 한번도 없을 줄 알았는데.

 

 

 

 

 

 

 

 

 

*

 

 

 

 

 

 

 

 

 

 은우는 그렇게 빈과 떨어진 날 빈과 사귀고 난 후로는 정말 오랜만에 다시 본가로 왔다. 그렇게 빈을 붙잡지 않고 보내고서는 다시 돌아가서 마주보기 무서웠다. 마지막에 빈이 저를 바라볼 때 눈물이 떨어지던 빈의 상처받은 눈은 은우를 아무말도 못 꺼내게 만들었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 일 년동안 빈과 지내던 습관이 몸에 익숙해진 것인지 매일 아침 30분씩은 일찍 일어나 멍하니 창 밖을 봤다. 빈을 깨워주던 습관이었다. 밥도 저가 먹고 한참 남을 정도로 요리했다. 그리고 밥이 남으면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습관이 무서웠다. 그런데 언제까지 빈과 떨어져 버틸 수 있을까. 빈의 집앞으로 가도 되는 것인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렇게 있다가는 빈의 오해와 상처만 깊어진다. 어떻게든 짚고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은우는 오랫동안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없었던 것 같다. 은우가 하루하루를 술로 버티어 내었다. 술에 강하다는 은우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그대로 아침까지 뻗을 정도로 술을 들이 부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면 이러면 안되는데 겨우 떠올려내고 주섬주섬 병을 치웠다. 기필코 오늘은 빈에게 가야겠다. 옷을 재빨리 챙겨입었다. 조금만이라도 시간을 더 지체하면 자신이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냥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한 은우는 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빈의 목소리를 기다리던 은우의 귀에 들려오는 것은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갈 때의 메세지였다. 메세지라도 남기고 가야겠다. 은우는 발걸음을 빈의 집으로 옮기면서도 혹시 빈은 저 없이도 아무렇지 않을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본가보다 익숙한 빈의 집 문 앞이었다. 벨을 누를까 주춤거리며 서성이던 은우가 겨우 손을 벨에 가까이 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후드티에 츄리닝 차림의 빈이었다. 깜짝 놀란 얼굴의 빈은 재빨리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은우의 눈에는 이 모습마저 귀여웠지만 당황한 모습의 빈슨 아마 편의점에 가려던 모양이다. 무척이나 그리웠던 빈의 얼굴을 보자마자 은우는 말이 터져나왔다. 하고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빈이 저의 말을 들어줄까 또 걱정되었다.

 

 

"빈아 나 할 말있어. 응? 한 번만 들어줘. 나 진짜 힘들어. 진짜 딱 한 번만 들어주면 안돼? 부탁할게.."

 

 

 속사포처럼 말하는 은우에 빈이 어버버거렸다. 아마 정말 집앞으로 찾아올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빈은 이리저리 얼굴을 가렸지만 은우는 몇 초도 제대로 못보고 가려진 빈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빈아 그 사이에 야위었잖아. 볼살 없어진 것 봐. 그래도 밥은 잘 챙겨먹고 다녀야지."

 

 

"은우야..지금 그 말 하려고 온 거 아니잖아. 그러는 너는 왜 또 더 말라진건데. 아니 일단 어디라도 가서 말하자."

 

 

빈이 은우의 손목을 붙잡고 제 집으로 들어갔다. 저의 손목을 잡고 들어가는 빈의 모습에 은우가 또 한번 멍하니 끌려들어갔다. 은우의 눈에는 저를 잡고 가는 뒷모습이 놀이공원에서 저를 두고 가버리던 빈의 모습과 겹쳐서 보이는 것이리라. 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은우는 빈에게 절대 내기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빈은 은우에게 도대체 왜 내기로 자신을 만난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오늘이 오해를 풀 날이었다. 둘의 뒤로 뉘엿뉘엿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여 가고 있다.

 

 

 

 

 

 

 

 

 

*

 

 

 

 

 

 

 

 

"빈아, 내가 너를 내기로 다시 만난 건 맞지만 너랑 그날 만나게 된 건 진짜 내 인생의 행운이야."

 

 

 

 빈은 은우의 말을 듣고 볼이 화끈거렸다. 내기가 그런 내기였다니. 그럼 정말 처음부터 저에게 관심이 있던거였구나. 솔직히 빈은 은우와 떨어지고서 집에 오면서도 무슨 내기였는지가 궁금했지만 이미 멀어진 후에 그 내기가 무슨 내용일지는 안중에 없었다. 오해가 풀리고 나니 저가 너무 성급했던 건가 미안해졌다. 저에게 내기에 관해 말해주려던 은우의 말을 끊은 것은 저였다. 진실을 앞에 두고 외면해버린 격이었다. 그러나 이런 오해와 오해의 해결을 통해 빈과 은우는 불이 붙은 듯 전보다도 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추가된 습관까지도.

 

 

"빈아 빈아, 진짜 내가 널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야."

 

 

"아, 진짜 알겠으니까 그만 말하라고!"

 

 

 카페에서든 밥을 먹으러 음식점에 가든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서 은우는 시도때도 없이 빈의 귀에 대고 항상 저렇게 말했다. 빈이 고개를 휙 돌리고 주먹으로 콩콩 밀어낼 때까지도 은우는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빈을 바라보다가 활짝 웃으며 빈의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빈의 얼굴의 활활 타오르는 건 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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