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나무 아래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RUA
주제
잠은 다 잤나봐요 (구르미 그린 달빛)


내가 좋아하는 사람

누구일 거 같아?

 

 

 

 

 

벚꽃나무 아래

차은우 X 문빈

 

 

 

 

싱그러운 햇살과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 적당히 덥고 또 적당히 시원한 환상적인 체육대회. 이런 게 있을 리가 없지. 진짜 더워서 죽을 거 같다. 단합이고 뭐고 다 필요 없으니까 다 꺼지라고 해. 이딴 푹푹 찌는 운동장에서 순서나 기다리다 깔짝이고 나올 바에는 그냥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 드러누워 아이스크림이나 먹는 게 정신건강에 훨씬 더 이로울 거 같았다. 반티로 채택된 하와이안 셔츠는 이미 벗어던진지 오래였으나 그럼에도 더위는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학교라 차마 벗을 수 없는 흰색 반팔티를 펄럭이며 바람을 만들고 햇빛을 피하려 그늘진 스탠드 구석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아, 더워... 덥다는 말만을 반복하며 축 늘어져 있자니 별안간 몸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고는 뭐야!! 하고 외치니 나의 우렁찬 목소리에 놀란 듯 상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 쫄보는 대체 누구인가 싶어 고개를 들어 얼굴을 올려다보니 차은우였다. 

 

 

"아, 뭐야. 깜짝 놀랐네."

 

 

다시 맥이 빠져 스탠드에 앉자 은우가 많이 덥냐며 꽝꽝 얼린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뭐가 그리 차가운가 했더니 얼음물 때문이었구나. 건네받은 생수병의 뚜껑을 열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증은 해소되는 느낌이었지만 몸에 가득한 끈적함은 여전했다. 으으, 이게 무슨 5월이야. 한탄을 하며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들을 닦으니 은우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빈아, 많이 더워?"

 

 

볼에 손을 댄 채로 열을 확인하는 은우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열은 안 나는 거 같은데, 얼굴이 점점 붉어지네. 의무실 가서 쿨 시트라도 가져올까? 그리 물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은우의 행동에 당황해 말을 얼버무리다 고개를 뒤로 빼자 은우가 머쓱한 듯 웃었다. 

 

 

"땀이 흐르길래. 미안."

"어? 어, 내가 미안."

 

 

내 눈이 갈 곳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자 은우가 아무래도 많이 더운 것 같다며 쿨시트를 가져다준다고 의무실로 뛰어갔다. 안 그래도 된다며 잡고 싶었지만 지금 잡으면 뭔가 어색할 것 같아 점점 작아지는 은우의 등을 바라보며 애꿎은 손가락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그러고 있기를 몇분이 지났을까 등 뒤를 콕콕 찔러오는 것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1학년 자리에 있어야 할 민혁이 서 있었다. 

 

 

"형, 여기서 뭐해요?"

"뭐하긴, 더위 피하고 있잖아."

 

 

덩치도 산만한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아무렇지도 않게 앞담을 툭툭 내뱉는 민혁을 째려보니 민혁이 어깨를 들썩이곤 말했다. 그나저나 형 은우 형이랑 2인 3각 한다면서요? 어떡해요 형? 형 심장 터져서 죽는 거 아니에요? 반대편에 있는 1학년 석에서 여기까지. 굳이 먼 길을 행차하신 이유가 있겠구나 했는데. 아~ 내 속 긁으려고 온 거구나. 그런 민혁이 괘씸해서 얼른 가라며 운동장 쪽으로 등을 밀고는 쏘아붙였다.

 

 

"안 죽어! 안 죽으니까 얼른 너네 반 가서 응원이나 해!"

"형 진짜 매정하다. 우리 그렇게 내쫓을 거예요? 흑흑 따나 너무 슬포."

 

 

언제 온 것인지 불쑥 나타난 산하가 민혁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 척을 했다. 민혁도 산하의 장단에 맞춰 주듯 믿을 수 없다며 손으로 입을 막는 제스처를 취하더니 흐읍, 우리 산하 너무 슬프겠다. 빈이 형이 잘못했네. 하고 오바해서 말했다. 

 

 

"어, 내쫓을 거야. 얼른 가."

 

 

와~ 진짜 형이 모처럼 은우 형이랑 한다길래 우리는 형 심장 떨려서 죽으면 어쩌지 하고 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온 건데!! 유언장이라도 쓰라고 어? 그 뭐지? 보증? 해주려고 온 건데!!! 억울하다는 듯이 말해오는 산하의 등을 찰싹 때리고는 조용히 하라고 했다. 많이 아팠는지 산하가 맞은 등을 매만지며 민혁을 가리켰다. 아, 형!! 왜 나만 때려요!! 얘는요!! 

 

 

"아, 형 제꺼는 산하가 맞아준대요."

 

 

웃으며 장난에 동참한 민혁이 산하의 한쪽 팔을 잡자 내가 반대쪽 팔을 잡고 오른손에 후 입김을 불며 산하의 공포심을 자극했다. 산하야 이런 게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야. 곧 맞게 될 등짝을 손으로 문지르자 산하가 붙잡힌 채 잔뜩 쫄아서 으악, 형 한 번만 살려줘요. 한 번만!! 하고 빌어 왔다. 그런 산하에게 산하야,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거야. 라며 무슨 소린지 모를 얘기를 하는 민혁도 있었다. 

 

 

"자, 그럼 윤산하 군 준비하시고,"

 

"빈아, 뭐해?"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올려오는 인영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은우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와 그의 잘생긴 얼굴에 놀라 토마토 같이 얼굴만 달아오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민혁이 핑거스냅을 하며 형, 정신차려요. 정신. 하고 나를 불러왔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뭐, 뭐라고 했었지?"

"뭐하고 있었냐고."

"그냥, 그냥 얘기했어." 

"그래? 우리 좀 있으면 경기 시작하는데. 같이 가서 대기하고 있자. 쿨시트도 가져왔어."

 

 

쿨시트를 흔들며 내 팔을 붙잡아오는 은우였다. 그런 은우와 산하, 민혁이를 번갈아보다 은우의 손을 떼고는 말했다. 잠만. 얘네 자리에 보내 놓고 갈게. 먼저 가 있어. 그에 은우가 민혁이랑 산하를 한 번 쳐다보더니 알겠다며 몸을 돌려 운동장 쪽으로 내려갔다. 그런 은우가 멀리 떨어지자마자 민혁이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저 형도 완벽한 거 같으면서 다 보인다니까. 뭐, 보이긴 뭐가 보여. 어? 착한게? 은우 착한 거 누가 모른다고. 민혁의 말에 반박을 하자 민혁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렇게 티를 내면 뭐해요.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너 그거 욕이지. 두 주먹을 꽉 쥐고 몸 앞으로 내미니 둘이 차렷 자세로 반듯하게 서서는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런 둘을 뒤로한 채로 농구골대 아래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은우에게로 향했다. 

 

 

 

"빈아 얘기 잘했어?"

"응."

 

 

은우가 상자 속에서 쿨시트를 꺼내더니 이마에 착 붙여주었다. 나 진짜 괜찮은데. 네가 더우면 내가 더 미안하잖아. 아이, 뭐가 미안하냐. 뒷목을 긁으며 말하니 은우가 손목을 붙잡아 손을 아래로 내려주었다. 빈아 긁지 마. 덧나. 그러고는 쿨시트를 붙이느라 잠깐 올렸던 앞머리를 도로 내려 꼼꼼하게 정리해주었다. 

 

 

"너는 계주 하는데 우리 반 인원수가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나가 주는 거잖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괜히 발에 걸리는 돌부리를 약하게 툭툭 차고 있으니 은우가 환하게 웃으며 말해왔다. 그래도 고마워 빈아. 우리 아직 연습 많이 못 해봤는데. 연습 해볼래?

 

 

“연습?”

“응, 연습. 왜 혹시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해보자. 늦은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도라에몽 마냥 주머니에서 2인 3각용 밴드를 꺼낸 은우가 발목에 밴드를 감아왔다. 저기 나무 보이지? 저기까지만 갔다 오자. 어때? 라고 말하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은우 때문에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심호흡을 하다 겨우 고개를 끄덕이니 은우가 하나, 둘 하고 외쳐왔다. 그런 은우에 구호에 맞춰 발을 움직였다.

 

 

 

고개를 들면 바로 은우의 얼굴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었기에 긴장한 내가 여러 번 삐끗거린 거렸지만 그런 거 치고는 꽤나 빠르게 도착했다. 헐, 우리 진짜 잘 맞는다!! 하고 아이처럼 기뻐하는 은우에 그러게. 10년 우정 어디 안 가나보다. 하고 목을 탁탁 치자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은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목을 건드려서 그런가 싶어 목에서 손을 뗐는데도 여전히 심기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은우야,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1초 전까지만 해도 뭔가 마음에 안 들어 보였는데 어느새 활짝 웃고 있었다. 뭐지? 내 말 때문에 그런 가.

 

 

“뭐야 아무것도 아닌 게 어딨어.”

“여기.”

“진짜... 아, 혹시 더워서 그래? 햇빛이라도 가려줄까..?”

“어? 응..! 가려줘!”

 

 

은우가 고개를 쭉 내밀고는 가려달라며 해맑은 얼굴로 말해왔다. 손을 은우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 올려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두 손으로 막아주었다. 그런데 나보다 키가 몇 cm는 큰 은우에게 해주려니 뭔가 벌 받는 느낌도 들고 점점 팔이 아파와 버티다 못해 차은우. 하고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응? 왜 빈아? 팔 아파? 그만할까?”

“아니, 그건..아니고... 다리 좀 접어봐. 너 키가 너무 커.”

“앗, 응. 알았어.”

 

 

다리를 구부려 나보다 아래에 있는 은우에 한층 편안한 자세로 햇빛을 가려주었다. 시원해? 응! 시원해! 완전 좋아! 배시시 웃는 은우에 나도 웃음이 났다. 히히, 다행이다.

 

 

 

 

 

*

 

 

 

 

 

2인 3각 결과는 1등. 은우의 말대로 우리는 꽤나 잘 맞았고 삐그덕 거리는 다른 팀들보다 큰 차이를 보이며 빠르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앞으로 경기가 몇 개 안 남은 이 시점에서 지고 있던 청팀이 역전을 해 우세하게 되었다.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청팀인 민혁이는 경기가 끝나자마자 응원석에서 뛰쳐나와 기세만 잘 타면 우리가 완전히 이겨버릴 수 있다며 기뻐했다. 반면 백팀인 산하는 왜 여기서 이겨버리냐고 민혁의 옆에서 투덜거렸다. 그런 산하에게 히히 웃으며 나 잘했지. 하고 물으니 앞이 아닌 바로 옆에서 대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우리 빈이 잘했다.”

 

 

갑자기 들려온 은우의 목소리에 이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손길에 놀라서 어, 어. 하고 뒷걸음질을 하다가 묶여있는 발 때문에 엎어질 뻔한 것을 은우가 잡아주었다. 붙잡힌 허리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동공 지진만을 일으키고 있자 은우가 몸을 아래로 숙여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빈아, 잠깐만 기다려봐.”

 

 

그러고는 발에 묶인 밴드를 풀어주는 은우에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는 먼저 스탠드로 가겠다며 도망을 가려니 은우가 그런 나의 손을 붙잡아왔다.

 

 

“빈아, 어디가. 우리 집합이잖아.”

“지, 집합?”

“응. 명준 쌤이 아이스크림 나눠주신다고.”

 

 

덜덜 떨리는 심장에 아이스크림을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었으나 더운 날씨에 한줄기의 빛 같은 아이스크림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알겠다며 은우의 뒤를 졸졸 쫓아가는데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잔뜩 흘린 땀 때문에 끈적할 손이 걱정이었다. 은우가 기분 나빠하면 어떡하지. 걷느라 약간 흔들리는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손을 빼? 그냥 둬? 하고 머리가 터져라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놓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결국 손가락을 꼬물락 거릴 뿐 손을 빼내지 않았다.

 

 

 

 

 

*

 

 

 

 

 

"쌤의 피 같은 월급에서 나가는 아이스크림이니까 맛있ㄱ"

"아, 쌤 쭈쭈바예요?!"

“뭐, 뭐!! 월급쟁이인 나한테 뭘 더 바래!!”

“치.”

“어어? 문빈? 너 먹기 싫지?! 쌤이 네 것까지 다 먹는다?”

“아!! 저 그런 말 한 적 없거든요!!”

 

 

혹여나 명준 쌤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갈까 싶어 입에 급하게 넣었다. 투덜거리긴 했지만 입에 넣으니 시원 달달 한 것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으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뭐랄까 더위로 고생했던 것이 싹 날아가는 기분? 암튼 너무 좋아서 히히 웃으며 먹는데 삼분의 일 정도 먹어 치우니 아래에 뭉쳐있는 아이스크림이 나오지를 않았다. 빨리 먹고 싶은 마음은 큰데 아무리 이로 끙끙거려도 나오지가 않는 아이스크림에 화가 나 쭈쭈바가 터질 듯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안에 있던 아이스크림의 반 이상이 한 번에 위로 튀어 올라와 옷과 손 그리고 바닥에 다 묻어버렸다.

 

 

“으아아, 끈적거려”

 

 

먹던 아이스크림마저 바닥에 놓치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은우가 학생회 본부에서 물티슈를 가져와 내 손을 닦아주었다. 물론 애기네.라고 놀리는 것도 잊지 않고 했다. 그런 은우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쟤 지금 다 큰 남고딩한테. 그것도 181cm나 되는 나한테 뭐? 애기?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진짜. 그래서 애기가 아니라며 빼액 소리를 질러도 봤지만 제 말이 들리는 지도 않는지 순 애기라고 말을 해왔다.

 

 

“나 진짜 애기 아니거든!!”

“애기 맞잖아. 이렇게 다 묻히고 먹는데.”

“그, 그건 아이스크림이 다 꽝꽝 얼어 있어서 그런 거야..!! 나는 어? 시간 그거.”

“효율?”

“어, 그래 그거!! 그거 효율적으로 쓴다고 그런 거거든!!”

 

“그리구 사람이 시행착오도 겪어봐야지 잘 하는 거야!! 실패는 성공의 아버지!”

“어머니.”

“아 쨌든 나 애기 아니야!!”

“알았어, 알았어. 항복할게, 항복.”

 

 

은우가 두 손을 위로 들어 올리고 항복을 선언했지만 애기 취급한 것이 아직도 마음에 들지 않아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자 은우가 어떤 검은색 봉지를 들고 와서 빈아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흥, 안 들려.

 

 

“빈아, 아까 간 김에 고드름도 사 왔는데... 안 먹을 거야?”

 

 

고드름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팩 돌려 은우를 쳐다보자 은우의 손에는 고드름이 들려 있었다. 그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져 미간을 꿈틀거리자 은우는 어? 너 이거 이제 안 좋아해? 라며 안절부절 못했다. 아니, 엄청 좋아하는데. 왜 이제야 말했냐. 내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쉰 은우가 내 손에 고드름을 쥐어주더니 속삭이듯 말해왔다.

 

 

“사실, 쌤도 이거 산 거 몰라. 내가 몰래 샀어.”

“뭐야, 천하의 차은우가 고드름이 먹고 싶어서 몰래 샀다고?”

“응. 너 이거 좋아하잖아....”

 

 

몰래 사 온 것을 사죄의 의미로 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애초에 나 먹으라고 사온 거라고? 이 무한한 다정함과 선함에 무언가가 머리를 세게 치고 지나 간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빈아?”

“아, 어.... 고마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이 고드름을 먹어달라는 의미인 것 같아 포장을 뜯어 입 안에 얼음 몇 개를 털어 넣었다. 입안에 가득한 새콤달콤한 맛과 시원한 냉기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자 은우가 아이 잘 먹네. 하구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은우에게 애기 취급은 진짜 그만하라고 으름장을 놓자 화난 고양이 같다고 말해오는 은우에 으으 몰라 나도.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얘는 맨날 나 놀려.”

 

 

부리 입을 툭 내밀고 투덜거리니 그런 것이 아니라며 저를 잡아오는 은우에 삐진 걸 풀까도 생각했으나 그 찰나에 학생회 임원 하나가 찾아왔다.

 

 

 

“은우 선배, 본부 와보셔야 할 거 같은데요.”

“응? 왜?”

“그게, 선생님이 찾으셔서요.”

 

"그래? 알겠어. 빈아, 나 빨리 갔다 올게."

"응. 갔다가 오지 마."

"알았어. 금방 올게."

 

 

 

 

 

*

 

 

 

 

 

오지 말라고 틱틱 거리는 내 말에도 환하게 웃으며 금방 오겠다고 말하던 차은우는 벌써 몇십 분째 올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워낙 유능해서 그런가 본부석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바쁘게 일하는 은우에 뭐 그럴 수도 있다고 그를 이해하려 해 봤으나. 이것만큼은 이해가 안 갔다. 왜 쟤는 자꾸 은우 뒤를 졸졸 쫓아다녀?! 아까 은우를 데리러 온 후배가 계속 은우 옆에 붙어 떨어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진짜 뭐야. 붙어있는 둘에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아무것도 없는 흙바닥을 운동화로 툭툭 찼다. 화가 풀리기는커녕 흙먼지만 잔뜩 날려 켈록이느라 기분만 더 나빠졌다. 재미도 없고, 짜증나고. 이제 뭐하냐.

 

 

기다리다, 기다리다 너무 심심한 나머지 민혁이와 산하가 있는 1학년 석으로 몸을 틀었다.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백팀이 이긴다, 청팀이 이긴다로 투닥거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야, 이번 종목은 뭐냐? 고새 얼음 소래를 들었는지 한 입만 달라는 애들을 떨어트려놓고 뭐냐니까? 물으니 심통이 난 산하가 형 짝남 나오는 미션 달리기요. 하고 말을 해왔다. 그런 산하의 목에 헤드락을 걸었다.

 

 

“앙? 재밌냐? 재밌어??”

“악, 탭탭, 탭!!!”

 

 

 

“형, 형 시작해요.”

 

 

시작한다는 말에 산하의 목에서 손을 떼고 스타트 라인을 바라보니 정말 은우가 출발선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뭐야, 차은우. 바로 다음 경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중얼거리는 사이에 출발 신호탄이 울리고 출발선에 서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긴 다리로 잘도 달리는 은우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얼굴 천재 차은우. 역시는 역시다. 전력질주로 뛰어다녀도 여전히 잘생겼다. 땀을 흘려도 잘생기고, 머리카락이 흩날려도 잘생겼어. 어쩜 저렇게 잘생겼지. 머릿속으로 주접이란 주접을 다 떨고 있으니 어느새 미션함이 있는 중간지점에 도달한 은우였다. 13명의 선수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상자 안에서 쪽지를 꺼내 읽은 은우가 3학년들이 모여 있는 스탠드 쪽으로 가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1학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뭐야 쟤 왜 여기로 와. 하고 어리둥절해 있으니 점점 가까워지던 은우는 이내 스탠드 위로 올라와 내 앞에까지 섰다. 그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빈아, 가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내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고 묻자. 태연한 얼굴로 너 데리러 왔는데? 쪽지 대상. 하고 답해오는 은우였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내 손목을 붙잡고 맑은 얼굴로 같이 가줄 거지? 물어오는 은우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 였다. 대체 뭐길래 나를 데려가?

 

 

“야, 차은우 뭔데. 왜 나 끌고 가는데.”

“....”

“거기 뭐라고 나와있는데.”

“....”

 

“내 말 씹냐?”

“응.”

 

 

중앙에 있는 학생회 본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해서 물었지만 은우는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아, 내 말 씹냐는 물음에는 응 이라고 대답해줬다. 이런 먹금 장인... 완전 너무했다. 그래도 우리의 착한 학생회장님을 믿고 본부석으로 향했건만....

 

 

은우나 진우 형이나 야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믿은 진우 형은 은우가 건넨 쪽지를 보더니 차은우 1등. 하고 등수만 외칠뿐 쪽지 안의 미션이 무엇이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진우 형!! 알려줘!! 알려줘요!! 하고 찡얼거려 보기도 했으나 형은 손을 휘저으며 훠이훠이 다음 애들 온다. 하고 나를 내쫓아버렸다.

 

 

옆에 서 있는 은우를 빤히 쳐다보았지만 은우 또한 고개를 돌리면서 나도 잘 모르겠네. 라며 능청스럽게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야아!! 우리 우정이 어?! 몇 년인데!! 은우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려봤지만 차은우 이 똥고집에 황소고집. 안 알려준다고 하면 정말 끝까지 안 알려주는 놈이라 도저히 이길 수가 없었다.

 

 

은우는 오히려 다음 종목 계주잖아. 스트레칭 안 해? 이런 말이나 하며 계주 주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라며 닦달을 해댔다. 그런 은우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입술을 툭 내밀고 청팀 주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다 등을 훽 돌렸는데 차은우는 그새 반 아이들에게 둘려 싸여 있었다. 남녀 따질 것 없이 다 은우야, 은우야. 하고 은우 이름만 불러오는 중이었다. 뭐야. 차은우. 너 지금 쟤네랑 놀려고 나 버린 거지? 그런 거지? 진짜 개새끼. 짜증나. 씨익거리며 발을 크게 구르자 민혁이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하지만 민혁의 물음에 대답해주기에는 내 정신은 온통 은우에게로 쏠려있었고. 화가 난 나는 나쁜 차은우, 못된 차은우 만을 반복하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

 

 

 

 

 

체육대회의 하이라이트이자 꽃인 계주. 1, 2, 3학년 통합 종목이고 청팀과 백팀으로 나누어져 경쟁을 하는 마지막 경기였다. 점수는 무려 500점으로 여기서 잘못해서 진다면 역전패를 당해 종합우승을 못할 수도 있는. 그런 중요한 경기였다.

 

 

이것만 이기면 일등이다. 처음엔 덥다고 이게 뭐냐며 귀찮아했지만 맡은 이상 최선을 다한다. 이게 문빈 신조다. 그리고 이것만 이기면 일등 확정이니까 명준 쌤이 상품권으로 맛있는 거 사주겠지!! 그럼 고기 사달라고 해야지!! 눈에 그려지는 핑크빛 자태의 아름다운 고기를 생각하며 심호흡을 했다. 반바퀴. 선두로 달려오는 민혁이를 눈으로 좇았다. 반 바퀴만 더 돌면 나한테 바통이 온다.

 

 

“형!! 받아!!”

 

 

민혁이 손을 뻗어 바통을 건넸고 그 바통을 받아 진짜 죽을 듯이 달렸다. 본 경기 때에도 이렇게 달려 본 적은 손에 꼽았는데. 이게 다 고기의 힘이었다. 뒤를 힐끔 쳐다보니 거리 차이가 한참이나 나 있었다. 맞아, 나 이래 봬도 육상부 에이스라니까. 조금만 더 달리면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결승지점에 좀 더 속도를 내는데 옆에서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아 힘내!! 하는 그 목소리가 차은우와 닮아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보니 내 이름을 외치고 있는 사람이 차은우가 맞았고 나는 놀란 마음에 발목을 삐끗해 흙바닥에 슬라이딩을 하고 말았다.

 

스탠드에선 일제히 탄식의 소리가 나왔다. 제대로 삐끗한 듯 욱신거리는 발목을 잡고 겨우 일어나니 이미 뒤에까지 따라붙은 백팀 주자에 이를 악 물고 달렸다. 삐끗한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발목이 저릿 거리는 느낌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여기서 이렇게 질 수는 없었다. 1등도 못하고, 고기도 못 먹고 자존심도 왕창 상하고. 아무리 아파도 그럴 수는 없었다.

 

 

다행히 결승점이 다 와가는 지점에서 넘어진 것이라 무사히 1등으로 들어가고 청팀이 이겼다. 그렇지만 전교생이 다 보는 앞에서 넘어진 것이라 너무 쪽팔린 나머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달려 나오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아파서 걷기도 힘든 다리를 끌고 스탠드 구석으로 도망가려 하니 언제 온 것인지 은우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문빈, 어디가.”

 

 

갑자기 성을 불러오는 은우에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은우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다리에서 피나.”

“알아, 괜찮아.”

“안 괜찮아 보여.”

“괜찮다니까.”

 

 

“피가 이렇게 철철 나는데?”

 

 

은우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화가 나도 제대로 났구나 싶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은우가 한 걸음 다가와서 말했다.

 

 

“의무실 가자. 치료받게.”

“이 정도는 금방 나아.”

  

 

끝까지 안 가겠다고 버티니 은우가 자꾸 그러면 들쳐 매고 갈 거라며 협박을 해왔다. 평소 같으면 웃어넘기겠지만 정말 나를 들쳐 맬 듯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해오는 은우에 결국 항기를 들어 올렸다.

 

 

“아, 진짜! 간다 가!!”

 

 

은우의 부축을 받아 걷는데 발을 내딛을 때마다 찌푸려지는 인상에 은우가 걸음을 멈췄다. 너 괜찮다며 발목은 또 왜 그래. 그런 은우의 말에 아, 별거 아니야. 하고 한 걸음 내딛으려 하니 은우가 말했다.

 

 

“업혀.”

“진짜 별거 아니야. 그냥 근육이 놀라서 그래.”

“그러니까 업혀. 계속 걷다가 잘못되면 어떡해. 그리고 별거 아니라기에는 지금 당장 아프잖아. 아프니까 찌푸린 거잖아.”

 

“....”

“얼른. 업혀도 괜찮아.”

 

넌 괜찮겠지만 난 안 괜찮거든요. 업히는 거 자체가 되게 밀착된 자세고 잘못하면 심장소리까지 다 들릴 그런 자세인데. 어떻게 괜찮냐고. 울상도 지어봤지만 은우는 이미 등을 보인 채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은우에게 다가가 엉거주춤 주저앉고 은우의 목에 팔을 거니 은우가 허벅지를 잡아 나를 들어 올렸다. 종이 한 장만이 들어갈 정도로 밀착한 몸에 긴장이 돼서 숨 쉬기 조차 힘든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은우의 귀에 뻔히 들릴 테고 그렇다고 조금 들이마시면 과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에 내가 숨쉬기가 힘들었다.

 

 

은우가 읏차 하고 업는 자세를 고치자 몸이 앞으로 기울어 은우의 목덜미에 코를 박게 됐다. 분명 얘도 땀을 흘렀을 터인데 은우의 목덜미에서는 은우 특유의 향기로운 체향이 느껴졌다. 향긋한 봄 내음보다 감히 더 향기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

 

 

 

 

 

멀게만 느껴졌던 의무실에 겨우 도착해 배드에 앉으니 진찰을 해주셔야 할 보건 선생님이 바쁘셨다. 선생님이 어어, 잠깐만.이라는 말을 하신지 5분이 지나자 은우가 바쁘게 돌아다니시는 선생님 곁으로 다가갔다.

 

 

“선생님 많이 바쁘세요?”

“어어, 지금 피가 좀 많이 나는 애가 있어서. 1학년 꼬맹이인데. 상처가 꽤 커.”

 

 

미안하다는 표정을 한 선생님께서 트레이에 약과 거즈를 정신없이 챙기시고는 한쪽 구석에 누워있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상처가 꽤나 심한 듯 배드 옆의 커튼을 치던 선생님께서 전에 선반 위에 있던 가위를 드시더니 누구였지? 아, 은우가 빈이 치료 좀 해줄래? 하고 말을 해왔다. 알겠다는 은우의 대답에 선생님은 부회장을 믿는다는 말과 함께 커튼을 완전히 치셨다.

 

 

궁금한 듯 고개를 쭉 빼고 보다 은우가 다시 내 쪽으로 오자 재빨리 부루퉁한 표정으로 바꿨다. 필히 빠른 귀가를 위해서였다.

 

 

“나 그냥 갈래.”

“뭘 그냥 가. 혹시 나 못 믿어?”

“아니, 그건 아닌데...”

“살살해줄게. 일단 기다려봐. 흙바닥에 넘어졌으니까 소독 좀 하고 약 바르자.”

 

 

반대편 배드에 기대앉아있던 은우가 일어서서 소독약을 찾아오더니 상처 부위에 그대로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아악!! 아프잖아!! 뭐 하는 거야!!”

“소독한 거야. 소독.”

“살살 좀 해달라고!!”

“미안, 근데 살살하고 있어.”

 

 

은우는 그렇게 얘기하며 상처 주위에 묻은 피와 소독약을 휴지로 닦아주고는 트롤리 카트 위에 있는 연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더니 연두 빛의 작은 연고와 면봉을 가져왔다.

 

 

“그렇게 꼼꼼히 안 해도 되는데.”

“안돼. 덧나면 어떡할 거야.”

 

 

대충 하라는 내 말에도 절대 안 된다며 면봉으로 연고까지 꼼꼼히 발라주고 크기가 넓은 밴드를 찾아와 상처부위에 붙여주었다. 제대로 붙으라며 밴드를 꾹 누르는 은우 때문에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어, 빈아 많이 아파?”

“안 아파!! 안 아프다고!!!”

 

 

안 아프다며 소리를 빼액 지르니 은우가 알겠다며 얼음을 가득 담은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발목에 대어주었다. 그런 은우를 쳐다보다 그냥 파스 뿌리고 끝내지? 하고 물으니 은우가 고개를 내젓고는 말했다.

 

 

“안돼 빈아. 그래도 찜질은 해야지.”

“알았어.”

 

 

침대 헤드에 기대 얌전히 앉아 있으니 은우가 창문 너머로 밖의 상황을 살피다가 배드에서 일어났다.

 

 

“빈아, 여기 있어.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올게.”

“어? 나도 같이 가.”

“발목이 그런데? 그냥 앉아있어. 내가 종례 받고 너 가방까지 챙겨올게.”

 

 

야아, 차은우! 하고 은우의 이름을 불렀으나 은우는 이미 뛰어가고 없었다. 하여튼 걱정 쟁이.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얼음주머니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배드에 벌러덩 누웠다.

 

 

그렇지만 걱정해주는 행동들이 싫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좋았다. 그도 그럴게 좋아하는 사람이 걱정해주는 것인데 안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냐고. 엄청난 망신이었지만, 은우를 더 많이 봤으니까. 그럼 된 거지 뭐. 한결 편안해진 마음에 편안한 자세를 찾기 위해 뒤척이다가 갑자기 생각났다.

 

 

“아 나 고기 사달라고 해야 하는데!!!”

 

 

놀란 마음에 상체를 벌떡 일으켰으나 꾸역꾸역 걸어가면 저 똥고집이 엄청 화낼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의무실 밖으로 나가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 그래, 쌤한테는 내일 말하면 되지. 뭐, 어차피 내일 또 보는데. 그렇게 말하며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선풍기의 바람이었지만 과하지 않게 불어오는 바람과 시원한 의무실의 공기에 기분이 좋아 지금 이 공간을 느끼자며 눈을 감았다.

 

 

 

 

 

*

 

 

 

 

 

으음, 절로 떠지는 눈에 뭐지? 싶어서 눈을 껌뻑이니 사방이 어두웠다. 뭐야, 차은우 나 버리고 간 건가? 아직 제대로 들지 않은 정신에 침이 잔뜩 묻은 입가를 닦고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엥? 가까이 보이는 이불에 선반에 여기는 아무리 봐도 내 방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기억을 더듬어 스위치가 있을 자리에 서서 벽을 더듬으니 스위치가 만져졌다. 헉, 뭐야. 하고 버튼을 누르니 반짝이며 전등이 커졌다.

 

배드에서 그대로 잠들었었던 거 같은데 일어나 보니 내 방 침대다? 너무 놀라서 허둥지둥 폰을 확인하니 은우에게서 카톡이 잔뜩 와 있었다.

 

 

 

17:01 빈아, 너 잠들어서

17:02 내가 집에까지 업어갔어.

            휴대폰은 침대 옆에 놨고.

            옷은 잠옷으로 갈아입혀놨으니까. 

            잘 자.  

17:03 아, 그리고 가방은 의자 위에 올려놨어. 

 

 

 

옷은 잠옷으로..?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다가 내가 입고 있는 것이 체육복이 아닌 잠옷이라는 것을 깨닫고 경악을 했다.

 

 

“아악!! 그러지 말걸!! 그냥 혼자 토껴서 집에 올 걸!!!”

 

 

인생에서 후회하는 일 TOP 5에 꼽을만한 일이었다. 진짜 내가 왜 그랬을까, 왜 잠들었을까. 침대에 고개를 박고 쉴 틈 없이 후회를 하다 보니 오늘 아침 입은 팬티가 생각이 나 사색이 됐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하고 바지를 살짝 들춰보니 시발, 트렁크다. 맨날 드로즈만 입다가 다 빨아서 딱 한번. 오늘 딱 한 번 중학생 때 입던 줄무늬 트렁크 바지를 입은 것인데. 진짜 옛날에 입던 걸 꺼내 입은 것인데. 왜 하필 오늘.... 부끄럽고 쪽팔리고 진짜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점점 달아오르는 귀에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 진짜 이불 킥 각이다... 한 456번은 넘게 할 각이다...

 

 

울 것 같은 마음에 노래로 진정이라도 시켜보자고 휴대폰을 다시 드니 그 아래로 카톡이 또 여러 개 있었다. 

 

 

 

19:25 빈아, 아직도 자? 

20:46 빈아 일어나면 톡 해줘. 

21:33 빈아 자는 거 맞지?? 내 톡 씹는 건 아니지? 

22:22 일어나면 꼭 연락해줘ㅠㅠ 상처 괜찮은지 궁금해ㅠㅠ 

22:23 (이모티콘) 

22:30 (이모티콘)

 

 

 

“많이도 보내 놨네...”

 

 

카톡에 답을 할까 하다가 이내 폰을 껐다. 지금 시간이 오전 1시인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범생이 차은우는 지금 이 시간이면 자고 있겠지. 그냥 내일, 아니 오늘 일어나서 직접 말해주자.

 

 

할 것도 없고 내일 오후 훈련을 생각하려면 얼른 자야지 싶어 다시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눈을 감고 있자니 자꾸만 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코끝에서는 그의 체향이 느껴지는 듯했다. 근데 그런 애한테 트렁크를... 시발!!! 진짜 미치겠다.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오늘 잠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다 차은우 때문이었다.

 

 

홧홧해진 얼굴의 열기라도 식히려고 침대 옆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같은 층, 다른 건물. 건너편에 사는 은우의 방은 불이 꺼져있었다. 역시 자고 있네. 은우의 방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옮겨 검은 밤하늘 속 혼자 달빛이 혼자 빛을 내고 있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하늘을 달 혼자서 빛내고 있었다. 그 넓은 하늘을 말이다.

 

 

그런 기특한 달을 바라보며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정말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에 창틀에 고개를 기대고 홀로 떠있는 달을 보고 있자니 달에 은우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놀라서 으아, 하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봤지만 저번 수학여행 일탈 때 내 귓가에 속삭이던 은우가 또 생각날 뿐 나아진 점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너는 달, 나는 해 같다.’라고 말해오던 차은우. 머릿속이 온통 차은우로 가득했다.

 

 

“아아악!! 그만 좀 나와!!”

 

"뭐가 나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리니 은우가 창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에 놀라 어? 어?! 하고 벌떡 일어섰다가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고 부딪쳐서 아픈 머리를 감싸다 이불을 밟고 스텦이 꼬여 우당탕탕 넘어져 버렸다. 건너편에서는 놀랐는지 빈아 괜찮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넘어질 뻔한 거 또는 넘어진 게 오늘만, 정확히 말하면 오늘이 아니긴 하지만 쨋든 오늘만 벌써 3번째였다. 하..진짜 왜 이렇게 쪽팔리냐.. 그렇지만 나 쪽팔려요. 하고 티른 내는 것이 더 그래서 떨어질 때 같이 떨어진 이불을 주섬주섬 들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침대 위로 올라가서 앉았다.

 

 

“뭐 잠깐 떨어트린 거야.”

 

의미 없는 변명을 한 후 머쓱한 척 목을 탁탁 치니 은우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했다.

 

 

“아닌 거 같은데? 놀라서 넘어진 거 같은데.”

 

 

그런 은우가 괘씸해서 괜히 놀려주고 싶었다. 어?! 차은우 뒤에!! 뒤에!! 하고 은우가 뒤를 돌아본 사이에 으악!!! 하고 소리를 쳐서 은우를 놀래켰다.

 

 

“와아아악!!”

“와앜ㅋㅋㅋㅋㅋㅋ 차은우 겁쟁이ㅋㅋㅋㅋㅋㅋㅋㅋ”

 

 

놀라 비명을 지른 것도 모자라서 바닥에 쿵하고 떨어진 은우에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랬더니 창피한 듯 붉게 볼을 붉힌 은우가 너도 그랬잖아. 라며 삐진 척을 해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배를 잡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와아아악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는 그 표정이 잊히지가 않아서 계속 웃음이 나왔다.

 

 

“진짜 너무해. 내 톡도 다 씹고. 나 놀리기나 하고.”

 

 

입이 대빨 나온 은우에게 미안, 미안. 자는 줄 알았어.라고 사과를 하자 은우가 그래도 답을 해달라며 찡얼거렸다.

 

“알겠어, 앞으로 그렇게 할게. 근데 웬일이야? 너 원래 이 시간에 자잖아.”

“그냥, 잠이 안 와.”

“왜? 무슨 고민 있어?”

 

 

평소 고민이나 걱정거리가 있으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은우였기에 놀라서 물어보니 근심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떻게 알았어?”

 

 

꽤나 심각해 보이는 은우의 표정에 왜, 무슨 고민인데. 하고 진지하게 물으니 은우가 우물쭈물하더니 말을 해왔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고백을 못 하겠어서.

 

 

좋아하는 사람의 좋아하는 사람. 그 존재를 듣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은우는, 역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눈물이 찔끔 나올 것도 같은데 굳이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춘 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그게 누군데..?”

“그게...”

“얼른, 누군지 알아야 어떻게 고백을 할지 궁리하지.”

 

 

내가 재촉을 해오자 은우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은우에 침을 꿀꺽 삼키고 그의 모습에 집중을 하니 그가 별안간 푸흣,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싱글싱글 웃는 낯으로 되려 나에게 물어왔다.

 

 

“누구일 거 같아? 맞춰봐 빈아.”

 

 

그런 은우의 행동에 갑자기 울컥했다. 아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나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눈물도 쏟을 뻔했는데. 저 새끼는 아무것도 모르고 환하게 웃잖아. 내가 지 좋아하는 거 알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갑자기 끓어오르는 화에 소리를 치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밖에선 당황한 은우가 어? 어?! 빈아!! 빈아 왜 그래!! 빈아 잠만 창문 좀 열어봐!! 빈아!! 하고 내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이내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지잉- 울리는 휴대폰 때문에 마음이 더 심란해지는 것 같아 휴대폰의 전원을 완전히 꺼버리곤 옷더미 속으로 던져버렸다.

 

 

나쁜 차은우, 못된 차은우.

 

 

눈물이 뚝뚝 흘렀다. 진짜 고민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 지 좋아하는 사람 얘기하려고 이런 거였어. 진짜 나빠. 못 됐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벅벅 닦고는 팔을 얼굴 위에 올렸다. 한바탕 눈물을 흘렸음에도 여전히 심란한 마음에 잠도 자지 못하고 진짜 못 됐다며 은우를 원망하고. 그로 인해 내가 상처를 입는 과정을 새벽 내내 반복할 뿐이었다.

 

 

 

 

 

*

 

 

 

 

짹짹- 

 

 

새소리만이 들려오는 이른 아침. 한숨도 자지 못해 졸린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가니 아침잠이 별로 없는 가족들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희귀한 광경에 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셔 선 같이 밥 먹으려고 일어난 것이냐며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물으셨다. 금방이라도 밥그릇을 꺼내실 것 모습에 아니요. 그냥 일찍 등교하려고 일어났어요. 하고 곧장 현관으로 나가니 동생이 따라 나와선 신발장에 기대곤 물었다.

 

 

“니가 어쩐 일이냐? 은우 오빠 없으면 일어나지도 못하던 놈이?”

“내 맘이거든?! 그리고 차은우 없어도 다 일어날 수 있는데 그냥 좀 더 자려고 잔 거 거든!!”

 

 

꿍얼거리곤 부러 쿵쿵거리며 현관을 나가니 동생이 허, 개소리한다. 라며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쁜 동생. 나도 혼자 일어날 수 있거든! 닫힌 현관문을 노려보다가 얼른 가야겠다 싶어 하품을 하면서도 걸음을 빨리했다. 학교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봐야겠지만 당장은 은우 얼굴이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마다 깨우러 오는 은우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찍 나온 것인데 걸음이 늦어 중간에 은우를 만난다면 그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걸음을 더 빨리 재촉하였다.

 

 

항상 둘이 함께하던 이 길을 혼자 걷는 기분이 이상했다. 둘에서 하나로 줄었다고 뭐가 그렇게 낯설어질까 싶었는데. 항상 걷던 이 길이. 새로 마주한 길처럼 모든 게 낯설었다.

그리고 외로웠다.

 

 

은우한테 애인이 생기면, 앞으로는 당연해지겠지. 생각할수록 흰 종이에 어두운 먹물이 스며들 듯 생각할수록 점점 암흑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우울한 마음에 아무도 없는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 책상에 엎어졌다.

 

 

 

은우, 차은우.

내 친구.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리고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그럼에도 보고 싶은 사람.

차은우.

 

 

나는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다.

 

 

 

 

 

 

 

*

 

 

 

 

 

 

 

“으아아, 잘 잤다.”

 

 

책상에서 자느라 찌뿌둥한 몸을 쭉쭉 피고 나자 교실 정 가운데에 걸려있는 시계가 눈에 띄었다. 12시가 훌쩍 넘은 시간. 한숨 자고 일어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덜 풀린 양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보니 책상 위에 작은 메모지와 네스퀵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뭐지 싶어 읽어보니 은우가 쓴 쪽지였다.

 

 

 

빈아, 미안해. 

어제 내 말 많이 불편했어? 

너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친 건데. 많이 불편했다면 미안해ㅠㅠ 

푹 자고 일어나서... 네스퀵 먹고 화 풀어주면 안 될까? 

원한다면 몇 개고 더 사줄게ㅠㅠㅠ

비나아ㅠㅠ 제발 나 너 없으면 못 살아ㅠㅠ 

진짜 다음부터 다시는 안 그럴게. 제발 한 번만 봐주라ㅠㅠㅠ

 

 

 

“치, 차은우... 내가 많이 상처 받았지만 귀여워서 봐준다. 진짜.”

 

 

은우의 쪽지에 기분이 좋아져선 받은 쪽지를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고 책상에 놓여있는 네스퀵을 집었다. 후훙, 괜히 웃음이 나는 바람에 콧노래를 부르며 빨대를 뽑아 콕하고 구멍에 꽂았다. 언제 먹어도 맛있는 달달한 초코우유에 기분이 붕붕 뜨는 느낌이었다.

  

 

“은우 또 학생회실 갔나?”

 

 

사과를 받았으면 나도 사과를 하는 게 도리지. 웅웅. 어젯밤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를 하기 위해 학생회실 까지 친히 가줬더니. 이게 뭐야. 은우가 어제 그 애랑 같이 서 있었다. 후배라던 그 애랑. 그런데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 있지. 근데...

 

 

그 후배가 은우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은우가 그 후배의 이름을 부르며 고맙다고 활짝 웃었다. 세상에 저런 미소를 지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미소를 지으면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둘 사이에 웃음꽃이 피고 난리도 아니었다.

 

 

 

허, 장난이라더니. 다 뻥이었던 거지?!

 

 

화가 나서 먹던 네스퀵을 손으로 구겨 아무 쓰레기통에나 쑤셔 넣었다. 생각보다 거칠게 나간 행동에 철제 특유의 소리가 났다. 큰 소리가 났으니 은우가 이쪽을 쳐다볼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날 또 속였다는 배신감에 닦지 않은 눈물들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동그란 원을 만들었다.

 

 

아니, 사실은 눈물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나도 많이 아픈데 왜 울면 안 돼? 그치만 차마 은우의 얼굴은 도저히 보지 못 할 거 같아 등을 돌리고 빠르게 복도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새 나를 본 것인지 차은우는 내 이름을 불러왔다.

 

 

“빈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를 치고는 숨이 막힐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달렸다. 어제부터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

 

 

 

 

 

달리고, 달리다 보니 학교 뒤편에 있는 벚꽃나무 아래까지 와버렸다. 완전 구석진 곳이라 사람이 많이 안 오는 곳에 하나뿐인 삐걱이는 나무벤치에 앉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벚꽃 잎들이 벚꽃이 만개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광경이겠지만 도저히 올려다볼 수가 없었다. 지금 이 기분에 그런 아름다운 꽃을 봐버리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발아래에 떨어진 구겨지고 찢어진 벚꽃 잎들만 보았다. 되는 것 하나 없는 이 상황에 짜증 난다며 발을 휘저으면서도 그 벚꽃 잎들은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얘도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꽃이 피었으면 언젠가는 떨어지겠지만, 이렇게나 빨리 떨어지니. 나는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도 그랬다. 오래 함께했으나 좋아하기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다. 근데 이렇게나 빨리, 금세 나가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하지 말걸. 사랑하지 말걸. 벚꽃들도 떨어져서 사람들한테 밟힐 때 이런 후회를 할까? 왜 벚꽃으로 태어났을까, 왜 떨어져야만 하는 운명일까.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고개 위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헉, 헉. 빈아, 너 너무 빠르다. 후우,”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제가 조금이라도 제 생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어떻게 알고 기가 막히게 쫓아온 은우에 짜증 난다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기괴하게 들리는 삐걱이는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빈ㅇ,”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리고 나 쫓아오지도 마.”

 

 

은우에게 으름장을 놓고선 다른 곳으로 가려고 걸음을 내딛으니 은우가 옷자락을 붙잡아왔다. 그러고는 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심통이 났느냐고 물어왔다. 심통... 나는 정말 진지했는데 이런 내 마음을 심통으로 치부하는 은우에 억누르고 있는 것이 폭발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빈아, 말을 해줘. 말을 해줘야 알지. 응?”

“....”

 

“말 좀 해줘, 빈아.”

“겨우 심통, 그딴 거 아니야. 다, 네가 한 짓 때문이야.”

“나?”

“그래 너. 네가 나한테 거짓말했잖아.”

 

 

그러자 화들짝 놀라서 내가?라고 되묻는 은우에게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이 나쁜 놈아!! 왜 모른 척 해?! 내가 이미 다 봤거든!! 너 아까 어떤 예쁜 후배랑 웃고 있었잖아. 너, 너 걔 좋아하는 거잖아!!!”

 

 

사그라들지 않는 분에 씩씩거리며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으니 은우가 배꼽 잡고 웃어댔다. 진짜 이 새끼가 미쳤나. 싶어 주먹을 갈길까 하는데 은우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어이없는 한 단어였다. 오해.

 

 

“빈아 그거를 오해한 거였어?”

“오해? 오해애?”

“빈아 그거 그냥 후배가 나한테 초콜릿 준거야.”

“초콜릿을 왜?!”

“서기 일 도와줘서 고맙다고 보답으로 받은 거야. 진짜야. 내 손가락도 걸 수 있어.”

 

 

손가락도 걸 수 있다며 말해오는 은우의 이야기는 사실인 듯했다. 방금까지 눈물 뚝뚝 떨궈가며 오해하고 실망했던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런건진...몰랐어. 미안...”

“근데 빈아, 너 방금 질투한 거 맞지. 그치?”

“뭐, 뭔 소리야.”

 

 

당황해 말을 더듬으니 은우가 다 안다는 표정으로 왜, 내가 걔 좋아할까 봐 겁났어? 하고 물어왔다. 이 말이 왜 인지 모르게 나를 놀리는 것 같았다. 너 나 놀리냐?! 하고 소리를 치니 은우가 해맑게 웃으며 말해왔다.

 

 

“아니. 질투 맞았으면 해서.”

“어?!”

 

 

내가 어제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 사실 진짜 있어. 은우의 어이없는 실토에 너, 너!!!! 하고 손가락으로 은우를 가리키니 이 답답한 놈이 어제 했던 말을 또 하고 앉아있었다.

 

 

“근데 그거 누굴 거 같아?”

“내가 어떻게 아냐고!!”

“진짜 모르겠어?”

“몰라!!”

 

 

왜 자꾸 저 이야기를 반복하는지 화가 나서 몸을 홱 틀어 교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 빈아. 내가 어제 미션 달리기 때 무슨 쪽지 받았을 거 같아?”

 

 

자꾸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질문만 하는 은우에 빡쳐서 아니, 너 자꾸 이상한 말만 할 거야?! 하고 버럭 화를 내니 은우가 갑자기 뒷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그마한 크기의 쪽지를 꺼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내게 쪽지를 펼쳐서 보여주었다.

 

 

쪽지에는 좋아하는 사람 데려오기!라는 10글자의 문장이 쓰여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게 무슨 뜻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러니까, 이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고?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도 머릿속에 입력이 안 되는 느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쪽지만 바라보고 있으니 은우가 입을 뗐다.

 

 

“이거, 좋아하는 사람 데려오는 미션이었어.”

 

 

사고가 완전히 정지된 느낌에 어버버 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으나 입에서는 어, 어..? 하는 얼빠진 소리만이 나왔다. 그러자 은우가 손을 뻗어 볼을 쓰다듬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 너라고. 문빈, 너.”

“히끅, 왜 이ㄹ, 히끅.”

 

 

갑자기 툭 튀어나온 딸꾹질에 당황하며 히끅 거리자 은우가 다정한 손길로 등을 두드려주었다. 거기에 덧붙여 빈아, 그렇게 놀라워? 물어오는 은우였다.

 

 

“이, 이 못된 차은우!!”

 

 

은우의 가슴팍을 치며 히끅거리자 은우가 그렇게 치면 아프다고 맞은 부분을 문질렀다. 그런 은우의 가슴팍을 한 대 더 때려주었다.

 

 

“넌 맞아도 싸.”

“알겠어. 내가 다 잘못했어. 근데 대답은?”

 

“나는 너 좋아하는데 너는?”

“너, 이미 다 알고 있잖아..!!”

“그래도 빈이 네가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어. 직접 듣고 싶어.”

  

 

눈을 반짝이며 말해오는 은우에 순 나쁜 놈이었다며 웅얼거리기도 했지만 나는 이미 차은우의 계략의 빠진 어린양이었기에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찬찬히 심호흡을 한 후 눈을 꼭 감고 외쳤다.

 

 

“나도 너 좋아해!”

 

 

두 눈을 꼭 감은 채로 가만히 서 있으니 정적만 흐를 뿐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에 뭐지, 하고 살짝이 실눈을 뜨니 은우가 나도 너무 좋아한다며 나를 폭 끌어안아왔다. 어색하지만 그런 은우의 등에 손을 올리곤 은우를 꼭 끌어안았다. 마주 닿은 심장께로 들리는 심장박동은 나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부끄러운 느낌에 은우의 어깨에 얼굴을 대자 은우의 체향이 코로 흘러들어왔다. 향기로운 느낌에 목덜미에 더 코를 박으니 은우가 간지럽다며 웃어왔다. 그런 은우의 반응에 히히 웃으며 고개를 떼자 잘생긴 내 남친과 그 뒤로 보이는 벚꽃이 만개한 벚나무가 보였다. 정말 장관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에 여기로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은우를 다시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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