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랗네, 그치? 하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힐조
주제
Mr.Blue Sky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문빈은 이동민과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가며 다양한 걱정들을 했지만 결국 가장 큰 걱정은 어떻게 죽어야 잘 죽을 수 있을까였다

 간장게장이랑 감이랑 같이 먹으면 죽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앞으로 한 달간 살아야 할 집에 도착해있었다


"편하게 들어와야 이따가 현관 비밀번호 알려줄게요. 앞으로 한 달간 잘 부탁합니다~"

"그래요…. 잘 부탁해요"


굉장히 기뻐 보이는 이동민의 집 소개는 뒤로하고, 굉장히 슬퍼 보이는 문빈은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잠깐이라고 했다는 사실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가장 실감 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차은우의 모습으로 자신이 이동민이라 말하고 있는 이동민이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름을 부르면 뒤돌아보며 빈아 왜~? 하고 웃고 있는 얼굴로 대답할 것만 같았다

분명 차은우와는 다른 사람, 다른 자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눈앞에 보이는 건 차은우의 잘생긴 얼굴이니 사람 심리가 참 우습다

죽음만 생각하던 자신의 머릿속에 조금씩 자라나는 알 수 없는 감정을 애써 외면하는 문빈이다


"그런데 문빈씨는 저랑 동갑인 거죠? 처음 봤을 때부터 반말했으니까…."

"아, 아뇨 저는 한 살 어린데 1월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갔어요. 그래서 은우랑 같이 학교 다닌 거에요"

"그래? 그럼 나는 말 놓을게? 너도 편하게 말해"

"네, 그래…. 익숙해지면 말 놓을게"


이어서 앞으로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자세히 알려주겠다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이동민을 뒤따라간 문빈은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았다

현관부터 거실까지 이어져 있는 짧은 복도를 지나면 채광이 좋은 거실과 주방이 있었고, 지나온 복도 쪽에는 문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욕실 문이고 또 다른 문을 열면 방이 하나 있었는데 거실과 비슷한 크기로 평수보다 방이 넓은 편이었다 방이 하나뿐이라는 것만 제외하고는 두 명이 살기에 나쁘지 않아 보이는 집이다

우여곡절 끝에 집에 들어온 첫날, 이동민은 문빈에게 앞으로 한 달 동안 동거를 하려는 목표와 약속을 정하자고 했다 

문빈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기대에 찬 얼굴로 종이와 펜을 들고오는 이동민을 위해 적당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약속의 내용을 정리해본다면 이러하다


첫 번째 약속, 문빈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이동민과 동거하며 이에 발생하는 모든 비용은 이동민이 지불한다 

두 번째 약속, 차은우의 자아가 돌아올 수 있도록 협조하여 차은우에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실과 사건을 거짓 없이 이동민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세 번째 약속, 하루 중 저녁 식사는 반드시 같이하며 식사시간 동안 문빈은 이동민이 차은우라고 가정하여 행동한다

네 번째 약속, 만약 차은우의 자아가 돌아온다면 차은우에게 이동민에 관한 이야기를 일체 금한다


"약속 정하는 건 여기까지 하고 더 궁금한 거 없으면 네가 쓸 생활용품들 사러 갈까?"

"잠깐만 여기 네 번째 약속은…. 왜…?"

"...미안하잖아, 6년 동안이나 얘 몸 대신 쓰면서 시간 뺏은 것 같고 딱히 나를 알아봤자 좋을 것도 없고, 그래서 나도 인간관계는 최대한 안 만들고 있어"


덤덤하게 말을 하던 이동민은 잠시 침묵했고 문빈은 이동민의 6년에 대해 상상해보려고 했다

이동민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6년 전 자신이 해리성 둔주로 인한 자아라는 걸 알았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지 하지만 이동민은 문빈이 생각할 틈도 없이 옷부터 사러 가자며 잡아끌었다








이동민은 아침을 챙겨 먹지 않았고 문빈은 늦잠을 잔다

 이동민은 일터에서 점심을 먹고 문빈은 집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하지만 저녁만큼은 집에서 같이 먹었다

문빈은 집에 혼자 있을 때 주로 차은우에 대한 기억을 곱씹어보거나 글을 끄적거리며 시간을 보냈고 이동민과 문빈이 차은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정말 저녁 시간 뿐이었다 

문빈이 차은우에게 들었던 차은우의 어릴 적과 초, 중학생 때의 이야기가 거의 끝나가고 이제는 차은우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자 어느새 주말이 되어있었다

 문빈에게 지금까지 가장 힘든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저녁 시간을 고를 것이다 

이동민과 함께 있는 시간이 가장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하필 밥 먹을 때 이런 짓을 해야 하나 같은 현타와 맞서 싸우며 동거 첫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이동민을 차은우처럼 대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는 것이다

그때만큼은 이동민도 최대한 행동을 조심하며 자신의 무릎을 누르면서까지 `차은우가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 인 다리 떨기를 참았다

그 정성을 봐서라도 문빈은 차은우와 사귀었을 때 행동을 꾹 참기 위해 노력했지만, 오므라이스와 돈가스를 먹었던 어제저녁은 문빈의 노력으로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던 날이었다 

이유를 묻자면 차은우와 문빈이 첫 데이트를 했을 때 먹었던 음식이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문빈 나 왔다~ 오늘 일찍 퇴근했으니까 내가 저녁 만들어줄게! 만들고 나서 부를 테니까 방에 가 있어"


어제, 그러니까 금요일날 신난 얼굴로 장바구니를 흔들며 집에 들어온 이동민은 문빈에게 금방 적응한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저 목소리에 저 얼굴을 한 사람에게는 문빈보다 빈이라고 불려온 횟수가 많았기에 이동민이 자신을 문빈이라 부를 때마다 어색한 느낌이 들어 불편한 건 자신뿐인 건가 싶은 문빈이다

 잠시 뒤 저녁을 완성하고 부르는 소리에 문빈은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왔다 

차은우는 요리를 꽤 잘했었는데 이동민은 엄청나게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 반 기대 반 식탁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오므라이스와 돈가스가 있었다


"너 저번에 노른자 못 먹는다고 했나…. 혹시 모르니까 돈가스도 했어, 아니면 볶음밥만이라도 먹어볼래?"


기억난다 차은우도 이렇게 배려해줬었지 하며 잠깐 추억에 잠겼다 

오늘따라 차은우생각이 왜 이리 따라오는지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 문빈이 잘 먹겠다는 말과 함께 돈가스를 콕 찍어 먹으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빈아, 내가 썰어줄게."

"아, 고마…."


이동민에서 문빈이 알고 있는 차은우로 바뀐 저녁 시간, 첫 데이트 메뉴, 다정한 말투, 그때의 차은우와 똑같은 행동 문빈은 순간 터져 나온 감정에 고맙다는 말을 미처 하지도 못한 채 울음이 나왔다 

문빈은 아직도 차은우를 사랑하고 있었다

차은우라면 이렇게 했겠지? 하며 돈가스를 썰어주겠다고 말했을 뿐인 이동민은 갑작스러운 문빈의 울음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식는 줄도 모르고 울음을 달래다 그렇게 금요일 저녁이 지나갔었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나른한 토요일 오후 4시, 이동민은 어제저녁 펑펑 울고 난 문빈이 아직 기운 없어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행동 중에서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나 걱정스러웠지만, 단도직입적으로 문빈에게 어제 운 이유를 물어본다면 대답을 피하거나 다른 말로 둘러댈 것만 같았다 

이런 상태로 시간을 보내면 한 달 동안 차은우에 대한 이야기는커녕 말도 못하고 지낼 것 같다는 생각에 속마음 말하기에 직방인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문빈아 오늘 저녁은…."

"한잔할래? 오늘은 차은우 말고 이동민으로 같이 먹자"


뜻밖에도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문빈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이동민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열심히 안주도 만들었지만 그날 저녁 이동민은 문빈과 진솔한 대화 시간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 잔뜩 취해버렸다 

그나마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마셨기에 망정이었다


"어쩐지 너무 빨리 마신다 했다…. 되게 금방 취한다 너"

"엉~ 나 술 처음 먹어"

"네? 보통 20살 되자마자 먹던데"

"나는…. 이건…. 내가 빌린 몸이잖아…. 차은우 몸이잖아. 그래서…."

"덕분에 간은 아주 건강하겠네~"

"그렇겠지…? 그런데 가끔 차은우가 나한테 몸으로 의사를 표현해주는 것 같아"

"...어떻게?"

"심장으로, 처음에 너 구할 때 심장이 엄청나게 뛰더라? 다른 사람들 구할 때는 그렇게 안 뛰었는데"


분명 술기운에 배시시 웃으며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이동민이지만 문빈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동민은 차은우가 아니지만 계속 차은우를 생각나게 하였다 

살짝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꾸벅거리는 이동민이다 

어휴 글렀다 싶은 문빈은 이동민을 침대에 눕히고는 거실로 돌아와 뒷정리를 하며 차은우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새 교실에 앉아있는 문빈은 멀리서 전학을 오게 되어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저 조용히 교실 구석에 자리 잡은 채 같은 중학교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있는 무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냥 엎드려있을까 고민하던 바로 그 순간 차은우가 다가왔다


"안녕, 이름이 빈이야? 이름 되게 예쁘다."

"고마워... 차은우? 너도"

"응 오늘 날씨 정말 좋다 그렇지?"


재빨리 명찰을 읽은 문빈은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는 차은우를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부터 문빈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둘은 서로 관심사가 겹치지 않아도 마치 서로 운명인 듯 금방 친해졌고,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여름 방학식 날 빗줄기를 뚫고 전한 서로의 마음은 풋풋한 사랑을 틔웠다

하지만 그다음 해 문빈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 문빈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낸 후 혼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죽기로 하여 낭떠러지로 떨어지려고 한 그 순간까지 문빈은 차은우를 잊었다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이동민을 만나고 난 후부터 문빈의 삶에 가장 큰 의미가 되어주었던 차은우와의 추억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하자 문빈은 이동민을 차은우로 바라볼까 두려웠다

그동안 단절되었던 인간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두려웠지만 소중했던 사랑을 기억하면 할수록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커졌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깊게 만들지 않는다는 이동민의 말을 듣고 문빈은 자신의 감정, 차은우와의 과거를 숨기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을 하나의 자아가 아닌 언제든지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낯선 불청객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은 이동민이었기에 그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이동민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쓸쓸해질 것 같았다

결국, 이동민은 일요일 내내 숙취에 시달려야 했다

틈만 나면 화장실로 비척비척 걸어가는 사람 붙잡고 차은우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서먹했고, 열심히 콩나물국이나 끓이는 문빈이었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가고 다시 월요일이 찾아온 후 똑같은 평일의 반복이었다

퇴근하고 나서 같이 저녁을 먹고, 자기 전까지 차은우 이야기를 하고, 이번 주도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듯해 보였다

어느 날 이동민이 상자들을 잔뜩 가져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상자들은 다 뭐야?"

"차은우네 집에 갔다 왔지, 여기 있는 상자들은 차은우 물건들이고"

"그냥 말도 안 하고 가져온 건 아니지…?"

"그냥…. 요즘 차은우에 대해 알아가려고 한다고 하니까 주던데? 그나저나 나 보자마자 은우냐고 물어보시더라 나는 아직 이동민인데"


쓴웃음을 짓던 이동민은 금세 표정을 거두고 내일 연차 썼으니 물건들은 자고 일어나 같이 정리하자는 말을 남겼다 

피곤한지 바로 잘 준비를 하러 들어간 이동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문빈은 상자로 시선을 옮겼다 

내일 이 상자들을 절대로 열어보게 해서는 안 된다

문빈은 오늘 이동민이 가져온 상자를 잘 알았다 

차은우의 집에서 같이 정리했던 상자들이었다 

그 내용물은 누가 봐도 '우리 연애해요~'의 분위기가 충분한 물건들이었다 

분명 저 상자에는 연애편지들이, 이 상자에는 커플링과 커플 신발이 들어있을 텐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초조해진 문빈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집안 곳곳에 숨겨버리기로 한다


"문빈 뭐해?"

"어? 아냐 그냥 정리하려고 정리"

"에이 핑계는, 내일 열어보자니까 궁금했구나? 나도 안에 뭐가 있는지 몰라서 궁금하긴 해"


문빈이 막을 새도 없이 이동민은 자기 앞에 있는 상자를 활짝 열어버렸다

문빈은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이동민의 '이런 것도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네?'라는 말을 듣고 조심스레 눈을 떴다

이게 뭐람, 이동민이 열어버린 상자 안에는 아마 차은우가 풀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문제집만 가득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문제집 사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 뭐지 차은우가 쓰던 폰인 것 같은데? 충전시켜놔야겠다. 이동민은 그렇게 방으로 들어갔고 문빈은 고비는 넘겼다는 생각에 안심하며 잘 준비를 했다

오늘은 내가 거실 가서 잘까 고민하던 문빈은 배터리가 충전되어 전원 켜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동민은 전원이 켜진 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날과 다름없이 비슷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때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차은우의 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오늘은 `우리 빈이랑♥` 기념일의 7주년입니다]


이동민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둘이 친구라고 알고 있었는데? 기념일도 있나? 하는 생각으로 이곳저곳 살펴보았다

갤러리에 문빈이랑 찍은 사진 폴더가 따로 있었고, 주고받은 문자 기록을 보니 누가 봐도 둘이 사귀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빈 이게 뭐야"


문빈을 부르는 이동민, 이동민과 함께 살기로 하고 집에 들어온 첫날 했던 약속 중 차은우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사실과 사건을 거짓 없이 이동민에게 말해주어야 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문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이동민을 볼 때마다 차은우 생각이 나고 떨린다고 말을 꺼내기도 적절해 보이진 않았다

그런 문빈을 바라보던 이동민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빈 너만 죽는 거 아니야 나도 죽어, 차은우를 위해서 이동민이 죽어야 한다고 너랑 사는 한 달은 내가 죽을 준비를 하는 한 달인데, 이런 중요한 과거를 꼭 숨겼어야 해?"





이동민은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 

처음 자신이 해리성 둔주로 인한 자아라는 사실을 알고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이 자아라고 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냐고 생각한 이동민은 현실을 받아들이며 차은우와 이동민 사이에서의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무너져내리지 않기 위해 나는 차은우가 아닌 이동민이라며 수없이 되뇌었다 가족들도 처음에는 매우 놀랐지만, 시간이 지나니 자신을 받아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낯선 이에 대한 친절일 뿐이었을까 이동민은 우연히 부모님이 차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지금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은 차은우의 사람들이지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구나 하며 생각했다 

그 후로 이동민은 폰도 아예 바꿔버리고 연락처며 SNS며 다 지워버렸다 

한가지 바꾸지 못한 것은 주민등록증의 이름이었다 몸은 차은우 자아와 인간관계는 이동민인 삶이 흐르면 흐를수록 자신은 원래 주인이 있는 빈 껍데기 속에 잠시 스쳐 가는 처지로 느껴지게 되었고 이동민도 문빈과 같이 의미 없는 삶에 미련이 사라지게 되었다 

거기에는 자신이 갑자기 생겨난 자아인 만큼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결국, 이동민은 이 불완전한 삶 속에 자신이 죽는 방법은 차은우의 자아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 차은우에 대해 닥치는 대로 정보를 모았으며 차은우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바꿔나갔다 

차은우가 등산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산과 관련된 직업을 찾았고, 농구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농구 동호회를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동민이 아무리 노력해도 차은우가 돌아올 기미조차 없었고 하루하루 안개 낀 길을 걸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중 운명처럼 차은우를 알고 있는 문빈을 만났다 

이동민은 6년 동안 이동민으로 살아오며 이번이 차은우로 돌아갈 수 있는 그러니까, 죽을 후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가 간절했다 

부디 이제는 차은우가 차은우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랬다

이동민이 하는 이야기를 듣던 문빈은 가장먼저 솔직해지지 못한 자신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왜 숨긴 거야?"

"나는 아직 차은우를 사랑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심장이 뛴다며, 차은우가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며 말도 안 되잖아, 억지 부리는 거잖아……. 그냥…. 네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것처럼 차은우는 놔주고 이동민으로 살아가면 안 되는 거야?"

"난 차은우의 6년을 뺏은 잘못된 존재야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거고"

"아니야 너는…. 너는 그저…. 네 인생을 살아온 것뿐이야 잘못된 존재는 세상에 없어. 그리고 나는 네가 죽는 거 못 도와줘 네 부탁 처음부터 없었던 거로 하자"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이동민에게 말하던 문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문빈은 이동민이 붙잡을 새도 없이 밖으로 나가버렸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던 이동민은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뒤늦게 따라나서 보지만 이미 눈앞에서 사라진 문빈이 어디로 갔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우산도 없이 그냥 나간 것 같은데…. 문빈이 걱정되는 이동민이 근처 편의점이라도 가서 물어보려고 하던 찰나 건널목 반대편에 우두커니 비를 맞으며 서 있는 문빈을 발견했다 

찾았다는 마음에 안도하며 달려가려던 이동민은 건널목을 막 건너려는 문빈 쪽으로 방향을 꺾으려다 빗길에 미끄러지는 오토바이 한 대를 발견했고 문빈을 구하기 위해 인도 쪽으로 밀쳤다 

하지만 미끄러지던 오토바이는 이동민을 향했다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도로에 쓰러진 이동민을 보며 문빈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사고를 목격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신고로 응급실에 이송되었고 문빈은 고민 끝에 이동민이 아닌 차은우 환자의 보호자로 이름을 올렸다

 사고가 난 후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이동민이 눈을 뜨길 기다리며 문빈은 혼자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내가 진짜 죽고 싶었던 건지, 왜 이동민이 죽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차은우가 깨어나면? 혹은 이동민이 깨어나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이것저것 생각하다 간이침대에 누워 스르륵 잠들어버린 문빈은 꿈을 꾸었다 

꿈속의 계절은 뜨겁고 습한 여름이 아닌 차갑고 건조한 겨울이었다 

차은우와 함께 숨을 쉬며 살아있던 겨울이었다


"오늘 하늘이 왜 이렇게 어둑어둑하냐"

"아까 일기예보에서 눈 온다고 그랬어"

"그래? 나는 눈 오는 거 별로인데..."

"빈아, 내 첫인상 어땠어?"

"갑자기? 그게 궁금해?"

"음…. 첫인상이 되게 중요하다잖아"

"첫인상은 첫인상이고, 나한테 다른 사람들은 알아 갈수록 처음 같아 그런데 너는 그냥 좋았어."

"그래?"

"응, 그랬지"

"나도 보자마자 빈이가 그냥 좋았는데, 그래서 우리가 사귀는 건가 보다"

"야 차은우 너는 그런 말을 막 하냐…. 부끄럽게"

"어어? 부끄러워? 나는 안 부끄러운데? 네가 먼저 내가 좋다고 했잖아"

"그러지 말고 얼른 집에 들어가 부모님 걱정하시겠다"

"그래 빈아 미리 생일 축하해! 얼굴 보고 당일에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내년에 얼굴 보고 12시 땡 할때 축하해주면 되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잖아"


꿈속의 문빈과 차은우는 나란히 하교하며 골목길에서 헤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왜 이러한 일상 속 행복이 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며 차은우를 바라보는 문빈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멀리서 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고 반대쪽에는 오토바이가 무섭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놀란 문빈은 차은우에게 피하라고 소리쳤지만, 목이 막힌 듯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돌진하던 오토바이와 차는 차은우와 충돌하였다 

며칠 전 이동민에게 일어난 사고와 겹쳐 보이며 쓰러진 차은우와 충돌한 차량과 오토바이를 바라봤다

차 안에는 문빈의 부모님이 피를 흘리며 죽어있었고 차은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현실 같은 잔혹한 상황에 문빈은 숨을 몰아쉬며 악몽에서 깼다

문빈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간신히 추스르며 습관처럼 이동민이 누워있는 침대를 바라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빈 침대뿐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문빈은 다시 차오르는 눈물에 눈 앞이 일렁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일어나서 창밖의 맑은 하늘을 보며 말을 건넸기 때문이다


"빈아 오늘은 하늘이 파랗네, 그치?"

"응…. 그러네…."


문빈은 차오르는 울음을 억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이야기의 결말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이제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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