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파랗네, 그치? 상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힐조
주제
Mr.Blue Sky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하늘이 파랗네, 그치?》


힐조

@EK_MBTMI



"나, 아무래도 죽어야겠다."


문빈은 창문을 활짝 열어놔도 바람 한점 불어오지 않는 한여름의 새벽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하며 잘 준비를 하는 말을 하듯 꽤 쉽게 죽기를 결심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갑자기? 다짜고짜? 싶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문빈은 자신의 삶이 살아봤자 의미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삶이라 생각했기에 미련 없이 결심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내 존재가 사라져도 해는 뜨고 시간은 흐를 텐데, 내가 살아있다 해서 사회에 딱히 큰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죽는다 해도 큰일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지? 같은 생각을 하던 문빈은 별안간 매트리스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갑작스럽지만 죽을 것이라는 결심을 하자 생의 마지막 순간 뇌가 활발해지는 것처럼 죽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빠르게 정리되었다

역시 죽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계획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문빈은 자고 일어나서 죽기 위한 계획부터 세우리라 비장하게 다짐하며 다시 곱게 매트리스에 몸을 눕혔다


"아침부터 무슨 비가…."


빗소리에 잠에서 일어난 문빈은 목 언저리를 쓱쓱 만지다 훅 불어오는 비바람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열어두고 잔 창문 틈으로 물웅덩이가 생겨있었다

근처에 걸려있던 수건으로 대충 닦고, 물 한 잔 마시고 굴러다니는 삼색 볼펜 하나 집어다가 어젯밤에 잠들면서 떠올린 계획을 종이에 써내려갔다

문빈의 계획은 이러했다


1. 모든 짐을 다 처분하고 중요한 물건들만 가방에 챙긴다

2. 높은 곳에 오른다

3. 가방을 던진다

4. 내 몸도 던진다

5. 죽는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괜찮은 계획(문빈이 보기에는)인 것 같아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린 문빈은 곰곰이 생각했다

죽고 나면 신원확인은 해야 하니까 신분증 챙기고…. 영정사진? 그런 것도 중요한 물건으로 따로 챙겨야 하나? 가구나 짐은 있어 봤자 죽고 나면 다 버려지는 거, 이왕이면 내 손으로 버리고 가는 게 났지 이렇게 생각해보니 `죽는데 이왕이면~` 싶은 것들이 속속 생각나는 문빈이다

"죽기 전에 경치라도 보고 감탄하다가 죽으면…. 그것도 좋지 뭐…."

그렇게 문빈은 2번 계획을 '경치 좋은 산에 오른다'로 바꾸며 중얼거렸다




죽기 위해 '경치 좋기로 유명하지만, 꽤 험한 산'을 오르고 있는 문빈은 지금 2가지 후회를 하고 있다

하나는 계획을 세우며 일기예보를 자세히 보지 않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후회였고 또 다른 하나는 죽기위해 굳이 집 앞에 있는 산 놔두고 이왕이면~ 경치 좋은 산에 오르겠다고 계획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

사실 이 두 가지 후회를 곱씹는다고 해서 내리던 비가 멈추거나, 산행이 편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문빈은 지금 저 두 가지 후회에 대해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뇌가 폭발할 것 같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후회하며 두 다리를 움직였다 

비가 오는데 경치가 무슨 상관이야 같은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생각에 생각은 꼬리를 물고 결국 죽는다는 결심이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미약한 의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산길이 끝나고 시야가 탁 트였다 이제 나머지 계획 3, 4, 5를 실행해야 할 때였다

긴장되거나 초조한 기분은 들지 않았고 빗소리에 귀가 살짝 먹먹해진 문빈은 몸을 던지기 던에 자신이 매고 온 가방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가방 안에는 문빈의 전 재산이 들어있는 통장과 지갑, 신원 확인을 위한 주민등록증 등등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퍽 하며 떨어진 가방은 멀리서 보기에는 멀쩡해 보였다 내가 떨어지면 저 가방처럼 멀쩡한 상태는 아니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문빈은 낭떠러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앉았다

솔직히 지금 당장의 심정으로는 죽는 것보단 아픈 게 무서웠다 그렇다고 비를 뚫고 힘겹게 올라온 산을 다시 살겠다고 내려가는 건 어쩐지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저것 생각해봤자 어차피 죽는데 무슨 상관이냐 하며 몸에 힘을 빼고 떨어지려고 하는 그 순간 빗소리를 뚫고 들린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문빈의 뒤에서 들렸고 반사적으로 소리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마 안된다고 소리친 것 같은 형광 우비를 뒤집어쓴 한 남자가 문빈의 어깨를 잡았지만 문빈의 몸은 이미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



이곳은 분명히 꿈속이다, 꿈이 아닐 수가 없다

문빈의 생일 전날 세상을 떠난 부모가 눈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꿈속에 나온 부모는 그저 문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부모의 사인은 사고사, 자세히 말하자면 어두운 밤길 졸음운전을 하다 신호를 보지 못한 대형트럭과 삼중 추돌 사고였다

문빈의 부모가 탄 차량은 대형트럭과 정면으로 추돌하였고 그로 인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하필 그 날 한파로 인해 도로가 꽁꽁 얼어있었고, 하필 그 날 문빈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일 선물인 새 휴대전화를 받을 생각에 설레어서 휴대전화에 바로 끼울 수 있게 유심을 빼놓고 잠들었기에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안에 자신만 있다는 사실을 안 문빈은 뒤늦게 부모님께 연락하였지만 문빈은 이미 세상에 혼자 남겨진 후였다

그때의 문빈은 슬프다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한마디로 당혹스러웠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죽을 수가 있구나, 사람 목숨이라는 게 이렇게도 연약한 것이구나, 언제 죽어도 모르는 게 인생이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나니 그 후로부터 모든 것은 문빈에게 다 무의미해졌다 

돈이 많아도, 좋은 집에 살아도, 행복해도 그게 뭐? 어차피 죽으면 끝이야,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부모님을 떠나보낸 문빈은 그 뒤로 모든 사람과의 연락을 끊었다 

가끔 걱정스러운 말로 안부를 물어보는 친척들이 있었지만 대충 잘살고 있다는 듯 대답해주고 나서는 번호를 바꾸었다

다니던 고등학교는 선생님과 친구들의 동정을 받으며 다니고 싶지 않았기에 자퇴를 하고 곧바로 검정고시를 본 후 먹고살 정도의 일만 했다 

매일 아침잠에서 깨어나 삶을 살아가도 솔직히 자신이 왜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부모가 죽고 바로 따라 죽기에는 마음에 걸렸다

꾸역꾸역 이유 없는 삶을 살아가다 이런 인생을 더 이어나가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낀 문빈은 드디어 어제 죽기를 결심하여 실행에 옮겼고, 꿈속에서 깨어난 문빈의 눈앞에 병실 천장이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문빈은 살아버렸다

자신이 지금 살아있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은 문빈은 자신이 떨어지기 직전 어깨를 잡았던 남자가 원망스러웠다 

그 남자는 자신이 누군가의 생명의 은인이라며 뿌듯해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문빈에게는 생명의 은인보다는 계획을 망쳐놓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만나기만 한다면 뭐라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어? 일어났다!"


그런데 왜 하필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는 문빈의 첫사랑, 첫애인 이었던 차은우일까


"차은우, 네가 왜 여기 있어."

"...네…? 죄송하지만 저는 차은우가 아니라 이동민이에요 제가 예전에…. 아니다. 의사 선생님부터 불러올게요. 기다려요."


문빈이 봤을 때 어떻게 봐도 차은우인 차은우는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시 멈칫하며 놀라더니 자신은 차은우가 아니라 이동민이라는 이상한 말을 하고 후다닥 병실을 나섰다 

잠시 뒤 차은우와 같이 들어온 의사 선생님의 말은 이러했다

사고 당시에 문빈은 낭떠러지로 곧장 떨어지지 않고 옆에 있는 보호자, 즉 자신이 이동민이라고 하는 차은우에게 어깨가 잡힌 덕분에 옆에 있는 비탈로 떨어졌지만 구르는 과정에서 머리에 충격이 가해져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늦었으니 다음날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나서 이상 소견이 없다면 바로 퇴원할 수 있다 하였고 그 말을 들은 문빈은 화가 났다 

계획이 망쳐져도 아주 제대로 망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사람 때문에


"너 뭐야?"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이동민입니다. 어제 정말 죽을뻔한 건 알고 계세요? 도대체 왜 떨어지려고 한 거에요?"


자신이 이동민이라고 하는 차은우는 처음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목소리와 다르게 딱딱한 목소리로 문빈에게 그날 왜 떨어지려고 했는지 물었다

문빈은 얼굴에 약했다 정확히 말하면 문빈과 연애하던 차은우의 무표정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졌다 

어느새 자신을 살린 사람에게 한소리 하려고 마음먹은 건 사라지고 차은우가 왜 계속 자신이 이동민이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만 남았다

자신의 이름은 이동민이고, 산악구조대이며, 비오는 날 낭떠러지 끝에 걸터앉아 떨어지려하던 문빈을 구해준 남자라고 소개했지만, 외관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차은우였기 때문에 문빈의 궁금증은 지금 차은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변해갔다

대체 비가 쏟아지는 날 왜 산에 오른 것인지부터 시작해서 운 좋게 자신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까지 속사포로 쏟아내고 있는 차은우에게 문빈은 장난스럽게 말을 꺼냈다


"잠깐만 네가 왜 이동민이야 친구 이름이야? 이동민이 누구냐?"

"지금은 제가 차은우가 아니라 이동민이니까요 아무튼 산에 오를 때…."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이야?"


문빈은 뒤통수가 살짝 저려왔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진짜 차은우 아닌 것 같아, 드라마에서나 보던 숨겨진 쌍둥이 이런 거 아니야?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상황이 쏟아져나왔지만 조금 전 차은우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확신했던 생각만은 틀렸음을 느꼈다

대답하기 곤란한 듯 한숨을 내쉰 이동민은 문빈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병실 침대에 걸터앉았다


"제가 들어왔을 때부터 저를 차은우라고 부르시던데, 문빈씨는 차은우를 알고 계시는 거죠? 언제부터 알았었죠?

"야……. 우리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아는 사이…. 였잖아"

"그러면 혹시…. 제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요?"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7년 만에 우연히 만난 남자친구가 자신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상황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간신히 차은우와 문빈은 '아는 사이' 라고 정의한 문빈은 확실히 뭔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꼈다 


"어…. 응…. 무슨 일이신데요?"

"우선 말씀드리기 전에 확실한 사실 하나 알고 계셨으면 해요, 차은우는…. 18살 이후의 차은우는 지금 없어요 해리성 둔주라고 아세요? 전혀 다른 자아가 생기는 건데…. 솔직히 지금 저도 혼란스러워요. 이동민으로 살게 된 후부터 가족들 빼고는 차은우를 아는 사람과 만나보지 못했거든요. 제가 연락처며 SNS며 다 바꾸고 지워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보통 일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런 일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문빈은 이동민이 한 마디 한 마디 폭탄 같은 이야기를 내뱉을 때마다 목을 쭈물거렸다 와우 하는 감탄사와 함께

그리고 문빈은 이 상황에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차은우를 아는 사이든 사귀었든 사이든 뭐든 휘말리지 않고 그냥 빨리 죽고 싶었다


"아, 네 이동민씨 그렇군요…. 그런 일이…. 예,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도울 건 없어 보이네요 그럼 이만 나가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구해줘서 감사합니다. 다시는 그 산 주변으로 얼씬도 하지 않을 거니까 마주치지 마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아니, 잠깐만…."

"나가세요."

"저 부탁할 게 있는데…."

"아니 그냥 병실 밖으로 나가주세요~"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억지로 병실 밖까지 떠밀린 이동민은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할 말이 많이 남았는지 문밖에서 한동안 서성거리다가 내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문빈은 지금 느끼는 감정이 그저 죽으려고 하는 자신에게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단순한 감정이라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부모님의 장례식 이후 처음 보는 차은우인데 차은우가 아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복잡해 죽겠으며, 비록 잠깐이었지만 다른 사람과 하는 오랜만의 제대로된 대화라 머리가 핑핑 돌았다 

게다가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모두 끊었을 때 차은우가 자신을 찾지 않았기에 그동안 은우도 나랑 헤어지고 싶었구나 하며 마음고생 했던 시절이 아까웠다 

차은우가 아니라 이동민이었으니 자신을 찾지 않았던 것일 테니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손가락은 어느새 검색창에다가 아까 이동민이 말했던 해리성 둔주를 검색하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라 그런가,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있는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착실히 검색 결과를 읽어나갔다

'기억상실과 동반되어 일어나는 장애로서,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에 대한 기억을 잃고 자신의 과거에 대해 회상하지 못하며 일부 혹은 완전히 새로운 주체성을 갖는 것'이라는 설명을 읽은 문빈의 병실에서는 새벽까지 희미한 휴대전화 불빛이 켜져 있었다



-



이동민은 다음날 일찍 문빈을 찾아왔다 

문빈은 엮이기 싫은 마음에 어제처럼 병실 밖으로 내쫓고 싶었지만 어제 저녁 부탁할 것이 있다던 이동민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조용히 있었고 그가 병원 수납을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기에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들어 가만히 있기로 했다

문빈은 자신이 한 번에 죽을 줄 알고 살던 곳을 모두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통장에 있는 2달 치 아르바이트비가 전 재산이었다 한마디로 지금 문빈은 땡전 한 푼 없었다

자신이 떨어지려고 했던 곳에 가방이 그대로 있다면 다시 가져와서 다르게 죽을 방법을 모색하기로 하고 퇴원 준비를 마치고 병원 밖으로 후다닥 나가려던 찰나였다


"문빈씨, 어제 하려던 부탁마저 해도 될까요?"

"죄송한데 저는 다른 사람 부탁 들어주고 그럴 시간이 없어서요. 병원비도 대신 내주셨는데 거절해서 미안해요."


솔직히 말하면 문빈은 이동민의 부탁을 거절하기에 양심이 찔려왔다 

더군다나 어제 해리성 둔주에 대해 찾아보면서 이동민은 차은우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긴 하지만 죽기 전에 예전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썩 즐겁지 않았고, 어차피 자신은 죽을 예정이니 죽기 전에 자신을 살려줬던 이동민과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부탁을 거절했다

그냥 죽을뻔한 사람과 죽을뻔한 사람을 구해준 사람 정도의 관계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동민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저도 문빈씨가 한 거절 거절할게요. 차은우를 위해서라도 제 부탁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은우를 위해서 들어달라고 하면 더 들어주기 싫은데요"

"어차피 지금 문빈씨 갈 곳도 없잖아요. 그날 자살 시도한 거죠?"


아 알고 있었구나

문빈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굳이 정중하게 거절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문빈은 계획을 바꿨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러면 더욱 그쪽 부탁 들어줄 이유가 없죠. 저는 지금 집도 없고 돈도 없어서 다시 죽으러 가는데 무슨 부탁을 하려고요? 커피라도 사올까요? 죽은 사람이 커피는 사 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

"문빈씨 지금 집도 없고 돈도 없다고 하셨어요?"


먹혔다 먹혔어, 역시 거절만 하지 말고 강하게 나갔어야 했어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문빈은 이동민의 놀란 표정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표정은 놀란 표정이 아니라…. 웃나…? 지금 웃는 건가?


"아 죄송해요. 웃으면 안 되는데…. 그럼 저랑 같이 살아요, 집도 없고 돈도 없으면 당장 갈 곳도 없는 거죠? 너무 다행이다…. 몸만 오면 되잖아요."

"이게 다행인 거에요? 저 죽을 거라니까요?"

"앞으로 한 달만 살아줘요. 그쪽처럼 제가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문빈씨는 지금 저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라 그래요"


이동민은 문빈이 죽음을 쉽게 결심한 것처럼 쉽게 한 달만 살아달라는 소리를 했다

문빈은 부모의 사고를 목격한 이후로 삶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었다 삶은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고, 이미 결말이 주어진 이야기를 아무리 재미있게 꾸며봤자 결말은 달라지지 않으니 이야기를 꾸미는 짓은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동민은 달랐다 

자신이 내일 죽는다는 결말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이야기를 써나가는 가는 것에 집중하겠다고 했다

문빈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당연하게 죽어야겠다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이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앞으로의 생각이 당연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뀔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보면 살아가는 것에 의미가 생길까? 싶은 문빈은 속으로 갈등하며 이동민의 말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부터 한 달 동안 제 부탁 들어주시는 거죠?"


한동안 말이 없던 문빈의 손을 꼭 잡으며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동민의 부탁은 누구라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문빈은 앞으로 한 달 동안 이동민과 함께 살아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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