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와 까마귀

2020 겨울호
작성자
Thalassa
작성일
2021-01-16 21:53
조회
84








  



“소셋물을 가져오니라.”

 



강퍅한 인상의 여인이 시립한 여종에게 일렀다. 예, 수더분하게 대답하며 허리를 숙인 여종은 디딤돌을 앞에 두고 멀거니 서 있는 도련님에게 향하려는 눈을 애써 돌렸다. 혹여나 천한 계집이 자기 아들 넘본다며 뺨이라도 맞았다간 그녀가 손가락에 낀 두꺼운 가락지에 살결이 다 찢어질 것이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여인은 여전히 뜻을 굽히지 않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못할 말을 했느냐?”

“아닙니다.”

“상처喪妻 한지 꼬박 삼 년이 지나고 후처를 들이라는 게 그리도 싫더냐? 어미 맘에 대못을 박을 만큼?”

 



은우의 얼굴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단정함에서 여인은 죽어도 꺾이지 않을 고집을 읽었다.

 



“나라에서 열녀문 세워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어도 열부의 길 권장한다는 소린 못 들어봤다.”

“그저 소자 개인의 바람일 뿐이옵니다.”

“이 어미가 조상님 뵐 낯이 없다.”

“불효는 소자가 저지른 것이오니 어머니께서는 괘념치 마시옵소서.”

“듣기 싫다. 당분간은 문안도 오지 말아라.”

 



장지문이 거칠게 닫혔다. 은우는 문 너머의 어머니께 허리를 굽혀 물러가겠노라 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도로 문을 연 여인이 끌끌 혀를 찼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마당에 평생의 수절을 말하는 아들이 어리고도 답답했다. 그만큼 죽은 며느리와 각별히 금실 좋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들이지만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은우는 꼭 등선을 준비하는 도사처럼 인세의 욕망에 초연했다.

 



“무슨 수를 내야 하는데….”

 



물론 사내의 정절이란 스러지는 꽃잎마냥 덧없음을 안다. 그러나 손 귀한 집안의 큰 어른으로서 언제 씨를 뿌릴까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어리고 건강하던 며느리가 급사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손가락으로 옻칠한 반상 위를 두드리던 여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예, 마님!”

 



허겁지겁 달려온 하인이 답하자 여인이 일렀다. 

 



“부호군 댁에 갈 것이다. 가마꾼을 부르고 너는 기별을 넣어라.”

 





*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손님에 빈은 매우 불편한 기색을 비쳤다. 그리 잘 보이고 싶은 상대도 아니라 의관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여인을 맞이했다. 장옷을 대신 들고 있던 몸종이 빈의 차림새에 에그머니나, 하고 황급히 눈을 내리 깔았다. 픽 웃은 빈이 자리도 권하지 않고 먼저 털썩 앉았다. 안 그래도 얼음장 같던 여인의 얼굴에 잔뜩 언짢음이 묻어나왔다. 

 



“예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숙부인?”

“예의를 모르는 망종인 건 여전하구나.”

“조반 먹기도 전에 오신 숙부인도 남 말 하실 처지는 아닌 듯합니다.”

 



그에는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러 온 쪽은 본인이니, 여인은 개인적인 불쾌감을 억누르고 빈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몸종에겐 자리를 피하라 이른다. 

 



“너는 언제까지 혼인도 않고 난봉꾼 행세를 하며 집안 망신을 시킬 셈이냐?”

“제가 언제 집안 망신을 시켰습니까? 문 씨 핏줄 인정할 수 없으니 꿈도 꾸지 말라 일갈하신 게 아직도 생생한데.”

“말꼬리 잡지 말아라.”

 



이래서 싫다. 빈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려 애썼다.

 



“흰소리 그만하시고 찾아오신 연유나 말씀하시지요. 당고모께서도 제 얼굴 오래 보기 고역이시지 않습니까.”

 



빈은 여인의 사촌 남동생이 늦은 나이에 들인 후처 소생의 아들이었다. 본처가 죽은 후 정식으로 예를 치르고 데려왔기에 엄밀히 따지면 서자가 아니었지만, 이미 장성한 자식들은 저보다 어린 새어머니를 무시했고 그 취급은 막 태어난 늦둥이 빈에게도 이어졌다. 아비가 명을 달리한 후에는 더했다. 빈이 이 악물고 어린 나이에 무관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맨몸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지금도 다를 바 없다. 유산은커녕 빈은 자기 이름이 족보에 올랐는지 안 올랐는지도 모른다. 어미는 이게 다 자기 집안이 변변치 않은 탓이라며 가슴을 치다가 홧병 때문인지 이른 나이에 눈을 감았다. 빈이 문씨 집안이라면 이를 가는 이유가 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네 형에게 너를 제대로 문씨 집안 자제답게 대하라 하겠다.” 

“형님이 퍽이나 귀담아듣겠습니다.”

“틈틈이 나에게 하소연하여 돈을 빌려 가길 여러 번이다. 그 아이 내 말을 거역치 못한다.”

 



장남이라고 그 많은 땅이며 재산을 홀랑 가져갔으면서 당고모에게 돈을 빌려? 평소 행실을 알만 했다. 빈이 싸늘한 얼굴로 웃자 여인이 헛기침을 했다. 칼밥 먹는 위인답게 작정하고 표정을 굳히면 한기가 흐르는 것이 제법 무서웠다. 

 



“그 부탁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길래 당고모께서 어려운 걸음 하셨습니까?”

“…….”

 



마침 하인이 차를 내왔다. 여인은 곧바로 입을 여는 대신 찻잔으로 마른 입술을 먼저 축였다. 손도 대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은 불손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런 남부끄러운 일을 완전히 남에게 이야기할 수도, 아무리 집안의 큰 어른이라 한들 아녀자인 자신이 나서서 해결할 수도 없으니 방법이 없다. 게다가 빈은 그 동안의 행동거지만 살펴도 여러모로 이 일에 적격이다. 

 



“너도 알다시피 내게 아들이 하나 있다.”

“저랑 비슷한 나이로 압니다.”

“그럴 게다. 올해로 며느리 삼년상이 끝났는데…. 새로 혼인할 생각이 없다더구나.” 

 



여인이 말을 고르다 어렵사리 뱉었다. 

 



“내 아들이 여자를 알게 해다오.”

 



놀랍게도 빈은 그 괴상한 부탁에 비웃지 않았다. 

 



“재종형제는 경험이 아예 없습니까?”

“혼인했을 때는 어린 나이였고 한창 과거 급제를 위해 박차를 가하던 시기였다.”

“변변찮았다는 얘기군요.”

 



당고모의 아들 차은우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친척이라 그런 것 뿐만 아니라 워낙 유명한 후기지수라 그렇다. 기라성 같은 젊은 수재들이 모인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압도적이었고, 관시에 합격한 후 그를 일찌감치 정치적 후계자로 점찍은 이판 대감이 정랑으로 콕 짚어 데려갔다. ‘삼경’이라는 호도 있다. 차은우를 만나면 세 번 놀라는데, 첫 번째로 용모에 놀라고 두 번째로 지혜에 놀라며 세 번째는 인품에 놀란다는 뜻이다. 지인들이 반쯤 장난으로 붙여준 칭호지만 아무도 그 내용을 과장됐다 여기지 않는 게 어떤 이인지 알 만했다. 

 

먼 발치에서 그를 본 적은 있다. 혼인하는 날이었고 큰 경사였으니 빈도 그의 어머니도 방문을 했다. 어차피 문전박대 당하겠지만 아예 걸음도 않으면 그걸로 꼬투리를 잡아 조리돌림을 할 테니 수가 없었다. 신부가 탄 가마 앞에 말을 타고 가는 얼굴이 새 신랑답지 않게 무감했는데, 그게 헌앙한 외모보다 흥미로웠다.

 

죽은 처와 그동안 얼마나 돈독한 정을 쌓았기에 불효도 감수하여 재혼을 거부하는 걸까?

 



“해줄 수 있겠느냐?”

 



이제 와서 문씨 가문에 당당한 일원이 되고픈 마음 따위 없다. 그런 거 없이도 잘만 살았다. 작게 나마 재산도, 권력도 가지고 있다. 그리 탐나는 자리도 아니건만 대단한 대가를 치르듯 제안하는 여인이 우습다. 하지만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 했다. 물론 자신이 군자라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자기 아들을 여색에 빠지게 만들라는 부탁 그 어디에도 명예를 지켜달란 소리는 없다. 그 고매하다는 아들도, 문씨 일가의 명예도 진창에 처박히면 여인은 오늘 일을 떠올리며 후회하겠지.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빈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약속이나 지키십시오.”

 







 



“섭이 너는 한 식경 정도 놀고 오너라.”

 



은우가 어린 몸종에게 돈을 주며 이르자, 입이 귀에 걸린 채로 꾸벅 인사를 하고 신나게 뛰어갔다. 은우는 너그러운 주인이라 시중을 드는 아이들에게 용돈을 줄 때가 잦아서, 주인님의 외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하인들 사이에서 치열한 눈치싸움이 벌어졌다. 보다 못한 은우가 순번을 정해 매일 다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꼬마들끼리 주먹질하느라 제법 시끄러웠을 것이다. 

 

서책방 여인은 보부상이 가져온 안경을 요리조리 살피느라 바빴다. 노안이 왔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지난번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들어서자 종이와 먹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청국에서 들어온 서적 중 눈에 띄는 것이 없나 살피다가 귀한 시집을 발견했다. 이미 읽은 기억이 있지만 반가운 마음에 손이 갔다. 유학자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공부는 경전이지만 은우는 세속적인 시도 좋아했다. 특히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탐미적인 사랑시를.

 



“재종형제께서는 생각보다 낭만적이군.”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은우가 고개를 돌렸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남색의 도포와 깨끗한 흰색의 깃이었다. 질 좋은 가죽신이며, 움직일 때마다 차르륵 소리가 날 것 같은 흑옥구슬의 갓끈하며 무척 화려한 차림새다. 넓은 가리개 밑으로 그림자 진 얼굴은 맹세코 처음 보는 이다. 한 번이라도 봤다면 기억하고 있었을 외양이기에 알 수 있었다. 은우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누구십니까?”

“못 들었소? 재종형제라니까.”

 



남자가 짓궂게 말했다. 은우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육촌 형제들과는 외가와 친가 모두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중 이 남자는 없었다. 

 



“사람을 잘못 보신 듯합니다.”

“문빈이오.”

 



불쑥 내민 이름에 은우가 눈을 깜박였다. 머리 한 구석이 톡 걸리는 느낌이다. 문 씨 성이라면 어머니의 친정 가문이 맞다. 그리고 아마 지나가듯 흘려들었던 이름인 것도 불확실하지만 맞는 것 같다. 

 



“애써 떠올리지는 마시오. 어차피 내 얘기라고 해봐야 욕밖에 더 들었을까.”

 



책장의 기둥을 잡고 있던 손을 물리고 뒷짐을 진 빈이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나무 덧창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볕이 빈의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구슬에 알알이 맺혀 저마다 푸르고 부드러운 빛을 뿜었다. 그 때문인지 새카맣고 커다란 눈동자가 유난히 반질반질해 보였다. 

 



“평소 재종의 인품이며 학식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어왔소. 한 번쯤은 실제로 만나보고 싶었다오.”

“세간의 과장된 말입니다. 실망하실까 두렵군요.”

 



빈이 파안했다. 

 



“내가 말 한 마디 나눈 걸로 사람을 판단하는 성급한 위인은 아니오.”

“오해 마십시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압니다, 재종.”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다. 연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은우는 뒤로 물러서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아내었다. 

 



“그럼 재종이 정말로 어떤 사내인지 알려주기 위해, 나랑 좀 더 어울려주지 않겠소?”

 



새의 지저귐, 나비의 날갯짓, 탐스럽게 벌어진 꽃잎. 아름답지만 연약해 금방 스러지는 덧없는 것들. 빈의 태도는 시종일관 그런 느낌으로 은우를 두드렸다. 평소 사람을 사귀는데 방어적인 은우는 사양하려 했다. 빈은 그와 너무 다른 사람이었고, 이상하게도 자꾸 은우가 마음속 깊이 걸어 잠근 빗장을 톡톡 밀어 열어버릴 것 같은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 

 

그렇지만 거절해도 싱긋 웃으며 그러냐, 하고 뒤돌아서서는, 다시 돌아보지 않을 듯한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결국, 은우로 하여금 입을 열게 하고야 말았다.

 



“…저와 함께 수학하고 싶다는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까.”

 



어쩐지 많은 뜻을 숨기는 것처럼 느껴진 대답이었다. 후에 기별하겠다며, 물러간 남자는 볼일이 은우와의 만남 뿐이었는지 다른 서책에는 눈도 주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여러모로 의뭉스러운 사내다.

 





*

 





“빈이 그 아이를 만났다는 이야기 들었다.”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낯설다. 어머니와 그는 껄끄러운 사이가 아니었던가? 지난번 빈과의 만남에서 있었던 대화를 은우가 곱씹었다. 여인이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어떻더냐.”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신가. 아니면 다른 점을 눈치채신 건가. 은우는 내색 않고 말을 골랐다. 

 



“점잖은 인사는 아닌 듯합니다.”

“품행이 방정치 못한 구석이 조금 있긴 하지.”

“들리는 소문도 그다지 좋지 않고…. 최소한의 도리만 다하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처럼 냉정하게 결론을 내린 은우가 어머니의 안색을 몰래 살폈다. 여인은 기쁘면서도 착잡해 보였다. 

 



“군자는 어린 아이한테도 배울 점을 찾는다고 하였다. 섣불리 멀리하지 말고 가볍게 교류해보아라.”

 



의외의 가르침을 내린다. 은우는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어머니의 따르기로 했다. 호수처럼 잔잔한 겉과는 반대로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여인은 은우에게 취한 태도와 별개로 여전히 그 사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필시 어떤 이유가 있어서 자신을 붙여주려 하는 것 같은데, 최근에 은우와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라면 혼인 문제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내가 중매쟁이 역할을 제대로 해낼 것 같지는 않다. 어떤 목적일까. 어머니는, 또 그 남자는. 

 



“도련님, 도련님께 서신이 왔다고 큰 할아범이 전합니다.”

“알겠다.”

 



은우는 어머니께 예를 올리고 일어섰다. 규방에서 나오자 무거운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 힐끗 뒤를 바라보았던 은우가 성큼성큼 내당을 벗어나 중간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큰 할아범이 공손히 서신을 내밀었다. 

 

붉게 물들인 삼끈을 풀자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다. ‘재종. 뱃놀이 좋아하오?’ 괴발개발 제멋대로 뻗은 획에 보낸 이를 짐작한 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 다섯 살 때 은우가 지금의 빈보다 또박또박 글씨를 썼을 것이다. 속내를 알 수 없게 구는 사내가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군.

 



“할아범. 오랜만에 말을 좀 달려야겠네.”

“무이가 좋아하겠군요. 마구간지기에게 일러두겠습니다.”

 



뱃놀이보다는 승마가 낫다. 

 





*

 





“포운호수에 배 띄워놓고 기생을 불러 가락이나 좀 들을까 했더니.”

 



도성 외곽의 도로에서 가볍게 말을 몰며 빈이 불평했다. 그와 앞서거니, 뒷서거니하며 마찬가지로 말에 타고 있던 은우가 대꾸했다. 

 



“듣는 귀의 수준이 낮아 좋은 것을 들어도 좋은 줄 모릅니다, 제가.”

“누구는 알아서 듣소? 그냥 분위기에 취하자는 거지.”

“그럼 싫다고 하지 그러셨습니까?”

 



그 말에 빈의 구시렁거림이 수그러들었다. 

 



“뭐, 그래도 재종이 먼저 말을 꺼낸 건데 거절하기도 좀.”

“전 그런 걸로 마음 상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내 기분이 그렇단 거요.”

 



재종 평소에 깐깐하다는 소리 좀 듣지 않소? 말발굽 소리에 섞인 대화는 지난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편해졌다. 이윽고 활터가 보였다. 관리인이 다가와 고삐를 쥐고 인도했다. 빈의 얌전한 암말과는 다르게 콧김을 내뿜던 무이가 불만족스러운 듯 앞발을 잠깐 들었지만 은우가 목덜미를 긁어주자 곧 포기한 듯 관리인을 따라갔다.

 



“길들이느라 고생 좀 했겠소.”

“생각보다 수월했습니다. 저건 그냥 투정이지요.”

 



등에 메고 있던 활대를 어깨에 걸친 은우와 빈이 사대에 섰다. 저 멀리 과녁이 보였다. 눈을 살짝 찌푸리고 거리를 가늠한 빈이 말했다. 

 



“80보 정도 되는군.”

“궁술은 즐기십니까?”

“재종. 나 무관이오.”

 



목전을 꺼내 시위를 메긴 빈이 부드럽게 팔을 당겼다. 팽팽하게 구부러지는 활대와 반듯한 어깨, 곧은 등이 그림으로 그린 듯 조화롭다. 잠시 바람을 기다린 빈이 손가락을 놓았다. 멀리서 과녁을 확인한 관리인이 깃발을 흔들었다. 명중이었다. 이어서 화살을 꺼낸 은우에게 빈이 제안했다.

 



“내기라도 하겠소?”

“원하는 게 있습니까?”

“재종이 나에게 말 좀 편하게 했으면 좋겠소.”

“지금도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앉아서 글공부나 한 샌님인 줄 알았는데 한쪽 눈도 감지 않고 조준하는 은우의 자세가 자연스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보는 빈의 시선이 거북하지도 않은지 은우는 의식하지 않고 활을 쏘았다. 보지 않아도 명중인걸 알겠다. 

 



“재종. 내 나이는 아오?”

“압니다.”

“자는?”

“전에 말씀하셨지요.”

 



둘의 습사 속도가 제법 빨라 금세 화살이 동났다. 과녁에 꽂힌 화살을 뽑느라 분주한 저편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었다. 

 



“기분 나쁘지 않소? 어린 놈이 툭툭 말 던지는 게.”

“한해도 차이 나지 않는데 뭐가 그리 싫겠습니까?”

“자는 불러주지도 않고.”

“그건 재종도 마찬가지지요.”

 



전에도 느꼈지만 차은우, 얌전한 얼굴로 한 마디도 안 진다. 그런데도 짜증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준수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의 외모 때문일까? 어리고 귀여운 강 참봉댁 막내딸이 먼저 매달려왔을 때도 눈 하나 깜짝 않던 빈이 자주 멈칫할 정도로 은우의 용모는 궤가 달랐다. 뭇 사람들이 들으면 비웃겠지만 아마 차은우를 실제로 보면 다들 입을 다물 테지. 처음에야 곧바로 기생집에 끌어다 놓고, 교태부리는 창기가 술을 따르고 젖가슴을 보이면 저라고 배기겠나, 싶었지만 쉬운 방법 놔두고 돌아 돌아 가는 까닭은 우습게도 지금의 은우가 꽤 빈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거래로 파생된 관계였다 한들, 이왕 맺은 인연 쉽게 악연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라도 최대한 오래 지기로 지내고 싶었다. 

 



“재종도 나도 서로 자는 불러주지 않고 눈치만 보고 있으니, 내기는 호칭으로 하면 되겠습니다.”

“더해서 말도 놓는 건?”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나름 참고 있는 터라.”

 



무엇을 참는 다는 건지 알쏭달쏭하다.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을 누르며 빈이 머리를 끄덕이자 화살이 가득한 통을 새로 받아온 은우가 선수를 양보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번갈아 쏘는 화살이 과녁에 가득 꽂혀 자리를 옆으로 옮겨서도 결판이 쉽게 나지 않았다. 무과에 합격하여 어린 나이에 종사품 부호군에 오른 빈에게 활쏘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은우가 엇비슷하게 따라올 줄은 예상 못했다.

 



“유생 시절에 글은 안 읽고 활만 들었소?”

“궁술은 마음 수련하기 좋지요.”

“두 번 수련했다가 나 같은 녀석은 말단 포졸이나 하겠군.”

 



슬슬 어깨와 팔이 아파졌다. 더 쐈다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말 고삐도 제대로 못 잡게 생겼다. 마지막 발은 동시에 쐈다. 가느다란 살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관리인이 다시 깃발을 흔들었다.

 



“이래서야 무승부인데.”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서로 한 번 불러줍시다.”

 



빈이 씩 웃었다. 

 



“은우야.”

 



쉽게 부르라고 만든 이름이다. 하지만 빈이 발음하는 자를 듣는 순간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굳게 잠가놨던 마음속 자물쇠에 벌써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뭐라고. 입 안쪽을 깨물어 겨우 동요가 새어나가는 것을 막은 은우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빈을 겨우 부른다.

 



“빈아.”

 



빈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반개한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해 오래 쳐다볼 수가 없어, 은우가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척 했다.

 



“듣기 좋네. 끝이오?”

“끝입니다.”

“사람 참 야박하기는.”

 





*

 





아내의 삼년상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휴직으로 처리된 기한이 곧 끝난다. 은우는 장고 끝에 다시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 그를 직접 이조정랑에 앉힌 이판 대감이 불같이 화낼지도 모르지만 이미 입신양명의 욕심이 사라져버린 은우에게 벼슬길은 귀찮은 족쇄일 뿐이다. 그나마 거느리고 태어난 양친의 재산이 막대해 도박이나 유흥으로 날려 먹지만 않으면 평생 한량으로 지낼 수 있는 수준이라 다행한 일이다. 한량이라니. 불과 몇 년 전 자신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터인데. 

 

갑자기 빈이 생각났다. 

 



“차공. 계시오?”

“아, 오셨습니까?”

“무슨 생각을 하느라 밖에서 고하는 목소리도 못 듣소?”

 



은우는 답지 않게 먼저 농을 쳤다.

 



“언제부터 호랑이셨소?”

 



어라, 하고 눈을 접어 웃는 빈이 유쾌하게 답했다. 

 



“내 생각 중이셨구려. 계속하시오.”

 



쓰던 사직서는 한 구석에 치워두었다. 빈이 힐끗 보긴 했으나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보다 품에서 꺼낸 몇 권의 서책을 보여줄 생각에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제목을 읽은 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죄다 통속소설이로군?”

“불온서적이라고 멀리하라 하시지만 이런 게 재미있는 걸 어쩌겠소.”

“나라님께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괜찮소. 나라님과 개인적으로 뵌 적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니.”

 



간단한 술상을 내왔다. 은우는 앉아서 술을 마시고, 빈은 엎드려 누워 책장을 넘기며 낭독했다. ‘박씨 부인이 옷고름을 풀자 달덩이 같은 뽀얀 살결이….’ 음란하기 이를 데 없다. 어머니가 들으시면 기함을 하시겠군. 빈의 갓은 진작에 풀어헤쳐 저 멀리 던져두고 겉옷도 마찬가지다. 일곱 살 동무들과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빈은 꼭 덜 자란 아이 같다. 고작 은우보다 일 년 조금 안 되게 어린 데 댕기 머리하고 뛰어다니는 아이 때나 했던 행동을 지금도 거리낌 없이 한다. 그게 미워 보이지 않는 것도 재주다. 까딱까딱 움직이는 발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은우가 뒤늦게 빈의 독경이 그친 걸 알았다. 턱을 괸 빈과 눈을 마주쳤다. 

 



“재종은 무슨 생각이 그리 많으시오?”

“별거 없습니다. 그냥 말로 다 하기 쑥스러울 뿐이지요.”

“나와 어울리기 싫은 건 아니고?”

 



샐쭉한 목소리에 침음한 은우가 상을 옆으로 치워 빈 곁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뒤로 벌러덩 누운 빈이 입을 삐죽거렸다. 

 



“나도 내 소문이 별로인 것은 알고 있소. 실제로 행실이 좋은 편은 아니니 기꺼이 감수하고 있지. 재종처럼 나라의 모범이 되는 선비라면 내가 꺼려지는 게 이해되오. 까마귀 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라는 말도 있잖소.”

“그런 게 아닙니다.”

 



호롱불의 불꽃이 잠깐 흔들렸다. 은우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속눈썹이 하얀 얼굴 위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라지곤 했다. 천하 절경이로군. 빈은 속으로 그런 감탄이나 했다. 

 



“백로의 빛깔이 희어 언뜻 보면 길조로 여겨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백로 떼가 사는 나무는 그 등쌀에 얼마 안 가 하얗게 말라 죽어버립니다. 거대한 자연의 순환에 그 또한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한낱 인간의 눈으로 애꿎은 나무를 상하게 하는 백로가 어찌 이롭겠습니까? 반면에 까마귀는 울음소리가 선득하고 빛깔도 검어 흉조로 여겨질 때도 있지만, 말 못하는 미물임에도 어미 새를 봉양하고 지극정성으로 새끼를 키웁니다. 이러니 겉모습만 보고 백로에게 까마귀를 피하라 이르는 말이 옳겠습니까? 그 반대라면 모를까요.”

 



빈이 일어나 앉았다. 한쪽 눈썹을 들썩이는 표정이 썩 탐탁잖아 보인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은우에게 바짝 다가왔다. 은우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뒤로 뺐다.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은우의 다리 위를 짚은 빈이 코 앞에서 씩 웃었다.

 



“나는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놈이라.”

“재종.”

“고작 새 타령 따위에 휘둘릴 수는 없지.”

 



미련 없이 일어나 구겨진 겉옷을 탁탁 털어 걸치고 갓끈도 야무지게 맨다. 황망히 올려다보는 은우에게 빈이 상쾌한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더 적극적인 자세로 재종에게 다가가야겠소.”

 



그렇게 선언하고, 은우에게 남 모를 두근거림만 남긴 채 떠난다. 

 









 

조금만 주의를 늦추면 자꾸 사람들과 부딪치기 일쑤라, 은우는 지금 정신이 없다. 이런, 미안하구나. 미안합니다. 괜찮으시오? 지나가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전부 사과할 생각이라도 하는 걸까. 어리숙한 행동을 하는 차은우는 또 새로워 빈이 히죽히죽 웃었다. 은우는 곧 자신을 도와줄 생각은 안 하고 구경이나 하는 빈을 발견하고선 눈썹을 치켜올렸다. 

 



“재미있소?”

“재미있구려.”

“문공은... 성격이 나쁘오.”

“고맙소.”

 



칭찬 아닌데.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은우라 이런 인파 속에서는 어쩔 수 없이 민폐를 끼치게 된다. 체격이 그와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빈은 어쩜 쓱쓱 잘 빠져나가는지 어느 새 또 저 앞에 있다. 놓치지 않으려고 걸음을 서두르자 빈이 그를 돌아보고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시오. 이러다 길 잃어버리겠군.”

“그 정도로, 얼뜨기는 아니오.”

“사고가 지금이다, 하고 나는 줄 아시오? 얼른.”

 



은우가 머뭇거리다가 빈의 손을 잡았다. 무관답게 손가락과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느껴졌다. 체온이 좀 더 높은지 따뜻했고, 의외로 손등은 부드러웠다. 은우는 저도 모르게 감상에 빠져있느라 빈의 물음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장시는 처음이오?”

“…어렸을 때 동무들과 와본 적이 있습니다. 재종은요?”

“난 가끔 온다오.”

 



돌아가신 어머니가 이런 곳 구경하는 걸 좋아했소. 그런데 재종도 아시다시피 양반가 여인이 돌아다니기에는 험한 세상 아니오? 그래서 아들 된 도리로 함께 나들이를 다녔지.

 



“퍽 다정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런 편이오.”

 



그 말에 궁금증이 생긴다. 빈은 지금 은우에게 다정한 쪽일까? 마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빈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장 다정하게 대하는 이가 재종이라오.”

“그…렇습니까?”

“티 나지 않았소?”

“원래 다정하신 성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더 노력해야겠소.”

 



길이 넓어지자 숨 막히는 인파도 흩어져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레 손을 놓은 빈이 한 포목점을 가리켰다. 

 



“청국에서 온 비단을 가장 먼저 파는 곳이지. 가봅시다.”

 



아쉬운 마음으로 빈손을 내려다보던 은우가 빈의 뒤를 따랐다. 빈의 말대로 유명한 포목점인지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곱게 염색된 온갖 천이 걸려있고 쓰개치마를 두른 젊은 여인들과 양반댁 심부름으로 방문한 몸종들이 저마다 물건을 구경하고 고르느라 정신없다. 남녀칠세부동석인데… 은우가 망설이자 빈이 시원스레 말했다. 

 



“저어되면 여기서 기다리시오. 얼른 갔다 오겠소.”

“천천히 볼일 보십시오.”

 



빈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반갑게 그를 맞는 주인의 목소리와 작게 수군거리는 여인들의 속삭임이 들렸다. 어머, 부호관 나리다, 어디 부호관? 내가 말하는 부호관 나리가 저 분 말고 또 있니? 까르르 웃는 소리가 시냇물에 자갈이 부딪치는 것처럼 청명하다. 처음부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자신 말고도 그에게 주목하는 이가 한둘이 아닌 건 자명한 사실인데, 괜히 실감하여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흙바닥을 발 끝으로 툭툭 차길 여러 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은우를 불렀다. 

 



“좌랑?”

 



고개를 들자 과연 아는 얼굴이다. 유생 시절 같은 곳에 기숙했던…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송공?”

“기억하시는군요! 격조했습니다.”

 



감격하여 얼싸안으려는 걸 밀어냈다. 겸연쩍어하는 송 씨를 모른 척하며 은우가 그림처럼 웃었다. 오랜만에 꺼내 보는 버릇이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다를 것 없지요. 요즘에는 집에 아이 우는 소리가 우렁차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오.”

 



왜 이 치가 기억나지 않는지 깨달았다. 은근히 아닌 척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데다 권력에 아부하는 부류라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은우는 송 씨가 원하는 대로 몇 차례 건조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빨리 보내고 싶다. 그의 재종형제에게 별로 보여주고 싶은 인물은 아니다. 

 



“그나저나 좌랑께서 장시, 그것도 포목점에는 웬일로….”

“재종, 잠깐 이리… 어라.”

 



주렴을 걷고 불쑥 고개를 내민 빈이 은우 곁에 있는 이를 보고 삐뚜름하게 웃었다. 은우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조금 상스럽게 표현하자면, 그렇게 재수 없게 느껴지는 미소는 처음이었다.

 



“그, 좌랑. 저 치와 아는 사이십니까?”

“오,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재종, 저 치와 아는 사이요?”

 



은우는 송 씨를 무감한 눈으로 일별하고, 빈에게 대답했다. 

 



“예전 성균관에서 같이 수학하던 사이입니다.”

“아. 그냥 지인.”

“이…! 좌랑! 저 무도한 사람과는 대체,”

 



과연 둘 사이 어떤 역사가 있어 송 씨가 빈을 ‘무도하다’고 표현하는지 조금 궁금했지만―빈이 아주 일부분 ‘무도하다’고 일컬을 수 있는 사람이긴 했다―지금 중요한 그게 아니었다. 은우는 망설임 없이 송 씨에게 일갈했다. 

 



“이 이는 나와 재종형제 사이고, 아주 가깝습니다. 깎아내리는 말은 듣기 좋지 않습니다.”

“좌랑!”

“애월이 손가락 몫은 아직 남았는데 지금 여기서 갚을까?”

 



빈의 위협에 그제야 송 씨가 황급히 달아났다. 은우가 애월이? 하고 되뇌자 빈이 느릿하게 설명했다. 

 



“예전에 가야금 연주를 기가 막히게 하던 기생이 있었소. 저 자식이 손가락을 죄 부러뜨려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름 높았을 터인데.”

“그 기생과 정이 두터우신가 봅니다.”

“음? 아니오. 그냥저냥 아는 사이지. 하는 게 재수 없어서 대신 갚아줬을 뿐이오.”

 



그러다 보니 여러 기생들과 좀 친하게 되었다고, 이럴 줄 알았으면 기둥서방이나 할 걸 그랬다며 또 채신머리 없는 농담을 지껄인다. 

 



“문공은 역시 다정한 사람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소?”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시고.”

“꼭 토라진 것 같소, 차공.”

 



그럴지도 모르겠다. 빈은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건 됐고, 이리 와보시오.”

 



은우는 빈의 손에 이끌려 포목점 안쪽에 들어갔다. 자신이 봐놓은 게 있다면 데려간 곳에 검푸른 색의 천이 나풀거렸다. 다른 것보다 푸른 색이 더욱 선명하여 마치 바닷물 같았다. 빈을 그것을 은우의 얼굴에 대보더니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재종은 푸른 색이 잘 받는 것 같소.”

“예?”

“선물 하나 하려고 하니 거절 말고 받으시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뇌물이오. 나랑 계속 놀아달라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손사래치기도 어려웠다. 치수까지 다 재고 나오자 괜히 창피한 은우가 이제 갈까요, 라고 묻고는 답도 기다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볍고 날랜 발소리가 뒤를 따랐다.

 



“그래도 아까 그 치를 대하는 재종을 보니, 재종과 내가 가까워지긴 한 것 같아 기껍소.”

“그렇습니까?”

“혹시 편하지 않을수록 다정히 대하는, 뭐 그런 삐딱한 성격은 아니지요?”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는지 그림자가 길어졌다. 푸른 하늘도 동쪽부터 서서히 짙어져서는 하얀 조각 달도 떴다. 강변을 따라 노를 젓는 뱃사공이 구슬픈 노래를 부르고, 새카만 머리를 쫑쫑 땋은 꼬마 아이가 자기 동생을 안고 종종걸음을 친다. 머리에 바구니를 인 아낙네 두엇이 깔깔 웃으며 골목길을 돌았다. 하지만 그런 다채로운 풍경 안에서 선명히 보이는 이는 오직….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지금까지…내가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거리를 두고 무뚝뚝하게 대하는 줄 알았습니다.”

 



살며시 지은 미소는 바람이 모래에 남기고 간 자국 만큼이나 희미하다.

 



“아니더군요.”

“그걸 나 때문에 알았소?”

“그렇습니다.”

“그럼 재종도 내가 퍽 좋아진 모양이오.”

“예.”

 



뭐가 그렇게 좋은지 빈은 펄쩍 제자리 뜀을 했다. 날렵하게 착지하는 다리 위로 옷색 도포 자락이 휘날렸다. 입을 크게 벌리고 와하하 웃는데 보는 이의 가슴이 다 뚫린다. 접힌 눈이 꼭 하얀 떡 위에 손톱자국을 내놓은 것처럼 가느다랬다. 

 



“그럼 우린 서로 좋아하는 사이네.”

 



그 말이 은우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빈은 결코 모를 것이다.

 





*

 





“어떤가. 가망이 있을 것 같은가?”

“가망이고 자시고 움직이지 마세요.”

 



화공의 일갈에 빈이 몸을 원래대로 했다. 대신 빈의 밑에 누워있던 반라의 창기가 말을 받았다. 

 



“도련님 말만 들으면 그 분께서 도련님을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요?”

“그래?”

“소녀 생각은 그래요.”

“어허, 움직이지들 마시라니깐.”

 



세필 붓으로 구겨진 옷 주름까지 그려 넣은 화공이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킨 빈이 기지개를 켰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느라 굳어있던 어깨며 허리에서 뚝 소리가 났다. 그동안 속곳 끝을 다시 묶고 속치마를 동여맨 창기가 화공이 그린 그림을 유심히 살폈다. 

 



“언제봐도 잘 그린다.”

“이걸로 먹고 사는데 당연하지.”

“나중에 나 초상화 하나 그려줘요, 언니.”

“하나. 나는 돈 안 되는 일은 안 한다. 둘. 언니라고 부르지 마라.”

“에이 거참 빡빡하게 구네.”

“다툴 거면 나가서들 다퉈라.”

 



이 남장 화공과 빈이 작당하고 춘화첩을 제작한 지도 제법 되었다. 등장인물은 빈과 주로 사정이 어려운 퇴기 또는 별 다른 재주도 없고 남자 손님을 받기 두려워하는 어린 기생들이다. 나라에서 금하는 음란서적을 만들고 팔기까지 하니 만약 들켰다간 단순한 망신에서 그치지 않겠지만 빈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고 보람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돈벌이도 쏠쏠하고. 

 
주눅 들지 않고 제 할 말만 따박따박하는 깍쟁이는 대담하게 먼저 접근하여 춘화를 그려주겠다 제안했고, 괴짜는 괴짜를 알아본다고 첫 눈에 화공의 진짜 성별을 눈치챈 빈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 이유를 묻자 

 

‘제가 본 남성분들 중 나으리 몸이 가장 보기 좋고 음탕합니다.’  

 

빈이 아닌 다른 양반이었다면 모욕이라고 바로 매타작을 벌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후에 화공은 여자가 그린 그림이라고 자꾸 판매를 거절당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고 수줍게 말했으나 빈은 속지 않았다. 자포자기한 사람이 무슨 남자들 몸을 뜯어먹을 것처럼 자세히 관찰한단 말인가. 

 



“나으리.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번 그림은 언제쯤 끝날 것 같은가?”

“사흘이면 채색까지 완료할 것 같습니다.”

“얼굴 고치는 것 잊지 말고.”

“말해 무엇합니까.”

 



공손히 읍하고 도구를 주섬주섬 챙겨 나간다. 빈은 아직도 맨 어깨를 드러낸 창기에게도 일렀다. 

 



“너도 그만 가보아라.”

“아이, 나리. 자고 가면 안되어요?”

“응. 안된다.”

“그렇지만….”

 



창기가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요릿집에 호판 댁 아드님이 그 왈패를 이끌고 온다고 했단 말이어요.”

 



호조판서의 왈패 끌고 다니는 아들이라면 빈도 안다. 난봉꾼에 손찌검도 잦아 그가 다녀가면 꼭 한 두어명은 며칠을 끙끙 앓는다 들었다. 머리를 올린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기생의 동그란 뺨을 보던 빈이 한숨을 쉬고 드러누웠다. 

 



“에휴. 그래라.”

“와 신난다!”

“혹여 다른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무슨 생각이요?”

 



요를 빈의 잠자리 바로 옆에 깔며 순진한 척 과장되게 눈을 깜박인다. 빈은 코웃음 쳤다. 

 



“이 호랑말코 같은 계집애야. 네가 동기들에게 내 첩살이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아이참, 그건 또 언제 들으셨데.”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

 



그 말에 잠시 조용해졌던 창기는 오래지 않아 또 재잘재잘 떠들었다. ‘나으리, 나으리는 저를 보면 동하지 않으시나요? 고자는 아니시지요?’, ‘나리는 왜 혼인하지 않으셔요?’, ‘숙부인댁 큰 아드님 정말 그렇게 훤칠하셔요?’…. 양반의 숙면을 방해하다니 건방지기 이를 데 없다. 빈은 손으로 귀를 막고 자는 척하다가, 어느 순간 진짜로 잠들었다.

 





*

 





“나리. 나리.”

 



몸을 흔들며 깨우는 작은 목소리에 빈이 간신히 눈을 떴다. 아침이 되었는지 창살 밖이 밝았다. 언제부터 불렀는지 모르겠지만 청지기가 애타게 빈에게 고하고 있었다. 

 



“아이고 도련님! 손님이 오셨다니까요!”

 



대관절 누구길래 이렇게 일찍, 짜증이 난 빈이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청지기 옆에 서 있던 이가 눈을 들었다. 오늘도 흰 옷을 단정하게 입은 은우였다. 은우는 빈을 보고 눈을 휘며 웃다가, 빈의 옆에서 고개를 빼고 자신을 훔쳐보는 창기와 흐트러진 빈의 옷차림을 보고 거짓말처럼 굳어졌다. 

 



“어…. 재종.”

“실례가 많았소.”

 



두말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 나가는데, 어찌나 싸늘한지 빈은 차마 잡을 생각도 못 했다.

 



“나리, 소녀가 잘못한 것이어요?”

“아니다…….”

 



영문 모르고 옆에서 눈치 보는 여자아이에게 차마 탓을 할 수는 없어서, 빈은 벅벅 마른 얼굴만 손바닥으로 거듭 문질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은우에게서 연락이 없다. 빈이 팔짱을 끼고 고심했다. 서신을 보내도 답이 없어, 찾아가면 출타 중이래, 단골 서책방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솔직히 따져보면 빈이 그렇게 잘못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죽은 아내에 대한 의리인지 뭔지 때문에 정절을 지키는 중인 차은우가 보기엔 대단히 못마땅한 광경일 수도 있겠으나, 빈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둘의 사이가 뭐, 특별한 교감이 오가던 그런… 그런 관계도 아니었는….

 

입맛이 쓰다.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던 빈이 어느새 해가 저물고 어두워진 하늘을 살폈다. 통금 시간이 언제더라.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단단히 결심한 빈이 살금살금 대청으로 나왔을 때였다. 

 



“어…….”

 



담을 넘어 들어오던 차은우와 정통으로 마주쳤다. 

 



“대관절 뭐 하고 계시오, 재종?”

“…담을 넘고 있었습니다.”

“나도 눈이 있소. 일단 얼른 내려오시오!”

 



그럼,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 은우가 날래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혹시나 다칠까 잡아주려 손을 내밀고 있던 빈이 머쓱하게 거두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안으로 들겠소?”

“잠시 들렀다 가겠습니다.”

 



방 안에서도 은우는 한참을 말 없이 바닥만 바라보았다. 혹시나 은우가 자신의 문란하고 가벼운 행동 때문에 사적인 교류를 더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까 전전긍긍하던 빈이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재종. 무슨 말이든 좋으니….”

“제가 그동안 마음 정리를 좀 했습니다.”

 



마음 정리? 진짜로 절연하겠다는 소리인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빈이 은우의 옷 소매를 잡았다. 은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빈의 손을 잡아 떼어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어리석게도…해서는 안될 착각을 하여.”

 



깊게 한숨을 내쉬는 은우는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미안합니다. 당신을 모욕적으로 망상하고, 내 마음대로 기대했다가 실망하였습니다.”

“재종.”

“하물며 조금 멀긴 해도 혈족 지간인데….”

 



서서히 빈은 깨닫는다. 은우는 고백하는 내내 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파르르 떨리는 붉은 입술에 홀린 듯 시선을 고정했다가 빈이 눈동자를 들어 올리자, 어느 새 고요히 자신을 주시하는 까만 눈동자가 보인다. 영민하게 반짝이는 빛이 언제나 아름다운 재종형제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위험하리만치 낮아졌다. 

 



“혹 저 만의 망상이 아닌지요.”

 



이번엔 빈의 할 말이 궁했다. 어쩔 줄 모르는 입술을 꾹 안으로 말았다.

 



“어머니와… 당신이 어떤 거래를 했는지 대강은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감사할 일.”

 



점점 가까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조금 겁이 난 빈이 은우의 가슴을 짚자 아까와는 반대로 은우가 그 손을 꽉 잡아 왔다. 손가락을 아플 만치 꽉 얽어온다.

 



“너무 취향인 당신이 먼저 와줬는데, 나로서는 도리가 없습니다.”

 



비가 왔다. 아까까지만 해도 구름 너머 고개 내민 달이 밝더니 삽시간에 거센 비를 뿌린다. 예년보다 날이 따뜻하여 시름은 좀 덜었으나, 아무래도 자유로이 다니기에는 비가 불편하다. 월담하여 들어와 엉겁결에 빈의 집에서 밤을 보내게 된 은우는 빈과 대작을 하였다. 

 

그는 빈에게 특별히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도 속이 복잡하긴 한지, 빈이 한 잔을 비울 때 혼자 석 잔을 마시더니 금방 취해 고꾸라졌다. 앉은 자세로 목이 부러져라 꺾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만 안쓰러워져, 빈은 직접 상을 물리고 은우를 끌어다 자기 무릎을 베게 했다. 

 

그래서 혼인하지 않고 평생 수절한다고 했던 거였구나. 이제 은우의 행동이 이해가 간다. 왠지 사람에게 냉담했던 태도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던 모습도. 물끄러미 눈을 감은 은우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밖에서는 지면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요란한데, 창호지를 통과하면 놀랄 만큼 부드럽게 박자가 되어 방 안에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빈의 눈꺼풀도 점차 무거워졌다.

 



“나도 취했나보다.”

 



그게 아니라면 잠든 은우에게 제가 입 맞춘 이유를 알 수 없다. 

 





*

 





까마귀가 결국 백로 우는 곁에 날개를 내리고 말았다. 

 







 



아침에 눈을 뜬 은우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곁에서 불편하게 웅크리고 잠이 든 빈을 발견했다. 그의 이마 언저리를 손으로 살며시 쓸어본 은우는 곧 조용히 방을 나섰다. 귀가 어두운 청지기 영감이 마당을 쓸다 은우를 보고 허리를 굽히자, 조용히 하란 손짓을 한다. 

 



“조금 늦게 잠들어, 피곤할 것이외다.”

“아, 알겠습니다요.”

 



은우는 빈의 집을 나오며, 이제 그와의 즐거웠던 한 때도 끝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고작 하루 뒤에 빈이 손에 작은 꾸러미를 들고 방문한 것이다. 당황한 은우가 인사도 하지 않고 벙벙하여 쳐다보자 빈이 장난스레 대꾸했다. 

 



“나 다시 가오?”

 



그건 싫다. 은우는 버선발로 뛰어나와 빈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휙 끌어당겼다. 헛기침을 하고 주저앉은 빈이 보따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붉은색 꽃잎과 작은 절굿공이와 삼끈과…. 소꿉놀이 같은 물건들에 은우가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우리 집 부엌일 해주는 함안댁 손녀가 이제 일곱 살인데, 어찌나 똑똑한지 모르오.”

 



영 딴소리였지만 은우는 재촉 않고 들었다. 

 



“고 어린 계집애가 사리 분별은 정승보다 잘하지 뭐요. 그래서 내 고민이 있으면 가끔 녹영이, 아 그 아이 이름이 녹영이오. 녹영이에게 가르침을 청하곤 하지.”

“그렇습니까?”

“그런데 오늘 고사리 같은 손에다가 꽃물을 들이고 있지 않겠소? 무엇하냐고 물었더니 봉숭아 꽃물이고, 이걸 손톱에 물들여서 첫 눈 올 때까지 계속 붉은 빛이면 사랑이 이뤄진다고 맹랑하게 대답하더이다. 벌써 마음에 둔 사내라도 있는 건지 내 가슴이 찢어질 뻔했다오.”

 



절굿공이에 짓이겨진 꽃잎이 뭉쳐진다. 검붉은 색이 꼭 핏덩이 같기도 하다. 빈이 손가락을 까닥까닥 하여 은우가 왼손을 내밀자, 꽉 잡고 새끼손톱 위에 뭉친 꽃잎 덩어리를 조금 떼어 올려놓고 천 조각과 삼끈으로 고정했다. 가만히 집중하느라 튀어나온 빈의 입술 언저리를 내려다보던 빈이 반대쪽 손도 내밀었다. 

 



“이왕 해주실 거면 열 손가락 다 부탁드립니다.”

“음? 괜찮겠소?”

“하나라도 더 해야 사랑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게 아닙니까? 조금의 후회도 하고 싶지 않군요.”

 



아무 말 없이 은우의 손을 끌어당겨, 그 말대로 열 손가락 모두에 천 조각과 삼베끈을 칭칭 둘렀다. 빈의 귀가 빨갰다.

 



“차공,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잘 하시오.”

 





*

 





그 해 유난히 눈이 빨리 내렸다.

 

소리 없이 내린 함박눈이 쌓여 오밤중에도 사위가 밝았다. 춥지도 않은지 창문을 열고 멍하니 턱을 괴고 있던 빈이 이윽고 미소를 지었다. 사박사박, 깨끗한 눈을 밟고 은우가 그에게 왔다. 빈이 선물한 푸른 색의 두루마기가 잘 어울렸다. 그는 조금 긴장한 것 같았다. 더 가까워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빈을 올려다본다. 

 



“왜 그러고 있소?”

“당신을…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소.”

“이름을 부르면 되지.”

 



은우야. 이렇게.

 

양팔을 벌리고 이리 오라는 듯. 안 오고 뭐하냐는 듯. 은우가 홀린 것처럼 다가갔다. 섬돌에 신발을 급하게 벗느라 비뚤비뚤, 한 짝은 심지어 그 밑으로 떨어져 버렸지만 온통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다. 보듬는 팔 안에 단단한 몸이 꽉 찼다. 

 





*

 





은밀한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작도 전에 먼저 끝을 예감했으므로 은우와 빈은 서로에게만 집중했다. 절박하고도 병적인 사랑이었다. 아들이 빈의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자 여인은 은우가 빈의 집에서 기생들과 놀아나기라도 한 줄 알았다. 그러나 영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 몰래 뒤를 밟게 했다. 그리고 꿈에서도 나올까 두려운 진실을 알았다.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여인은 수소문 끝에 사람을 불러 빈의 암살을 의뢰했다. 아들 은우는 장정 여럿을 시켜 광에 가두었다. 빈이 얼마나 뛰어난 무관인지 관심조차 없었던 게 패착이었다. 빈은 피를 좀 흘리긴 했지만 무사히 감금된 은우를 구했다. 깨끗하게 잘린 자물쇠의 단면을 보며 여인이 울부짖었으나 이미 둘은 한양을 떠나 멀리 연경으로 가는 배를 탄 뒤였다.  

 

나라에서 천주쟁이들을 작심하고 잡아 죽인다는 소문이 퍼져 몰래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밤만 되면 기도 소리가 마치 주문처럼 배 안을 떠돌았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은우가 신자들에게 설교하던 신부를 향해 질문했다.

 

‘당신이 믿는 신은 어떤 사랑도 품을 수 있습니까?’

 

신부는 은우와 빈을 번갈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동성애는 죄악이오.’

 

몇 시간 후 모두가 잠든 밤 풍덩 소리가 났다. 유서가 없어 실수로 빠져 죽은 게 아닌가 했지만, 곱게 벗어놓은 두 켤레의 남자 신발을 발견한 후 모두 애도했다. 신부는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내가 서툴어 애꿎은 청년 둘을 죽게 했구나!’







written by Thalas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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