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열가지 이유

2020 겨울호
작성자
유리잔
작성일
2021-01-16 22:29
조회
57


    급식 시간을 노려. 걘 밥 먹을 때 제일 행복하다니까.


    입 가득 밥을 씹으며 허허허 웃는 빈의 모습이 정말 행복해 보이긴 했으나, 급식실 앞에서 은우는 발만 동동 굴렀다. 선거 유세 다닐 때도 여유롭게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울상을 짓던 은우가 이재의 말을 생각하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너 쟤만 공략하면 운동부 표는 다 니꺼 되는거라니까. 원하는 대학에 지원하려면 학생회장 경험이 꼭 필요했다. 그래, 내가 자존심 팔아서 문빈 얻고 명예도 얻는다. 짧게 숨을 뱉은 은우가 결의에 찬 얼굴로 급식실에 들어섰다.


"마셔."


    이미 제 몫의 초코우유를 다 마시고 입맛을 다시던 빈의 앞에 새 것이 놓여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던 빈이 은우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번 얼굴을 찌푸렸다.


"시비거냐?"

"아니, 쫌."


    발끈하던 은우가 이내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침착하자, 차은우. 평소의 차은우처럼만 행동하면돼.


"그냥 마시라고. 너 이거 좋아하잖아."


    최대한의 다정함을 끌어올려 은우가 생긋 웃어보였다. 보통 정상적인 애들이라면 은우의 호의에 고마워할법하지만, 빈의 얼굴이 보란듯이 일그러졌다.


"약 먹었냐?"


     아니, 씨발.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열가지 이유

차은우 X 문빈





    은우와 빈의 사이를 표현하자면 그랬다. 개와 고양이. N극과 S극. 햇빛과 바람. 그저 상극.


    시작은 고등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되어 열렸던 논술 대회였다. '사형제도 찬반토론'이라는 진부한 주제 아래 뻔한 토론이었다. 단지 지독히 논리충인 은우가 찬성, 지독히 감성충인 빈이 반대 의견이었을뿐.


'사람 목숨이 그렇게 쉽냐? 완전 싸이코패스아냐?'

'뭐?? 싸이코패스???'


    가벼운 의견차에 감정이 실리고 둘 다 핏대세워가며 싸우다 결국 빈의 입에서 싸이코패스 소리가 나온 순간 은우가 책상을 쾅 치며 일어난것은 지금도 회자되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 빈과 은우는 정말 전생에 원수였던 것 처럼 사사건건 부딪혔다. 빈에게 있어 원칙적이고 이성적인 은우는 공감능력없는 싸이코패스였고, 빈에게 한 번 멱살을 잡혔던 은우에게는 빈이 너무 단순하고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운명론적인 인간이었다. 한마디로, 둘은 안맞아도 너무 안맞았다.


    그렇게 일년이 지난 지금. 전교회장선거에 나가게 된 은우는 강력한 라이벌에 맞서기 위해 아직 선거정치가 닿지 않은 표심이 필요했다. 그걸 얻기 위해선 운동부의 주장인 빈의 환심을 사야하는, 비극적인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공적인 일을 하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릴 수 없지. 거대한 포부로 은우는 빈에게 살갑게 굴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럴 때 마다 무언가 삐끗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농구 수행평가 연습을 하는 빈을 보던 은우는 운동의 신이라던 빈이 유독 공에는 약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제가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는 이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 마침 은우는 농구라면 자신있었다.


"너 공놀이는 잘 못하는구나. 내가 가르쳐줄까?"

"너 지금 나 꼽주냐?"


    최대한의 친절을 끌어모아 물었던 은우가 띠꺼운 빈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아니 왜 또 말이 그렇게 돼? 도와준다니까?"

"니 도움 필요 없거든."


    와. 저 싸가지. 은우는 농구공을 안고 저를 휙 지나치는 빈의 뒷모습을 노려보다 쫒아갔다. 나도 참을만큼 참았어.


"넌 내가 왜 그렇게 싫은데"

"그걸 말해줘야 아냐?"

"어, 말해줘."


    진짜 모르겠다는 은우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을 치던 빈이 손을 들어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말했다.


"난 너처럼 융통성 없는 사람 싫어. 싸이코패스도 싫고. 학생회니 뭐니 그런것도 싫고. 니 싸가지없는 눈도 싫고. 갑자기 나한테 친한척 하는 것도 싫고. 공부 잘한다고 남들 무시하는 것도 재수없어. 거기다 농구도 잘하는거 진짜 꼴불견이야. 나보다 약간 큰 것도 짜증나. 그 중에도 난 네 얼굴이 제일 싫어. "


"내 얼굴은 왜?"

"너무 배려심이 부족한 얼굴이야."


    ....그냥 내가 싫다는거잖아?





    이쯤되니 은우도 슬슬 포기란 마음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플랜을 바꿔야겠어. 문빈 걔는 안된다니까."

"야, 지금와서 어떻게 바꿔. 지금 표심 돌릴수 있는데는 거기 뿐이라니까."

"불가능해. 그리고 걔가 이런거에 관심이나 있겠어? 머릿속에 근육만 들었는데."


    당장 선거도 며칠 안남았는데 복잡해진 상황에 은우가 한숨을 쉬었다. 덩달아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보던 이재가 이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저거 왜저래."


    이재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은 은우가 본 것은 창문 틀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리는 큰 화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를 지나치고 있는 빈을 본 순간, 은우는 저도 모르게 달렸다.


"차은우!"


    저를 부르는 이재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은우가 바로 제 밑에 깔린 빈의 얼굴을 확인했다. 놀랐는지 조금 하얗게 질려있긴 했지만 멀쩡했다. 뒤를 돌아보자 산산조각나있는 화분이 보였다. 저기에 머리를 맞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괜찮냐?"

"너 미쳤냐? 거길 갑자기 왜 끼어들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은우가 손을 내밀었지만, 빈은 그 손을 잡지도 않고 앉은 채 물었다. 기껏 구해줬더니 떡 하나 더 내놓으라는 심보에 울컥하던 은우가 이내 가벼운 통증에 허리를 짚었다.


"고마우면 그냥 고맙다고 해라. 아 허리 아파."

"미친새끼."


   그제서야 은우의 손을 잡고 일어난 빈이 우물쭈물하더니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고마우면 밥이나 사던가."


    은우가 능글거리게 말하자 고새 평소의 빈으로 돌아온 빈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쾅쾅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빈의 뒷모습을 보며 은우가 피식 웃고 있는데 이재가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너 진짜 대단하다. 넌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태어난 앤가봐."

"조용히 해."

"어떻게 바로 몸부터 나갔냐?" 목숨으로 환심을 사겠다 뭐 이런건가."


    그러게. 빈을 갑작스럽게 밀치느라 살짝 삐긋한 허리를 붙잡고 은우가 생각에 빠졌다. 사실 빈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몸이 나갔다. 더군다나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던 앤데. 은우가 괜히 또 복잡해지려는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쨌든 공략할 기회를 얻었으니 잘 된 일이었다.





    불판 위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고기를 앞에 두고 빈은 젓가락을 쥔 채 어딘가 띠꺼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간간히 흘끔거리며 은우가 정신없이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안먹냐?"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네가 은혜를 갚는 중이지. 안 갚으려고 했냐?"

"갑자기 사람을 끌고오면 갚고 싶다가도 안 갚고 싶어질 것 같은데."

"일단 먹지? 고기 타는데."


    두 볼 가득 고기를 넣고 우물거리는 은우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빈이 그제서야 마지못해 젓가락질을 했다. 투덜거리던것도 잠시 이내 열심히도 고기를 입에 넣는 빈을 보며 은우가 몰래 웃었다. 평소엔 그렇게 나만 보면 못죽여서 안달이더니,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고기를 잘 먹고 있는 빈의 모습이 귀여웠다. 하긴, 빈은 원래 은우만 아니면 대체로 순둥한 표정이긴 했다.


"이거 먹고 카페가자. 나 케이크 먹고싶어."

"니나 먹어."

"내가 니 목숨 살려준 은인인데"


    시발, 이걸로 몇 번은 더 우려먹겠네. 빈이 탁소리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아도 은우는 못들은 채 열심히 고기만 먹었다. 얼추 고기를 다 먹어가고 정신을 차리자 드디어 은우와 단둘이 있다는게 실감이 났다. 아무래도 친했던 사이는 아니라 침묵이 좀 어색해서 빈이 티비로 눈을 돌렸다.


"어, 저거. 내가 좋아하는 영환데."

"너가? 저거 로맨스영환데?"

"난 로맨스 영화 좋아하면 안되냐?"


    '너를 사랑할 수 없는 열가지 이유'. 유명한 로맨스 영화의 재개봉 예고편을 가만히 보던 은우가 어께를 으쓱했다. 아니 좀 의외여서. 머리에 근육만 들어있는 줄 알았는데. 하긴 빈이 의외로 책도 많이 읽고 시도 쓴다는 것으로 보아 꽤나 감성적인 편이긴 했다. 


"넌 무슨 영화 좋아하는데?"

"나도 로맨스 영화 좋아해. 저 영화는 아직 못봤지만."


    니가? 사랑은 그저 호르몬의 장난일 뿐이지, 라고 말할 것 같은 은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평소에 말투가 싸가지없어서 그렇지 은우의 얼굴만큼은 천상 로맨스였다. 빈을 대할 때 아니고서야 대체로 다정한 편이기도 했고. 그제서야 빈은 은유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유하게 풀려있다는 것을 느꼈다. 차은우와 이렇게 학교 밖에서 단 둘이 밥을 먹고 있다는게 새삼 묘하게 다가왔다.





    .....묘하긴 뭐가 묘해. 내가 저 얼굴에 넘어갔구나 씨발. 빌지를 몇번이고 확인한 후 거기에 찍힌 금액이 거짓이 아니라는걸 깨달은 빈이 뒷목을 잡았다.


"미친 무슨 둘이서 고기를 칠인분,"

"야 솔직히 너도 반 먹었다. 인정해라."


    솔직히 할 말이 없어서 빈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릴 때 부터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먹는양이 늘은 빈이었지만 생긴건 식욕 없게 생긴 은우가 저렇게 잘 먹을 줄은 몰랐다. 먼저 나가 있는다. 어께를 으쓱하며 먼저 식당을 빠져나가는 은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빈이 이내 한숨을 쉬며 계산대 앞에 섰다. 계산이요. 핸드폰을 꺼내 삼성페이를 준비하는데 알바생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계산 하셨는데요?"

"네?"


    고기 칠인분에 밥 세공기, 음료수까지 총 십만이천삼백원이 계산되었음을 확인한 빈이 얼떨떨한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고개를 돌리자 골목길에 쭈구려앉아있는 은우가 보였다.


"뭐냐?"

"이거 봐봐. 고양이."


    은우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길고양이 한마리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은우와 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으로 우쮸쮸 소리는 내는 은우를 보던 빈이 저도 모르게 은우를 따라 쭈구려앉았다.


"귀엽네."


    피도 눈물도 없는 싸이코패스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고양이한테 꿀떨어지는 눈빛을 보내는걸 보니까 좀 의외였다. 이런 면도 있었네, 라고 생각하는데 도로에서 들린 경적음에 고양이가 도망가버렸다. 어 갔다. 우리도 가자. 손바닥을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우를 따라 일어선 빈이 물었다.


"왜 니가 계산했냐고."

"담번엔 니가 사던가."


    별 일 아니라는 듯 어께를 으쓱하며 웃어보이는 은우를 가만히 보고 있자 실실 웃던 은우가 이내 간다며 손을 흔들었다. 멀어지는 은우의 뒷모습을 바라만보고 있던 빈이 순간 머리가 띵함을 느꼈다.


    저거 완전 고단수아냐?





"넌 사람 말도 없이 끌고오는게 취미냐?"


    갤럭시버즈 끼고 학교 교문 나오는 순간 납치를 당해 택시 안으로 넣어졌다. 당장 내려달라고 바락바락거리는데도 들은척 안하더니 도착한 곳은 영화관. 그래도 요 근래 친해졌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은우가 안겨준 팝콘 잘 줏어먹는 빈을 보며 은우가 몰래 웃었다.


"내가 좋은데 가자고 했잖아."

"영화관이라고는 안했잖아."

"네가 보고싶어하던 영화 보러왔으니까 좋은거지."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열가지 이유.' 흘리듯 말했었던 본인도 정작 보러가는걸 까먹었는데, 이렇게 은우 손에 이끌려 영화관에 오니 괜히 기분이 이상하다. 영화 시작 전 지나가는 광고들을 보며 빈이 어께를 으쓱했다.


"그러네 거짓말은 안했네."

"왜. 거짓말은 싫어?"

"어 나 거짓말 엄청 싫어해. 세상에서 제일."


    스크린 불빛에 비친 빈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은우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쉴새없이 조잘거리면서 간간히 팝콘을 쏙 집어넣는 입술이 왠지 참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시작한다."


    문제는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참새 부리 입술에 신경이 쓰였다는 거다. 왜이렇게 입술만 보이냐. 미약한 스크린 아래에서도 빈의 톡 튀어나온 윗입술이 보였다. 가만히 그 입술만 보다 빈과 눈이 마주쳤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하필이면 스크린에서 키스신이 나오고 있다.


    빈 역시 은우와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괜히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그리 진하지도 않은 키스신인데 옆에 앉은 은우가 신경쓰여서 땀이 날 정도였다. 쟨 무슨 생각이지. 슬쩍 은우를 곁눈질하려다가 또 다시 눈이 마주쳤다. 별안간 그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입술이 닿았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나 미쳤나봐 이재야."


    빈과 그렇게 키스하고 서로 새빨개진 얼굴로 헤어진 후 은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갑자기 왜 키스를 했지? 그것도 문빈한테? 미쳤구나 미쳤어. 은우가 신음소리를 내며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놀란 이재가 은우의 팔을 잡았다.


"왜 그래. 힘들어서 미친거야? 야 선거 일주일남았어. 일주일만 참아."


    아 맞다. 선거. 은우는 그제서야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빈에게 다가간 목적을 어느 순간부터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왠만큼 친해졌고 어제는 키..스도 했으니 저를 밀어달라고 하면 빈은 아마 해 줄 것이다. 은우가 먼저 말하지않는 이상 은근히 둔한 빈은 은우가 표를 위해 빈에게 접근했다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빈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숨기고 싶었고, 숨길 수 있었지만 빈의 성격에 그냥 미리 말하고 용서를 받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말해야 한다.


"나 문빈한테 말할래."

"뭐를?"

"전부."

"미쳤어?"


    아무것도 모르는 이재는 은우가 빈에 대한 죄책감과 선거에 대한 부담감에 정신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울상을 한 은우의 두 볼을 쥐고 이재가 애 달래듯 말했다.


"야, 이런 거로 흔들리면 안돼."

"그게 아니라,"

"일주일만 참으면 문빈네 운동부 표가 다 니꺼라니까. 너 지금까지 노력한게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들리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에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은우가 삐걱대는 목을 겨우 돌리자 차갑게 굳은 얼굴로 둘을 바라보는 빈이 보였다.


"진짜야?"

"문빈

"너,"


    아니라고 변명해야하는데 뭐라고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평소에 언변이라면 자신있던 은우였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은우를 바라보던 빈의 얼굴이 점점 더 딱딱해져가고 이내 허탈한 숨소리와 함께 빈이 등을 돌렸다.


"잠깐만,"

"놔."


    뒤쫒아 달려간 은우가 나름 힘을 주어 빈의 손목을 잡았지만, 평생 운동을 해 온 빈의 힘도 만만치 않았다. 금새 저를 뿌리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빈에게 뛰다싶이 다가간 은우가 이 번엔 빈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래, 처음엔 속인거 맞아. 근데 중간부터는 정말 진심이었어."

"한 번 거짓말한 사람을 내가 어떻게믿어"

"정말이야. 나도 진짜 너한테 다 말하려고,"

"그렇다고 거짓말한게 다 없던 일이 돼?"


    평소 은우를 대하던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니라, 차분하면서도 담담한 목소리에 맥이 풀렸다. 은우가 저도 모르게 빈의 어께를 잡았던 손에 힘이 풀리자 이내 빈이 한 발자국 물러섰다.


"네가 지금은 진심이라해도, 난 너처럼 속이는거에 익숙한 사람 제일 싫어해."

".............."

"거짓말에 넘어간 내가 병신이지."


    차가운 빈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푹푹 꽂혔다. 차마 쫓아가지도 못하고 멀어지는 빈을 보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이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차은우, 어떻게 된거야."

"............"

"야, 너 울어?!"


    내가 운다고? 놀란 얼굴을 한 이재를 보고서야 은우는 제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눈물임을 깨달았다. 나 진짜 우는구나. 나 왜 울지. 당황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도 수도꼭지가 열린 것 처럼 계속 눈물이 났다.  은우가 선거에서 질 까봐 운다고 생각한 이재가 안쓰러운 얼굴로 은우의 어께를 토닥여 주었다. 


"다른데서 표 공략하면 되지. 문빈이 소문낼 성격도 아니고."

"이재야...."

"응, 그래."

"나 문빈 좋아하나봐."

"....뭐?"


    근데 걔는 나 싫대. 벌어진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한 이재 앞에서 은우가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선거 결과를 알리는 포스터가 게시판에 붙고,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축하를 받는 은우를 보던 빈이 조용히 자리를 떴다. 벌써 그 날이 있은 후 일주일이 지났다.


    옥상에 올라가 하늘을 보고있으니 마치 모든게 한여름밤의 꿈처럼 느껴졌다. 그 날 이후 은우는 그대로 잠수를 탔다. 붙잡기는 커녕 사과도 안하는 은우를 보며 빈은 밤마다 혼자 울었다가, 은우를 욕했다가, 다시 우는 것을 반복했다. 개새끼. 나쁜새끼. 쓰레기새끼. 역시 싸이코패스가 맞았다. 그깟 표 얻으려고 사람을 이용해먹다니.


    바보처럼 속았던건 나인데도, 은우를 볼 때 마다 울컥해서 시선을 마주하기도 어려웠다. 이래서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던건데. 상처받을 것 같아서. 사실 빈은 은우를 처음 보았을 때 부터 조금 두근거렸다. 은우는 너무나도 빈의 취향이었고, 은우가 신경쓰여서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굴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진짜 나만 병신됐네."

"빈아."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방금까지 친구들 틈에 있던 은우가 어느새 옥상 문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었다. 잠시 은우를 바라보던 빈이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대로 은우를 지나치려는 순간 은우가 빈의 손목을 잡았다.


"빈아 잠깐만."

"놔."

"진짜 잠깐이면 돼."


    잔뜩 풀죽어서 울먹이듯 말하는 은우를 보고있으니 호구처럼 또 마음이 약해졌다. 빈이 한숨을 쉬며 은우를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이 점차 달라졌다. 목소리가 울먹인다고 생각은 했는데, 거짓말처럼 은우가 울고 있었다.


"야, 너,"

"빈아 좋아해."

"뭐?"


    당황한 빈이 삑사리를 냈음에도 은우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한 손으로는 빈의 손목을 꽉 쥔 채 떠듬떠듬 말을 했다. 평소의 잘나고 이성적인 은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바보 가았다.


"선거 전에 말하면 아직도 속인다고 생각할까봐. 일부러 선거 끝날때까지 기다렸어."


    그 말에 괜히 울컥해진 빈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일주일동안 혼자 별 쌩쇼를 다했는데. 혼자 화냈다가, 용서했다가, 또 분노했다가, 슬퍼했다가.


"넌 인내심도 좋다."

".....나 미치는줄 알았어. 나 진짜 선거 그만둘 생각도 했어."


    은우의 말에 빈이 고개를 숙인 채 은우의 시선을 피했다. 손까지 바들바들 떨어가며 고백을 했더니 제 눈도 안마주치는 빈 때문에 은우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문빈, 나 좀 봐봐. 어떻게든 빈과 시선을 마주치려던 은우가 빈의 얼굴을 들어올렸다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빈아 너 울어?"


    안그래도 튀어나온 입술이 더 삐죽 나와가지고,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빈이 은우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 미치겠다. 저도 모르게 빈을 끌어안은 은우가 빈의 어께에 얼굴을 묻었다. 빈이 은우의 품에서 벗어나려 잠깐 반항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나 너 진짜 싫어."

"내가 진짜 잘할게."


    다정하게 속삭인 은우가 제 품에서 빈을 꺼내 두 볼을 쥐었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한 번 해봤다고 빈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내 세상이 달콤한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너를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수백가지.

그럼에도 우리는 시작한다. 그 사랑이라는 것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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