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점

2020 겨울호
작성자
슈가빈
작성일
2021-01-16 22:44
조회
35

 

 

 

 

“나 여자에 관심 없는데.”

 

 

귀찮음을 못 이겨 내뱉은 이 한마디가 모든 일의 시작이자 원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재수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분명 그럴 테지만), 어릴 때부터 인기가 많았다. 저는 커서 은우랑 결혼할 거예요! 에 이어 은우야, 우리 사귈까? 은우야, 너는 나 어떻게 생각해? 은우야, 사실 전부터 널 지켜봤어, 은우에게 라는 말로 시작하는 편지 등등. 비슷한 듯 다양한 레파토리들이 일일이 다 읊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다. 차라리 그런 것에 연연하고 우쭐해하는 성격이면 나았으련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관심의 대상인 나에게 연애에 대한 흥미가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호기심이랄 것도 딱히 들지 않았고, 오히려 넘치는 애정들은 나를 피곤하게 할 뿐이었다. 좋은 말로 에둘러 거절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어느 순간부터 더는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거절의 답변이 점차 짧아졌다. 덤으로 싸가지도 점점 없어졌다. 그리고 그날은, 하필이면 고등학교 입학 이래 처음으로 모의고사 답안지를 밀려 쓴 그야말로 최악의 날이었다. 누구와도 대화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는데, 기어코 사람을 돌려세워 신경을 긁는 통에 입에서 사회적 필터라는 것이 완전히 제 기능을 상실해버린 것이다.

 

 

 

“알아들었지? 이제 그만 간다.”

 

 

 

그리고 다음날, 전교에 소문이 쫙 퍼졌다. [1학년 3반 차은우 게이래.]

 

 

그 뒤로 학교생활에 커다란 장애라도 생겼다면 어떻게든 루머를 바로잡았겠지만, 이런 상황에 으레 예상되는 바와는 달리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책상 위에 매직으로 낙서가 되어 있다거나, 교과서나 찢어져 있다거나, 집단폭행의 대상이 된다거나 하는 괴롭힘은 없었다. 물론 날 향한 수군거림은 있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졸업하면 대부분이 두 번 다시는 마주칠 일 없는 인연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귀찮고 곤란하게만 하던 고백타임이 깡그리 사라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쾌적함이었다. 그래서 부러 정정하지 않고 두었다. 

 

 

 

 

“며칠 전에 수업하는데 6반 애들이 그러더라, 너 게이라고.”

“무시해.”

 

 

 

상우 형은 머쓱한 듯 괜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과는 어릴 때부터 집안끼리 알고 지낸 사이였고, 지금은 나름대로 교사와 학생의 관계를 유지해가는 중이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걸 굳이 바깥에 알릴 필요도 없었을 뿐더러, 그래봤자 괜한 말만 나오기 좋을 것 같아 학교 내에서는 딱히 대화랄 것을 나누지 않는 편이었는데, 갑자기 불러내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다짜고짜 소문 타령을 했다. 차가운 대답에도 계속 어물쩍대기에 “나 게이 아니야. 됐어?”라고 말해줬는데도 어쩐지 더 할 말이 남은 눈치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은우야, 너한테 소개시켜줄 사람이 한 명 있어.”

 

 

상우 형이 결심을 굳힌 듯 결연한 표현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열고 상담실 바깥으로 상체를 빼고는 주위를 살피더니, 누군가에게 들어오라며 손짓을 하고는 바로 문을 닫았다. 형이 다시 의자에 앉을 때 쯤 상담실 문이 조심스레 한 번 더 열렸다. 제법 덩치가 큰 남학생이었다. 아는 애였다. 아는 사이는 아니고, 말 그대로 ‘아는 애.’

 

 

 

 

우리학교에서는 모르면 간첩이라는 1학년이 두 명이었다. 하나는 잘생기기로 유명한 차은우고, 다른 하나는 게이로 유명한 문빈이었다. 이제는 차은우도 잘생긴 게이로 그 명성을 떨치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 게이로 유명한 건 나보다는 문빈 쪽이었다. 내가 당하지 않은 음습한 괴롭힘의 대상이기도 했다. 물건이 하나씩 없어진다거나, 책이 찢겨있다거나 하는. 이런 문빈이 게이로 유명해진 계기는 참 개 같게도, 시커먼 대학생 한 놈이 낮술을 마시고 학교에 찾아와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안 만나주면 죽겠다느니 뭐라느니 지랄쌩쑈를 하다가 복도 한복판에서 문빈한테 복부를 걷어차이고 경비와 교사들 손에 끌려 나갔었다. 나는 그때 교무실에 가던 중이었고, 상우 형은 갑작스런 소란에 급하게 차출되어 그 남자를 끌고 나간 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와, 너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거 처음이다. 이러니까 더 잘생겼네.”

 

 

문빈은 넉살좋게 웃으며 상우 형 옆에 걸터앉았다. 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나에게 문빈을 이렇게 소개했다. 

 

 

 

“……내 남자친구야.”

“수학이랑은 헤어졌어?”

“아니, 안 그래도 지현이 때문에 너한테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수학담당인 지현 선생님은 학벌도 좋고 성격도 털털해 학생들이 많이 따르는 사람이었다. 상우 형이 ‘결혼할 사람’이라고 하며 우리 가족에게도 소개시켜주었던 기억이 있다. 무려 2년을 구애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친구라니. 심지어 자기가 가르치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더군다나 수학과의 관계를 정리한 것도 아닌데.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형에게 진 빚 때문에 차마 그러지도 못했다. 

 

 

 

 

“너도 알겠지만, 빈이가 좀 유명하잖아. 그래서 우리도 나름 조심한다고 했는데… 얼마 전에 우리가 같이 있는 걸 지현이가 봤어. 나야 담임도 아니니 학생지도라고 해도 영 못 믿는 눈치라서.”

“그래서?”

“우리 좀 도와줘. 응? 은우야.”

 

 

 

형의 뻔뻔한 제안에도 차마 그것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상담실을 나올 때에, 그냥 ‘아는 애’였던 문빈과 방금 막 ‘아는 사이’가 된 채 우리는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학교의 유명인사 둘의 만남에 온 학생과 교사들이 죄다 들썩거렸다. 심지어 하루는 담임이 나를 불러대더니 연신 헛기침을 하며 “그… 불순이성교제는, 아니, 이성교제만이 아니라……”라며 말끝을 흐렸다. 어이가 없었으나 생기부는 중요했으므로 나름 예의를 갖춰 대답하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연애 때문에 정신 팔렸던 것도 아니고, 다음부턴 마킹 실수는 하는 일 없을 거라고. 

 

담임이 이제 가도 좋다고 한 것도 아닌데, 알아서 미닫이로 된 교무실 문을 여니 그 앞에 문빈이 서있었다. 제법 걱정스럽다는 듯 얼굴을 감싸 쥐는데, 누가 봐도 연인을 걱정하는 안타까운 표정이다. 연기에 제법 소질이 있어보였다. 속사정을 모르는 다른 학생들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그리고 사람 그림자 하나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가볍게 인사를 하고 교무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수학이었다. 교무실 문이 닫히자 문빈이 내 뺨을 감싼 손을 내렸다. 우리는 하교할 때도 함께였다. 어느 정도 걷다가 주위에 우리학교 교복이 보이지 않을 때쯤에 쿨하게 헤어졌다. 적당히 이렇게 몇 달 지내고 ‘헤어질’ 예정이었다. 

 

 

그래도 함께 있는 동안 우리는 남들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대화하는 시늉을 하고는 했다. 교무실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모습을 수학에게 보여준 것은 얼추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나는, 그날도 부득불 함께 하교하는 문빈에게 다소 짜증이 나있었다. 

 

 

 

“너는 이런 짓을 왜 하냐?”

 

 

나는 문빈이 한심했다. 나야 형에게 빚이 있다 쳐도, 문빈은 바람 상대일지언정 형의 ‘남자친구’라는 위치였다. 그런데 애인의 여자친구에게 들키지 않으려 전교생의 씹을 거리가 되어주는 꼴이라니.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물론 자기보다 열 살은 많은 교사와 연애를 한다는 것부터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는 했다만.

 

 

 

“선생님은 사실 날 좋아해. 나도 선생님이 좋아서, 원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고.”

“…너 바보야?”

 

 

그냥 갖고 노는 거잖아, 널. 하는 말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그 애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바보라는 말을 듣고 웃는 모습을 보고, ‘얘 다 아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문빈은, 내 인생에 두 번은 없을 멍청이였다.

 

 

 

 

상우 형이 여자친구에게 댄 핑계는 이랬다. 지난번에 소개시켜줬던 차은우가 사귀는 애가 바로 문빈이라고. 소중한 동생의 애인이고, 그때 당시에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건 자신뿐이었다고. 그래서 은우와 한바탕 다투었던 빈이 자기에게 전화를 걸었고, 교사로서 학생이 남에게 말 못할 일로 괴로워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끌어안고 위로를 해주었던 것뿐이라고. 얼핏 들으면 제법 그럴싸했다. 나와 문빈이 ‘다툼의 원인’이었던 공개연애를 선언하기로 했으니 이제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맹세까지. 이미 게이로 소문이 파다한 남학생과 포옹하는 장면을 연인에게 들켰으니 더 이상의 핑계를 생각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는 마침 내가 게이라는 소문이 막 돌기 시작할 즈음이었고, 내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라는 것을 아는 데다 지워둔 빚이 있으니 말을 맞춰달라고 하기도 수월했을 거고.

 

 

 

 

어쨌든 나는 문빈과 그렇게 첫 연애를 시작해야만 했다. 비록 교내 1km를 벗어나면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문빈은 제법 붙임성 있게 구는 편이었다. 이따금 먼저 연락을 하며 문빈의 연인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려주기도 하고, 차은우의 연인이 알아야 할 것들을 물어오기도 했다. 그러다보면 가끔 잡담도 했다. 귀찮아질 법도 한데, 늘 적당한 선에서 대화를 끝마쳤기 때문에 딱히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너 게이 아니지?]

[어]

[근데 왜 게이인 척 해]

[그런 적 없는데]

[나랑 사귀는 척 하잖아]

[그것도 게이인 척인가?]

 

 

 

문제집을 풀면서 중간중간 휴대폰을 확인해 봤지만 새 메시지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날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오히려 기다리지도 않은 메시지 하나가 쌓였다.

 

 

 

[지현이가 더블데이트 한 번 해보는 거 어떠냐고 하네]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매트리스 위로 던지고는 그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더블데이트 날은 찾아왔다. 나는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문빈이 선뜻 그러자고 하는 바람에 달갑지 않은 자리에 끌려가게 되었다. 심지어 따로 도착하는 게 더 이상하다며 집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적당히 중간에서 만나 합류하면 될 것을.

 

 

 

약속장소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문빈은 좀처럼 말이 없었다. 애초에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은 아니었지만, 항상 물꼬를 트곤 하던 문빈의 입이 가만히 다물려있으니 내가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자신을 흘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뒤통수에 눈이 달리기라도 한 건지 문빈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호구 병신새끼라고 욕을 해.”

“…안 해, 그런 말.”

“그럼 왜 그렇게 쳐다봐?”

“너 상우 형이 수학이랑 만나는 거 알았냐?”

“지금 말했네, 호구 병신새끼라고.”

“안 했어.”

“한 거야.”

 

 

 

 

문빈이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학교에서는 거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잘 몰랐는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눈이 길고 눈꼬리가 얄쌍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 모른다. 코끝도 동그랗고, 인중도 도톰해서 평소에는 덩치만 큰 어린애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엔 몰랐어. 근데 내가 죽자고 쫓아다니니까 말하더라. 그래도 난 상관없다고 했더니 그럼 만나주겠다고 해서 사귀었어. 그게 다야.”

“형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데? 이런 바보짓에 어울려주기나 하고.”

“그러는 너야말로 왜 이런 거짓말에 어울려주는데? 약점이라도 잡혔어?”

“나 중학교 2학년 때. 죽을뻔한 거 형이 나 들쳐업고 병원까지 달려가서 살려냈거든. 목숨 빚졌지.”

“좀 의외네. 생명의 은인치고는 너 선생님 엄청 싫어하지 않냐?”

“응. 사실 죽으려고 했던 거라서.”

 

 

 

 

그 말에 빈이 잠시 침묵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려고 눈동자를 여기저기 굴리는 게 훤히 보였다.

 

 

 

“…뭐, 한창 그럴 나이였네.”

“그래도 뭐, 살아보니 나쁘지 않은 거 같기도 하고 해서 은혜나 갚을 겸.”

 

 

“왜 죽으려고 한 건데?”

“모르겠네. 관심 받고 싶어서?”

“너 누가 쳐다보는 거 싫어하잖아.”

“좋아하는 사람이 쳐다보는 건 안 싫어해. 그리고 난 엄마아빠 좋아했고. 근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 나한테 관심이 없더라. 죽었다 살아났을 때도 별 말을 안 하더라고.”

“이제야 네 성격이 왜 삐딱선을 탔는지 알겠네.”

 

 

 

문빈은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몸을 팔걸이 쪽으로 더 깊게 기댔다.

 

 

 

“근데 나도 비슷해. 나도 원래 못된 인간만 좋아하거든. 내가 글러먹은 애라서 그런가봐.”

“나도 글러먹었다는 뜻이야?”

“어. 비슷하다니까?”

 

 

 

 

 

 

그리고 대화주제가 바뀌었다. 내려야 할 역이 가까워진 탓이었다. 우리는 슬슬 자리를 타고 일어서 문가에 섰다. 지하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문빈이 말했다. “오늘은 빈이라고 불러. 괜히 서먹한 티 내지 말고. 도착하면 일단 웃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약속한 3번 출구로 올라오니 상우 형이 역 앞 벤치에 앉은 채 손을 흔들었다. 

 

 

 

“학교 밖에선 오랜만에 뵙네요.”

 

 

개뿔. 어제도 형이랑 만났으면서.

 

 

“하하, 그러게. 따라 나와 줄 줄 몰랐는데 고마워. 어른들 노는 거 재미없어도 티 안내주면 더 고맙고.”

“에이, 저희야말로 눈치 없이 따라와서 불편하게 해드린 건 아니죠?”

“내가 제안한 건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너네는 아직 학생이니까 어른 감독 하에 놀아야지.”

 

 

수학은 그렇게 말하며 까르르 웃었다. 문빈도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이 마주 웃었다. 지하철에서는 표정이라고는 없어보였는데, 지금 보니 아주 생기가 넘쳐 보인다. 셋 다 똑같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나만 어색하게 입꼬리만 간신히 올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빈은 아랑곳 않고 내 손을 낚아챘다. 형과 수학은 우리보다 두 발자국 정도 앞서 걸었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면서, 나와 문빈의 소문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해졌다. 180 넘는 산만한 남자 둘이 손을 잡고 걷는 것. 유별한 친구사이 같을까, 아니면 우리도 상우 형과 수학처럼 그냥 한 쌍의 커플로 보일까.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날 본 영화는 재미가 없었다. 사실 내용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옆에 앉은 문빈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영화가 재미없었던 건지, 아니면 영화관이 어두우니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문빈이 영화관을 나오면서 “내 돈 주고 봤으면 아까울 뻔 했다.”하고 속삭였기에 그냥 전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빈은 다시 얼굴을 활짝 펴고 웃어보였다. 와, 울 뻔 했어요. 하며 능청스럽게 굴며 신이 난 것처럼 수학과 떠들며 식당가로 이동했다. 형과 수학이 샐러드바에 간 뒤에야 문빈의 표정이 다시 돌아왔다.

 

 

“계속 그렇게 웃고 다니면 얼굴 안 아프냐?”

“너야말로 좀 시원시원하게 웃어라, 나 혼자 고생하게 하지 말고.”

“난 원래 잘 안 웃어. 내가 너처럼 헤실대면 그게 더 이상해보일걸.”

 

 

“그것도 부모님 때문이야?”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어릴 때도 그러셨어?”

“원래 그런 건 아니었고. 슬슬 이혼얘기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그냥 서로 정이 떨어지니까 나도 괜히 보기 싫었던 건지 뭔지. 지금은 아빠하고 살아. 거의 안 들어오시긴 해도.”

 

 

 

사실 누군가에게 가족 얘기를 한 것이 아주 오랜만이었다. 상우 형이야 사정을 대강 안다고 쳐도, 아예 관계가 없는 생판 남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 아닐까 싶었다. 꼭 불쌍해 보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구는 스스로가 볼썽사납게 느껴졌다.

 

 

 

“나도 사실 엄마 없어. 우리도 일찍 이혼했거든. 그리고 우리아빠도 나한테 관심이 하나도 없어. 이제 우리 동네에선 내가 게이인 거 아빠 빼고 다 알지 않을까 싶네.”

 

 

 

문빈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상우 형과 수학이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부모 관심을 못 받고 커서 관종이 됐나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관심 줘봤자 기분 나쁘진 않고?”

“나는 좋아.”

 

 

 

 

 

 

그때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의자를 빼며 자리에 앉았다. 의자 끄는 소리가 제법 요란해 들리지 않을 법도 한 문빈의 말이 이상하게도 선명히 귓가에 꽂혔다.

 

 

 

 

 

 

“난 나한테 관심 주는 사람이 좋아지거든.”

 

 

 

 

 

 

 

 

 

 

 

 

 

 

 

 

 

 

 

 

데이트 흉내도 끝날 때가 되어갔다. 겨울은 해가 짧았고, 형과 수학은 명색이 교사인지라 학생들은 얼른 집에 돌아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다른 길로 새지 말라고 주의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빈이 웃으며 인사를 하려는데, 상우 형이 불쑥 다가와 지갑에서 돈을 꺼내 빈에게 건네주었다. 오만 원짜리 한 장. 그리고 그 밑에, 지갑에 함께 숨겨두었을 편지 한 장이 얼핏 보였다. 빈은 알아서 수학에게 편지가 최대한 보이지 않도록 갈무리하며 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었다.

 

 

“와, 선생님. 웬 용돈이에요? 계 탔네.”

“용돈 아니고 택시비. 지하철 말고 택시 타. 아직 추워.”

“에이, 택시비 이 정도로 안 나와요.”

“그냥 받아.”

 

상우 형이 뒤돌아서며 바로 택시 한 대를 잡았다. 얼른 들어가라며 우릴 밀어 넣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꼭 쫓겨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문빈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문빈은 돈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바로 내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 눈으로 읽어 내려갔다.

 

 

 

 

 

 

 

 

우리는 빈의 집보다 조금 앞서 내렸다. 빈이 조금 걷고 싶다고 해서였다. 처음 가본 빈의 집은 근처에 도랑이 하나 있었는데, 문빈은 그 앞에 서자마자 바로 편지지를 구겨 안쪽으로 집어던졌다.

 

 

 

“선생님이 나 좋대.”

“근데 편지는 왜 버려.”

“내가 좋은데, 지현 선생님도 너무 좋대. 그리고 자긴 그 사람이 필요하대.”

 

 

 

빈은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사실 내게는 빈을 집 앞까지 데려다줄 이유가 없었지만, 나는 굳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게 뭐야? 선생님은 필요하고, 나는 필요 없다는 거야?”

 

 

 

개새끼, 차라리 싫다고 하지. 다 큰 사내새끼 징그러워서 짜증나 죽겠다고 하지. 문빈이 괜히 길가의 돌맹이를 걷어차며 투덜댔다.

 

 

 

“너도 이제 나 안 따라와도 돼. 학교에서도 아는 척 안 해도 돼. 헤어졌겠거니 하겠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 게이 맞는 거 같아.”

“거짓말 좀 하지 마.”

“나 이제 거짓말 같은 거 안 하기로 했어. 할 필요 없으니까.”

 

 

 

 

 

빈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굳이 빈의 옆에 서는 것 대신, 그대로 한 발자국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택했다. 다가가는 건, 여기까지. 마치 책상에 금을 그어놓듯이. 누군가가 내 짓궂은 장난을 무시하고 그곳을 침범해주길 바라며.

 

 

 

 

 

“그런 놈 때문에 울지 말고 그냥 당장 쫓아가서 지난번 그 새끼처럼 존나 패버려.”

“안 패. 그리고 안 울어. 내가 애냐?”

“우는 거 아니면 얼굴 보여줘.”

“싫어.”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빈아, 여기 봐.”

“싫어.”

 

 

 

“이쪽 좀 봐줘, 빈아.”

 

 

 

 

 

 

일종의 충동이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평행선인 줄만 알았던 우리가 만날 교차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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