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스무살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익명
주제
Cuckoo (두번째 스무살)



[첫번째 스무살]


빈은 대형 기획사의 가수 연습생으로 5년을 살았다. 그 말인 즉슨 학창시절을 거의 다 바쳤다는 말이다. 평범한 교우관계나 그때만 할 수 있는 경험은 얻질 못했다. 

아쉬운 점은 있었으나 데뷔 후 꽃필 날을 생각하며 그 인내의 시간을 아깝다고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불행은 예고 없이 온다더니 빈은 그 말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되었다.

데뷔를 앞두고 연습이 끝난 새벽. 숙소로 가는 길 신호위반 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일년을 누워 스무살을 그대로 날렸다. 회사는 기다려주지 않았으며 빈은 청춘을 바친 회사에서 나와야했다. 사망선고와 같았다.

죽고싶었지만 믿어줬던 가족들을 위해 살아야했다. 생각을 깊게하면 어디든 뛰어들고 싶어져서 그냥 닥치는대로 몸을 쓰며 일을 했다.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할지 몰랐지만 영혼은 죽은 채 몸만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살다가 군대로 끌려갔다. 남들은 우울해하는 군대생활에서 다행히 좋은 동기 선임들을 만나 점점 밝아졌고 삶의 방향을 잃은 빈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었다. 평생 아르바이트만 하고 살 수는 없으니 공부를 시작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그렇게 제대하고 23살 24살은 수험생활로 보냈다. 빈은 본인이 공부머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5년간 연습생 생활을 했던 인내심 덕분인지 나름 괜찮은 대학의 경영학과에 운좋게 문닫고 들어갈 수 있었다. 



[두번째 스무살]


첫 등교를 하며 마음 먹었다. 스무살이 보는 스물다섯살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있었기 때문에 자발적 아싸로 조용히 살다가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평범하게 살아야겠다고.. 미래 계획까지 마치며 평화로운 새소리와 따스한 햇살이 반겨주는 봄 기운 가득한 등굣길을 경쾌하게 걸었다.


 내 바람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람들과 부딪히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사람많은 경영학과에서는 잠깐 유지되는 관계가 많아 크게 걱정할 필욘 없었다. 조별과제만 하고 헤어질꺼니까 괜히 사람들 불편하게 나이 까지 말고 스무살인 척해야지..액면가가 어려보여서 다행이다..따위의 생각을 하며 구석자리로 가서 앉아있었다.


(야 너도 마케팅관리 김교수님 조별과제 뭔지 알고 들어온거냐?)

(아니? 당연히 프레젠테이션아님?)

(이 교수님 목표가 CC 만들기래. 조별과제는 그냥 조끼리 하고 싶은거 하고 인증샷 찍기. 조는 여자 남자 반반 섞어서ㅋㅋ 여기서 CC 탄생 엄청 많이 한다고 소문났어.)


혼자 있으니 남의 얘기가 더 잘 들리네 큼큼 ...저 소리를 들으니 좀 더 학교 다닐 맛이 나는 것 같다. 핑크빛 캠퍼스 라이프를 꿈꾼 찰나.. 모인 조원을 보니 핑크빛은 무슨 다시 잿빛이 스며들었다. 


왜 우리 조만 홀수?..여자 하나에 나 포함 남자 둘. 게다가 이미 여자 조원은 다른 남자조원에게 눈으로 하트를 발사하고 있었다.... 

근데 정말 할 말 없게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단정, 댄디, 센스있는 스타일에.. 키도 나보다 좀 더 크고 비율도 좋고 몸도 좋아보이고 얼굴은 더 미쳤다. 우와 사람이 이렇게 생길 수도 있구나 깎아 만들어도 이렇게는 못하겠다. 다가졌네 다가졌어. 나도 어디서 빠지지 않는데.. 자꾸 힐끔거리게 되는 외모다..


-안녕하세요 15학번 차은우에요.

-저는 18학번 문빈입니다.

-저는 18학번 구재희에요. 선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우리도 편하게하자!

-어..그럴까? 그래.. 우리 뭐할까? 아 일단 핸드폰 번호 좀 단톡방 팔게.


나는 눈 앞에서 다섯 살 동생과 두 살 동생이 나에게 말을 까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뭐 우리 학과 사람 많으니까 한 학기만 지나면 쌩까면 돼...  


-...! 빈아! 무슨생각해?

-네? 아니에요..선배 하핳...; 


다섯살 동생이랑 친구하는건 그닥 어색하지 않은데 동생에게 형 대접 하는건 왜 이렇게 어색하지...주저주저하고 쭈뼛대는 내 모습을 보았는지 친히 은우 선배님께서는..


-불편해하지마 나 딱딱한 사람아니야ㅎㅎ 형이라고 해. 。^‿^。

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주셨다..핳 더 불편해졌어.... 


-네 은우 ㅎ..형...


착실히 형이라고 부르게 됐다..


우리는 각자 도시락을 싸와서 봄소풍을 가기로 정하고 헤어졌다. 거의 노는 과제라지만 과제는 과제인지라 시험이 다가오기 전에 후딱 해치우기로 의견을 통일했다.

 

무슨 도시락을 싸갈까 고심하다가 난 귀여운 것을 좋아했으므로 캐릭터 도시락을 택했다. 내가 좋아하는 스폰지밥 모양으로 계란 지단을 부치고 오려서 정성스럽게 한땀한땀 장인정신으로 도시락을 쌌다.




*

빈은 약속 당일 학교 근처 공원에 미리와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서 봄소풍 나온 커플들을 보며 아주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조원들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안녕? 빈아!

-오 시간 맞춰 온다더니 빨리왔네?

-응 너한테 할말도 있고해서.. 빈아 있잖아..선배 오기 전에 단도직입적으로 빨리 말할게. 나 은우선배한테 관심있거든? 너가 좀 도와주면 안될까?


역시나 그럴줄 알았어 혼자인 것도 서러운데 내가 왜 남의 커플 성사에 큐피트가 되어줘야 하냔 말이오..


-내..내가? 그걸 내가 어떻게 도와줘

-아니 그냥 선배 여자친구 있나.. 또 나 어떻게 생각하나 떠볼 수 있자나..응? 동기사랑 나라사랑 모르냐.


재희와 도와주냐 마느냐로 한창 실랑이를 하는 중에 차은우가 왔다 


-다들 와있었네ㅎㅎ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헙 안녕하세요 선배! 별 얘기 아니에요ㅎㅎ

-그래? 우리 저기 그늘에 자리깔고 인증샷 찍을래?


우리는 꽃 앞에서 사이좋게 인증샷, 닫힌 도시락 들고 인증샷, 열린도시락을 들고 인증샷을 찍어댔다. 그리고 나눠먹으려는데....


-푸핫! 야 빈아 너 진짜 귀엽다ㅋㅋㅋ 캐릭터야? 근데 무슨 캐릭터지? 생긴 것도 귀여운데 도시락까지 너 같은 거 싸왔네 

-....귀엽다니요!? 그럴리가여!!

 

스물다섯 군대 다녀온 건장한 181의 근육질 문빈에게 귀여움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서 몸이 절로 굳어버렸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놈의 자슥이 부들부들.. 


-부끄럽구나 얼굴 빨개졌다 알았어 안그럴게ㅎㅎ 너 귀여워서 그랬어


안한다면서 또 하다니 부끄러운게 아니라 화가 나서 그런거라고..!

재희는 본인의 도시락이 차은우의 관심에서 벗어나자 시무룩해 보였다..그래..좀 도와주자..


-이..이야 재희야 너 솜씨 좋다 되게 잘쌌네 우와 맛도 있어 형! 형도 드셔보세요!!

-그래? 오 그러네 맛있다..


어쩐지 차은우가 시무룩해보이네....옛다 너도 칭찬이다.

-형 김밥도 맛있네요? 

-그래?。^‿^。


차은우 좋아하는 재희 눈치보랴 차은우 형 대접하랴 나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며 서둘러 도시락을 끝장냈다. 과제도 끝났으니 이 불편한 시간은 여기서 끝 빠이빠이다..기숙사 가야지 이제 


- 선배 어디사세요? 

- 나 oo동.

- 와 진짜요? 저랑 방향 같다 같이 가요 선배.


그래 나 그만 눈치보게 하고 둘이 같이 사라져줘..기운빠진다..

- 어~ 그러면 되겠네. 그럼 이만.. 저는 기숙사로 가볼게요 

-아니야, 나 도서관 들렀다 가야돼 먼저가 재희야.

 

어이고..저렇게 여자의 맘을 몰라서야..재희는 한껏 풀이 죽은채 집으로 갔다..그렇다면 학교를 둘이서 같이 걸어가야한단 말이구만..? 불쌍한 재희야 이 동기가 너 좀 도와주마. 재희를 도와주기 위해 차은우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형 형은 여자친구있어요?

-응? 갑자기? 그건 왜?

-아이 그냥 궁금해서요

-너는? 있어?

-아뇨 없던 지 좀 됐어요 

-그래? 인기 많을 거 같은데

-형이 더 많을거 같은데요? 여자친구있죠?

-없어ㅎㅎ 

-..... 재희 어떻게 생각하세요? 괜찮지 않아요?

- 음 재희 괜찮지... 갑자기 재희는 왜? 너가 맘에있어서 그래? 찜해놨다 이거야?ㅎㅎ

-아니에요 아니에요!!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말을 나누어 보니 차은우는 굉장히 다정한 스타일이었다. 남자인 나에게도 이렇게 다정하다니..계속 밥을 사준다는데 더 친해지면 내가 곤란해질 것 같아서 선을 긋고 도서관과 기숙사의 갈림길이 나오자 서둘러 인사하고 기숙사로 와버렸다. 

내가 형인 상태로 첨부터 만났으면 친해져도 좋았을텐데 아쉽긴했다. 하지만 이제와서 형이라고 하라고 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과제도 끝났고 이젠 볼일없다. 차은우 안녕..




*

다음 수업에서 재희에게 차은우가 여자친구가 없으며 너에 대해서 괜찮게 생각하는 것 같으니 이제 뒷일은 너가 알아서 하라고 말해주고 구석자리에 앉았다. 재희는 매우 기뻐하며 톡으로 학식 제일 비싼 거 산다기에 그 정도 수고비는 받자 싶어서 오케이 했다. 


자리에 앉아있으니 뜬금없이 노란색 물체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흠칫 놀라며 옆을 보니 차은우가 내 책 위에 스폰지밥 인형을 올려 놓는것이다.


-아이 깜짝아. 이..게 뭐에요?

-지나가다가 심심해서 인형뽑기 했는데 스폰지밥이 나와서.. 너 이거 좋아하잖아. 난 인형 별로 안 좋아해. 너가 가져주라.

 

안 좋아하면 안 뽑으면 되지....

내 속을 읽은 것인지 


-뽑는 건 재밌는데 처치곤란이야.


그렇게 스폰지밥은 내 품에 안겨있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좋긴 했다. 난 귀여운거 좋아해..차은우는 내 품에 안긴 스폰지밥을 보고 특유의 마카롱같은 눈웃음을 보이며 뿌듯해하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엔 재희가 사주는 학식 중 젤 비싼 교직원 밥을 클리어 했다. 후후 역시 비싸고 공짜니까 더 맛있다. 다 먹고 재희는 수업이 있어서 가고 난 공강이라 학교 카페에서 과제를 하고 있는데 차은우가 심통이 난 얼굴로 내 앞에 앉았다.


-어..? 형 어쩐 일이세요?

-너.. 나랑은 밥 안 먹는다더니 재희랑은 먹던데? 남자랑은 밥 안 먹는다는거야? 그럼 술 마실래?


차은우 말이 저렇게 빨랐던가 나는 당황스러워서 어버버거리며 답했다.


-네? 그게 아니라 제가 재희 그..뭐..좀 도와줘서 보답한다고 그래서.. 그래서! 얻어 먹은거에요.

-그래?... 그럼 내 부탁도 들어줬으니까 내가 밥살게.

-네? 제가 언제 부탁을 들어드렸어요?

-인형 가져달라고 부탁한거 들어줬잖아.

-.....에?


나는 멍청한 소리를 내고는 얼떨결에 차은우와 밥약속을 잡았다.




*

약속에 나온 차은우를 보자마자 잘못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은우는 요리사 모자를 쓴 스폰지밥 인형과 함께 등장했고 그건 또 다시 내 손에 들렸다.


차은우는 내가 고기와 밥을 듬뿍 넣고 거대하게 쌈을 싸서 와아앙 먹는 것을 보고 재밌어했다. 그만 관찰하고 먹기나 하지...고기 사주니까 봐준다. 고기가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차은우에게 성격이 좋은 형이라고 엄지를 들어줬다.

확실히 차은우는 의심없이 나를 세살 어린 동생으로 보고 형 노릇을 했다. 막 복학해서 그런지 군대 얘기도 해주고..나도 군대 얘기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 했지만 꾹 참았다...나보다 동생이긴 했지만 진짜 형 같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이 좋네....커피랑 케이크도 사주는 좋은 사람..미소지으며 맛나게 케이크를 먹고있는데 차은우가 물었다.


-빈아 너는 애인 만들 생각 없어? 

-있긴 있죠.. 근데.. 아직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네요.

-어떤 사람 좋아하는데?

-제가 좀 덜렁거려서 잘 챙겨주는 사람..또 제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같이 좋아했으면 좋겠고.. 또 음..얼빠아시죠? 제가 그런 기질이 있어서......성격도 중요한데 외모도 좀 봐요 안 그러려고 하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그러자 차은우는 짐짓 고심하는 척을 하더니 박수를 한 번 짝치며 

-오! 나 그런 사람 알아! 

하곤 신나했다. 대학에 와서 드디어 소개팅을 해보는 것인가 하고 덩달아 나도 신이 나려 하고 있었다.


-누구요? 우리학교에요?

-응!!! 차은우!

-아.................


-왜! 진짜야 나 잘챙겨줘 너가 좋아하는 스폰지밥도 주고 밥도 사주고 디저트도 사줬지. 그리고 나도 만화 좋아해 2d 3d 다 섭렵했어.  또 너가 아까 성격도 좋다며, 외모도 이 정도면 괜찮은거 같은데.. 니 스타일은 아닌가?


하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들이 밀었다. 차은우....얼빠에게 얼굴 공격을 하다니... 이 정도면 괜찮은 거 같다고?? 이 무슨 망언.. 저 얼굴에 취향이 어디있냐!... 진심 가능할 거 같기도 하단 말이야...

아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문빈 돌았니...저건 다 저 얼굴... 남자도 웃게 만드는 미친 얼굴 때문이야...거기에 홀린거야. 정신 바짝 차렷! 잠깐 생각에 늪에 빠졌다가 목을 탁탁쳤다.


-아 형.. 장난치지 마세요~

-왜 장난이라고 생각해? 생각 좀 해봐ㅎㅎ


차은우를 알게된 지가 오래되지 않아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장난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저게 진심일리 없잖아! 우리나라에 게이나 바이가 많은것도 아니고.. 군대에서 형들이 하던 짓궂은 장난과 같은 결이겠지?

근데 난 게이가 아닌데 왜 차은우의 농담에 고민하냐.. 나 알고보니 바이였나?.. 아닌데..지금껏 그런 일은 없었는데.....

그래! 그건 스폰지밥 인형 때문이야!.. 다른 버전으로 가져다주니까 다음이 기대되잖아.. 해적, 요리사..다음 스폰지밥은 뭘까.....?

나는 마음이 혼란하여 이상한 결론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차은우는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스폰지밥 인형을 처리해주었다는 구실로 약속 또 다음 약속을 잡았고 밥 먹고 만화카페도 가고 영화도 보러갔다. 여느날처럼 차은우와 놀고 기분좋게 웃으면서 방에 들어왔다가 문득 망치로 얻어 맞은 기분이 들었다.

기숙사 방 침대에 쌓여가는 스폰지밥의 수만큼 나는 차은우와 가까워져 있었고 또 그만큼 죄책감이 한번에 몰려 왔다. 미소짓다가 순식간에 심각해진 내 표정과 달리 마냥 웃고있는 스폰지밥 인형을 보니 불편한 마음에 애꿎은 인형 얼굴을 뒤로 돌렸다.

나는 차은우가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할까봐 걱정 되었다. 왜 그런 걱정이 들었는지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다 피하고 싶었다. 나는 차은우와 자연스럽게 서서히 멀어지는 방법을 택했다.




*

중간고사를 핑계로 나는 차은우의 연락을 매우 뜸하게 받았다. 아침에 오는 톡은 저녁에..저녁에 오는 톡은 아침에 단답으로 답해줬다.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고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며 시험기간을 보냈다. 


중간고사가 끝나자마자 학과사무실에서 금융감독원 견학 겸 캠프 신청을 받았다. 취업하려면 여기저기 부지런히 참여해야하니까 신청 접수기간 첫날부터 학과사무실로 갔는데..차은우가 왜 저기있는거야... 


-안녕하세요... 금융감독원 견학 신청하러왔는데요..

-여기 신청서 작성하고 내고 가면 돼.

-네.


작성하고 있는데 차은우가 날 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시험은 잘봤어?

-음..그럭저럭이요

-연락도 뜸하더니... 안 그래 보이는데 공부 열심히 하는 타입인가봐.

-.....시비 거시는 거예요?

-ㅋㅋ아니야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러지

-근데..여기서 뭐하세요?

-친구 여기서 근로 하는데 잠깐 봐주는거야.

 시험도 끝났는데 술 마시러 갈래?

-저 선약이 있어서 다음에요. 안녕히계세요.

그렇게 나는 나름 차은우를 잘 피해다녔다. 




*

견학가는 날이라 미리 교수님들께 서류를 제출하고 강의를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었고 이틀 간은 차은우를 힘들게 안 피해다녀도 돼서 마음이 놓였다. 취업을 위해 참여한 거지만 나름 소풍같은 기분을 느끼며 숙소에 도착했다. 

2인 1실 숙소에 배정되었고 견학은 시작되었다. 금융감독원 구경도 하고 직원분 강의도 열심히 듣고 일정을 마치고 뿌듯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갔는데


-어....왔어?

-..뭐...뭐...예요? 형도 신청했어요? 안 보이던데?

-응 나는 좀 늦게 갔거든 그래서 못봤나보다.


상황파악을 하고는 무척 곤란해졌다. 차은우를 피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꼼짝없이 붙어 있게 됐네. 왜 멍청하게 차은우도 신청할 수 있을거란 생각은 안했지? 그나저나 왜 같은 방이야ㅠ


나를 보던 차은우는 

-너 신청하는거 보고 바로 신청했더니 같은 방이 됐네? ㅎㅎ잘됐다

하며 속 터지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것이다.


갑자기 열불이 나서 씻는다고 하고 샤워실로 향했다..어떻게 차은우를 대해야 할지 고심하며 샤워를 했지만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방에 들어왔는데 차은우는 없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항상 깔끔하고 댄디한 스타일이었던 차은우가 프리한 흰색 반팔티에 회색 트레이닝팬츠를 입고 샤워를 하고 왔는지 나를 보며 물에 젖은 머리를 탈탈 털었다...저렇게 입으니 단단한 몸이 더 부각된다.. 평소와 다른 느낌의 차은우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갑자기 귀에서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미쳤나 문빈...얼굴에도 열이 올라오는 것 같고 안되겠다. 방에서 나가려고 벌떡 일어났는데 차은우가 손목을 잡았다.

-빈아 나랑 얘기좀 하자.


우리는 나란히 건물 옥상에 서있었다.

차은우는 말없이 건물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엄청 밝네요.

나는 정적을 못 이기고 일단 아무말이나 했다. 그제야 차은우가 천천히 나를 보더니 입을 뗐다.


-빈아..내가 요며칠동안 계속 고민했는데...

..나 불편해?..아니면.. 싫은 건가?

너 따라서 여기 온 것도..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니가 불편해할까봐 망설였는데 그냥 포기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난 너 처음 봤을 때 얼굴도 귀엽고 말투도 귀여워서 관심이 갔다가..강의 때마다 조용히 구석에 숨어 있는 게 예민한 고슴도치 같아서 신경 쓰이고.. 계속 생각이 나더라.. 

그냥 귀여운 동생이라 그런줄 알았지 너 좋아하는 줄은 나도 몰랐는데 너가 날 피하는데 마음이 아프더라고...지금은 확실히 알았어. 

나는.. 문빈 너 좋아해. 너랑 만나고 싶어... 근데 너는 아니면.. 확실하게 나 차줘.


처음엔 망설이는 듯하더니 점점 눈에 진심을 담아 약간은 직설적으로 고백을 하는 차은우를 보다가 심장이 쿵 떨어졌다.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계속 부인해왔지만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차은우를 좋아한다..

그런데 내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꿰었어.. 내가 널 속였다고 말해도 너가 날 지금처럼 좋아할까? 난 겁쟁이라 거부 당하는 것이 무서워.


-나도..나도 좋아하는데요. 내가 본의 아니게 속인 게 있어요. 그거 알면 나 안 좋아할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감정은 여기서 묻어요..은우형..잘해주고 좋아해줘서 고마웠어요.


하고 미안해서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방으로 돌아왔다.


차은우는 방으로 잠잘 시간이 다 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불을 끄고 내 자리에 누워서 훌쩍였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내가 깨닫지 못한 사이에 생각보다 차은우를 많이 좋아했구나 싶어서 서글퍼졌다. 바보같이 괜히 속여서 시작도 못해보고 끝났구나.. 나를 원망하며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차은우는 벌써 짐을 챙겨서 나가고 없었다. 벌써 이렇게 불편한 사이가 됐어.. 또 눈물이 나오려는 걸 참고 거울 앞에 섰다...퉁퉁 부었네




*

그 이후로 차은우는 잘 보이지 않았다. 같은 수업에서도 나와 가장 먼 자리에서 뒷모습만 보여주고는 강의가 끝나면 쌩하니 사라졌다. 내 잘못 때문이지만 서러웠고 염치없게도 날 보며 웃는 차은우가 보고싶었다. 


차은우랑은 이제 끝났구나라고 머리로는 알았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는데 몇 번의 수업동안 차은우 뒤통수만 보다가 실감이 났다. 공허한 마음으로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약간 야윈 차은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내 앞에 나타났다.


-문빈...우리가 서로 좋아하는데 못 만난다는 게 이해가 안돼.. 지금 나. 결심하고 온거야. 너가 날 뭐라고 속였든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당연히 말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 너 애인있는데 나한테 흔들렸던 거지? 그래서.. 그렇게 망설인거지..? 나.. 너 정리될 때까지 기다릴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울고 싶을 정도로 차은우에게 미안해졌다. 차은우 상처받는 건 생각도 안하고 나 상처받기 싫어서 저런 결심을 하는 동안에 외면만 했구나...나한테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고 바닥을 보다가 눈을 꼭 감고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응?

-나... 사실 스무살이 아니에요..

-...응? 뭐라고?


이번엔 고개를 들어 차은우의 눈을 보았다.

-내 나이...스물다섯이라고...너보다 내가 형이라고..!


예상치못한 답변이었는지 차은우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나에게 실망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그래도 거절당하면서도 몇 번이나 내 앞에서 자존심을 버린 차은우를 위해서 설령 나를 싫어할지라도 나는 용기를 내야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학교에 늦게 왔는데.. 조별활동은 어차피 한번 만나고 헤어지니까 굳이 나이 밝혀서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근데 너랑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텐데 본의 아니게 속여서 미안해. 나 싫으면 이제 거절해도 돼.


차은우는 한동안 말 없이 있다가 눈이 그렁그렁하더니 눈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그러고는 


-이....못된 문빈!ㅠ 고작 그런 거로 맘고생 시키고 그게 머가 어때서!! 나는 너 애인있는지 알고 얼마나 울었는데!! 어떻게 그 자식을 이겨야 되나 며칠을 고심했는데!!!


하며 엉엉 울었다. 나는 엉엉 우는 차은우를 보며 당황하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좋아한다는 차은우에 어이없게도 기분이 좀 좋아져 몰래 살핏 웃으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 미안한 마음에 꼭 안아주었다.

-그럼 훌쩍 빈아 나랑 만나도 되는거지? 사귀어도 되는거지?

-응응...미안..은우혀..ㅇ 아니 은우야


근데 좀 이상하네...

-근데 있자나...이제 내가 형인데...형이라고 안해?

 

차은우는 나를 품에서 떼어 놓더니 눈물을 슥슥 닦고는

-동생같단 말이야...원해? 형이라고 해줘?

하며 나를 빤히 보았다.


시작을 이렇게 해서 그런가 왠지 차은우가 형같았다. 차은우가 나를 빈이 형이라고 부르는 것을 상상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했다. 징그럽네 뭔가..

-아니다 그냥 지금처럼 하자..

-그래 빈아ㅎㅎ 




*

우리는 스릴만점 캠퍼스라이프를 즐겼다. 사귀고 나니 차은우는 애정표현도 잘하고 스킨십을 좋아했다...나는 쑥쓰러워서 덜 그런 척 했지만..스킨십 나도 사랑한다...남친이 차은우인데 안 좋을리가..보는 눈이 있다보니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한적한 곳이 나올때마다 붙어먹었다.


-야 차으누.. 우리 적당히 해야하지 않을까?

-왜? 키스하기 싫어?

-아니아니 좋아! 근데 사람들 볼까봐 좀 무서워서..실내! 둘만 있는 곳!...에서만 하는게 어때?

-흐음.....그것도 무서운데

-머가 무서워?

-그러면 자제가 안될거같아..

-무엇...을?

-너랑 끝까지 가고 싶을 거 같은데..

-켁

-빈이 너 뒤로는 처음일테니까.. 마음의 준비가 안 됐을 거 같아서 충분히 기다려주려고했지.. 안되겠다..그럼 힘들지만 당분간 키스를 줄이자. 


키스를 줄이다니.... 그건 내가 너무 아쉬운데....ㅠㅠ 하지만 엉아가 되가지고 인내심 없이 너무 밝히는거 같으면 안되겠지....? 후우..

....근데 차은우? 왜 내가 당연히 밑이라고 생각하는거..? 그건 가봐야 아는거지..!!


-..그래.... 당분간....근데 왜 내가 밑이야!! 그건 가봐야 아는거 아니야? 너무 당연하게 말한다..?

-왜 우리 빈이 위로 가고 싶었쪄요? 내가 힘이 더 세잖아ㅎㅎ 나 잘 들지도 못하면서..그리고 내가 잘해줄게. 벌써 만반의 준비를 마쳐놨는데.. 준비되면 말해 빈아。^‿^。


하고 내가 좋아하는 눈웃음을 짓다가 볼에 쪽소리 나게 뽀뽀를 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연하남.....참.....

좋다...


차은우 녀석은 진짜 그 말 이후로 나에게 필요이상의 터치를 잘하지 않았고 얼마전까지 물고 빨고 했던 내 입술이 그립지도 않은지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나는 엉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스킨십하고 싶어도 슬픈 생각 해가면서 참는데.. 분하다...근데 실내에서 단둘이 키스하기 시작하면 정말 내 뒤가 뚫릴 것 같아 무서웠다..


하지만 당분간 참겠다는 나의 결심은 삼일을 채 못 갔다. 못 참겠다!!...같이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고개를 들고는 말간 얼굴로 책에 집중하는 차은우를 물끄러미 보았다. 

아..저 얼굴을 붙잡고 입을 부비고 싶다... 문빈 이렇게 짐승이었나..아니 저 얼굴과 몸을 보고 어떻게 참죠..? 그건 고문이에요.. 

남자끼리 어떻게 관계를 갖는지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준비되면 말하라는 차은우의 말 이후 게동을 찾아 볼까하다가 모르는게 약이다 싶어서 그냥 부딪히기로 했다.


-야 짜으누...나 키스하고 싶어.

-엥? 여기서?

-아니..... 너 집..

-.....진짜? 


똑똑한 차은우는 내 의도를 한방에 알아채고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그러고는 다시 눈빛을 바꿨다.

-후회 안하겠어? 중간엔 멈추기 힘들단말야..


 차은우는 자꾸 망설였다. 나 위해주는 거 아는데...! 그냥 내가 너랑 입술을 부비고 몸을 부대끼고 싶다니까ㅠㅠ 답을 해줘도 차은우는 내가 확실히 맘을 굳혔는지 계속 확인받으려 했다...안되겠다. 내가 이렇게 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으누형....빈이....형 집에 갈래요..


나름 필살무기였는데 차은우는 굳어서 무반응이었다. 뻘쭘해져 다신 안해야지 생각했는데 순간 눈빛이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변하더니 차은우가 카페테이블에 올려진 책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쓸어넣었다. 좀 쫄았다..


-가자 빈아.



*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게 차은우는 집에 다양한 용품을 구비해놓았다. 나중에 듣기론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게동을 철저히 분석하고 신체학 해부학까지 공부했다고 했다. 이런 것까지 성실한 스타일이라니..

그에 반해 마음은 먹었지만 긴장으로 삐걱대는 내 몸을 차은우는 배려심 넘치는 충분한 전희와 강철 체력으로 넉다운 시켰다. 그리고 섹스할땐 형이라고 불러달라는 취향도 보여주었다..

무서워했던게 무색하게 좋았다. 


씻고 나란히 누워서 한층 더 가까워진 차은우에게 상처가 난 뒤 돌보지 않아 곪은 과거를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나는 내 스무살이 너무 힘들었어..다 지워버리고 싶었어. 

근데 널 만나는 지금 진짜 꽃피는 스무살이 된 것같아.. 고마워 은우야.


차은우는 그런 나를 한껏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더 따뜻한 품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이런 저런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위로였다. 


-빈아 있잖아. 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를때 아직도 꿈꾸는 거 같을 때가 있어.. 내가 더 고마워 나 믿어주고 나한테 와줘서..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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