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금주를 결심한 이유

2020 겨울호
작성자
따란
작성일
2021-01-16 22:54
조회
96





역대급 숙취다.

 

문빈은 눈도 뜨지 못하고 신음부터 흘렸다. 술 처먹은 다음 날 내가 또 이렇게 마시면 왈왈 짖는 개다, 라고 다짐했다가 2주도 못 가서 그냥 왈왈 짖고 소맥을 말아 잡순 게 어언 5년째다. 합법적으로 술 마실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는 소리다. 어제(인지 오늘인지)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은 하나도 안 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쑤시는 구석이 없었다. 진짜, 내가, 또 이렇게 술을 마시면... 마시면... 더 할 다짐도 이제 생각 안 났다.

 

 

 

"목말라..."

 

 

 

아주 가까운 데서 차은우의 쉬어빠진 목소리도 들렸다. 이 새끼도 무사히 살았구나. 차은우는 가끔 먹고 죽자는 말이 진담인 것처럼 퍼마실 때가 있어 술자리 다음 날 빈은 은우에게 전화해 살아있냐고 곧잘 묻곤 했다. 차은우가 먼저 일어나면 그 상황은 그대로 반대가 되어 돌아왔다. 유일하게 주량 맞는 동기인 만큼 빈도 만만찮은 터라 영 틀린 소리는 아니었다.

 

 

 

"빈아... 나 물 좀."

"네가 떠먹어..."

"빈아아아..."

"아이 진짜 어디서 앙탈이야..."

 

 

 

프흐흐, 하고 차은우가 자주 짓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은 채로 빈도 흐흥, 하고 코웃음을 흘렸다. 서로 누워서 물 떠달라고 졸라대는 게 꽤 한심하고 웃기게 느껴졌다. 하긴 알콜에 담갔다 뺀 다음 날이 다 그렇지 뭐.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꼼실거렸는데,

 

어라.

 

빈은 갑자기 전신에 확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 누구 팔에 머리 베고 있지? 지금 내가 만지고 있는 게 뭐지? 내 엉덩이 쥐고 있는 이 손은 누구 거지? 눈이 번쩍 떠졌다. 코앞에 알콜 섞인 숨 내뱉는 차은우가 마찬가지로 얼굴 찡그리며 현실 인지 중이었다. 맨살, 맨 가슴, 딱 달라붙어 은우의 팔을 베고 있는 빈의 머리, 문빈 오른손은 차은우 불알 위, 차은우 왼손은 문빈 팬티 속 엉덩이를 주무르고 있다.

 

 

 

"으악 씨발!!!!"

 

 

 

빈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나 차은우를 발로 찼다. 억, 소리를 내며 침대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차은우 발목에 벗다 만 바지가 처량히 걸려있었다. 빈은 서둘러 양손으로 몸을 더듬어보았다. 사고 안 쳤지? 뭐 더 안 했지? 와 진짜 미친 새끼. 주어 복수형. 몸을 일으킨 은우의 눈이 이글이글 불탔다.

 

 

 

"야이씨. 그렇다고 사람을 발로 까?"

"꼬라지를 봐라. 죽빵 갈기려다 참았구만."

"죽을래? 고추 만진 건 넌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개새꺄, 너는 팬티 속에 손 집어넣었잖아! 주무르긴 왜 주물러? 떡 만지냐?"

"닳는 것도 아니면서 되게 비싸게 구네."

 

 

 

빈에게 걷어차인 부분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린 차은우가 바지를 완전히 벗어 던졌다. 속옷 밑으로 방금까지 문빈이 뭔지도 모르고 주물럭거린 성기가 반쯤 서서 뚜렷한 윤곽이 드러나 있었다. 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휴, 진짜 천만다행이다. 쟤랑 사고 쳤으면 저게 내 XX 안에... 으악! 가슴을 쓸어내리는 문빈에게 갑자기 차은우가 물었다.

 

 

 

"야... 너 그거 뭐냐."

"뭐가 뭐야."

"손가락에... 무슨 반지야?"

"엥?"

 

 

 

차은우의 삿대질을 따라 쭉 시선을 옮기자 진짜로 처음 보는 반지가 빈의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다. 영롱한 큐빅인지 다이아인지가 반지 중앙에 떡 하니 박혀있고 사이즈는 빈의 손가락에 딱 맞으며 흠집 하나 없었다. 뭐야. 내 술주정이 언제부터 도둑질이었어? 빈이 얼떨떨해하는데 차은우가 어? 하고 또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나도 있네."

"엥?"

"이거 왜 네 거랑 똑같아 보이냐."

 

 

 

마찬가지로 차은우의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디자인이 은우 말대로 문빈 거랑 똑같다. 그런데 왜 하필 왼손 약지지? 불길하게?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빈이 애써 외쳤다.

 

 

 

"우리... 술 처먹고 우정 반지 맞췄나 보다!"

"설득력은 딱히 없는데. 더 생각하기 무서우니까 그런 걸로 하자."

 

 

 

바닥에 흩어진 옷을 발로 뻥뻥 찬 차은우가 서랍에서 익숙하게 티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과에서 주량 많기로 서열 매기면 1등 차은우다, 아니다 문빈이다 두 개의 파로 갈라질 정도인 만큼 술자리에서 정신 차리고 보면 딱 둘만 고개 들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왕복 2시간 반짜리 통학러 차은우가 문빈 자취방에서 자고 간 횟수도 양 손가락에 발가락까지 더한 것보다 많다. 먼저 옷을 갈아입고 빈이 입을 옷까지 꺼내 던져준 차은우가 매트리스를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아, 액정 나갔네."

"안 잃어버린 게 다행이지 솔직히."

"그건 그렇지."

 

 

 

충전기를 연결하고 전원을 켰는데, 은우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빈아?"

"왜."

"아니. 우리 종강 목요일이었잖아."

"어. 근데?"

"왜 오늘 토요일이야?"

 

 

 

빈이 후다닥 일어나 은우 곁에 머리를 붙였다. 쩍 금 간 액정에 선명히 [08:50, 12월 12일 토요일] 글자가 떠 있다. 하루가 지났다고? 빈이 서둘러 자신의 핸드폰도 켰다. [08:51, 12월 12일 토요일]. 시간만 1분 지나고 같은 날짜다.

 

 

"야 은우야... 이게 뭐냐. 너 어제, 아니 엊그제 기억나?"

"1차 고깃집 갔다가 2차 포차 가고... 애들 3차 안 간대서 너랑 따로 빠지지 않았나?"

"어 그러고 우리 클럽 갔잖아."

"맞아. 나도 들어간 건 기억나는데."

 

 

 

그 뒤론 새카맣다. 어떻게 둘 다 기억을 못 할 수가 있지? 그것도 하루를 통째로?

 

 

 

"알콜성 치매 왔나 봐..."

"아니 그보다... 와. 이게 뭐지?"

"왜 또 왜?"

"반지 이거 122만원 짜리야. 미쳤어."

 

 

 

[국민(3026) 결제승인 차**님 244,000원(1/5) 12/11 09:48 G 금은방]

 

가격을 보자마자 문빈이 헉,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반지에 혹시라도 흠집 날까 손가락을 좌우로 쫙 벌린 채 왼손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고 차은우는 허탈한 얼굴로 '나 그 와중에 무이자할부 최대 개월로 결제했네', 하고 자신을 향한 비난인지 칭찬인지를 해댔다. 환불되겠지? 되겠지? 제발.

 

똑똑.

 

충격에 빠져있는데 별안간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빈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은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집에 이모 오셨어?"

"아니? 우리 엄마 여행 갔는데."

"그러면 네 동생인가?"

"걔도 같이 갔는데."

"그럼 저거 누군데."

 

 

 

나도... 몰라. 빈의 대답에 겁많은 차은우가 바로 등 뒤로 달라붙었다. 똑똑. 야야야, 빈아 네가 나가봐. 아니 나가지 말고 문만 살짝 열어봐. 아니 열지 마 잠깐만 나 마음의 준비 좀 할게. 지랄 육갑을 떤다 차은우. 죽기야 하겠어? 야악, 문빈 죽는다고 하지 마, 불길한 소리 하지 마! 문빈이라고 그러지 말랬지. 지금 그게 중요해? 만담 같은 대화 중에 다시 똑똑. 그리고 한참의 정적.

 

 

 

"...갔나?"

 

 

 

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철컥철컥철컥철컥!!

 

잠긴 문고리를 열려고 시도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차은우는 숨넘어가게 놀라 얼굴이 새하얘졌고, 빈도 침을 꿀꺽 삼켰다. 궁여지책으로 옷걸이를 몽둥이처럼 쥐고는 천천히 문으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경계심 가득 찬 빈의 물음에 돌아오는 또랑또랑한 목소리.

 

 

 

"아빠들 일어나셨어요?"

"아빠?"

"아빠?"

 

 

 

방문 너머 G 금은방 122만원 우정 반지보다 더한 충격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빈이 조심스레 문을 열자, 키가 빈과 은우의 허리에도 안 닿을 것 같은 꼬마애가 꾸벅 배꼽 인사를 했다.

 

 

 

"빈이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어?"

"은우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우리가 왜 아빠? 왜 애가 있지? 어떻게 하루 만에 애가 생겼지? 닥쳐오는 현실이 하나같이 충격의 연속이라 빈이 잠깐 비틀거렸다. 차은우가 재빨리 부축한다. 빈아 기절하지 마라, 쟤랑 나랑 둘만 놔두고 기절하지 마라. 은우가 다급히 속삭였다. 얜 아직도 꼬마애를 귀신이 아닌지 의심 중이다. 도움 안 되는 차은우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낸 빈이 마음을 다잡고, 허리를 숙여 방긋방긋 친절한 웃음을 가장했다.

 

 

 

"저기, 얘. 우리가 아빠라고?"

"네!"

"어... 그래. 언제부터?"

"어제부터요!"

"그랬구나... 우리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아빠 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요!"

 

 

 

미친 건가? 술에 취해서 불알친구의 불알을 만지고 122만 원 짜리 우정 반지를 나눠 낀 후 애를 유괴까지 했다는 말인가? 드디어 꼬마애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는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차은우도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말끝이 떨리는 걸 보니 반지에 이어 또 다른 액세서리(은팔찌)의 추가 여부가 이 아이의 대답에 달렸다는 걸 빈 만큼 절실하게 깨달은 모양이다.

 

 

 

"그래... 진짜 엄마 아빠는 어딨어요?"

"엄마는 일하러 갔고 아빠는 없었는데 어제 생겼어요!"

"엄마 핸드폰 번호 알아요?"

"엄마가 아침에 써줬어요! 그리구 아빠들 깨워서 어린이집 가랬어요."

 

 

 

애 엄마랑 합의된 거였어? 십년감수 했다. 허억, 하고 빈과 은우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안심돼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빠들의 이상행동에 아이가 겁을 먹었는지 뒤로 물러났다. 시선을 맞춘 빈이 겨우 울음을 참고 물었다.

 

 

 

"이름이 뭐야?"

"우빈이에요!"

"그것참... 꼭 우리에게 준비된 선물 같은 이름이네."

"은우야 닥쳐..."

 

 

 

 

 

*

 

 

 

 

 

일단 아이 엄마가 어린이집에 보내라고 했다니까 그러기로 했다. 화장실에 남자 셋이 나란히 서서 이를 닦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교육 봉사 경험이 많은 차은우가 우빈이 얼굴도 씻기고 흥, 해! 하면서 코도 풀게 했다. 그 시간 동안 문빈은 냉장고에 붙어있던 메모를 읽었다. [어제 너무 감사했습니다. 저는 출근을 해야 해서 먼저 갑니다. 우빈이 어린이집은 10시까지만 데려다주시면 돼요. 저녁에 뵙겠습니다] 뭔가 일이 더 있었던 모양인데? 빈이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은우와 빈이 취한 와중에도 나쁜 짓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았다.

 

 

 

"빈아. 아무래도 어제 우리 행적을 좀 알아봐야겠어."

"우빈이 데려다주고 클럽부터 가보자."

 

 

 

양말도 신기고 외투를 꼼꼼하게 입혔다. 우빈이는 씩씩하고 말을 아주 잘 들었다. 서툰 아빠들이 뒤늦게 알림장을 읽고 준비물을 챙길 때도 투정 하나 안 부리고 신발장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감동한 은우가 진짜 아빠 할까? 하고 빈에게 소곤거렸다가 옆구리를 찔렸다. 과장 조금 보태서 옆으로 3m 정도 날아갔다.

 

 

 

"은우 아빠 어디 아파요?"

"으응, 우빈아 걱정하지 마. 쟤는 마음이 아파요, 마음이."

"진짜 문빈 나 간지럼 잘 타는 거 알면서!"

"문빈이라고 하지 말라 했다."

 

 

 

캠퍼스 주차비 비싸다고 맨날 문빈 자취방 빌라 앞에 차 세워두는 차은우 덕에 멀리 나가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조수석에 타려다가 어린 우빈이 혼자 뒷좌석 앉히면 안 될 것 같아 빈이 옆에 따라 탔다. 은우가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에 우빈이 어린이집 주소를 입력하는데, 뒤에서 문빈이 불렀다.

 

 

 

"야, 은우야. 이거 뭐냐."

"뭔데. 나 이제 네가 그러면 너무 무서워."

 

 

 

빈이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새카맣고 네모난, 꼭 영화 속에서 조폭들이 돈거래 할 때 가지고 다니는 가방같이 생겼다. 무심코 차를 출발시키며 백미러로 뒤를 본 은우가 급정거했다. 빈이 연 가방 안에 진짜로 돈다발이 가득했다.

 

 

 

"뭐야. 빈아 그거 네 거야?"

"내 거겠냐?"

"어디 있었는데?"

"여기! 네 차!"

 

 

 

<<차은우와 문빈이 취한 상태로 저지른 일>>

 

1. 반나체 상태로 서로의 고추와 엉덩이를 만지고 있었음

2. 122만원 짜리 우정 반지를 맞춤

3. 아이가 생김

4. 수상한 돈 가방을 훔침(new)

 

 

 

 

 

*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우빈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후 기억을 잃은 시발점인 클럽에 갔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이 없으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했는데 다행히 청소하는 직원들은 나와 있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CCTV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난색을 보인다. '저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창피를 무릅쓰고 빈이 드러누워 떼를 썼고 은우는 돈 가방을 흔들며 협박을 했다. '이! 큰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여기서 주웠는데 CCTV를 안 보여주시면! 주인을 찾아드릴 수가 없는데요.' 어떤 포인트에서 먹힌 건지 가방을 확인한 직원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대체 이게 뭐길래?

 

 

 

"반출은 안 되시구요, 꼭 보기만 하셔야 해요?"

 

 

 

찝찝함도 잠시, 은우와 빈의 모습이 화면에 잡히자 둘은 집중했다. 당시에는 멀쩡하게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비틀비틀 난리가 났다. 저 상태로 입장할 수 있었던 게 신기하다. 차은우의 혼잣말에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상 속 바텐더 앞에 앉은 둘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한참 시시덕거리다가 옆에 있던 잔을 들고 러브샷을 때렸다. 뭐, 그 정도야 자주 하는 짓이니까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기들 게 아니었다. 옆에 앉은 남자의 잔이었다. 착각한 것이다. 족제비같이 생긴 그 남자는 은우와 빈이 술을 바꿔 마시기 직전, 잔에 슬쩍 뭘 탔다. 그리고 바뀐 것도 모른 채  멀쩡한 술잔을 함께 있던 여자에게 권했다.

 

 

 

"아 십팔 약 탄 걸 우리가 먹은 거야?"

"그거네 저거, 물뽕. 양아치들이 강간하려고 타는 약."

"개쓰레기 새끼..."

 

 

 

둘 다 표정 굳히면 한 살벌하는 지라 함께 있던 직원이 안절부절못했다. 남자는 술을 마신 여자가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또 몰래 약을 탔다. 잠시 후, 마치 잘 짜인 콩트처럼 은우와 빈이 그걸 나눠마셨다. 그리고 그 과정이 다섯 번 정도 반복됐다...

 

저 정도면 코끼리도 맛이 갔겠다 싶었을 때 화면 속 둘의 행동이 극적으로 변했다.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더니 서로 눈을 마주쳐서 대화를 주고받다 별안간,

 

 

 

"......"

"격렬하네."

"그러게."

 

 

 

키스를 했다. 아주 딥하게.

 

 

 

"오래 하네."

"그러게."

 

 

 

둘 다 태연한 척했지만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뭐야, 저거 약에 최음제라도 들어있는 거 아냐? 약 30시간 후 어떤 심정이 될지도 모르고 열중하던 과거의 차은우와 문빈은 거의 바 테이블 위로 눕다시피 했고 정신 나간 새끼들이 주위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다 미쳤어. 거기에 떠밀린 양아치 새끼는 술을 마신 여자의 몸을 만지다 뺨을 맞았고, 빠르게 출동한 경찰에게 끌려나갔다. 은우와 빈의 살신성인으로 애꿎은 성폭행 피해자를 만들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클럽 한가운데서 섹스라도 할 기세였던 그들은 출동한 경찰과 과열되는 분위기를 말리러 온 직원들로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자 흥이 떨어졌는지 어깨동무를 하고 클럽을 나갔다. 은우의 귀에 코를 박고 뭐라 소곤거리는 빈의 표정이 무척 즐거워 보였다. 그리고 출입구에서 마지막으로 찍힌 은우는 반대 손에 어느새 처음 보는 검은 가방을 든 채였다. 아까 차에서 발견했던 수상한 돈 가방이 틀림없었다.

 

하루 동안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진 이유와 수상한 돈 가방의 출처까지는 알아냈다. 그러나 여전히 주인을 알 수 없는 돈 가방을 다시 들고 클럽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는 은우와 빈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부모님도 못 알아볼 만큼 취하면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아까의 그 진한 스킨십을 제삼자의 입장으로 보니 여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슨 게이 포르노인 줄 알았다. 은우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고 빈은 소리 없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반지 환불이나 받으러 가자..."

"그래..."

 

 

 

서로 얼굴을 못 쳐다보고 있다.

 

클럽에서 나온 시간이 새벽 4시 즈음, 그리고 은우의 핸드폰에 결제 메시지가 온 게 9시 48분이니 5시간 정도의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그동안 무얼 했는지 아는 게 더 두려워 둘 다 그 사실을 모르는 척했다. 몸 멀쩡하고 엉덩이도 안 아픈 거로 봐서 뭐가 나오지도(콩팥이라던가) 들어오지도(차은우 또는 문빈의 XX라던가) 않았으니 된 게 아닐까. 


주소를 검색해서 택시 타고 도착한 G 금은방. 딸랑딸랑 종소리가 나는 유리문을 밀며 들어가자 짜장면을 먹고 있던 주인이 아는 체를 했다. 오, 어제 그 커플! 염병. 진짜 우정 반지 아니고 커플링이었나 보네. 차은우와 문빈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억지웃음을 지었다. 클럽에서 약 탄 술을 마시고 진한 키스를 하는 영상을 확인했을 때부터 예감하긴 했었다.

 

 

 

"저희 기억하세요?"

"그럼요! 무려 15만 원이나 깎아줬으니까 기억하죠."

 

 

 

심지어 가격 흥정까지 했었냐. 환불 가능성에 먹구름이 꼈다.

 

 

 

"그런데 왜요? 혹시 다이아몬드 빠졌어요?"

"아뇨, 그... 그게 아니라..."

"환불되나요?"

 

 

 

버벅거리는 빈 대신 은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122만원을 쓴 게 자신이니까 당연했다. 절박함의 정도가 빈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나 주인은 방금까지 싱글싱글 웃던 표정 그대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발요. 저희가 어제 진짜 취해있었거든요."

"그렇게 안 보였겠지만 진짜 그랬어요."

"허 참, 젊은 사람들이 이러면 안 되지요! "

"아니 그게요, 저희가 진짜 거짓말하는 게 아니구요..."

"애초에 저희가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잠깐 술 먹고 착각을,"

"무슨 소리예요. 혼인신고도 하러 간다고 했으면서."

 

 

 

옥신각신 실랑이 중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은 빈의 고개가 홱 들렸다.

 

 

 

"뭐요? 혼인신고요? 누가요? 저희가요?"

"네. 반지 맞추고 바로 구청 간다고..."

 

 

 

이제 더는 커플링이 문제가 아니다.

 

 

 

 

 

*

 

 

 

 

 

부리나케 구청으로 달려간 차은우와 문빈은 설마, 설마 그 정도로 또라이는 아녔겠지 우리, 하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으나 결국 충격적인 것을 목격하고야 말았다.

 

 

 

"빈아 저거 뭐야...?"

"너도 보인다고? 저게 허상이 아니란 말이야?"

 

 

 

행복한 웃음을 짓는, 누가 봐도 게이 커플인 차은우와 문빈이 꽃목걸이를 걸고 구청장과 사진을 찍은 게 민원실 벽에 걸려있었다. 손에는 A시 첫 동성 커플 혼인신고라고 쓰여 있는 미니 플래카드를 들고서.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뉴스에서 '동성혼 합법화'가 시행되니 마니 하던 기억이 났다. 아무리 제 발로 찾아온 실적에 기뻤다고 해도 만천하에 민원인 얼굴을 공개해도 되는 거냐 이 공무원 놈들아? 물론 먼저 의사를 물어봤을 테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어제의 차은우와 문빈은 동의했을 것이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서로의 가족관계증명서를 떼보니까 진짜 혼인 관계로 나왔다. 무슨 행정처리가 이렇게 빠른 건데? 아니, 그보다 내가 얘랑 법적 가족관계라니. 하염없이 얼굴을 마주 보는 둘의 분위기가 심상찮았는지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그러세요...?

 

 

 

"혼인신고 취소돼요?"

 

 

 

결론만 말하면 불가. 이혼해야 한단다.

 

 

 

"하하, 부부인 거 알자마자 이혼하게 생겼네."

 

 

 

실성한 은우가 옆에서 계속 웃어댔다. 빈은 벌써 핸드폰으로 이혼하는 법을 검색하고 있었다. 반쯤 미쳐버린 둘을 바라보던 직원이 다시 조심스레 말했다.

 

 

 

"저... 이혼 안 하시면 안 될까요?"

"네?"

"적어도... 다음 달 첫 주 토요일까지는 유지해주시면 안 될까요?"

 

 

 

왜요? 하고 물어보니 벌써 NKS 다큐멘터리 팀에서 구청장을 취재해갔다는 것이다. 그때 방송을 한다며, 구청장님이 방송 타는 걸 많이 기대하고 계신다고. A시 1호 게이 부부인게 전국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에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결혼은 신성한 거 아닙니까, 젊은이들!"

"아니 애초에 들어올 때부터 불경하게 들어왔, 이거 놔요!"

 

 

 

어제 구청장의 기분이 정말 좋았나 보다. 열린 행정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구청장을 넘어 다음에는 시장, 그 이후 더 높은 자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김칫국을 퍼마셨다. 그래서 금일봉을 쐈고 직원들은 그걸 도로 뱉어내기 싫었다. 소란을 들은 구청장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은우와 빈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머리가 반쯤까진 중년 아저씨의 눈물까지 보고서야 둘은 이혼 이야기를 철회했다. 포기하고 나가는 데 지금부터 순번을 정해 법원 주위를 순찰하자는 다짐이 뒤에서 들려왔다.

 

분통이 터진 문빈이 씩씩거리며 과 학생회장에게 전화했다. 왜 종강총회는 평일이냐? 왜 평일에 해서 다음날 구청에 들어갈 수 있게 만들어버린 거냐? 뜬금없이 욕을 먹은 학생회장이 벌컥 화를 냈다. 그럼 주말에 하리?

 

 

 

'야 그리고 페이스북에 뜬 거 너랑 차은우 맞냐?'

"어? 뭐가?"

'미친놈들. 같이 술 처먹다 눈 맞았냐? 끊어!'

 

 

 

옆에서 통화를 듣고 있던 은우가 재빨리 페이스북에 접속했다. 만들어만 놓고 거의 쓰지 않는 계정인데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청난 개수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뭐야, 뭔데. 빈도 바짝 붙어 태그된 영상을 확인했다.

 

김@@ - 오빠 이거 오빠예요? #차은우

 

 

 

"얜 또 누구냐."

"나도 몰라."

"작작 좀 흘려."

"바가지 긁는 거야? "

"개소리 마라."

 

 

 

영상 제목이 '벤치에서 낭만적으로 프러포즈하는 게이 커플' 이었다. 제목이 스포일러였다. 누가 봐도 차은우와 문빈이었고 초상권 팔아먹은 새끼들은 얼굴에 모자이크도 안 해줬다.

 

 

 

"너랑 나 둘 중에 누가 프러포즈 했을까?"

"내기할래?"

"뭐 걸 건데?"

"보고 ㅎ"

"콜"

 

 

 

차은우랑 내기하면 승률이 별로인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영상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하늘이 푸르스름한 게 새벽이다. 클럽에서 나와 금은방에 가기 전까지 실종된 다섯 시간에 뭐 했는지 드디어 드러났다. 이러고 있었군 ㅎ 뭐가 그렇게 좋은지 고장 난 로봇처럼 실실 웃는 둘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가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가 손을 잡았다가 별 스킨십을 다 했다. 원래 취하면 둘 다 옆 사람에게 좀 치대는 편이긴 했는데 술과 약에 취하자 '좀'이 우주 밖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클럽에서처럼 진하지는 않은 게 다행이다. 돌아버린 와중에도 야외플은 안 한 게 의외로 상식적이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드디어 영상 속 문빈이 몸을 일으켜 차은우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가 졌네. 빈이 두 손으로 눈을 가리며 끙끙 앓았다. 빈아, 문빈아. 차라리 얼어 죽지 그랬냐.

 

 

 

"쪽팔려... 못 보겠어."

 

 

 

반대로 은우는 눈도 안 깜박이고 끝까지 봤다. 문빈이 은우의 손을 잡고 올려다보며 대충 청혼 같은 걸 하고, 그게 끝나기도 전에 차은우가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볼 것도 없이 수락이다. 은우의 목에 팔을 감고 매달리는 빈을 마지막으로 영상이 끝났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눈에 이어 귀까지 막고 있던 빈이 물었다.

 

 

 

"끝났어?"

"어."

 

 

 

밥이나 먹으러 가자. 빈을 툭 치고 먼저 걸음을 옮기는 은우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다. 뭐야, 갑자기. 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뒤를 따랐다.

 

해장을 위해 들린 24시간 국밥집. 은우는 소고기 해장국을, 빈은 뼈다귀탕을 주문했다. 심각한 표정의 차은우가 신경 쓰여 빈이 은우 앞에 수저도 놔주고 물도 따라줬다. 122만 원 때문에 그런가? 그건 말 하지 않아도 반으로 똑 잘라 은우에게 돌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어, 대답하는 게 건성이다. 빈이 은우의 발을 가볍게 찼다.

 

 

 

"왜 그러는데?"

"빈아. 화내지 말고 들어봐."

"뭔데?"

 

 

 

눈을 못 마주치고 티슈를 하트 모양으로 접더니 한다는 소리가,

 

 

 

"혹시 너 나 좋아해?"

"뭔 소리야?"

"그럼 내가 너를 좋아하나?"

"너 갑자기 왜 그래?"

 

 

 

빈이 몸을 멀찍이 물렸다. 지금 다른 상황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차은우까지 복잡하게 행동하면 답이 없다. 곧 음식이 나왔다. 커다란 뼈다귀를 건져 살부터 발라낸다.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쌀밥이 붉은 국물 위로 퐁당 빠졌다. 식는다. 너도 빨리 먹어. 일부러 더 무뚝뚝하게 은우를 재촉했다.

 

 

 

"너 청혼하는데 너무 행복해 보이더라."

"그래?"

"받은 나도 진짜 행복해 보이고."

"우리 그때 약 먹었잖아."

"그래도."

 

 

 

그렇다고 해도. 왜 키스를 했지.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왜 청혼했지. 왜 그걸 받아줬지. 결혼반지 사러 가서 15만 원이나 깎고 5개월 무이자 할부까지 받아낼 합리적 판단이 가능했는데. 대체 왜. 세상이 마냥 꽃밭으로 보였다면 혼인신고까지는 생각도 안 했을 텐데. 은우야, 밥이나 먹으라니까. 나중에 생각하자.

 

 

 

 

 

*

 

 

 

 

 

어느새 우빈이를 데리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둘은 각자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져 어린이집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유괴범으로 몰려 신고당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싶다. 미리 언급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빈이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하, 안녕히 계세요... 웬만하면 다시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양아들(우빈이)을 먼저 차에 태우고 은우와 빈은 막간 회의를 했다.

 

 

 

"우리가 어떤 사탕발림을 해서 저 모자지간을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쪽에서 우리를 꼬셨는지도 모르지."

"에이. 그 당시 우리는 갓 결혼한 게이 부부인데?"

"...진짜 게이는 아니잖아."

 

 

 

음. 빈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은우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너 게이야??"

"그래, 너랑 부부까지 된 마당에 뭘 더 숨기겠냐."

"진짜 게이라고?"

"뭐..."

"너 군대 가기 전에 여자친구도 있었잖아."

"둘 다 가능은 해..."

 

 

 

말을 잇지 못하는 은우를 피해 발끝만 쳐다보던 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걱정하지 마, 지금까지 그랬지만 앞으로도 너 절대 안 좋아할게."

"왜?"

"어?"

"왜 절대 안 좋아해?"

 

 

 

이번에는 빈의 표정이 황당으로 물들었다.

 

 

 

"너 그 말 어떻게 들리는 줄 알아?"

"어떻게 들리는데."

"자꾸 이러면 나 오해한다."

"그러니까 그 오해가 뭐냐고."

"야 차은우."

"얘기를 해봐. 오해 맞는지 아닌지 말해줄 테니까."

 

 

 

근래 본 차은우의 눈빛 중 가장 진지했다. 장난이 아니라는 거다. 얼굴빛이 파래져다 빨개졌다 신호등처럼 변하던 빈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차에 타고 있던 우빈이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 가요? 엄마 보고 싶은데..."

"어어, 그래그래 가자!"

 

 

 

이때다 싶어 도망가는 빈의 뒤통수를 빤히 노려보던 은우가 픽 웃었다. 문빈, 네가 뛰어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 뒤를 따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우빈이의 엄마는 기사식당에서 서빙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메모에 있던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 후 우빈이의 손을 잡고 찾아가자, 기다리고 있던 여자가 둘을 맞이했다. 머리를 뒤로 바짝 묶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퍼석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어렸다.

 

기억에 없는 새 인연을 맺은지라 뭐라고 첫인사를 꺼내야 할지 난감해 은우와 빈이 입술만 달싹이자, 여자가 먼저 나지막이 물었다.

 

 

 

"생각해보니까 안 되겠어요?"

 

 

 

무덤덤한 목소리지만 이미 상처받은 눈이다. 악역이 되기 싫었던 빈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은…”

 

 

 

클럽에서 약 탄 술을 잘못 주워 마시고 하루의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는 고백을 믿어줄지 자신이 없었지만, 여자는 의외로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반쯤은 안심한 것 같았다.

 

 

 

“다행이에요. 그래도 기억을 잃었다고 그동안 영 다른 인격이 되거나 하지는 않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저도 피해자였거든요.”

 

 

 

은우가 눈만 도륵 굴려 우빈이를 쳐다보았다. 우빈이는 심각한 엄마와 새아빠들의 분위기도 모르고 해맑게 만화영화를 시청 중이었다. 여자, 민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친구였어요. 그 정도로 쓰레기 새끼인 줄 몰랐는데. 헤어지고 한참 있다가 임신한 걸 알았어요.”

 

 

 

민주는 그때 열일곱이었다. 하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다들 학교에 가서 자기 꿈을 꿀 시간에 그녀는 갓난아이만 안고 사회로 내던져졌다. 지난날을 후회할 겨를도 없이 민주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빈이 말없이 휴지를 뜯어와 민주와 은우, 그리고 자신의 몫을 나누었다. 셋은 나란히 눈물을 닦고 코도 팽 풀었다.

 

 

 

“어제 그 자식을 봤어요.”

“그 자식이라면…”

“우빈이 아빠요.”

“그 개쓰레기 자식이요?”

 

 

 

혹시라도 우빈이가 들을까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둘에게 민주가 웃음을 보였다.

 

 

 

“그전까지는 자존심 때문에 연락 안 했어요. 그런데 어제 그 얼굴 보는 순간, 그런 이유로 우빈이에게 아빠 얼굴 한 번 안 보여주는 게 맞는 일일까, 내 이기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남자는 여자에게 눈길조차 안 줬다. 민주의 손을 잡은 우빈도 힐끗 한번 본 게 전부였고, 그녀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바쁘게 통화를 하며 지나쳤다. 악으로 깡으로 버틴 세월을 생각하면 거기서 남자를 붙잡고 따귀라도 올려붙이는 게 옳았다. 하지만 민주는 갑자기 발밑이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빈이는 방금  스쳐지나간 사람이 자기 아빠인 것도 모르고 표정이 좋지 않은 엄마만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엄청나게 지치고 삶이 무겁게 느껴졌다. 우빈이에게 뭘 해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끝까지 아이를 책임지는 게 맞는 걸까? 내 욕심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우빈이를 예뻐해 줄 형편 좋은 사람들을 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이처럼 엉엉 눈물이 났다.

 

그때 차은우와 문빈이 나타난 것이다. 갓 법적 부부가 된 그들은 아주 많이 들떠있었고, 온 세상이 자신들처럼 행복하기를 바랐으며, 불행해 보이는 민주에게 다가가 친절을 베풀 만큼 오지랖이 넓었다.

 

은우와 빈은 마치 친오빠처럼 민주를 다정하게 달랬다. 띄엄띄엄 털어놓는 민주의 사연을 용케 알아듣고 까짓거 아빠 해주겠다고 괜찮다고. 엄마를 따라 훌쩍거리는 우빈이를 안아 다독이며 오늘은 아빠네 집에서 치킨 먹을까? 라고 했단다. 우빈이는 넉살도 좋게 곧잘 아빠 소리를 했다. 낯선 남자 둘의 제안이 수상하기도 하건만 지친 민주는 은우의 품에 안겨서 사탕을 쪽쪽 빨아 먹는 우빈이만 바라보며 그냥 멍하니 따라갔다. 더 생각할 힘조차 없었던 것 같다. 우빈이가 낯선 아저씨들을 경계하지 않는 것도 이상할 만큼 신기했고.

 

 

 

"아니, 뭘 믿고 우리를 따라왔어요?!"

"진짜 그러다 큰일 나요."

"일단 두 분이 너무 사이가 좋으셨고..."

 

 

 

기억나는 게 없으니 할 말도 없다. 대신 오늘 확인했던 그 날의 행동거지를 떠올리며 둘은 헛기침만 연신 했다.

 

 

 

"저도 나름대로 사회 생활해서요. 많이 데어보기도 했고. 두 분이 나쁜 사람 아닌 건 그냥 알겠더라구요."

 

 

 

혼자 있기 싫은 날 곁을 채워주는 타인의 친절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민주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은우와 빈이 진짜 아빠가 된 것처럼 우빈이를 들여다 봐주겠다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란 걸 안다. 둘은 좋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거기에 기대면 모두 힘들어질 뿐이다. 민주는 그걸 이해했다.

 

 

 

"괜찮아요. 한 번이라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진심이에요."

 

 

 

거기다 대고 그럼 안녕히, 하고 자리를 뜰 만큼 은우와 빈은 냉정하지 못했다.

 

 

 

"아니에요... 그냥 우빈이가 엄마 보고 싶대서 잠깐 온 거예요..."

"맞아요. 우빈아, 아빠들이랑 이제 돈가스 먹으러 가자..."

 

 

 

얼렁뚱땅 조카 겸 아들과 애 엄마 겸 여동생이 생겼다.

 

 

 

 

 

*

 

 

 

 

 

우빈이에게 돈가스를 먹이고(내친김에 둘도 같이 먹었다. 국밥 한 그릇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그게 또 들어갔다), 은우의 차에 탄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휴, 한숨을 쉬었다. 다사다난한 하루다. 배가 부른 우빈이는 졸린 지 뒷좌석 안전벨트에 매달리다시피 꾸벅꾸벅 졸았고, 해가 짧아진 하늘은 어느새 어둑해졌다.

 

 

 

"우빈이랑 집에 있다가 민주 씨 퇴근하면 데려다줘야겠다."

"너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갈 거냐?"

"신혼인데 벌써 별거하자고?"

"아 쫌 진짜."

 

 

 

심각성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자꾸 농담을 일삼는 차은우에게 빈이 짜증을 내려다 참았다. 그게 무슨 소용이람. 어쨌든 한 달간은 운명공동체고 성공적으로 갈라선 후에도 혼인관계증명서에는 각자의 이름이 전남편으로 기재되어, 미래의 배우자에게 완벽한 설명을 해도 둘 사이를 의심받을 게 자명한데. 다른 의미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가만, 부모님한테는 뭐라고 설명하지. 갑자기 아들이 결혼했는데 그게 이모~하고 부르던 동갑내기 아들 친구야. 얻어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 가방은 어떡할 거야?"

"경찰서 맡길까."

"좀 찜찜한데."

 

 

 

이제 수상쩍은 돈 가방만 주인에게 돌려주면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난다. 본래대로라면 진작 경찰서에 맡기고 나 몰라라 했겠지만, 현금 뭉치를 가방에 넣어 다니는 종류의 사람이 경찰서에 당당히 들어가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결국에는 둘에게 연락해올 것이란 예감에 계속 들고 다녔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가방을 보고 뭔가 아는 듯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던 클럽의 직원이 둘이 남겨놓은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돈 가방의 주인이 왔고 그걸 다시 클럽으로 가져다 달라는 말을 전한다. 은우와 빈은 잠깐 고민하다가 수락했다. 십 원 한 장 쓰지 않았으니 설마 나쁜 일이 있으랴 싶었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만큼 나약한 이들도 아니었고.

 

 

 

“내가 갔다 올게. 빈이 넌 여기 있어.”

“괜찮겠어?”

“우빈이 깨서 혼자 있으면 놀랄지도 모르고.”

 

 

 

그건 그렇지. 수긍한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우빈, 문빈. 둘 다 빈자 돌림이다. 입을 오리처럼 내밀고 졸고 있는 우빈이와 부리처럼 튀어나온 윗입술로 빨대를 쪽 무는 문빈. 둘은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닮아 보여서 괜히 웃음이 났다.

 

은우가 돈 가방을 들고 아직 오픈하기 전인 클럽에 들어갔다. 굴속에 들어가는 것처럼 앞이 캄캄하다. 마침내 넓은 홀에 도착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돈 가방의 주인공을 확인한 은우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성추행범 양아치였다. 돈 가방을 분실하고 큰 곤란을 겪었는지 은우에게 유감이 아주 많아 보였고, 그 자식이 입을 연 순간 돈만 돌려주면 끝날 거라는 희망도 박살 났다.

 

 

 

"감히 내 돈을 훔쳐?"

"훔친 게 아니라, 하..."

 

 

 

점잖게 대응하려던 은우가 순간 울컥했다.

 

 

 

"애초에 당신이 술에다 약을 안 탔으면!"

 

 

 

그 말에 양아치가 움찔했다.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아?"

"뭘 어떻게 알아, 마셨으니까 알지."

 

 

 

먼저 반말을 찍찍해대는데 돌려줄 예의가 어디 있어. 존중해주고 싶은 인간도 아니고. 차은우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양아치는 외려 큰소리를 쳤다. 잠깐이나마 쫄아버린 걸 들키기 싫은 기색이다.

 

 

 

"하여간 너희 개새끼들 때문에 내가 형님들한테 얼마나 털렸는지 알아? 한번 죽어봐라."

"한 번 털린 거 가지고 엄살떠네 양아치 새끼가."

“말 다 했냐, 시발놈아?”

"난 너 때문에 결혼을 했어."

"뭔 개소리야 이 미친 새끼가..."

 

 

 

타이밍이라도 맞췄는지 은우의 뒤에서 양아치의 패거리들이 히히덕 거리면서 등장했다. 젠장 쪽수에는 장사 없는데.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구석에 숨어있던 클럽 직원(어쩐지 양아치와 커넥션이 있어 보이는)이 잽싸게 자리를 떴다. 어디까지나 제삼자의 위치를 지키고 싶어 하는 듯했다. 양아치가 깝죽대며 말했다.

 

 

 

“잘난 얼굴 뭉개지기 전에 무릎 꿇어라.”

 

 

 

무릎 꿇는 정도로 봐준다면 얼마든지 해줄 용의가 있다. 차은우는 자존심보다 실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약을 타고 여자들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놈들이 이 돈으로 뭐 하겠어. 또 나쁜 짓 하겠지? 우빈이를 홀로 키우느라 고된 삶을 산 민주도 생각이 났다. 나쁜 놈들이 나쁜 짓 하려고 하는 돈을 돌려주면 간접적으로 그걸 방관하는 게 아닐까. 은우의 꽉 다물린 턱에서 완고함을 읽은 양아치가 비열하게 웃었다.

 

 

 

“혼자 감당할 수 있겠냐?”

“누가 혼자래.”

 

 

 

클럽 문을 발로 거세게 차며 문빈이 히어로처럼 등장했다. 은우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가 구하러 왔,”

“마누라!”

“왜 내가 마누라야! 네가 마누라 해!”

 

 

 

또 옥신각신한다. 다투는 척하며 빈이 슬그머니 은우의 곁에 섰다.

 

 

 

“너 혼자 온 거 아니지?”

“주소 불러주긴 했어. 올지는 모르겠고…”

“제발 문빈 인생 헛산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 너도 인생 제대로 살았길 바란다.”

 

 

 

빈은 차에서 하릴없이 은우를 기다리는 중 명백히 좋지 않은 인상의 사내들이 우르르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 대번에 차은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했다. 물론 차은우야 정글 한복판에 떨어져도 태연히 살아나올 녀석이긴 하지만, 기왕이면 덜 다치고 살아나오는 편이 낫잖아? 빈은 서둘러 가장 최근 발신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욕설과 부탁과 허세와 애원이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민주에게도 연락해 사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침착하게 택시를 타고 15분이면 도착한다고 답했다. 깊게 잠든 우빈이를 보아하니 15분 만에 깰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서로를 마주 보던 패거리들이 서서히 거리를 좁혔다. 자연히 등을 맞댄 은우와 빈이 긴장했다. 개중 가장 튀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바닥에 침을 뱉으며 주먹을 뒤로 당기는 게 슬로모션처럼 보였다. 은우가 들고 있던 직각의 검은 돈 가방을 냅다 집어던졌다. 아주 커다란 퍽 소리와 함께 놈이 얼굴을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선빵 필승”

 

 

 

개전의 시작이다. 주저앉은 남자를 뛰어넘으며 빈이 먼저 주먹을 갈겼다. 3대 500을 치는 파워는 과연 무시무시했다. 턱이 돌아간 패거리 중 하나가 볼썽사납게 쓰러졌으나 빈은 돌아볼 새도 없이 다음을 상대했다. 은우 역시 긴 다리로 오금을 걷어차며 매타작을 피하느라 바빴다.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지 몇 대 맞는 것쯤 아무 느낌도 안 났다. 죽이니 살리니 온갖 험악한 욕지거리가 날아다녔다.

 

단 두 명 잡겠다고 달려든 양아치들 사정 봐줄 새가 어딨담. 같은 남자지만 치사하게 다리 사이 약점을 공략하던 은우가 잠깐 휘청하며 중심을 잃었다. 악에 받친 한 놈이 어디서 났는지 각목을 은우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오싹 소름이 돋는 찰나 옆에서 튀어나온 빈이 그놈을 들이받았다. 함께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곧 놈의 위에 올라탄 빈이 개빡친 표정으로 놈을 후려쳤다.

 

 

 

“지금 누구 얼굴을!”

“...나 잘생겨서 다행이다….”

 

 

 

빈과 은우가 아무리 사람 패는 것에 도가 텄대도 한계가 있다. 점점 맞는 횟수가 늘어갈 무렵 와! 소리와 함께 한쪽 팔에 ‘A대 사회체육과’ 글씨가 궁서체 자수로 새겨진 과 잠바로 무장한 남자애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폭주족이냐. 저거 창피해서 차은우랑 문빈은 사지도 않았다. 선두에 선 과 학생회장의 얼굴에 은우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구하러 와주었구나. 종강했다고 그새 심심했는지 동기와 후배들이 죄다 몰려왔다.

 

 

 

“와! 조지자!”

“조지자!”

“교수 얼굴이라고 생각해!”

“씨팔 죽여!”

 

 

 

아무리 봐도 구하러 온 게 아니고 자기 스트레스 풀러 온 거 같은데. 광기로 치달아가는 와중에 빈이 슬그머니 은우의 팔목을 잡고 구석으로 끌어당겼다. 더듬더듬, 뒤로 손을 뻗어 깍지를 끼자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이 만져졌다.

 

 

 

“쫄려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

“때맞춰 와서 다행이지…”

“돈 가방 어디 있어?”

“여기.”

 

 

 

두들겨 맞는 양아치들의 얼굴에서 전의가 완전히 사라질 때 쯤 상황을 정리하고 도망칠 생각을 하던 은우와 빈의 사고가 정지한 건 모든 것의 원흉, 돈 가방 주인인 양아치가 고함을 질렀을 때였다.

 

 

 

“동작 그만!”

 

 

 

인질극이었다. 도망간 줄 알았던 클럽 직원이 우빈이를 억세게 붙잡고 양아치가 그런 우빈이에게 작은 칼을 들이대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미친 새끼 아냐? 합의된 사항이 아닌지 싸우고 있던 패거리들도 웅성거렸다. 그냥 패싸움이랑 흉기를 들고 어린아이를 겁박하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사항이긴 했다. 양아치가 은우에게 돈 가방을 가져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잠시 서로 마주 본 둘이 동시에 한숨을 쉬고, 은우가 천천히 다가갔다.

 

 

 

“야 이, 개새끼야아아아!”

 

 

 

누군가의 사자후와 함께 양아치의 뒤통수에 작렬한 헥토파스칼 킥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돈 가방을 돌려주었을 것이다. 양아치가 쓰러지자마자 은우가 뛰어들어 칼을 멀리 발로 차버렸다. 동시에 양아치를 쓰러뜨린 사람이 클럽 직원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림 같은 정권 지르기가 꽂혔다. 억, 하고 코를 감싸며 쓰러지는 직원의 손 사이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하나로 질끈 묶은 말총머리가 휙 뒤돌았다. 빈의 입이 떡 벌어진다.

 

 

 

“민주 씨?”

 

 

 

정신을 차린 양아치가 고개를 잠깐 흔들더니 민주에게 달려들었다.

 

 

 

“최민주 이 쌍년이!”

 

 

 

멱살을 잡는데 민주의 눈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우빈이 네 아들이야 이 병신새끼야!”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여기저기서 경악의 외침이 터졌다. 스트레스 풀러 왔다가 뜻밖의 흥미진진한 막장 드라마를 관전하게 된 사체과 학생들이 어디서 꺼내왔는지 팝콘 대신 알록달록 앵두 과자 한 포대를 가져와 퍼먹기 시작했다. 양아치의 어깨를 잡고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민주가 마구 흔들었다. 양아치는 마치 종이 인형처럼 맥없이 흔들렸다.

 

 

 

“너한테 아빠 노릇 해달란 생각 꿈에도 해본 적 없어. 그런데 이건 아니지! 제 핏줄도 못 알아보고 애한테 칼을 들이밀어? 너 같은 새끼는 죽어야 해.”

 

 

 

뺨을 거세게 내려치는 데 멘탈이 터졌는지 양아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맞았다. 한 대, 두 대, 세 대… 죽어도 싸지만 저러다 진짜 죽겠다 싶어 은우가 급히 민주를 뜯어말렸다. 빈은 한쪽에 나동그라져 울고 있는 우빈이를 안고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저거 우빈이 아빠 아냐…

 

 

 

 

 

*

 

 

 

 

“민주 씨 우빈이 낳기 전에 태권도 중등부 시 대표였대.”

“…어쩐지 보통 발차기가 아니었지.”

“잘하면 우리 후배로 들어올 수도 있겠다.”

 

 

 

민주에게 맞기만 하던 양아치는 출동한 경찰에게 불법 약물을 유통한 혐의와 특수강간 및 성추행 등으로 체포됐다. 알고보니 양아치를 도운 직원은 클럽에서 저지르는 양아치의 범죄를 눈감아주는 대가로 그동안 돈을 받아챙겨먹었던 모양이다. 어쩐지 CCTV보여달라니까 얼굴이 다 허얘지더라니. 다행히도, 은우와 빈은 적극적 방어 행위라는 점을 인정받아 훈방조치 되었고 그것은 사체과 일동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과 학생회장은 출동해준 은혜를 들먹거리며 술값을 두둑이 뜯어갔다. 

 

 

 

“물주들아, 뒷풀이 안 가냐?”

“시끄러 인마. 내가 이제 또 술을 마시면 개새끼다.”

“또 개구라를 치네.”

“…이번에는 진짜야.”

 

 

 

녀석은 삽시간에 어두워지는 은우와 빈의 표정을 살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는지 발랄하게 자리를 떴다. 그래, 너희끼리 잘 처마시고 술독오르길. 그러고보니 반지 낀 손으로 팼네. 이제 진짜로 반지 환불은 물 건너 갔다… 벌써 바닥이 보이는 통장잔고에 빈이 피눈물을 흘렸다. 마지막으로 우빈과 민주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자 아주 녹초가 되었다. 

 

길고 길었던 하루가 끝이 났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탈탈 털며 나온 빈은 침대에 엎드린 채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은우를 보았다. 대충 말린 머리가 볼품없게 이마 위로 쳐졌는데도 콧대며 내리깐 속눈썹이 새삼 잘생겼다. 쟤랑 나랑 결혼했다고? 갑자기 그 사실이 머리를 두드렸다. 민주와 우빈도 없고 둘만 남자 괜히 어색해서 봉긋 솟은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옆으로 좀 가, 좁아."

 

 

 

슈퍼 싱글 사이즈 매트리스에 왕덩치 남성 둘이 눕기란 상당히 불편한 일이다. 어찌 됐든 어깨며 다리를 딱 붙이고 있을 수밖에 없어서, 빈은 두 손을 배 위로 가지런히 올리고 얌전히 숨만 내쉬었다. 어찌나 고요한지 서로 눈 깜박이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잘 거야? 웅.

 

 

 

“그럼 불 끈다.”

 

 

 

차은우의 듣기 좋은 목소리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스위치가 탁 내려갔다. 잠시 후 어깨 한쪽이 겹치다시피 은우가 바짝 다가와 누웠다. 괜히 옆으로 가라고 그랬나. 그냥 알아서 이불 깔고 바닥에 누울걸. 후회해도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문득 차은우도 빈 만큼 긴장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들키고 싶지 않아서, 빈이 태연한 척 말을 걸었다.

 

 

 

“이제 다 끝났네.”

“다는 아니지.”

“뭐가 남았어?”

“아까 얘기하다 말았잖아.”

 

 

 

하여간 차은우 이 자식은 한 번에 수긍하는 일이 없다. 빈이 입을 다물자 다시 은우가 재촉했다.

 

 

 

“어? 말해보라고.”

“쫌. 어차피 이혼할 건데 그냥 넘어가자.”

“너 나랑 이혼할 거야?”

“안 할거냐 그럼?”

 

 

 

마주친 차은우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났다. 하도 촉촉해서 슬며시 걱정이 들 정도다. 설마 우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습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투로 은우가 빈을 몰아세웠다.

 

 

 

“문빈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인정머리 없다.”

“뭔 소리야.”

“한번 좀 굽혀주면 덧나냐?”

 

 

 

이미 솔직해질 타이밍은 지났다. 쓸모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있다는 것쯤 빈도 뻔히 알지만 이제와 빈대떡 뒤집 듯 태도를 바꾸기도 창피할 뿐이다. 빈은 계속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어차피 차은우도 문빈 만큼이나 자존심이 세니까… 

 

 

 

“그러니까 뭐를, 이 자식아.”

“지가 청혼했으면서.”

 

 

 

정말이지! 왜 계속 자진해서 구렁텅이로 들어오고 난리야?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빈이 몸을 일으켰다. 이에 질세라 은우도 일어나 앉아 벽을 쾅 쳤다. 뭐냐 이 자세. 벽치기? 카베동인지 뭔지 지금 나한테 하는 거냐 설마. 빈의 표정이 아연했다.

 

 

 

“문빈. 나랑 진짜 이혼한다고?”

“야, 아니, 그게,”

"그럼 너 왜 반지 안 빼는데?"

"너, 너는?"

 

 

 

점점 얼굴이 다가온다. 어어, 하고 물러나다가 빈의 뒤통수가 벽에 닿았다. 더 달아날 구석도 없는데 차은우는 멈추지 않았다. 입으로만 말리던 미약한 항의는 금세 그치고 한동안 축축한 소리만 들렸다. 제기랄. 아직 숙취가 남은 걸까? 좋아죽겠다.

 

 

 

"맨정신에 해보니까 어때.'

 

 

 

차은우는 최소한의 도망갈 핑계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빈은 뚫어지게 은우를 마주 보다가, 대답 대신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첫날밤이다. 







전체 0

전체 120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공지사항
계간은콩 2020 가을호 line up list
계간은콩 | 2020.10.24 | 추천 0 | 조회 430
계간은콩 2020.10.24 0 430
1
계간은콩 2020 겨울호 후기
계간은콩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5
계간은콩 2021.01.16 0 95
2
Maleficent
각설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00
각설 2021.01.16 0 100
3
더 랍스터(The Lobster)
극락행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73
극락행 2021.01.16 0 173
4
첫사랑의 유통기한
나비담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04
나비담 2021.01.16 0 104
5
파도
노예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2
노예 2021.01.16 0 92
6
Once upon a dream
뉴문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5
뉴문 2021.01.16 0 95
7
곰돌이를 부탁해
달문어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2
달문어 2021.01.16 0 92
8
이동민 찾기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9
2021.01.16 0 99
9
그들이 금주를 결심한 이유
따란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6
따란 2021.01.16 0 96
10
청년경찰
땨빈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0
땨빈 2021.01.16 0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