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민 찾기

2020 겨울호
작성자
작성일
2021-01-16 22:55
조회
100

 

 

*각종 트리거 주의

 

 

 

사람 찾아드립니다

010-0330-0126 이동민

 

 

이동민 찾기 

 

 

 단물 다 빠진 인생을 씹고 있노라면 속에서 울컥 쓴 물이 차오를 때가 있다. 빈에게는 그게 이동민을 떠올릴 때였다. 동민아. 동글동글한 이름. 울리는 소리가 많아서 알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는 듯한 망상에 빠진다. 눈을 한 번 감으면 그 언제적의 바닷가 모래사장 위에 그 둘은 올라 서 있고, 파도가 밀려와 그렇게 곱지 않은 모래에 닿아선 부서지는 소리를 내는 걸 떠올리고 다시 눈을 떴다. 짙은 망상은 언제나 그 얼굴로부터 찾아오고 불면의 밤에 얼굴이 퉁퉁 부어 올라있다. 대학가 술집 라인이 죄다 셔터를 내린 오전 열한시에 빈은 그 근처를 서성이며 입을 열었다. 입김이 뿌려져 부서지는 모양새가 꼭 파도가 부서지는 모양새와 닮아있고 어쩐지 제 속은 닳아 빠진 운동화 밑바닥을 닮았다. 운동화 밑바닥의 홈에 알맞게도 끼어져 맞춰 들어간 껌이 진득이며 아스팔트 바닥과 붙었다 떨어진다. 단물이 죄다 빠져 하얗게 머리가 샌 껌이다. 또는 언젠가 껌이었던 것. 빈은 이렇게까지밖에 표현을 할 수 없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저가 어휘를 많이도 잃어버린 걸 깨닫는다. 수많은 어휘를 불어오고 동시에 수많은 말을 잃어버리게 한 이동민. 찬 바람만 쌀쌀하게 불어오면 세상에서 갑자기 증발해버린 걔가 생각났다. 수족냉증이라 손바닥이 항상 차갑던 걔. 수족냉증인 둘이 서로 외로워서 사랑한다고 그 손이 덥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반쪽끼리 만나면 덧셈이 아니라 곱셈을 해야 해. 마음이 반의 반이 된다. 둘로 견딜 줄 아는 게 늘어나면 혼자 견딜 수 있는 게 사 분의 일 조각밖에 될 수 없다. 나는 그래. 그렇게 생각해. 문득 담배 캡슐을 깨물어 터뜨리고만 싶었지만 참았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파란 배경의, 누가 봐도 대충 글자만 편집해 얹은 듯한 광고지가 손아귀로부터 탈출하려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빈의 손바닥에 자꾸만 찔러댔다. 

 

"사람 찾으신다고요."

 

 깔끔하게 정돈된 건물 창가에선 짙게 냉기가 들어왔다. 생긴 건 제법 화려하게 생겨서 꼴이 엉망이다. 할아버지들이나 입을 법한 누런 누빔 잠바에 무릎담요로 온몸을 꽁꽁 감춘 남자가 제 꼴과는 달리 깔끔한 자세로 단번에 일어선다. 앉으실래요. 가죽 소파는 아무리 봐도 어디선가 주워온 것 같았고 스토브가 닿지 않아 짜게 식은 가죽 탓에 엉덩이가 시렸다. 잘 갠 무릎담요를 건네주며 금방 따뜻해질 거라 얘기하는 목소리는 굳이 따지면 높은 편이 맞았는데 쨍하지는 않았고 둥그렇게 말려 올라가는 듯한 온기가 있었다. 머리 위로 한껏 데워진 공기가 직통으로 내려앉는다. 빈은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남자가 준 무릎담요를 한 번 더 내려다봤다. 헬로키티다. 다시 한번 남자를 올려다보면 반대편에 앉은 남자가 퍽 신뢰감이 드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알아요. 흥신소랑 안 어울리는 얼굴이죠."

"......아무 말 안 했는데요."

"그래서 평소엔 꽃남방을 자주 입으려고 노력하는데."

 

 아무래도 제가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에는 좀. 대신 스카프 했어요. 제 목덜미에 대충 묶인 꽃무늬 리본을 가르키며 웃는다. 뭐 하나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없었다. 패션 테러리스트네. 빈은 말을 삼켰다. 죄다 맞아 떨어질 것같이 생겨놓고선. 

 

"찾으시는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동민이요."

"본인 성함은?"

"문빈입니다."

"죄송해요. 기억에 없는데."

 

 자신감에 아주 똘똘 뭉쳐 있는 꼴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쪽말고 다른 이동민 찾습니다. 내뱉은 말에 가시가 돋혔다. 연이은 불면증 탓에 신경이 날카로운 탓이었다. 은우는 그런 빈이 어쩐지 비오는 길에 달달 떨면서도 신경질을 부리는 고양이 새끼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건물 1층에 누구든 괜찮으니 가져가세요, 라고 매직으로 쓰여진 박스 안에서 제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볼륨으로 짜증을 부리던 것.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올려다보며 불평불만을 다 토해내기에 결국 은우는 그 앞에서 쪼그려 앉아 말을 걸어야만 했다. 코트 뒷자락이 빗물에 다 젖어가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도끼병이 좀 있어서. 웃으면서 대꾸하면 또 움찔한다. 누가보면 사람이라도 죽이고 온 줄 알겠어.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그런 와중에는 바싹 말라있고. 하지만 직감이 맞은편의 빈을 보고 있더라도 아무런 경고 문자를 보내오진 않는다. 

 

"이 분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을까요."

"......97년생이었어요."

"네."

"그게 다예요."

"네?"

"나보다 한 살 많았어요. 근데 난 걔랑 그냥 친구했고."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어요. 무릎까지 잠기며 첨벙거리는 소리를 냈던 게 떠올랐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혹시 어떤 관계냐 물어온다면 빈은 동민과 저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깊었지만 얕았고 마냥 얕다기엔 서로의 구석을 꺼내어 보이던 모양새가 퍽 운명적이었지만 사람들은 운명에 대해 믿지 않고 빈도 이제는 확신할 수 없어져서 입을 다문다. 확실하지 않은 가능성은 머릿속에 자리 잡힌 이동민이란 세 글자에서 몇만 갈래로 뻗어 나와 있었지만, 한순간 눈을 깜빡이면 포맷하듯 죄다 사라지곤 했다. 빈은 눈을 깜빡이고 내뱉었다. 이름은 확실해요. 생일도 모르세요? 3월이었어요, 아마. 걘 워낙 많은 걸 숨겨서. 은우는 제 가명과 똑같은 빈의 동민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럼 일단 97년 3월생 이동민씨부터 찾아봐요."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자신에 차서 냉골인 방을 덥혔다. 

 

-

 

 분홍색 모닝 운전석에 앉아있는 은우를 보고 있으면 빈은 어딘가 자꾸 핀트가 어긋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그리 작은 덩치도 아닌데 소형차 운전석에 앉은 모양이 영 불편해 보인다. 무엇보다 다리가 길어 위로 무릎이 올라오듯 접힌 게 신경 쓰였다. 뒷자리에 앉으려고 뒷문을 열려는데 눈 깜짝할 새 조수석 문을 열어놨다. 어쩐지 부담스럽지만 꾸역꾸역 올라탄다. 아직은 낯을 가리는 와중이었다.

 

 서울 근교에 위치한 97년 3월생 이동민은 무려 백 명이 넘었고 그 중엔 빈이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체크리스트 위로 파란 펜을 죽죽 그어 생긴 선이 깔끔하다. 동민이도 자 없이 선을 잘만 그어댔던 게 기억났다. 세련되게 치는 동그라미 모양도 어쩐지 닮은 듯해서 문득 옆을 돌아보면 은우는 그럼 다음으로 가볼까요 내뱉는다. 고개를 끄덕이면 시동이 다시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는 둘 사이에 진공이라도 걸린 듯 아무 소리도 없다. 먼저 입을 뗀 건 은우였다. 

 

"이동민 씨랑 많이 친했어요?"

"네."

 

 대화가 뚝뚝 끊긴다. 은우는 차라리 AI가 빈보다는 덜 무뚝뚝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자꾸만 말을 붙였다. 웬만해선 침묵을 지키는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장기간 붙어 다니려니 속이 갑갑했다. 혹시 저한테 낯 가리세요? 직구로 던져오는 물음에 빈이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안합니다. 모르는 건 물어보는 게 직성이라. 그래서 은우는 사람을 찾는 일을 했다. 어릴 적 고고학자가 되어 유물 위로 내려앉은 먼지를 살살 털어내고 싶던 꿈이 어떻게 보면 다른 방향이지만 이뤄진 셈이었다. 빈은 그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내뱉었다. 깡패일 줄 알았어요.

 

"네?"

"사람 찾아준다길래."

"아무래도 그런 컨셉이 더 먹히는 편이긴 하죠. 저도 개업 초창기엔 꽃남방도 입고 썬글라스도 끼고...아, 검은 양복 입고 넥타이는 안 메고 와이셔츠 윗단 단추 두 개만 풀기도 하고....."

"요샌 코트 입고 다니네요."

"꽃무늬가 영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그래도."

 

 안쪽 주머니에서 새빨간 바탕에 흰 백합이 질서정연하게 프린팅된 손수건이 나왔다. 오늘도 갖고 오긴 했어요. 취향은 아닌데 징크스가 있거든요. 꽃무늬 하나라도 챙겨 나오지 않으면 일이 영 꼬이길래. 그렇게 생겨 먹지 않아선 미신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사주팔자 이런 거 좋아하냐 물으면 어떻게 알았냐는 듯 웃더니 얘기해온다. 매년 보러 가는 점집이 있어요. 별자리 운세는요? 그것도 생각나면 틈틈이 확인하죠. 

 

"운을 믿으시나 봐요." 

"보물찾기는 운이 제일 중요하니까."

 

 빈은 은우의 보물이라는 표현이 어쩐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도는 듯 했다. 잠깐 이어진 정적을 깨고 빈이 얘기했다. 어쩐지 다사다난하네요. 어디든 다사다난하죠.

 

"왜 이 일 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앞처럼 곧장 튀어나오지 않는 대답에 빈이 질문을 다시 수거하려하면 은우가 입을 뗐다. 보물 찾기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그 만화 중에 보물 찾기 시리즈 알죠. 아직도 집에 전권 다 있어요. 가끔 생각나면 읽기도 해요. 근데 새 시리즈가 안 나오더라. 한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담담히 내뱉는 얼굴이 어딘가를 멍하니 노려보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빈은 제 것도 찾지 못한 주제에 은우가 노려보는 곳을 시선으로 훑으며 앞을 바라다봤다. 서울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고속도로 위에서 표지판 없는 길이 자꾸만 이어졌고 은우는 앞만 바라보다 문득 노래 들을래요 물어오며 멋대로 볼륨을 키웠다. 빈이 언젠가 한 번 정도는 티비에서 들어본 저 옛날 발라드가 하나씩 목록을 넘겨가며 차 안에 특유의 박자감을 만들어낸다.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처음으로 빈도 제목을 온전히 아는 발라드가 나왔을 무렵 은우는 핸들을 붙잡고 간간이 노래를 따라불렀다. 발라드치곤 흥겨운 듯 고개를 좌우로 까닥였지만 여전히 무언갈 찾고 있는 듯 하다. 울고 있니..내가 오랜만이라서. 빈은 가만히 앞을 바라보며 다음 가사를 흥얼거릴 은우를 기다렸지만 은우는 말이 없었고 질문이 있었다. 문빈씨. 네. 

 

"이동민이라는 분을 사랑했어요?"

 

 빈은 입을 달싹이며 표현을 골랐다. 그냥, 아픈 손가락 같았던 애에요. 그렇구나. 진공 상태의 분홍색 모닝 안에 다시 공기가 감돌기 시작한 건 은우의 그 다음 말 때문이었다. 

 

"되게 많이 아꼈나봐요."

 

 둘 다 말없이 열 번째 97년 3월생 이동민을 찾아간다. 빈은 늘상 뻐근하던 가슴께가 나은 듯한 기분이었다. 대신 차 안의 공기가 식도를 타고 들어와 내벽을 콕콕 찌르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듯해서 숨을 참고 동민이에 대해 생각한다. 동민아. 동글동글한 이름. 울리는 소리가 많은 그 이름이 알사탕처럼 다시 입 안으로 내려와 읊조려질 줄 알았다. 거기선 박하향이 났다. 여전히 식도의 뒤통수를 따갑게 울리는 냄새였다.

 

-

 

 한창 다들 어렴풋한 고등학교 시절,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빈은 제 풋풋한 어렴풋함을 견디지 못해 지나가는 길목마다 동급생들이 흘리고 다니던 불안감의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거기선 어릴 때 멋모르고 할머니댁에서 씹어먹은 홍삼 캔디 냄새가 풍겨왔다. 홍삼 캔디 비닐 안에서 풍기던 매캐한 홍삼향. 물 없이 넘기는 가루약의 껄끄러움이나 그 홍삼향 아래서 질척이며 땅에 바짝 붙어 굳어버린 듯한 식어빠진 단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한 시기에 하필 그런 예민한 후각을 갖고 있던 빈은 교실에 꽉 찬 그런 홍삼내를 맡고 싶지 않아 무의식으로 도피하는 편이었는데, 그렇다고 하루 종일 잠만 잘 수 있을 정도로 잠에 특화된 인간은 또 아니라 학교에서 잠든 만큼 새벽까지는 불면에 시달려야만 했다. 

 

 3학년 1학기라는 정말로 어중간한 시기에 전학 온 이동민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도 엎드려 자다 일어난 탓에 안경을 끼지 않은 시야가 뿌옇게 흐렸다. 바로 앞자리에 앉은 동민의 등을 그 시야로 보다 다시 잠에 들었고 동민은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뒷자리의 동급생을 위해 그날 하루 수업시간과 담임 시간에 나누어준 각종 유인물들을 따로 챙겨선 집에 돌아가는 빈의 손에 쥐어주는 오지랖이 있었다. 갑작스레 눈 앞에 찾아온 정성에 당황한 빈은 그걸 가방에 대충 구겨넣고 교실을 나왔다. 며칠 쌓이다 보니 집에 와 문득 가방을 열면 그때마다 동민이 건네준 수많은 유인물들이 가방 및바닥을 꽉 채우고만 있었다. 천장을 바라보다 구겨진 걸 하나씩 펴다보면 그때마다 동민의 생각이 났다. 이상한 애. 그러면서도 그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빈은 꾸준히 유인물도 받아들지 않고 맨 뒷자리에서 잠에 들어있거나 자는 척을 했다. 어느 날부터는 매일 나온 유인물들을 모아 호치케스로 집어 건네오는 동민에게서 묘한 집요함을 느꼈다. 고마워. 빈은 그때 되어서야 저가 남의 호의에 생각보다 약해빠진 사람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유인물 모음을 건네오는 동민의 근처에선 교실 곳곳에서 풍기는 애어른들의 홍삼 캔디 냄새가 아니라, 여름에서 가을 넘어가는 무렵 앞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냄새가 났다. 그 끝자락에 옮겨 붙은 쎄한 냄새는 늘 이름이 가물가물했다. 그게 동민이 몰래 피우던 박하향 담배의 캡슐 냄새라는 걸 알게 된 무렵은 호치케스로 집힌 유인물 배달을 한 달쯤 받았을 때였다. 틈틈이 손 세정제를 바르는 동민의 손가락 사이에서 풍기는 알코올 향 아래에 파묻혔던 모양이다. 어쩐지 충격이라 하루 종일 그 사실에 앓던 빈은 그날 처음으로 반에서 제일 늦게 나가는 동민과 함께 교문을 나섰다. 빈의 학창시절 역사상 가장 늦은 하굣길이었다. 뭔가 물어볼 게 있냐는 동민에게 빈은 입을 달싹이다 내뱉었다. 너, 그. 

 

"......담배 피워?"

 

 동민은 빈을 빤히 바라보다 내뱉었다. 너 개코구나. 

 

"나 전담으로 바꿨는데."

 

 가방 안쪽 주머니에서 꺼내 잠깐 흔들어보이는 걸 굳은 채 보고 있으면, 그건 둘 사이의 접점에 처음으로 동민의 구석이 들어앉았다는 의미였다. 

 

-

 

"불량학생이었네요."

"그래도 걔, 술은 안 마셨어요."

"알겠어요. 동민씨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쪽 동민이요."

"동민씨는 술 좋아해요?"

"이쪽 동민씨요, 그쪽 동민씨요?"

"재미없어요."

"난 재밌는데."

 

 오십 번째 97년생 이동민을 만나고 돌아올 무렵이 되어선 제법 입이 트인 빈이 눈을 흘겼다. 차량 뒷좌석에 내버려 둔 리스트 위로 아무렇지 않게 빨간 볼펜으로 엑스 표시를 하려는 걸 은우가 급히 막았다. 엑스 표시는 파란 펜으로 해주세요. 빨간 펜 왠지 불길해서. 보아하니 은우가 이렇게까지 운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때 얘기한 보물찾기와 관련이 있는 듯 했지만 괜히 캐내고 싶지 않아 빈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은우와 만나는 날이면 괜히 집 앞에서 은우의 분홍색 모닝을 기다리며 별자리 운세를 찾아보게 됐다. 별게 다 옮는다 싶었지만 눈은 은우가 챙겨 입고 나온 연갈색 캐시미어 코트에 고정이다. 오늘 럭키 컬러 베이지색인데. 그거나 그거나 비슷한가. 아무래도 은우는 신경 쓰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듯했다. 

 

"시비 거는 거 아닌데요."

"네에."

"왜 그렇게 운에 민감한지 물어봐도 돼요?"

"운으로만 해결되는 일도 있거든요."

 

 노력으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 일. 은우는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까끌거리는 문장의 표면이 위장 곳곳을 찔러대느라 표정이 잠시 굳는다. 집 한구석에 아직도 놓여 있는 만화책을 떠올렸다. 터키에서 보물찾기. 집에 애도 하나 없는데 손때가 묻어 꼭 초등학교 도서관에 몇 년이고 꽂혀 있던 모양새다.

 몇 번이고 밟아 압축시킨 박스들이 기억 한 구석에서 손도 쓸 수 없게 부풀어 오를 때가 있다. 둥글 게 올라와 터지기 직전까지 띵띵 붓는 것. 요 근래 산이라곤 근처도 간 적이 없는데 속에 시커멓고 커다란 산모기를 하나 키우는 기분이 든다. 콕콕 찔리는 속에 혹이 하나씩 늘어나면 좁은 통로로 무언가 역류해서 튀어나올 것만 같아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오십 미터 근방 우회전입니다, 를 내뱉는 게 귓등을 가만히 스쳐 지나갔다. 동민씨. 이동민씨. 

 

"길을 지나왔네요."

 

 미안해요. 저 앞에서 유턴 받죠. 액셀에 올린 발에 힘을 좀 더 실었다. 주황 불을 쌩하니 지나오면 그다음의 빨간 신호에 분홍색 모닝이 정차한다.

 

"제 이름 차은우예요."

 

 이동민은 가명. 옛날에는 그 이름으로 살았어요. 혹이 찢겨 고름이 조금 흘러내렸다. 51번의 97년생 이동민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은우는 제 이름 세 글자가 하나도 제 모양을 유지하지 못한 채 흐트러지는 걸 열다섯에 목도했다. 동그랗게 울리던 이름이 무언가 깨지는 듯한 소리로 시작하는 게 힘들었던 거 같아. 부친의 성도 모친의 성도 아닌 제 3자의 성이었다. 이동민 한 글자도 남기지 않고 차은우. 어딘가 유령이 된 기분이 들어서 자주 엄지로 손바닥을 꾹꾹 눌러보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은우는 엄지 끝에 닿는 말랑한 감촉이 누구의 것인지 헷갈렸고 안전벨트는 생명끈이라는 내용의 공익광고협의회의 영상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안전벨트를 맨 둘은 끊겼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하나만 이어진다. 장례식장에서 환자복 위에 부친의 까만 양복을 걸치고 있으면 등이 한참이고 남아 열려있던 장례식장 입구를 통해 들어오던 바람이 메우지 못한 틈을 꽉 채웠다. 부조금을 어떻게 걷고 보험금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똑똑한 애라는 주변의 칭찬이 말짱 헛소리였다는 걸 문득 깨닫는다. 국화꽃은 너무 하얗게 생겨 먹어서 싫어했다. 무언가 박박 지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은 단물 다 빠져서 하얗게 새어버린 껌 같은 기분. 한순간에 발 아래 땅이 꺼지고 이삿짐 사이에 등을 동그랗게 말고 숨고 싶었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어두운 구석들이 있으면서 쥐구멍 하나는 그렇게 찾기 힘들어서 은우는 손바닥이나 꾹꾹 누르고만 있었다. 이따금 깎지 않은 손톱이 손바닥에 박혀 얕게 자국을 내고 사라지는 걸 확인하면 기분이 묘했고 그럴 때마다 왼팔 어깨부터 길게 내려오는 수술 흉터를 확인했다. 잃어버린 것의 마지막 흔적은 거기에만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은우는 불행이 행복의 반대말인지 행운의 반대말인지 자주 고민했다. 입에서 차은우, 하고 내뱉으면 탁 튀어 오르는 '차'라는 발음이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혀를 날카롭게 반으로 갈라버린다. 단어에도 제 나름대로 요구되는 권한이 필요하다는 걸 그 무렵에 깨달았다. 대체로 가족사와 관련된 수많은 단어를 목구멍 밖으로 끌어올리기가 힘들었다. 아무래도 퍼 올리는 양동이가 저 아래로 나가떨어진 모양이다.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오래되어 둥글어진 것들에 묻은 먼지를 솔로 털어내고 살살 다루면서 옮기는. 보이지 않는 보물을 땅에서나 어디서나 찾아서 끌어올리는 일. 성장과 성숙은 꼭 같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몸은 자랐고 장례식장 때 처음 입어본 부친의 까만 양복이 등에 꼭 맞게 된 무렵에 다시금 캐리어를 쌌다. 친척의 호의는 분명한 모양새를 띄고 있었지만 내벽에 몇 방이나 물려 부풀어 오른 혹 탓에 삼키기가 어려웠다.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미안하고 신경을 쓰게 만드는 일이라 입안이 까끌했다.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대충 그런 모양새로 얹혀 살던 걸 얼버무리면 걱정스런 표정이 따라왔고 그게 부담스러워 뒷걸음질치며 문고리를 잡아 밀었다. 은우는 그날따라 운동화 밑바닥이 아파트 복도 바닥과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유달리 컸던 걸로 기억했다. 1월 26일이었고 한참 내린 눈 사이로 캐리어 바퀴가 끊기거나 이어지며 자국을 냈다.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끊기거나 이어진 제 이름 석 자가 떠올랐다. 이동민. 동그란 이름에 물기가 하나도 없어 입안에서 푸석푸석하게 흩어진다. 무엇이건 간에 잃어버린 게 분명했고 그 무렵의 빈은 이름을 잃어버리지 않은 동민의 손을 가만히 잡고만 있었다. 손바닥이 의외로 까끌했고 박하 향이 났다. 어딘가 착실히 무너져 내리는 중인 걔를 구하고만 싶었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기였다. 

 

-

 

 거의 100번째 97년생 이동민을 만나러 대한민국 전국 지도의 한쪽 끝자락에 도달했을 무렵이었고 둘은 장장 두 달을 꾸준히 붙어 다니며 각자의 동민이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아무래도 3월생이라는 말은 거짓말이었나 봐요. 그러게요, 나쁜 놈. 리스트에서 98번째 97년생 이동민의 이름 위로 파란 펜으로 엑스표시를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행운의 색이 파란색이래요. 누가요, 문빈씨가요? 아뇨, 동민씨요. 3월 30일. 빈은 차은우라는 이름을 잊은 사람처럼 은우를 여전히 동민씨, 라고 불렀다. 입에 붙어서 익숙하다는 게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어렴풋이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 무렵 유인물을 모아 호치케스로 집어주던 동민이가 생각나서였다. 아무래도 걔의 오지랖이 옮은 모양인지 가끔 멍하게 도로를 노려보곤 하는 은우가 신경 쓰였다. 저가 어디 만화나 드라마, 혹은 영화에 나오는 히어로가 되지 못하는 그쯤은 잘 알았지만 어쩐지 그때 무렵의 동민이처럼 구하고픈 구석이 은우에게도 분명히 있는 듯 보였다. 겨울 해가 비추어 유달리 길어진 은우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자꾸만 그랬다. 문득 그날 동민이와 둘이 갔던 바다에서 파도 부서지던 소리가 겨울바람 사이로 들려오는 듯했다. 딱 백 번째의 97년생 이동민을 찾아내었을 때다. 

 

"이번에도 아니었네요."

"그러게요."

"바다 좀 보고 갈래요?"

"그래도 돼요?"

"뭔가 계속 바다를 보고 있길래."

 

 겨울 바다에 한이라도 있는 사람 같아서. 빈은 은우의 그 말에 눈을 끔뻑였다. 길게 늘어선 그림자 아래로 감춘 구석을 들킨 기분이다. 날은 곧 뭐라도 내릴듯 흐렸고 공기 중엔 꽁꽁 얼어붙은 눈 냄새가 났다. 눈이라도 올 거 같네요. 은우는 저의 1월 26일을 떠올린다. 캐리어 바퀴 자국이 눈의 뼈들을 뿌득거리며 부수던 소리나, 숨을 내쉬었을 때 하얗게 얼어붙어 흩어지는 입김을 보고 싶지 않아 입술을 꾹 다물었던 그 날. 어딘가에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어요. 그랬던 때가 있어요. 은우가 읊조리면 빈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었다. 문빈씨, 물병자리라고 했죠. 네. 생일이 2월이에요? 아뇨, 1월 26일. 은우는 이 땅의 한쪽 끝자락 땅덩어리를 쓸어갔다가 다시 쓸어오는 파도가 부숴지는 소리를 듣는다. 우연이 몇 겹이고 쌓여서 불투명한 무언가가 어떤 분명한 모양으로 빈과 본인의 사이에 있는 듯했다.

 

"바다에서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

"이동민씨 얘기죠?"

"......알고 있었어요?"

"아뇨, 그냥."

 

 은우는 구두 앞자락을 모래에 몇 번 파묻었다. 빈은 은우의 시선을 따라 파묻힌 구두 앞자락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회색빛 하늘의 한 귀퉁이에서 빼꼼히 고갤 내민 오후의 햇빛이 모래를 틈을 타 내리 쬐면 그 자리만 가만히 반짝이곤 한다. 빈은 그게 동민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홍삼내 나는 교실 안에서 혼자 박하향을 풍기던 애. 무언가 달관한 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알 수 없는 말을 할 때도 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죄다 맞는 말을 하던 애. 운동화 앞코로 모래사장의 모래를 깊게도 파내던 애. 바다에서 사라진 애. 동민이를 걱정했어요. 빈은 앞에서부터 거세게 불어와 얼굴을 때려오는 바닷바람의 짠 내 사이로 제 짠 내를 섞어 읊조렸다. 나는 걔를 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속삭이듯 내뱉은 말이 바람을 타고 다시 얼굴 위로 코를 때리듯 돌아오는 게 아팠다. 흉터가 주변 살보다 유달리 흰 빛을 띠는 건 새살이 돋았다는 뜻이니까. 동민이를 아픈 손가락으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어요. 내뱉으면 곧장 다시 돌아와 코를 때리곤 하는 말들에 그대로 코피가 날 것만 같았다. 난 그랬어요. 은우는 문득 왼팔에 길게 난 수술 자국을 만지고만 싶어졌다. 본인도 한 번 단단히 꼬인 팔자에 어줍잖게 남의 팔자를 위로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저의 짠 내인지 남의 짠 내인지 알 수 없이 섞여 바람을 타고 몰려온다. 소금기가 내려앉은 식도의 혹들이 자극을 받아 더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다. 빈씨 그건 그냥 운이에요. 지나가는 거. 어떻게 나아가고 어떻게 돌아갈지 모르는 거. 저가 제일 듣기 싫어했던 말임에도 할 수 있는 말은 또 그것밖에 없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돌아갈까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는 빈을 내버려두고 먼저 모래사장을 지나쳐 육지로 올라온다. 주차장으로 올라오는 계단까지 가는 짧은 길이었음에도 모래에 발이 빠져 몇 번이고 비틀거려 넘어질 뻔하면서.

  운이 되게 없네요, 우리. 말을 삼키느라 입 근처 근육이 힘을 받아 움찔거렸다. 

 

-

 

 흩뿌려지지도 않고 하얗게 곱게 빻아져 있는 512번 함의 이동민. 빈은 그 번호와 주소를 똑똑히 기억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멱살이 잡히고 내동댕이 쳐지는 게 온전히 제 탓이 맞다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끊임없이 죄송하고 끊임없이 미안했다. 어줍잖게 걔를 어루만지려고 해서 죄송합니다. 흉터는 새살이 돋는다는 의미인 줄로만 알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동민의 장례식에서 국화 한 송이 올릴 수 없었다. 국화가 너무 하얘서 그랬다. 걔의 민증 사진 앞으로 그걸 놓을 수가 없었어요. 하얀 것만 보면 눈이 따가워서 집에선 블라인드를 끝까지 내렸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볼 수 없었다. 이불 안에 들어앉아 며칠 밤이고 죽기 직전의 열병에 시달렸다. 애매하게 걔를 구하려고 했던 제 탓이라고 생각했다. 펄펄 끓는 이마를 물수건도 적시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걔가 호치케스로 집어준 유인물 왼쪽 위에 자리잡힌 작은 금속을 드문드문 만지며 개에 대해 생각했다. 눈알이 뜨거웠지만 축축하게 뜨거운 게 아니라 비틀어 빠진 사막처럼 푸석해서 눈을 감았다 뜨면 그냥 죄다 부서질 것 같았다. 겨우 잠에 들면 그때마다 깊게 잘 수 없어 꿈을 꿨는데, 그렇다고 거기서 이동민이 나오는 건 아니었다. 그냥 끝없이 계단을 올라가고 다시금 굴러떨어지고 또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동민의 국어 기출 문제집 안내문에서 나왔던 시시포스의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빈은 벌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걸 깨달을 때면 차라리 기분이 나았다. 

 

 바닥에 온전히 두 발로 땅을 디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다리 한쪽을 아예 쓸 수 없는 듯해서 남들처럼 바닥에서 중심을 잡는 삶이란 무엇인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반쪽과 반쪽이 만나는 건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야. 1에서 4분의 1 조각이 된다. 한쪽 다리로 서는 방법을 이십 년 가까이 한 번도 앓아본 적이 없어 그저 쓰러진 모양으로 가만히 누워 있었다. 무릎까지 차오르다 말 줄 알았던 게 모양을 아예 잃어버리고 세상에서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진다. 딱 몇 걸음이었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어 그럴 수 없었다. 아무래도 동민이를 구하려고 했던 건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이었던 거 같아. 그 딱 몇 걸음을 더 옮길 수 없었던 저가 미워 빈속으로 자주 토악질을 했다. 나오지 않는 날에는 목젖을 억지로 찔러 켁켁거렸다. 쌓는 건 십구년이었는데 망가지는 건 그 몇 분이나 혹은 몇 초, 또는 한 걸음 정도였다. 동민아. 동글동글하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알사탕처럼 혀 위에서 구르는데 아무 향도 맡을 수 없게 된 날 제일 심한 토악질을 했다. 시시포스는 돌을 굴려 올릴 수도 있는데 저는 아무런 근육도 없어 그저 바닥에서 한없이 그 돌을 바라만 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근육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건 그 무렵이었다. 

 

'사람 찾아드립니다. 

010-0330-0126 이동민'

 

 그 전단지를 알게 된 건 매일 턱 끝까지 숨에 찰 정도로 뛰는 걸 일 년 가까이 반복했을 때였다. 비에 맞아 쭈글하게 아스팔트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앉아있던 파란 전단지 왼쪽 끝자락이 딱 이동민이 수놓았던 그 모양처럼 호치케스로 집혀 있었다. 바닥에서 긁어 집어올리면 자르지 않은 손톱 아래에 아스팔트 위의 까만 먼지가 콕콕 박혀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시꺼매진 손으로 들어 올려 동민아 내뱉으면 알사탕처럼 굴러와 미묘한 단내를 풍겼다. 공일공 공삼삼공 공일이육.. 공일공 공삼삼공 공일이육..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그걸 입안에서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걸어서 돌아오는 동안 몇 번이고 파란 전단지 왼쪽 끝자락의 호치케스를 어루만졌다. 공일공 공삼삼공 공일이육.. 동그란 게 많아 입안에서 알사탕처럼 번호들이 굴러다녔다. 동민이를 닮아있었다.

 

-

 

동민씨  00 : 00

동민이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00 : 30

차가 없어서  01 : 25

 

-

 

 고속도로를 달리는 분홍색 모닝이 헤드라이트로 조막만하게 길을 비추며 지나가는 게 꼭 딱 한 치 앞만 아는 인생을 닮았다. 은우와 빈 모두에게는 동떨어진 삶이다. 스쳐 지나온 것들을 떠올리거나 흉터 딱지 아래 고름으로 굳어 딱딱해진 걸 캐보면 죄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순간들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노란 고름이 꼭 보석인 호박을 닮았다. 남의 고름 딱지 앉은 상처를 보면 어줍잖게 캐내고 싶어지는 건 어쩌면 그게 꼭 보석처럼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릎 푹푹 빠지는 사람을 멋대로 구하고 싶어질 때가 다들 있잖아. 그건 이기적인 건지 그래도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구하고 싶어져. 그냥 문득 세게 씹은 입안 내벽처럼 자꾸 신경이 쓰이고 걔의 이름이 적힌 손가락은 아파오는 법이었다. 은우는 앞으로 중형 승용차 몇 대를 지나 보내고 그 뒤를 중고 분홍색 모닝으로 따라가는 동안 문득 제 이름이 적힌 누군가의 손가락들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옆을 바라보면 빈이 눈을 가만히 감고 있었다. 이동민 세 글자 적힌 손가락 하나를 그대로 잃어버린 문빈. 그 위로 제 이름을 쓰고 싶다면 그건 이상한 일일까. 동정과 위로는 늘상 헷갈리는 거였고 그래서 은우는 누군가의 아픈 손가락이 되는 일이 싫어 몇 번이고 입 근육 움찔거리며 이빨 보이지 않게 입을 꾹 다무는 삶을 살아왔다. 노란 고름 딱지까지 아무도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남의 고름 딱지에선 보석을 캐고 싶었다. 보물찾기 시리즈 알아요? 난 정말로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어요. 제 속을 캐내는 대신 남의 속을 캐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둥그렇거나 깨지기 직전의 것들을 소중하게 들어올려서 솔로 먼지를 털고 원래의 모양대로 짜 맞추는 일. 나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난 잃어버린 게 되고 싶었어요, 문빈씨. 잃어버린 이동민 세 글자의 둥그런 모양으로 다시 찾아지고 싶었어요. 조각 맞춰지고 부스러진 홈에 낀 먼지를 털어내고. 누군가 내 노란 고름에서 호박을 찾아주길 바랐어요. 맥락 없이 뚝뚝 끊기는 말에 빈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다 입을 뗐다. 동민씨. 

 

"내 손가락에 동민씨 이름 새겨줄까요."

"차은우로 괜찮아요."

"이동민이 좋을 거 같아요."

"헷갈리잖아요. 같은 이름으로 아픈 손가락이 두 개면."

"다르게 아파서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노래 들을래요? 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가사가 흘러나오면 동민이는 손가락을 느리게 까닥거리며 핸들의 가죽을 두드렸다. 빈은 눈을 뜨고 딱 한 치 앞만 보이는 고속도로를 노려다본다. 잃어버린 새끼 손가락과 새 이름을 적은 네 번째 손가락을 꾹 잡고 눌렀다. 틀렸어요 아저씨. 가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아픈 손가락도 사랑이 맞아요. 난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빈은 연결된 은우의 휴대폰을 빼내고 제 휴대폰을 연결했다. 마룬파이브의 Maps.

 

 동민이가 기다리는 512번 함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 정도의 한 치 앞 정도는 볼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

 

So I'm following the map that leads to you

The map that leads to you

Ain't nothing I can do

The map that leads to you

 

Maroon 5 - Ma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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