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유통기한

2020 겨울호
작성자
나비담
작성일
2021-01-16 23:02
조회
105




첫사랑의 유통기한

 

이 세계에 태어난 아이들은 오직 유전학적으로 나뉜다. 인공수정과 자연잉태.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우성인자를 가지고 자연잉태로 태어난 아이들은 열성인자를 가진다. 열성인자를 가진 아이들은 부적합자로 분류되어 좋은 직업, 좋은 배우자, 좋은 성품을 가질 수 없고 당연하게도 부모에게 버려질 수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이 가지게 될 각종 질환(ex.심장병), 수명, 소득수준을 다 알 수 있게 됐다. 그렇다보니 사회에는 인종, 성별, 나이가 아닌 유전학적인 차별이 만연했다. 정부는 차별 받는 열성인자들을 위해 의무교육을 실시했으나 법적으로 학교를 다녀야 되는 건 16살까지였다. 17살이 되는 해부터는 열성인자들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 청소 업체나 어두운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에 반해 우성인자들은 대학부터 취업까지 탄탄대로를 당연하다는 듯이 걸었다. 

 

빈은 자연잉태로 태어났다. 기대 수명 30.2세, 심장질환을 가질 가능성 99%, 폭력적 성향을 가질 가능성 78%. 빈은 그렇게 열성인자로 태어났고 그 다음 해에 우성인자인 동생이 태어났다. 빈은 열성인자라는 이유로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고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밖에 잘 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극심한 난시로 인해 두꺼운 뿔테 안경 없이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빈에게 유일한 세상은 집에 있던 두꺼운 천문학 책이었다. 알고 있던 세상이 오로지 집이던 빈에게 우주는 처음 안경을 쓴 날처럼 맑은 세상을 본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빈은 우주를 사랑하게 됐고 지구를 떠나고 싶어 했다.

정부의 의무교육이 실시되고 빈은 처음으로 학교란 곳에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동생이 아닌 다른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다. 하지만 빈에게 우주보다 더 친한 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빈은 17살이 되었다. 17살이 된 빈은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고 고등학교를 진학하는 몇 안 되는 열성인자였다. 초중학교에서는 우성인자와 열성인자를 나눠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랬기에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열성인자들은 수업을 따라가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빈은 그러지 않았다. 열성인자임에도 우성인자들 사이에서 꽤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빈을 시기하는 아이들이 생겨났고 빈은 공공연하게 묵인된 괴롭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괴롭힘이 지속되어도 빈은 굴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냈다. 그렇게 1학기가 끝나고 여름방학식 날, 빈을 괴롭히는 아이들이 빈의 가방을 꽁꽁 숨겨두고 하교를 해버렸고 빈은 가방을 찾는다고 텅 빈 학교를 돌아다녀야 했다. 

 

“우성인자라기엔 너무 유치하다. 어휴”

 

빈의 가방은 체육관 2층에 있었고 빈은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내려갔다.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고 빈은 우산이 없었다. 부모님은 일로 바빠 이 시간에 오지도 못하고 동생은 빈을 위해 우산을 가져다줄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빈은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빈은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며 이 비는 어느 바다에서 왔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빈은 그 사람에게 눈길을 돌렸다. 빈과 같은 디자인의 하얀색 반팔 와이셔츠, 남색 긴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빈은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어딘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가 빈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빈을 쳐다봤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빈은 안 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는 점점 빈으로부터 가까워졌다. 그 남자애는 빈을 불렀다. 빈은 그 소리에 돌렸던 시선을 슬그머니 움직여 그 남자애를 바라봤다. 

 

“아...”

 

빈의 입에서 짧은 음성이 튀어나왔다. 빈은 그 아이가 낯익은 이유를 알아챘다. 그 아이는 빈의 학교 유명 인사였다. 사람을 분류하는 점수가 10까지 있다면 차은우라는 저 아이는 9.3점에 달하는 굉장한 엘리트였다. 저런 애가 이 학교에 왔다고 교장이 플래카드까지 걸었었다. 그런 은우는 앉아있는 빈을 내려다봤다. 은우의 시선이 왠지 모르게 위압감 같은 게 느껴진 빈은 당황한 듯 눈을 수십 번 깜빡거렸다.

 

“너... 우산 있어?”

 

빈은 예쁘장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조금 당황했고 누가 봐도 우산이 없어 보이는 자신을 향해 나온 은우의 질문에 더 당황을 했다. 빈은 당황하지 않은 척 말을 더듬으며 없다 말하자 은우는 빈의 옆에 빈과 비슷한 자세로 앉았다. 빈은 딱 붙어 앉아오는 은우에 옆으로 살짝 멀어졌다. 그렇게 둘은 내리는 비를 보며 비가 그치길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장마가 시작된 걸 모르는 것 같아 보였다. 빈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뻗어 비를 확인했다. 빈의 손으로 투명한 빗물이 하나 둘 떨어졌다. 은우는 그런 빈의 옆에 섰다. 빈은 은우보다 작았다. 은우는 빈을 보며 손을 빗속으로 집어넣었다. 은우의 손은 점점 젖어갔고 은우는 여전히 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빈은 옆에서 느껴지는 은우의 시선에 고개를 돌려 은우를 봤다. 은우는 빈이 자신을 보자 활짝 웃어보였고 빈은 심장이 멎는 느낌을 처음 느껴봤다. 그래서인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은우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은우는 전화를 받고 매고 있던 가방을 끌어안고 빗속으로 뛰어갔다. 은우가 움직이자 빈의 시선은 은우가 움직이는 방향과 동일하게 움직였다. 빈은 무슨 할 말이라도 있었는지 입이 살짝 벌어져 있었다. 은우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자 빈은 빗물에 젖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아스팔트를 때리는 날카로운 빗소리, 그 사이를 뚫고 들리는 누군가의 뜀박질 소리. 빈은 소리가 나는 그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곳엔 은우가 투명 우산을 들고 달려오고 있었다. 은우는 앞머리가 살짝 젖은 채로 빈에게 우산을 건넸고 빈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은우를 보고 있었다. 빈이 멀뚱멀뚱 서있기만 하자 은우는 직접 빈의 손에 우산을 쥐어줬다.

 

“너, 몇 반이야?”

“8반...”

“개학식 날 갈게. 잊지 말고 나 기다리고 있어”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휘어지게 웃은 후 은우는 다시 빗속으로 뛰어갔다. 그게 둘의 첫 만남이고 그게 빈의 첫사랑의 시발점이었다. 빈은 그 투명 우산을 보며 방학 내내 심장 통증을 호소했다. 빈은 그게 설렘인지 진짜 통증인지 구별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2학기 준비를 하며 이상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개학식 날, 은우는 진짜 8반으로 찾아왔다. 밖에 서있는 은우를 본 빈은 미약한 심장 통증을 느꼈다. 빈은 가방걸이에 걸어둔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빈은 은우에게 우산만 전해주고 다시 반에 들어가려 했으나 그런 빈을 은우가 잡아버렸다. 

 

“이름이 뭐야?”

“빈이야. 문, 빈”

“예쁘네. 내일도 와도 돼?”

“우산 줬잖아...”

“우산 말고 너 보러”

 

빈은 숨이 가빠짐을 느꼈고 은우는 자신의 손에 잡힌 빈의 손목을 통해 빈의 맥박을 느꼈다. 은우는 빈의 손목을 놓고 자신의 반으로 가버렸다. 빈은 은우를 처음 본 그날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 뒤로 은우는 빈의 반으로 자주 찾아갔다. 빈은 자꾸 찾아오는 은우가 많이 부담스러웠다. 우성인자 중에서도 엘리트로 꼽히는 아이가 열성인자와 어울린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빈은 은우가 자신이 열성임을 알고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붙어오는 것이라는 생각도 한 적이었다. 하지만 빈과 같이 있는 순간마다 진심으로 웃는 것 같은 은우에 그런 의심은 작아지고 있었다. 은우는 평소처럼 빈의 반을 찾았고 빈은 익숙하게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때 빈을 괴롭히던 A가 빈의 발을 걸었고 빈은 큰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 소리를 들은 은우는 한 번도 들어오지 않던 빈의 반으로 들어왔다. 은우는 넘어진 빈을 일으켜주며 괜찮은지 물었고 빈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끼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빈의 손목을 잡고 나가는 은우를 A가 멈춰 세웠다.

 

“왕자님 오셨네. 안 지겹냐? 열성인자라 놀아주는 거.”

“우성인 척하는 것들이랑 노는 것보다 재밌는데. 몰랐나봐.”

 

웃음기 하나도 없이 낮은 톤으로 읊조린 은우에 빈은 꽤나 놀랐다. 처음 보는 차가운 모습과 달리 빈의 손목을 잡은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사실 빈은 은우가 미소는 습관이고 친절은 버릇인 사람인 줄 알았다. 빈은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울렁거리고 어딘가 간지럽고 입이 바싹 마르고 몸을 주체할 수 없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은우는 빈을 보건실로 데려갔다. 빈은 괜찮다고 했지만 은우는 웃으며 단호하게 아니라 말했다. 하지만 보건실은 문이 닫혀있었고 둘은 벽에 기대 보건 선생님을 기다렸다. 빈은 잡혀있는 자신의 손목이 신경 쓰였다.

 

“야, 손목...”

“...”

“왜 그렇게 봐”

“너 아파? 맥박 되게 빨리 뛰는데”

 

그 말을 들은 빈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은우는 손목마저 빨개진 빈을 보고 귀여움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빈은 은우를 살짝 째려보고는 손목을 빼냈다. 빈은 말을 더듬으며 그동안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자신이 열성인 걸 알았음에도 왜 자꾸 반으로 찾아오는지. 은우는 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빈은 숨을 참았고 은우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빈의 손을 잡았다. 은우가 무언가를 말 하려고 할 때 멀리서 보건교사가 뛰어와 보건실 문을 열어주었다. 은우는 아쉽다는 한숨을 뱉었다. 

그 뒤로 빈은 은우에 대한 거리낌이 사라짐을 느꼈다. 그건 은우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비가 오는 날이면 옥상 문 앞에 앉아 비를 바라봤다. 빈은 은우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을 뻗어 비를 느꼈다. 은우는 그런 빈을 빤히 바라봤다. 빈은 그때는 물어보지 못한, 그리고 평소에 물어보고 싶었던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너는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봐?”

“내 눈이 어떤데?”

“비가 다 말라버릴 것 같아”

 

은우는 빈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지독하게 빈을 볼 뿐이었다. 빈의 말대로 은우의 눈은 내리는 비를 다 말릴 것 같았다. 빈은 언제나 그 눈을 피했고 은우는 집요하게 따라가려하지 않았다.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빈의 마음은 붉어진 귀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채로 둘은 고등학교 3년을 보냈다. 은우는 당연히 명문대로 진학을 했고 빈은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겨우겨우 대학이라고 이름 붙은 곳에 갈 수 있었다. 빈은 대학 진학 후에 은우와 연락을 할 수 없었고 전화를 걸어 봐도 없는 전화번호로 뜰 뿐이었다. 그 사이 빈은 가족에 대한 소외감으로 가족들 몰래 집을 나오게 되었다. 집을 나온 빈은 여타할 열성인자들과 같은 루트를 탔다. 빈은 서울에 있는 대형청소업체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청소 일을 하면서 빈이 우주에 대한 꿈을 더욱 키워가던 때에 처음으로 우주센터에 청소를 하러 가게 됐다. 청소를 하면서 우주로 날아가는 우주선을 보고 직원들이 일을 보는 사무실을 보고 체력단련실 등 많은 곳을 정신없이 마치 꿈처럼 떠돌아다녔다. 청소를 마치고 본사로 돌아가던 중 빈은 동료직원들이 하는 말을 듣고 어디론가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청소업체를 그만 둔 빈은 대학을 나왔지만 열성인자라는 이유로 모든 면접에서 불합격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집에 갈색 아타셰케이스를 든 남자가 찾아왔다. 빈은 긴장이라도 한 듯 그 사람을 맞이했고 그 사람은 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들고 있던 아타셰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혈액이 담긴 유리병이 있었고 남자는 대충 보다가 유리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남자는 빈에게 할 마음이 있는지 물었다. 남자가 든 유리병 위에 적힌 이름은 차은우. 빈은 익숙한 그 이름을 보고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빈은 양손에 캐리어를 들고 남자가 알려준 집으로 갔다. 택시에서 내리자 그때 봤던 남자가 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빈은 집을 구경할 틈도 없이 머릿속에 피어나는 은우 생각에 입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빈은 남자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꽤나 차가워보였다. 남자가 계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고 빈도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는 휠체어에 탄 은우가 있었다. 빈을 본 은우는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빈은 동공을 빠르게 놀리며 상황파악을 하려 노력했다. 남자는 빈에게 은우를 인사시켰다. 빈이 없던 시간동안 은우는 육상 국가대표까지 되었고 꽤 유망주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름도 모를 시골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빈은 그 얘기를 듣자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찌릿함을 꾹 참았다. 은우는 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빈은 은우의 손을 잡았고 다시 느껴지는 찌릿함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남자는 빈의 모든 것을 은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도와줬다. 빈은 렌즈도 맞추고 교정도 하고 운동도 했으나 중요한 것이 하나 남아있었다. 빈은 은우보다 5센티가 키가 작았다. 깔창으로도 안 될 크기에 빈은 결국 수술을 하게 되었다. 수술 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어야 했고 은우는 그런 빈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빈은 잊었던 익숙함이 떠올랐다. 근 몇 년간 청소부인 그를 빤히 보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면접장에서마저 열성인자라는 이유로 한 마디도 못해봤으니 빈의 인생에서 빈을 저리도 빤히 보는 인물은 은우가 유일했다. 빈은 여전히 그런 은우의 눈을 피했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은우가 집요해졌다는 점이다. 빈이 은우의 눈을 피하자 은우는 빈의 시선을 따라갔다. 

 

“너는 왜 자꾸 피해?”

 

그게 두 사람이 인사 이외에 나눈 첫 대화였다, 빈은 학창시절보다 나긋해진 은우의 음성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빈은 여전히 은우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 빈은 대충 둘러댔고 은우는 봐준다는 듯 웃으며 위스키 잔을 들었다. 그리고 빈에게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다. 왜 다리 수술을 해가면서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자신이 필요한지. 빈은 말하려 하지 않았다. 국가대표가 되어 유망주로 살았던 은우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 하찮은 삶이었다. 그곳엔 정적만 감돌았다. 은우는 위스키를 마시며 빈을 봤다. 빈은 또 은우의 눈을 피했다. 그 뒤로 둘은 서서히 얘기를 하게 되었고 은우는 빈을 은우로, 빈은 은우를 동민으로 부르게 되었다.

빈이 수술한 다리에 적응을 하게 되었을 때, 은우의 할 일이 시작되었다. 은우는 최대한 많은 자신의 유전자를 뽑아냈다. 각질, 소변, 머리카락, 혈액 등등 모든 것이 빈을 위한 것이었다. 그 덕에 빈은 면접에 합격할 수 있었고 우주센터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빈은 매일 아침에 일어나 알루미늄 캔 같은 소각시설에 들어가 자신의 전신을 긁어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태우고 은우의 유전자를 챙겼다. 

빈은 센터에서 인정받는 엘리트가 되었다. 모든 것은 빈의 노력이었다. 그 노력이 빛을 바랄 수 있었던 것은 은우의 이름과 유전자 덕이었다. 빈은 바쁘게 지내야 했다. 우주선에 타려면, 우주에 가려면 빈은 남들보다 떨어지는 만큼 공부하고 운동해야 했다. 우주 센터에서의 빈은 은우보다 더 은우 같았다. 은우는 그런 빈을 바라보기만 했다. 빈의 우주선 탑승은 거의 확정되었다. 그리고 비행이 이틀도 안 남은 상황에서 빈의 비행계획이 채택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빈은 퇴근하는 길에 은우에게 전화를 해 소식을 알렸다. 은우는 빈에게 기념으로 같이 술을 마실 걸 권했다.

빈은 퇴근하자마자 은우를 찾았다. 은우는 평소에 아끼던 와인을 들고 있었다. 빈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은우의 반대편에 앉았다. 둘은 빈의 우주비행 축하 기념으로 와인의 반병을 비웠다. 와인을 마실 때도 은우는 빈을 빤히 쳐다봤다. 빈은 취기가 오르는지 은우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빈은 은우의 눈을 보며 잔을 비웠다. 은우는 그런 빈이 꽤나 야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은우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빈은 은우를 따라 웃었다. 은우는 빈의 웃음에 왠지 씁쓸해졌다. 유전자가 무엇이기에 그 긴 시간동안 빈이 웃지를 못했는지.

 

“사고 아니었어.”

“뭐가?”

“내가 뛰어들었어. 달리는 트럭 앞으로. 부모님은 항상 완벽을 원하셨어. 완벽하게 태어났으니까. 그게 싫었어. 그래서 뛰어들었는데. 태어난 게 잘 태어나서 그런지 죽지도 않더라.”

 

은우는 빈을 보고 있지 않았고 빈은 은우를 보고 있었다. 처음 만들어진 상황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은우는 빈의 시선에 빈이 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비가 다 말라버릴 것 같다는 말. 지금 빈이 은우를 그렇게 본다면 둘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걸까. 은우는 휠체어를 끌어 자신의 침대로 갔다. 빈은 그런 은우와 속도를 맞췄다. 빈은 은우를 끌어안아 침대 위로 옮기려 할 때 은우가 빈의 옷깃을 잡아 빈과 같이 침대에 눕게 되었다. 둘은 서로를 피하지 않았다. 빈은 가라앉는 분위기에 홀린 듯 은우에게 작게 속삭였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어떻게 보는데”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빈은 누구의 심장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둘의 심박 수가 비슷하게 울렸다. 은우와 빈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서로의 삼장을 느끼기 위해 서로를 느끼기 위해 공백으로 가득히 채웠던 그 시간을 매우기 위해 더욱 열심히 서로를 탐했다.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고 집 안은 어떤 물기도 존재할 수 없었다. 

다음 날, 빈이 눈을 떴을 때 옆에 은우는 있지 않았다. 은우는 어느 때처럼 자신의 유전자를 뽑아내고 있었다. 빈의 비행은 얼마 남지 않았고 냉장고에는 은우의 유전자가 충분히 남아있었다. 빈은 은우에게 우주에는 이런 게 필요 없다 말했으나 은우는 듣지 않았다. 빈은 계속해서 은우에게 말을 걸었지만 은우는 계속 빈을 무시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빈은 곧 우주선에 탑승을 해야 했고 빈은 은우와 조금 더 마음을 나누고 싶었다. 처음 느껴본 쾌락을 몇 번이고 떠올려 봐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좋았으니까. 우주에 가면 적어도 몇 달은 은우와 같이 있지 못하니까. 빈은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애써 숨기고 은우에게 물었다. 

 

“왜 자꾸 나 피해”

“내가 뭘”

 

빈은 뭐라 말하지 못했다. 나 혼자 즐긴 거냐. 박힌 건 난데 왜 네가 내외 하냐. 하기 싫었던 거면 그때 말하지 왜 지금 무시 하냐. 등등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았지만 어떻게 말을 해야 될지, 어떤 식으로 꺼내야 될지 몰랐다. 빈이 우물쭈물하자 은우는 그새를 못 참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가봤자 집 안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빈은 은우를 따라가지 못했다. 빈은 간단한 짐을 챙기며 은우를 욕했다. 빈이 짐을 챙겨 집을 나서려는 그때 은우가 빈을 불렀다. 은우야. 빈은 자신을 부르는 걸 알고 있으나 반응하지 않았다.

 

“빈아”

 

은우가 빈의 이름을 부르자 빈은 약간 주저하면 은우를 바라봤다. 여전히 은우의 눈은 비를 말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은우의 얼굴에 전에 있던 미소는 사라졌다. 빈은 이상한 분위기에 말을 꺼내기 싫었다. 

 

“나 여행 갈 거야.”

“... 어디로?”

“좀 멀리.”

“잘됐네.”

 

은우는 가볍게 웃었다. 빈은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빈은 은우에게 잘 다녀오라 말하곤 집을 나섰다. 은우는 빈이 닫은 문을 보며 빈에게 잘 다녀오라 말했다. 은우는 지금껏 뽑아둔 유전자를 정리했고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썼다. 은우는 집안 곳곳을 둘러봤다. 그러다 은우의 시선이 멈춘 곳은 빈과 같이 밤을 보냈던 침대였다. 은우는 그 침대를 보며 입술을 꽉 물었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가 소각시설 문을 열었다. 빈은 우주선에 탑승했다. 지구에 남아있을 은우를 생각하며 몇 달 후 만날 은우를 그리워하며 그토록 원했던 우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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