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eficent

2020 겨울호
작성자
각설
작성일
2021-01-16 23:06
조회
101



*원작의 설정과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백작님의 아이를 가졌습니다."


검은 복장의 여인이 제 배를 감싸며 말했다. 설렘 가득한 그녀의 심정을 말해주듯 그녀의 등에서 솟아난 아름다운 검은색 날개가 펄럭였다. 윤기가 흐르는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산뜻한 바람을 일으켜 그녀의 머리칼이 상기된 볼을 간지럽혔다.



그러나 이제 막 푸릇한 수염이 자라나기 시작한 사내는 그녀와 상반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나시오."

"백작님..?"


칼같이 다려진 제복을 차려입은 사내는 그녀의 부름에 말 없이 등을 보였다.


"연모한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평생 함께하자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대는 숲의 마녀이고, 나는 장차 이 나라의 국왕이 될 사람이오. 평생 함께한다니, 가당키나 한 소리라 생각했소?"


사내의 말은 마디마디 독이 되어 그녀의 온몸에 고통스럽게 내리꽂혔다.


"그 간의 하셨던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습니까?"

"내 그대와의 정을 생각해서 하나 알려주겠소. 사내를 믿지 마시오."


미안한 기색은 커녕 저를 능멸하는 듯한 말에 뒷골이 서늘해져 그녀는 끝내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분노와 절망이 한 데 엉겨 그녀의 복장을 찢을 듯이 날뛰었다. 속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그녀가 주먹을 꽉 쥐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돌며 얼굴과 손, 눈가가 뜨거워졌다.


"아이는, 우리 아이는, 어떡합니까."

"키우든, 버리든, 혹 죽이든. 아무 상관 않겠소. 내가 원하는 것은 그저 그대가 여길 떠나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

"백작님!"

"뭐하느냐! 당장 이 년을 끌어내거라!"




Maleficent

w. 각설






국왕의 즉위식은 그 어떤 행사보다 성대하게 열렸다.


역대 왕가 직계 혈통의 즉위식 때보다 훨씬 더 화려하게 꾸며진 성에는 부마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없애려 애쓴 티가 역력했다. 망토를 두른 한 여인이 벽에 걸린 장식물을 둘러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왕비가 된 공주의 회임이 알려진 후 열린 첫 왕궁 행사였기 때문에 궁에는 겹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모인 방문객들로 북적거렸다. 여인은 사람들 틈에 섞여 즉위식장으로 들어갔다. 식이 이제 막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선대 국왕이 단상에 올라 자신의 머리에 있던 왕관을 벗었다. 그리고 제 앞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새 국왕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한참 버거워보이는 왕관을 쓴 사내는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며 국왕으로서의 첫 인사를 건넸다. 사람들을 돌아보며 다시 없을 순간을 한껏 만끽하고 있는 그의 눈에 익숙한 누군가가 들어왔다.


"네 년은..!"

놀란 국왕이 소리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국왕이 보고 있는 곳에 쏠렸다. 그 곳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여인이 웃으며 서 있었다. 



"환영 인사는 따로 받고 싶었는데."

웃음기를 머금은 여인의 등에서 커다란 날개가 나와 펄럭였고 그녀는 순식간에 국왕의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국왕이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뭐하고 있느냐! 어서 이 마녀를 죽여라!"


병사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는 검은 빛 날개를 크게 펼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궁수들이 활을 쏘아댔지만 그녀가 있는 곳까진 닿지 못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도망치고 있는 국왕을 낚아채 천정의 버팀목 위에 올려놓았다.


얼굴이 새파래진 국왕이 아래를 향해 소리쳤다.

"왕궁마법사를 대령하라!어서 이 년을 죽여라!"


"한 나라의 국왕이라는 자가 그리 입이 걸어서야 되겠습니까. 폐.하."

여인이 잔뜩 비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우리 빈이에게 왕궁 구경을 시켜주러 왔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겁나시는지요?"

"빈이?"

국왕이 한 쪽 눈썹을 올리며 묻자 여인이 부드럽게 제 배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아이 이름입니다. 빈. 빛나는 아이라는 뜻이지요."

"허! 마녀에게서 태어난 괴물이 빛나는 아이라니."

"폐하에게서 태어난 괴물이기도 하지요."


여인의 말에 국왕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변해갔다.


"우리 빈이를 이리 모독하시니, 즉위 선물은 없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년 따위가 주는 선물은 필요 없다."

"여왕에 대한 비밀인데, 필요없다 하시니 저도 굳이 알려드리진 않겠습니다."

"알려준들 네 년 말을 믿을 것 같으냐?"

"그런 도발은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평생 모르고 사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지요."


여유롭게 미소짓는 여인 뒤로 강한 섬광이 번쩍 일며 여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여인을 공격한 왕궁 마법사는 한 번에 큰 마력을 사용해 벌써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뱃 속에 마녀의 씨가 있다! 마녀의 새끼 또한 죽여야 한다!"


국왕이 소리치자 병사들이 여인을 둘러쌌다.

예상치 못하게 큰 부상을 입은 여인은 도망가려 날개를 펼쳤다.


그 때, 왕궁 마법사가 남은 힘을 다해 그녀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그녀의 몸을 속박한 듯 그녀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를 틈타 궁병들이 그녀의 날개를 도려내었다. 살을 자르는 고통에 그녀의 비명이 공기를 가로질렀다.


상처입은 등을 뒤로 한 채 제게로 겨눠지는 창과 칼들을 마력으로 막아낸 그녀는 가까스로 투명 사슬에서 벗어났다. 날개가 있던 자리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려 그녀의 망토 자락을 어둡게 적셨다.


쓰러진 병사들을 헤치고 밖으로 나서려는 그 때,  보랏빛 낙뢰가 그녀를 향해 떨어졌다. 

미처 다른 곳으로 피할 새도 없이 그녀는 양 팔로 배를 껴안은 채 주저 앉았다.


'아가.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킬거야.'


낙뢰를 정통으로 맞은 마녀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녀의 아이를 위해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 출구로 한걸음 한걸음 내딛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모든 마력을 소진한 왕궁 마법사가 쓰러져가며 다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년은 방금 네 새끼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 아이는 억겁의 시간에 갇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얻을 것이다. 그 아이가 스무살이 되는 해부터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할 거ㅅ,!"

왕궁 마법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가 쏜 마법이 그의 심장을 날카롭게 관통했다.


마녀는 왕궁 마법사를 죽인다 한들 아이의 저주는 풀리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주에 관해선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걸린 끔찍한 저주가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아가야, 빈아, 미안해..엄마가 미안해...'


그녀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돌려 왕비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국왕의 빌어먹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왕비의 부풀어오른 배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왕비의 뱃 속에 있는 아이가 스무살이 되는 해, 네 놈의 아들이 생일을 맞는 순간, 저 아이는 영원한 잠에 빠질 것이다.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껍데기 속에 갇혀 세상의 끝이 다가올 날까지 홀로 잠들어 있을 것이다!"


악에 받친 저주를 건 그녀는 다친 몸을 이끌고 급하게 숲으로 돌아왔다.






*






새로운 왕자의 탄생을 반기는 말도 있었지만,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왕비가 애를 못 가지는 몸이라 다른 곳에서 애를 데려왔다더라, 사실은 국왕에게 문제가 있고 아기는 왕비가 다른 곳에서 임신을 한거다, 등의 입에 담기 부끄러운 소문이 흉흉하게 왕국을 떠돌았다. 


하지만 소문이 무색하게 국왕과 왕비는 왕자를 끔직히 아꼈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은우 왕자는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 어느 덧 일곱살이 되었다.





"왕자님 숲은 위험합니다!"

호위기사의 말은 귓등으로 듣는지 똘망한 눈을 한 은우는 작은 몸으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은우의 눈에 덤불이 뭉쳐 작은 동굴처럼 된 곳이 들어왔다. 은우는 그 아래 몸을 웅크리고 들어갔다.


"왕자님! 왕자님!"


성인인 호위무사의 눈높이에는 너무 낮은 곳에 있었는지, 은우를 애타게 찾던 호위무사는 은우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갔다. 호위무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은우는 덤불 동굴에서 나와 몸을 일으킨 후 엉덩이에 묻은 흙을 탈탈 털었다. 


은우가 바지를 보며 흙을 턴 후 다시 몸을 돌리자, 은우의 앞에는 생전 처음보는 동물이 있었다.

검은 호랑이의 모습이나 용의 날개를 달고 있는 괴이한 생명체였다.


"안녕?"

은우가 인사를 건네자 흑범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나는 은우야. 차은우. 야옹아 너는 이름이 뭐야?"

은우가 가까이 다가가자 금방이라도 은우를 물어뜯을 듯 흑범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은우가 아랑곳않고 호랑이의 연분홍색 코에 손을 올리자, 호랑이는 펑! 소리를 내며 은우 또래 정도로 되어보이는 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나 안 무서워?"

"뭐야 사람이었어? 아니 귀여운데."

"너 이상한 아이구나? 내 이름은 문빈이야."

"예쁜 이름이네. 반가워."

"너 여기서 뭐해?"

"놀러왔어. "

"숲에 놀러온다고? 사람들은 숲을 무서워하는 거 아니었어?"

"난 아냐. 숲이 얼마나 좋은데. 이렇게 친구도 만나고."

"친구?"

"응. 나랑 친구하자. 사실 나 친구가 없어."

"나도 사람 친구는 없어. 숲에 사람은 나랑 엄마밖에 없거든."

"좋아! 그럼 내가 니 첫번째 사람 친구야!"

"그래! 그럼 난 니 친구 1호야."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은우와 빈이 만난지 10년이 지났다.

작은 가시덤불 아래 숨던 꼬마는 훌쩍 커 제법 어른에 가까워진 태가 났다. 


"은우야 내일 뭐해?"

"내일은 궁중 법도 배워야해."

"왕자는 힘들구나."

"혼자 배우려니까 재미없어. 나도 학교 가고 싶어."

"학교가 뭐하는 덴데?"

"다 같이 공부하는 데야."

"피. 재미없겠다."

"아냐. 운동도 하고, 재밌는 것도 많이 배워."

"재밌는 거 뭐 배우는데?"

"음...안 가봐서 모르겠다."

"그게 뭐야. 너도 모르면서."

"맞아. 세상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나도야. 숲에서만 사니까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너 모르는 거 있으면 내가 알려줄게. 물어봐봐."

"음...우리 엄마는 항상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한단 말이야? 그런데 엄마가 집에 가지고 오는 책들에는 다르게 써져있어. 사랑이 제일 중요하대. 사랑은 진짜로 있는 걸까?"

"너 사랑해본 적 있어?"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봐? 넌 해봤어?"

"당연하지."

"진짜? 어때?"

"한 사람만 생각나고, 같이 있으면 두근거리고, 맨날 보고싶고, 보고있어도 보고싶고, 또, 그냥 그 사람이랑 있는 거 자체가 너무 행복해."

"난 너랑 있을 때 그런데?"

"바보야. 나도 그 말이야."

"누구보고 바보래 바보가."


서로를 놀리며 투닥대다 동시에 푸흡하고 웃음이 터진 은우와 빈은 풋풋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







신년이 되자, 궁의 경비가 삼엄해졌다. 국왕은 왕자를 마녀로부터 지키기 위해 왕국의 모든 마법사들을 불러 24시간 경계태새를 갖추었다. 그 덕에 3주나 빈을 만나지 못한 은우는 겨우 경비들의 눈을 피해 궁을 빠져나와 숲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빈이 심통이 나 있었다.

"왜 요즘 안 왔어?"


"아빠가 밖으로 나가지 말래. 오늘도 겨우 몰래 나온거야."

"왜?"

"마녀가 날 죽일거래."

"응.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마녀가 나한테 저주를 걸었대. 20살 생일 때 영원히 잠에 빠뜨릴거라고."

"헉. 무섭다."

"그치? 근데 내 생각엔 뻥인 것 같아."

"왜?"

"그 마녀가 숲에 산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그 마녀는 커녕 사람이라곤 너밖에 못봤잖아."


은우의 말에 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빈을 눈치챈 은우가 다급히 덧붙였다.

"너희 어머니일리가 없지. 너희 어머니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러실 분도 아니잖아."


은우의 말에 빈이 애써 웃으며 은우의 말에 맞장구쳤지만 마음 속에 찝찝함을 사라지지 않았다.


"당분간 못 올 것 같아. 그래도 니 생일 때는 올게."




은우가 숲을 떠나자마자 빈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붙잡고 물었다.


"어머니, 어떤 마녀가 왕국의 왕자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었다는데, 아세요?"


빈의 어머니는 대답 대신 빈에게 되려 물었다.

"빈아. 올해 니가 몇 살이지?"

"26일이면 스무살이에요 어머니."

"빈아. 아가. 엄마가 20년 동안 못한 말이 있는데, 들어주겠니?"









*








어머니에게 모든 전말을 들은 빈은 울기도, 화내기도 하며 제 어미를 설득했지만 빈의 어머니는 저주를 푸는 방법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빈은 앞으로 은우를 볼 자신이 없었다. 은우에게 덧씌워진 저주를 풀 방법을 모르는 것도, 그 빌어먹을 저주를 건 사람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것도, 그것도 모르고 은우와 사랑에 빠진 것도, 모두 빈을 무너뜨리는 죄책감의 덩치를 부풀렸다.


빈은 누구보다도 은우의 찬란한 20세의 봄이 오는 걸 두려워했다.





*




'빈아 생일 축하한다'

예쁘게 장식이 된 케이크 옆에 곱게 놓인 쪽지를 보고도 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우가 오기로 한 날이었다.



빈은 은우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아니, 볼 수 있을지 조차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은우에게 저지른 끔찍한 일을 알게 된 이상, 은우를 전처럼 대할 수 없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차 어떤 말로도 그 심정을 표현할 수 없었다. 


빈이 은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 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은우는 언제나 낮에 와서 밤이 될 쯤 돌아가곤 했다. 약속을 잊었을 리도 없다. 은우는 빈과의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빈은 불안해졌다.


숲의 밖에서 날개를 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거스르고 빈은 궁을 향해 단숨에 날아갔다. 단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지만, 수년간 은우가 귀에 닳도록 들려준 곳이라 익숙하게 느껴졌다. 


왕궁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빈은 날개를 접고 궁으로 들어가 은우를 찾아 이리 저리 돌아다녔다. 탑 가까이에 있는 층에 다다르자, 휘향찬란한 문이 눈에 띄었다. 일개 궁인의 방은 아닌 듯 했다. 무거운 문을 밀고 조심스럽게 들어가자 넓은 방 저편에 자리잡은 커다란 침대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빈이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은우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있었다. 빈이 나즈막히 은우를 불렀다.

"은우야."

은우는 대답이 없었다.

"은우야. 나 왔어. 일어나봐."

여전히 은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빈의 손이 떨렸다. 빈은 떨리는 손으로 은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은우의 뺨은 얼어붙은 왕국의 한송이 눈처럼 차가웠다. 손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빈은 눈물이 터져나왔다. 


"어째서 은우가 아니라 제 생일에,"

그제서야 빈은 깨달았다. 어머니의 저주는 정확했다.




"네 놈이 그 괴물새끼군."


갑작스레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빈이 뒤를 돌자, 증오로 가득찬 표정을 한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빈은 한 눈에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마녀에게 가서 전해.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냐고. 아직 생일이 되지도 않았는데, 아직 우리 은우가 봄을 보지도 못했는데 왜 잠에 빠져들었는지!"



"나도 당신의 아들이 아닙니까. 아버지."


빈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답하자 국왕의 머릿속에 이십년 전의 찢어질 듯한 마녀의 목소리가 마치 어제처럼 생생히 울려퍼졌다.


"네 놈의 아들이 생일을 맞는 순간! "


왕은 실소를 터뜨렸다.

"개 같은 년..."


제 어미를 모욕하는 아비를 향해 빈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봄에 태어난 아이는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저와 같이 늙지도, 죽지도 못한 채 영원히 추운 겨울 속에서 잠들 것입니다."


"이 괴물 새끼가..! 그래. 네 놈, 네 놈의 저주를 풀어주겠다. 왕국의 모든 마법사를 동원해 네 놈의 저주를 풀어줄테니, 우리 은우의 저주 푸는 방법을 알려주면 되지 않느냐."


왕의 말에 빈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빈의 대답에 실의에 빠진 국왕을 뒤로 한 채 빈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날개를 펼쳤다.

"생일 선물은 이것으로 족한 듯 하니, 이만."



창문을 통해 빠져나온 빈의 밤하늘에 절망이 펄럭였다.








*






은우가 잠든 궁은 점점 황폐해졌다. 폭군으로 변해버린 국왕 때문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잠긴 왕비는 더욱 피폐해져 갔고, 결국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궁중 의원들에게 이따금씩 이상한 말을 하곤 했다.


"우리 은우가 저주에 안 걸릴 줄 알았네. 저 새끼 애가 아니니까. 우리 은우는 내 애 거든. 저런 미친놈 애가 아니라. 은우 아빠는 평민이었지. 그 사람은 내가 공주인 줄도 몰랐었어. 그냥 다 버리고 그 사람이랑 살 걸 그랬나보오. 우리 은우 어떡하나. 나는 진짜 저주에 안 걸린 줄 알았어."


날이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매일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던 왕비는 끝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생을 달리했다. 왕자와 왕비를 동시에 잃은 국왕은 더욱 더 미쳐 날뛰었고, 왕궁은 지옥 그 자체가 되었다.



숲이라고 궁과 다른 상황은 아니었다. 은우가 잠에 빠진 이후로 국왕은 틈만 나면 숲을 공격했고, 마녀는 국왕이 나타날 때마다 그녀의 마음에 쌓인 증오를 되새김질 했다.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숲은 점점 검게 변해 생명이 살기 힘들어졌다.




*




빈은 잠든 은우를 보며 다짐했다. 

빈은 자신이 영원히 잠드는 한이 있어도 은우를 깨어나게 해주겠다고. 저주를 푸는 방법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은우의 저주를 풀어주겠다고.


빈이 은우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춘 후 속삭였다.


"나는 늙지도 죽지도 못하는 괴물로 영원한 시간 속에 갇혀 살아갈 지라도, 너만은 살리고 싶어. 사랑하니까. 은우야.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나도 사랑해 빈아."



빈은 제 눈과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은우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얼어붙은 빈을 보고 은우가 한 마디 덧붙였다.



"나 자다 일어나서 별로야?"


은우의 장난끼 어린 말에 실감이 난 빈이 얼른 일어나 은우의 목을 감싸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빈이 끌어안은 은우의 목이 따뜻했다.



봄이 돌아왔다.







*




은우는 깨어나자마자 빈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빈이 눈물 콧물을 쏟으며 간간히 미안하다고 하는 덕에 몇 마디는 못 알아들었지만,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제 아비란 것은 똑똑히 이해했다.


너무 울어서 퉁퉁 부어버린 빈을 집으로 돌려보낸 후, 은우는 국왕을 찾아갔다.

국왕은 깨어난 은우를 보고 놀라며 반가워했지만, 은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은우의 물음에 국왕이 답했다.


"왕이 될 자는 대를 위해 소를 버릴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준비해라. 전쟁을 치를 것이다. 너에게 저주를 건 댓가를 치르게 해줘야지."





검은 숲의 중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마녀가 빈에게 말했다.


"빈아. 마지막 전쟁이 될 것 같구나."





*





국왕이 선봉에 올라 숲을 향해 달려왔다. 마녀도 지지 않고 숲 속의 하수들로 군대를 맞이했다. 


"쳐라!"


국왕의 명령이 신호탄이 되어 숲의 동물들과 군사들이 서로의 목을 뜯고 몸통을 베며 죽여나갔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살아남은 목숨이 몇 없어질 때쯤, 국왕이 안장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녀의 날개였다.


국왕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마녀의 날개에 장검을 꽂자,  아직도 날개가 연결되어있는 것처럼 마녀는 고통스러워했다.


"크흑!"



마녀의 모습을 확인한 국왕은 날개에 꽂힌 장검을 주욱 내리며 검은색 날개를 크게 찢었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마녀가 비명을 지르자 그녀의 수하들이 힘을 잃고 땅 아래로 사라졌다. 

국왕이 날개에 꽂힌 칼을 뽑아 날개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찢고 또 찢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마녀는 힘을 쥐어짜 땅에서 나뭇가지를 솟게 해 국왕의 목을 옥죄었다. 그 덕에 국왕의 손에서 날개가 떨어졌지만 이미 마녀는 너무 많은 마력을 빼앗긴 상태였다. 마력이 부족한 탓에 국왕을 잡은 나뭇가지는 금방 사라졌고, 국왕은 날개에 꽂혀있던 검을 들고 마녀에게 다가갔다.


기력을 쇠한 마녀가 국왕 앞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이제 진짜 끝이다."




은우가 국왕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저를 죽이십시오."


"뭐하느냐 비켜라"


"아버지. 너무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무고한 목숨들이 더 죽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안 비키면 니가 죽는다."


"아버지께서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장차 왕이 될 자는 대를 위해 소를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제 목숨따위."


"배은망덕한 것. 그래, 저 괴물을 죽일 수 있다면, 네 목숨 정도는 희생할 가치가 있지."




국왕의 얼굴은 이미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벌겋게 눈이 뒤집어져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빈아, 엄마가 미안해. "


마녀가 마지막 힘을 다해 은우를 밀치고 국왕에게 달려들어 그를 끌어안았다. 마녀와 국왕의 몸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마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불에는 마력이 깃들어 병사들은 물론 은우와 빈도 다가갈 수 없었다.


빈이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엄마!"


온 몸에 불이 붙은 국왕이 비명을 질러댔으나 마녀는 단 한 틈도 그를 놓아주지 않고 더욱 세게 그를 그러안았다. 마침내 두 사람의 몸이 재가 되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어떤 것으로도 끌 수 없었던 불씨는 사그라들었다.





*





전쟁이 끝난 후, 봄이 찾아왔다.


황폐해졌던 왕국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고, 가시덤불로 덮여있던 숲에는 알록달록 예쁜 꽃들이 피고 새로운 생명이 생겨났다. 



새로운 국왕의 즉위식이 숲의 입구에서 열렸다. 왕국의 사람들과 숲의 동물들이 모여 즉위식은 매우 북적거렸다. 멋지게 차려입은 은우와 빈이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나무 밑동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손을 잡고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국왕 차은우와 국왕 문빈은 왕국과 숲을 하나로 합쳐 평화롭게 통치할 것을 선서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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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은콩 2020 겨울호 후기
계간은콩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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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leficent
각설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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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랍스터(The Lobster)
극락행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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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유통기한
나비담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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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노예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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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upon a dream
뉴문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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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를 부탁해
달문어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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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민 찾기
| 2021.01.16 | 추천 0 | 조회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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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금주를 결심한 이유
따란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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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경찰
땨빈 | 2021.01.16 | 추천 0 | 조회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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