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M군의 우울, 그 해 봄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이름없음
주제
좋았을걸 (슬기로운 감빵생활)



19세 M군의 우울, 그 해 봄

w. 이름없음

(참여 OST _ Heize - 좋았을걸)







* 네이버 웹툰 '어/글리 후/드'의 세계관을 차용했으며, 웹툰에서 나온 몇몇 용어가 등장하는 글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전개와는 관계없는 글임을 미리 밝힙니다.

* 전개상 불편하고 잔인하거나 혐오스러운 발언과 표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유의해주세요.









A.



그 애는 봄이 오는 것이 싫다고 했다.





B.



서울에 위치한 유명한 명문 사립고교 송신 頌神 고등학교. 새학기가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기에 시끄러울 법도 하건만 학교는 조용했다. 당연하게도 수업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1교시가 시작한지도 정확히 25분 정도 지났을까? 닫혀진 교문 난간을 가볍게 뛰어넘어서는 깔끔하게 정돈되지 않은 연분홍빛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느릿한 걸음으로 운동장을 가로질러오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아래는 교복 바지를 입었지만 위에는 연한 잿빛의 후드 집업을 입고선 귀에는 피어싱과 귀걸이를 하고 있는 그는 어딜 가나 눈에 띨 법한 화려한 외모의 소유자였건만 무기력하기 그지없어보였다. 다 낡아빠지고 색이 바랜 검은 운동화를 질질 끌며 학교 건물로 들어간 그는 계단을 올라 교실 앞에 다다랐다. 3학년 6반. 교실 문패를 잠시 바라보던 그가 뒷문을 큰 소리가 나도록 열고 들어간다. 아직 수업 중이었기에 당연히 급우들과 선생님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힌다. 그 시선은 물론 곱지 못하다.



" 쟤는 또 지각이야? "

" 개학하고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지각만 열 번이 넘지 않았어? 깨워주는 사람도 없나? "

" 그러게. 누가 D급 돌멩이 아니랄까봐 게을러 빠졌어. 저러니까 진급을 못하지. "



분명 그에게 들으라고 하는 노골적이고 적대감 가득한 소리들. 하지만 대놓고 할 용기도 배짱도 없기에 그저 수군거릴 뿐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저 귓가에서 지금 웅웅거리는 파리의 날갯짓 소리보다도  못한 소음에 불과했다. 한때는 저런 소리에 분노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아무런 감흥도 일지 않는다. 따갑게 꽂히는 시선들을 받으며 자리로 돌아가 앉으려는 그에게 선생이 말한다.



" 문빈. 지금 지각만 몇 번째인 줄 알아? "

" ... 죄송합니다. "


" 자꾸 이런 식으로 번번이 수업에 늦으면 학교 다닐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퇴학을 건의하도록 하겠다. 알겠어? "

" ... 알겠습니다. "


" 쯧쯧, 그리고 꼴이 이게 뭐지? 단정한 품행과 용모조차 갖추지 않다니, 주신의 어린 양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지 못했구나. 그러고도 네가 영광스런 송신고 학생이라 할 수 있겠어? "

" ... "


" 옛날 같았다면 너같은 천한 D급은 우리 학교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텐데. 과분한 곳에 들어왔으면 그에 걸맞는 노력을 하진 못할망정 학교의 품위에 먹칠이나 하고. 하긴, 그러니 네가 D급이겠지. "

" ... "



선생의 말에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명백한 비웃음과 조롱, 그리고 모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아주 작은 감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루해하는 기색만이 잠시 비췄다 사라질뿐.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선생이 시선을 거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자리로 가 앉아서는 가방을 대충 걸어두고 후드 집업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책상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 오늘은 주신께서 우리들에게 베푼 은혜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다. 자 ··· '



선생이 하는 말이 머나먼 꿈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어지며 희미해져간다. 그리고 암전.





C.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는 아주 오랜 옛날, 주신 主神 나타스 Natas가 지구에 내려와 인간들을 위하여 인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교리로 삼은 종교인 나타스교 Natas敎는 지구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신앙이었고, 지구인들이라면 필히 나타스교를 믿었다. 빈이 다니는 학교 또한 나타스교를 믿는 학교였고, 그랬기에 매일 아침 1교시마다 주신의 가르침에 대해 배우곤 했다. 그래, 그건 괜찮았다. 상관없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건, 교회에서 떠들어대는 말에 따르면 분명 주신은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그랬기에 인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주었던 것이라며.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인간들에게 '계급'을 매긴 것은 대체 무슨 연유에서일까? 일반 시민들은 얼마나 교회에 자주 출석해 기도를 드리는지, 얼마나 헌금을 많이 내는지에 따라 A급부터 D급으로 나뉘어 있고 노력 여부에 따라 진급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위에는 사제, 주교, 추기경이 있었고 그들의 가장 위에는 신의 사자 使者라 불리는 '교황'이 있었다. 일반 시민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자리에 있는 이들. 그들이 바로 교회 사람들이었다. 



그래, 누가 봐도 이 세상은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명백히 눈에 보이는 사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매우 극소수였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그도 포함되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그의 부모님이었으니.



- 빈아, 잘 들어.

- 사람들이 믿는 주신 主神은, 사실 신이 아니야.

- 외계인이지.

- 그리고 그를 따르는 교회 사람들 역시, 모두 인간의 몸을 숙주로 한 외계인이고.


- 그들이 왜 그런 신기한 초능력들을 쓸 수 있겠어? 주신의 은혜를 받아서 얻게 된 성력 聖力일까?

- 아니야.

- 그건 다 그들이 외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야. 애초에 그들이 타고난 능력이지.



그의 어미가, 그의 아비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이 하는 말은 대역죄에 속했고, 교회 사람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즉결 처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들이 너무나도 확신에 찬 눈을 하고 말해왔기에 어린 빈은 처형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들의 말을 믿었다. 빈의 부모님은 빈에게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분들이셨기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을 하는 빈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A급 진급을 앞두고 있는 B급이었다. 일명 모범 시민. 그랬기에 빈, 그리고 그의 여동생 역시 부모님의 계급을 따라 B급 신도였다. 탄탄대로가 보장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은 신도들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 가장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D급이다. 어쩌다 밑바닥으로 떨어진 것일까. 그건 아마도, 4년 전의 '그' 사건 때문일 테지.



- 문지원, 유하연, 문지유.

- 이상 3인을 이단으로 간주, 대역죄를 물어 즉결 심판에 처한다.

-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문빈은 죄는 없으나 연좌제를 적용해, D급으로 강등한다.



그래. 그 때부터였다.

문빈이 제발 죽게 해달라고 매일같이 신에게 빌기 시작한 것이.





D.



더럽게 잘생겼네.



문빈이 전학생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래, '잘 생겼다'는 말 이외에는 형용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진 녀석이다. 그리고 A급. 신앙심 깊은 집안에서 자란 부잣집 도련님인가보다. 자신과는 아주 다른 세계에 사는, 고생이라고는 전혀 해보지 않았을 샌님같은 녀석. 딱 거기까지였다. 빈에게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는 못했다. 어디에 앉을 것이냐고 묻는 선생의 말에 전학생이 고민하는 듯하다. 어차피 교실에 빈 자리는 많고, A급 학생이 학교에 드문 편이기에 급우들도 아마 전학생과 친해지려고 다들 자기 옆자리에 앉길 바랄터다. 뭐 고민할 게 있나. 그냥 아무데나 골라앉아도 될 것을. 살짝 짜증니 난 채로 전학생의 얼굴을 힐긋 보고서 빈은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잠을 청했다. 아니, 청하려 했다는게 더 맞는 말일터다. 막 잠에 들려는 찰나 빈의 귀를 잡아끈 선생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 정말 괜찮겠니? 저 자리에 앉아도? "

" 네. 전 괜찮습니다, 선생님. "


" 그래, 네 뜻이 정 그렇다면야... 가서 앉거라. "

" 감사합니다. "



얼씨구. 대단한 예의범절 납셨네. 살짝 비웃어주고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전학생의 발걸음 소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쪽에는 빈 자리가 없을텐데. 있기는 있지만 그 자리는 빈의 옆자리뿐이다. 모두가 절대 기피하는 바로 그 자리. 설마 자신은 아니겠지. 점점 가까워오는 발자국 소리에도 빈은 감은 눈을 뜨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신은 언제나 빈의 편이 아니었다. 가까워지던 발소리는 빈의 옆자리에서 멈추었고, 이내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빈의 옆에 누군가 앉는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선생의 목소리와 수군거리는 급우들의 목소리.



" 문빈, 이번 한 달 동안 은우랑 같이 다니면서 학교랑 동네 지리 가르쳐 주고 적응 도와주도록 해. 은우가 해외에 오래 살다 와서 우리나라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니까. 알겠어? "

" ... "


" 쯧. 그리고 은우는 불편하면 말하도록 해. 도와줄 다른 사람 구해줄 테니. "

" 네. 그렇게 할게요. "



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혀를 찬 선생이 빈의 옆자리에 앉은 녀석에게 말한다. 아마 이름이 은우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제가 그런 귀찮은 짓을 해야하는 것인지. 이제 고위급 녀석들하고 얽히는 일에는 신물이 난단 말이다. 정말 신은 빈을 싫어하는 것일까. 살짝 밀려드는 짜증에 입술을 잘근 깨무는데,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든 빈이었고, 때마침 제 쪽을 보고 있던 전학생과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 이제야 나 봐주네. "

" ... "


" 반가워. 난 은우라고 해. 차은우. 너는? "

" ... "


" 수줍음이 많은 친구인가보다. 빈이는. 아니면 내가 A급이라 불편해? 그런 거 아니지? "

" ... "


" 아무튼 잘 부탁해, 빈아. "

" ... "



절 언제부터 봤다고 벌써 성 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오는 것인지. 웃기는 녀석이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 다시 무시하려는데 녀석이 웃는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실실 웃어대지. 멀쩡하게 생겨서 어디가 모자란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부류의 녀석이다.



딱 한 달만 도와주고, 그 이상은 얽히고 싶지 않다. 어차피 너도 특권의식에 찌든 A급일 뿐일테니까.





E.



이상하다. 차은우는, 정말로 이상한 인간이다.



A급이면서도 빈과 같은 D급 학생들 (전교생 통틀어 채 열 명도 되지 않는다.)에게도 다른 학생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친절을 베풀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정했고, 똑같이 친절했으며, 똑같이 도움을 주었다. 계급에 따라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송신고에서 D급은 조선시대로 치면 노비와도 같은 존재.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노비들에게조차 자비를 베푸는 '양반' 차은우는 학교에서 금방 유명해졌다. 선생들의 입방아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게다가 차은우는 공부도 무척 잘했다. 해외에서 학교에 다니는 동안에 단 한 학기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에다가 국가적 대회에 나가도 높은 상을 휩쓸어오기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불공평하게도 운동도 매우 잘했다. 체육 시간만 되면 차은우는 운동장을 날아다녔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전교생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응원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점심 시간에는 농구를 하는 차은우를 보러 나온 여학생들로 조회대와 벤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음악적 재능도 뛰어나 여러 악기를 두루 잘 다뤘고 노래 솜씨도 제법 훌륭했다. 그리고 신앙심도 깊어 매주 금요일마다 강당에서 전교생들을 모두 모아 하는 신앙 증명 시간에는 모두를 감동시키는 간증을 하곤 했다. 그야말로 신께서 모든 걸 주신 녀석. 그런 차은우를 학생들은 모두 '나타스 님의 은혜를 한 몸에 받은 축복받은 자'라고 부르며 그를 추앙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완벽해보이는 차은우에게도 한 가지 큰 오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문빈, 자신이었다.



차은우는 이상하리만치 빈을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선생이 도와주라고 해서, 도움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생이 말한 한 달이 지나고 나서도 차은우는 계속해서 빈을 따라다녔다. 매 쉬는 시간마다 매점에 같이 가자고 졸랐고, 학교가 끝난 후에 혼자 하교하는 빈에게 뛰어와서는 같이 가자며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워낙 똑똑한 녀석이니 가는 길을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고, 전학 온 바로 그날부터 슈퍼스타가 되어 수많은 친구를 사귀었으니 외로워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 빈아! "



차은우가 혼자 하교하고 있는 빈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뛰어온다. 하지만 오늘은 날이 날인지라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고 가야할 곳이 있었기에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니 빈보다 더 빨리 뛰어서는 옆으로 다가온 차은우였다. 방금 전까지 운동을 하고 왔는지 머리칼에는 땀방울이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하다. 얼굴에는 해사한 미소를 띤 채로. 대체 녀석은 뭐가 그리 행복해서, 뭐가 그리 기뻐서 이렇게 매일같이 웃고 다니는 걸까? 적어도 빈이 보아왔던 한, 차은우는 한 번도 웃는 표정 외의 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주 작은 짜증도, 화도 내지 않았다. 빈은 그런 차은우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짜증이 울컥 솟았다. 그래서 그에게 날카롭게 말을 뱉었다.



" 야. "

" 응? 왜 그래, 빈아? "


짜증나. 왜 자꾸 멋대로 친한 척 내 이름을 부르는 건데.


" 나 신 안 믿어. "

" 어? "



그제야 차은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래, 차라리 이 얼굴이 낫다. 웃는 얼굴은 자신 같은 인간이 볼 자격도 없고 그럴 수 없으니. 누군가가 지금 빈의 말을 듣고 교회에 신고하기라도 한다면 당장 신성모독으로 끌려가서 엄벌에 처해지거나 즉결 처형 당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마치 제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빈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미 통제를 벗어난 입은 멋대로 움직였다.



" 귀 먹었어? 나 신 같은 거 안 믿는다고. "

" 빈아. "


" 4년 전에, 난 신 같은 거 버렸어. 그딴 게 무슨 소용인데. "

" ... "


" 신이 정말로 있었으면, 신이 정말로 인간을 사랑한다면. 우리 가족을 그렇게 두지 말았어야지. "

" ... "


" 그리고 난 하찮은 D급일 뿐이야. 밑바닥 돌멩이라고. 너같이 존귀한 A급이랑은 감히 어울릴 수도 말 섞을 수도 없는 천한 존재. "

" ... "


' 문빈, 너. '

' 은우가 너랑 같이 다닌다고 해서 너가 뭐라도 되는 것마냥 우쭐해하지 마. '

' 하찮고 천한 돌멩이 주제에. '



내가 어떻게 몰라. 내 주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데.



" 혹시 좋은 사람 코스프레 하려는 일에 날 이용한 거면 성공했네. 너도 알잖아. 너가 우리 학교에서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

" ... "


" 이 정도면 됐어. 더 이상 나같은 돌멩이랑 엮여서 뒷소리 듣지 말고 적당히 해. 너, 짜증나니까. "

" ... 무슨 뒷소리. "


" 하, 그런게 궁금해? 너 게이 아니냬. 나 좋아하는 거 아니냬. 말도 안되는 개소리인거 아는데, 그런 소리 듣기 싫으면 이 정도에서 그만둬. 나 아는 척 하지 말고, 무시하라고. 다른 애들이 그러는 것처럼. "

" ... "


" 똑똑하니까 이 정도만 말해도 알아듣겠지. 신성모독으로 신고할 거면 하든지 맘대로 해. 간다. "



거기까지만 말하고 돌아서서 교문을 빠져나갔다. 차은우는 더 이상 뒤따라오지 않았다. 그래, 잘 한 것이다. 이제 더는 높은 계급의 인간들하고 엮이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걸음이 오늘따라 무거웠다. 오늘은 중요한 날인데. 자꾸만 무거워지려는 발걸음을 겨우 떼어 근처 꽃집으로 향하는 빈이었다.





F.



꽃집으로 향한 빈을 주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빈이 어린 시절부터 빈을 알고 지낸, 제 2의 어머니와도 같은 분이다. 그리고 빈이 4년 전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나마 잘 알고 있는 유일한 이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오늘 빈이 왜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는 듯 익숙하게 꽃다발을 빈의 품에 안겨주었다.



" 벌써 그 날도 4년이나 지났구나. "

" 그러게요. "


" 빈아. "

" 네? "


" 너 정말로 괜찮은 거니? "

" ... 네. "



괜찮지 않으면 어떡하겠는가. 그 아무도 문제의 원인을 해결해줄 수 없기에 그 날의 상처 또한 스스로 봉합하고 아물게 하는 수밖에 없으니. 그래봤자 매일 밤마다 꿈에 찾아드는 그 날의 기억은 너무나 생생했기에, 지금 괜찮다는 빈의 말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거짓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걸 그녀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저리 안쓰럽다는 듯이 보며 손을 잡아주는 것이겠지.



" 잘 다녀오렴. "

" ... "


" 세 사람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

" 네. 그럴게요. "



그녀가 안겨준 꽃다발을 안고 빈이 향한 곳은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거의 1시간을 가야만 나오는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추모공원 한 켠의 납골당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4년 전 '그 날' 때 억울하게 생을 달리한 이들의 유해가 머무는 것이 유일하게 허락된 곳이기도 했다. 죽어서조차 안식이 자유롭지 못한 그들, 그들은 바로 이단이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빈의 가족도 있었다. 빈이 익숙한 듯 납골당 안으로 들어서서 한 제단 위에 꽃다발을 올려놓는다.



" 엄마, 아빠, 저 왔어요. 지유야, 나 왔어. "


' 비겁한 녀석. 네가 네 부모님과 동생을 죽인 거야. '

' 네가 그 때 도망치지 않았다면 과연 세 사람이 죽었을까? '

' 겁쟁이. 살인자. '


" ... 닥쳐. "


' 죽는 게 그렇게 무서워? 그러니까 도망갔겠지? '

' 죽는 게 무서워서 도망친 주제에 다 끝나고 나서야 이제 와서 죽음을 원해? '

' 신이 널 죽게 내버려 둘 거 같아? '


' 넌 못 죽어. '

' 살아서 모든 죄를 다 갚아야 해. 신이 허락하지 않는 한, 넌 절대 죽을 수 없어.  '

' 살아. '

' 살라고. '


" 닥치라고 했잖아!!! "



빈의 귓가에 속삭이는 수많은 목소리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또다시 나타난 모양이다. 그들은 항상 나타날 때마다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그 말들은 모두 빈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모든 것에 무뎌져도 아직 무뎌질 수 없는 말들. 그리고 빈을 매번 죽고 싶도록 만드는, 외면하고픈 진실들. 귀를 틀어막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발악하듯 소리친다. 그제야 그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춘다. 주변엔 아무도 없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빈이 제단에 쓰러지듯 기대어 두 손을 깍지껴 맞잡고서 눈을 감는다. 아까 차은우에게 난 신따위 믿지 않는다고 하고 왔으면서도 오늘도 간절히 찾는 것은, 모순적이게도 신이었다.



신이여, 제발.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G.



납골당에 다녀오고 나서 다음날은 주말이었기에 학교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빈에게 남은 유일한 혈육인 큰이모와 이모부네 집은 두 분이 주말을 맞아 교회를 나가셨기에 고요하기만 하다. 그분들은 곧 B급으로의 진급을 앞두신 C급이다. 그들에게 (이미 죽었지만) 이단 가족을 둔 D급의 조카가 그리 좋게 보일리는 없다. 교회를 같이 가자고 처음에는 몇 번 설득하고 혼도 내셨지만 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결정적으로 빈을 놓게 된 것은 열일곱의 빈이 어느날 했던 말 때문이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우리 부모님과 지유가 그딴 외계인들한테 죽게 두는게 아니라 절 데려갔어야죠.



명백한 신성모독. 신실하지는 않을지언정 기본적인 지구인으로서의 개념이 있다면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언행이다. 같은 가족 사이에도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한다면 교회에 신고해서 잡아가는 세상에 빈의 이모 부부도 그렇지 않을거란 보장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자신은 4년 전 그 날,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했던 목숨. 그 날 이후 항상 죽음만을 바라며 살았기에.



그러나 빈의 이모 부부는 빈을 신고하지 않았다. 그저 빈을 더욱 가엾게 여기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두었다. 아무리 이단이라지만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머리가 조금 이상해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한새벽에 자다 목이 타서 부엌에 가려다가 우연히 엿듣게 된 그들의 본심에, 빈은 그나마 남아있던 정마저 다 떨어져버렸다. 그나마 남은 가족조차 저를 미친놈 취급하는데, 제게 더는 무엇이 남아있으랴?



그리고 그때로부터도 2년이 흐른 지금. 빈은 또다시 죽음을 바라고 있다. 아니, 그 날 이후부터는 매일 그러했다. 다만 지금 더 강력하게 원할 뿐. 그러다 떠오른 건 차은우의 속을 알 수 없던 웃음기 사라진 얼굴이었다. 개같게도 그런 표정을 지어도 잘생겼더라. 그런 것만 떠오르는 머릿속에 제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곧 교회 사람들에게 끌려갈지도 모르는 마당에 팔자 좋기도 하지.



차은우는 분명 빈을 교회에 신고할 것이다. 지금까지 빈이 보아온 차은우의 모습을 근거로 든다면 아무리 머리가 나쁜 사람일지라도 어렵지 않게 도출해낼 수 있을 지극히 당연하고 합리적인 결론이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1교시 주신 관련 시간에도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단정한 자세로 앉아 선생님의 말씀을 경청하던 차은우, 매주 금요일 신앙 증명 시간마다 대표로 나서서 차분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사람들을 감동시키던 차은우 (신을 믿지 않는 빈도 가끔은 혹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거 아닐까.), 주신께서 원하시는 어린 양의 완벽한 완성품 그 자체라고 칭찬받는 모범생 차은우. 심지어 일반 시민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인 A급 신도이기까지. 



아마 차은우도 지금 교회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겠지. 그리고 집에 돌아가기 전 빈을 신고할 것이다. 아니, 이미 신고했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제 곧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겠지. 아니면 적어도 오늘 안에는. 그렇게 잡혀간다면 이제는 정말 죽을 수 있을까? 이 정도면  4년 동안 신을 많이 욕하고 다닌 거 같은데. 신이 믿음 없는 건방진 인간에게 화가 나서라도 이제는 절 죽이지 않을까. 그런 헛된 희망을 가져본다.



그러나 그 날도, 그 다음 날도 교회에서 사람이 오는 기척조차 없었다. 말도 안 돼. 그런 말을 했는데도 차은우가, '그' 차은우가 신고하지 않았다고? 어째서? 왜? 하찮은 D급 신도의 말 따위는 흘려버리면 되고 안중에도 없어서? 아니면, 서서히 말려죽이려고 당장 신고하지 않고 일단 두고본다 이건가? 



주말이 지나고 다시 학교에 나가 차은우의 하는 행동을 일주일 동안 지켜본 결과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맞는 것 같았다. 하찮은 돌멩이의 말 따위 무시해도 그만이었던 것이라면 더는 엮이지 않게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빈의 말 같은거 듣지 않고 엿먹으라는 듯이 친한 척 하고 말을 걸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차은우는 주인 말 잘 듣는 개라도 된 마냥 빈의 옆에 앉아서도 빈에게 전혀 말을 걸지 않았고, 필요할 때만 반장 (그새 반장 선거에서 뽑혔다.)으로서 가끔 챙길 뿐 그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고 웃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것들에게는 빈에게 해오던 마냥 바보같을 정도로 자주 웃음을 짓고 거리낌없이 대한다. 그래. 원래 이게 맞는 것이다. 자신이 받아야 할 당연한 대우고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받아오던 대우랑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운 거지?



점심 시간이어도 밥 먹을 생각이 없는지 다른 급우들이 급식실로 가고 나서도 자리를 뜨지 않는 차은우 때문에 항상 혼자 남아있던 교실에 오늘은 둘이 남아있게 되었다. 원래 점심을 늦게 먹으러 가는 습관 탓에 졸다가 일어나보니 옆에 앉아있는 차은우는 이어폰을 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읽을 수 없는 언어로 되어있는 것을 보아하니 외국 원서 같았다. 재미라곤 없어보이는 책을 읽고 있는 차은우의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늦봄의 바람에 작게 흔들린다. 그 모습이 꼭 그림의 한 장면같이 현실감 없게 느껴졌다. 빈의 신성모독 발언에도 신고하지 않은 차은우. 아는 척 하지 말라는 말을 잘 들으면서도 항상 단정하고 바른 차은우. 모두가 무시하고 기피하는 빈을 옆자리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차은우.



" 야, 차은우. "

" 어? "



무슨 생각에서였을까? 자리에서 일어나 차은우의 이어폰을 빼고서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빈이 그럴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하게 빈을 올려다본다. 짜증났다. 넌 항상 매사 이렇지. 한결같이 단정하고, 한결같이 바르고 차분해. 그래서. 빈이 그런 차은우의 손목을 잡아채서 교실 밖으로 끌고 나가 어디론가 향했다. 분명 세게 잡고 있기는 했지만 뿌리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못할 힘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은우는 그저 반항 없이 빈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다들 점심을 먹으러 간 상태라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빈이 멈춰서서 차은우의 손목을 놓은 것은 학교 뒤편에 있는 인적이 드문 느티나무 아래였다. 분명 누구나 당황스러울 법한 상황이건만 차은우는 담담한 표정이다. 그런 차은우의 반응에, 결국 빈이 먼저 입을 뗀다.



" 차은우. "

" ... "


" 넌 내가 우스워? 내가 멍청해보여? "

" 그게 무슨 말이야, 빈아. "



그제야 차은우가 저를 바라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던 차은우가, 지금은 빈과 또렷하게 눈을 맞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어온다. 누구라도 홀릴 법한 반짝이고 깊은 빛을 띤 흑갈색 눈에 빈을 정확히 담고 있는 차은우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고 싶다.



" 왜 날 신고하지 않았어? "

" 빈아. "


" 너 같이 독실한 A급 신도라면, 당연히 신고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감히 하찮은 돌멩이 따위가 지고하신 '주신'을 모독했는데? "

" ... "


" 내 말이 말 같지 않아서 귀담아 들을 가치도 없었던 거야? 아니면, 천천히 나 말려죽일 생각으로 갖고 노는 거야? "

" 그런 거 아니야, 빈아. "


" 그런게 아니면 뭔데? 그리고 내 이름 친한 척 부르지 마. 너, 진짜 짜증난다고. 네가 뭐라고 그런, "



빈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차은우가 빈의 어깨를 꽉 잡고서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지척의 거리. 시선은 흔들림 없이 올곧게 빈을 향한 채였다. 당황한 빈이 벗어나려 했지만 어디서 나온 힘인지 놓아주지 않고 더욱 꼭 잡은 채 차은우가 말을 잇는다.



" 너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너 갖고 놀려는 것도 아니야. "

" ... "


"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하지만 난 다른 사람들처럼 널 무시하고 싶지 않아. 그것만은 확실해. "

" ... "


거짓말이다.


" 그리고 나, 교회 안 다녀. "

" ...? "


" 부모님 잘 만나서 A급일 뿐이지, 난 교회 나가는 거에 관심 없거든. "

" ... ???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그러니까 내 말은, "

" ... "

" 나도 신 같은 거 안 믿는다는 거야. 너처럼. "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A급이나 되면서 신을 믿지 않는다고? 어째서? 하지만 어느 한켠에서 문득 들어오는 감정은, 끔찍하게도 동질감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이단'이라는 데에서 오는 동질감. 그리고 다음 순간 차은우의 입술이 빈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었고 차은우의 표정이 아무렇지 않았기에 꿈이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들려오는 차은우의 말에 지금 모든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었다.



" 이 정도면 나, 너 빈이라고 불러도 되지? "

" ... "


" 긍정으로 받아들일게. 그러니까 빈아, 너도 나 은우라고 불러주면 안돼? "

" ... 나중에. "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하기 그지없는 대답. 그럼에도 차은우는 뭐가 좋은 것인지 해사한 미소를 짓는다. 오랜만에 보는, 자신을 향한 차은우의 미소는 마치 빛마냥 눈부셨다. 그래서 더욱 비참하고 끔찍했다. 잠시지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아, 이래서 난... 네가 정말 싫어.





H.



차은우.

응.


너 교회 안 나간다고 그랬지?

맞아.


그러면 부모님한테 안 혼나? 너희 부모님도 A급이실거 아냐.

안 혼나. 그 분들은 나한테 관심 없으시거든.


왜?

왜라니?


너 같은 자식이 있는데 관심 없을 수가 있다고?

나 같은 자식이 뭔데?


말 안 해도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뭐야?

진짜 몰라서 그러는 건데?


너 같이 잘난 자식 두고 관심 없는 부모가 있을 수 있냐고. 꼭 내가 말해야만 돼?

응. 네가 말하는 걸로 듣고 싶었으니까.


다른 애들한테도 맨날 듣는 소리면서 새삼스럽네.

그런가. 난 잘 모르겠어. 아무 생각도 안 들어서.


너 진짜 재미없는 거 알아? 얼굴 빼곤 다 재미없어.

얼굴이라도 재밌으니 된 거 아냐? 인간들은 잘생기고 예쁜거에 약하니까.


넌 참...

응?


아니다. 집이나 가자.

그래.





I.



그 날 이후로 차은우는 예전처럼 빈을 따라다녔다. 그리고 빈은 그런 차은우를 내치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잠시 소원해진 듯 싶다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두 사람에 다시금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것은 전부 빈을 향한 것이었다. 천한 돌멩이 따위가 감히 주신의 신실한 어린 양을 꾀어내어 타락시키려 한다는, 대응하고 싶지 않은 헛소문. 



그리고 노골적인 괴롭힘도 심해졌다. 차은우가 자리를 비울 때를 틈타 빈을 불러내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과 욕설을 일삼았고, 차은우의 눈에 띄지 않을 곳들만 골라 때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빈이 차은우와 같이 있거나 어떻게 안 것인지 괴롭힘의 현장에 차은우가 나타날 때에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 다정한 말을 하며 빈을 챙겼다. 역겹고 가증스럽다. 징그러워 토해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참았다. 욕 먹는 것은 빈 자신 하나로 족하니까. 고결하고 아름다운 차은우는, 저처럼 어둠에 찌들지 말아야 하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빈은 학교 뒷산에 있는 느티나무에 오르곤 했다. 높은 나무에 올라가 앉아 시내를 내려다보며 바람을 맞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차은우도 불렀다. 그곳에 누군가를 부른 것은 차은우가 처음이었다. 오직 빈만이 알고 빈만이 오르던 비밀 장소에 처음으로 초대된 타인. 그래도 풍경을 바라보다 웃는 차은우가 아름다워서. 그래서 괜찮았다.



그 날도 역시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 잠시 느티나무에 올라가 해 지는 풍경을 차은우와 같이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노을빛을 받아 차은우의 까만 머리카락이 불타오르는 듯 주홍빛으로 반짝이며 살랑이는 게 퍽 아름다웠다. 그 때였다. 차은우가 고개를 돌려서 빈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물은 것은.



" 빈아. "

" 왜. "


" 신을 믿지 않는 거 알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신이 있다면. 넌 무슨 소원을 빌고 싶어? "

" 갑자기? "


" 응. 이런건 원래 갑자기 묻는 거잖아. "

" 난 그런거 없는데. "


" 에이 뭐야, 재미없네. "

" 그러는 너는? "


" 사실은 나도 없어. 넌 혹시 있을까 해서 물어본 거였는데 아쉽다. "

" 그게 뭐야... "



그러더니만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너는, 차은우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J.



중간고사가 끝나고 5월도 끝물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차은우가 송신고로 전학을 온 지도 두 달이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6월 모의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주말, 같이 모의고사 준비를 하자며 먼저 연락을 해온 차은우에 무엇을 입고 가야할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빈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무리들이 괴롭힌 탓에 아직 낫지 않은 상처와 멍들이 남아있어 반팔을 입기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차은우에게만 들키지 않으면 될 거란 생각에 빈은 반팔 위에 얇은 가디건 하나를 걸치고서 가방을 챙긴 채 집을 나섰다. 



이제 곧 있으면 일요 기도가 끝나는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 사람들이 꽤 많은 듯해 보였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늦잠을 자는 바람에 촉박하게 출발해 시간이 많이 않았다. 그랬기에 원래 다니던 길을 두고 빈은 더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자 큰 길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이 많아지는 듯 싶더니 대로변 가득히 사람들로 막혀 있었다. 무슨 일인걸까. 혹시 시위라도 있는 것인가 싶다. 이런 소식은 들은 적이 없는데. 피해서 가는 게 상책이다. 괜히 얽혀봤자 좋을 게 없다. 그렇게 돌아서 피해가려는 빈의 귀를 잡아끄는 시위대의 외침은.



" 4년 전 대청소 때 억울하게 죽임당한 이들을 이단 명부에서 삭제하라, 삭제하라! "

" 주신의 뜻에 반 反하는 살생을 한 교회 인사와 교황은 퇴위해라, 퇴위해라! "

" 엘 마타도르 El Matador에 대한 수배령을 폐지해라, 폐지해라! "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들. 빈이 결코 모르지 않고, 몰라서도 안 되는 이름들. 하지만 이제는 잊고 싶은 이름들. 눈을 꾹 감았다 뜬 빈이 모르는 척 걸음을 떼려고 하던 그때였다. 허공에서 들려오는 낯설지 않은 목소리들. 마치 어제 들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있는 목소리들.



" 하찮은 인간들이 위대하신 나타스 님의 은혜를 모르고 감히 나타스 님의 사도이자 신의 대리인인 우리 교황님을 들먹여? 건방지기 짝이 없네. "

" 언니, 그러니까 4년 전에 다 죽여버리자고 그랬잖아요. 인간들은 우매하고 멍청해서 기회란 걸 줘봤자 분수도 모르고 설치면서 기어오르기만 한다니까? 마타도르 놈들처럼. 언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

" 맞습니다, 선배. 기회가 기회인 줄 모르고 이렇게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 따위에게 너무 자비로우십니다. "

" 어떻게 할까요? 당장 처단해버릴까요? "


" 잠시만, 다들 조용히 있어. 말할 게 있으니까. "



그 자리에 멈춰선 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언제 나타난 것인지 허공에 떠 있는,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는 다섯 명의 젊은 남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들의 얼굴도, 이름도. 그들은 이 시 市의 사제들이었다. 그리고, 4년 전 대청소 사건 때 큰 공을 세운 당시 추기경- 지금의 교황이다 -의 충실한 개들이기도 했다. 몸이 옅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벗어나야 하는데.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데. 생각해보니 이 곳은 분명히.



" 여기까지만 하고 물러나십시오. 지금 당신들은 나타스 님과 그의 사도인 교황님을 동시에 모독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분노가 두려운 게 아니라면, 당장 해산하십시오. "


" 아, 케르 언니 또 착하게 군다. 그렇게 말하면 인간 놈들은 못 알아듣는대도 그러네? "

" 시끄러워, 에리스. 조용히 해. 이건 부탁이 아닌 경고입니다. 제 말을 듣지 않아 생기는 다음 결과는 저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


" 선배. 인간들 따위에게 공손한 존대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그냥 쓸어버리는 게, "

" 조용히 하라는 말 못 들었나, 모로스? "



사제들 중에서도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단아하지만 냉기가 어려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아름다운 여인이 허공에서 가볍게 내려와 시위대에게로 다가가 차분한 어조로 말한다. 분명 공손하고 예의바른 어조이지만 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서려있는 살기와 분노를.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걸. 그럼에도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한 것일까? 그들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결국은, 일이 터지고 말았다. 



" 으아악! 저, 저게 뭐야! "

" 꺄아아악-!! "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대로변. 사람들 사이를 정확하게 가로지르며 아스팔트를 갈라놓은 날카로운 칼날들. 그것은 방금까지 차분하게 말하던 여인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아니, 이제 그녀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은 반 이상이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흰자위가 있던 자리는 검은 자가 대체한 채 눈동자는 붉은 빛을 띠고 있었으며 그녀의 풀어헤쳐진 긴 머리카락은 마치 누가 잡아당기는 것마냥 허공에 뜬 채 서슬퍼런 푸른빛을 뿜으며 방금 벤 자의 피를 잔뜩 묻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사제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등 뒤에 수십 개의 촉수가 돋아난 자도 있었고, 푸른 불꽃에 휩싸인 자도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 그들은,



" 외계인... "



그들은 허공을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도착한 교황의 친위대에 잡혀가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햇빛 벌건 대낮에 펼쳐지는 잔혹한 풍경. 하지만 빈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마치 4년 전 그 때처럼. 자신의 눈 앞에서 처형당하는 제 부모님을, 동생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 날처럼. 다리가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빈을 발견한 한 친위대원이 그를 잡아채더니 D급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자리에서 때리기 시작했다. 입 안이 터져서 비릿한 피맛이 감돌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스팔트가 유난히 차게 느껴진다. 그래, 생각해보면 이 곳은,



4년 전 빈의 가족이 죽임당했던 처형장이 있던 자리였다.



가족을 버리고 생존을 택한 비겁자의 최후로는 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것을 비웃음으로 오해한 것인지 그들은 더욱 분노하며 거세게 폭력을 가해온다. 그래, 이렇게라도 죽을 수 있다면 그것도 축복이겠지. 눈을 감았다. 눈 앞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지난 4년 동안의 자신의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이.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감은 눈 앞이 밝아졌다. 그리고 더 이상의 폭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가 빈의 팔을 잡아 일으켜 품에 기대게 하는 온기뿐이었다. 누구지. 그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빈의 의문에 답하기라도 하듯이 들려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 이게 무슨 짓이예요? 이 아이는 제 친구입니다.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라 말씀하신 나타스 님과 교황님의 영광스런 친위대께서 죄 없는 시민이자 제 친구에게 이유없는 폭력을 가하시다뇨. 이것은 이 아이를 친구로 삼은 A급 신도인 저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

" 물러가주세요. 당장. "



그들이 물러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제야 눈을 떴다. 눈을 뜨니 보여오는 것은, 빈을 품에 기대 안기게 한 채 자못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내려다보고 있는 차은우였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오지 않는 빈 때문에 찾으러 나왔던 걸까. 고맙기도 했지만, 원망스러움이 앞섰다. 여전히 공포에 질려 몸을 떨고 있으면서도, 입은 마음에도 없는 못된 말만을 내뱉어낸다.



" 왜 도와준 거야? "

" ... 어? "


" 그냥 죽게 두지. 날 왜 살린거야. 왜 구해준 건데? "

" 빈아. "


" 죽었어야 했는데. 이렇게라도 죽어야, 먼저 간 우리 부모님이랑 지유한테 진 죄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데. "

" 문빈. "


" 차은우. 너 그때, 정말 신이 있다면 빌고 싶은 내 소원이 뭐냐고 물었었지? "

" ... 응. "


" 내 소원은, "



우리 가족을 죽게 만든 악마같은 교회 놈들이 모두 죽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죽는 것.



" ... 가자. 공부 하기에는 그른 거 같고, 상처 치료도 해야하니까. "

" 차은우. "


" 응, 빈아. "

" 내가 얘기 하나 해줄까? 재미 더럽게 없겠지만. "


" 그래. 일단 자리 옮겨서 얘기하자. "



한결같이 다정하기 그지없는 사람. 그래서 더더욱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그런 차은우가 빈을 부축해 데려간 곳은 근처에 있던 커다란 호텔이었다. 잠깐 머무는 것 뿐이건만 이렇게 비싼 돈을 들일 필요가 있는 것인지. 하지만 기왕 받는 친절이고 다시 누리기 어려운 호사라면 받아들이기로 했다. 방을 잡고 들어와선 빌려온 구급상자에서 약을 꺼내 얼굴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꼼꼼히 발라주는 손길이 퍽 간지럽다.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차은우의 시선이 느껴져 눈을 감았다. 차은우는 왜 항상 제 눈을 바라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이상한 걸, 그는 알까. 어지러워지는 머릿속을 다잡는 빈이었다.



" 너, 4년 전 대청소 사건에 대해 알지? "

" 응. 들어는 봤어. 외국에 있어서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소식이 전해졌거든. "


" 그렇구나. 그러면, 엘 마타도르 El Matador가 뭔지도 알아? "

" 조금. 반 反 교회집단이자 교회 사람들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초능력을 가진 집단으로 유명하잖아. "


" 그 엘 마타도르가, 교회의 잔악한 실험 때문에 생겨난 이능력자들 모임이라면 믿을래? "

" ... 어? "


" 그리고 그 엘 마타도르에, 내가 있었다면, 그 때문에 내 가족을 죽게 만들었다면.  "

" ... "


" 너는, 믿을래? "





K.



빈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의 기억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빈이 본 것은 높은 천장,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자신을 가두어 둔 차가운 철창뿐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빈의 주변에는 자신처럼 흰 옷을 입은 제 또래의 아이들이 꽤 여럿 있었다. 그런 빈과 아이들을 관리하는 사람은 인자해보이는 따뜻한 웃음을 지닌 젊은 남자였고 아이들과 빈은 그를 무척이나 따랐다.



하지만 그 때의 따뜻함은 잠시였다. 빈을 비롯한 아이들은 다섯 살이 되자 어디론가 끌려갔고, 모두 독방에 가두어졌고 24시간 감시를 당했다. 그리고 매일같이 연구원들로 보이는 이들이 다가와 주사를 놓았으며, 주사를 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아이들이 있는 방은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가득 들려오곤 했다. 그것은 빈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온 몸이 찢어질 것만 같은, 어린아이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기도 했고 때때로 고통을 이기지 못해 혼절하는 일도 생기곤 했다.



2년여간의 길고 잔인한 실험 동안 빈 또래의 아이들 수십 명이 빈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것을 보고 정신이 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용했다. 그리고 일곱 살이 되던 해, 빈은 드디어 그 곳에서 벗어났다. 물론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강제였다. 교회에서 비밀리에 벌어지는 잔악한 실험을 알아챈 이들이 빈이 있던 연구실을 급습해 테러를 벌이고 아직 생존해 있던 아이들을 모두 구출해낸 때문이었다. 그 날, 빈은 그제야 대낮의 태양빛이 얼마나 밝은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낸 '완성품'들을 찾기 위함이었고 그 중에는 빈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교회의 눈을 피해 도망다니며 길거리를 떠돌던 빈을 거두어주고 돌보아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빈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연고도 없는 낯선 어린아이를 가엾게 여기고 아들로 입적시켜주었으며, 지금의 이름을 주었고, 빈의 상처를 알고서 사랑으로 보듬어주었다. 피는 전혀 섞이지 않았지만 빈은 그들을 진짜 가족으로 여겼고,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빈이 열두 살이 되던 해였다. 연구소에서 만났지만 죽은 줄로 알고 있었던 친구를 오랜만에 마주하게 된 빈은 반가움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빈의 질문에 친구는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빈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는 자신이 사실 엘 마타도르 El Matador 라는 집단의 일원이며, 빈과 자신과 같이 교회의 실험으로 인해 이능력을 가지게 된 이들이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빈 역시 들어오는 것이 어떻겠냐며 권유를 해왔다.



하지만 빈은 망설였다. 이미 자신은 소중한 가족이 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런 데에 나선다면 잘못하여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다. 그런 빈의 심정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것일까, 어차피 가명으로만 활동할 것이며 빈의 능력은 전방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것이라 얼굴이 노출될 일도 신분이 알려질 일도 없고 설령 움직일 일이 생기더라도 매사 가면을 쓰고 다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빈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르는 어린 아이들을 교회로부터 구해내고 차별받는 C, D급 시민들을 도와주자고 빈을 설득했다. 빈은 아직 어렸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끔찍한 일을 겪는 이가 없기를 바랐기에 결국 친구의 부탁을 승낙했다.



그것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올 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빈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교회에 잠입해 있던 조직원 중의 한 명이 돌아오는 4월 말, 주신절 主神節에 교회에서 '대청소'라는 것을 자행할 것이라는 소식을 몰래 전해왔다. 지구에서 가장 성대한 축제가 열리는 주신절에 갑자기 대청소를 한다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회 놈들의 의중은 늘 알 수가 없으니. 그래서 뭔가 불안한 마음에 이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나서기로 했고, 계획을 짰다. 그리고 빈은 늘 모든 계획에서 그랬듯 조직원들만이 아는 비밀스런 장소에 숨은 채 상황을 지켜보며 인이어를 찬 채 그들을 돕기로 되어 있었다. 부모님께는 친구들을 만나 공부를 하기로 했다며 거짓말을 어쩔수 없이 하고서 말이다.



시간은 금방 흘러 축제날 당일이 되었다. 축제는 성대하게 열렸고,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와 축제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행복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번 축제가 특히 주목할 만했던 점은 C, D급을 위한 개별 부스가 모인 거리를 통째로 C, D급만을 위해 내주었다는 것이다. 그 거리는 무려 현 서울시 추기경이 낸 아이디어라 했고, 평소 교회에 반감이 없잖아 있던 C, D급들도 그 날만큼은 추기경을 칭송했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평화로운 듯 보였다. 빈의 가족도 축제에 참여해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랬기에 현장에 나가있던 조직원들도, 그 모습을 시내에서 멀지 않은 건물에서 지켜보고 있던 빈도 안심했다.



그러나 항상 비극은 가장 안심하고 있는 순간에 찾아온다고 하던가.


탕-!!!



평화롭던 거리를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는, 총성이었다. 인이어 너머로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소리. 그리고 작은 화면 너머로 보여오는 붉은 피와 쓰러지는 사람들. 그 앞에 보이는 것은 총을 들고 있는, 틀림없는 '추기경'의 친위대. 그들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쏜 것이었다. 한 번은 실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고 방아쇠를 계속 당겼다. 귀를 찢을 듯한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달아나려는 시민들을 어느새 바리케이트를 쳐서 막고서 안으로 밀쳐버리고 그런 그들을 망설임 없이 쏘는 군인들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그때 누군가가 허공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사제복을 입은 아직 애티를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해 보이는 젊은 남녀 네 명이었다. 첩보에 따르면 이번에 새로이 세례를 받은 사제들이라고 하는데, 실력이 뛰어나 추기경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잠시 서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 싶더니 이내 말릴 생각 없는지 아래의 참상을 그저 재밌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언뜻 들리는 말은,



- 추기경님도 참 악취미셔. 이렇게 개미새끼들 한 구역에 몰아넣고 한 번에 처리하신다니.

- 그야말로 대청소 그 자체 아니겠어? 이 얼마나 재밌어.



말도 안 된다. 자신의 신을 숭배하고 추앙하는 날에 사람들을 죽인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가족은 B급이기에 저 구역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손톱을 까득까득 물어뜯으며 인이어 너머의 소리에 잔뜩 집중하고 있던 빈이 그대로 멈칫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또다른 사제가 가운데 있던, 그들의 우두머리 사제로 보이는 여인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것을 들은 여인이 돌연 재밌다는 듯이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 여기에 지금 쥐새끼들이 숨어있다고 한다.

- 주신의 은혜를 받아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지만 신을 배반한 대역죄인이자 이단들, '엘 마타도르'가 말야.

- 그리고 그 녀석들을 숨겨준 불경죄를 저지른 또다른 이단들도.

- 당장 모두 끌고 와라. 내가 직접 즉결 처형할 테니.



!!!!



어떻게, 어떻게 그걸 알았단 말인가. 내부에 밀고자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매우 좋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자신의 가족들은 자신이 '엘 마타도르'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걸 알고 있음에도 자신을 숨기고 오히려 자신을 지지해주었다는 것. 그렇다는 건, 제 가족도 안전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인이어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끊어지자 이성적인 사고 역시 마비된 빈은 숨어있던 장소에서 벗어나 무작정 뛰었다. 지옥의 한복판으로.



망설임 없이 뛰어간 곳은 이미 처참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디 하나가 잘리거나 찢어진 채 피를 흘리며 고통에 신음하면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 이미 숨이 끊어진 사람들, 그리고 한가운데에서 직접 사람들을 처단하고 있는 검은 사제복의 사람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하고 징그러운 모습. 그제야 부모님의 말이 떠올랐다. 사제들은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은 '외계인'일 뿐이라는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에, 끔찍한 현실에 대한 자각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빈은 구역질이 나려는 것조차 잊고 벌떡 일어났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사제 여인, 아니 '외계인'이 광장에 있던 단상 위로 올라가더니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의 세 사람의 머리채를 잡아 바닥에 무릎꿇려 앉히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빈의 가족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여동생. 처형식이 있을 것이니 당장 모이라고 한 것인지 광장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인 듯 싶자 그제야 사제가 입을 연다.



- 지금부터 이단에 대한 즉결 심판을 시작하겠다.

- 한낱 사제가 처형에 대한 권한이 어찌 있느냐고 묻는다면,

- 이것은 모두 추기경님께서 허락하신 것임을 미리 말해두겠다.

- 이에 반발한다면 추기경님의 권위에 대한 의심과 도전으로 간주하고 계급 상관없이 무조건 처형할 것이니 조용히 따르도록.


- 지금 여기 있는 문지원, 유하연, 문지유.

- 이들은 교황님과 주신 나타스님을 모욕하고 권위에 도전하는 대역 죄인 '엘 마타도르'의 조직원 중 한 명인 닉스 Nyx 를 그가 이단임을 알고도 교회로부터 숨도록 은신처를 마련해주고 이 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채 은닉해왔다. 그리고 그 죄는 매우 크다.

- 이상 3인을 이단으로 간주, 대역죄를 물어 즉결 심판에 처한다.

-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문빈은 죄는 없으나 연좌제를 적용해, D급으로 강등한다.


- 혹시 닉스가 이 자리에 있다면, 지금 순순히 나오도록 해라.

- 그렇다면 네가 처형당할지라도, 네게 은혜를 베푼 인간들의 목숨은 나타스 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코 살려주겠다 추기경님께서 자비를 베푸셨으니.

- 3분 주겠다.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다. 빈은 주먹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닉스 Nyx 는 자신의 예명이었다. 지금 자신이 나간다면 제 가족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이 일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가족 때문이었는데, 저로 인해 그들이 위험해졌다. 모두 제 탓이었다. 자신에게 더없이 큰 은혜를 베푼 그들에게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아야 했고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런데도, 자신은 왜 망설이고 있는걸까. 왜 자신있게 저를 처형하라 말하고, 당당히 나서지 못하는가.



아, 그랬다.



자신은 무서웠다. 죽음이 무서웠다. 고작 15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지척에서 고통에서 몸부림치고 살려달라 빌다 숨이 끊어지던 사람들의 절규와 비명소리가 생생히 기억났기에. 명예로운 죽음 따위, 아름다운 죽음 따위는 모두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오는 것일 뿐 현실은 참혹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려서.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자신은, 문빈은,


'죽고 싶지 않았'고, '죽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 결말은,


- 제 목숨은 아깝다 이건가. 역시 인간들이란 자기 목숨만 귀히 여기는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종족이군.

- 처형해라.


- 그리고 감히 교황님과 주신님의 권능에 도전하고 반역을 도모한, 엘 마타도르 녀석들도 모두 죽여라.

- 감히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교회의 위엄과 권위에 반하는 짓 따위 생각조차 할 수 없도록.



이토록 잔혹한 비극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빈은 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모두 앗아간 비극의 계절인 봄을.


그리고 빈은 그 때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어야 겠다고. 하지만 죽더라도, 추기경은 죽이고 죽겠다고.





L.



" 내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 되게 재미없지? "

" ... "


" 어때? 이런 얘기까지 들었는데도, 아직도 나랑 같이 있고 싶어? "

" ... "


" 교회에서 아직 살아있는 엘 마타도르 조직원들이 있다는 걸 알고 찾는단 얘기 들었어. 신고하고 싶으면 해도 상관없어. "

" ... "


" 벌써 4년 전 일인데 아직도 매일 꿈에서는 그 날 일만 나오더라. 그러다 마지막에는 온 몸이 피로 물든 가족들이랑 조직원들이 날 원망해. 난 그 원망을 받다가 꿈에서 깨고. "

" ... "


" 그런다고 동정하는 눈으로 날 보진 마. 동정받고 싶어서 한 말 아니니까. "

" 그러면 왜, 그런 얘기를 해준건데? "


" 너라면, 이런 얘기 해도 상관없을거 같아서. "

" ... "


" 내가 별 말을 다 하는 거 같네. 기왕 좋은 데 온 거 여기서 자고 갈까? "

" 빈아. "


" 응? "

" 너, 왜 울어. "


" 뭔 말 하는 거야. 내가 울기는 왜 울, "



그 순간 한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내렸다. 울지 않았는데. 제 가족이, 제 동료가 눈 앞에서 잔인하게 죽어갈 때도 울지 않았고 D급 돌멩이라고 온갖 쓰레기 취급을 당할 때도 울지 않았는데. 왜 고작 저런 샌님 같은 녀석 한 마디에 눈물이 나는 것인지. 웃기는 일이다. 제가 우는 것에 당황한 것인지, 차은우가 어정쩡하게 손을 들더니 손등으로 눈물을 비벼 닦아준다. 그러더니만 빈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꼬리를 접어 웃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너 지금 무슨, "

" 빈아. "


" ... "

" 이젠 나쁜 꿈 꾸지 않을거야. " 


" ... "

" 잘 자. "


" 이래서... 난 너가 싫어. "

" 응, 나도 알아.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신기하게도 빈은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그리고 차은우는, 빈을 교회에 신고하지 않았다.





M.



6월 모의고사도 끝나고 기말고사 준비로 분주한 여름, 처음으로 하복을 입고 등교한 날이었다. 예전보다는 덜해졌지만 아직 사라지지는 않은 수군거림과 따가운 시선들도 이제는 아무렇지 않아졌다. 익숙하게 가방을 사물함에 넣고서 얼마 전 차은우로부터 빌린 요점정리 노트 필사를 하고 있는데, 근처에 모여있던 여학생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야, 너 그 소문 들었어? "

" 무슨 소문? "


" 요새 밤마다 늦게까지 야자하다 집에 돌아가는 학생들이 실종되어서 돌아오지 않는데, 그 애들이 다 죽었을지 모른대. 그리고 그 애들은 전부 자기보다 낮은 계급 학생들을 못살게 굴고 괴롭히기로 유명한 애들이었다나... "

" 뭐야, 무서워... 잘못하면 우리도 큰일나는 거 아니야? "


" 그리고 이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라는데, 지금 우리 시의 사제들이 거의 씨가 말랐대. "

" 뭐? 왜? "


" 왜긴. 지금 교황님께서 인력이 필요하다며 교황청으로 부르셨다는데, 교황청으로 간 이후의 행적을 그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거야. 근데 죽었을 거라는 얘기가 많더라. "

" 말도 안 돼. 교황님께서 같은 신도이고 교회 사람을 죽이실 리가... "

" 그러니까. 이것도 소문이었으면 좋겠다... "



필사를 하려고 펜을 쥐고있던 빈의 손이 움찔하더니 힘이 들어갔다. 지금의 교황은 4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 시의 추기경이었다. 4년 전 사건을 계기로 교황까지 된 바로 그. 빈이 자신을 죽여달라 빌면서도 아직 죽음을 진실로 원하지는 못하게 만드는 바로 그 존재. 그 사람, 아니 그 '외계인'이 동족을 죽였다고? 말도 안 되는 얘기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다.



그 때 빈의 휴대폰이 작게 진동하며 울렸다. 문자가 온 것이었다.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낼 이가 있었다. 자신의 번호를 아는 이는 차은우 하나뿐인데 차은우는 지금 선생님이 호출한 탓에 교무실에 가 있으니 차은우는 아닐 터. 그럼 누구지. 의아한 마음에 휴대폰 화면을 켠 빈이 문자 내용을 확인하고는 입꼬리가 내려가며 표정이 굳어지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을 빠져나갔다. 다른 학생들은 그 사실조차 모른채 무관심했다. 빈이 나간 것을 알아챈 것은 때마침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차은우, 한 명뿐. 하지만 빈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급하게 뛰었다. 얼마 전, 흑발이 보고 싶다며 졸라대는 차은우의 설득에 어쩔 수 없이 검게 물들인 빈의 머리가 더운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한참을 뛰던 빈이 멈춘 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쓰지 않는 버려진 체육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훅 끼쳐드는 더운 공기와 함께 흩날리는 먼지에 큰 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 나니 마치 기다리고 있던 듯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얼굴은,



" 닉스 Nyx? "

" 에레보스 Erebos? "


" 무사히 잘 살아있었구나. 닉스. "

" ... 너야말로. 오랜만이야. "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빈과 함께 교회의 실험을 받고도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물이자 4년 전까지 엘 마타도르에서 동거동락했던 조직원이며 빈의 유일한 동갑내기 친구. 예명 에레보스. 4년 전 그 날, 처형당하는 조직원들 틈에서 유일하게 보이지 않길래 어디로 잘 도망갔나 싶기는 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예전 실력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휴대폰 번호를 용케 알아내서 제 예명을 언급하며 학교까지 찾아오다니. 엘 마타도르 최고의 해커다웠다. 하지만 반가운 재회도 잠시, 자신의 친구가 보낸 문자에 나온 내용을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 요새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 말할 게 있다고 했는데, 그게 뭐야? "

" 하급 신도들을 괴롭히는 상급 신도들, 특히 학생들이 많이 납치당하고 실종됐다는 그거 있잖아. 그게, 교회에서 한 거라는 얘기가 있어. "


" 뭐? 그게 무슨. "

" 그래서 지금 나도 이해가 안 돼. 아무리 추적하고 뒤져봐도 우리 쪽 사람같진 않은거야. 게다가 내가 이 시 市의 모든 CCTV를 확인해봤는데, 경찰 조사로 나온 실종 시간과 실종 장소 근처의 CCTV들만 갑자기 먹통이 되었다가 5분 정도 뒤에 정상으로 돌아왔더라. 마치 누가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근데 그런건 일반인의 능력으로 안 되는 거 알잖아. CCTV 관리는 경찰의 영역인데, 경찰청 서버 보안 철통이라 나도 깨는데 하루나 걸렸던 거 기억하지? "


" ... 그랬지. "

" 그래서 일반인이 아니라 잘 훈련받은 천재 해커일 거고, 그게 아니면... "


" 교회 사람. "

" 그래. 초능력을 쓸 수 있는 외계인들말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는 거지. 너도 알다시피 이능력을 가지고 있던 보통 인간들은 그 날 이후로 우리 둘만 남았고. 하지만 서로 알잖아. 우리 능력이 그런 쪽이 아닌 거. "


" ... 알고 있어. "

" 아무튼 내 말은, 혹시 교회 놈들이 고등학생들한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건지 모르니까 조심하라는 거야. 네가 고등학생으로 있는 거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


" 그래도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 "

" D급은 인간으로도 안 쳐주는 것들 틈에서 잘 지낼 거 같진 않은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친구는 있고? "


" 어... 있다고 해야하나. 아마도. "

" 진짜? 누군데? "


" 차은우라고 있어. 같은 반이고 옆자리. A급. "

" 뭐? A급 신도가 D급이랑 친구를 해준다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냐? "


" 모르겠어. 근데 걔 앞에서 내가 두 번이나 신성모독 발언을 했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인지까지 얘기를 했었어. 그런데도 신고하지 않더라고. 심지어 자기도 신 같은 거 안 믿는대. 웃기는 놈이지 않아? "

" ... 그래도 이상해. A급이나 되는 놈이 굳이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


" 너도 그렇지? 네가 그런데 나는 어떻겠어. 그래서 그냥 이해를 포기하고 받아들이려고. "

" 그래도 너무 믿지는 마. 너 생각보다 모질지 못해서, 그렇게 막 믿다가 당한게 얼만데. "


" ... 그런가. "

" 일단은 조심해. 너 들어가봐야 할 거 같으니까 난 이만 갈게. 새로운 소식 있으면 연락할테니까 그 때도 여기서 보자. "


" 그래. 잘 가고, 너야말로 조심해. "

" 누가 할 말을. "



돌아서서 학교 건물로 들어오니 때맞춰 1교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교실로 들어가니 빈이 들어와도 아무런 관심 없어보이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차은우는 뒷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빈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계속되는 진득한 시선에 빈이 영 불편했는지 뒷목을 긁적거리고는 시선을 돌려 피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하지. 뭐 하나 부족한 거 없고 부러울 거 없이 다 가진 놈이 굳이 나같은 하자 많은 돌멩이랑 왜. 게이도 아니면서 남 입술이랑 이마에 뽀뽀해대고 자각도 없는 이상한 놈이긴 하지만. 그런 빈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은우가 입을 뗀다.



" 빈아. 어디 갔다온 거야? "

" 그냥, 산책. "


" 산책 가는데 왜 이렇게 머리에 먼지가 많이 묻었어. "

" 요새 날 안 좋잖아. 허공에 떠다니던 먼지들인가보지. 신경 쓰지 마. "


" ... 그래. "



하여튼 눈치만 더럽게 빨라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거짓말을 잘 해서 넘겼기 망정이지. 그나저나 그렇게 말하면서 대체 제 머리는 왜 만지는 것인지. 자꾸 사람 심란하게 만드는 데에 뭐 있는 놈이다. 차은우의 행동을 신경쓰느라, 스스로의 거짓말에 만족하느라 빈은 차은우의 표정이 평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그게 실수였다.





N.



촤아악-!



" 커억...! "



무언가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고, 이내 초록빛의 액체가 바닥에 흥건하게 흩뿌려진다. 그리고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는 검은 사제복의 남자. 그리고 그 뒤에서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또다른 사제들.



" 다음. "


높낮이 하나 없지만 묘한 울림을 가진 아름다운 목소리. 어둠 속에 가려진 채 손가락만 까딱인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저 허공으로 손을 살짝 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자마자 아까의 사제와 같이 초록빛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쓰러져 죽어버린다. 그렇게 몇 번의 행동을 반복하고 나니 넓은 집무실이 금세 시신들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없어 보이는 붉은 빛의 눈동자.



" 치워. "

" 저, 교황님. "


" 말해. "

" 저,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것인지... 이들은 대청소 때 공을 세운 사제들 아닙니까. "



그의 뒤에 서서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가 모든 사태가 종료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는, 아직은 앳되어 보이는 사제. 세례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 티가 난다. 그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고개를 푹 떨군 채 벌벌 떠는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이 불경한 말을 했다 생각하고 앞에 쌓여있는 시체들처럼 저 역시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 듯 했다. 하지만 침묵도 잠시, 사제의 머리 위로 아름다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 이것은, 신의 뜻이다. "

" 예? "


" 신께서 원하시는 일이니까. 기꺼이 따라야지. "


이상하게 웃음기까지 머금고 있는 듯한 목소리. 단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는 분에게서 느껴지는 낯선 분위기에 사제가 불경죄로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은 채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것은, 너무나도 아름답게 웃고 있는 그였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리는 자, 지구를 통틀어 단 하나뿐인 자. 교황.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시건만 어째서 아무도 그의 아름다움을 칭송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까.


" 그 이유가 궁금하니? "

" 예? "


" 그 이유는, "

" 내 얼굴을 본 자들은, "



몇 분 뒤, 교황의 집무실로부터 호출이 들어왔다. 쌓여있는 쓰레기들을 처리한 이들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하도 많이 받아서 이제는 익숙해진 호출. 본의 아니게 교황청의 미화부가 되어가고 있는 주교들이 한숨을 내쉬고는 집무실 문을 두드린 뒤 안으로 들어간다. 바닥에 마치 물감마냥 퍼져있는 징그러워보이는 초록빛의 피들. 오늘은 그래도 평소보다 기분이 좋으셨나보다. 얼마 전에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는지 열 명도 넘는 주교들을 처형하시던데 오늘은 기껏해야 여섯뿐이다. 물론 거기에 아까 세례 받은지 얼마 안 된 어린 사제도 껴있었다는 게 조금 의외기는 했지만. 교황의 심기를 건드렸나보다.



" 교황님. 어째서 어린 사제까지 죽인 것인지요. 아직 세례 받은지 얼마 안 되었을 텐데. "

" ... 데키마 주교. "


" 예, 교황님. "

" 사제 관리 똑바로 해. 주교 따위가 감히 교황에게 허락도 없이 질문을 하게 만드나? "


" ... 조심하겠습니다. "



웃고는 있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고 살기마저 느껴지는 황금빛의 눈동자가 그들을 향한다. 선이 고운 손에서 떨어지는 초록빛의 피가 불쾌했던 것인지, 그는 주교들이 인사를 올리고 시체들을 치워 나가자마자 손을 성수에 담가 닦아내고선 자리에 앉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에 비추어 더욱 희게 빛난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은 누군가에 의해 다른 교회로 전해졌고, 그 소식은 교회 소속인들이라면 모두가 알데 되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교황이, 자신의 동족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죽인다.'고.





O.



실종되었다는 학생들이 하나 둘 발견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부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하지만 하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지독한 공포에 질린 채로, 실종 당일부터 발견 이전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다는 것. 그리고 더 이상의 진술과 사건 조사를 일체 거부하고 두문불출 한다는 것. 그건 마치,



" 세뇌당한 게 아닐까 싶어. "

" 세뇌? "


" 생각을 해봐. 협박 전화도 없었고 폭력의 흔적도 없었어. 돈을 노린 게 아니란 뜻이야. 심지어 무사히 돌아왔잖아. 그런데 실종 직전까지의 기억은 선명히 남아있는데, 실종된 그 순간부터 발견 직전까지의 기억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게 말이 돼? 마치, "

" 누가 일부러 기억을 지우기라도 한 것처럼. "


" 그래, 그거야. 그런데 기억을 지우고 세뇌시키는 능력은 알다시피 일반인은 절대 가질수 없어. 그리고 외계인 놈들 사이에서도 최소 추기경급 이상은 되어야 있을까 말까한 거고. "

" 그래서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 교회 놈들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틀림없어. 그놈들이 신도들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이상한데 심지어 대부분의 피해자가 '하위 계급 신도'를 괴롭히는 '상위 계급 신도'이고 게다가 학생이다? 이건 그쪽 놈들 중 누군가가 스파이로 학교에 잠입해있을지 모른단 증거야. 그놈들 변신술 하나는 끝내주니까. "

" ... "


" 그리고, 얼마 전에 또 교황이 주교들을 불러다가 죽였다더라. 교황청에 있던 사제가 직접 한 얘기가 새서 교회 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던데. 근데 교황이 최근들어 죽인 놈들이 다, 4년 전 그 날 때 현장에서 학살에 참여한 놈들이더라. "

" ... 뭐? "


" 한두 놈이어야 우연의 일치로 넘어갈텐데, 나도 조사하면서 교황 얘가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나 싶더라고.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지? 지가 벌여놓은 일 이제와서 수습이라도 하려는 건가. 웃기네. "

" ... 이상하긴 하네, 확실히. "


" 아참, 그리고 또 하나 말해줄 게 있어. "

" 잠깐만. 문자 왔는데 확인 좀 해볼게. "



그 날도 역시 빈은 에레보스, 아니 산하의 연락을 받고 점심 시간에 슬쩍 빠져나와 체육 창고에서 그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미스터리한 현재 상황. 요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머리가 복잡하다. 그때 빈의 휴대폰이 주머니에서 작게 진동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확인을 해보니 차은우로부터 메세지가 와 있었다. 데이터를 안 꺼놓은 탓인가, 데이터 아깝게시리. 하필 미리보기가 되어있었기에 차은우가 보낸 메세지 내용이 굳이 대화방을 눌러 들어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 어디야?    pm 12:38 ]



잘 보니 이미 이전에도 점심 같이 먹자고 연락을 했던 상태였다. 그걸 산하와 대화하는 데 집중하느라 빈이 보지 못했던 것이고. 뭐, 저런 연락에 굳이 답장할 필요가 있을까. 내가 어딜 갈 때마다 일일이 보고해야 할 만큼 어린 애도 아니고, 그런 걸 알려줄 만큼의 사이도 아닌 거 같고.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치니 조금 기분이 나빠지는 것 같아서 휴대폰 화면을 끄고 데이터도 끈 채 돌아서서 다시 산하에게 가는 빈이었다.



" 누구였길래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

" 그냥, 아는 사람. "


" 혹시 차은우야? "

" ... "


" 맞나보네. 지금 내가 하려는 말도 차은우 걔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잘 됐다. "

" ... 걔가 왜? "


" 그냥 결론부터 말할게. 그러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

" 무슨 말을 하려고. "


" 너 앞으로 차은우 걔랑 친하게 지내지도 말고, 같이 다니지도 마. "

" ... 뭐? "



 빈이 조금 멍한 표정을 하고서 느릿한 걸음으로 교실로 향한다. 그리고 때마침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차은우와 그대로 마주쳤다. 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고 그대로 교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손목을 잡아서 돌려세우는 차은우에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빈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차은우는, 그저 걱정이 묻어나는 듯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또 저러지. 멋대로 제 몸에 손대고, 눈을 맞춰오고, 저를 제가 아니게 만드는, 이상하고 거슬리는, 그러나 그게 싫지 않아 더 짜증나는, 그런. 빈이 세게 손을 뿌리치니 그럴 줄 몰랐다는 듯 멈칫하던 차은우가 빈이 세게 쳐내어 붉어진 손을 내린다. 그럼에도 다정한 목소리는 그대로다.



" 왜 답장 안 해줬어. 전화도 안 받고. 많이 바빴어? "

" 어. 좀. "


"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내일은 점심 같이 먹자. "

" 내일 바빠서 점심 안 먹을 거야. "


" ... 많이 바빠? "

" 응. "


" 알았어. 바쁜 일 끝나면 말해줘. "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 왜 그렇게 상처 받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산하로부터 듣고 온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빈은 마음이 약해졌다. 냉해보이고 날카로운 인상과 다르게 남에게 모질지 못하다못해 무르기까지 한 성격 때문에 크게 당할지 모른다고 산하가 예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왔건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못했다. 그런 말을 듣고 와서도 저런 거에 넘어가는 우스운 꼴이라니. 가장 멍청한 것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 야, 차은우. "

" 응? 왜, 빈아? "


" 너 나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 있어, 없어? "

" 없어. "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로 떨어지는 답. 자신이 저런 걸 물어볼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마냥.



" 진짜로 없어? "

" 빈아. "


차은우.


" ... "

" 난 너한테,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아. "


왜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거야?


" ... "

" 빈이 너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니까. "


왜 그런 말을 해?


" 그러니까 빈아, "


그렇게 말하면 나는, 산하가 너에 대해 한 말 모두를 거짓이라고 믿고 싶어진다고.


" 이제는 나 은우라고 불러주면 안될까? "


넌 정말, 나를 이상하게 만들어.





P.



소년이 그토록 싫어하던 봄도 지나갔고, 찾아온 여름도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여름 역시 빨리 지나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Q.



기말고사 기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때맞춰 장마가 찾아왔다. 하늘이 어둡고 흐린 게 비가 올 듯하다.그리고 문빈은, 그 날 이후로 차은우와 더 이상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서로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R.



어, 이상하다.

그 날 이후로 산하가 한 번도 연락을 해오지 않는다. 많이 바쁜가?





S.



더 이상의 학생 실종 사건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에서는 사제들, 심지어 주교급도 교황이 가차없이 처형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4년 전 대학살 때 참여했던 자들이었다. 그런 교황을 빈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속죄라도 하려는 거라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는데.

내가 죽기 위해선, 네가 죽어야 하는데.





T.



다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아, 이제는 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역시 아니었나보다.





U.



오늘은 여름방학식이 있는 날이다. 다행이었다. 적어도 이제 한달 반 정도는 차은우랑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 테니까. 어차피 고 3들의 방학식이란 별 의미 없다. 그저 집에 조금 빨리 갈 수 있기에 좋은 날 그 이상도 아니지. 이제는 지긋지긋한 선생의 방학 행동 지침 훈화를 마지막으로 방학식은 끝났다. 언뜻 곁눈질로 바라본 차은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제는 웃지도 않는다.



" 빈아. "



인사 나눌 사람도 없고 제게 인사할 사람도 없을 것이 뻔하기에 그냥 챙겨서 집에 가려고 했다. 현관을 나서니 뜨겁기 그지없는 햇빛에 저도 모르게 눈살이 찡그려진다. 그런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제게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흠칫하며 뛰려 했다. 하지만 상대가 한 발 빠르게 빈의 손목을 잡아 멈춰세웠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차은우였다.



" 왜. "

" 방학 잘 보내라고. 그 말 하고 싶었어. "


" 너도 방학 잘 보내고, 개학식 때 보자. "

" 빈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


" ... 뭔데. "

" 나, 한 번만 안아줄 수 있을까? "


" 뭐? "



이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하지만 차은우는 장난치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인 것인지 진중하게 가라앉는 눈으로 빈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 저 눈. 저 눈은 항상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마치 홀리는 것처럼. 한숨을 내쉰 빈이 진즉에 학생들이 다 나간 학교를 흘긋 돌아보고는 팔을 뻗어 차은우를 끌어안았다. 흠칫 몸을 떨며 놀라는 듯 하던 차은우도 이내 빈의 어깨를 꼭 감싸 마주안는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시원하게 느껴지는 체온이다. 그리고 차은우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은.



" 고마워, 빈아. "

" ... 어. "


" 나 갈게. "

" 잘 가. "



품에서 떨어지니 차은우는 그제야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아서 웃는 것인지.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저 미소에 흔들릴 수가 없었다. 흔들려서도 안 됐다. 교문을 빠져나가 멀어지는 차은우의 모습을 바라보며 빈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제는 확신이 되어버린 사실 때문에.



" 차은우. "



왜 너한테서 나면 안 될 향이 네게서 나고 있어?

왜 너한테서, 피 냄새가 나는 건데?





V.



[  내일 새벽 1시. 교황청 뒤쪽 담에 샛길 뚫어놨어. 뒷문 열어놨으니까 거기로 들어오면 될거고, 교황은 아마 침실에서 자고 있을거야. 유일하게 황금색으로 된 문이 있는 방. ]

[ 산하야, 너 괜찮은 거야? 그동안 왜 연락 없었어? ]


[ 교황청 보안 뚫느라 바빴어. 미안해. 당직 서는 사제가 없는 날이 오늘뿐이라 오늘말곤 기회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까 꼭 와. 보안은 내가 시간 맞춰 다 뚫어놓을게. ]

[ 너가 예전에 말해준 거기에서, 그거 챙겨서 가면 되는거지? ]


[ 그래. 조심히 와. ]



무려 한 달만에야 산하로부터 온 문자. 그래도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기에 안도의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바로 당일 통보라니, 너무 시간이 촉박한 거 아닐까. 물론 빈이 그토록 복수를 꿈꿔왔던 상대를 드디어 처단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기에 떨려서일 뿐이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있어서도 안됐다. 이모와 이모부 부부가 잠들 때까지 자지 않고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빈은 그들이 깊게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평소 자주 입던 후드 집업을 걸치고서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조심스레 집을 빠져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빈은 품에 무언가를 고이 갈무리한 채 산하가 알려주었던 길을 따라 교황청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오는 곳이었다. 보통의 일반 시민들이라면 결코 출입할 수 없고 교회 소속이더라도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성역 聖域에 들어온 하찮은 D급 신도라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산하의 말대로 당직을 서는 사제가 없다는 것이 사실이었는지 빈이 어둠 속을 따라서만 걸으며 발소리를 죽여 걷고 있는 동안에 마주친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빛나고 있던 황금색의 문 앞에 다다랐다. 이 너머에, 정말로 교황이 잠들어 있다는 걸까. 문 손잡이를 잡고 가볍게 잡아당기니 쉽게 문이 열린다. 좋은 장치가 되어있는지 열리는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암막커튼이 쳐져 있어 캄캄하기만 한 실내, 있는 빛이라고는 탁자에 놓여있는 채도 낮은 테이블 스탠드 하나가 고작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혼자 자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큰 캐노피 침대가 있었고 침대의 얇은 레이스 커튼 너머로 누군가가 빈을 등진 채로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놈이다.



4년 전 대학살을 명령한 자. 제 가족을, 소중한 동료들과 친구들을 모두 앗아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자. 지난 시간 동안 반드시 죽이리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자. 이제 모든 결론을 낼 때가 온 것이다. 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건,


총이었다.



' 너 앞으로 차은우 걔랑 친하게 지내지도 말고, 같이 다니지도 마. '

' ... 뭐? '


' 너랑 친한 거 같아보여서 어떤 놈인지 궁금해서 조사를 좀 해봤어. '

' ... 그래서? '


' 차은우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

' 뭐? 그게 무슨 말인데. '


' 너도 알거야. A급 신도 정도 되면 교회에도 그 명단이 넘어가는거. 그런데 교회의 A급 신도 명단에 차은우라는 이름은 없었어. 그래서 혹시나 해서 이 나라에 있는 차은우라는 사람들은 다 정보를 찾아봤어. 그 중에 송신고에 다니고 있는 19살의 차은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고. '

' 잠깐만. 네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


' 진짜 만약의 경우가 있으니까 차은우로 개명한 사람들 정보도 다 찾아봤어. 하지만 네가 알고 있는 그 차은우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

' ...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 요새 사태를 잘 생각해봐. 지금 죽어나가는 사제들이 어떤 놈들이었는지. 그리고 실종됐다 돌아온 학생들이 어떤 애들이었으며, 걔네들의 상태가 어떤지. 그게 단지 우연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교회 놈들은 변신술에 뛰어나고 초능력도 있어. 그 정도면 정보 조작을 해서 인간인 척 하는 건 쉬울 거라고. '

' 네 말은, 차은우가 교회 사람이기라도 하다는 거야? '


' 그래. 그리고 너에게는 조금 충격적이라 느껴질지 모르지만, 난 그 녀석이 교황일 거라 생각해. '

' ... 뭐? '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믿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던 차은우가 생각났다. 한 번 의심하는 것이 어렵지, 그렇게 피어난 의심은 끝을 모르고 커져나간다. 그리고 그 의심이 확신이 된 것은, 방학식 날 저를 안던 차은우에게서 나던 피 냄새, 차은우의 교복 셔츠 칼라 끝에 튀어있던 색이 조금 연해진 기분 나쁜 초록빛의 액체들. 그것들을 보며 빈은 더 이상 자신의 의심이 의심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 이건 너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인데, 사실 지금 교황을 처리할 수 있을 만한 무기를 만들고 있어. '

' 뭐? '


' 겉보기에는 그냥 총인데, 일반인에게는 타격을 주지 않지만 외계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 있도록 제작하고 있어. 아마 곧 완성될 거야. 완성된다면 너와 나만 아는 비밀 공간에 둘 거고. '

' 비밀 공간? '


' 4년 전 우리 아지트가 있던 곳 말야. 지금은 폐공사장이 되었지만. '

'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야? 네가 해도 되잖아. '


' 누구보다 교황을 죽이고 싶어했던 너니까, 마지막 처단의 기회는 너한테 주고 싶어서 그래. '

' ... '


' 그리고 왠지, 내가 할 수 없을 거 같아서. '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는 걸까. 그토록 원하던 복수의 순간을 눈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왜 자신은 이렇게 망설이고 있는 건지. 하지만 눈을 감으니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모습들. 눈 앞에서 무참히 죽어간 가족들과 동료들. 그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비겁한 자신. 그게 더 이상의 망설임을 필요없게 만들었다. 입술을 꾹 앙다물고서 떨리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싼 채 방아쇠를 당겼다. 교황이 뒤돌아 누워있던 덕에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푸슉-



소음기를 장착했던 덕인지 별다른 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것은,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초록빛의 피. 그래. 결국 교황도 인간이 아닌 그저 징그러운 외계인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렇게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지. 정말 미쳐가는 것일까. 눈가를 옷소매로 비벼 닦아낸 빈이 혹시라도 누가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에 총을 품에 갈무리한 채 돌아서서 한 걸음 내딛으려는 그 때였다. 뒤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 이제 만족해, 빈아? "



설마, 그럴리가 없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빈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는, 빈이 모를 수 없는 이가 서 있었다. 평소의 웃는 낯 그대로. 그 사람은 분명히.



" 차은우. "

" 응. 오랜만이야, 빈아. "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어?





W.



" 많이 놀란 표정이네. 내가 교황이 아니라서 놀란 거야? "

" ... "


" 날 죽이려고 한 거면 조금 유감이야. 그래도 우리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

" 너, 어떻게. "


"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냐고? 아니면, 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고? "

" ... "


" 글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



그렇게 말하며 빈을 바라보고 있는 차은우는, 빈이 마지막으로 그를 본 날 입고 있던 흰색의 단정한 하복 차림 그대로였다. 웃고 있는 낯 역시 빈이 알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눈 앞에 있는 건 빈이 지금껏 봐왔던 차은우가 맞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차은우가 아닌 것만 같은 느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은우가 이미 싸늘하게 식은 교황의 시체를 보더니만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하얗고 긴 손가락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초록색의 기분 나쁜 액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법도 한 광경이건만, 차은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홰홰 털어내고선 시체를 등진 채 침대에 폭 걸터앉는다.



" 이 녀석도 참 멍청해. 내 명령이라니깐 4년 전 자기가 벌인 짓들의 정반대 행동이라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개처럼 잘 따르더라고. 덕분에 애꿎은 녀석이 날 의심하긴 했지만. "

" 그게 무슨 말인데. "


" 빈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아무리 당직 사제가 없는 날이라고 해도, 무려 신의 대리인이라 불리는 교황이 머무는 교황청에 이 늦은 시간 경비가 아무도 없다는 게? 그리고 교황의 침실의 문이 그렇게 쉽게 열릴 수 있다는 게? "

" ... "


" 자, 봐봐. 이게 '진짜' 현실이라는 거. "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계속 내뱉던 차은우가 손가락을 한 번 탁 튕긴다. 그러자 사방이 한 번 크게 진동하더니 곧바로 시끄러운 소음들이 들려온다. 그리고 주변에는, 이미 죽은지 꽤 오래된 듯 차갑게 식어있는 사제들과 주교들의 시신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붉은 카페트에는 초록빛 피가 스며들어 검게 변해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런 게 없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있을 찰나 침실 문이 열리더니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교회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교회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동료들, 그리고 침대에 쓰러져 이미 죽어있는 교황을 보고 이성을 잃은 듯 했다.



" 저 녀석들이 감히, 감히 교황님을 해했다! "

" 저런 놈들은 당장 죽여야 해. 죽여라! "


" 역시 교회 놈들이란, 귀찮아. "



아주 작게 중얼거린 말이었지만 빈은 똑똑히 들었다. 높낮이라고는 전혀 없는 무감정하고 차가운 목소리. 잠시지만 소름이 쭈뼛 돋을 정도였다. 지금 살의를 가지고 달려드는 교회 사람들보다도, 가라앉은 눈을 하고 낮게 속삭이듯 말하는 차은우가 훨씬 더 두렵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중얼거린 차은우가 왼손을 들더니 허공에서 가로로 손을 홱 긋는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살의를 가지고 달려들던 수많은 교회 사람들이 가슴에서 초록 피를 뿜어내며 자리에 쓰러진다. 치명상을 입은 듯 했다. 하지만 그에 만족하지 않는 것인지 차은우가 다시 중얼거린다.



" 너 따위 것들은 더 이상 필요없어. 신도 자격 박탈이다. "

" 그러니, 죽어. "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버둥거리며 몸무림치던 이들의 움직임이 모두 멎었다. 하지만 차은우는 그 광경을 보면서도 마치 계절의 풍경을 감상하듯이 심상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입가에는 미소를 걸고 있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너무나도 모순적인 얼굴. 그제야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았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이 사람, 아니 '무언가'는 빈이 알던 차은우가 아니다.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빈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 왜 도망가고 그래, 빈아. 많이 놀랐나보네. "

" 넌, 대체 누구야? "


" 내가 누구냐니. 난 차은우야. 왜 그런 걸 물어보고 그래? "

" 거짓말하지 마. 차은우의 탈을 뒤집어쓰고서 그런 말 하지 말고 정체를 밝히라고. "


" 빈아. 내가 우리들의 규칙까지 어겨가면서 특별하게 준 능력, 안 쓰더라. 4년 전부터는. "

" ... 뭐? "


" 상대의 눈을 보면, 단 한 번 그 사람에게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조종하는 능력. "

" ...!!! "


" 실험체로 살던 네가 가엾어서 남은 생 동안에는 그래도 조금은 편하게 살았으면 해서 규칙을 어기고 준 능력이었는데. 내가 그 때문에 10년 정도 근신하고 나오는 동안 이 교황이 이상한 짓을 해놨더라고. 모든 게 다 내 뜻이라면서. 웃기지도 않게 말이야. "

" 그게 무슨 말이야. "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

" ...! "


" 그게 네가 4년 전부터 나에게 빌던 소원 아니었어? "

" 그걸, 어떻게... 너, 대체 뭔데? "


" 글쎄. 난, 너희들이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 지금의 나는 차은우고, 차은우가 곧 나야. "

" ... "


" 그리고 이 지구에서 나를 부르는 이름은, "

" ... "


신 神. "





X.



" 인간들은 흔히 말하지. 신은 인간들을 아끼고 사랑한다고. 그래서 그들을 만든 것이라고 말야. "

" 그런데, 그건 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고 헛소리야. "


" 신은 인간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도 두지 않고. "

" 신에게 있어 인간은 그저 자신들이 만든 피조물일 뿐이고, 다른 피조물들과 다르지 않게 여기지. "


" 그리고 신들이 자신의 피조물에 어떠한 일말의 감정이라도 가지면, 신들의 규칙에 어긋나거든. "

" 모든 신들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있어 결코 어떠한 감정도 가져선 안 된다. 이 규칙에. "


" 그래서 나도 처음엔 그냥 내버려뒀지. 내 뜻이라느니 뭐니 하면서 날 떠받드는 꼴이 꽤 재밌기도 했고, 난 단 한 번도 내린 적 없는 계시를 받았다면서 계급제를 만들고 지들끼리 싸우는 게 꽤 흥미롭기도 했으니까. "

" 나한테 있어서는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외계인들 따위에 휘둘리는 인간들이 퍽 우스웠기도 했고. "


" 그런데 도저히 좌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지. "

" 비록 내 뜻에 반할지라도 신의 이름을 빌고 따르는 자들이, 어린 인간들에게 끔찍한 실험을 하는 일이.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어서 연구소를 폭파시켜버렸지. 그때 아마 대부분 탈출했던 걸로 알고있고. "


" 그때 탈출했던 녀석들 중에 제일 눈에 띄었던 게 너였어. "

" 친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은 너. 앞으로의 생은 좀 무난하길 바래서 특별히 좋은 능력을 준 것뿐인데 그게 신들의 뜻에 어긋났다 보더군. 뭐였더라? 인간에게 감히 연민을 가졌다고 했던가. 그 때문에 10년 근신 처벌을 받았고. "


" 신에게 있어 10년은 아주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지만 인간들에게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겠지? "

" 그새 신의 뜻을 따른다던 놈들이 누구도 넘어갈 수 없는 끔찍한 짓을 자행했더군. 4년 전 대학살 말이야. "


" 나는 그때 근신 기간 중이었어서 어떤 소식도 듣지 못했기에 나중에 근신에서 풀리고 나서야 알게 됐지. 그리고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신에게 '연민'을 가지게 만든 인간, 그니까 네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

" 신에게 있어서 인간 하나의 삶을 알아내는 건 쉬웠기에 금방 모든 걸 알 순 있었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직접 만나서 보고싶더라고. 얼마나 사는게 괴롭고 끔찍하길래 자꾸 죽여달라고 비는지 궁금했고. "


" 그래서 웃기는 일이지만, 여기 내려온 거야. 이 얼굴로, 이 몸으로. "

" 인간들에게 환심을 사려면, 외계인 것들에게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이런 인간이 가장 좋을 테니까. "


" 그리고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네가 아는 그대로야. 더 설명할 필요 없겠지. "

" 혹시 궁금한 점이라도? "


" 아, 옷에 묻어있던 이 피가 어쩌다 튄 건지 궁금해하던거 같은데. 별 거 없어. 교회의 탈을 뒤집어쓴 외계인들을 죽여버리다가 묻은 거거든. 아까처럼. "

" 신의 뜻이라며 무고한 인간들을 죽이는 놈들에게 진짜 '신의 뜻'이 무엇인지 보여준 것 뿐이고. "

" 그럼 다른 궁금한 점은 또 없어? "



그럼, 나한테는 왜 그랬어? 



" 응? "

" 무얼 말하고 싶은건지 모르겠는데. "



한낱 인간의 생각쯤이야 손쉽게 읽어낼 수 있고 다 아는 신이면서, 나 그 동안 갖고 논 거냐고.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자기한테 흔들리는 모습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비웃고 있었을까.



" 아, 그거. 그래. 사실 네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네 과거가 어떤지 정도는 다 알고 있었어. "

" 그런데 말도 안 되는 거 같지만, 네 생각은 하나도 읽히질 않더라고. "



뭐?



" 나도 처음엔 당황했지. 나랑 얼굴을 마주하고서 생각이 읽히지 않는 인간은 수천 년, 수만 년을 살면서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눈을 맞추고 얘기한 거야. 눈을 맞추고 얘기하면 대부분은 생각이 다 읽히니까. "

" 그런데도 하나도 읽히지 않았어. 그래서 흥미가 생겼고, 궁금해졌지.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


" 그래. 처음엔 단지 그 정도였을 뿐인데. "

" 우습게도 지금은 이렇게 되어버렸지. "


" 네가 과거에 얽매여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과거에 발목을 잡혀 아직도 악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 가엾었어. 더러운 교회 것들의 욕심에 놀아난 피해자일 뿐인데 오히려 더 숨죽이고 저 돌멩이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는 게 화가 났고. "

" 그래서 널 그렇게 만든 것들을 모두 없애버렸어. 그러면 네가 조금은 기뻐할까 싶어서. 가장 필요했었던 순간에 지켜보지도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조금의 보상이라도 될까 싶어서. 내가 그렇게 하면서 '차은우'로 머문다면, 네가 더 이상은 고통받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행복'이라는 걸 너도 느껴볼 기회라도 주고 싶어서. 그러면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소원을 빌지 않을까 싶었거든. "


" 웃기는 일이지. 한낱 인간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했다는 게. "

" 나도 모르겠다.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한 것인지. 너무 오랜 시간을 살아와서, 이젠 다 잊어버렸거든. "


" 그래서 나야말로 네게  묻고 싶어. "

" 내가 느끼는 이것, 이 '감정'을. 인간들은 뭐라고 부르는지. "


" 알려줘, 빈아. "

" 만약 너도 잘 모르겠다면, 부탁 하나만 할게. "

" 너의 능력으로 날 죽여줘. "



뭐?



" 애초에 내가 처음으로 네게 능력을 줄 때, 그건 사람이나 외계인뿐만 아니라 신에게도 쓸 수 있도록 준 거였어. "

" 어차피 난 다시 신계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더라도 바로 처형당하겠지. 신들의 규칙을 너무나도 많이 어기고 내 피조물들에게 손을 댔으니. "


"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 피조물의 손에 끝을 맞는게 나을 테니까. "

" 너는, 그 때 네 가족과 너를 구해주지 않은 신을 원망하고 있었잖아. 그런 신따위 없어지길 바랐고. "


" 그러니까 이제, "

" 날 죽여. "





Y.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는 차은우는 뭐가 그리 아무렇지 않은지 다시금 웃고 있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쏟아져들어온 수많은 믿을 수 없는 진실들.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을 올려다보고 있는 차은우의 눈만큼은 처음 빈을 보던 그때와 다를 바 없이 맑고 깊어서, 자꾸만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저 모든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지게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화도 났다. 차은우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다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굴던 신이라는 작자가 고작 한낱 인간 때문에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일들을 벌였다는 무모함과 대책없는 어리석음에 대해서.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어쩔 수 없는 순간을 제외하고서 모든 시간 동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가 벌인 모든 무모함과 대책없는 어리석음의 이유가 자신이었다는 게. 신을 뒤흔들어 놓고, 신조차도 모르는 물음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사실은 두려웠다. 뭐가? 총을 쏘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겨누고 있는 사람이 정말로 차은우일까봐. 쏘고 나서도 후회했다. 차은우 네가 교황이었다면 죽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도 안되는 생각까지 했다. 그리고, 그의 얘기를 듣는 동안 안도했다. 교황이 그가 아니라는 사실에. 너무나 이기적이고 끔찍하게도.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빈이, 무언가 결심한 눈을 하고서 차은우에게 다가간다. 그러고서 그의 어깨를 잡은 채 처음으로 눈을 똑바로 맞추고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서 속삭였다.



" 차은우. "

" 응. "


" 난, 네가 싫어. "

" 알고 있어. "


" 나는, 네가 정말로 싫어. "

" 응. 알아, 빈아. "


" 그런데, 그래도 난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

" 빈아. "


" 그렇다고 해서 널 용서한다는 게 아니야. 그리고 네 물음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도 않을거야. "

" ... "


" 그러니까 내 명령은. "

" ... "


" 네 '감정'이 어떤 것인지, 네 스스로 깨달으라는 것. "

" ... "


" 평생, 내 옆에서. "

" 빈아. "


" 그러면 그 때는, 널 용서해줄게. "

" ... "


" 은우야. "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말을 마친 빈이 차은우를 잡아당겨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떼고는 그를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안은 차은우에게서는 여전히 혈향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더는 역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놀란 듯 굳어있던 차은우가, 천천히 팔을 들어 빈을 마주 안는다. 그가 조금은 떨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아무렴 상관없다. 빈이 그를 도닥이며 처음으로 미소지었다. 이제야 비로소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올 다음 해의 봄이, 더는 두렵지 않다.





Z.



소년은 더 이상 악몽을 꾸지 않는다. 비로소, 여름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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