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계에도 달이 뜰때까지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유리잔
주제
lost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개의 별)





"차은우. 너 빈이랑 친하지?"


빈에게 수업이 끝났다는 문자를 보낸 후 필통을 가방에 넣던 은우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알기론 학교에 빈이를 ‘빈’이라고 부를 만큼 친한 여자애는 없었다. 생활 반경이라곤 학교와 자취방, 헬스장 정도인 빈에게 저 모르게 다른 모임에서 친구를 사귀었을리는 전무했다. 더군다나 빈과 전공도 다른 혜니가 빈과 따로 접점이 있을리가 없었다.


"무슨 일인데?"

"너가 나 빈이랑 이어주면 안될까?"


혜니의 말에 은우가 입을 다문 채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혜니는 신입생이었을 때부터 예쁘다고 학교에서 유명했다. 올해 초에 학교 홍보영상을 둘이 찍게 되며 혜니를 처음 보게 되었을 때 그 짧은 만남에도 은우는 충분히 혜니가 성격도 좋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왜?"

"나 빈이한테 관심있거든."


은우는 대답을 잠시 멈추고 멍한 얼굴로 혜니를 바라보았다. 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에 자신이 유일하게 신방과라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이 자리에 명준이 있었다면 우리 빈이를 거둬줄 생각을 하다니 고맙다며 당장이라도 자리를 만들려고 들 것이다. 명준은 빈이 연애에는 영 젬병이라 아까운 얼굴을 썩히기만 한다며 늘 잔소리를 했었으니까.


"미안. 그건 좀 어렵겠다."

"그래? 어쩔 수 없지. 알겠어."


은우의 거절에 혜니가 가볍게 어께를 으쓱하며 순순히 물러섰다. 다시 필통을 가방에 넣던 은우가 순간 행동을 멈추고 먼저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있는 혜니를 바라보았다. 두 번 묻거나 서운해하지 않는 혜니의 모습에도 심기가 불편해진 은우가 결국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 세계에도 달이 뜰 때까지

차은우 문빈





은우는 빈을 만나보기도 전에 문빈이라는 이름 두 글자를 알고 있었다. 아역배우인 빈은 미취학시절부터 유명했고, 은우는 엄마가 보는 드라마나 제가 보는 어린이 프로에서 그런 빈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티비에서 애교스럽게 웃는 빈은 사랑스럽고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째서인지 빈은 열다섯 무렵 갑작스럽게 티비에서 자취를 감췄으나 은우에게는 빈의 가느다란 입꼬리나 커다란 눈 같은 게 강하게 인상이 남았다. 모두 그 작은 아역배우를 잊어갈 때도 은우는 답지않게 가끔 빈의 근황을 찾아보곤 했으나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무살이 되고 대학 OT에서 빈을 다시 만났을 때, 은우는 그 특이한 이름을 듣기도 전에 얼굴만 보고도 한 눈에 빈을 알아보았다.


그 때에 비해서 엄청나게 커 버린 키와 어께, 그리고 그 때와 똑같은 큰 눈과 얇은 입술. 엄청 사교적이고 활발한 성격은 아님에도 은우는 혼자 앉아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는 빈을 보며 다가가고 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박 삼일 동안 조별로 움직여야하는 OT에서 아쉽게도 은우는 빈과 같은 조가 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의 대학 생활을 생각하며 조금 설레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은우와 달리 빈은 처음 은우를 본 순간부터 한껏 뾰족한 가시처럼 굴었다. 물론 은우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은우가 원인이었다.


'아역 배우 출신이라더니 별 거 없네? 은우가 더 잘생겼는데.'


본인은 농담이라고 한 것이었지만 선배의 말에 빈의 얼굴을 차갑게 굳어버렸다. 자연스럽게 스며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빈이 방을 빠져나간 것은 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스개소리로 일을 수습하는 사이 아까부터 빈의 얼굴만 보고 있던 은우가 빈을 따라 방을 나섰다.


'괜찮아? 기분 많이 나빴지. 내가 대신 사과,'

'야.'

'어?'

'너 나 알아?'


은우는 그 때 빈을 알아야 한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모른다고 해야 할지 고민했다. 분명 은우는 빈을 너무나도 오랫동안 알아왔지만 빈과 실제로 만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웃지 않으면 굉장히 차갑게 느껴지는 빈의 얼굴을 보며 은우가 잠시 고민을 할 때였다. 그런 은우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빈이 이내 은우의 어깨를 툭 치며 비켜갔다. 부딪힌 것은 어깨인데 심장이 미친듯이 뛰어와서 은우는 그 자리에서 한 참 동안 서 있어야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때의 빈은 굉장히 불안하고 예민할 때였다고 했다.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이혼하시면서 아역배우를 그만두게 된 빈은 마음의 문을 닫은 채 십대의 나머지를 보냈다. 천성 탓에 크게 나쁜 길로 빠지진 않았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 빈은 결국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집에서만 지내다가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빈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랬던 빈이 처음으로 큰 마음을 먹고 왔던 대학교 OT에서 대놓고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말을 들었으니 그 선배는 물론 은우까지 미워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은우의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일이었지만.


친구는 은우의 얘기를 듣고 빈을 한 번에 '싸가지없다'고 표현했지만 은우는 빈이 계속 신경 쓰였다. 은우가 유달리 착하거나 친구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은우 주위에는 노력하지 않아도 늘 사람이 넘쳤다. 그런데도 은우는 빈이 예민한 얼굴로 혼자 수업을 듣고 밥을 먹는 것을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빈이 조금씩 제 옆자리를 내 주었을 때, 점차 은우를 보는 얼굴이 유순해져갈 때, 은우는 그게 너무 좋았다. 그게 너무 좋아서 다른 것은 깊게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이렇게 후회하게 될 줄도 모르고.


"너 엠티 갈거냐?"

"너는?"

"너 가면 가려고 했지."


은우는 대답을 기다리느라 제 얼굴을 쳐다보는 빈의 동그란 두 눈을 바라보았다. 처음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혼자 다니는 빈을 보며 아직도 제가 연예인인 것 마냥 비싸게 구는게 재수가 없다는 소문이 있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면이 있긴 했지만 지금의 빈은 그 때와 비교하면 다른 사람처럼 한결 편하고 밝아졌다.


"가면 일만 죽어라 시킬 거 뻔한데. 가지 말까 봐."

"그런가. 그래도 우리 아마 마지막 엠티일텐데. 사학년 되면 못 갈 거 같아서."


은우와 친해지고 나서 자연스럽게 다른 동기들 과도 친해진 빈은 학과 모임을 귀찮아 하면서도 꼬박꼬박 참여했다. 어릴 때 촬영장을 전전하느라 바빴던 빈에게는 거의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라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런 빈의 마음을 알면서도 치졸한 마음이 드는 제 자신을 억누르며 은우가 넌지시 물어봤다.


"그럼 갈까? 마지막으로?"

"그래. 내가 학생회한테 문자 보낼게."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보내던 빈이 더운지 입고 있던 옷을 펄럭거렸다. 더위를 많이 타는 빈은 이제 겨우 오월의 초입임에도 벌써 반팔 차림이었다. 그 사이로 드러나는 흰 피부에 은우가 시선을 돌렸다.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처럼 속이 메스꺼워 결국 은우가 자리에서 멈췄다.


"왜 그래?"

"그냥 좀 울렁거려서."

"너 수업 너무 열심히 들은 거 아니냐?"


장난스럽게 말하더니 빈이 눈이 안보일만큼 웃어 보였다. 네 무방비한 모습을 볼 때 마다 숨이 막힌다고 말하면 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는 사 년 전 그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 어깨에 손을 올리지만, 나는 오히려 지금이 훨씬 더 괴롭다고 말하면 너는 뭐라고 대답할까. 청량하게 공기를 가르는 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은우가 쓴웃음을 삼켰다.





"안녕"

"너 뭐야?"


저도 모르게 말이 차갑게 나가버린 탓에 은우가 입을 다물었지만 막상 혜니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습관처럼 어깨를 으쓱하는 혜니를 보며 은우는 술을 나르고 있는 빈을 흘끗 바라보았다.


"나 경영으로 전과할까 생각 중이라. 학생회에 부탁해서 과엠티 먼저 와 봤어."


그 말이 자꾸 다르게 해석되는 바람에 은우가 술이 담긴 궤짝을 들어올리며 미간 사이를 조금 찌푸렸다. 안 그래도 딱히 오고 싶지 않았는데 혜니의 등장으로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았다.


"은우!"


그 때 뒤에서 빈이 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은우가 먼저 나서기도 전에 혜니가 그런 빈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빈아 안녕!"

"어, 안녕."

"나 지혜니라고 해."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은우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어색한 얼굴로 혜니를 보고 있던 빈이 혜니 뒤에서 걸어 나오는 은우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 때 누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 본 혜니가 빈에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따가 또 봐."


은우를 흘끗 바라본 혜니가 이내 빈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런 혜니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는 빈을 보며 은우가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빈의 손목을 아프게 잡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너 혜니랑 친해?"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잘해줘."

"그냥 네 친구니까 잘해준거지."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바람 섞인 소리를 내며 웃는 빈을 보며 은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그만치 사 년이었다. 사 년 동안 빈은 제 옆에 은우만 있으면 된다는 듯이 굴며 연애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은우는 그 사 년 동안 한 번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항상 진득거리는 걱정과 불안함이 은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왜 그래?"

"아냐."

"뭐야. 차은우 너 쟤 좋아해?"


은우의 다소 굳어 있는 얼굴에 빈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가끔 은우는 빈을 마주보면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면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나듯 마음이 먹먹해져 숨조차 쉴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당장이라도 빈을 붙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야아. 화났어? 장난이야."


내가 너의 구원이 되어 주었잖아.

너도 제발 나를 살려줘.





술을 아무리 들이켜도 전혀 취하지 않는 것 같은 은우와 달리 빈은 볼이 조금 붉어진 채 사람들 틈에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람이라도 잠깐 쐴 요령이었다. 명준의 농담에 바닥을 치며 웃던 빈이 이내 그런 은우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펜션 현관문을 열었다.


가로등을 피해 마당의 어두운 구석에서 담배를 물며 곧 이어 나올 빈을 기다렸다. 역시나 빈이 현관문을 열고 나와 두리번거리며 은우를 찾는데, 어느새 따라 나온 혜니가 빈의 팔을 잡았다. 혜니가 무어라 하는 말을 듣더니 이내 혜니를 따라 가는 빈의 뒷모습에 은우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두운 시골길 사이에 숨어 무작정 빈과 혜니의 뒤를 쫓았다. 혜니가 빈을 데리고 간 곳은 펜션 근처에 있는 작은 벤치였다.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은우와 달리 빈과 혜니는 가로등 빛을 받아 빈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 너무나도 잘 보였다. 혜니가 무어라 말하자 당황했다가, 이내 귀 끝이 붉어지는 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우가 발을 돌렸다.


"어디 다녀와?"

"아, 그냥."


빈이 다시 펜션에 돌아온 것은 은우가 도착한 후로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혜니는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빈만 어색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아직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은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는지 거실의 사람들은 대부분 죽어서 자고 있었다.


"애들 엄청 못마 신다."


피식 웃는 빈에게도 술냄새가 진하게 났다.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사람들을 피해 술병들을 한 곳에 모으던 은우가 그런 빈에게 말했다.


"산책이라도 좀 할래?"

"그래."


흔쾌히 대답한 빈이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술기운이 도는지 조금 멈칫했다. 비슷한 양을 먹었는데 오히려 술이 더 센 빈 보다 멀쩡한 은우가 그런 빈의 팔을 잡았다. 나 너무 많이 마셨나봐. 웅얼거리며 말한 빈이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슬리퍼를 신었다. 제 운동화를 구겨 신은 은우가 현관문을 열었다.


봄을 지나 여름이 되어가고 있는 밤의 시골길은 습하고 조용했다. 논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으며 큰 등치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빈이 신경쓰여 은우는 몇 번이나 팔을 뻗어야만 했다.


"여기 앉았다 갈까?"


은우가 가리킨 곳은 아까 빈과 혜니가 앉았던 그 벤치였다. 잠시 멈칫한 빈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벤치에 앉았다. 빈의 옆에 따라 앉은 은우가 가로등 빛을 받은 저와 달리 새카만 산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가볍게 불 때 마다 나뭇잎들이 스치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별 진짜 많다."

".....그러게."


빈의 말에 고개를 든 은우가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쏟아질 것만큼은 아니지만 확실히 서울보다 많은 개수의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달도 뜨지 않아 더 밝은 하늘을 보고 있는데, 어깨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아, 이거 엄청 어지럽네."

"어지러워?"

"응."


취한 것 같아 보이더니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빈이 은우의 어깨에 기대 중얼거렸다. 빈이 더 편히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주자 빈이 더 깊이 고개를 묻어왔다. 나뭇잎을 쓸던 축축하고 서늘한 바람이 빈과 은우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자?"

"..........."

"빈아."


함께 해왔던 사 년의 시간답게 빈은 한치의 의심도 없는 모습으로 은우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맞닿은 피부로 저보다 뜨거운 빈의 체온을 느끼며 은우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습한 바람에 촉촉하게 젖어 은우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빈의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견디기 위해서, 불안하고 서러운 마음을 꼭꼭 숨기고 빈을 보며 웃기 위해서, 가끔은 당장이라도 빈의 손을 쥐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서, 은우는 스스로를 위해 자주 기도해야 했다. 달이 뜨지 않은 밤에도 은우는 지나가는 바람처럼 조용하게 서럽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했다.


나는 우연이란 순간의 기적을 믿는다. 계절들과 풍경은 바쁘게 지나도 우리의 기억은 새겨질 것을 믿는다. 그 기억들이 언젠가 네가 내게 오게 해주리라 믿는다.


길을 잃은 내 세상에도, 언젠가는 꼭 달이 뜰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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