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우주대통합
주제
조선의 마음 (해어화)



※일제강점기 배경

 

 

 


 

 

 

 

- 이 세상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너와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은 필요 없어. -

 

갑자기, 은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따사로운 햇빛, 가라앉은 목소리, 바람은 가볍고, 공기는 무겁던 그때.

이런 순간에 왜 그때가 떠올랐는지 알 수 없다.

 

- 너는? -

 

은우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리는 걸까.

조금 화가 났던 것뿐인데.

내가 욕심 부리지 않았더라면, 너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은우와 빈은 권번(기생조합)에서 온갖 잡일을 하며 컸다. 그곳에 어찌 들어갔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알려주는 이도 없었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가 버팀목이라는 것만 알고서, 나름 즐겁게 지냈다.

 

 

 

 

 

“이 녀석, 빨래는 끝낸 것이냐!”

 

선생의 호통에 빈은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마시곤 재빨리 달아났다. 이번엔 너무 일찍 들켜 버려 뾰로통해진 얼굴로, 혼자 빨래를 하고 있을 은우에게 향했다.

 

“선생님, 빈이도 수업 듣게 해줘 보세요. 쟤 노래도 춤도 잘해요.”

“그러니까 안 되는 거다.”

“네?”

“너희가 사내아이에게 밀릴까 염려스럽다는 뜻이다. 자, 처음부터 다시!”

 

선생은 빈의 걱정을 많이 했다. 아무리 혼을 내고 벌을 줘도 수업 때마다 기웃대고, 틈만 나면 노래하고 춤을 췄다. 남자로 태어나 정식으로 이름은 못 올릴 테고, 이리저리 흥밋거리로 놀아나다가 비참해질 뻔한 길을 기어이 가고 있는 것이 마음에 얹혔다.

 

 

 

빈은 은우와 함께 빨래를 하면서 방금 전 보고 왔던 수업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지만 1절도 채 못 부르고 입술을 비죽였다.

 

“오늘 새로운 노래 배우나 보네.”

 

가만히 듣고 있던 은우는 눈치를 살피며 말을 걸었다.

 

“응. 근데 난 못 배우지.”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은우는 빈을 달래듯이 다정하게 말을 붙였다.

 

“..빈아 그럼 가수는 어때? 내가 어제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들었는데 가수는 남자도 있대.”

“싫어. 다른 거야. 난 전통소리가 좋아. 춤도.”

 

여전히 심통이 난 얼굴로 화풀이하듯 빨래를 했다. 은우는 빈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길 바랐다. 자신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기생이 되었으면 좋겠다기보다, 그저 그냥, 노래도 춤도 무엇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길 바랐다. 그저 그냥, 언제나 즐겁기를 웃고 있기를 바랐다.

 

 

 

 

 

 

 

 

 

 

*

 

빈은 웬일인지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젓가락으로 생선만 연거푸 내리꽂고 있었다. 꼭 예전 어릴 적, 빨래터에서 가수는 싫다고 말했을 때처럼 입술을 비죽거리며.

 

“빈아, 걔 이미 죽었어.”

“알아...”

 

말끝을 길게 늘이며 이번엔 생선의 눈을 찌르고 있다. 밥이 눈앞에 있는데 생선만 괴롭히고 있다니 뭔가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고민 있어?”

“당장 일자리 구해오라는 게 말이 되냐.”

“한 3년 전부터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데, 그랬던 거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됐나.”

 

생선이 아니라 너를 찔러 버리겠다는 눈빛에 당장 말을 바꿨다. 그렇지만 선생이 3년 전부터 권번의 일은 손 놓고 자기 길을 가라고 한 건 맞다. 둘 다 나이가 차서 이제는 정말 자기 앞가림을 스스로 해야 될 때가 된 것이다.

 

“넌 걱정 안 돼? 천하태평이네.”

“음... 난 일하는 곳이 있어.”

“뭐?”

 

이건 배신이다.

 

“한 달쯤 전에 좋은 자리가 생겨서, 일한 지 좀 됐어.”

“차은우 너 배신이야...”

 

빈은 하나밖에 없는 친구의 배신이라며 자신의 머리를 마구 헝클고는 바닥에 늘어졌다. 잔뜩 심술 난 표정으로 은우를 째려보고 있긴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은우라면 그럴 것 같았다고, 좋은 일자리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은우는 착실했고 성실했고 열심히 했다. 3년 전 선생의 말 때문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늘 무엇인가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빈은 그게 은우의 천성인가 보다 했지만, 사실 빈 때문이었다. 힘 있는 사람이 되어 빈이 원하는 것을 이뤄 주고 싶었다. 그러려면 뭐든 열심히 해야 했다. 그것 말고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몰라......”

“일단 밥 먹어.”

“몰라아...”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우는 소리를 하는 빈이 은우 눈에는 언제나 귀엽다. 선생은 은우에게 빈의 어리광을 받아 주지 말라고 했다.

‘니가 자꾸 받아 줘 버릇하니 너한테만 기대는 것 아니냐. 평생 빈이 옆에 있으련?’

그때는 입 꾹 다물고 묵묵히 듣고 있었지만, 입을 열었다면 분명 평생 빈의 옆에 있겠다 했으리라.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먹고 살아야 하잖아.”

“......몰라.”

 

계속 모른다고 투정부리며 대책 없어 보이지만 빈도 노력을 많이 했다. 이름 올려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권번에 남겠다고 몇 년을 선생에게 대들며, 인정받기 위해 갖가지 일을 벌였는데 대담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을 쪼개서 연습에 매달리는 건 기본이고,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겠다며 사람 많은 거리에서 노래하고 적지만 돈을 벌어 오고, 몸이 아픈 기생 대신 놀음에 가질 않나, 거기서 또 화대(놀음값)를 얹어서 받아 오질 않나, 깜짝 놀랄 일을 자주 일으켰다. 그럼에도 선생은 모질게 내쳤다.

 

“빈아.”

“왜애애.”

“돈이 있고 자리가 있으면 넌 예인으로서 살 수 있을 거야. 나 돈 있고, 자리도 지킬 수 있어. 널 예인으로 세우기 위해 내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어.”

“뭐야 갑자기..”

“...나랑 살래?”

 

 

 

 

 

“    .”

 

 

 

 

 

배짱도 좋았다.

둘 다 말이다.

선생님은 우릴 보고 너희는 고생길을 찾아간다고 했다.

또, 겁이 없다고 했다.

 

- 그런 건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모한 것이다. -

 

둘 다 왜 비극을 손에 쥐고 놓질 못하냐고도 했다.

은우와 함께라면 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둘이 함께 있으면 어떤 것도 해내겠다고 믿었다.

 

난 너무 욕심을 부렸고, 은우는 너무 자만했고, 둘은 너무 어리석었다.

 

 

 

 

 

 

 

 

 

 

 

 

 

 

 

 

 

 

 

 

“어디 가? 쉬는 날이잖아.”

“누가 들으면 내가 쉬는 날인 줄 알겠어. 오늘 일하게 됐다고 말했었는데?”

 

빈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언제였는지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느리게 눈만 깜박였다. 그 사이 준비를 마친 은우는 창가에서 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햇살이 강하지도 뜨겁지도 않게 내리었다. 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서 긴 눈맞춤을 이어갔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지 마.”

“큰일 날 소리네. 어리광 부리지 마.”

 

빈이 어리광을 부리면 은우는 곤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최대한 단칼에 자르는 것이 방법이라면 방법이라, 타이르는 건지 탓하는 건지 모를 낮은 목소리였다. 빈은 속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올라오는 것이 화가 나는 것 같았다. 함께 웃고 떠든 게 언제였는지 어렴풋하다.

 

“이제 내가 지겨워?”

“빈아.. 그럴 리 없잖아.”

 

은우의 눈에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짙은 슬픔이 일렁였지만, 빛을 등진 채라 빈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저 가라앉은 목소리만 전해질 뿐이었다.

 

“난 내 상황이 지겨워.”

 

지겹지만 싫지 않았다. 계속 예인이고 싶었다.

 

“......어째서?”

 

알면서도 물었다. 우리는 웃음을 잃었고, 정의를 버렸다.

 

“니가 경무국에서 일하는 게 싫어.”

 

싫지만 그만두라고 하지는 못한다. 누리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한다.

 

“엉망이다, 우리.”

 

너무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 엉망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참을,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서로를 담으려 애썼다. 창문으로 선한 바람이 들어왔지만 금세 날아가 버렸다. 바깥바람은 그들을 이끌기엔 부족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은우는 마지못해 시계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다가 침묵을 깨고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너와 행복해질 수 없는 세상은 필요 없어.”

 

어디서부터 잘못됐나. 은우의 말이 빈을 무겁게 눌렀다.

 

“너는?”

 

은우는 닫혀진 문에 시선을 두고 물었다. 돌아볼 용기까진 없었다. 빈도 은우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장을 바라봤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조금 심술을 부린 것뿐이었다. 일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신경 쓰길 바랐다. 대답은 얼마 동안 미루었다가, 둘 다 쉬는 날 여유롭게, 눈을 맞추고 입을 맞추고, 웃으며 말하고 싶었다. 못 다한 어리광을 부리며 말하고 싶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정갈한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

 

요즘 몸이 좋지 않았던 빈은 해가 중천에 오도록 잠을 자고 있었다. 은우가 아침 일찍 나가며 열어 놓은 창문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싫어도 눈을 뜨게 하는 소리였다. 오지 않을 것 같던 광복이 찾아왔다는. 빈은 혼란스러웠다.

 

은우는?

 

집히는 대로 옷을 입고 뛰쳐나왔다. 거리의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며 기뻐했지만, 빈은 불안함을 안고 달렸다.

 

경무국에 도착했지만 역시 은우는 없었고 난장판이었다. 주변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자신도 위험했다. 경무국이 보호하는 남자 기생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으니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떨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은우를 찾을 때까지 무너지면 안 돼.

 

빈은 다시 달렸다. 은우가 있을 법한 곳, 처음 가보는 곳, 집에도 몇 번을 다시 갔다. 계속 엇갈리는 것일까. 하늘의 색은 점점 바뀌는데 은우는 보이지 않았다. 주저앉아 울고 싶어졌을 때 문득 함께 자란 권번이 생각났다. 권번도 다 헤집어졌을 게 뻔해서 가볼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숨어 있기 괜찮은 곳일지도.

 

 

 

권번은 불에 타서 그 화려했던 모습을 다 잃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든 틈에 폐허가 된 권번 안으로 몰래 들어갔다. 조심스럽게 하지만 꼼꼼히 살폈다. 허탕이라는 생각이 들 즘 은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자 진 구석에 쓰러져 있는 걸 다행히도 지나치지 않았다.

 

“은우야. 너, 죽은 거 아니지? 은우야..”

 

빈은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은우의 옆에서 쭈그리고 엉엉 울고 있으니 갑자기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빈아,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자겠어.”

“뭐야 너! 사람 놀래키지 마! 일어날 수 있어? 몸 괜찮아?”

“괜찮아. 진짜 잠든 거야.”

“왜 얘기 안 했어. 일본군들은 대부분 빠져 나갔다는데, 그럼 미리 언질이 있었을 거 아냐. 도망을 가든 경무국장을 팔아넘기든 했어야지!”

“미안... 우선 집으로 돌아갈까? 짐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가자.”

 

은우는 참 다정하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어두워지면 움직이자. 너 사람들 눈에 띄면 맞아 죽어.”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이거 들고 나만 쫓아와.”

 

은우는 빈의 손에 총을 쥐어 주었다.

 

“아이.. 야, 나는 총 쏠 줄 몰라. 그리고 이걸 누구한테 쏴.”

“위협용이니까 괜찮아. 가자. 얼른.”

 

은우는 빈이 뭐라 하기도 전에 서둘러 움직였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자신 있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모습이 좋아서 그냥 하자는 대로 했다. 다 불타 버렸지만 이곳이 권번이라서일까, 은우가 다시 다정히 웃고 손을 잡아줘서일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남은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상황을 봤다. 하지만 역시 둘이서 안전히 도망가기에는 무리였다.

 

“은우야 역시 지금은..”

“빈아. 너 전통 소리도 춤도 많이 알고 있지?”

“응. 근데 그게 지금..”

“거기다가 아주 잘하지?”

“그래 나 잘하지.”

“자랑하고 싶지 않아? 넌 살아있는 작품이야.”

“뭐?”

“난 자랑하고 싶어. 지키고 싶어.”

 

이해가 안 된다는 빈의 표정은 순식간에 경악으로 바뀌었다. 은우는 갑자기 빈을 끌고 거리로 나오며 크게 소리쳤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총을 떨어트리지 않게 빈의 손을 겹쳐 잡고 자신의 심장을 겨눴다.

 

“뭐하는 거야, 너 뭐하는 거야.”

“그래, 내가 속였어! 널 이용한 거야! 어리석게, 예술만 알았지 세상물정 몰랐으니까!”

“그만해!”

“자기가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너 같은 건 천황 폐하께 바칠 가치도 없다!”

“차은우!”

 

빈의 목소리는 총성과 함께 울려 퍼졌다. 은우가 작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은우는 눈을 감아 버렸다.

 

 

 

빈은 그 뒤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다가왔고, 자신에게 괜찮냐 묻는 걸 들었던 것 같다. 정신을 차리니 집이었고, 은우가 선물해 줬던 모자를 잃어 버렸다.

 

 

 

 

 

 

 

 

 

 

*

 

“이거 은우가 혹시라도 자기한테 무슨 일 생기면 너 전해 주라고 했어.”

 

봉투 겉면에는 ‘나의 조선, 나의 전부 빈이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은우 글씨다.

 

“이게 뭔데?”

“노래, 라던데.”

“노래?”

 

급하게 봉투를 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다정히 쓰여진 글자들이 나를 웃게 했다.

은우가 나한테 남긴 마음이었다.

 

 

 

 

 

 

 

 

 

 

*

 

“마지막이네.”

“응, 이게 내 마지막 앨범으로 남을 거야.”

“또 부르고 싶은 노래가 생기면 어떡해?”

“부르면 되지. 하지만 기록은 이걸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

 

은우의 바람대로 난 내 실력을 자랑하고 지킬 거다.

내가 욕심냈던 것들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알리며 살기로 했다.

은우가 그렇게 하고 싶어 했으니까.

 

‘조선의 마음.’

 

나에게 남긴 노래를 영원히 품고, 운명이 다하면 너를 만나 불러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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