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두번째 계절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설빈
주제
너의 모든 순간 (별에서 온 그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만 백 번도 넘게 했다. 그렇게 결심한 마지막이 진짜 마지막이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빈은 오늘도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한 차은우를 부축하며 생각했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다.




“차은우, 정신 좀 차려봐.”

“…빈아…”

“어.”

“…나 진짜 너무 속상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와 빈은 한숨 쉬었다. 그래 나도. 속상해 죽겠다. 속으로 그렇게 맞장구 치면서 빈은 자꾸만 바닥으로 고꾸라지려는 은우의 몸을 추켜 올렸다. 앞으로 푹 숙여진 단정하고 하얀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꿈을 꾸는 것처럼 머리가 멍 해졌다. 여자들이 왜 차은우에 미치는 지,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채 가시지 않은 날 선 추위에 코를 훌쩍이며 빈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희끄무레한 게 펄펄 하늘을 날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의 눈은 꼭 이렇게 낭만이라고는 먹고 죽을 래도 없을 때에만 내리고 지랄이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오늘로 차은우의 열 한번째 연애가 끝났다.




얼굴이 그렇게 잘생긴 탓에 연애라면 도가 텄을 것 같은 차은우는 지지리도 연애복이 없었다. 차은우는 쉽게 반하는 성격이었고 호구처럼 올인하는 스타일이었다. 저 얼굴로 자신에게 늘 사랑을 속삭이는 차은우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지, 열 한명의 엑스 애인들은 늘 차은우를 먼저 차버렸다. 그 중에는 바람을 피우다 들킨 이들도 몇 있었다. 남이 들으면 헛웃음을 지을 소리였는데 애석하게도 모두가 사실이었다. 차은우가 맞이하는 연애의 끝은 늘 똑같았다. 애인에게 차인 차은우는 늘 술을 진탕 먹고 취해서 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차은우가 새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삼 사 개월 뒤, 새벽에 전화를 건다면 그건 백 프로 이 꼴이 나 있을 거라는 의미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보자 마자 반해버린 학교 앞 카페 알바생 누나와 불 같은 삼 개월간의 연애를 끝으로 시원하게 차여버린 차은우는 술에 취해 제게 전화를 걸어왔다. 비나…. 멍청한 목소리가 귀에 꽂히는 순간 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매일 좋은 일이 있는 사람 마냥 실실 쪼개던 차은우의 목소리가 이렇게 변할 때마다 빈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짜증이 났다.




집이 멀어 기숙사를 신청했지만 성적에서 미끄러진 빈은 학교 근처에서 원룸을 얻어 살고 있었다. 집에서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보태주긴 해도 전부 손 벌리기는 양심에 찔려서 아르바이트도 몇 개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얼굴만큼 머리도 좋은 차은우는 기숙사비를 면제받으며 지내고 있었지만, 기숙사에서 자는 날보다 빈의 원룸에서 자고 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럴 거면 방값이나 좀 보태라고 면박을 줘도 매번 바보같이 웃으며 라면이나 과자 같은 주전부리를 한보따리 사 들고 오는 터라 더 말을 얹기도 어려웠다.




원룸 키패드 위에서 두 번 정도 헛손질을 하고 나서야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 때문에 손 끝이 얼어버린 것만 같았다. 제 몸에 기대 늘어진 차은우를 침대까지 겨우 옮겨 앉혔다. 답지 않게 축 쳐진 어깨와 처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차은우를 보며 빈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냉수를 한잔 따랐다. 속이 타 들어가는 건 항상 차은우가 아닌 빈이었다. 처음에는 진심으로 화를 내보기도 했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바보천치같이 간 쓸개 다 빼 주는 네가 호구 잡힌 거라며 차은우를 나무랐다. 그러다 결국 속이 답답해 끊었던 담배를 피운 날도 많았다. 누가 보면 연애는 차은우가 하고 깨지긴 제가 깨진 것처럼 굴었다.



연애를 끝내고 나면 차은우는 나라를 잃은 사람 마냥 울기만 했다. 빈아, 나 너무 속상해. 하는 말이라곤 고작 그게 다였다. 상대에 대한 미움 한줌 쏟아내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하는 원망조차 하질 않았다. 그냥 다 제 잘못인 양, 제 탓 인양, 그저 연애의 끝을 슬퍼하기만 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니 더더욱 빈은 속이 터졌다. 상대를 미워할 감정이 없는 사람 마냥 구는 게 꼭, 그 연애가 제게는 너무나 소중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중한 시간을 욕할 마음 따윈 없는 사람처럼, 그래서 그 순간이 너무나 진심이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빈은 섣불리 차은우의 짧은 연애들을 폄하할 수가 없었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니 언제나 빈은 속에서 천불이 들끓고 마는 것이다. 따라 놓은 냉수를 단숨에 삼켰다. 꺼지지 않는 불덩이 위로 물을 쏟아 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쉽게 반해버리는 주제에 제게만 그렇게 비싸게 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쉽게 연애할 거라면 한번쯤은 제게 기회를 줘도 괜찮은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다. 빈은 속에서 치미는 말들을 꾸역꾸역 눌러 삼키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있는 차은우에게 냉수를 찰랑찰랑 채운 컵을 내밀었다. 너도 속이나 좀 차리라고 말이다.



“…빈아.”

“왜.”

“나 이제 연애 안 할 거야.”

“그래.”

“이젠 진짜 안 할 거야.”


빈은 대꾸하지 않았다. 늘 똑같았다. 저렇게 말해도 차은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금방 반해버릴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연애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저 말을 믿지 않게 된 게 언제부터 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화장실에 걸린 은우의 칫솔에 치약을 발라 가지고 나왔다. 차은우의 칫솔이 제 원룸에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을 마주하며 빈은 칫솔을 건넸다. 빈아. 질리도록 제 이름을 불러 대는 차은우는 결국 또 다시 누군가와 사랑을 할 것이다. 문빈을 제외한 누구와도 차은우는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네 둘이 사귀냐?”

“아 존나 징그럽게 남자끼리 무슨 개소리야.”


하긴 차은우가 얼마나 열심히 연애를 하는데. 낄낄대며 웃는 술 취한 동기의 목소리에 잔 부딪히는 소리가 묻혔다. 왁자지껄한 학교 앞 술집에서 늘 그렇듯 몇 안돼는 주머니 속 푼돈을 모아 시킨 안주를 축내며 맥주로 목을 축이던 빈은 슬쩍 옆에 앉은 은우의 얼굴을 살폈다.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기집애 같은 눈웃음에 무던히도 많은 여자애들이 껌뻑 죽어 나가곤 했다. 차은우는 민망한듯 손을 내저으며 맥주를 삼켰다. 고향 친구도, 같은 학교 출신도 아닌 은우와 빈은 새내기 모임에서 만난 후로 쭉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대단한 인연이 있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아주 잘 맞는 것도 아니었다.



생김이 대단한 만큼 대단히 도도한 성격일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차은우는 무던하고 착한 편이었고, 생긴 것 마냥 예민하게 굴 것 같던 빈은 생각보다 털털한 성격이었다. 신중할 것 같은 차은우가 지독한 금사빠라는 것과 쉽게 질려 할 것 같은 문빈이 이토록 지고지순한 성격이라는 것은 아주 가까운 이들이 아니면 잘 알지못했다.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순한 성격의 둘은 그럭저럭 잘 묻어가는 스타일이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졸업반인 지금까지 쭉 붙어 다니는 것이기도 했다.



훤칠한 사내놈 둘이 노상 붙어 다니다 보니 으레 농담으로 둘이 사귀냐 어쩌냐 하는 질문을 받는 것은 흔했다. 거기에 늘 득달같이 달려들어 말도 안돼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먼저 대꾸하는 것은 빈이었다. 차은우에게 애인이 있을 때든 없을 때든 그 대답은 동일했다. 남자끼리 무슨. 그래, 남자끼리 무슨. 헤프게 웃으며 첨언을 하지 않는 차은우가 빈은 늘 얄미웠다. 그리고 그 순간에 실망하는 제 자신이 애달프고 가여웠다. 무언가를 더 바라지 않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부터였을 것이다.




“빈아, 너 요즘 담배 늘었다.”


어, 그러게. 대꾸하면서도 물고 있던 담배를 끄진 않았다. 술기운이 그리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냥 저 안에 있는 게 답답해져서 밖으로 나왔다. 한달에 한 개피나 피울까 싶을 정도라 거의 비흡연자에 가까웠던 빈은 요즘 부쩍 담배를 태우는 일이 많았다. 이유를 모른다고 하기에는 양심에 찔릴 정도로 뻔했다. 담배 끝이 빨갛게 타 들어가는 것을 보며 길게 숨을 삼키던 빈은 어느새 제 옆에 따라 나와 있는 차은우가 답답했다. 그래, 술집이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어서 답답한 게 아니었다. 거기에 차은우가 있어서 답답했다. 그래서 양 옆도 하늘도 다 뚫려 있는 이 술집 앞 골목 마저도 금새 답답해지고 말았다. 빈은 담배를 한번 더 길게 빨아 삼켰다. 매캐한 공기가 폐부 구석구석을 채우는 느낌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차은우의 눈매가 답지 않게 찌푸려졌다. 뻗어오는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하얗구나 싶어서, 빈은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





미쳤냐? 남자끼리 무슨.



이제는 거의 술자리 레파토리가 되어버린 질문에 옆에 앉은 빈이 냉큼 대답했다. 미쳤냐. 남자끼리 무슨. 그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자꾸만 혀 끝에서부터 고약한 쓴 맛이 퍼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들고 있는 맥주잔 속 맥주가 크게 일렁일 만큼 큰 팔 놀림으로 제게 어깨동무를 하는 빈의 얼굴 위로 살짝 취기가 도는 듯했다. 안 그래? 동의를 구하듯 물어오는 목소리에 은우는 그저 긍정도 부정도 아니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리고는 맥주를 삼켰다. 김이 빠져 밍밍한 맥주가 사약이라도 되는 양 썼다.



“차은우 여친이 들으면 기절하겠다.”


굳이 또 빈이 덧붙였다. 제 옆자리를 한번도 양보하지 않는 문빈은 이럴 때면 마치 확인사실을 하는 것처럼 굴었다.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꼭 저렇게 선을 그어야 속이 편한 사람처럼 말이다. 아니 애초에 빈을 저렇게 만든 건 제 탓이기도 했다. 이미 여자친구가 있는 차은우. 그러니까 남자끼리, 무슨, 그딴 걸. 생각할 수록 속만 더 답답해졌다.




원하던 대학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꾸준히 유지했던 성적에 비하면 수능을 망쳐서 두계단쯤 미끄러져 붙은 학교였다. 만족이 되지 않았다. 재수를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자신감이 떨어져버린 탓에 내년이라고 뭐 얼마나 더 잘 하겠나 싶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학했던 학교였다. 아주 별로인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세울 것도 없는 학교. 이름값도 매길 수 없는 그 어중간한 대학교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차은우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누구는 저 더러 금사빠라고 했다. 눈만 마주치면 반해버리는 쉬운 성격이라고. 그래, 다 인정한다. 차은우는 쉬운 성격이었다. 그러니까 그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마주친 문빈에게 말 한마디 섞기도 전해 반해버렸지.


그 사실을 너만 몰랐다. 제 시간이 그 때부터 겨우 제대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도. 은우는 새침한 눈으로 두리번대는 빈을 보자 마자 직감했다. 같은 과구나. 그리고 낯선 이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별로 없는, 생각보다 숫기 없는 성격의 차은우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혹시 환경공학과 신입생?”


어…, 하고 말이 늘어지는 목소리가 생각보다 하이톤이었다. 마치 길을 찾아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보였는지 다소 당황하던 표정이 환하게 펴지고 있었다. 키도 저만큼이나 큰 훤칠한 체격의 사내놈을 난생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차은우는 그 찰나의 순간 느꼈던 생소한 감각들이 뒤섞여 대는 것에도 불구하고 아주 단순 명료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있었다.




매번 같은 수업을 신청했다. 누구 하나 수강신청을 놓치기라도 하면 교수를 찾아가 시간표를 협상했다. 과에서는 물론이고 학교에서 잘생기고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그 차은우가 애처롭게 웃으며 하는 부탁을 거절하는 교수는 없었고, 결과적으로 차은우는 마치 문빈과 한쌍처럼 딱 붙어 수업을 들었다. 빈이 기숙사신청을 했다는 소리에 집에서 얻어준 방도 취소했다. 같은 방으로 배정을 받지 않더라도 어차피 제가 가서 부탁하면 바꿔줄 사람은 많을 것이었다. 차은우는 빈과 룸메이트가 된 뒤만 생각했다. 문제는 빈이 기숙사 배정에서 탈락했다는 것이었다. 그건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거기다 저 혼자만 붙는 것도 예정에 없었다. 빈은 어쩔 수 없이 학교 근처에 방을 구했다고 했다. 저도 기숙사 신청을 무르고 다시 방을 알아볼까 싶던 차에 문득 이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는 통금시간이 있고, 그 말은 조금만 밖에서 늑장을 부리기만 해도 차은우는 금세 갈 곳 없는 처지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건 꽤 좋은 핑계로 빈의 원룸에 밥 먹듯이 찾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마다 빈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딱히 내쫓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환경공학과 차은우와 문빈은 이제 거의 명물이었다. 서로 다른 결로 각자 잘생긴 놈들이 시도때도 없이 붙어 다니니 캠퍼스가 훤해진다는 둥, 시력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둥 우스개 소리뿐이었지만 듣기에는 썩 나쁘지 않은 말들이었다. 지치지도 않고 붙어 다니는 통에 지치지도 않고 동기며 선배들이 물어오곤 했다. 둘이 사귀냐, 맨날 붙어 다니게. 그럴 때 마다 빈은 손사레를 치며 아니요 했다. 언제부턴가 차은우는 그런 빈이 영 마뜩잖았다. 매번 성실히 아니요 할 필요가 있나 심통이 나기도 했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는 빈의 주변에도 점점 친한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건 은우에게 있어서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술자리에 자주 얼굴을 비추던 선배 한 명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문빈 귀엽지 않아?”


살짝 상기된 얼굴로 그녀는 얼마전에 빈과 대화할 일이 있었고, 그때의 문빈이 생각보다 귀여웠다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빈이 겉보기와는 다르게 털털한 성격이고, 말투에 애교 비슷한 게 묻어난다는 사실을 차은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남들이 그 사실을 알리 없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학기가 지날수록 빈의 주변에는 사람이 잘 꼬였고, 어느 순간부터 차은우는 남들과 그런 빈을 공유하는 게 싫어 졌다. 질투가 아니었다. 마음 속에서 몽글몽글 커져가는 감정은 오히려 독점욕에 가까웠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그 것 만을 기대 하다가 굶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어쩌면 같이 죽자고 덤비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몰랐다. 던져지지 못하고 가득 채워지기만 하는 마음을 쏟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머리를 비우고 눈을 돌리니 그 다음은 생각보다 쉬웠다. 제게 먼저 호감을 표현해 주는 사람은 더 많았다. 차은우는 쉬운 길을 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조금씩 포기할 수 있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계 바늘소리가 멈추기야 하겠지만, 다시 온 세상이 느릿느릿 흑백으로 변해버리는 기분이 들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참 뜻대로 되질 않았다. 어렴풋이 예상은 했다. 제 맘처럼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차은우는 늘 새로운 사람에게 반하고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 옆에 있는 빈을 떨쳐낼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매 순간 실패하긴 해도, 그래서 그 때마다 이 마음이 더욱 커져가긴 해도 계속 버티다 보면, 그래도 언젠가는 참을 수 있을 만큼 무뎌 지겠거니 싶었다.




…빈아

…나 진짜 너무 속상해.


차은우의 여자친구들은 금방 실증을 냈다. 결코 그녀들이 나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연애가 순탄할 리 없는 것이다. 겉으로만 좋아해 사랑해 아무리 염불을 외워 봤자 그건 진짜 사랑이 될 수 없었다. 노력으로 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차은우는 인정하고 말았다. 마음이 가지 않는 곳에 애정이 홀로 존재할 수 없듯이. 그래서 차은우의 여자친구들은 모두 금방 은우를 차버렸다. 진짜 사랑을 주는 다른 이에게 이별보다 먼저 마음이 기우는 것을 욕할 수 없었던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처음부터 이 연애는 두 사람 분의 애정을 담고 시작하지 못했으니까. 짧은 연애는 끝을 맺을 때 마다 신랄한 평가로 되돌아왔다. 넌 남자친구로는 완전 꽝이야. 넌 절대 연애하지 마라. 차은우는 매번 같은 평가에 토 하나 달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게 뻥 차이고 나면, 홀가분해졌다. 이제 전화 한통이면 버려지고 처연해진 저를 데리러 단숨에 달려올 문빈이 있었으니까.



빈이 냉수로 찰랑찰랑 가득 찬 컵을 제게 건넸다.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고 흔들리는 투명한 물이 마치 제 마음 같았다. 한발만 삐끗하면 넘쳐 흘러 갈 곳을 잃고 바닥으로 쏟아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은우는 커다란 덩어리를 밀어 누르듯 냉수를 삼켰다. 넘쳐서는 안 될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에 목마른 사람 마냥 연애를 시작했지만 정작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계속 목마르기만 했다. 어디에서 채워야 할지는 알았어도 어떻게 채워야 할지는 모를 갈증이었다.





***





“빈아, 너 요즘 담배 늘었다.”

“어, 그러게.”


평소와 다르게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빈이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입가에 담배를 가져가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흡연자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아주 가끔씩만 담배를 피우던 빈은 요즘 들어 꽤 자주 담배를 샀다. 고민이라도 있나? 아르바이트가 힘든가? 혹시 누구한테 괴롭힘이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은우는 고개를 털었다. 그럴 리가 없지. 빈은 누구에게 쉽게 미움을 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럼 혹시, 연애 문제인가. 문득 스치고 지나는 생각에 입맛이 썼다. 맥주 때문은 아니었다. 은우는 길게 숨을 토하며 어색하게 옆에서 담배만 태우는 빈을 바라보았다.



“아까 지민누나가 너 여친이랑 헤어졌냐고 그러더라.”

“어. 왜.”


은우는 빈의 말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빈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담배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만 피웠으면 좋겠는데. 뺏으면 화 내려나. 그 와중에 어이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하던 빈이 제 눈 앞에 반대쪽 손을 흔들었다.



“뭐해?”

“아냐. 아무것도.”


너는 한번도 내게 아무것도 아닌 적이 없었는데. 무의식 중에 툭툭 터져 흐르는 마음이 쓰고 고단해서 은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꾹 물었다. 왜긴 왜야, 지민 누나 너한테 관심 있나보지. 무심하게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은우는 튀어나오려는 말을 참아야 했다. 대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대꾸하지 않으니 머쓱해진 분위기에 빈이 다시 입으로 담배를 가져갔다. 더는 참을 재간이 없었다. 은우는 손을 뻗어 빈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를 빼앗았다. 조금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눈매가 사랑스러웠다.



“더는 못 버티겠다.”


뭐? 되묻는 목소리가 차마 튀어나오지 못하고 제 입술 안으로 갇혀 들었다. 깊게 파고들 듯 밀어붙이는 제 기세에 빈의 등이 차가운 콘크리트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그 벽 위로 담배를 짓이겨 떨궈버리고 빈의 뺨을 양 손으로 붙들어 깊게 입술을 삼켰다. 조금 매캐한,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가 숨 끝에 묻어났다.



한번 무너져버린 둑은 쉽게 막아지지 않는다. 흘러 넘쳐버린 마음을 주워담을 길은 없었다. 미끈하게 얽혀 드는 혀의 감촉이 사탕보다 달았다. 그동안 얼마나 이 것을 원해왔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술을 그렇게 들이 부어도 취할 것 같지 않더니 왠일로 지금은 정신없이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이었다. 온 몸으로 뻗어 있는 신경줄이 죄다 찌릿했다. 당황한 듯 굳어 있던 빈이 손을 올려 제 손목을 붙들었다. 그래 놓고는 정작 어떻게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그 다음이 없었다. 그런 점이 늘 제 마음을 안달하게 만들었다. 손으로 빈의 턱부터 귀 끝까지 한번에 감싸 쥐고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어 깊게 혀를 탐했다. 뜨끈하고 미끌 대는 혀와 점막, 그리고 고른 치열까지 죄다 집요하게 훑어 댔다.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다. 버틴다고, 버텨질 게 아니었다.



혀 끝과 입술을 당기듯 빨아내자 쪽, 하고 젖은 소리가 울렸다. 다소 숨이 달리는 듯 빈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크게 숨을 내뱉으며 눈을 맞추는 빈은 쉽게 말을 내지 못했다. 차가운 밤 공기에 드러난 젖은 입술이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을 받아 살짝 반짝였다.



“결국 이럴 줄 알았어.”

“…뭐?”

“너는 몰랐어?”


손을 들어 빈의 아랫입술을 살짝 문댔다. 응? 정말로 몰랐어, 빈아? 가라앉은 눈으로 빈을 들여다보며 재촉하듯 되물었다. 그러자 흠칫 어깨를 떨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는 것 마저도 이미 예상한 바였다. 결국 차은우는 문빈을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이렇게 무너져버릴 것을 알았다. 온통 흑백인 세상 속에서 살아왔던 순간을 새삼 깨닫게 된 사람처럼 은우는 빈을 처음 만난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분명히 제 안의 무언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멈춰 있던 시계가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꾸만 그 모습을 따라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차은우, 취했어?”

“취했나.”

“…일단 좀, 비켜봐.”


살짝 미간을 찌푸린 빈이 은우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그러나 쉽게 밀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제 어깨에 올라온 손목을 쥐고 끌어내려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그런 중에도 은우의 시선은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빈을 향한 채였다. 손 끝이 가볍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곤란한 듯한 목소리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흘러나왔다.



“너 뭐해, 차은우…”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야.”

“뭐…?”

“대답 잘 해, 빈아.”




차은우의 목소리가 제 손바닥 위로 뭉개져 손 끝까지 찌릿하게 울려 퍼졌다. 빈은 별안간 지금 벌어진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신 할 수 있었다. 차은우와 문빈 둘 중 어느 누구도 취하지 않았다는 거. 그러니 더 미칠 노릇이었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술로 실연의 아픔을 달래며 징징대던 차은우가 지금 왜 제게 이러는 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하필 그 말을 했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야. 늘 제가 곱씹던 그 말을 지금 차은우가 제게 하고 있었다. 아이러니였다.



“남자끼리, 무슨.”

“…”

“진심이야? 남자끼리, 개소리야?”

“무슨 소리야, 차은우.”


아니 어쩌면 차은우는 취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빈이 아는 한 차은우는 이렇게 앞도 뒤도 없이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치 녹음 파일을 재생하는 것처럼 은우는 그동안 제가 숱하게 해왔던 말들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시 대답을 기다리는 양 제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까맣고 숱이 많은 속눈썹 아래로 새카만 눈동자가 잠겨 드는 듯했다. 붙잡힌 손을 떨쳐내지도 못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와 닿아 있는 차은우의 얼굴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간은 참 솔직한 동물이었다.



“남자끼리는 안돼? 너는 그래?”

“…”

“나는 온통 너야. 그냥 머릿속이 전부 다. 너야, 빈아.”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어.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설탕덩어리를 씹는 것처럼 온통 달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아.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다시금 사랑에 빠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등 뒤에 닿은 콘크리트 벽의 냉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빈은 코 끝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은우의 목에 팔을 감았다. 온 세상의 계절이 돌고 돌아 지금 이 순간에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아까 닿았던 입술 위로 살짝 제 입술을 맞대 보았다. 밤공기에 차가워지긴 했어도 부드러운 것은 그대로였다.



“…이제 연애 안 한다며, 차은우.”

“네가 거절하면. 이제 평생 안 하려고.”

“거짓말.”

“그래서. 나 이제 연애 못 해?”


낮은 웃음소리가 묻어났다. 살짝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는 차은우가 고개를 숙여 눈을 마주치며 되물었다. 평생 연애하지 말까? 결국 빈은 버티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해. 나랑. 대답하며 팔을 내려 은우의 탄탄한 허리를 당겨 안았다.



“나랑만 해.”




이제부터 돌아오는 모든 순간은 오직 너와 나만이 아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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