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연 하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모해
주제
홍연 (역적 : 백정을 훔친 도적)

 

 

 

빈은 잠든 동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마음에 담을 수 없으니, 눈에라도 담아야 했다. 당신의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못내 신경이 쓰였다.

 

 

“…너만 그리 생각하면 되었다.”

 

 

홀로 남았을 그 너른 등이 아른거렸다. 제게 있는 모든 정은 동민에게 주었다 생각했는데, 림에게도 나누어줄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감당할 수 없는 연민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고스란히 남을 감정들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했다.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뜻에 반하는 일이라 해도.

 

 

빈은 동민에게 큰절을 올린 뒤, 소리 없이 밖으로 향했다. 인기척이 사라지자, 동민은 감았던 눈을 떴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쉬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

 

 

 

 

금군들의 눈을 피해 보연당에 들어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십 년 동안 그리 했으니, 새삼 어려울 리가. 헌데 왜 이렇게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는지. 지난 세월 항상 곁을 지켰으면서, 정작 림이 가장 필요로 할 때 자신은 동민의 곁에 있었다. 배신자라고 역정을 내어도 고스란히 받아줄 생각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빈이 문을 열어젖혔다. 

 

 

림은 우두커니 앉아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만 바라보고 있었다. 쉬이 흩어지는 달빛과도 같은 사람. 어찌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있을까. 빈이 저려오는 마음을 뒤로 하고 걸음을 내딛자, 림의 시선이 빈에게로 와닿았다. 마주치는 시선에 준비했던 말도 잊고, 숨을 죽인 채 바라보기만 했다.

 

 

“…빈아.”

 

 

갈라진 목소리가 사무치게 아팠다. 차라리 화를 내는 편이 나았다. 이전과 같이 다정하고도 서글프게 자신을 부르는 것보다는. 아픈 그 목소리에 입 맞춰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 했을 텐데.

 

빈은 눈을 질끈 감고,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궐밖에 말을 준비해두었습니다.”

“…….”

“어디든 가십시오. 가서….”

“…….”

“…다시는 돌아오지 마십시오.”

 

 

림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가라앉은 눈이 깊게 반짝였다. 그 눈을 마주 볼 자신이 없어 돌아서는데, 림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가지 마라, 빈아….”

“…….”

“…너마저 나를 두고 가지 마.”

 

 

당신이 그리 끔찍이 생각하는 내가 실은 동민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내가 누구의 사람인지 안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나를 대할 수 있을까. 

지난 십 년 동안 철저히 감춰두었던 진실이 멋대로 비집고 나왔다. 평생 감추고 싶기도, 언젠가 한 번은 꼭 말하고 싶기도 했던 진심이었다.

 

 

“저는… 대군마마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

“처음부터 저는….”

 

 

채 마치지 못한 말을 끝으로 몸이 돌려졌다. 큰 손으로 빈의 어깨를 붙잡고, 전에 없던 표정을 하고 있는 림이 낯설었다. 그는 화가 난 듯하기도, 애절한 듯하기도 했다. 

 

 

“말하지 마.”

 

 

왜 잊었을까.

 

 

“듣고 싶지 않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체하는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림이 알고 있다, 제가 누구의 사람인지. 그 사실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는 왜 알면서도 자신을 곁에 둔 것인가. 십 년간 그를 지켰던 검이 자신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상관없다.”

“…….”

“네가 무엇이든, 누구의 사람이든….”

 

 

빈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림을 올려다보았다. 어깨를 아프도록 쥐고 있던 손이 천천히 내려가 빈의 손을 그러쥐었다. 그가 무너지듯 빈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힘이라고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뿌리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으나,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빈의 손 위로 겹쳐진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그는 평생을 이토록 두려워하며 살았다. 제게 달린 수많은 목숨과 기대를 외면할 수 없어 스스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주어진 길 위에 떨었다. 풍요 속에 있어도 가난했으며, 봄날을 맞아도 홀로 겨울이었다. 그는 왜 이토록 가난하고 가련하여 외면조차 하지 못하게 만드는 걸까. 

 

 

“나와 함께 가자, 빈아.”

“…….”

“나와 함께 가주어….”

 

 

애달픈 목소리에 차라리 귀가 멀었으면 했다. 이해 가지 않는 것 투성이다. 자신을 속여온 이에게 이토록 안겨 오는 림이나, 잘게 떨리는 손에 마음이 일렁이는 자신이나. 

 

흔들리는 시선이 맞부딪혔다. 늘 흩어져 사라질 것 같던 사람이었는데, 자신을 담는 시선만은 또렷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뱉지 못할 마음을 삼키며 살았을까. 그리고 그가 끝끝내 내뱉은 진심에 이토록 마음이 파도치는 것은 연민인가, 동질감인가. 그게 아니면….

 

 

림이 빈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 봄날 같은 손길이 낯설어

 

 

“너에겐 뭐든 답해줄 테니.”

 

 

제게 익숙한 봄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빈은 림의 손을 뿌리쳤다. 그의 진심이 무엇이 되었든 동민을 홀로 둘 수 없다.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긴 세월 동안 림을 홀로 두었으니까.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거니와 품어온 마음을 버릴 수도 없다. 처음부터 여기까지인 연이었다. 그러니 그의 시선도, 마음도 외면할 수밖에 없다.

 

 

림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빈의 모습에 텅 빈 손을 그러쥐었다. 쏟아지는 달빛을 맞으며 생각했었다. 빈아, 달이 이리 환한데, 너 하나 잃었다고 어찌 이리 어두울까.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듯하고, 살아 있어도 죽은 듯하다. 네가 나를 찾아오려나. 그래 준다면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형님이 늘 탐내던 이 한목숨까지도. 지리한 삶을 버리는 것 따위가 겁이 날까. 너만 있어준다면.

 

그런데 너는 아니었구나. 입안이 썼다. 모든 것을 가진 형님이 꼭 너마저 가져야 했을까. 

 

 

눅눅히 가라앉은 림의 시선이 빈에게 꽂혔다. 단 한 번도 형님의 것을 탐해본 적 없다. 욕심을 내면 안 된다 여겼다. 나의 욕심이 모든 것을 망칠까 겁이 났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처음부터 나의 것이었다면…

 

 

“보위를 되찾을 것이다.”

 

 

탐한다 해도 어찌 욕심이라 하겠는가.

 

 

전에 없던 목소리에 빈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림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형님의 곁을 원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너의 마음이 그곳에 있다면 내가 그곳이 되겠다. 나만으로 너를 곁에 둘 수 없으니,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억지로라도 곁에 둘 것이다. 나를 원망한다 해도 너를 볼 수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그때 너도, 함께 찾겠다.”

 

 

림은 느린 발걸음으로 빈의 곁에 섰다. 닿은 시선이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림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속삭였다.

 

 

“형님을 잘 지키거라.”

 

 

그때까지는.

 

 

말을 마친 림이 빈을 스쳐 지나갔다. 홀로 남은 빈은 그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가올 운명이 두려워 견딜 수 없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은 더욱. 

 

 

 

 

-

 

 

 

 

림이 보연당을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동민은 심기가 불편했다. 빈의 다정한 성정 탓에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불쾌한 기운이 가시질 않았다. 더군다나 그를 도운 장본인에게 그 이야기를 직접 들었으니, 가슴이 뻐근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처분을 기다리는 빈의 낯이 고요했다. 그 손으로 직접 나를 택할 줄 알았건만. 오만이었나. 그의 손가락이 일정하게 내려앉았다. 

 

 

“어명을 어겼으니…”

“…….”

“네게 어떤 벌을 주면 좋을까.”

 

 

빈이 동요 없이 답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다운 대답이었다. 

 

 

동민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 궁을 빠져나갔으니, 곧 사병을 이끌고 궁으로 올 것이다. 빠르면 날이 밝는 대로, 늦어도 이틀 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역모를 일으켜준다면 아우를 벨 가장 적합한 명분이 생기는 셈이니. 객(客)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군. 

 

생각을 마친 동민이 빈에게 일렀다.

 

 

“근신이 좋겠구나.”

 

 

본래 객을 맞이하려면 가장 귀한 것은 깊이 숨겨둬야 하는 법이다.

 

 

 

 

-

 

 

 

 

동민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양현대군과 그의 사병들이 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절로 웃음이 샜다. 이제야 이 지루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겠구나. 그동안 나의 뜻대로 움직여주었으니 림아, 너만은 내 손으로 보내주어야겠지. 무장을 마친 동민이 검을 손으로 길게 쓸었다. 

 

 

곧 대군의 사병들이 궁의 문을 부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웃음기를 거둔 동민이 무감하게 명했다.

 

 

“열어주어라.”

 

 

오늘이겠구나. 길고 긴 악연을 끊는 날이.

 

 

 

 

-

 

 

 

 

지난 세월 동안 대군의 세력이 많이 약해진 탓인지 사병들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모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공법을 택한 것이 참 그 아이답다 싶었다. 형님과 같은 길을 가지 않겠다, 그리 말하는 듯한 선택이었다. 

 

동민은 처참히 스러져가는 사병들을 보며 생각했다. 기백은 가상하나, 어리석구나. 너를 따른 대가로 버려지는 저 수많은 목숨을 감당할 그릇도 못 되지 않으냐. 

 

 

동민은 걸음을 옮겼다. 그 아이라면 필시 보연당으로 올 것이다. 내가 여기 있을 것을 알고 있을 테니. 내리는 꽃비 속에 서 있자니, 날이 더없이 좋았다. 

 

 

“형님.”

 

 

보내기 아쉬울 정도로.

 

 

평생을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늘 림과의 마지막을 그렸다. 너도 그랬겠으나, 나 역시 너의 그림자 속에 평생을 살았다. 세자의 자리도, 왕좌도 늘 불안했다. 평생 받아본 적 없는 부모의 사랑조차 네게 빼앗길까 전전긍긍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가져본 적도 없으면서 무엇을 두려워한 걸까. 모두가 너를 칭송했고, 동시에 나를 깎아내렸다. 나는 너의 그림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생각할 정도로. 그러나 나는 너의 그림자가 될 생각이 없다. 오롯이 나로 서기 위해 널 없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그리 할 것이다. 그러니

 

 

정히 원망해야겠거든, 하거라.

 

 

“늦었구나.”

 

 

이제 와 너의 원망이 두렵겠느냐.

 

 

“저는… 처음부터 저하의 사람이었습니다.”

 

 

유일한 내 것을 빼앗길까 두려울 따름이지.

 

 

 

“그러게 말입니다.”

“…….”

“진작 이리 할 것을,”

“…….”

“무엇을 망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림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검을 맞대고 있는 짧은 사이에 마주한 눈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심약한 아우를 무엇이 저렇게 만들었을까. 답은 뻔했다. 

 

 

“…부디 저를 용서하지 마십시오.”

 

 

그 뻔한 답이, 미치도록 불쾌해서 문제였지만.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잠시라도 마음을 놓으면 베일 것이 분명했다. 칭찬이라도 해주어야 할까. 이리 진심으로 누군가를 상대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조금은 즐거웠으나, 그의 검은 지나치게 감정적이었다. 감정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림의 검이 날아갔다. 동민의 검이 림의 목을 정확히 겨눴다. 림은 놀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무감한 낯으로 끝을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 뜻을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목숨을 구걸하길 너도 원치 않는 것 같으니 내 너를 단번에 베어주는 것이 나을 테지. 

 

 

동민은 검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림에게 닿지는 못했다. 자신의 검을 맞받아친 빈 때문이었다. 동민의 눈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이리될까 봐 궁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건만. 

 

 

“비키거라.”

 

 

낮은 목소리로 명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제 뜻을 알아주던 이였으니, 지금도 제 뜻을 모르지 않을 텐데. 빈은 명에 따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찌 이리 자꾸만 나를 벗어나려 해. 속이 탔다. 너는 내 것이 아니라 의심해본 적이 없는데, 실은 네가 내 것이 아니었다면. 너마저 그런 거라면…. 

 

 

“비키라고 하지 않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야 할까.

 

 

“정녕… 내 손으로 너를 베어야 말을 듣겠느냐.”

 

 

네게 검을 겨누면서도 아니길 빌었다. 잠시 동정심에 움직인 마음일 뿐이라고 말해주었으면 했다. 그런데 어찌 네가 나에게…

 

 

검을 겨누는가.

 

 

“저는 대군마마를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

“해서 어명을… 따를 수 없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너의 말에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너의 검은 내게 닿지도 않았건만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홀로 거니는 듯하다. 너의 시선만으로 찢기고 버려진 나는

 

 

“…네 뜻이 그렇다면 별수 없구나.”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는다.

 

 

“검을 들어라.”

 

 

네가 천천히 검을 들자, 나는 망설임 없이 네게 달려들었다. 너는 쉴 틈 없이 쏟아지는 검을 막아내기 급급했다. 애초부터 공격하려는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대군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나를 공격할 필요가 없기는 했다. 내가 너를 상대하는 동안 대군이 달아나면 그만이니.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너는 내 검을 막아내면서도 한 곳만 바라보았다. 너의 시선을 따라가니 달아날 생각도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림이 눈에 들어왔다. 내게 검을 겨누면서도 어찌 시선 끝엔 내가 있지를 않나. 자조적으로 웃을 뻔했다. 네가 바라는 것은 하나겠지. 그저, 대군이 살아남는 것. 그가 너의 죄책감으로 남지 않는 것.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애석하게도 이 일을 끝낼 길은 너의 바람을 져 버리는 것 하나뿐인 듯하다.

 

 

몸을 비껴내 대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대군을 향해 달려가자, 네가 급하게 따라붙었다. 대군의 코앞에 다다라 검을 높이 치켜들자, 네가 그 앞을 막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급하게 시야에 들어차는 너의 낯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내게 닿지 않을 것 같던 너의 검이 끝내 나를 베었다. 

 

 

피를 흘리며 주저앉자, 네가 내게 왔다. 검을 맞대고 있을 때는 멀리 있는 듯하더니, 검을 버리자 비로소 가까워졌다. 너는 놀란 듯 눈물만 쏟았다. 나를 벨 생각은 전혀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새삼스레 안심하는 내가 우스웠다. 

 

 

“전하, 어찌….”

 

 

네 앞에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 된다. 감정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인 것을.

 

 

눈물로 얼룩진 뺨을 쓸어내며 말했다.

 

 

“…약조하지 않았느냐.”

“…….”

“네 눈앞에서는… 죽이지 않겠다고.”

 

 

우습게도 너의 낯을 보는 순간, 그 약조가 떠올라 그랬다. 차마 벨 수 없었다. 너의 바람을 저버리겠다 마음먹었으면서, 필사적으로 나를 막는 너를 보니 그리할 수 없어서. 아둔하다 해도 어쩌겠느냐. 지난 세월 동안 너는 내 것이었으니, 너의 손에 너의 것으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단 생각만 드는 것을.

 

 

시야가 흐려지기에 나를 안고 있는 너의 손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너의 눈물이 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어찌 이리 울어. 이제 내 곁을 떠나, 네가 있을 곳을 선택할 수 있을 터인데. 

 

 

“울지 마라, 빈아….”

 

 

전하. 울먹임 속에 새어 나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낮게 웃었다.

 

 

“알고 있잖아,”

“…….”

“내 이름.”

 

 

네가 떨리는 내 손을 잡아 너의 뺨에 갖다 대었다. 손바닥에 따뜻한 입술이 느껴졌다. 

 

 

“동민아….”

“…….”

“가지 마라, 제발….”

 

 

내 손에 피가 묻은 탓인지 너의 얼굴에도 피가 묻었다. 고운 그 얼굴에 피를 닦아주고 싶었으나, 내게 힘이 없다. 점점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 너와의 날들을 그렸다.

 

 

 

“문 빈.”

 

“좋은 이름이구나.”

 

 

눈부셨던 그 날들은 산산이 부서져

 

 

“너와 나의 연은 어떨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아쉽구나. …나는 늘 생각하는데 말이다.”

 

 

다시는 오지 못할 어둠으로 가고,

 

 

“저는… 처음부터 저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속에 나만 홀로 남았다.

 

 

 

 

“…너를 연모한다, 빈아.”

 

흩어지는 정신 속에 나를 부르는 너의 목소리가 아득히 들렸으나, 더는 답을 할 수 없었다.

 

 

 

붉은 실로 이어진 인연인 줄로만 알았더니, 

붉은 피로 물들 인연이었구나.

 

 

홍연紅緣이라면 홍연이겠으나,

 

빈아,

다음에는 꼭 붉은 실로 와주어.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찾을 수 있게.

 

 

 

 

 

-

 

 

 

 

 

 

 

Epilogue

 

 

팔자에도 없는 역사 관련 교양을 듣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그 수업만 안 들었으면 궁을 방문한 뒤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과제도 없었을 텐데. 벚꽃의 기말은 중간고사인 법인데,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래, 뭐, 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내가 심각한 길치라는 것이다. 한눈을 팔다가 친구들과 떨어져 이상한 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발걸음을 계속 옮겼다.

 

 

“보연당…?”

 

 

맞나? 갸우뚱거리다 들어가려는데, 나오는 누군가와 부딪혔다. 

 

 

“괜찮아요?”

 

 

머리 위로 내려앉는 단정한 목소리에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남자가 거의 안듯이 받아준 덕분에 넘어지진 않았는데, 문제는 커피가 남자의 옷에 많이… 튀었다.

 

 

“헐, 죄송해요!”

“괜찮아요.”

“제가 세탁비 드릴게요. 아, 진짜… 이거 흰 셔츠라서 잘 지워지지도 않을 텐데.”

“괜찮….”

“제발 세탁비 청구해주세요… 제발요….”

 

 

거의 울먹이며 하는 내 말에 남자는 작게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번호를 교환한 뒤, 세탁비가 나오면 꼭 청구해달라고 강조했는데, 계속 웃는 낯이기만 해서 영 믿음이 가지 않았다. 연락 없으면 내가 해봐야지…. 남자의 연락처를 저장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켰다.

 

 

“이름 좀 알려주세요.”

“…….”

“아, 저도 안 알려드렸구나. 저는 오제에요. 정오제.”

 

 

나는 이어질 남자의 말을 기다렸다. 순간 바람이 불어 꽃비가 내렸고, 남자는 그 속에서 조용히 웃었다. 

 

 

“차은우예요.”

“…….”

“제 이름.”

 

 

봄날 같은 미소에 그리운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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