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며

2020 봄호
2020 봄호
작가
그론
주제
너를 기다리는 법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사랑해)



    반평생을 가족처럼 지내던 친구를, 실은 내가 사랑하고 있었다. 손만 잡으면 애기가 생기는 줄 알던 때부터 친구였던 그 애를,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다. 나는 걔를 처음부터 사랑해서 항상 함께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에는 우정이었다가 그 애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어느 쪽일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난 지금 걔를 사랑하고 있다.


    사랑이란 단어조차 우스운 나이에 걔를 만났지만, 아마 난 처음부터 사랑하고 있었을 것 같다. 달랑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수학익힘책을 풀지 않아 혼이 날까 두려워하는 너를 위해, 책을 바꿔 대신 혼나주기도 하는 용기가 있었다. 두부 공장을 차린 건지, 두부김치, 순두부찌개, 시금치 두부 무침이 급식으로 나온 날에는 밥만 푹푹 퍼먹는 너를 위해 달랑 세 개 나온 소시지를 다 줘버리기도 했다. 피아노 치는 일이 제일 좋았지만, 너와 함께하고 싶어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태권도를 시작했었고, 영어학원에선 늘 다른 반인 게 아쉬워 레벨 테스트를 망치고 너와 같은 반에 들어갔다. 다른 애들은 게임이나 심한 장난 때문에 싸울 때, 나는 내가 사준 필통을 안 쓴다고 화를 내거나, 네가 나 말고 딴 애한테 준비물을 빌려 가서 삐지는 등 거의 무슨 애인처럼 굴었다. 하지만 네가 내 첫 번째 친구였고, 난 친구 사이에는 당연한 건 줄 알았다. 

    

    나의 열렬한 설득과 운 덕에 우린 같은 중학교에 올라왔지만, 늘 붙어 다녔던 초등학생 때와는 다르게 점점 멀어져 갔다. 학원과 학업에 집중하느라 예전처럼 너와 함께 지내지 못해서인지 반도 친구도 관심사도, 우리 둘을 제외하곤 하나도 맞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나와는 다르게, 넌 춤추길 좋아했고

“이번 주도 독서실 갈 거지?”

라고 묻는 내 친구들과는 다르게, 네 친구들은 시험 기간에도 꾸준하게

“피방 콜?”

을 외쳐댔다. 또 수업준비를 도우러 교무실에 가는 나와는 다르게 넌 지각 반성문을 쓰느라 교무실에 앉아있었고, 난 방송부라 아침 7시 반까지 등교했지만, 너는 오후 5시 반까지 학교에 남아 춤 연습을 했다. 매일 보는 사이에서 이삼일에 한 번 보는 사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새로 사귄 친구들과 만나느라 일주일에 한 번도 놀지 못할 때도 많았다. 거의 매일 친구들과 찍은 셀카를 올리는 네 인스타를 보며 속 쓰려 하는 날도 많았지만, 나도 나 대로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있었기에 너를 그리 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예전과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여전히 좋은 친구였고, 난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다. 불그스름한 홍조를 띠며 환히 웃어주는 너를 보아하니, 너도 내가 여전히 좋았다. 자주 만나지 않지만 매일 카톡과 전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은 네가 무슨 애인이냐며 징그럽다고 타박하기도 했지만, 친구들이랑 하면 징그러운 게 너랑 하면 하나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너와 조금 더 오래 통화하려 애를 썼다. 이야기하는 쪽은 주로 나였고, 넌 항상 들어주기만 했다. 전화의 주 내용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부터 서로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비밀 이야기 등 다채로웠다. 예를 들면, 여자친구 같은.


    중학교 3학년의 차은우는 조금 착했다. 그리고 매우 멍청했다. 생일날 집 앞까지 찾아와 안개꽃과 케이크, 그리고 커플링까지 건네며 고백하는 여학생의

“ 야 차은우! 너 이거 안 받아주면 너 완전 쓰레기다. 나 돈 많이 썼어.”

당돌한 멘트에, 착하고 멍청한 나는 그 고백을 받아버렸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학생이었기에 사귀게 된다면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렸던 나의 쓰레기 같은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땐 그랬다. 난 사랑을 우정으로 착각하고, 우정을 사랑으로 뒀다. 처음으로 받아본 직접적인 고백과 첫 여자친구라는 설렘에 바로 너에게 전화해 여자친구의 탄생을 알렸고, 축하해줄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떨떠름한 목소리와 조금 딱딱해진 말투로

“어... 은우야 나 좀 피곤한데 나중에 이야기 해줘….”

라며 전화를 끊는 네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맴돈다.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네가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떻게 프러포즈 받았는지, 여자애 표정이 어땠는지, 내 기분이 어땠는지, 무슨 케이크를 사 왔는지 다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걔는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살살 돌리거나 날 피해버렸다. 이야기 듣기 싫어하면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지만, 내 가장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상대가 너라서 나는 계속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내 여자친구 이야기만 나오면 그 큰 눈이 빨갛게 되고 목소리가 뚝뚝 끊어지는데도, 난 계속 듣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이야기를 했다. 나의 연애가 길고 깊어질수록 난 일방적으로 너에게 내 연애사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처음에는 그 이야기가 나오면 말을 돌리던 네가 내 터치를 부담스러워하고, 이내 날 피했다. 휴대폰을 붙들고 사는 애가 내 톡은 맨날 바빠서 못 보고, 급식실에서 내가 앞자리에 앉으면 입맛이 없다며 급식을 다 버리고 가버렸다. 거짓말인 걸 알 수 있었다. 가끔 하교 시간이 겹칠 때는 혼자 있는 힘껏 달려서 집에 가기도 했다. 참 나도 눈치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분명한 네 마음도, 내 마음도 이렇게 늦게 깨닫다니. 


    멍청하고 눈치 없는 차은우는, 있는 힘을 다해 피해 다니는 문빈을 쫓았다. 문빈 뒷모습만 보여도 달려가서 대화하려 들었다. 오기였다. 걔가 날 피하는 이유도 몰랐고, 걔가 자기 친구들과 점점 더 친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만 오면 표정이 굳어버리는 내 친구들을 보며, 우리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항상 발그레해진 볼과 함께 나에게 웃어주던 너도 더는 없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네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날 피하는 이유도 모른 채 너와 점점 멀어져 간 난, 계속해서 널 괴롭혔다. 인사하고, 말 걸고, 장난쳤다.


    너와 완전하게 멀어지게 된 그 날, 난 선생님의 심부름 때문에 교무실에 갔다 오던 중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네가 저 앞에 보이길래 난 가서 어깨동무하곤 말을 붙였다.

“ 빈아 빈아 뭐해? 빈아 나랑 얘기하자!”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려 나를 본 넌, 내 말이 다 끝날 때쯤에야 어깨동무를 알아차렸다. 토끼 눈을 한 채, 내 손을 탁 뿌리치는 너도 나도, 놀랐다. 기분이 확 상했었다. 여태까지 당한 외면과 무시에 대한 감정이, 한번에 훅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굳어진 내 표정과 우리 사이 냉랭한 분위기에 네 친구들은 널 보호하기 위해 

“ 야 빈이한테 작작해. 그만 상처 주라고. 애가 싫다잖아”

“ 그래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

백번 천번 맞는 말들을 나에게 쏟아부었고, 멍청하고 눈치없고 자존심 쎈 나는

“ 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갑자기 얘가 나랑 말도 안 하고 피하기만 하잖아. 그럼 어쩌라고 나한테. 아니 뭐가 문제였는데. 니네가 나랑 얘 떨어뜨려 놓았냐?”

라며 네 친구와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말다툼을 벌였을까, 네가 나에게 생전 처음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만해. 야 차은우, 니가 네 앞에서 여친 얘기만 하는 거 너무 싫어. 내가 싫다는데 왜 자꾸 따라다니는데. 진짜 제발 나 힘들게 하지 말고 사라져줘.”

생전 처음 보는 그 애의 정색과 정말 화난 듯한 목소리, 그리고 빨개진 눈은 모두를 침묵하게 했다. 그것을 끝으로, 우린 남은 중학교 시절 내내 서로 없는 듯 지냈고 멀어졌다.


    사라져 달라는 너의 말과는 다르게 우린 또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가게 되었다. 서로 다른 학교에 지원했지만 같은 학교에 배정받은 것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사귄 여자친구완 헤어진 지 오래였지만, 너와는 아직도 화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학교에서 가끔 스쳐 지나가듯 이라도 너를 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칠 때면, 홍조를 띠며 파드득 고개를 돌리는 너를 보아하니, 너도 눈으로 날 쫓고 있는데 분명했다. 더는 친구처럼 보이지 않는 우리 둘이지만, 너와 함께했던 시간을 그리워했다. 너무 그리울 땐, 어떻게 보면 ‘우리 절교하자!’라는 말은 안 했으니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합리화했지만 난 다시 걔한테 다가갈 수 없었다. 그 애의 친구들도 나를 피해 다녔고, 내게 걔 소식을 전해주고 싶지 않아 했다. 이제는 간간이 올라오는 SNS와 선생님들의 대화 속에서 네 소식을 듣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내가 아는 거라곤, 네가 좋아하던 춤을 전공으로 삼고 있다는 것과 여전히 잠이 많아 지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주저주저하며 선뜻 사과도 연락도 하지 못하다 서로 멀어진 지 2년이 다 되어갈 때쯤, 너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 은우야, 잘 지내? 나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나올 수 있어?’



“ 어 안녕 은우야.. 잘 지냈어?”

“ 그럼, 너도 잘 지냈지? 춤 전공한다며, 정확히 무슨 춤 추는 거야?”

    생각보다 말이 술술 나왔다.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서 그런지 약 2년간 대화하진 않았지만, 아주 자연스러웠다. 먼저 연락한 걸 보아하니, 다시 친구가 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 오랜만에 너를 봐서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가슴에 손을 대지 않아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 음.. 알고 있었구나. 그냥 이것저것... 그래서 나 미국 간다. 다음 주에. 이미 댄스팀 오디션도 다 봤고, 계약도 다 했어. 가기 전에 알려주고 싶은 거 있어서 나와달라고 한 거야. 그때 피해 다닌 거 미안했어. 내가 잘못한 거 다 맞아. 근데 또 내가 사라지라고 하고 화 많이 내서 미안해. 근데 정말 나도 너무 괴로워서, 네 앞에만 서면 눈물이 나서 그랬어. 우린 친구인데, 분명 친구인데, 네가 여자친구 얘기할 때마다 막 화가 나고 슬퍼서 피했어. 그러다가 내가 널 많이 좋아하는구나 알게 됐어. 왜 내가 아닐까. 왜 넌 내 마음 알아주지도 못할까. 난 널 밀어내는데 왜 너는 자꾸 옆에 와서 날 힘들게 할까. 네가 내 마음 다 알아 버리고 어색해질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그냥 그랬어. 널 잃기 싫어서 널 피하다, 널 정말 잃어버렸어. 내가 너무 어렸나 봐. 미안해.. 정말 정말.. 떠나기 직전에 이러는 거 정말 얍삽하고 못된 짓인 거 아는데, 그 전엔 용기가 안 나더라. 내 마음 받아달라는 게 아니야. 사과받아달라는 것도. 그냥 미안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왜 난 그때야 네 마음을 알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난 네가 날 좋아하기 전부터 널 좋아했는데. 왜 난 걔 마음을 알고도 내 마음을 정확히 깨닫기까지 6개월이 넘게 걸렸는지 모르겠다. 왜 그렇게 멍청하고 눈치 없고 자존심 세고 또 둔해서 걔가 나에게 마음을 보여주고 뒤돌아 걸어갈 때까지, 그리고 한국을 떠나고 새로운 땅에 도착해서도 내 마음을 몰랐는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왜 난 널 일찍부터 좋아했으면서 널 사랑한다는 건 이렇게나 더 늦게 깨달았는지, 왜 이렇게 느린 것인지. 이제 알았다. 난, 처음부터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전체 0

전체 67
제목 작가 주제
공지사항
계간은콩 2020 여름호 line up list
계간은콩 |  
계간은콩  
1
화성 소년 X 소년
달문어 | 화성
달문어 화성
2
너를 만난 여름
달함 | 타이베이
달함 타이베이
3
독일영화
| 부산
부산
4
수위 회자정리 거자필반 상
따란 | 인천
따란 인천
5
수위 회자정리 거자필반 하
따란 | 인천
따란 인천
6
스토커
땨빈 | 파리
땨빈 파리
7
수위 그남자 그남자의 사정
망간 | 청주
망간 청주
8
여름
백향과 | 대련
백향과 대련
9
트로이메라이
베디 | 시카고
베디 시카고
10
Hidden: 숨겨진, 비밀의 ; 신비한
분무기 | 산토리니
분무기 산토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