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e in heaven

2020 여름호
작가
유리잔
주제
쿠알라룸푸르




    별명이 유교보이였을 만큼 빈은 엄한 부모님 아래에서 도덕관념 제대로 박힌채 법을 어기면 목숨이라도 날아가는 줄 아는 채로 컸다. 법이고 도덕같은 것은 돈이 안된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은 빈이 스물넷이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업부도에 이어 큰 병이 난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기에 소신이라는 것은 값어치가 안됐다. 그것을 시작으로 어머니와 아버지가 모두 돌아가시고도 삼년이 지난 지금까지 빈은 숱하게 많은 연예인을 협박했고, 돈을 뜯었다. 그러니까, 항상 협박을 하는 쪽이였지 당해보기는 처음이라 이거였다.


"저기요. 남의 사진 맘대로 찍는거 초상권침해에 사생활 침해거든요."

"그게 기자님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협박을 하긴 했는데 양심을 완전히 팔아먹지는 못해서 은우의 말에 빈은 할 말이 없었다. 연말시상식 끝나고 뒷풀이에서 만취한 은우가 담배피는거 찍어다가 돈타먹었던게 바로 작년이었다. 빨리 가. 빈의 고개짓에 방금까지 빈의 허리를 붙잡고 입술빨던 아이돌 A모씨가 모자를 눌러쓰고 줄행랑을 쳤다. 느긋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던 은우가 굉장히 신기하다는 어투도 말했다.


"기자님 남자 좋아하시는구나. 의외네요."

"제가 남자 좋아하는게 그렇게 의외일 것 까지야..."

"아닌데. 되게 의왼데."


    비록 남의 사생활 팔아먹고 살았으나 빈은 이제와서 제 신상이 걱정되서 미칠 지경이었다. 상대는 잘나가는 탑배우인만큼 묻을 돈이라도 있겠지만 빈은 하루벌어 하루먹고사는 월급쟁이였다. 빈은 기자치고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대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는 장점이 있었다. 재빨리 상황파악을 마친 빈이 은우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오늘부러 기자생활 접을거라서. 그럼 안녕히 계십쇼."

"벌써요? 이제 스물여덟살이라고 들었는데. 저랑 동갑."

"빠른이라 따지고 보면 스물일곱인데."


    빈의 말에 은우가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내 그림같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뭐가 웃긴거지. 빈은 불안감과 초조함에 저절로 입가로 올라가는 손을 애써 꾹 붙잡았다.


"에이, 은퇴가 너무 빠르시다. 우리 이제부터 할 일 있잖아요."

"네?"

"이런걸 같은 배를 탔다고 표현을 하는건가?"


    그렇게 말하고는 저를 보더니 두 눈을 접어가며 화사하게 웃는 은우를 보면서 빈은 얼마전에 보았던 은우의 단컷 광고가 떠올랐다. 한 손에는 초콜렛을 든 채로 달콤하게 웃고 있던 은우의 옆에 써 있던 카피.





made in heaven

차은우 문빈





    빈이 몇 번이고 잘 해결되었다고 말했음에도 아이돌 A군은 빈에게 쌍욕을 뱉은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 먼저 어께가 넓다느니 가슴근육이 단단하다느니 인터뷰 하다말고 꼬신게 누군데. 꽤 오래 사귀었던 남자친구랑 헤어진거에 슬퍼할 시간도 없이 빈은 은우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어려운건 아닌데. 그냥 저랑 연인인 척 해주면 돼요."

"배우님 게이였어요?"

"뭐. 비슷한거."


    게이면 게이인거지 비슷한거는 또 뭐야. 아무리 이바닥이 자유롭다지만 대한민국 간판배우의 커밍아웃에 빈은 정신이 아늑해졌다. 전세계 여성들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는구나. 


"잠깐 만났던 사람인데 자꾸 연락이 와서."


    빈은 그렇게 말하며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넘기는 은우의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살짝 찌푸린 미간까지 완벽해서 빈은 질척거리는 은우의 전애인의 마음이 너무나도 이해가갔다. 


"나 거짓말 진짜 못하는데."

"괜찮아요. 빈이씨는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돼요."


    가만히 있는것도 잘 못하지만 빈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애인 연기 한 번 만으로 자신의 과오를 덮을 수 있다면 빈은 키스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은우라서 하고 싶은거 아니냐는 내면의 물음이 들렸지만 빈은 애써 무시했다.


"왜 저에요? 나 연예인도 아닌데."


    그 말에 천천히 핸들을 돌리던 은우가 무심한 얼굴로 빈을 흘끗 바라보았다. 


"빈이씨 겉모습만 보면 충분히 연예인 같아요."

"..........."

"그 안경만 벗으면."


    은우의 말에 얼굴이 새빨개진 빈이 급히 안경을 벗다가 안경대에 볼을 찔렸다. 안경을 가방에 넣고 얼얼한 볼을 매만지고 있자 은우가 웃음기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농담인데."


    이 인간이 지금 장난하나.






    제 옆에 앉아 차를 들이키고 있는 이 남자. 스물에 독립영화 조연으로 데뷔 후 삼년만에 남우주연상을 탄, 곧 서른을 앞둔 현재 명실상부 대한민국 탑배우. 차은우. 


   그리고 그 맞은편에 앉아 빈을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는 저 남자. 아역배우 출신으로 빈 역시 자주 브라운관을 통해 얼굴을 보았던 배우이자, 흰 피부에 얇은 쌍커풀이 한 때 빈의 이상형이었던 남자, 김정우. 빈은 현재 이상형과 과거 이상형 사이에 앉아 다리를 달달달 떨었다. 아니 시발 에블바디 게이야 뭐야. 


"너 틈만나면 촬영 핑계로 한 달씩 연락 두절되는것도.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절대 나 먼저 찾아오지 않는것도. 나 다 참았어."


    화를 참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남자의 손을 보며 빈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정작 당사자인 은우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아무래도 당신 남친은 쓰레기인가 봅니다.


"반년 사귀면서 밖에서 만난적이라곤 한 번도 없고. 너네집 찾아가야 겨우 만나주는거. 그것도 한시간 지나면 피곤하다고 가라고 하는 것도 다 참았다고."


    울분을 토하는 듯 한 글자씩 씹어서 내뱉는 남자의 말에 빈은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기삿거리 캔다고 육개월 가까이 은우의 뒤를 붙었을 때 남자는 커녕 여자도 안만나서(담배피는 장면도 겨우 건진거였다) 혹시 은우가 무성애자는 아닐까 싶었는데 그냥 똥차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랑했는데 나한테 돌아오는게 고작 이거야?"

"정우야."

"내가 얘보다 못한게 뭐야."


    자존심 상한 빈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지만 빈은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최대한 몸을 쭈그렸다. 자신은 현재 저렇게 잘난 애인을 방치한 차은우와 염치없이 바람이 난 죄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빈과 달리 정작 은우는 여유로운 얼굴로 빈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요즘 가슴이 발달된 사람이 좋더라고."

"야!"


    물 잔에 담겨있던 찬 물이 은우의 얼굴에 날라온건 순식간이었다. 조각같은 콧대와 긴 속눈썹을 타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던 빈이 습관적으로 카메라를 찾다가 아차했다. 이 순간에도 빌어먹을 직업정신이 사라지질 않는다.


"쓰레기 새끼."


    눈물 고인 눈으로 은우를 노려보던 정우가 떠나고 난 뒤 적막 속에 은우의 얼굴을 타고 물방울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속눈썹을 깜빡이는 은우를 바라보던 빈이 냅킨을 건내며 조심스레 물어다.


"괜찮아요?"

"밥이나 먹으러 가죠."

"그꼴로요?"


    배고파요. 그렇게 말한 은우가 빈이 건내준 냅킨으로 얼굴을 대강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은우를 따라 카페를 빠져나오며 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야, 이게.





"배우님 아무나 막 만나는 타입이구나. 카사노바?"

"기자님은 기자치고 되게 옛날 사람 같다."


    처음엔 이 남자랑 숨막혀서 어떻게 밥을 먹냐 고민하던 것과 달리 빈은 막상 식당에 온 후 주는 밥과 술을 다 잘먹었다. 꽤나 술기운이 올랐다 싶었는데 테이블에 놓인 술만 벌써 네 병이었다. 밥도 비싼거를 사주더니 술도 비싼거를 착착 시켜주는 은우 때문에 빈은 조금 신이 난 상태였다.


"그 얼굴로 사면 다 그렇게 되나?"

"뭐가요?"

"아니. 막 자기 좋다는 사람 막대하고. 남의 감정은 쉽게 생각하고."


    술이 어느정도 올라온 탓인지 그런지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필터링없이 나왔다. 스스로 좆됏음을 느끼면서도 빈은 입을 멈추지 못했다. 사실 아까부터 은우에게 약점이 잡혀 끌려다닌게 조금 억울했던 터였다.


"내가 그래보여요?"

"네."

"아닌데. 나 하나도 안쉬운데."


    그러면서 푸스스 웃는 은우는 멀쩡해 보여 더 약이 올랐다. 같이 먹었는데 왜 나만취해. 삔또가 상한 빈이 은우의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주었다. 결국 잔에서 흘러내려 잔을 쥐고 있던 손에 묻은 술을 핥아먹는 빈을 은우가 빤히 바라보았다.


"은우씨 사랑 안해봤죠?"

"기자님은 해봤어요?"


    은우의 물음에 빈은 말문이 막혔다. 빈은 연애를 꽤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한 번 마음을 주면 깊게 주는 타입이었다. 사귀고 있던 남자친구와도 꽤 오래 만났으며 아마 은우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잘 만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가라앉은 빈의 분위기에 은우가 조금 굳어진 얼굴로 느리게 술을 삼키다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나 원래 배우가 꿈 아니었어요."

"그럼요?"

"교사."

"진짜 안어울린다. 아닌가. 어울리나. 잘어울리네."


    혼자 말하고 잘어울린다며 빈이 보조개가 파이도록 웃었다. 그런 빈을 따라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은우가 빈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그러는 기자님은요? 기자님은 원래부터 꿈이 연예부 기자였어요?"

"아뇨."

"........."

"나 원래 남 뒤나 캐서 약점잡고 그러는거 진짜 혐오했었어요."

"그럼요?"


    빈은 어느새 술기운에 무겁게 젖은 두 눈을 가만히 깜빡이며 빈 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면 안되는데, 신나서 들이킨 술 때문인지 자꾸 졸음이 왔다. 빈이 애써 두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기 위해 입술을 움직였다.


"저 원래 정치부 기자가 꿈이었거든요..."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자꾸만 두 눈이 감기고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면 안돼, 문빈. 명색이 기자가, 제 약점을 잡은 남자 앞에서 자면 안돼...


"기자님? 왜 그래요?"

"..........."

"문기자님. 빈이씨."


    자신을 부르는 은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빈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후각이 예민한 빈이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낯선 향수 향이었다. 그 다음 피부에 닿는 사부작거리는 낯선 감촉을 느낀 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빈이 이 장소가 호텔임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이불 속을 들쳐보았다. 어께부터 허벅지 안쪽까지 나체의 몸에 잇자국이 가득했다. 눈을 질끈 감은 빈이 절망적인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술을 많이 마신 탓에 필름이 끊겼는지 빈은 드문드문 끊긴 기억을 이어붙이려 노력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어떻게 호텔에 왔는지는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그저 중간중간 제가 은우에게 키스를 조르던 것과 그럴 때 마다 저를 보며 웃던 은우의 탁해진 눈동자 같은게 떠오를 뿐이었다. 


"미쳤지, 미쳤어..."


    자학적으로 제 머리를 내리치던 빈이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이다 멈칫했다. 욱씬거리는 허리를 살피던 빈이 붉게 남은 손자국을 보자마자 어젯밤 기억이 스치듯 머리를 지나갔다.


'불 꺼요.'

'왜요.'

'.....나만 땀 나잖아요.'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그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혼자만 땀에 흠뻑 젖은게 쪽팔려 사정없이 박는 은우의 팔을 간신히 붙잡고 보챘었다. 그 말에 잠긴 목소리로 작게 웃으며 스탠드 스위치를 내리던 은우의 모습을 떠올리자마자 빈의 두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좆됐다. 헤어진지 일주일도 안되서 그것도 저를 헤어지게 한 원인인 남자와 잠을 잤다는 사실에 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던 빈이 이내 귓가를 때리는 물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은우가 샤워부스 안에서 샤워를 하는 모양이었다. 빈이 재빠르게 여기저기 널부러져있는 옷을 줏어입고 지갑과 핸드폰만 겨우 찾아 현관문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갔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택시를 타면서도 빈은 심장이 콩닥거려 죽을 맛이었다.


    그래, 한 여름 밤의 꿈이라고 생각하자. 안 좋게 엮였지만 한 때 자신의 이상형이었던 남자였고, 어차피 자신은 헤어진 상태였으며, 상대가 차은우인이상 오늘 일이 소문이 되어 전남친 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빈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빈이 쥐고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에 뜬 은우의 이름에 빈은 문득 어젯밤 귓가에 스치던 은우의 억눌린 한숨소리나 제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길을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온 몸에 소름이 돋은 빈이 재빠르게 전화를 거절하고 은우의 연락처를 차단했다. 이제 끝이다. 끝. 빈이 길게 안도의 숨을 뱉으며 핸드폰을 잠궜다.





    원나잇스탠드에 대한 부채감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자고 혼자 매너없게 날라버린 빈에게 화가 난 것인지 은우는 계속해서 빈에게 연락을 해왔다. 빈이 제 번호를 차단했음을 아는지 다른 번호로까지 연락을 해오는 은우 때문에 빈은 딱 죽을 맛이었다.


"형, 나 이거 안가면 안돼요?"

"뭐?"

"아니, 나 말고 다른 사람 보내면 안되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말고 빨리 가, 인마."


    자그만치 주연 배우는 차은우에 전남친이 조연으로 출연하는 드라마 현장스케치 스케줄에 빈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저번 달에 별 생각 없이 오케이했던 스스로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다. 그래, 일단 가자. 어차피 인터뷰 딸 것도 아니니 촬영감독한테 맡기고 차에 숨어있을 요령이었다.


    촬영장인 용인까지 가는 내내 빈은 다리를 주체 못하고 달달달 떨다가 운전하는 선배에게 꼬집히기까지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댄 후 팀원들을 먼저 올려보낸 빈이 차체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아, 담배말려. 끊었는데.


"문빈씨."


    차은우와 전남친을 마주치지않을 수 있는 최적의 경로를 짜고 있던 빈이 익숙한 음성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조금 굳은 얼굴로 빈을 노려보던 은우가 작게 한숨을 쉬고 빈에게 걸어왔다. 후리한 차림이었던 그 때와 달리 촬영중이었는지 머리부터 의상까지 풀세팅인 모습이 몇번이나 보았다고 조금 낯설었다.


"혹시 나 차단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를 헤집으며 변명할거리를 찾는 빈을 빤히 바라보던 은우가 핸드폰을 꺼내 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빈이 당연히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쥔 손을 뒤로 숨겼으나 이미 은우의 얼굴을 차갑게 굳은 후였다.


"진짜 차단했네."

".........."

"그 날 나 뭐 잘못했어요?"

"은우씨. 그게 아니라요. 후,"


    제게 성큼성큼 다가오며 묻는 은우에게 밀려 차체에 몸을 바싹 붙인 빈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저를 노려보는 은우의 눈치를 보며 빈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멀리서 스텝이 은우의 이름을 불렀다.


"....촬영 끝나고 얘기좀 해요, 우리. 도망가지 말고."


    답답하다는 얼굴로 작게 한숨을 쉰 은우가 빈에게 경고하듯 말하고 스텝에게 걸어갔다. 그런 은우의 뒷 모습을 보던 빈이 은우를 따라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헤집었다. 





    빈은 구석 기둥에 기대어 촬영을 하고 있는 은우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절절한 눈으로 상대 배우를 바라보는 은우의 턱 뼈가 울음을 참는 듯 도드라졌다. 순간 그 얼굴에서 그 날 밤 빈의 위에서 눈썹을 찡그린 채 이를 악물 던 은우의 상기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저렇게 억눌린 표정으로 내게 입을 맞추고 내 몸을 만졌었지. 무의식속에서도 자꾸만 위로 기어올라가는 빈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던 큰 손과 빈의 가슴 근육을 타고 내려가던 입술 같은 것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빈의 얼굴이 또 한번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려다 실패한 빈이 결국 몸을 돌렸다. 나 먼저 차에 가있는다. 가방을 챙겨 조용히 촬영장을 빠져 나온 빈이 오지 않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비상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죄송합,"


    무심코 비상구 문을 열던 빈이 대낮부터 서로를 에로틱하게 끌어안고 있는 한 쌍의 남남을 보고 황급히 문을 닫으려고 한 순간이었다. 문빈? 어딘지 익숙한 얼굴이라 싶었더니 침으로 범벅이 된 입술로 숨을 헐떡이며 저를 보는 남자는 전남친 A였다. 순식간에 더러워진 기분에 빈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너 먼저 가라."


    신인 배우인지 A와 입술을 부비고 있던 남자가 굳은 빈의 얼굴을 흘끗 보고 고개를 푹 숙인 후 비상구를 빠져 나갔다. 껄렁이는 태도로 제 입술을 슥 닦는 A를 바라보던 빈이 바지에 두 손을 넣은 채 못마땅하다는 듯 물었다.


"뭐냐?"

"보다싶히."


    무슨 문제 있냐는 듯 씨익 웃는 A의 얼굴에 빈이 입술을 깨물고는 머리를 헤집었다. 사귈 때도 착한 편은 아니었지만 꽤 귀엽고 아이같은 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헤어졌다고 백팔십도 달라져버린 A의 모습에 빈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헤어지고 나서도 은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이별을 실감하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전애인의 애정행각을 보고 나니 기분이 끝없이 바닥을 쳤다.


"그래. 나 간다."

"왜. 형도 나랑 자고 싶어?"

"뭐?"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여도 예의를 중요시 여기는 빈은 이런 가벼운 말을 굉장히 싫어했었다. 그런 빈을 알면서도 입가에 비웃음을 건 채 빈을 빤히 바라보는 A의 행동은 명백히 도발에 가까웠다.


"하긴 우리가 속궁합은 좋았지."

"야."

"외로우면 연락해. 솔직히 형 같은 일반인이 나 정도 되는 남자 만나기 어렵잖아."

"........."

"뭐, 그래도 형 몸은 쓸만하니까,"

"자기야."


 

    A의 쓰레기같은 발언에 빈이 멱살이라도 쥐려고 할 때 별안간 비상구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빈과 A가 고개를 들자 촬영장에서 입고 있던 수트차림 그대로 한 손엔 담배각을 든 은우가 서 있었다. 나른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던 은우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여기서 뭐해? 빨리 가자."

"어?"


    이내 정말 연인처럼 빈의 허리를 끌어안는 은우의 태도에 빈은 당황했고, A는 대번에 얼굴을 구겼다. 마치 말도 안되는 것을 봤다는 듯한 얼굴로 빈과 은우를 번갈아 바라보던 A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벌써 새 남자 만났냐, 쓰레기새끼야?"

"그게 지금 네가 할 소리냐?"


    A의 말에 순간 욱한 빈이 주먹을 쥐자 은우가 그런 빈의 볼을 쓰다듬으며 달랬다. 빈은 자연스러운 은우의 연기에 어버버거리는 얼굴로 가만히 그 손길을 받기만 했다.


"빈아, 화내지마. 가자 우리. 시간 아까워."


    이내 자연스럽게 빈의 허리를 감싸고 은우가 비상구를 빠져나왔다. 철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에 멍하니 은우의 품에 안겨있던 빈이 그제서야 은우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뭐에요?"

"이런걸 상부상조라고 하나."

".......허."

"밥이나 먹으러 갈래요?"


    방금까지 연인인척 다정하게 굴더니 금새 바뀐 표정으로 은우가 빈을 보며 웃었다. 빈이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진짜 이번에는 술 자제해야지 몇 번이고 했던 다짐과 달리 어느새 비워진 병만 다섯개였다. 이미 약간 취한 빈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목을 문지르며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또 쓸어넘겼다.


"난 진짜 연애랑 안맞는 것 같아."

"왜요?"

"그냥. 항상 끝이 안좋아서요. 연애를 하지 말아야 하나..."


    조금 안좋았던 가정환경만 빼면 잘난 얼굴과 피지컬에 특별하게 모난 곳 하나 없었으나 이상하게 빈의 연애는 늘 순탄하지 않았다. 빈은 조심성이 많았지만 대신 한 번 마음을 주고 나면 상대가 식기 전까지 잘 변하지 않았다. 그런 빈의 사랑방식이 현대사회의 트렌드와 잘 맞지 않는건지 연애의 끝에 빈은 늘 상처를 받았다.


"나는 어때요."

"네?"

"나도 꽤 잘생기지 않았나?"


    술기운에 조금 상기된 얼굴로 은우가 턱받침을 괴며 다가왔다. 풀린 눈에 억지로 힘을 주고 그림같이 반짝이는 은우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빈이 대뜸 손으로 은우의 이마를 밀어버렸다.


"아."

"들이대지마요."

"왜요?"

"은우씨 너무 잘생겨서 좀 위험해요. 나 게이잖아."

"나도 게인데."


    은우가 못마땅하는 듯 중얼거렸지만 빈은 피식거리며 몸을 뒤로 뺐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두 눈을 꿈뻑거리며 은우를 바라보던 빈이 습관처럼 한숨을 쉬었다. 오늘 여러모로 감정을 많이 소모해서 그런지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술 몇잔에 피곤함이 밀려왔다.


"또 자면 안돼요. 한 번하면 실수지만 두 번 하면..."

"두 번 하면?"

"........"

"빈이씨?"


    마음이 생길 것 같단 말이에요. 끝 말을 억지로 삼키며 빈이 저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빈이 깨어난 것은 새벽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던 빈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은 손에 움찔했다. 은우와 저 모두 맨 몸이었다. 숙취보다도 자괴감 때문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이 번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 때 만큼 취하지도 않았고 필름도 온전한 제정신이었다. 하지만 빈은 저를 원하는 눈으로 저를 만지는 은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도망가면 안돼요. 제게 몇번이고 속삭이는 은우의 목소리에 빈은 달뜬 얼굴을 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기자 생활을 하면서 는 것은 눈치밥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이 나이가 다되어서도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빈은 미칠 지경이었다.


    빈은 고개를 돌려 어느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은우의 잘생긴 눈썹과 예쁜 입술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그림같은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빈이 가만히 손을 뻗었다. 그냥 손만 가져가는 것 뿐인데, 심장이 쿵쾅거리면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손 끝이 은우의 입술에 닿기 바로 직전 멈칫한 빈이 결국 손을 거뒀다. 방금 정말 위험했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침대에서 벗어나기 위해 빈이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은우가 빈의 손목을 잡아왔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잠결이었는지 은우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있었다. 조심스럽게 은우의 손을 떼어낸 빈이 천천히 일어나 조용히 옷을 줏어입었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빈은 거울로 상기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은우의 살과 맞닿은 듯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위험하다. 빈이 입고 있던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 써서 얼굴을 가렸다. 딩동,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로비에 멈추자 빈이 빠르게 호텔을 빠져나왔다.






    새벽의 공항은 한산했다. 빈은 멍하니 여권 속에 꽃힌 쿠알라룸푸르 행 비행기 표를 바라보았다. 그만둔다는 빈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해외로케 한 번만 다녀와달라는 팀장의 말을 빈은 거절 할 수 없었다. 


'왜 내가 가야 하는데요.'

'아니 그쪽에서 너 아니면 촬영 허가를 안내준다잖아.'


    첫 촬영스케치에서도 촬영장에 있는 둥 마는 둥 했었는데 무슨 이유로 빈을 고집하는지 빈을 알 수 없었지만 애써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거 아니여도 충분히 신경쓸 것이 많아 머리가 아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빈은 무심하면서도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자신이 상처받을것 같은 일에는 먼저 발부터 빼려는 습성이 있었다. 몇 번의 연애 실패 경험도 그런 빈의 회피적인 태도를 만드는데 한 몫했다. 그래서 그 후로 빈은 회사에 사표를 낸 후 한달간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음식은 전부 시켜먹었고, 심심하면 게임을 하거나 웹툰을 봤다. 오피스텔에 딸린 헬스장을 가는 것이 외출의 전부였다.   


    말레이시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빈은 자꾸만 두근거리는 심장이 불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라. 빈이 무심코 제 가슴을 퍽퍽 두드리자 옆에 앉았던 남자가 빈을 흘끔 쳐다보았다. 빈이 어색한 얼굴로 애써 웃어보이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창 밖으로 해가 뜨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공기는 습하고 무더웠다. 더위에 유난히 취약한 빈은 불쾌감에 몸부림을 쳤다. 캐리어를 덜덜 끌며 로비를 지나는데 별안간 반대편 손목이 붙잡혔다.


"빈이씨."


    한달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평생 모르고 살다가 고작 두세번 본게 다닌데, 무척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에 빈이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촬영이 힘든지 은우의 얼굴이 조금 상해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왜 전화를 꺼놨느냐고 닥달할 줄 알았는데 아무 말 없는 은우의 얼굴에 빈은 왠지 가슴이 따끔거렸다. 당연한 일인데도 빈은 자꾸만 기분이 가라앉으려고 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은우가 그런 빈의 뒤를 따라오며 말을 걸었다.


"어디가요? 촬영은 오후부터라는데."

"운동하러요."

"운동도 다녀요? 하긴 몸이 좋더라."

"기자는 체력이 먹여살려주는 직업인거 몰라요?"

"운동도 밥부터 먹고 해야죠. 같이 식사하러 갈래요?"

"차은우씨."


    자리에 멈춰선 빈이 은우를 똑바로 마주 바라보았다. 이 번에도 가만히 빈을 바라보는 은우의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던 빈이 피곤함에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시다싶이 저 게이여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가 자꾸 밥먹자 하면 사심 품을 수도 있거든요?"

"사심 품어도 되는데."

"저기요."

"은우씨!"


    빈이 무어라 더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걸어왔다. 은우의 상대 여자 역 배우였다. 길게 한숨을 쉰 빈이 은우에게 눈치를 주었다. 


"가보세요."

".....이따 다시 얘기해요. 제발. 도망가지 말고."


    이내 여자에게 걸어가는 은우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빈이 신경질적으로 쥐고 있던 캐리어를 놓았다.




    촬영 내내 빈은 미친듯이 가라앉는 기분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을 쥔 은우의 큰 손이나 다정한 눈빛 같은 것이 모두 연기인 것을 알면서도 주제넘게 혼자 질투가 나서 미칠 것 같았다. 회식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기애애한 회식 분위기 속에서 빈은 억지로 수저를 입에 넣으며 자꾸만 저를 바라보는 은우의 시선을 모른 척 했다. 


"두 사람 진짜 연인같아. 메이킹도 아주 잘 나오겠어."


    감독부터 스텝까지 잘 어울리는 메인 커플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 웃는 은우의 얼굴을 흘끗거리던 빈이 결국 수저를 놓았다. 옆에서 동기가 벌써 다 먹었냐며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으나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해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알고보니 정말 사귀는거 아니에요?"


    그 말에 박장대소가 터진 옆 테이블을 보던 빈이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를 빠져나왔다. 찬 물로 여러 번 세수를 했음에도 어지러운 머릿속에 빈이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끝나고 얘기하자더니 저 곳에 앉아 있는 은우도 얄미웠고, 정작 은우는 별 생각 없는데 혼자 이렇게 오바하고 있는게 비참했다. 빈이 습관처럼 한숨을 쉬고 얼굴에 물기를 팔로 닦았다.




    회식 장소에 돌아갔던 빈이 무심코 은우가 앉았던 곳을 바라보았다가 멈칫했다. 은우와 은우의 옆자리 모두 비어있었다. 문득 불안한 기분에 휩싸인 빈이 저도 모르게 자리를 빠져나왔다. 제가 갔던 화장실부터 야외 테이블까지 모두 돌아다니던 빈이 멀리서 보이는 두 사람의 인영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골목에서 여자 배우와 끌어안고 있는 남자는 분명 은우였다. 고개를 돌리던 은우가 그 자리에 굳어 이 쪽을 바라보고 있는 빈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당황한 얼굴로 여자를 밀어내고 제게 오는 은우를 보던 빈이 뒷걸음질치더니 이내 시선을 피하곤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은우와 자지 않았다면. 은우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면 은우의 협박을 그냥 무시했다면. 수 많은 가정들이 빈의 머릿속을 스쳤다가 사라졌다. 한참을 달린 후에야 멈춰 선 빈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가만히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날씨 때문인지 자꾸만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빈은 무심하면서도 예민한 구석이 있어서 자신이 상처받을것 같은 일에는 먼저 발부터 빼려는 습성이 있었다. 몇 번의 연애 실패 경험도 그런 빈의 회피적인 태도를 만드는데 한 몫했다. 그래서 발도 담그지 않으려고 했는데, 빈은 이제서야 제가 머리끝까지 잠겨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좆됐다. 난 정말 학습능력이 없구나. 하필 차은우를. 그래 하필 차은우를. 자리에 주저앉아 자책을 하던 빈이 고개를 들었다. 눈 앞에 세븐일레븐이 보였다.


    점원에게 손가락으로 제가 피는 담배를 가리킨 빈이 주머니를 뒤지다가 멈칫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지갑을 챙겨오지 않았다. 순간 영어를 까먹고 머릿속이 하얘진 빈이 머리를 헤집는데, 누군가 그런 빈을 대신해 지폐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빈이 은우의 얼굴을 확인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빈이씨. 얘기좀 해요."

"무슨 얘기요."

"아까 그거 오해에요."


    은우의 말에 울컥했지만 빈이 애써 표정을 숨기려고 노력하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빈의 뒤를 따라나온 은우가 답답하다는 얼굴로 빈의 어께를 붙들었다. 바보처럼 은우가 앞에 있자 또 주체없이 뛰는 심장에 길게 한숨을 쉰 빈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또 혼자 삽질하지말고 이젠 정말 끝내야 했다. 빈이 주머니를 뒤져 늘 가지고 다니던 USB를 내밀었다.


"이게 뭐에요?"

"은우씨 담배피던 사진이요."

"...저번에 입금했을 때 바로 지웠다면서요."

".....이게 정말 마지막 파일이에요."


    최후의 보루였던 USB를 넘기며 빈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제 손에 놓인 USB를 바라보던 은우의 표정이 점차 차가워졌다.


"은우씨. 저 절대로 어디 발설 안할거구요. 이거 USB파일도 드렸으니까 이젠 끝이고요."

"빈이씨,"

"그 날 부로 저희 계약인가 뭔가도 종료된거 맞죠? 제 사진도 알아서 지워주시구요."


  빈이 말을 하다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끝이다. 더 위험해지기 전에 여기서 끊어내는게 맞았다. 빈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다신 보지 맙시다, 우리."

".........."

"은우씨?"


    냉정하게 말하던 빈이 갑작스럽게 붉어지는 은우의 눈가를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울지 않으려는 듯 턱 근육이 꿈틀거릴만큼 힘을 주던 은우가 결국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우는 은우의 얼굴에 황당하면서도 우는 모습도 그림같이 예쁘고 잘생겨서 빈은 말문을 잃었다.


"왜, 왜 울어요."


    빈이 걱정스럽게 물으면서 다가가자 은우가 그런 빈의 손을 꽉 쥐었다. 빈이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고하자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 빈의 손을 더 강하게 쥐어오면서 은우가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끝이에요?"

"............"

"난 이제 시작인데."


   눈물에 젖어 반짝이는 은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그 속에 둘만 존재하는 것 처럼 모든 것이 멀게 느껴졌다. 빈이 두 눈을 가만히 깜빡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뭐라구요?"

"저 빈이씨 좋아한다구요."


    빈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은우가 빈을 품에 끌어안고 어께에 고개를 묻었다. 멀리 보이는 트윈 타워의 화려한 야경과 습한 kl의 공기, 그리고 저를 끌어안은 채 울며 더운 숨을 뱉는 은우까지 모든게 현실 같지 않았다. 빈의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서 심장 소리가 귀에까지 들리는 듯 했다.


"제발 도망가지 마요."


    빈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으며 은우가 젖은 목소리로 빈에게 애원하듯 속삭였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습한 공기에 축축하게 젖은 빈과 은우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epilogue.



    은우는 메이크업을 수정하는 스텝의 손에 얼굴을 맡긴 채 무표정한 표정으로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형 와줘서 고마워. 제게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남자친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빈이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길고 얇은 입술을 보던 은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은우씨, 이번 작품에서는 짝사랑하는 역할을 맡으셨는데요."


    제게 마이크를 내미는 인터뷰어의 목소리에 은우가 빈을 쫒던 시선을 돌렸다.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향해 웃어보이면서도 은우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은우씨 같은 분이 짝사랑을 하다니 비현실적이지만! 만약 작품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애인이 있더면, 어떻게 하실 것 같으세요?"

"하하. 음, 저는요."


    두 눈을 접어가며 예쁘게 웃은 은우가 고민이라도 하듯 턱을 괴었다. 카메라 넘어로 여전히 제 남자친구 옆에 붙어 웃고 있는 빈이 보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은우가 이내 마치 꿈을 꾸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뺏어야겠죠. 아무래도."


    빈이 은우에게 사진을 찍히기 전, 어느 날의 일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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