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라디바리의 달

2020 여름호
작가
어게인
주제
비엔나


스트라디바리의 달

written by 어게인




 "손님 여러분, 비엔나 국제공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좌석벨트 사인이 꺼질 때까지 잠시만 자리에서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선반을 여실 때는..."


 

승무원의 기내 방송이 무색하게 대부분의 승객들은 좌석벨트 초록색 등이 꺼지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좌석 사이 복도에 다닥다닥 붙어 섰다. 그들은 모두 1초라도 빨리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어 안달난 모양새였다.


반면 빈은 그들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약속도 목적도 없는 여행인지라 굳이 이리저리 밀치는 앞뒷사람과 몸을 맞대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창가 좌석에 앉은 빈은 여유롭게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기를 기다리며 기내 창문을 통해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회색의 활주로에 황금빛 햇살이 쏟아졌다. 빈은 햇빛을 받아 노랗게 반짝이는 활주로 바닥을 잠시간 바라보다 이내 간발의 차이로 그늘에 가려진 바로 옆의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비엔나. 

빈. 


자신과 같은 이름의 도시를 빈은 1년 하고도 9개월 만에 다시 찾았다.




빈은 오스트리아를 떠난 후로 단 한번도 비엔나에서의 생활에 대해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마치 비엔나에 간 적도 없는 사람처럼 그 곳에서 있었던 4년을 함구했다. 이제는 세계 투어를 다니게 된 그였지만 정작 그의 연주가 시작된 곳에는 발조차 딛지 않았다.


누군가 비엔나의 생활에 대해 물으면 '재미없더라.' 다섯 글자가 그의 대답 전부였다.




그랬던 그가 비엔나를, 빈을, 제 발로 다시 찾아왔다. 


그 이유에 대해선 빈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빈 자신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는 건지도 몰랐다. 


수하물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24인치 캐리어에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대충 던져넣으며 핸드폰 너머의 민혁에게 그저 '특가항공권이라서, 마침 공연을 쉬는 기간이라서, 요새 보는 드라마에 비엔나랑 관련된 얘기가 나와서,' 따위의 구실을 댈 뿐이었다. 




그 때의 빈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오백만원 짜리 바이올린을 제 목숨처럼 아끼던, 낯선 외국어보다 바디랭귀지가 편했던, 여리고 어렸던, 어리석었던 스무살의 문빈.




스물 여섯의 문빈은 몇 천만원을 웃도는 바이올린을 가볍게 맨 채 유창한 독일어로 입국 심사를 빠르게 통과한 후 공항을 빠져 나왔다. 


 숙소까지 가는 우버를 불러놓고 기다리며, 빈은 처음 비엔나에 도착한 날 공항에서 기숙사로 대중교통을 타고 가며 쩔쩔맸던 과거의 저를 떠올렸다. 한국에 있을 땐 그 시절을 생각하기도 싫었건만, 지금은 신기하게도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연식이 제법 돼 보이는 스틱차가 도착했다. 우버 기사는 느긋하게 운전석에서 내려 빈에게 인사를 건넸다.


"Morgen!"


비엔나에 돌아왔다는 것이 차츰 실감났다.







매일의 하늘은 매일 다르다는데 이 도시의 하늘은 그 때와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회색과 하늘색을 오묘히 섞어놓은 하늘은 비가 내릴 듯 말 듯 아슬아슬한 빛을 냈다. 


차가 속도를 높이자 영화 필름이 돌아가듯 비엔나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빈은 곧장 창문을 내렸다. 이마가 훤히 드러날 만큼 세찬 바람이 불었지만 빈은 개의치 않고 창문을 끝까지 내려 바람을 맞으며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감상했다. 



분하게도 이 도시는 빈이 사랑했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구시가지 중심부의 슈테판 대성당은 여전히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성당 지붕의 다채로운 빛깔과 무늬는 한참 멀리 떨어져있는 빈의 눈에도 선명히 들어왔다.


쇤브룬궁을 지나칠 때 빈은 기어이 참고있던 탄성을 와!하고 뱉을 수 밖에 없었다. 2월의 나무는 초라하기 마련이건만 궁전 정원에 빼곡히 깔린 나무들은 회갈색의 마른 잎을 겨우 달고 있는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빈은 비엔나만이 풍기는 분위기를 사랑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도시를, 그래서 자신과 닮았다 착각한 이 도시를 빈은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늙지 않는 이 오래된 도시를 보며 빈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고르지 못한 돌길에 바퀴가 자꾸 걸려 캐리어가 불규칙적으로 덜컹거렸다.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렇게 길바닥에 돌을 많이 박아넣은건지 빈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국제, 도시면, 캐리어를, 좀, 끌 수 있게, 해놓지!"


돌부리에 바퀴가 부딪혀 캐리어가 들썩이자 빈은 그 불쾌한 움직임에 맞춰 마디마디 짜증을 토해냈다.


"오스트리아 새끼들, 여기에 오는 외국인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 이런 것도 제대로 안해놓고 말이야, 어? 국제도시는 무슨. 서울이 훨씬 낫다. 아익, 계단은 왜 이렇게 또 많아아!"


빈이 제 허리께까지 오는 커다란 캐리어를 잡아끌며 허공에 대고 성질을 냈다. 갈 곳 없는 분노가 입김이 되어 초여름밤의 비엔나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 공짜로 여기까지 온 게 어디야.'


빈은 공항부터 기숙사까지 개고생을 하며 온 탓에 바닥이 나버린 긍정을 겨우 긁어모아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냈다.






빈이 합격한 국립 대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대로, 올해 빈을 포함하여 신입생을 몇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중에서도 먼 나라에서 온 입학생은 한 자리수 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이런 바늘구멍을 통과한 빈은 확실히 재능이 있었다. 빈을 포함한 주위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빈의 바이올린은 보통 음대입시생들이 쓰는 모델에 비해 저렴한 보급형이었지만, 그는 보급형의 뭉툭한 소리로도 예민한 음을 내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빈의 모교에서 비엔나 국제 음대에 합격한 학생은 개교 이래로 빈이 유일했다. 전국 예고 순위에서 항상 중위권에 머물렀던 빈의 학교에서 비엔나 국제 음대 합격생이 나오자 학교 재단에서 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단은 오스트리아로 가는 비행기 삯은 물론이고 빈이 음대를 재학하는 전학기 동안의 학비를 후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실상 후원이라기보다는 학교 홍보를 위해 빈의 이름과 얼굴이 여기저기 쓰이는 것에 대한 개런티 지불에 가까웠다. 


그렇게 빈은 제 이름과 얼굴을 팔아 비엔나로 날아왔다. 


그마저도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기회는 아니란 걸 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빈은 학교 팜플렛과 현수막에 제 얼굴이 나부낀다는 사실에 쪽팔림보다는 알량한 자부심을 느꼈다.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될 제 앞날이 기대되고 설레었다. 비엔나에서의 대학생활은 자신의 인생을 뒤집어놓을 특별한 일들로 가득할 것이라고 빈은 확신했다.















노잼.

여기는 노잼도시다.


빈이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지 한달만에 남긴 비엔나에 대한 감상이었다.


정규수업, 보충수업, 바이올린 학원, 바이올린 과외, 음대 입시 과외. 독일어 과외.

이 지옥의 루틴으로 살던 한국에서의 생활과는 정반대로 여기선 모든 것이 자율이었다. 강의는 일주일에 고작 열 몇시간이 전부였고,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는 식이었다. 대학생들은 원래 다들 이렇게 사는 건지, 그래서 다들 그렇게 술만 주구장창 퍼마시는 건지 빈은 궁금해졌다.


사실 빈도 술만 주구장창 퍼마시는 걸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성인의 자유로움을 만끽하고 싶어 동기들을 따라 펍과 클럽에 출근 도장을 찍기도 했었다. 유럽에 잘생긴 남자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내심 기대했는데, 헛소문이었다. 잘생기긴 개뿔, 팔과 다리에 털이 부숭부숭하게 난 털복숭이들 투성이었다. 간혹 멀끔한 놈들이 있었지만 아시아인을 혐오하는 미친놈이거나 반대로 아시아인만 골라 꼬시는 미친놈, 둘 중 하나였다. 


미처 새벽으로 물들지 못한 밤, 빈은 홀로 클럽을 빠져나와 선선한 여름 밤공기 사이를 가로질렀다.





빈이 환상을 품었던 대학생활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학교에도, 기숙사에도, 클럽에도. 4년어치 로망은 한달만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빈의 비엔나 라이프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올린이라도 마음껏 켤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지루하지는 않을 거라고 빈은 생각했다.



대다수의 강의는 이론 위주였고, 실기 강의도 학생 모두가 완곡할 기회를 받기에는 강의 시간이 촉박했다.


물론 바이올린 전공생에게 주어진 연습실이 따로 있긴 했다. 하지만 햇병아리 동양인 신입생이, 게다가 싸구려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습실에서 연주를 하려면 웬만한 무신경함 가지고는 불가능했다. 외국인들은 남들이 뭘 입던, 뭘 하던 신경 안 쓴다던 소리는 이 연습실 안에선 개소리에 불과했다. 


빈도 어디가서 무신경함으로는 뒤지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저를 콕콕 찌르는 눈초리들과 따가운 비웃음이 부유하는 공간에서 연주에 집중을 할 정도의 무신경함을 갖고 있진 못했다.



기숙사에서 바이올린을 켰다가는 쫓겨날 게 분명했고, 길바닥에서 연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길바닥!

빈의 머리에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빈은 게으른 편에 속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게 생기면 곧장 실행에 옮기는 선택적 게으름뱅이였다. 본인이 흥미를 느끼는 분야에 있어선 누구보다 빠릿하게 행동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빈은 바이올린 버스킹을 생각해내자 본인의 천재같은 아이디어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근질거리는 손가락이 현 위에서 춤추고 싶다고 아우성 쳐 대는 통에 빈은 곧장 장소 물색에 나섰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역시나 슈테판 광장이었다. 성당을 배경으로 연주를 하는 모습이 멋있을 것 같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니 벌이도 꽤나 쏠쏠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뜬 마음으로 광장에 도착한 빈은 금세 맘을 바꾸었다. 그 곳은 인파가 많은 만큼 소매치기도 많고, 이미 여러 버스커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 제 바이올린 소리가 사람들 귀에 제대로 들리기나 할 지 의문스러웠다. 빈은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바이올린 케이스를 메고 마땅한 연주 장소를 찾으려 한 블럭 뒤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메인 광장 거리에서 고작 한 블럭 거리일 뿐인데 골목은 꽤나 한산했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 지나가는 행인들을 모두 합해도 스무명 남짓했다.


하지만 빈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제 연주가 사람들이 북적이는 광장 앞에 떠도는 소음 중 하나가 될 바에는 이 곳에서 음악이 되는 게 훨씬 나았다. 게다가 골목 중앙에 자리잡은 미니 분수대가 메인 거리 못지 않게 거리의 감성을 북돋았다. 




마음에 드는 장소를 발견하자 빈은 당장 연주를 시작하고 싶었다. 빈이 분수대 앞에 자리를 잡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자, 몇 시선들이 빈을 훑었다.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리고 턱을 가볍게 대자 빈의 뒷목엔 기대에 찬 소름이 살짝 돋았다. 빈은 심호흡을 한번 후-하고 뱉은 후 팔을 올려 활을 현 쪽으로 갖다대었다. 현과 활의 경쾌한 마찰음을 시작으로 바이올린 현 위에서 손가락이 춤추기 시작했고, 뻑뻑했던 마음에 선율을 들이붓자 그 동안 참아왔던 갈증이 시원하게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주를 하니 입꼬리 새로 저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빈은 보는 사람들도 즐거워질만큼 행복한 얼굴을 한 채 산뜻이 활을 놀렸다. 







빈이 만들어내는 밝은 음률은 절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분수대 앞에서 연주를 시작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았건만 빈의 연주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배는 많아진 것 같았다. 활짝 열린 바이올린 케이스에 수십개의 동전이 날아들었다. 한 번 활을 들면 청중을 곡에 빠져들게 하는 이 거리의 악사에게 이국의 행인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관객들 중에는 휘파람을 불어 찬사를 보내는 이도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기쁘고 뿌듯했다. 이제야 이 노잼도시가 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광장 뒤쪽 골목 미니 분수대 앞에서 연주하는 게 빈의 방과 후 일상이 되었다. 못해도 일주일에 세 번은 발도장을 찍는 빈을 알아보는 팬도 생겨났다. 학교에서도, 밖에서도 매일같이 바이올린을 켜는데도 질리지가 않았다. 빈은 작은 틈도 남기지 않고 제 일상을 바이올린으로 가득 메웠다. 빈은 이 도시에서의 삶이 점점 좋아졌다.





여느 날처럼 빈은 미니 분수대 앞에 걸터앉아 활에 송진을 바른 후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읏차!"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일어난 빈은 어깨에 바이올린을 올리고 송진이 잘 발린 활을 우아하게 휘둘렀다.


 날이 더워져 길에 서서 빈의 연주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줄긴 했지만 오늘만큼 없었던 적은 연주 첫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있던 관객들마저 연주 중간에 동전을 던지고는 제 갈길을 가버려 연주가 끝날 즈음엔 한 사람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빈의 연주가 끝나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관객이 박수를 치며 빈의 바이올린 케이스에 20유로짜리 지폐를 넣었다. 대부분 주화에, 지폐는 5유로짜리밖에 받아보지 못했던 빈은 제 바이올린 속에 생소한 파란 지폐를 넣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까만 흑발에 흰 피부.  

빈은 순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남자는 동양인 같기도, 서양인 같기도 했다. 머리색이나 생김새는 동양인 같은데, 피부나 키,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가 동양인이라고 단정하기엔 애매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빈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빈은 어쩐지 남자를 쳐다볼 수 없어 재빨리 고개를 숙여 바닥으로 시선을 끌어내렸다. 다리밖에 보이지 않지만 빈은 남자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말을 걸어야하나?

같이 웃어야하나?

아직도 쳐다보고 있을까?


안절부절 못하며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빈의 시야에 물자국이 들어왔다.

한 방울, 두 방울, 회색 보도블럭을 짙게 물들이더니 이내 투툭투둑 소리를 내며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악! 안돼!"

빈은 자신이 젖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등을 굽히며 바이올린을 제 품에 끌어 안았다. 그리고 바이올린 케이스에 담긴 20유로 지폐와 동전 몇 개를 한 웅큼에 쥐어 주머니에 쑤셔넣곤 서둘러 바이올린과 활을 넣었다.


빈이 바이올린 케이스 뚜껑을 잠그는 동시에 남자가 빈을 잡아끌었다. 남자가 빈의 손을 잡고 달리자 빈도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바지가 흠뻑 젖어들어 다리가 무거웠지만 이상하게도 남자와 달리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 빗 속을 내달릴수록 묘하게 상쾌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꼬질해진 운동화의 앞코를 통해 빗물이 들어와 양말이 축축해졌는데도 빈의 얼굴엔 보송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자는 한 카페의 차양막 안으로 빈을 이끌었다. 비가 와서인지 카페 입구엔 [CLOSED] 팻말이 걸려있었다. 차양막에 비가 세차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와 빈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랐다. 


적막속에 울리는 빗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공기를 더욱 축축하게 만들었다. 빗물에 젖어 갈래로 뭉친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또옥 똑 떨어졌다. 


여름인데도 빗줄기가 제법 서늘했다. 비에 푹 젖은 터라 온 몸이 차게 식었지만 남자와 마주잡은 손만은 따뜻했다. 손과 손 사이에 빗물이 흘러 미끌거렸다. 하지만 남자는 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빈은 여전히 남자를 쳐다볼 수 없었다.


퍼붓는 빗줄기로 시선을 돌리자 여름의 흙내가 담긴 비냄새가 풍겨왔다. 남자가 빗물에 젖은 머리를 털자 비냄새는 이내 향수향이 미미하게 섞여있는 살냄새로 덮였다. 후각이 예민한 빈은 비에 젖은 달큰한 냄새에 몸에 열기가 오르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퍼져 빈의 혈관을 타고 다니며 체온을 높이는 것만 같았다. 


헐떡이던 숨은 진즉 가라앉았다. 하지만 남자와 빈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빈은 용기를 내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긴 속눈썹에 가닥가닥 작은 물방울이 맺혀 빈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남자의 앞머리에 간신히 달려있던 빗방울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미간으로 떨어졌다. 미간으로 떨어진 빗방울은 잘 빠진 콧등을 지나 코끝을 스치곤 윗입술산에서 넓게 퍼져 남자의 입술이 반들거렸다.


빈이 이 일련의 과정을 감상하는 동안 남자의 시선 또한 빈에게 닿았다. 맞붙은 손바닥이 뜨끈해졌다. 눈빛이 오가는 와중에도 둘 중 누구도 서로의 손을 놓는 사람은 없었다.



소낙비를 흠뻑 맞으니 꽤나 쌀쌀했다. 빈이 추위를 이기려 몸에 힘을 주다 잠깐 긴장을 푸니 소름이 오소소 돋으며 몸이 짧게 부르르 떨렸다. 


추위에 달아오른 볼. 빗물이 붙은 속눈썹 때문에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는 두 눈. 잘게 떠는 어깨.

남자는 빈을 빤히 바라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Wollen Sie bei mir gehen?"


빈은 남자를 마주보았다. 선뜻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낯선 사람의 집에 덥석 따라가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대로 남자를 보낸다면,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질문에 대답이 없자 남자는 빈이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입술을 가로로 길게 꾹 누르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집, 갈래요?"









욕실에서 울리던 드라이기 소리가 멎자 은우는 준비해뒀던 코코아에 갓 데운 우유를 부었다. 핫초코에서 몽글몽글한 김이 올라왔다. 동시에 욕실 문이 열리면서 뒷꽁무니에 몽글몽글한 수증기를 단 빈이 나왔다.


"옷 라디에이터 위에 올려놨어요. 그래도 완전히 마를 것 같진 않아요."


"아이, 괜찮아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떻게 딱 한국인을 만나가지고 이렇게 도움을 받네요."


빈의 말에 남자는 엷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한국인은 아니에요. 독일 사람이에요."


독일 사람이라는 남자의 말에 빈이 놀라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

"독일 사람이에요? 한국말 엄청 잘하시네요! 얼굴도 한국인처럼 생기셔가지구 한국분인 줄 알았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독일 사람인데, 교포에요.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다 한국인 교포. 그러니까 실은 반은 한국인 맞아요."


"아~ 교포~ 그래서 한국말을 잘 하셨구나...아! 이름은 뭐에요? 이름도 안 물어봤네!"


제가 실수했다는 듯 눈을 찡긋거리며 묻는 빈에게 남자는 다정함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Felix Cha에요. 그냥 Felix라고 불러요. 이름이 뭐에요?"


"오 펠릭스~ 멋있다. 저는 문빈이에요. 문빈."


"여기랑 이름이 똑같네요."


"네?"


"Wien이랑 똑같네요. 이름이."


"네 맞아요. 오스트리아 빈~ 문빈~"

빈이 팔을 휘적이며 장난스런 제스처를 취하자 펠릭스가 살짝 웃었다.


"잘 어울려요. Der Mond von Wien. 비엔나의 달. 진짜 잘 어울려요."

Felix는 빈의 이름을 음미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곱씹었다.


"펠릭스는 한국 이름 없어요 한국 이름?"


"..한국 이름 있어요. Mein Mittel Name."


"미들네임이 뭐에요 그래서?"


"안 가르쳐줘요."

 

"왜요?"


"빈은 Mittel Name 없잖아요. 문 빈. 두 글자."


"그거랑 뭔 상관이에요?"


"나는 빈 이름 두 글자 밖에 모르는데 빈은 내 이름 훨씬 많이 알잖아요."


"에? 아니 그게 무슨,"


"봐요. F.E.L.I.X.C.H.A. 여덟 글자나 알고 있잖아요."


"뭐야! 알파벳으로 하면 나도, 나도, 잠깐만, 엠 오 오 엔, 비 아이 엔, 일곱자에요!"


빈이 음이탈까지 내며 흥분하자, 남자가 재밌다는 듯 소리내어 웃었다.

"아하하, 그렇네요. 알려줄게요. 은우에요. 한국 이름. 차은우."


"은우. 차은우. 이름 진짜 예뻐요."


"하하. 고마워요. 빈도 예뻐요."



예쁘다는 말에 빈의 귓볼이 달아올랐다. 

이름 얘기인 것을 알면서도 빨개진 스스로가 부끄러워 빈은 빨리 가봐야한다는 핑계를 대곤 대충 옷을 갈아입고 도망치듯 은우의 집을 나왔다.


빈은 아직 축축한 소매를 손바닥께로 끌어올려 화끈거리는 얼굴을 꾹꾹 눌러가며 비가 그친 비엔나 거리를 걸었다. 


'쪽팔려. 나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


잰 걸음으로 걷던 빈은 순간 Felix란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펠릭스. 펠릭스 차.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빈은 걸음을 멈추고 폰을 들어 검색창에 [Felix Cha]를 쳐보았다. 역시,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라 했더니, 업계에서 한창 핫한 목재악기공예사였다. 특히 현악기 제작에 일가견이 있어 전설의 장인 스트라디바리의 후예라는 황송한 칭호도 따라 붙곤 했었다. 


그가 만든 악기는 돈만으로는 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장인 정신을 내세워 제 악기를 사람들의 연주를 직접 듣고 악기의 울림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음악가들에게만 악기를 판매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일각에서는 그런 그의 행동이 유난이라며 비난을 했지만, 그것이 그의 인기 요소 중 하나였다.


빈은 놀라운 마음에 입을 떡 벌렸다. 

'설마. 그 사람? 에이 아니겠지. ' 


설마했던 빈의 폰 화면에 뜬 위키피디아 인물 소개에 떡하니 "Felix Eunwoo Cha"라고 풀 네임이 적혀있었다. 


인생의 첫 두근거림을 안겨준 남자가 제 분신과도 같은 바이올린 제작가라니, 빈은 이를 운명이라 생각했다.













운명의 다른 말은 착각, 김칫국, 아님 뭐 망상?

빈은 이 정도 유사성이면 국어사전에 유의어 등재를 해야하는 게 아니냐고 분수대 천사상에게 짜증내듯 물었다.


그 날 이후 은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일. 열흘 하고도 하루 더. 어감도 안 좋은 십일일 째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운명은 고사하고 제게 관심조차 없다는 의미라는 걸 빈은 인정해야 했다.



빈은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바이올린을 어깨에 올렸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있어 빈은 제 기분이 연주에 묻지 않도록 눈을 감고 연주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음률이 빈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연주가 끝나고 빈이 살포시 눈을 뜨니, 은우가 인파에 섞여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바이올린 케이스에 동전을 넣는 사람들 새로 은우가 다가와 20유로 한 장을 꺼냈다.


"스탑! 스탑 스탑!"

빈의 다급한 외침에 은우가 빈을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펠ㄹ, 은우는 평생 공짜로 들을 수 있게 해줄게요. 관람 무료!"


빈의 뜬금없는 파격 제안에 은우가 웃으며 답문했다.

"진짜요? 평생?"


"아 당연하죠. 나도 나중에 은우가 만든 바이올린 쓸건데. 나한테 팔아주면 이 정도야 뭐."

"지금은 안될 것 같은데요?"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단칼에 거절당하니 빈은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그니까 나중이라고 했잖아요. 나중에."

"알았어요. 나중에. 그럼 지금은 나랑 놀래요?"









관람 무료 쿠폰이 꽤 쏠쏠했는지 은우는 매일같이 빈의 공연을 보러 광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매번 빈의 연주가 끝나고 함께 식사를 하거나, 카페를 가거나, 혹은 한 두잔의 술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둘은 빈의 연주가 없는 날도 만나기 시작했다. 서로 시간이 빌 때면 둘 다 가보지 못했던 비엔나의 명소들을 구경하러 다녔다. 성당은 물론이고, 궁전, 광장, 공원 등 가리지 않고 돌아다녔다. 빈은 은우와 함께 있어 그 명소들이 더욱 감명깊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와의 추억이 쌓여갈수록 이 나라를,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김없이 연주가 끝나고 은우와 공원에서 산책하다 나란히 앉은 벤치에서 빈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우리 말 편하게 할까..요? 우리 친구잖아.요."

조그만 목소리로 요 자를 붙인 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은우가 대답했다.


"친구? 나랑 빈은 친구 아닌데."


예상치 못한 은우의 말에 빈이 섭섭함을 느끼며 대꾸할 거리를 찾는데,


"Du bist jünger als ich. Ich bin ein Jahr älter als du."

(너 나보다 어리잖아.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아.)


갑작스런 은우의 말에 빈이 바보같은 소리를 내었다.

"에?"


"친구 아니고 형아. Call me 형아."


"와~한국인 어디 안간다. 바로 형 소리 들으려고 하는 거봐."


"어? 내가 형인데 반말?"


"아니 솔직히 한국식으로 할거면 빠른도 쳐야지~ 나 1월 26일! 어? 빠른 중에 빠른! 그니까 나는 니 친구! Freund!"


빈의 말에 은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Bist du mein Freund?"

(너 내 Freund야?)


"어."


"Willst du mein Freund sein?"

(너 내 Freund 되고 싶어?)


"그래!"


당당한 빈의 대답에 은우가 신이 난 듯 크게 웃었다.


"왜!"


"아니 좋아서. 나도 니 Freund 하고 싶어."


말을 마치고도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은우에게 빈이 쏘아붙였다.

"왜 자꾸 웃는데!"


"Freund가 무슨 뜻인지 알아?"


"친구!"


"그냥 친구 아니고, 남자친구. 애인."


은우의 말에 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빈의 반응에 은우는 빈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며 빈의 손을 잡았다. 


빈은 코앞에 다가온 은우의 얼굴을 차마 밀어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아이, 뭐, 친구든 애인이든, 서로 말 놓자고!"


"그래. 내 애인 문빈."


은우가 깍지를 끼며 빈의 손을 고쳐잡았다.









빈이 은우의 집에 살림을 차린 지 벌써 햇수로 3년이 넘어가던 때였다. 빈은 소파에 기대어 앉아 멜로디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뭐해?"


"그냥. 이 노래로 오디션 볼까 하고."



졸업을 앞둔 빈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동기 중에 이미 단독 콘서트 여는 애도 있었고, 오케스트라에 입단한 애도 있는데, 빈만 그냥 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아무 제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락 오는 곳은 전부 한국의 오케스트라일 뿐, 빈이 생각했던 유럽 오케스트라는 캐스팅은 커녕 오디션 합격 소식조차 없었다. 빈은 아무도 찾지 않는 스스로의 재능이 의심스러웠다.


학교 생활을 하며 쌓여갔던 것은 은우와의 추억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넓고 잘 하는 사람은 너무 많았다. 빈의 세계가 넓어질수록 그 속의 자신은 점점 작아졌다. 차원이 다른 경쟁 세계 속에서 버티며 빈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회의감과 열등감이 곰팡이처럼 번져갔다. 



학교에 다닐수록 빈은 특별한 줄만 알았던 자신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빈은 분명히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빈의 재능이 금이라면 빈과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였다. 빈은 스스로가 제일 반짝이는 보석인 줄로만 알고 살았는데, 이 곳에 있으면 자신이 그저 노란 광택이 도는 돌멩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어중간한 재능도 재능이기에 빈은 끓어오르는 열등감을 누르며 오디션을 보러다녔다. 바이올린을 그만두는 것은 빈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오디션 하나만 된다면, 진짜, 딱 하나만. 





신은 잔인하게도, 빈의 가장 간절한 순간에 가장 큰 아픔을 선사했다.



빈이 입학 때부터 입단을 목표로 하고 준비했던 비엔나의 오케스트라 오디션장에서 한 심사위원이 빈의 연주에 평가를 내렸다.



"잘하는데, 특별함이 없어요."




예술적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다 믿고 노력해왔던 제게 "사실 그건 네 착각이야"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빈은 이제 더 이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연주를 시작하려고 할 때마다 제 바이올린은 괴상한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어중한한 재능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게 재능인지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이 나라가 낯설게 느껴졌다.



















좌절감은 불씨가 되어 빈의 마음을 태워갔다. 감정의 불길은 빈을 빠르게 빈을 집어 삼켰다. 새카맣게 타버린 마음의 잿가루가 매캐하게 날려 가장 가까이 있던 은우에게로 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


"뭐가 아냐. 딱 보니 무슨 일 있는데."


"됐어. 말해도 몰라."


"그래도 말해줘."


빈은 잠시간 망설이다 끈질긴 은우의 눈빛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줄 알았어. 유학도 오고. 학교에서 장학금도 주고."


"그럼. 우리 빈이 대단한 사람이지."


은우의 말에 빈이 실소를 뱉으며 대꾸했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 나 같은 거 보고 대단하다 하니까 웃기다."


"너 같은 게 뭐야. 왜 말을 그렇게 해."


"나 같은 게 어떤 거냐면, 병신같이 지 잘난 줄 알고 살다가, 큰 물 와서 자기가 얼마나 재능없는 놈인지 깨닫는 사람을 나 같은 거라 하는 거야. "


"빈아,"


"뭣도 아닌 재능 가지고, 진짜로 자기가 잘하는 줄 착각하면서 살다가! 진짜로 잘하는 너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지금에서야 안 멍청한 놈이라고!"


빈을 집어삼킨 화마가 결국 빈을 모조리 태우곤 은우에게 불길을 내뿜었다.


"그런 말 하지마.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지금 슬럼프 온 거야, 빈아."


은우가 위로를 건넸지만 빈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제 할 말만 이어갔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바이올린 밖에 없는데, 그나마 잘 한다 소리 들은 게 바이올린이 전부인데, 지금 와서 그만 둘 수도 없는데 이제 바이올린 켜기가 겁나. 또 그저 그런 연주할 것 같아서. 차라리 아예 못했으면 욕심도 안 부렸고 여기까지 안 왔을텐데. 멍청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칭찬에 내가 진짜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다른 거 할 기회도 다 차버렸어."


"빈아 다른 걸 왜 해. 지금까지 열심히 했잖아."


"그래. 열심히만 했지. 잘해야지. 잘."


"너 잘해. 너 잘한다고."


"너는 몰라. 너는 천재잖아."


"아니야 빈아. 나도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게 아니야. 노력한거지."


"음악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야. 재능이 노력을 이겨. 나 같은 놈이 아무리 해도 타고난 것들은 절대 못 이긴다고!"


"빈아. 너도 타고났어."


"나한테 특별한 게 없다잖아 아무리 연주를 잘해도 씨발 그 특별함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없다잖아!"


"빈아 너는 특별해. 내가 알아."


진심이 담긴 눈동자였지만 이미 새까매진 마음이 빈의 눈을 가려 은우의 마음을 볼 수 없었다.


"너는 몰라."


눈을 감고 귀를 닫아버리는 빈에 은우도 짜증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나는 몰라. 모르겠다."


짧은 정적 끝에 빈이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게 내 행복이었는데 이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아."


빈의 말에 은우가 반문했다.

"나랑 있어도?"


"..."


"나랑 있어도 행복하지 않아?"


"...니 옆에 있으면 내가 너무 초라해."


빈의 말에 은우가 고개를 떨구었다.


"...집에 가고 싶어. 여기 괜히 온 것 같아."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들조차 후회하는 듯한 말에 은우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은우가 나가자 빈은 홀로 방안에 주저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빈은 비엔나에 오기 전을 떠올렸다.

거기선  자신이 특별했고, 잘났고, 빛났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아.'



은우를 사랑했지만 은우 옆에 있기엔 빈 자신의 말대로 스스로가 너무 초라했다. 저 하나만 바라보기에도 벅차 은우와의 미래를 꿈꿀 수 없었다.


빈은 눈물을 쏟으며 캐리어에 자신의 짐을 모두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은우의 작업 테이블에 [미안해] 라고 적힌 쪽지 한 장을 두고 나왔다. 그리고 은우에게서 오는 모든 연락을 무시했다. 기숙사를 찾아와도 없는 척하거나, 졸업 때문에 기숙사생이 미리 빠진 방에 들어가 지내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빈의 졸업식이 열렸다.



은우를 제외하고는 찾아올 사람이 없는 빈은 재빨리 졸업장을 챙겨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쳤다. 빨리 기숙사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내일이면 떠날 이 도시에 작별인사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빈의 손을 누군가 잡아챘다.

누군지 쳐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Gratulire."

(축하해.)


은우가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빈이 가만히 있자 은우가 빈의 가슴팍에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빈은 은우를 처음 만난 날처럼 고개를 숙였다. 있는 힘껏 울음을 참았다.


"기다릴게."


돌아오지 않을거야. 기다리지마.

빈은 울음과 함께 대답을 삼켰다.


빈은 은우에게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 채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세계 무대를 누비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됐지만 빈은 여전히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평범하지만 피나는 노력으로 커버친 케이스 정도로 자신을 평가했다.


한국에 갓 돌아왔을 무렵, 빈은 국내 유명 오케스트라의 제의도 마다하고 몇 개월동안 바이올린은 손에도 대지 않았다. 민혁은 빈이 정말로 바이올린을 그만 두는 줄 알았다고 그 때를 회상했다. 빈은 정말 바이올린을 그만 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기엔 빈은 순수하게 바이올린을 너무 좋아했다. 없는 재능으로라도 덤벼보고 싶었다. 특별함이 없다면 평범한 연주라도 하고 싶었다. 빈에겐 재능 대신 애정이 있었다. 바이올린에 대한 애정. 자기 연주에 대한 애정. 남들이 뭐라건 바이올린을 켤 때면 행복해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


빈은 6개월만에 바이올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는 손끝이 터지도록 매일을 연습했다. 처음엔 한국 오케스트라, 그 다음은 일본, 지금의 독일 오케스트라에 합류하기까지 빈은 미친 사람처럼 바이올린에 매달렸다. 여전히 그 특별함이란 게 뭔지는 몰랐지만,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을 넘어선 끝에 지금의 자리에 오르게 된 빈이었다. 


그런 그에게 비엔나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트라우마와 같은 곳이었다. 세계 각 곳을 누비며 바이올린을 켠다고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트라우마는 앞에서 마주봐야한다고, 빈이 즐겨보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말했다. 그 날, 빈은 비엔나 행 티켓을 끊었다. 편도로.










광장 뒷골목은 예전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은우와 매일 같이 들렀던 카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악기점이 들어서 있었다. 


[Der Mond von Wien]


전면 유리창 위에 작게 달린 간판엔 익숙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빈이 가까이 가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니 바이올린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바이올린 옆에 놓인 명패엔 'Der Mond von Stradivari'라 적혀 있었다. 스트라디바리의 달. 이 바이올린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빈은 이끌리듯 가게의 문을 열었다. 경쾌한 우드벨 소리가 울렸다.


"Guten Tag."

익숙한 목소리가 뒤를 돈 채 인사를 건넸다.


"Tag."


빈의 목소리에 익숙한 인영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다. 오랜 침묵이 이어졌다.



"Wie viel kostet die ausgestellte Geige?"

(저기 전시되어 있는 바이올린은 얼마에요?)


빈이 먼저 침묵을 깨고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Das ist nicht zum Verkauf. Ich suche nach ihrem Besitzer. "

(판매용이 아니에요. 바이올린의 주인을 찾고 있어요.)


"Jemand Besonderes, der den Klang spielen kann, den ich will."

(제가 원하는 울림을 낼 수 있는, 특별한 사람.)



이 깐깐한 장인은 여전히 자신만의 고집을 지키고 있었다. 은우답다,고 빈은 생각했다.


"Wollen Sie es spielen?"

(한 번 연주해볼래요?)



은우가 친히 빈에게 바이올린을 가져다 주었다. 매일 관리를 한 건지 먼지 한 톨 쌓여있지 않았다. 빈은 떨리는 손으로 바이올린을 받아들었다. 현이 팽팽하게 진동했다.


빈은 어떤 큰 무대에 설 때보다도 긴장한 모습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은 편해졌다. 은우 앞에서 연주하고 있노라니, 비엔나에서 처음 연주를 시작했던 때가 떠올랐다. 빈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연주가 끝나자 은우가 박수를 쏟아내며 말했다.


"듣고 싶었어." 


은우의 말에 빈이 손에 바이올린을 든 채 은우를 껴안으며 대답했다.


"응. 나도 보고 싶었어."


은우는 빈을 힘껏 안으며 빈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 소리가 너무 듣고 싶었어. 너만 낼 수 있는 소리."


그제서야 빈은 깨달았다. 자신은 특별하다는 것을. 자신의 특별함을 못 알아보는 사람들의 말에 스스로 눈을 감아버렸다는 것을. 껍데기라고 생각했던 게 빈만의 특별함이었다는 것을. 


그걸 은우는 처음부터 알아봐줬다는 것을. 은우 옆에 있으면 초라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것을.




플랫과 샵으로 가득 차 단조로웠던 빈의 마음에 드디어 밝은 멜로디가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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