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heil

2020 가을호
작성자
작성일
2020-10-24 22:48
조회
19


UNHEIL






차은우는 대뜸 오피스텔에 찾아왔다. 사랑하면 화도 날까? 두 눈 멀뚱히 뜨고 문빈은 대답한다. 화가 나서 사랑하지는 않을 거 아냐. 지루한 예능에서 채널 위로 두 개 올리니 눈물범벅 된 남자주인공이 나타난다. 나도 널 사랑하고 싶어. 사랑까지 너와 하고 싶어. 물기 머금은 고백. 사랑 고백. 전원 버튼을 누르니 짧은 종료음과 함께 브라운관 화면이 닫힌다.


“왜 껐어.”


“재미없어.”


“한창 눈물 쏟고 난리던데.”


“구질구질해.”


“사랑은 원래 구질구질하게 해.”


“나는 그러기 싫어. 맘 아플 것 같아.”


“그럼 내가 해주지 뭐.”


뭐를. 구질구질한 사랑. 나한테? 응, 너한테. 문빈은 그저 웃는다. 차은우가 사랑에 구질구질. 그냥 웃겼다. 어울리지도 않은 옷 갖다 입은 것 같아서, 웃음이 났다. 차라리 나보고 하라 그래.


버스 타고 집 돌아가던 길, 차은우는 제 어깨 기댄 문빈 내려다보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우리 나중에 달로 여행이나 가자. 버스 내부 설치된 작은 화면에서는 달 관광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상관관계를 너무 늦지 않게 눈치챈 문빈은 그냥 웃는다. 그리고 뒤늦게 말한다. 저거 실제가 되면 너무 늦을 것 같은데. 차은우는 그 말 듣고도 창밖을 응시했다. 창가 앉은 사람은 문빈인데, 바깥에 미련이라도 떨구는 듯 그렇게 바라본다. 넌 나한테 늦지 않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아주 한참 뒤에, 내릴 때 즈음이 되어서야 돌아온 조용한 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벨 누른 차은우는 문빈의 손등 간질인다. 일어나라는 뜻이었다.


굉장히 우습게도, 그날 두 사람은 길었던 5년의 동거를 끝냈다. 짐 하나씩 눌러 담으며 헛웃음이 터졌다. 알고 지낸 3년, 동거한 5년 질리게도 긴 8년의 기간. 이상한 관계가 되어 비틀린 상태로 동거는 끝난다. 누구 하나 고백한 적 없었음에도 서로에게 고프다는 듯 몸을 섞었다. 물론 키스도 했다. 웃겼다. 뭐 하나 남들처럼 굴러가는 관계는 아니었으니. 나란히 앉았던 버스에서조차 다정한 연인 사이의 대화였다. 8년이 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허무하게 각자의 집을 찾아 떠난다. 모든 기억에 진득히 눌러앉아 떼어낼 수도 없는 그런, 그런 8년.


“왜 왔어.”


“보고 싶길래.”


“나를? 왜?”


“이유가 있나.”


동거를 끝낸 후, 차은우는 종종 문빈의 오피스텔에 찾아왔다. 이상한 말들 늘어놓으며 천천히 제 흔적 남기기도 했다. 동거하던 집을 내놓을 이유가 없었다. 이럴 거면 다시 합쳐. 하루는 이따금 약이 올라 소리친 문빈이었다. 차은우는 그 말에 고개를 저어냈다. 그건 안 돼. 이유는 여전히 모른다. 여전히 제집 드나드는 듯 익숙하게 문 여는 차은우가 있을 뿐이다.


차은우는 참 이상한 놈이다. 그런 차은우를 항상 쫓는 문빈도 이상한 놈. 주변인들은 당연히 두 사람이 오랜 기간 연애한 연인인 줄 안다. 고백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문빈은 8년을 그저 이상한 관계로만 정의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이상한 놈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옆 꼭 붙은 서로 또한 이상한 놈으로 받아들였고.


고백은 안 했다. 그러나 동거하기 전부터 몸은 섞었다. 우리 차라리 같이 살래. 묻는 것도 아닌 말에 문빈은 그저 고개 끄덕였다. 그게 낫겠다.


같은 집에 살면 이득은 많았다. 집세도 반, 생활비도 반, 이런저런 이야기 공유하면 외로움은 덜고, 몸 섞는 사이에 장소 가릴 필요도 없다. 생활패턴도 얼추 잘 맞춰가니 더할나위 없는 룸메이트고. 그러니 5년이란 시간을 함께 살았을 것이고. 이득은 많은데, 문득 이 관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룸메이트라기엔 방만 공유하는 것이 아니고, 친구라기엔 조금 뒤틀렸고, 연인이라기엔 고백이 없었다. 문빈은 그래서 물었다. 우리 왜 같이 살지?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답이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문빈은 고개 끄덕였다. 동거의 시작도 차은우가, 끝도 차은우가. 문빈은 눈앞에 놓인 선택지에 손 올릴 뿐이었다.


“빈아, 너 이제 요리 잘 해?”


“이제 먹을 만큼은 해.”


“아쉽네.”


“나도 먹고는 살아야지.”


“빈아, 근데 그거 타.”


어느새 검은 연기 뿜어내는 프라이팬. 문빈은 급히 불을 껐다. 너 신경 쓰여서 기름 안둘렀어. 차은우는 웃었다. 내가 할게.


우린 어쩌다 사랑을 했을까? 야채 썰어넣은 계란 말던 차은우는 고개 돌린다.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는 질문. 문빈은 식탁에 앉아 지독하게 쫓아오는 시선에 입술 달싹였다. 사랑이란 걸 하기는 했나. 사랑이라 정의할 수 없는 기간에 멋대로 이름 붙였다. 조금 뒤 돌아오는 말. 나긋한 목소리. 빈아. 응? 말이 틀렸잖아. 어쩌다 사랑하고 있냐 물어봐야지. 누가 보면 우리 헤어진 줄 알겠어. 문빈은 한참 벙쪄있었다. 그리고, 일정한 간격으로 나뉜 계란이 식탁 위 올라올 때 깨닫는다. 여전히 우린 연인이 아니다. 이 관계 또한, 사랑이라 정의할 수 없다.


차은우는 타고나길 이성적이게 타고나서, 깊은 관계를 맺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서 바라본 관계가 아닌, 차은우의 입장에서. 득이 될 사람과 해가 될 사람 정확하게 짚어냈다. 곁에 둬도 될 사람, 뭐 그런 식으로. 웃는 낯으로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제 곁 내어주지는 않았다. 종종 벽을 두고 대화하는 것 같다는 감상 또한 있기야 했다. 그게 큰 파장을 일지는 못했지만. 그런 차은우를 처음 만난 문빈은 자다 일어나 반장을 불렀을 때였다.


유난히 잠이 많아 차은우의 뒷자리 앉았다. 차은우의 자리는 교실 중앙에서 조금 앞이고, 문빈은 그렇게 교실 중앙에 앉는다. 그 자리 앉는다 하더라도 많은 잠이 순식간에 사라질 일도 없었다. 덕분에 점심시간 다 되어서야 눈 비비며 일어난다. 책상 위 놓인 쪽지. 아무리 깨워도 안 깨서 간다 빵 사다 줄게 기다려. 함께 어울리던 재윤의 글자체였다. 확인 후 다시 둘둘 만 담요 위 엎드리려던 찰나 앞자리 앉은 등이 눈에 들어왔다. 얜 밥 안 먹나? 뒷모습이 너무 반장의 것이라서 문빈은 반장, 하고 부른다. 뒤돌지 않기에 가디건 챙겨 입은 등 두어번 손가락으로 톡톡. 반장 밥 먹어. 그제서야 뒤도는 반장. 밥 먹으러 가자. 차은우는 여전히 졸린 듯 반쯤 엎드린 문빈의 손 붙잡아 급식실로 향했다.


너 요즘 차은우랑 친하게 지내더라. 응 착하던데 잘생기고. 다른 애들 말 들어보면 좀 쎄하다던데 안그래? 어, 야 완전 아냐 성격 진짜 좋아 애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재윤은 더 이상 말 덧붙이지 않았다. 유난히 문빈 앞에서 웃는 차은우를 몇 번 봐서 말 덧붙일 수가 없었다. 소문이랑 다른 놈이겠거니,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고삼. 다 함께 광기에 차 나사 빠진 로봇 된 또라이들의 집합. 재윤은 그 사이 또라이의 정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 구기종목은 못하는데. 예민한 고삼들 데리고 나와 반 대항 경기를 하겠다더니, 연습한 적도 없는 농구를 시키기에 문빈은 울상이었다. 차라리 계주하면 잘할 수 있는데. 입술 비죽이는 문빈, 그 옆에서 웃고 있는 차은우. 어느새 두 사람은 세트가 되었다. 문빈 행방 찾으려면 차은우에게, 차은우 행방 찾으려면 문빈에게. 그러나 누구도 차은우에게 문빈의 행방 묻지 못했다. 이는 또라이의 정의를 찾은 재윤의 이야기와 동일한 이유다.


농구 못해! 도망 다니는 문빈 팔 붙잡는다. 할 사람 너 말고 없어. 결국 유니폼 입고 코트 뛰게 된 문빈은 생각보다 꽤 열심히 날아다녔다. 기본 운동신경이 되는 사람이니까. 다들 손뼉 치고 웃는 와중에, 코트 위 차은우가 재윤의 눈에 들어왔다. 분명 공을 쫓는데, 동시에 문빈을 향한 시선이 있었다. 이게 뭐지. 공보다도 문빈에게 먼저 향하는 시선. 문빈이 움직이면 뛰고, 뛰면 걸었다. 멍하니 그 시선 좇는데, 어느 순간 차은우의 움직임이 변한다. 시선 끝에 넘어진 문빈이 있었고. 발목 접질린 문빈 단숨에 등에 업고 코트 빠져나가는데, 이상하게 그 눈빛에서 살기가 언뜻 보였다. 알고 보면 착한 애 그런 정의가 아니라, 차은우는 문빈에게 다 퍼주고 있는 놈이었다. 재윤은 그날 알았고, 구태여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문빈도 현 상황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아서.






차은우는 재수 없게 굴었다. 공부도 잘했고, 눈치도 빠르고, 열심히 하는 것마저도 잘했다. 틈 조금을 안 줄 것처럼 굴어서 유난히 전설처럼 통하기도 했다. 역시 차은우. 그 말이 익숙하기까지 했으니.


재수 없는 바보 차은우. 문빈은 종종 그렇게 불렀다. 이유는 큰일이 아니었다. 집 가던 길에 덥다 하니 아이스크림 잔뜩 쥐여준 차은우 때문이다. 여름 햇빛에 다 녹아 손이고 팔이고 흐르는 아이스크림에, 손에 들린 검은 봉지에는 다 녹았을 아이스크림이 잔뜩이었다. 그러게 우리 집 앞에서 사도 된다니까. 덥다길래 당장 먹여주려고 했지. 차은우의 대답에 웃음이 나왔다. 바보 같아. 허리 굽혀 웃어대는 문빈 손에는 여전히 녹아 흐르는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넌 진짜 여자친구 생기면 아까울 것 같아. 그날 집에 드러누워 했던 이야기. 듣는 차은우의 표정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정해서 잘 챙겨주고, 신경도 써주고, 성격도 좋고 그리고 잘생기기까지 했어. 여자친구 사귀기 전에 데려와. 알았지. 장난처럼 엄포를 뒀다. 문빈에게 차은우는 정말 누구에게도 아까운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차은우는 한 번을 소개한 사람이 없었고 만난다는 소문 들려오는 사람도 없었다. 문빈과 만나는 8년 내내 그랬다.


“근데 넌 나 사랑해?”


“응 사랑해.”


“그럼 나도 사랑을 해야 해?”


“천천히 해.”


“뭐를?”


“날 사랑하는 거.”


난 백 년도 넘게 너 사랑할 수 있거든. 문빈은 볼 긁적이며 생각해본다.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도 연인이 아니라면 대체 어떤 관계인지. 밤을 함께 보내고, 같은 침대 위 눈 뜬 우리는 어떤 관계로 정의가 될 것인지. 침대에서 일어나니 허리가 뻐근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차은우는 재수 없고 바보 같은 사람이다. 본인 혼자 알고 있는 감정으로 사랑을 말했고, 구태여 타인의 사랑까지 원한다고는 말하지 않으면서, 본인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이라는 듯 구는 그런, 재수 없고 바보 같은 사람이다.


바다 가고 싶다. 브라운관 가득 채운 푸른 바다에 문빈이 내뱉은 말이었다. 흘리듯 아주 조용하게 툭 내뱉은 말. 차은우는 늦은 아침을 만들어 두고 당장 떠날 수 있는 바다를 검색했다. 어느 바다가 좋아? 사람 많은 곳? 없는 곳? 알면서 꼭 물어보기까지 했다. 식탁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반찬 하나씩 문빈 앞으로 밀어두기도 했다. 식사 끝마칠 때 되면 어느새 한쪽에 치우친 그릇들이 있다.


“드라이브 가자. 바다로.”


“지금?”


“가고 싶다며.”


“너 할 일 없어?”


“없어.”


결국 바다 가고 싶다는 말은 씨가 된다. 인적 드문 모래사장 위 주저앉았다. 3년 전 쯤, 재윤이 마시던 술잔 내려두고 물었다. 차은우 아직도 너한테 다 퍼주냐? 아직도 친한지, 여전히 연락하는지, 여전히 같이 사는지 그런 것들은 이미 전제가 된 상태의 물음이었다. 다 퍼준다니? 재윤은 술이 약한 편이었다. 맨정신에 가까운 문빈이 되물으면 재윤은 술술 불었다. 걔 예전부터 네 이름만 대면 난리였잖아 몰라? 너 배고픈 것 같으면 빵 사다 주고 너 먹어보고 싶었다는 매운 떡볶이도 먹어주고 걔 너한테만 그랬어. 걔가 얼마나 너만 쳐다봤는지 모르지. 수평선 바라보다 문득 떠올랐다. 지금도 그랬다. 바다 가고 싶다 흘리듯 한 혼잣말에 홀랑 데리고 온 걸 보면. 두 눈 깜빡이다 눈치챈다. 이렇게 퍼준다는 뜻이었구나. 본인의 일상을 퍼준다는 뜻이었구나. 본인의 일상 모든 곳에 제 감정을 묻혀두고, 열심히.


재수 없는 바보 차은우가 아니라, 사랑 앞에 호구 같은 차은우다. 틈만 나면 사랑한다 했던 것들은 그저 본인의 흘러넘치는 마음이었으리라. 가만히 고개 돌리면, 이미 제게 닿아있는 시선이 있다. 문빈은 그 시선 마주 봤다가, 다시 고개 돌린다.


“나 할 일 생각났어.”


차은우는 무엇이라도 듣겠다는 듯 나긋한 시선 끌어다 놓았다.


“집에 가야 할 것 같아.”


“응 데려다줄게.”


“지하철 타고 갈래.”


“그럼 나도 지하철 탈게.”


“넌 차 있잖아.”


“너는 지하철에 있잖아.”


문빈은 가만히 차은우 바라보다, 이내 고개 끄덕인다. 그래, 데려다줘. 생각해보면, 차은우를 이겼던 적은 없다. 차은우 앞에서 꽤 이성적인 척 굴어도, 온갖 감정 쓸어 담아 안겨주는 걸 이겨낼 힘은 없다.


할 일도 없으면서 일찍 집에 돌아왔다. 몇시간을 운전한 차은우는 여전히 웃는 낯짝 들이민다. 제멋대로 변덕 부리는 모습에 화낼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재수 없는 바보 호구. 나 사실 할 일 없어. 제법 비장한 어투로 이야기했다. 신발 벗지도 않은 차은우는 현관 앞에 서 웃었다. 알아. 그런데 왜 모르는 척 했어? 모르길 바라던 거 아니었어? 여전히 신발 신은 채, 차은우는 웃는 얼굴이었다. 집에 오고 싶어서 그럴 명분을 만든 거잖아 난 너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어.


차은우는 갑자기 나타나고, 갑자기 사라진다. 바다에서 문빈을 집에 데려다놓고는 집에 돌아가겠다며 사라졌다. 그걸 붙잡을 명분도 없다. 집에 가지 말라고 붙잡으면, 딱히 할 일도 없다. 하던 것처럼 몸을 섞고 늦은 아침에 눈 뜨고, 차은우의 손길 닿은 밥을 먹는 것. 친구가 하는 일은 아닌데, 연인의 그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사랑이라 정의내리지 못했다. 이젠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도 없다. 그냥, 아니면 아닌 거라고, 그냥, 그냥 사랑이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만다.






넌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사랑한다고는 하면서 사귀자, 연애하자, 그런 말은 왜 안 해? 취중 진담 그런 거였다. 갑자기 쓰린 속에 알코올 들이붓고 싶은 날이 화근이었다. 할 일도 딱히 없고, 적당한 취기를 원했다. 안주와 소주 담은 비닐봉지에 물방울 맺힐 때 즈음 집에 도착한다. 사랑 이야기 담아낸 영화 한 편 틀어놓고, 홀로 소주만 들이부었다.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기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새 중반부 지나가는 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갈등이 두터워지며 사랑싸움이 일고 있었다. 사랑하면 화도 날까? 차은우의 물음이 문득 떠오른다. 알딸딸해진 정신에, 차은우가 겹치기 시작했다.


엔딩크레딧 올라가는 화면 바라볼 때는 이미 기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태였다. 냅다 핸드폰을 들어 차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릴 이성이 남아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신호음 몇 번 지나지 않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응, 빈아. 잠시 망설이고 있으면 다시 한 번 이름 부른다. 빈아 무슨 일 있어? 술기운 잔뜩 오른 문빈은 그냥 오소소 쏟아버렸다.


넌 왜 나한테 고백 안 해? 사랑한다고는 하면서 사귀자, 연애하자, 그런 말은 왜 안 해? 너 나 가지고 놀아? 사랑하는 것도 다 거짓말이야? 사랑한다고 할 거면 연인이 된 상태에서 해야지 재수 없는 바보 차은우야. 넌 진짜 재수도 없고 호구 같아. 바보 같아. 진짜 짜증 나게 왜 고백만 안 해? 다른 건 다 하면서.


한참 듣던 차은우는 말이 끝나고도 잠시 침묵을 이었다. 괜히 괘씸해진 문빈이 전화를 끊으려 할 때가 되어서야 이름 부른다. 빈아. 적당한 높낮이와 적당한 물기 품은 목소리. 순식간에 취기가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슨 말을 한 거야. 뒤늦게 입을 틀어막아봐야 이미 감성들은 줄줄 새어나간 후였다.


“확신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네가 날 사랑하는지?”


“아니.”


“그럼?”


“네가 날 사랑하는지. 난 확실해. 말했잖아. 백 년도 널 사랑할 수 있다고. 백 년 뿐이겠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도 사랑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날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너 바보야? 그걸 왜 기다려?”


“갑자기 네가 힘들어지면 어떡해. 이게 사랑인지 우정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하면, 나는 너한테 사랑을 줄 수 밖에 없는데 너는 그걸 힘들어 할 거잖아. 난 너 힘들게 하면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취기는 이미 달아난 상태였다. 어쩌면 고백이었다. 수백 번도 넘게 사랑한다 이야기 들었으면서, 단지 기다리겠다는 말로 확신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슴께가 빠르게 울렸다.


“확신이 생기면 언제든지 말해줘. 원하는 대로 해줄게. 확신이 생길 때까지도 사랑해줄게.”






문빈은 며칠 째 두통을 앓았다. 차은우에게서는 연락이 없었고, 그게 괜히 또 괘씸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시간 보내다 가던 사람이 아플 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프다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얼굴이 원망스럽다. 두통은 며칠 째 일상을 괴롭혔다. 밥 챙겨 먹을 기력도 나지 않고, 발 내디디면 울리는 골에 집 안 청소도 되질 않았다. 얼얼한 뒤통수 붙잡고 침대 한 번 내리쳤다. 차은우 때문이 분명한 두통이다.


침대에 누워 재윤의 번호를 찾았다. 핸드폰 화면 몇 번 넘기니 금세 통화 화면 띄워진다. 여보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야, 하고 부른다. 잠시 정적, 이어지는 조심스러운 물음. 너 어디 아프냐? 재윤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내려놓고 다시 천장 바라보며 눕는다. 잠깐의 움직임에도 머리가 띵한 게, 세상이 어지러웠다. 끊겠다는 말도 없이 끊은 걸 보면 재윤은 곧 집으로 올 것이었다. 눈 몇 번 깜빡이고, 문자로 비밀번호 남겨둔다. 천천히 두 눈 감으면 어느새 진득한 어둠 속에 스민다.


수평선 보이는 바닷가였다. 모래사장과 바다의 끝자락 맞부딪히는 경계 따라 걷는 지루한 바닷가. 왼발은 까슬한 모래가 밟히고 오른발엔 잔잔한 파도가 간지럼 태운다. 그러다 돌 밟고 주저앉으면 급히 신발 신겨주는 손길이 있다. 아프지 마. 올곧게 꽂히는 시선에 고개 돌렸다. 그리고는 급히 일어나 신발 신은 채 걸었다. 들이치는 파도에 신발은 이미 다 적셨다. 문득 몸을 돌려 천천히 수평선 가까이 걸으면 제 몸 건져낸다. 온 몸 축축하니 늘어지는 채로 모래사장 위 앉혀졌다.


내가 널 사랑해. 제발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화가 나고, 널 아프게 한 것들은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어. 그게 나일지라도, 그러고 싶어. 이런 나를 사랑해? 너만 보면 화가 나. 나는 이렇게까지 너를 사랑해. 사랑해. 손등에 볼 얹고 두 눈 감은 차은우의 얼굴이 보였다. 꿈이었구나, 생각할 때 즈음 천천히 눈을 뜬다. 눈꺼풀이 온통 불에 데인 듯 뜨겁다.


알아서 할게. 어. 됐어. 겨우 고개 돌리면 통화 중인 차은우의 손등이 보인다. 재윤이는? 목소리가 볼품 없이 갈라졌다. 텁텁한 목소리에 차은우는 말릴 틈도 없이 통화를 끊어버렸다. 미안. 그리고 예상외의 말이 들려온다. 어지러운 머리에 대뜸 사과의 말을 건넨 차은우. 문빈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괜히 이불 속 파고들고만 싶어졌다.


“앞에서 만났어. 걔한테 전화했다며.”


“아, 맞아.”


“미리 올 걸, 아픈데 혼자 둬서 미안.”


문빈은 그저 두 눈 깜빡인다.


“아프면 전화하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내가 너 짝사랑하는 사이라고 하자.”


“어?”


“그럼 언제든지 부를 명분은 생기잖아.”


여전히 꿈을 꾸나 싶었다. 사랑한다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어도, 차은우의 저런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술이 몇 번을 달싹이고, 짙은 속눈썹이 몇 번 떨렸다. 검은 두 눈동자는 어느새 물기 잔뜩 머금은 채였다.


내가 왜 차은우한테 전화를 안 했지? 문빈은 결국 이불 속 파고 들어가 고민했다. 왜 아픈데도 연락이 없고, 찾아오지 않는 차은우를 원망했는지. 괘씸함에 전화번호부 즐겨찾기 해둔 번호도 넘겨두고 재윤에게 전화를 걸었는지. 이불 속 더운 공기가 열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무슨 사이가 되었다고 전화를 망설였나. 전화해서, 거절당할 사유에 대해 겁이라도 났었나. 어지러운 머리로 고민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차은우는 천천히 이불을 걷어낸다.


“약 먹고 누워.”


“너 왜 왔어?”


“너 아프니까.”


“앞에서 어떻게 만났는데?”


“일단 약부터 먹고.”


“대답 먼저 해. 앞에서 어떻게 만나? 너 집 앞에 있었어?”


응. 앞에 있었어. 들어와서 너한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 사랑한다고 하면 너무 가볍게 보이진 않을까, 그렇다고 사랑한다고 말 안 하기는 싫고. 그랬는데 전화하더라. 너 아프다고. 그래서 그냥 들어왔어. 내 고민보다 네가 먼저니까. 이제 약 먹어줄 거야? 눈꺼풀이 뜨겁다. 금방이라도 온 몸이 녹다 못해 타들어 가 재도 남지 않을 것처럼 뜨거웠다. 두 눈 천천히 감으면, 뜨거운 열기에 가둬진 듯 굴었다. 데인 것처럼 뜨겁다. 억지로 눈 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숨 하나하나에 열기가 섞여 터졌다. 야 차은우. 응. 짜증나 너 재수도 없고 호구 같아. 응. 짜증나 진짜. 응 사랑해. 문빈은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 덮었다. 짜증나, 나도 너 사랑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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