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아다에서 구하소서 상

2020 가을호
작성자
은또
작성일
2020-10-24 22:54
조회
17

*TS 소재. 이름은 같지만 둘 다 여자입니다 🙂



다만 아다에서 구하소서

차은우x문달이



01.

"오늘 끝나고 엽떡 조질 사람?"

"아, 전 패스."

"헐. 진심?"



그럼 구라겠어여. 윤미가 연기 훅 내뿜으면서 대꾸하는데 영 신뢰가 안 갔다. 캡사이신 귀신 주제에 엽떡을 마다하다니 믿을 수가 없는 거다. 아오, 저 싸가지. 싸가지 없는 윤미새끼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나를 보고도 혀나 낼름 내민다. 언니 또 때리면 나 또 기도실 갈 거에요. 그 말에 얌전히 손가락 풀었다. 지난 주에 엉덩이 한 번 걷어찼다가 윤미가 수녀님한테 꼰지르는 바람에 반성문 열 장 썼는데, 그 후로 기도실이라면 치가 떨린다. 약아빠진 새끼... 우리 둘의 만담을 보다가 마찬가지로 다 피워가는 꽁초를 난간에 지져 끄던 명주언니가 낄낄 웃었다. 놔둬, 쟤 요새 연애하느라 바쁘잖아. 이건 또 뭔 염병같은 소리야?



"니 연애하냐?"

"미친~ 관심 좀."



백일도 넘었거든요? 핸드폰에 시선고정하고 나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딱히 반응 없는 걸 보니 박민영도 알았던 모양이다. 나만 몰랐냐? 물어봤더니 고개 끄덕끄덕. 윤미가 이 놈 저 놈 만나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지만 지들끼리만 알고 있었다는 게 괜히 서운해서 시비나 털었다. 어떤 놈인지 구경 좀 하자. 한참 신나게 카톡하다가 핸드폰 뺏긴 윤미 기지배가 펄펄 뛰었다. 아, 내놔요! 그러거나 말거나 대화창 쭉쭉 올려보니까 내용 가관이다.



"모텔? 이 기지배가 미쳤나."

"이 언니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니가 나이가 몇 갠데 모텔을 가!!! 펄펄 뛰는 내 옆구리를 마른 손가락이 대차게 꼬집었다. 조용히 해, 여기 담배 소굴인 거 들킬 일 있냐. 아무래도 이 언니는 돌았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막내가 사귄지 백일 된 남친이랑 모텔 들락거린다는데 말리지도 않는다. 아무리 어, 우리가 꼴통이긴 하지만 말이야. 코리안 유교걸로서 지킬 게 있는 거 아닌가. 동생이 막나가면 적당한 주먹으로 계도를 좀 해 줘야지 가만 있어? 어이가 없어서 한 마디 하려는데 윤미가 하는 말에 대가리가 뎅 울렸다.



"내가 이 오빠 따먹을라고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뭐?"



내가 방금 뭘 들은거냐. 갑작스러운 섹밍아웃에 적응 못하고 귀 후비적댔더니 김명주는 또 웃기다고 깔깔 웃는다. 문달이 표정 좀 봐! 나보고 닥치라더니 지 목소리가 더 크다. 그보다 옆에서 실실 쪼개는 박민영이 더 얄밉다. 죽을래, 했더니 어깨나 으쓱 한다. 아다니까 우리가 봐 줘요. 그래, 그러자. 미친 이 여자들이 진짜?



"다들 해 봤다는 거야? 윤미 너도?!"

"아, 장난? 고닥교 올라오기 전에 마스터했져."



근데 언니 진짜 아다에요? 푸풉. 윤미 기지배 지랑 똑같이 생긴 어피치 이모티콘마냥 웃는 게 짜증나서 공중발차기 한 번 날렸더니 김명주 뒤로 쏙 숨는다. 그래봤자 언니보다 머리 하나 더 커서 가려지지도 않는 주제에 졸라 깝친다. 쟤 안 그렇게 생겼는데 은근 청학동이잖아. 완전 열린 문빈 닫힘. 놀리듯이 하는 말에 눈을 부라렸다. 아니거든?! 우겨봤자 돌아오는건 존나 얄미운 얘냬걔댼? 차마 선배 얼굴에 주먹 날릴 수는 없어서 씩씩대고만 있는데 박민영이 와서 어깨를 두드렸다. 언니, 좀 늦어도 괜찮아요. 화이팅. 와, 이건 진짜 열 받았다.



"딱 대라, 한 달 안에 하고 온다."

"엑. 할 사람도 없음서."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맞는 말이라 더 짜증났다. 야, 배고프다고 아무 놈이나 주워먹으면 탈 난다. 맞아요 언니, 우리 학교 유일의 아다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이 여자들이 건수 하나 잡았다고 열심히 놀려댄다. 젠장... 사실 내가 남들보다 그런 쪽으로 둔감한 건 사실이다. 연애를 안 해 본건 아니지만 스킨십 쪽으로는 영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만 하느라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샐 틈이 없어서 그렇다, 고 생각하기엔 박민영도 나랑 똑같은 루트 탔는데 이 기지배는 대체 언제?! 여태까지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었고, 그만큼 별 쓰잘데기 없는 건데도 막상 이렇게 되니까 승부욕 문제였다.



"안 한거지 못 한건 아니거든?! 아무나 찝어, 당장 꼬실테니까."

"진짜요?"



박민영이 씩 웃는데 갑자기 존나 불안해졌다. 쟤가 겉은 착해보이는데 사실 우리 중에 제일 또라이라 가끔 보면 무서울 때가 있다. 저 쪼그만 머리통 안에서 무슨 생각이 굴러가고 있을지 몰라서 긴장하던 중에 민영이가 박수를 딱 쳤다. 아, 씨발 깜짝이야! 놀라서 펄쩍 뛰는 윤미는 싹 무시하더니 내게 딜을 건다.



"그 언니 있잖아요. 언니네 반 전교 1등. 뭔 브라 이름이었는데."

"비비안?"

"맞다."



머리속에 반짝 떠오르는 얼굴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깩 질렀다. 빛이라곤 본 적 없는 것 같은 허여멀건한 피부에 머리통 반을 가리는 커다란 안경, 화장기 없는 얼굴과 염색 한 번 안 해본 긴 생머리. 삐빅 난이도 별 세 개. 무난의 극치다. 악랄한 박민영한테서 이 정도 조건이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오케이 딜! 나중에 말 바꾸기 없어. 확신에 찬 내 목소리에 윤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뭘 보고 그 언니가 별 세 개라고 확신하는데요. 기지배야 딱 보면 모르냐? 애가 순진하잖아. 아니 언니 내 말 들어봐요 윤산하가 그러는데,



"됐고, 나 걔 꼬시러 간다. 얼마 걸래 십?"

"깔끔하게 이십 가죠."

"말 바꾸지 마라."



다들 디데이 세고 있으셈. 소중한 아이코스 주머니에 쑤셔넣고 옥상문을 젖혔다. 여아일언중천금이다. 내 기필코 한 달 안에 비비안인지 비비고인지 꼬셔서 저 여자들 지갑 다 뜯어내고 말 것이야. 씨근덕대며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비음 잔뜩 섞인 명주언니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마리아님, 다만 문달이를 아다에서 구하소서~"

"아멘~"



아니 진짜 저것들이 근데.




02.

"아, 문달이 담배냄새."

"지랄, 내 거 전담이거든."



아, 김명주 박민영 진짜. 저 간죽간살 시스터즈는 윤미랑 내가 전담으로 갈아탈 때 연초만 고집하더니 기어코 남의 교복에 냄새 배게 한다. 교실로 들어가자마자 코를 쥐어막는 짝꿍에게 쿠사리 한 번 주고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운동부다보니 복장에 크게 지적받지 않아서 평소에는 체육복을 입고 있는 편이다. 쭉 스캔하니 전쟁터를 방불케하는 교실 한복판에서 꿋꿋하게 문제집 들여다보고 있는 뒤통수가 보였다. 오늘도 머릿결 끝장나십니다. 뭔가 부러워서 탈색 후 개털이 된 내 머리카락 좀 만져보다 관뒀다. 혹시 땀냄새라도 날까 싶어 짝꿍한테 강탈한 탈취제까지 뿌려주고 비비안인지 비비고인지 앞자리에 턱, 앉았다.



"저기."



못 들은건지 대답도 없다. 에어팟이라도 꼈나 싶어서 슬쩍 봤더니 그것도 아니다. 아니 사람이 말을 하면 아는 척은 해 줘야지... 저기 비안아. 머쓱하게 책상까지 두드리니까 그제야 고개를 든다. 얼굴 똑바로 마주한 건 처음인데 커다란 안경 너머로 마주친 눈이 제법 컸다. ...안녕? (자칭) 육상부 트레이드마크 눈웃음까지 날렸는데도 영 무표정이다.



"뭐해?"

"공부."



단답 지리네... 이래가 대화 좀 하겠나. 조금 삔또가 상했지만 어떻게든 말꼬리 붙잡고 얘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꼬시려고 온 거니까. 와, 무슨 공부 하는데? (어차피 봐도 모르지만) 물어보니 책을 내미는데 보기만해도 대가리 지끈거리는 회계책이다. 제법 공부 열심히 하는지 연필자국이 여기저기 나 있었다. 아, 나 이 학교에서 쓰레빠 신은 이후로 이렇게 공부하는 애 처음 보네. 비안이 너 공부 존ㄴ, 아니 진짜 열심히 한다. 안 어울리게 욕까지 정정해가며 들이댔는데도 돌아오는 건 어, 하는 뚱한 목소리였다. 와, 얘 사람 민망하게 하는 데 뭐 있네. 목소리 높낮이 변화 지리게 없어...



"나 비안이 아닌데."

"네 이름 비비안 아냐? 성이 비, 이름이 비안."

"..."



잠깐 대답 안하다가 처음으로 웃는다. 활짝이 아니라 피식인 게 문제였지만. 윤미 같았으면 뭘 쪼개 기지배야, 하면서 마빡 한 대 쳐줬을 건데 비안이라 참았다. 빤히 내 얼굴 쳐다보는데 골때린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우리동네 꼴통대장으로서 여기저기서 저 표정 많이 봐서 귀신같이 안다. 들고 있던 샤프 내려놓고 머리 한 번 넘기더니 으레 그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그건 나 미국살 때 이름이고. 전학온 날 한국이름 얘기 했는데."

"...그래?"



아무리 대가리 굴려봐도 기억 안 난다. 김영희 뭐 이런 건 아닐 거 아냐. 쒸발... 지 눈치 보는 걸 알았는지 비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나보네. 비비안이한테는 미안하지만 나는 교실보다 트랙에 나가있는 시간이 더 많고 그나마 교실에 붙어있을 때는 딱 두 가지다. 먹거나, 자거나. 그래서 아마 얘 전학온 날도 엎어져서 눈귀 다 닫고 있었을 거라 뇌세포에 기억이 있을리가 없다. 아니 당장 어제 급식 메뉴도 기억 안 나는데 무슨...



"차은우."

"어?"

"내 이름, 차은우라고."



차은우... 혀 끝에서 굴러가는 이름이 동글동글하다. 아무리 내가 새대가리여도 절대 안 잊어버리려고 책상 구석에 몇 번 쓰는 동안 은우는 말도 안 하고 나 하는 양만 봤다. 근데 얘 착하다. 지 이름도 잘 모르는 애가 갑자기 와서 말 걸어도 쳐내지도 않는다. 쌈닭들만 모여있는 우리 학교에 이런 착한 애가 다니고 있다니 놀랄 노자다. 그런 애를 여태까지 아무도 안 건들였다는 것도 존나 의외고.



"나도 공부 좀 가르쳐 주면 안 돼?"

"너 공부 안 하잖아."



가시나야 그렇게 정곡을 찌르면 내가 민망하냐 안 하냐.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문달이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좀 해 볼라고 그른다 왜에. 속으로 토하면서 말꼬리 늘여가며 매달렸다. 야아, 내가 아무리 운동부여도 졸업은 해야 할 거 아냐. 좀 난감한 표정으로 안경을 쓱 올린다. 좋아 온다 온다 넘어온다. 이제 좀만 더 노 저으면 될 것 같아서 슬쩍 힘 좀 더 줬다.



"으누야아. 일주일마안."

"...쪽지시험 끝날 때 까지만."



아싸! 차은우 마음 변하기 전에 내 폰부터 쥐어줬다. 일주일 안에 쇼부 보려면 시간이 없으니 스겜해야겠다. 눈웃음 샐샐 치면서 번호 찍어줘, 하니 잠깐 망설이다가 11자리 숫자가 찍힌 폰을 돌려준다. 시작이 반이랬는데 이 정도면 삼일 안에 키스까진 가능하다 아님? 사실 키스도 몇 번 안해봤지만 처음부터 일이 술술 풀려주니 자신감만은 만땅이다.



"나 자리 바꿀까? 니 옆에 앉게."



은우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교실 뒤에서 노가리까고 있는 차은우 짝꿍한테 소리를 꽥 질렀다. 야 부승아 나 자리 좀 바꿔줘. 물론 내 자리는 창가 맨 뒷줄 개꿀자리였으니 쟤가 거절할 리는 만무했다. 어 니 좆대로!!! 바로 돌아오는 대답에 은우 옆에 찰싹 붙어앉았다. 나 훈련할 때 빼고는 이제 여기 앉을게, 했더니 또 그 무심한 목소리로 단답이다. 내친 김에 좀 더 나가볼까.



"주말에도 시험공부할거지?"

"아마."

"나 너네 집 가도 돼?"



나 독서실 갈건데. 아니 안되는데요 독서실가면 내가 수작을 못 부리잖아요. 너무 급발진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길래 한번 더 질척댔다. 아니 내가 잘 모르니까 물어보면서 배우려고 그래애. 차은우는 묘한 표정으로 날 보다가 그럼 그러던가, 했다. 뭐야, 말투만 그렇지 얘 완전 예스걸이잖아. 기분 좋아져서 들고 있는 샤프 뺏어다가 책상에 하트 크게 그려 줬다. 고마워 자기야, 하니까 고개만 끄덕이는데 귀가 살짝 빨갛다. 나 여자꼬시는 거에 재능 있나본데. 운동 말고 다른 길 찾았는데 이거.



봤냐 꼴통들아. 20만원은 내 거다.




03.

카톡에 찍힌 주소는 학교에서 좀 떨어진 오피스텔이었다. 딱 봐도 일반 가정집은 아니어서 물어봤더니 가족들은 다 미국에 있고 혼자 산다고 했다. 찐으로 신이 돕는 건지 속이 시커먼 내 입장에서는 존나게 땡큐였다. 오늘은 안전빵으로 뽀뽀까지만 하고... 기회 되면 키스까지 해야지. 아 한 달 개껌인데 이거? 순진한 은우를 꼬셔서 홀랑 자빠트릴 궁리만 조지게 하고 갔는데 가자마자 세 번 놀랐다.



"누구세요?"

"나 차은우인데."

"엥?!"



모르는 사람이 문 열어줘서 한 번 당황하고, 그 모르는 사람이 존나 예뻐서 속으로 깜놀하고, 그 존나 예쁜 사람이 차은우라서 대놓고 식겁했다. 내가 아는 은우는 안경쓰고 눈 좀 작고 그냥저냥 평범한 얼굴인데,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웹툰에서 막 튀어나온 주인공 같았다. 못 믿고 쳐다보니까 무표정으로 나 2학년 6반 차은우, 하고 신상정보 줄줄 읊는데 그거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믿긴 믿는데...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실감은 안나는 거 뭔 줄 알지. 이거 그건가? 만화에 나오는 찐따가 안경 벗으니까 꽃미녀였다 그런 거. ...그딴 게 현실에도 있단 말이야? 얘는 그럼 그 그지같은 안경을 왜 쓰는거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계획했던 수작질따위 개나 줘버리고 공부랍시고 앉아있는 내내 멍청하게 있었다.



"문달이. 알겠어?"

"어...어엉..."

"그럼 혼자 풀어봐."



은우는 학교에서는 그렇게 단답러더니 집에 오니까 의외로 존나 다정했다. 솔직히 나같이 공부 손 놓은 애 가르치려면 엄청 귀찮고 짜증날건데 알아들을때까지 반복하고, 모른다고 고개 저으면 괜찮다고 다시 해 주고 엄청 따뜻하다. 씨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없어서 존나 심장 떨렸다. 하지만 평소에 책을 펴 본 적이 없는 내가 차은우가 아무리 기깔난 설명을 한들 받아먹었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심장이 쿵쿵대서 지금 부정맥 올 것 같단 말이다... 샤프 꼬다리만 씹으면서 가만 있으니까 문달이, 왜 그래 하고 나를 쳐다보는데 마주친 눈이, 그 눈이, 엄청 크고 깊은 거다. 시발 얘 눈동자 존나 커. 속눈썹도 존나 길어. 망할 놈의 안경을 뺏어다가 반으로 아작내고 싶었다. 걱정스레 어디 아프냐고 이마 짚어줄 때는 심장 뛰어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미친 건가? 그렇게 호기롭게 들이대놓고 이제와서 이런다고? 나 진짜 윤미 말대로 얼빠속물인가?



"근데 너 존나 예쁘다."

"뭐?"



입술을 깍 깨물었던거야...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말에 합죽이가 된 걸 보고 은우는 또 슬쩍 웃었다. 웃지 마 기지배야 사람 홀리니까. ...내가 너 안경 박살내도 돼? 물어보니까 학교에서는 써야 된다고 안 된다길래 입맛만 다셨다. 이 잘난 얼굴 감추고 다니는 게 괜히 존나 안타까웠지만 뭐 나만 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나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이 정도면 딜 제시한 김명주한테 108배라도 해야했다. 언니가 내 하사장이고 마리아님이에요, 존나게 아멘입니다. 실시간으로 변하는 내 표정을 보는 차은우 반응이 아까랑 달라졌다. 지금 그건데. 흥미진진한 얼굴인데 이거.



"너도 예뻐."

"야아..."



그런 말 웃으면서 하지 마라 경고 없이 바로 레드카드니까. 내 말투가 좀 토나오는데 이번엔 진짜 의도한 거 아니고 예상치못한 말에 그냥 저절로 말꼬리 늘어진거다. 평소에 입에 걸레 두어개 씩 문 육상부 사람들이랑만 어울리다가 이렇게 스윗한 말이 훅 들어오니 몸이 스크류바마냥 배배 꼬였다. 그만큼 나는 정신 못 차리고 있는데 차은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스파르타 모드였다. 이거 이해하기 전까진 집에 못 간다는 거다. 사실 그러면 완전 땡큐인데 자고 가도 되냐니까 그건 또 안 된단다. 무심하게 펜 달칵대면서 문달이 빨리 풀어, 하고 재촉하는데... 아까부터 거슬리는 게 하나 있어서 문제 푸는 대신 또 딴소리 했다.



"너 원래 사람 부를 때 성 붙여서 불러?"

"응."

"나 그거 되게 싫은데... 안 하면 안 돼?"



너는 내가 너한테 차은우라고 성 붙여서 부르면 기분 좋겠어? 별 대답이 없는 게 왠지 상관 없다고 할 것 같아서 입 틀어막았다. 달이라고 부를 때 까지 안 놔준다고 했더니 눈썹 꿈틀대면서 난감한 기색이다. 아, 빨리. 빨리 해 봐. 재촉하면 노트에 알았으니까 손 떼라고 꼭 저처럼 가지런한 글씨로 대답한다. 손을 떼니 저도 어색한 듯 헛기침 몇 번 하고 툭 뱉는데,



"알겠어, ...달아."



나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민망한지 자리를 뜨는 게 쟤 좀 귀여운 거 같애... 달그락대는 소리만 멍하니 듣고 있는데 갑자기 존나 더웠다. 폰 카메라로 확인하니 얼굴이 터질 것 같이 빨갰다. 가만히 보니까 꼬시러 온 주제에 정작 내가 꼬셔지고 있는 거다. 그것도 성 떼고 이름 한 번 불렀다고 돌돌 감겨버릴 만큼. 아, 이거 아닌데. 잠깐 얌전해진 줄 알았던 심장이 또 난리 부르스를 땡기길래 엎어져서 심호흡을 했다. 와, 문달이 정신 차려라. 이 정도에 휘둘려서 목표 달성은 하겠냐?



"자는 거 아니지."

"...아니거든?"



일단 공부 핑계로 왔으니 하는 척은 해야했다. 눈 앞에 놓인 사과주스 원샷하고 다시 마음을 다잡았는데 오랜만에 공부 비슷한 걸 했더니 대가리에 쥐가 날 것 같았다. 들었던 설명 되짚어가며 끙끙대는 날 은우는 참을성있게 기다려주었다. 한참만에 간신히 한 문제 풀긴 했는데 자신이 없어서 노트를 밀어놓고 시선을 피했다. 틀리면 뭐... 제가 빡대가리인 것으로 하겠습니다. 은우는 답지도 안 보고 지가 쓱쓱 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헐!!! 나조차도 못 믿겠어서 눈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은우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솔직히 답 맞춘 것 보다 은우의 손길에 더 깜짝 놀랐다.



"잘 하는데?"



그리고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 거다. 버릇처럼 피식 하는 거 말고, 웃는 듯 안 웃는듯 희미한 미소 말고. 그 예쁜 눈 접어가면서, 입꼬리 한껏 올려가면서 짓는 미소가 너무 다정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나는...



"...?"

"헉."



얼떨결에 목표달성 해 버린거다.




04.

충동적으로 입맞춘 날도 벌써 저번주다. 내가 해 놓고도 깜짝 놀랐는데 오히려 은우는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그냥 입술 몇 번 만지더니 어깨 으쓱하고 마는 거다. 그렇게 좋아? 한 마디 하긴 했는데 그닥 기분나빠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변명 각 재고 있던 게 쏙 들어갔다. 하긴 거기서 웅앵거렸으면 더 이상해질 뻔 했지. 잘 넘어가준 은우 덕분에 분위기만 더 좋아져서 집에 가기 직전에 한 번 더 했다. 현관문 앞에서 얼굴 들이대는데 피하지도 않는 게 존나 그린라이트였다. 예상했어? 응. 나 또 와도 돼? 그래. 그 이후로 공부 핑계로 놀러가기만 하면 뽀뽀 열심히 하다 돌아온다. 한 문제 맞출 때 마다 한 번씩, 상 걸고 하니까 집중도 잘 된다. 다 좋다. 하나만 빼고.



"은우야. 우리 놀러가자."

"그래."

"맨날 말만!"



어제 쪽지시험까지 근 열흘을 공부만 존나 했더니 좀이 쑤셔 죽겠다. 삐죽대는 입술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더니 들고 있던 샤프를 내려놓는다. 뭐 하고 싶은데? 몰라 그냥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 일부러 은우 책 위로 엎어졌더니 머리 쓰다듬어주면서 그런다. 그래 뭐 시험도 끝났는데. 맨날 학교 아니면 은우네 집이라서 조금 지루했다. 아, 진도 좀 나가려면 좀 새로운 분위기도 필요하고! 그래서 어제부터 차은우 옆에서 놀러가자고 노래를 불렀더니 이제 좀 반응이 온다.



"영화보러 갈래?"

"데이트 하는거야?!"



반색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악 너무 좋아! 벌떡 일어나서 걸치고 있던 추리닝 벗어던졌다. 너도 안경 벗어라, 이쁘게 하고 나가자! 안경 뻇으면서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내준다. 좋아 이뻐이뻐. 만족한 내가 파우치 열심히 뒤적거리는 동안 은우는 이 영화 저 영화 보여주며 표를 예매했다. 이건 지루할 것 같아. 저건 재미 없대. 아무것도 안하는 주제에 퇴짜만 놨는데도 의견 반영 열심히 해 주며 골라낸 건 딱 보기 편한 수위의 로코였다. 요새 인기 많은 아이돌이 주연을 맡아서 광고도 많이 때렸던 기억이 났다. 영화 보고, 밥 먹고. 또 뭐 할까, 물었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오락실 갈래? 여서 조금 놀랐다. ...너 게임도 해? 되물으니까 컴퓨터 게임을 못해서 피씨방보다는 오락실파란다. 오, 재밌겠다. 간만의 외출에 신이 나서 엉덩이 열심히 흔들었다. 나가자, 나가자!



영화는 무난했다. 솔직히 기억에 남을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K드라마 매니아로서 그 다음 장면이 그려질 정도의 스토리였달까. 그보다 더 재밌는 건 차은우 반응이었다. 저 뻔한 영화를 어찌나 집중해서 보는지 수업듣는 것 같았다. 신기해서 반응 관찰하다가 시간 다 갔다. 중간에 내가 저만 보는 걸 알았는지 민망해하며 앞에 봐, 한 마디 하는데 그게 또 그렇게 웃겼다. 이미 영화에 흥미 떨어진 나는 커피컵 잡은 손 끌어다가 장난이나 쳤다. 몇 번 빼려던 은우도 내가 하도 치대니까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키에 비해 손발이 작은 편인데, 은우는 좀 컸다. 나보다 손가락도 굵고 길이도 반마디 정도 길었다. 손톱도 흰 부분 없이 가지런했다. 너 손 예쁘다, 속삭이니 슬쩍 웃고는 깍지를 낀다. 쳇, 또 저렇게 웃네. 사람 설레게. 얘 생각하다가 영화 다 끝났다.



네가 영화 보여줬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하고 야무지게 들어간 파스타집에서는 차은우 취향 하나 득템했다. 넌 토마토랑 크림 중에 뭐가 좋아? 난 무조건 크림. 평소랑 다르게 대답이 존나 단호해서 좀 놀랐다. 이렇게 하나씩 알아가는 건가, 하고 뿌듯해하는 중에 진지하게 덧붙인다. 근데 요새는 로제도 좋은 것 같아. 메뉴판 들여다보는 표정이 세상 심각해서 머리 한 번 쓰다듬어줬다. 귀여운 차은우. 맛있는 거 먹어, 하니까 자기 많이 먹는단다. 그래라? 솔직히 주변에 나만큼 많이 먹는 사람 별로 없어서 저렇게 말해도 얼마나 먹을까 싶었는데 진짜 잘 먹었다. 그리고는 나 화장실 간 사이에 계산까지 다 해놔서 또 빚졌다. 야!!! 내가 산다고!!! 펄펄 뛰는 나를 잡고 오락실로 잡아끌었다. 게임비는 네가 내.



간만에 오락실 들어오니까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은우는 익숙한 듯 구석의 게임기로 나를 이끌었다. 공룡 두마리가 공 쏘는 게임이었는데 겜알못인 나도 어렸을 때 해본 기억이 났다. 오 좋지, 개중에 제일 쉬워보여서 자리 잡고 앉았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임에 입술 꾹 깨물고 하는데 옆의 은우는 엄청 여유롭게 틱,틱 버튼 몇 번 누르니까 매달려 있던 공이 다 떨어졌다. 엥?! 입 떡 벌어져서 쳐다보니까 씩 웃는다. 뭐야 너? 숨겨진 고수? 공부 잘하는 애가 게임도 잘 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나 못 하는거 별로 없는데. 참나. 저 잘난척도 밉지 않다. 근데 그거랑 별개로 내가 지는걸 진짜 싫어해서 승부욕에 불이 붙었다.



"아, 나 지는 거 체질에 안 맞는데."



열심히 손가락 푸는 옆에서 지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한다. 맞긴 한데 나는 정도가 좀 심했다. 어렸을 때부터 승부욕 때문에 다치기도 많이 다치고 사고도 많이 쳤다. 육상도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시작한 거고. 얘기 듣더니 뭔가 자기가 봐주려는 눈치길래 으름장 놨다. 너 그렇다고 봐주면 안 돼!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니여. 다른 동기가 필요했다.



"뭐 걸고 하자."

"어떤거?"

"소원 들어주기?"

"너 소원 있어?"



당연하지. 내가 오래 품어온 소원이 하나 있지. 그랬더니 고개 끄덕인다. 그래, 해보자. 그렇게 우리는 테트리스 지옥에 빠졌다. 소원 걸고 하니까 집중력 최상이었다. 각자 한 번씩 이긴 상태로 마지막 판을 앞두고 둘 다 비장하게 시작했는데 진짜 치열했다. 다 큰 여자 둘이서 눈에 불을 키고 게임하고 있는 게 웃겨서 하면서도 막 웃었다. 왜 웃어? 헉. 의아하게 돌아보다가 손가락이 삐끗했는지 은우가 끙끙댔다. 헐 찬스다! 이때다 싶어서 열심히 밀어붙였다. 그 한 번의 실수가 결정타였는지 은우 쪽의 블록이 빠르게 쌓였다. 결국 화면 반쪽이 까맣게 차오르고 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했다. 이겼다!



"아, 네가 웃어서 그래."

"누가 돌아보래?"



얄밉게 혀를 내밀었더니 무표정하게 볼을 꼬집는다. 아아, 아프잖아. 투정하면 또 다정하게 살살 쓸어준다. 그 손길이 좋아서 잠깐 눈 감고 받고 있었다. 게임 하면서 열 올리느라 흐트러진 앞머리까지 정리해 준 은우가 물었다.



"소원있다며? "

"맞다! 나 소원 있지. 다 들어줄거야?"

"생각해 보고."



아냐, 꼭 들어줘야돼. 손 꼭 잡고 말 하니까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 끄덕인다. 진짜지? 응, 진짜.



"안경 갖다 버려."

"...그게 소원이야?"



그러고는 소리내어 웃는다. 달아, 난 또 뭐라고. 뭐가. 왜 웃냐. 너네 집 처음 간 날 부터 품고 있던 소원이었다니까 머리 쓱쓱 쓰다듬어 준다. 알았어, 안 쓸게. 흔쾌히 대답하는 거에 기분이 좋아져서 볼에 찐하게 뽀뽀 한 번 갈겨줬다. 사람들 많은 곳에서 갑자기 닿는 입술에 놀랐는지 원래도 큰 눈이 진짜 이만큼 커졌다. 귀여워서 반대쪽에 한번 더 해주고 바로 앉았는데 벌떡 일어난 은우가 갑자기 손목을 잡아끌었다. 어, 뭐야! 삐끗해서 당황하는 와중에 입술이 닿았다. 도장 찍듯이 꾹 눌러오는 입술이 끝내주게 말랑말랑해서 기분이 이상했다.



"볼 말고 입에 해줘야지."

"야아..."



무심하게 던지는 말에 얼굴 빨개졌다. 아이씨, 얘는 왜 이렇게 한 방에 강한거야? 따뜻한 느낌이 생생해서 잠시 멍때리는데 심장이 콩콩 뛰었다. 차은우 뭐야 진짜... 우리 인형뽑기 할까? 그래놓고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자기도 조금 민망해하는 것 같아서 그게 또 되게 귀여웠다. 얼른 따라갔더니 조이스틱만 만지작거리면서 일부러 딴청 피운다. 야, 나 이제 뽀뽀 입에만 한다? 하니까 못 들은 척 버튼만 연타한다. 힘도 없는 집게 당연히 헛손질인데 그거만 열심히 보고 있다. 너 진짜 귀엽다.



하 어떡하지, 나 얘 좋은 거 같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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