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빛. 나의 색

2020 가을호
작성자
유리잔
작성일
2020-10-24 22:59
조회
17




비가 모든 걸 지워 버릴 듯 내렸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될 것 같았다. 꿈에서 깬 듯, 겪었지만 현실이 아니고 기억하지만 흐릿한, 그런 것이 될 것만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것처럼.




"미안."


"...왜 사과해?"




왜 사과하냐고? 이제 곧 내가 널 죽여야 하니까? 널 계속 속였으니까? 겁도 없이 사랑이라는 무책임한 말로 널 건드려서?


머리가 아프다. 이유는 너무 많아. 내가 너한테 사과해야 되는 이유, 끝도 없다.




"......"


"넌 그런 표정을 지어도 잘생겼네."


"같이 도망갈까?"


"내 평생의 꿈을 망칠 셈이야?"




꿈. 동화 같다.

너는 위협적인 껍데기를 쓰고 위험한 사람인 듯 굴지만, 사적인 대화를 하다 보면 여린 속살이 다 드러나 버린다. 너의 입에서 종종 나오는 동화 같은 단어들 때문에, 내 머리는 멋대로 널 다정한 사람이라 판단했다.


널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데이터 속의 너는 죽여도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시? 나는 싫은데. 다음 생에도 우린 악연일 거야. 너 때문에 내 인생 처음으로 죽음이 두려워졌어. 죽는 게 내 평생의 딱 하나 있던 소원이었는데, 그걸 뺏으면 어떡해."




범죄 조직의 보스를 헤치려고 왔다가, 문빈의 인생을 망쳐 버렸다. 평생의 꿈...소원... 자신을 다 내던져 얻은 명예... 전부 내가 망친 거다.




"다음 생..? 왜 당연히 죽을 것처럼 말해?"


"무슨 소리야. 그렇게 정해진 거 아니었어?"


"빈아.."


"또.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너한테 도움이 되지는 못 할 망정, 준다는 게 고작 두려움이라니. 지금 상황에서 나는 너를 지킬 수 없다. 너는 죽음과 너무 가깝고, 일상을 싫어 하니까.




"빈아. 난 말이야.."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 너 진짜 말 안 듣는다. 우리 조직에 잠입시킨 거 위에서 너 싫어서 그런 거 확실해. 말 안 듣는 놈 죽으라고 들여보냈더니 눈치 없이 작전 성공한 거라고."


"아직 성공 안 했어. 그렇게 말하지 마."


"성공할 거잖아. 차은우는 절대 코앞에서 목표를 놓치지 않아. 그렇지?"




애써 웃는 게 안쓰럽다.




"작전 성공하고, 안전하게 돌아가야지. 차은우는 그래야 되잖아."




너는 떨리는 손을 감추며 앞에 있던 와인을 들이켰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말하면 안 돼?"




너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너한테 다가가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달아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이니 솔직해져라? 아님 무섭다고 너한테 매달리기라도 하라는 거야?"


"매달려 달라고 하면 매달려 주게? 아니잖아."


"......"


"나랑 도망가는 게 왜 싫어?"


"......"


"못 미더워?"




대답은 안 해주고 와인잔만 천천히 돌리고 있는 게 참 얄밉다.




"대답 좀 하지?"


"......"


"야. 일부러 화나게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싫다고 한 적 없어."


"어?"


"싫지 않다고. 왜 싫을 거라 생각해?"




어이없어.




"죽는 게 두려워졌고, 내가 좋고, 도망가는 게 싫지 않은데 왜 여기서 죽겠다는 건데."


"너는 왜 나 죽이려고 했는데?"


"이제 아닌 거 알잖아. 시간이 없어. 빨리 가자. 같이 살자."


"은우야."


"응."


"그냥 같이 죽자."


"......"


"그냥 그러면 안 돼? 다음 생에는 형사 이동민 말고, 처음부터 차은우로. 내 앞에 나타나면, 안 돼? 우리.."


"빈아?"




너는 갑자기 숨 쉬는 것을 힘들어 했다. 목을 움켜쥐는 통에 손톱 자국이 붉게 남았다.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당황한 것 같진 않았다.


와인에 독을 타서 마셨구나.




"문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손.. 잡아줘."




나는 그제서야 너한테 다가갈 수 있었다.




"있지."


"어."


"..만나기, 싫다, 한 거. 거짓말이야. 악연..이어도, 꼭, 만나..."


"그래.... 내가 만나러 갈게."




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무슨 의미의 눈물인지는 평생 알 수 없겠지.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왜 니가 로미오 하냐.."


"내가 더, 무모...하잖아."




너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진다. 힘이 빠져 가고, 나를 바라보던 눈이 초점을 잃어 간다.


이제 내 세상에 빛은 없다.











비는 여전히 모든 것을 가릴 만큼 시끄럽다. 덕분에 니가 덜 불안하겠다. 늘, 고요함을 불안해 하던 너니까.


비가 바다를 거쳐 다시 하늘로 올라가 새로운 비가 되는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 속에 다시 내릴 수 있을까.


이 거센 비가 모든 악연을 지우고, 우리의 애틋함만 남기기를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


"아빠! 유치언 느져! 빨리빨리!"


"알겠어요, 우리 공주님."




은우는 현관문을 닫고, 일곱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에게 서둘러 간다.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하자 아이는 먼저 달려나간다.




"은빈아, 뛰면 다쳐요. 지금 가도 절대 안 늦어. 충분해."


"안대. 일찍 가꺼야."


"일찍 가는 건 좋은데, 아빠 손잡고 가주면 안 될까요?"


"그래. 아빤 나 업쓰면 파랑불 빨강불도 모르자나."




은우는 눈을 휘며 웃는다. 구부정한 자세로 아이와 함께 걸으며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운다.




"아빠."


"응? 왜?"


"내가 유치언 가서 색깔 이-러케 마니 알아오께."




아이는 온몸으로 큰 원을 만들며 의욕이 넘치는 표정이다.




"그래. 이-렇게 많이 알아와서 아빠한테도 색깔 가르쳐 주세요."




은우도 아이를 따라하며 같이 들떠 있다.




둘은 열심히 걸어서 드디어 유치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현관에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나온 선생님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은빈이가 갈 반의 담당 선생님도 있다.




"선샌님!"




은빈이가 큰소리로 밝게 선생님을 불렀다. 그에 선생님도 아주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눈다.




"은빈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여."


"안녕하세요, 문빈 선생님. 나와 계시네요."




은우도 역시 예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은빈이를 대할 때와 다르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짧은 대답과 가벼운 목례만 하는 선생님.




"아... 네."


"은빈이 첫 등원이라 일부러 나와 계신 거죠? 원래 등원 마중은 다른 선생님들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네. 그렇죠, 뭐."


"감사해요. 우리 은빈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잘 부타드림미다."


"응, 우리 은빈이. 선생님도 잘 부탁해요."




누가 봐도 아이를 대할 때와 아이 보호자를 대할 때가 확연히 차이 난다. 어이없는 게 아니라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탕 냉탕을 왔다갔다 하는 태도였다.




"워낙 활기차고 하고 싶은 건 해야 되는 아이라서 조금 과할 때도 있지만, 뭐든 조곤조곤 알려주면 곧 잘 알아들어서 속 썩이진 않을 거예요."




그래도 굴하지 않는 은우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우리 은빈이 다 잘 먹는데 저 닮아서 매운 것만 못 먹거든요. 유치원이니까 아이들 먹이는데 매운 음식은 안 나오겠죠?"


"네, 안 나와요."


"아 선생님, 또 우리 은빈이가 이건 누굴 닮아 그러는지 한번 싸우면 자꾸 누구 한 명은 울리고 끝내더라고요. 그럴 때는 엄하게 혼내 주세요."


"은빈이 아버님, 알겠으니까.."


"죄송해요, 선생님.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네. 하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은빈아 먼저 들어가 있어. 아빠, 선생님이랑 비밀 얘기할 거야."


"에휴. 아라써. 아빠 수다쟁이. 선샌님 죄송함미다. 우리 아빠가 철이 업써요."




뚱하게 지루한 듯 듣고 있던 은빈이는, 유치원 등록하러 와서 보고 기억해뒀던 반으로 들어갔다. 은빈이에게 끝까지 손을 흔들어준 은우는 이내 조금 차분해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제가 색을 못 봐요."


"네?"


"눈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선천적으로 색을 못 봐요. 저한테는 온 세상이 다 흑백이에요. 그래서 은빈이한테 색깔을 가르쳐 줄 수가 없었거든요. 당연히 은빈이도 주변에 가르쳐 줄 사람이 없으니 색깔 이름도 잘 모르고 그래요. 워낙 똑똑해서 티비 같은 거 보고 몇 개 외우긴 했는데, 그래도 다른 또래 아이들이랑 차이가 많이 날 거라 걱정입니다. 원장님께도 말씀드리긴 했는데.. 죄송한 말씀이지만, 조금만 신경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조금 다른 거니까요. 실수로라도 은빈이가 큰 상처 안 받게 주의하겠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역시 문빈 선생님은 굉장히 다르시네요."


"네?"


"아니, 좋은 말이에요! 긍정적인 뜻으로요."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하원 때 뵐게요."




둘은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빈은 은우가 자신이 굉장히 다르다고 한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단순한 칭찬일 수도 있지만 왠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직감적으로.




정확히, 단순 칭찬이 아니었던 게 맞았다.


등록을 위해 은빈이와 손잡고 유치원을 방문했던 날, 원장은 지나가던 빈을 불러 달님반 담당 선생님이라며 미리 소개해 줬었다.


은우는 그때 빈을 보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른 살이 넘도록 흑백밖에 없던 자신의 세상에 색깔이 보인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빈이와 몇 번을 재탕한, 바로 그 애니메이션 영화 속 그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들리는 듯했다.


다른 곳들은 늘상 보이는 대로 똑같은데, 빈과 빈의 주변만 컬러였다. 기적이었다. 진짜 애니메이션 속으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무 신기했다. 무척 신이 났다. 황홀했다.

은빈이를 처음 보육원에서 만났을 때와 은빈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불러줬을 때를 순식간에 제치고, 바로 인생 최고의 순간 1위의 자리에 올라가 버렸다.


이런 거구나, 색깔은. 이런 거였구나.


은우는 그날 이후로 머릿속에서 빈이 떠나가질 않았다. 처음에는 색깔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본 컬러인간(은우의 단어를 빌리자면 말이다. 컬러인간. 이때까지 본 사람들은 흑백인간. 너무 원시적이지만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은 은우의 감각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홀라당 빠져 버린 것이다.






"이게 사랑이구나.."


"머가?"


"응? 아니야, 은빈이 밥 먹어."


"아빠 사랑에 빠져써?"


"에이 아니야.."


"누구 사랑하는데?"


"아빠는 우리 은빈이 제일 사랑하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 아빠는.."


"아니이! 다른 거! 나 사랑하는 거랑 다른 거!"


"아니 그러니까.."


"누구야! 달님 선샌님이지!"


"어? 어?"


"내일 유치언 가서 선샌님한테 말해주께."


"안 돼 안 돼 안 돼. 은빈아, 안 돼요. 하지 말아요. 안 되어요."


"왜여?"


"어... 음... 선생님이 아빠를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아냐. 선샌님 아빠 조아해. 막 아빠가 뭐 조아하는지도 물어보구."


"어? 진짜?"


"응. 진짜. 그리구 내가 나도 집에 어른 두 명이면 좋게따 해떠니, 아빠가 둘이어도 갠찬냐고 물어봐써. 그래서 달님 선샌님이면 좋다 해써."


"......잘했어."


"그치?"






그래, 이판사판이다. 차은우 인생에 컬러인간이 또 찾아올리 없었다. 거기다가 나이대도 비슷하고, 은빈이도 허락했고, 예쁘고, 몸매까지 탄탄하고. 어디 하나 빼놓을 구석이 없는 사람을 놓치는 건 은우답지 않았다.


은우는 오랜만에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만졌다. 그런 은우를 은빈이는 심사위원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은빈아. 아빠 어때?"


"음. 머시써!"


"그래? 달님 선생님이 좋아하실까?"


"응. 달님 선샌님 아빠 얼굴 조아해. 이-러케 쳐다바."


"알았어. 이-렇게 쳐다볼게."


"이제 가자!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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