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만 보이는

2020 가을호
작성자
작성일
2020-10-24 23:06
조회
30



 

 * 이 글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 속 주인공의 외양을 차용하여 쓴 글입니다. 원작과 본 글의 내용은 관계가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 다소 잔인한 표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실한 마음? 화려한 용모? 거대한 자연? 이처럼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기는 어렵다. 차은우는 형태가 있는 것조차 구체화하기 어려웠다. 그는 그 자신마저도 명확하게 단정 지을 수 없었기에.

 

 

 

 

 

 

 

 

 

 

 

 

 

 배게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던 은우는 눈을 떴다. 정 자세로 자려 하면 잠이 도통 오질 않았다. 자신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탓에 얼굴을 묻고 자는 것은 자연스레 생긴 습관이었다.

 

 

 

 은우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곤 익숙하게 손을 더듬어 넓은 방의 벽을 찾고는 일어섰다. 벽을 집고 조금 걸어가니 큰 창문이 그의 손에 닿았다.

 

 

 

 매일 있던 일인 듯 창문을 열었고, 새벽 공기가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바람의 향기가 곧 추워진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자신을 반기는 찬 공기가 코를 간지럽히니, 웃음이 나왔다. 미소를 머금고는 아침의 소리를 느끼며 그는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만을 기다렸다. 

 

 

 

 

 

 

 

 

 

 

 

 

 

 

 

 

 

 

 

 

 

 

 

 

 

 

 

 

 

 

 

 

 

  ‘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이 왕자의 눈을 뜨게 하리라. ’ 

 

 

 

 

 

 

 

 

 

 

 

 

 

 

 

 

 

 

 

 

 

 

 

 

 

 

 

 

 

 이 나라의 왕비는 아름다웠다. 긴 드레스를 늘어뜨리고 걸을 때면 그 우아한 자태가 뿜어져 나왔고, 말 위에 앉아 활을 겨눌 때면 그녀는 하나의 맹수와도 같았다. 그녀는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따듯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용맹함과 따스함이 사람들의 존경과 충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를 매우 시기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그녀의 누이였다.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잘난 언니에 그녀는 항상 비교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왕비의 아름다움이 그녀의 누이에게는 꽃 옆에 솟아 햇빛을 가리는 나무와 같았다. 증오하는 것은 때론 사랑하는 것만큼 강하다는 말이 있다. 질투심이 흘러 넘쳐버린 그녀는 남몰래 마녀를 찾아가 왕비에게 저주를 걸도록 하였다. 왕비의 자손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할 때까지 앞을 보지 못하는 저주를.

 

 

 

 

 

 

 

 

 

 

 

 

 

 

 

 

 

*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왕과 왕비 사이에는 왕자가 태어났다. 기쁜 소식에 나라는 시끌벅적했다. 왕비를 닮아서 그런지 왕자의 용모는 수려했다. 그의 피부는 백옥처럼 하얗고 부드러웠으며 흠집 하나 없었다. 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칼은 비단결과 같이 고왔으며 바람이 불어 그의 머리를 훑고 지나갈 때면 매끄럽게 찰랑거렸다. 높은 콧대 그리고 날카롭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콧날과 붉고 청조한 입술은 그를 더 아름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또한 뚜렷한 이목구비 덕에 그의 화려함을 아무리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다. 눈은 또 어떠한가, 차가운 칠흑을 띠고 있는 가하면 햇빛 아래에서 볼 때는 따듯한 연갈색을 띠고 있었다. 왕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떠한 생물 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깊은 우주와 같은 아름다운 두 눈은 어떠한 것도 담지 못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신의 얼굴을 가진 그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왕자는 치유할 수 없는 암흑 끝에 서 있었다. 왕과 왕비는 그런 왕자, 은우에 매일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기에 그들은 온 사랑을 쏟아부어 은우를 키웠다. 매일같이 은우를 데리고 나가 자연을 느끼게끔 하였고, 은우가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밤에 잠이 들기까지 달콤한 말을 해주었다. 지혜로운 왕과 왕비는 은우의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을 일깨워주려 노력했다. 최대한 많은 것을 만지도록 해주고, 최대한 많은 소리를 듣게 했다. 존재하는 모든 향을 맡게 했으며 책을 통해 글씨와 세상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스무 살의 청년이 된 은우는 그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었고, 현명한 부모님 덕에 다른 감각을 사용하여 세상을 보는 법을 배우며 바르게 자랐다.

 

 

 

 

 

 

 

 

 

 

 

 

 

 

 

*

 

 

 

 

 

 

 

 

 

 

 

 

 

 

 

 

 

 

 

 “ 너 그거 알아? 이 숲에 괴물이 산다는 이야기. ”

 

  “ 으응, 전에 들었는데 무섭더라. ”

 

  " 이번에 사람이 또 죽었다며. "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시녀들의 말소리가 들려오자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던 은우는 자연스레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동화책이나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것이 현실에서도 존재한다니. 계속 생각하다가 은우는 문득 괴물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실제로 본 것이라고는 암흑이라는 심연밖에 없었지만 은우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괴물을 본 적이 있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는 보였다. 마음의 눈이라는 것은 정말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 어머니, 괴물이 무엇인가요? ”

 

 

 

 낮에 하녀들이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던 은우는 기억했다가 자신의 방에 찾아온 지혜로운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는 품격있는 목소리로 웃음소리를 내었다. 

 

 

 

 “ 우리 왕자님 또 궁금한 게 생긴 모양이구나. ” 

 

 

 

 오늘 시녀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시선은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은우는 그녀를 따라 웃었다. 왕비는 은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 괴물은 괴상한 것이야. 추악하고 사나운 것,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지. ”

 

 “ 어머니, 그러면 사람 또한 추악하고 사납다면 괴물이 될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리고 숲에 괴물이 산다던데..  ”

 

 

 

 아가야 하나씩 물어보렴. 계속되는 질문에 왕비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다시 조곤조곤 말하기 시작했다.

 

 

 

 “ 숲의 괴물은 서민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란다. 예전에, 어두운 밤에 그 숲을 거닐던 일행이 죽은 일이 있었단다.

 

 그중에서 한 명만이 살아남아 돌아왔다지. 돌아와서 하는 얘기가 괴물을 만났다고, 그 괴물이 자신의 일행을 살해했다고, 너무 놀라 기절했다가 눈을 떠보니 다른 이들은 다 쓰러져있고 그 괴물은 온데간데없었다고 하더구나.

 

 기절하기 전, 그 괴물은 기괴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데. 이 일이 유명해지면서 궁금증이 생긴 사람들은 괴물이 정말 존재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숲에 들어갔지만 지금까지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더구나. ”

 

 

 

" 많이 무서운 얘기지? " 

 

 

 

 왕비의 말에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온 자가 없다니 섬뜩했다. 어머니랑 아버지는 절대 숲에 가지 마세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 아가를 두고 어디를 가겠니. 은우의 말에 왕비는 흐뭇하게 웃고는 그를 따듯하게 안심시켜 주었다. 

 

 

 

 “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어디 계신 건가요? ”

 

 

 

 언제나 자신이 잠들기 전에는 항상 왕과 왕비 둘이서 찾아왔었다. 하지만 오늘은 왕이 보이지 않았다. 왕비는 은우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 요새 많이 바쁘시단다. 오늘만 그런 것이니 안심하렴. ”

 

 

 

 사실 은우도 왕비가 왜 이리 조심스레 말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왕의 반대 세력이 요즘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성 내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이야기였다. 분명 어머니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실 테지. 은우는 네, 라고만 답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아가, 좋은 꿈 꾸렴. 왕비가 자신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자 은우는 어린아이처럼 웃었다. 어릴 적 느꼈던 따듯한 행복감이 떠올랐다.

 

 

 

 

 

 

 

 

 

 

 

 

 

 

 

*

 

 

 

 

 

 

 

 

 

 

 

 

 

 

 

 

 

 날씨가 좀 더 추워졌을 때 즘이었다. 낙엽은 거의 다 떨어졌고, 초록빛이던 산은 갈색빛이 되었다. 쿵, 그리고 들리는 사람들의 비명소리. 은우는 갑자기 난 큰 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 느낌이 안좋다. 은우는 초조해진 마음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때 자신의 하인이 급한 듯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절박하게 외쳤다. 왕자님, 왕자님!! 심각한 일이 일어난 게 분하다. 윽, 피 냄새. 은우는 어깨가 우악스럽게 잡히는 바람에 잠시 뒤로 휘청거렸다. 

 

 

 

" 왕자님, 서쪽, 서쪽에 있는 버려진 성으로 가십시오. "

 

 "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리고 너는, 너는 괜찮은 것이냐. "

 

 은우는 자신의 하인의 어깨를 감싸고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 폐하는... 왕자님, 저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곳, 서쪽 성에서 나머지 하인들, 병사들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출발했습니다. 왕자님도 꼭.. 사십시오. "

 

 " 하지만, 나는 너희가 없으면 갈 수가 없.. "

 

 " 왕자님! 그들이 왔습니다! 얼른 숨으셔야.. "

 

 

 

 커억, 하인은 고통스러운 소리를 냈고 곧 은우의 어깨를 잡았던 손은 힘이 풀려 밑으로 떨어졌다. 그 뒤 누군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자신 또한 위험하다. 직감적으로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다. 

 

 

 

 " 이놈이 이 나라의 왕자인가? "

 

 " 그런 듯 보이네. 쓸만한데? "

 

 " 장님이라더니, 얼굴이 용하군. "

 

 " 죽이지 말고 데려가서 노예로 팔아버리도록 하지. "

 

 

 

 모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공포심에 몸이 벌벌 떨렸다. 은우의 뒷덜미는 우악스럽게 잡혔고 은우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넘어질 뻔했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가는 내내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은우의 몸은 밧줄로 묶였고 마차를 타는 듯했다. 평소에도 많이 탔던 마차이지만, 자신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포박해놓은 것과 거칠게 대접받는 것이 달랐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어 공포심은 커져만 갔다.

 

 

 

 서쪽 버려진 성, 이 사람들한테 말하면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남은 하인들과 병사들은 안전한 것일까, 어둠 속을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은우는 막막함을 이기지 못해 눈을 감았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계속 마차가 덜컹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잘 정돈된 길은 아닌 것 같았다. 숲인가, 낙엽이 짓밟히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제 옆쪽에 한명, 제 앞쪽에 두 명, 그리고 마부가 타는 좌석에 한명. 은우가 파악하기에는 그랬다. 괜히 반항을 했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은우는 단 한마디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관성에 의해 몸이 앞으로 쏠렸고 병사들은 욕지거리를 뱉어내며 무슨 일이냐며 마부석에 앉은 병사에게 물었다. 대답이 없자 안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마차 밖으로 나왔다.

 

 

 

 으아악! 병사들은 겁에 질려 소리를 질렀다. 그들 앞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는 도끼가 들려있었고 그 남자의 입은 웃는 모습으로 기괴하게 찢어져 있었다. 

 

 

 

 " 괴물, 괴물이다! "

 

 

 

 마차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은우는 순간 왕비가 들려준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쳤다. 숲의 괴물은 병사들에게도 유명한 일화인 것이 분명했다. 쇠붙이로 자르는 소리, 듣기 싫은 소리,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괴물이라는 외침과 함께 한명씩 쓰러져가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질려 죽어 나갔고 괴물에게 덤비려다가 죽은 병사도 있었다.

 

 

 

 조용해진 것은 한 순간이었다. 왜 괴물은 웃고 있었다고 했을까, 그 소문을 다시 생각해보자면 괴물은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전혀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머릿속에 혼란과 공포로 가득 채워져 있던 그때 갑자기 저벅,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마차 쪽으로 다가온다. 괴물이 이쪽으로 다가올 수록 몸은 점점 굳었고 심장 박동 또한 빨라졌다. 

 

 

 

 벌컥, 마차의 문이 열렸고 은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저를 서쪽 성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은우는 벌벌 떨며 무작정 외쳤다. 어째서인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려움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우는 괴물, 그러니까 남자에 의해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그의 손길은 자신을 대할 때, 병사들과는 달리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 앞을 못 보는 건가.. "

 

 

 

 여린 목소리. 높으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그렇지만 부드럽고 성숙한 미성이 들려오자 은우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저를, 저를 도와주세요. 은우는 간절함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괴물을 향해 말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다가 그 괴물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잡아, 요. " 

 

 

 

 괴물, 그러니까 남자는 밧줄을 풀어주었고 은우의 팔목을 덥석 잡곤 은우를 마차에서 내리게끔 했다. 걸음걸이가 투박하고 빨랐지만 아까의 병사들이 은우에게 대했던 것과 비교하면 훨씬 괜찮았다. 발에 채는 낙엽들 때문에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숲속을 채웠다. 은우가 오기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그 괴물은, 남자는 잠시 멈춰주기도 하고 발을 맞춰주려고도 했다.

 

 

 

 어째서 나를 살려주는 것일까. 분명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신 이야기는 흉포하고, 추악한 괴물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실제로 제 손을 이끄는 것은 괴물이 아닌 사람이었다. 

 

 

 

 

 

 

 

 

 

 

 

 

 

 

 

*

 

 

 

 

 

 

 

 

 

 

 

 

 

 

 

 남자의 거처로 생각되는 오두막 속으로 들어왔다. 추웠던 밖과는 달리 따듯한 느낌이 감돌았고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은우를 낡은 의자에 앉혔다. 둘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 저기, 고마워요. 구해주셔서. "

 

 " ... "

 

 

 

 은우는 긴장되는 분위기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괴물은 추악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무서웠지만 안심되었다. 괴물의 소굴에 들어와 안심이 되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은우는 순간적으로 고민했지만 그냥 내뱉기로 했다.

 

 

 

 "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 "

 

 " 저는 차은우라고 해요. "

 

 " 아, 실례가 되었다면.. "

 

 

 

 문빈. 또 그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괴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고 불안정한 예쁜 목소리. 문빈, 은우는 빈의 이름을 몇 번 읊어보더니 빈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 빈, 예쁜 이름이네요. "

 

 

 

 아, 눈 마주쳤다. 빈은 제 얼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은우가 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게 진심으로 웃어줬던 사람이 몇 명이더라. 아마 다섯 손가락 안으로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한 손가락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둘은 이틀이라는 시간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물론 은우가 먼저 대화를 걸어오면 빈이 답하는 형식이었다.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빈에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은우가 잘 때면 빈은 자신의 침대를 내어주고 바닥에서 잤다. 빈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한 은우는 섭섭한 마음도 금방 잊어버렸다. 

 

 

 

 그리고 은우가 빈에게 나이를 물어봤을 때, 빈은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답했다. 나이를 샐 만큼 여유로운 삶은 아니었기에 곰곰이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스물, 빈이 뒤늦게 답하자 은우는 금세 활짝 웃는다.

 

 

 

 " 저랑 동갑이네요. "

 

 " 빈아. "

 

 

 

 은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빈은 작게 어깨를 떨었다. 빈의 심장이 또 벌컥거리며 뛴다. 살포시 미소를 짓고 있는 은우는 빈의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 빈이라고 불러도 괜찮지? "

 

 " .. 불러도 돼. "

 

 

 

 머뭇거리면서 답을 하는 빈에 은우는 뭐가 그리 좋은지 또 웃는다. 아무것도 못 보면서. 빈의 얼굴은 이미 웃고 있었지만 은우를 따라서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빈아. "

 

 " 은우, 나도 은우라고 불러주라. "

 

 

 

 만약 은우가 볼 수 있었다면, 나를 볼 수 있었다면 분명 시뻘게진 얼굴의 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빈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던 것도 잠시, 은우를 바로 바라보며 빈은 떨리는 입을 열었다.

 

 

 

 " 은우야. "

 

 

 

 응 빈아, 은우가 답했다.

 

 

 

 

 

 

 

 

 

 

 

 

 

 

 

*

 

 

 

 

 

 

 

 

 

 

 

 

 

 하늘이 푸르스름한 새벽에 빈은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곤히 자는 은우를 바라보았다. 은우는 옆으로 자고 있어 반쪽 얼굴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전체 얼굴은 보지 못 했지만, 어둠 속에서 봤지만, 아름다웠다. 빛이 난다는 착각을 들게 만들기도 했다.  

 

 

 

 은우의 얼굴에 무의식적으로 천천히 다가갔지만 빈은 곧 그 다가가려는 손을 거뒀다. 그리곤 발을 돌려 밖으로 빠르게 나갔다. 

 

 

 

 내가 왜 그랬지, 빈은 차가운 밖과는 다르게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한 손에는 활을 쥐고 어깨에는 화살통을 맸다. 낙엽이 거의 다 떨어진 나무는 차갑고 딱딱해 보였다. 언제봐도 달라지는 숲의 장관을 보며 거닐고 있었는데 멀리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빈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로 찾아 고개를 돌렸고 그 방향의 멀리에는 두 명의 병사가 있었다. 은우를 찾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빈은 조용히 그들을 향해 활을 겨누었고, 화살은 깔끔하게 그들의 머리를 뚫고 지나갔다. 

 

 

 

 " 은우, 은우야. 여긴 위험해. "

 

 

 

 빈은 곧바로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이미 깨어있는 은우에게 말했다. 이 곳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너, 서쪽 성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지, 내가 서쪽 성으로 데려다줄게, 자초지종 상황을 설명하고는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내가 왜 은우를 구하고 있는가, 인간을 싫어하던 괴물 아니던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해답이었다.

 

 

 

 문제는 은우를 어떻게 데리고 가느냐였다. 빈은 복잡한 머리를 잠시 긁적였다. 

 

 

 

 " 업혀. "

 

 " 나 무거울 텐데. "

 

 

 

  한번 업혀보기로 했다. 은우의 허벅지를 잡고 제 등에 올라오게 했다. 은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곧바로 은우를 내려줬다.

 

 

 

 "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

 

 

 

 은우가 미안하다는 듯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들 수는 있었지만 꽤 많은 힘을 들여야 했다. 둘은 잠시 고민하다 그냥 손을 잡고 빈이 은우를 이끌기로 했다. 자기 혼자 걸어본 적이 있다며 안심하랬다. 왕자님은 평평한 길만 걸었을 텐데요, 빈은 전과 같이 은우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곧 은우는 자신의 잡힌 손목을 조심히 빼고 빈의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마주 잡았다. 빈은 은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손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

 

 " 어어.. 그래.. "

 

 

 

 생글생글 웃는 낯짝이 예뻐 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

 

 

 

 

 

 

 

 

 

 

 

 

 

 

 

 둘은 손을 잡고, 빈은 손목을 잡으려 했지만, 서쪽 성을 향해 걸었다. 혼자라면 빠르게 갔을테지만 은우가 있어 발걸음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은우의 말에 빈은 멀리에 머리에 화살이 꽂힌 채 쓰러져있는 병사들을 흘긋 보았다. 빈은 아무 말 않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은우는 뛰어난 후각과 청각을 가지고 있었다. 시각이 없으니 다른 기능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과 왕비의 현명함도 한몫을 하였다. 빈은 조금 놀랐다. 이 정도로 좋을 줄이야. 둘은 한동안 숲의 소리만을 남겨두며 손을 잡고 빈이 이끄는대로 걸었다.

 

 

 

 " 빈아. " 

 

 " 고마워. " 

 

 

 

 처음인 게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고맙다는 말조차 저에게는 처음이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자신의 처음을 채워가는 은우였다. 빈은 왜냐고 물었다.

 

 

 

 " 그냥. "

 

 

 

 그냥 고마운 게 어딨어, 빈은 피식 웃었다. 어, 웃었다. 은우는 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또 눈이 마주쳤다. 

 

 

 

 " 나한테 처음 웃어준 것 같은데? "

 

 

 

 은우는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빈에게 말했다. 아닌데, 매일 웃고 있는데. 빈은 잠시 제 찢어진 입가를 만졌지만 이내 다시 은우를 보았다.

 

 

 

  같이 있으면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은우가 볼 수 있었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은우가 장님인 것에 연민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지만. 빈은 가짜 웃음 속 진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얼마나 걸었는지 해가 벌써 지려고 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둘은 서로가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빈은 은우의 구원자, 은우는 빈의 치료사였다. 장님과 괴물, 잘 어울렸다. 남들이 보기에는 동정의 대상이었지만, 둘은 한없이 의지할 수 있었다. 빈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 했던 감정이 꿈틀거렸다.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면서 저릿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기다란 터널. 낡은 터널의 주위에는 이끼가 껴있었다. 터널은 어두웠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빈은 우뚝 섰고 은우도 따라서 멈췄다. 바람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이런 어둠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것일까, 빈은 끝없는 암흑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결심한 듯 은우의 손을 이끌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발소리가 울렸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고 발에 돌이 채이기도 했다. 퀴퀴하고 눅눅한 냄새였다. 은우는 직감적으로 터널이나 지하실 같은 곳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암흑 속에 있는 것은 같았지만. 빈의 눈이 점차 어둠에 익숙해지자 엄청 멀리서 빛구멍이 보였다. 

 

 

 

 그 순간, 아야, 은우의 몸이 흔들렸고 빈은 은우를 붙잡았다. 어둠 속이라 발밑에 장애물이 있다는 것을 못 봤다. 자신의 불찰이라고 생각했던 빈은 사과부터 꺼냈다.

 

 

 

 " 미안. "

 

 " 네가 미안할 게 뭐 있다고. 내가 더 미안하지. "

 

 

 

 은우는 발을 접질렸다. 아프면서 괜찮은 척 했다. 빈은 칠흑 같은 암흑한테 괜히 짜증이 났다. 업혀, 빈은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은우를 이끌었고 업어 들어 올렸다. 성인 남자를 업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은우는 보이지 않을 테지만, 저보다 키가 조금 더 컸다. 빈은 한 발, 한 발 차분히 나아갔다.

 

 

 

빛이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불편한 일이었다. 세상을 본 적이 있는 빈에게 갑자기 차단되는 시야는 빈을 무력화시켰다. 은우가 대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빈아 나 안 무거워? "

 

 " 괜찮은데. "

 

 

 

 푸흐흐, 은우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네. 귓가에 대고 그러지 말라고. 빈은 몸을 살짝 움츠렸다가 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탓인지 빈은 귓가에 들려오는 은우의 목소리와 숨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

 

 

 

 

 

 

 

 

 

 

 

 

 

 

 

 기나긴 어둠 속을 빠져나오자 하늘은 불타고 있었다. 예쁜 주황빛이 빈과 은우를 덮쳤다. 빛이 이렇게 감사한 존재라니. 빈은 갑작스러운 밝은 석양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지만 곧 제 시야에는 활짝 웃고 있는 은우가 들어왔고 저도 따라 웃었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은우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는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빛이 가득했다. 상쾌한 겨울 공기가 둘을 반겨주었고 직선으로 뻗어 나오는 태양 빛은 둘을 금색 융단으로 덮어주었다. 

 

 

 

 " 빈아 쉬다 가자. 힘들겠다. "

 

" 그럴까. "

 

 

 

 둘은 나무가 트여 석양이 잘 보이는 숲속 한가운데에 앉았다. 서쪽 하늘이 장관인 곳이었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둘의 거리는 전보다 가까웠다. 은우는 비록 보이지 않았지만 햇빛의 따스함은 느낄 수 있었다. 빈은 파고들어 오는 빛에 눈을 반쯤만 뜨고 있었고, 은우는 눈을 온전히 다 뜨고 있었다. 

 

 

 

 은우야. 빈의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빈아. 은우는 빈의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은 살포시 은우의 손을 잡아 느릿하게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댔다. 정확히는 그 옆이었다. 자신의 기다란 흉터, 웃는 모양의 상처 위에 은우의 손을 덮었다. 빈은 은우를 바라보았고 은우의 눈은 초점이 없었지만 반짝이고 있었다. 빈은 자신의 상처 위에 닿은 은우의 손등을 꼭 잡았다. 너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나의 이야기. 빈은 은우에게 맞추던 눈을 아래로 떨궜다.

 

 

 

 " 나는 어릴 때, 곡예사였어. 미천한 광대. 귀족들 앞에서 춤을 추고 재주를 부리던 광대. 가족이랄 것도 없지만, 아버지라는 사람은 나를 팔았어. 이 상처는, 이 지울 수 없는 얼굴은, 그때 생긴 거야. "

 

 

 

 은우는 괴물이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는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어릴 적, 그러니까 빈이 4살이 되던 해에, 노예로 팔려 간 빈은 강제로 입이 찢기는 수술을 받았다. 입을 활짝 웃는 모양으로 찢고 그 위에 다른 피부 조직을 끌고 와 웃음이 절대 사라지지 않게 만들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형과 기괴함에 열광하는 귀족들 때문이었다. 빈은 어렸다. 왜 팔려 가는 지도 왜 수술을 받아야 하는 지도 몰랐다. 아직도 남아있는 그 생생한 공포는 빈의 심장에 말뚝처럼 깊게 박혀 있었다. 피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어 가던 칼의 느낌, 살려달라고 온 몸의 세포들이 외치던 그 날, 아직도 눈을 감으면 모든 것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웃는 남자. 한때 빈의 별명이었다. 빈의 얼굴을 본 자는 곧 죽을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웃었다. 곡예사가 아닌 웃는 괴물이 춤을 추는군! 환멸이 났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과 탐욕이 선량한 인간을 더럽혔다.  

 

 

 

 몸은 커질 수록 훤칠해졌고 골격과 근육이 균형 있게 잡혀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빈을 보는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저 얼굴이 선천적으로 탄생한 것이 아닌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은 기형이었지만 그의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커다랗게 자리 잡은 날카로우면서도 순한 예쁜 눈을 봐서, 이전에는 수려한 얼굴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의 웃음은 기쁨과는 달랐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아니었다. 그의 외면은 내면은 극과 극에 있었다. 그의 내면 속에는 기쁨, 분노, 슬픔 등의 여러 가지 감정들로 엮어져 있었지만 외면은 기쁨, 아니 영원한 웃음 하나 뿐이었다. 빈은 세상을 볼 수 있었지만 자기 자신만은 볼 수 없었다. 자신의 본 모습은 벗겨지지 않는 기괴한 가면에 의해 가려졌다. 어쩌면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빈은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인간이 싫었다. 자신 조차도 인간이라는 것에 혐오감이 들었다. 악몽을 꿀 때면 언제나 희뿌연 거울을 보는 자신이 나왔다. 입은 길게 찢어져 피를 뚝뚝 흘리고 괴물로 변해갔다.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면 목 놓아 울고 싶었다. 죽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도 없었다. 빈은 왕자의 생일이 다가오기 하루 전 성에서 칼을 챙겨 탈출하였고 그 뒤로 웃는 남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빈은 숲으로 도망을 갔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숲 깊숙이 들어갔다. 안개가 껴 있던 숲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고 나무는 날카롭게 뻗어 꼭 빈의 입을 찢을 것만 같았다. 칼을 잡고 있는 손은 잘게 떨렸다. 꼭 귀신이라도 나와서 저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아직 15살밖에 되지 않았던 빈은, 산짐승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면 지신의 몸을 웅크리는 일밖에는 하지 못했다.

 

 

 

 빈이 숲에 들어온 지 벌써 5일째 되던 날이었다. 또 밤이다. 두려움에 덜덜 떨고 있던 그때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사람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의 인영. 빈은 배고프고 추웠다. 빈은 조심스레 불빛으로 다가갔다. 살려주세요. 한 사람이 아닌 일행이었고 그들은 빈을 보자마자 기겁하던 것도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 하하하, 징그럽게 생긴 괴물이! "

 

 " 웃는 남자의 등장이구먼 그래! "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배꼽을 부여잡고 껄껄거렸으며 숨이 넘어갈 뻔하기도 했다. 빈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도움을 청해도 돌아오는 것은 웃음 뿐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그 악랄한 웃음소리가 빈을 서서히 죽여갔다. 빈은 분노에 지쳐 가지고 있던 칼을 치켜 들었다.

 

 

 

 그 날 빈의 몸은 다른 사람의 피로 뒤덮였다. 많이 지쳤다. 정신은 이미 피폐해진 지 오래였고 망가진 지 오래였다. 한계의 낭떠러지에 다다른 빈은 다짐했다. 인간과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리라고. 나를 본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겠노라고. 빈은 결국 자신의 꿈속에서 보았던 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빈은 숲속에 있는 버려진 오두막을 찾아 그 안에 자신의 몸을 숨겼다. 조용한 숲에서 침묵을 지키며 살아가는 중이었다.

 

 

 

  은우와 처음 만난 그 날, 다 죽이려했다. 보자마자 괴물이라고 외치는 무례한 자가 어디있나. 다 죽이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급스러운 마차였다. 안을 열어보니 사람이 있었다. 공포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은우,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헐어버린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은우는 자신과 대비되는 고급스러운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빈은 잠시 인상을 찌푸리곤 떠오르는 생각들을 털어버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은우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아 저를 바라보게 했다.

 

 

 

 아름답다, 은우를 보자마자 드는 생각이었다. 나와는 대비되는 사람. 빈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만 전혀 기겁하지 않는 은우를 보고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장님이구나. 나를 보지 못한다. 영원한 암흑 속에 갇힌 사람과 영원히 얼굴을 잃어버린 사람, 아니 괴물. 비참하면서도 잘 들어맞는 조합이었다. 빈은 도와달라는 은우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인간인데 도와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우가 빈을 바라보며 웃었던 날, 빈은 한숨도 못 잤다.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따스함이 그리웠던 탓인지 빈은 심장이 두근거려 도저히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가슴 언저리가 간질간질한 느낌. 이상했다.

 

 

 

 " 빈아. "

 

 " 비록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

 

 " 나는 너를 통해 천사를 봤어. "

 

 " 너는 괴물이 아니야. "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은우는 빈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둘의 사이로는 따스한 석양만이 붉은 꽃을 피워내며 조용히 내려앉고 있을 뿐이었다.

 

 

 

 

 

 

 

 

 

 

 

 

 

 

 

*

 

 

 

 

 

 

 

 

 

 

 

 

 

 

 

 

 

 

 

 어두워진 숲은 고요했고 차가웠다. 더 움직이는 것은 위험할 것 같아 여기서 자야했다. 또 은우의 발목 또한 휴식이 필요했다. 꽤 멀리 걸어왔는데 이게 맞는 길인지, 무작정 서쪽 성으로 가는 길을 안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진정으로 아는 것인지.

 

 

 

 모르겠다, 빈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드러누웠다. 은우 또한 스스럼없이 드러누웠다. 의외로 쉽게 땅바닥에 기댄다. 왕자라서 주저할 줄 알았는데. 빈은 제 옆에 누운 은우를 바라보다가 별이 뿌려진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 은우야. " 

 

 " 응, 빈아. "

 

 

 

 빈은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우의 눈 안에서 보았던 드넓은 우주였다. 심장이 콩닥거리기도 했다. 밤의 분위기에 취해 은우를 불렀다.

 

 

 

 " 너랑 있으면 기분이 뭐랄까.. 좋아. "

 

 " 그러면서 동시에 가슴이 답답해. "

 

 " 이 느낌이 뭔지는 모르겠어. "

 

 

 

 은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빈은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솔직하고 순진한 빈의 진심. 은우는 살포시 웃음을 흘렸다.

 

 

 

 " 나도 같은 느낌이야. "

 

 

 

 나는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은데, 은우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아니다, 빈아 잘 자. 응, 너도. 은우는 눈을 감았고 잠을 청했다. 빈은 드넓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가슴 한 켠에 몽우리처럼 자리 잡은 이 감정은 무엇인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빈도 눈을 감았다.

 

 

 

 

 

 

 

 

 

 

 

 

 

*

 

 

 

 

 

 

 

 

 

 

 

 둘은 또 걷고 걸었다. 서쪽을 향해서 한없이 걸었다. 손을 마주 잡고, 이번에는 빈이 먼저 잡았다. 날이 흐렸다. 곧 비가 올 것처럼 구름이 가득 껴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잿빛 하늘이 둘을 반겼다. 빈은 그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운수가 나쁠 것만 같은 느낌이 빈을 덮쳤다.

 

 

 

 " 빈아. "

 

 " 만약 우리가 성에 도착한다면, 우린 헤어지는 걸까. "

 

 

 

 흔들림없이 단조로운 말투였다. 빈은 잠시 당황해 은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 도착한다면야.. "

 

 " 난 그러기 싫은데. "

 

 

 

 어떻게 되는 거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빈이 망설이며 내뱉은 말은 은우에 의해 끊겼다. 빈은 멍해졌다. 우리는.. 결국 대답을 못 했다. 헤어지기는 싫었지만, 또 둘만의 세상이 아닌 곳에는 가기 싫었다. 아니 갈 수 없었다. 빈은, 경계를 넘어 들어가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존재였다.

 

 

 

 그때, 둘 말고 다른 이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빈과 은우는 동시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고 우거진 나무 사이로 숨었다. 빈이 은우를 더 안쪽에 들어가게 도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쪽에 세 명, 빈과 은우가 가는 쪽으로 향하는 병사들이 있었다. 마차에서 봤던 병사들과 같은 차림새인 것을 보아 적이다.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저 길로 가야 하는데 병사들이 떡하니 지키고 있었다. 이대로 잡히면 끝이었다. 

 

 

 

 빈은 머리를 굴렸다. 제 허리춤에 있는 칼을 만지작거렸다. 어떡하지, 상황을 물어오는 은우를 한 번 바라보곤 결심한 듯 말했다. 

 

 

 

 " 은우야, 여기는 안전하니까 꼭 숨어있어. "

 

 " 빈아, 위험해. 한두 명이 아니었어. "

 

 " ... 잠시만 갔다 올게. "

 

 " 꼭.. 조심해야해. "

 

 

 

 은우는 빈을 막으려했지만 빈은 괜찮다며 은우를 타일렀다. 금방 돌아올 거야. 은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빈은 상체를 일으키곤 허리춤에 넣어두었던 호신용 단도를 뽑아 들었다. 그래, 나는 괴물이야. 은우의 따듯함에 잠시 방심하고 있었다. 빈은 숨을 들이 마시고 병사들의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빈은 발소리도 죽이고 병사들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쫓았다. 그리곤 뒤에서 내리 꽂았다.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병사는 쓰러졌고 나머지 병사들이 빈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칼을 뽑아 들었다. 상대가 장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거리를 좁혀 공격하기 어려웠다. 

 

 

 

 빈은 몸을 빠르게 움직여 병사의 목을 급습했다. 하마터면 칼에 어깨를 베일 뻔 했다. 그리고 남은 한 명, 겁에 질려서는 뒤에서 빈을 내려치려 하고 있다. 빈은 휙 뒤돌아 칼을 던졌고, 마지막 병사의 눈을 명중시켰다. 고통에 울부짖으며 쓰러졌다. 빈은 천천히 다가가 쓰러진 병사의 눈에 정갈하게 박힌 칼을 뽑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었다. 그 순간이었다.

 

 

 

 푹, 작은 은빛 칼날이 빈의 왼쪽 옆구리를 쑤셨다. 빠져나갔다가 이미 뚫려버린 곳을 또 뚫는다. 윽, 칼을 또 가지고 있을 줄이야. 힘이 남아있었는지 한참 전에 엎어져 있던 병사는 빈의 옆구리를 맘껏 갈겨놓고는 맥없이 쓰러진다. 빈도 동시에 다리가 풀렸다.

 

 

 

 쿨럭, 입에서 나오는 검붉은 액체가 낯설게 느껴졌다. 손이 잘게 떨리고 힘이 축축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다. 얼굴이 칼로 난도질 당했던 그날의 느낌. 빈은 옆구리를 부여잡고는 입술을 콱 깨물었다. 빈은 고통스러웠지만 웃고 있었다. 괴물의 탈을 쓴 인간에게는 웃는 얼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죽을 것 같다, 이는 지금까지 겪었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죽음에 대한 공포, 인간 모두는 이 생소한 공포를 언젠가는 반드시 경험하게 된다. 언젠가 느끼게 될 감정인데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까 두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어차피 겪을 건데. 언젠가, 라는 단어가 현재의 자신에게는 안심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자 빈은 고통이 섞인 한숨을 쉬었다. 그 꼬리를 물어 생각난 마지막은 은우였다. 혼자 있는 은우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고통에 휘청거리던 몸을 바로잡고 쓰러진 병사의 흰 옷가지를 찢어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감았다. 아무한테도 배우지 않았지만, 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피를 다 쏟아내면 은우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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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스럭, 누군가가 급하게 낙엽을 밟는 소리, 빈의 발소리다. 숨죽여 웅크리고 앉아있던 은우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발소리였지만 빈과 다시 재회했다는 기쁨 때문에 그 작은 부분까지는 알지 못 했다.

 

 

 

 “ 보고 싶었어, 빈아. ”

 

 “ 아이, 그 사이에 뭘.. 음, 그게.. 사실 나도. ”

 

 

 

 빈은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은우는 그 말에 소리가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빈은 은우를 따라 웃었지만, 아니 이미 웃는 모습이었지만, 입에서 왈칵, 흘러나오는 피에 말은 하지 못했다. 빈은 은우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티 내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 자신의 왼쪽 옆구리를 바라보니 지혈하려 썼던 하얀 천이 어느새 검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젠장, 빈은 조용히 욕을 곱씹었다.

 

 

 

 “ 그 사람들이 또 올 거야. 위험해지기 전에 얼른 여길 떠나야 해. 자, 잡아. ”

 

 

 

 빈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은우의 어깨를 토닥이며 일어나라고 손을 잡는다. 하지만 은우는 주저앉아 일어나지를 않았다. 아니 얘가 왜 이래, 아무리 가자고 부추겨봐도 요지부동이었다. 빨리 가야 한다니까, 빈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은우의 표정을 보고는 도로 삼켰다. 빈의 말문을 막히게 만든 은우의 표정은 곧 울 것만 같았다. 아, 눈 마주쳤다.

 

 

 

 “ 야, 왜 갑자기 울고 그래.. ” 

 

 “ 그치만.. 그치만.. 빈아.. ”

 

 

 

 

 

 

 

 

 

 

 

 

 

 

 

 

 

 

 

 

 

 

 

 

 

 

 

 

 

 

 

 

 

 

 

 

 

 

 

 

 

 

 

 

 

 

 

 

 

 너한테서 피 냄새가 너무 많이 나. 

 

 

 

  

 

 은우의 투명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그의 먹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은우의 후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은우의 말에 놀라 굳은 것도 잠시, 그의 웃고 있는 얼굴과는 반대로, 빈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울지마, 빈이 은우를 부드럽게 타일렀다. 빈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에서 말을 꺼냈다.

 

 

 

 

 

 

 

 

 

 

 

 

 

 

 

 

 

 

 

 

 

 

 

 

 

 

 

 

 

 

 

 

 

 

 

 

 

 

 

 

 

 

 

 

 

 “ 은우, 은우야, 나는 추악한 괴물이야. 피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해. ”

 

 “ 하지만.. ”

 

 

 

 빈은 가만히 서 눈물을 흘리는 은우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래, 나는 괴물이지. 간신히 빠져나왔던 구멍에서 바닥 끝까지 떨어졌다. 은우의 아름다운 얼굴에 빈의 손에 묻어있던 피가 묻었다. 이제 가야지, 난 괜찮아. 응. 빈은 은우의 손을 잡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안전한 곳까지만, 안전한 곳까지만 가자. 눈치 없는 피는 계속해서 상처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은우의 손을 맞잡은 빈의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은 은우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동하는 피 냄새. 빈은 자꾸만 다른 이의 것이라고 부정을 한다. 은우는 답답했다. 빈을 향한 걱정이 은우를 가득 채웠다. 볼 수가 없으니 빈의 말을 믿는 것만이 전부였다. 숲길은 험했고 빈은 위태로웠다. 은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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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을 빠져나오자 아름다운 들판이 펼쳐졌다. 푸른색을 잃은 풀들은 누랬다. 숲 밖은 이리도 예뻤던가. 하늘의 색도 회색 구름이 걷혀 하늘색과 노란색이 어우러져 있었다. 해가 질 시간이었다. 들판의 끝에는 정말 성같은 것이 보였다. 하하, 제대로 찾아오긴 했네. 선선한 바람이 불어서 어째 기분이 좋기도 했다. 은우는 바람의 흐름을 따라가 이곳을 훑었다. 빈 또한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빈은 입에서 을컥 올라오는 뜨거운 피의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말이 자꾸 끊겼다. 흔들리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자신의 배는 천의 하얀 부분은 온데간데없고 이미 검붉은 색 피로 축축하게 적셔진 지 오래였다.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던 몸조차 망가지려 했다. 바다가 덮쳐버린 모래성처럼 빈도 부서져 버렸다. 

 

 

 

 " 이제 거의 다 왔, 는데... "

 

 " 빈아! "

 

 

 

 은우의 손을 잡았던 빈의 손이 손에 담긴 물처럼 천천히 빠져나갔고, 빈의 몸은 뒤로 고꾸라졌다. 털썩, 풀이 빈에 의해 뭉개지는 소리도 났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은우는 자석처럼 빈의 몸을 따라갔다. 고급스러운 하얀 옷이 더럽혀져도 상관없었다. 차가운 가을의 땅에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빈의 몸을 흔들었다. 

 

 

 

 " 빈아, 일어나, 빈아.. 너를 잃고 싶지 않아.. "

 

 " 흑, 나 때문에, 미안해, 미안합니다. "

 

 

 

 피 냄새가 진동하는 빈을 절박하게 붙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냈다. 은우의 눈에서는 예쁜 구슬방울이 하염없이 떨어졌다. 우니까 바보 같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 은우야. "

 

 

 

 어둠 속에서 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아 불안했다. 하지만 빈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바랜 황금빛 땅은 붉은색으로 물들여져 갔다. 왜 이 감정을 이제야 알아버린 것일까, 빈은 두 팔을 들어 올려 은우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곤 제 쪽으로 조심스레 데려와 입을 맞췄다.

 

 

 

 " 사랑해. "

 

 

 

 은우의 얼굴을 감쌌던 두 손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괴물의 입맞춤은 한없이 달콤했지만 한없이 썼다. 은우는 뚜렷한 손짓으로, 허공에 헤매지도 않고, 빈의 상처가 남아있는 얼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아, 나의 아름다운 사람아. 나도, 나도 사랑해. 이제 빈에게는 들리지 않을 소리를 눈물과 함께 늘어놓았다. 은우의 눈은 시력을 얻었지만 빛을 잃었다. 이름 두 글자를 외치며 하염없이 목놓아 우는 왕자의 뒤로는 둘만의 비밀을 새겼던 주황빛의 석양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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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저주를 받은 그 자손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게 된다면.. '

 

' 찾게 된다면 어찌 되느냐. '

 

' 진정한 사랑과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영원히 함께할 것을 기약하게 됩니다. ' 

 

 ' 왕비가 불행할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상관 없다. '

 

 

 

  

 

 

 

 

 

 

 

 

 

 

 

 

 

 

 

 

 

 

 

 

 

 

 

 

 

 배게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던 은우는 눈을 떴다. 정 자세로 자려 하면 잠이 도통 오질 않았다. 자신이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탓에 얼굴을 묻고 자는 것은 자연스레 생긴 습관이었다.

 

 

 

 헉, 빠르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은우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땀이 난 탓인지 축축한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기나긴 꿈을 꾼 느낌. 모든 것을 담아내는 은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나왔다. 은우는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만져보았다.

 

 

 

 " 일어났어? "

 

 

 

 은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봤다. 이제 막 샤워를 끝낸 듯한 빈이 방으로 들어오더니 멍하니 눈물을 흘리는 은우를 보고는 호다닥 달려와 은우의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 뭐야! 차으누 왜 울어! "

 

 " 어어.. 빈아.. "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은우는 몇 번 끔뻑거리다가 빈을 꼭 껴안았다. 빈의 달곰한 샴푸향이 코 끝을 간지럽히니, 은우는 괜스레 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꿈을 좀 꿨어. 뭐야아.. 놀랐잖아. 둘은 한동안 서로를 껴안은 채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 빈아. "

 

 

 

빈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은우는 나지막이 말했다.

 

 

 

" 나도 사랑해. "

 

" 전해주고 싶었어. "

 

 

 

 곁에 있어 줘서, 항상 고마워. 푸시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오글거리면서도 애틋한 느낌. 빠르게 쿵쾅거리던 심장이 콩닥콩닥 안정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 아이, 너 무슨 꿈을 꿨길래 갑자기.. 참 부끄럽네.. 헤헤 사랑해 은우야. "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목을 긁는 빈이 보였다. 나의 낙원, 나의 천사, 그리고 나의 사랑. 둘은 얼굴을 마주 봤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곤 동시에 느리게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진하게 키스까지. 부드럽게 손을 마주 잡고 침대에 빈을 조심스레 눕혔다. 

 

 

 

 " 오늘따라 적극적이네. "

 

 " 하아, 너도 마찬가지야. "

 

 

 

 둘은 끈적하게 맞대고 있던 입술을 떼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처럼 키득거렸다. 평생 사랑해 문빈. 아 왜 성붙여서 부르냐, 나도 차은우. 빈의 입은 삐죽거리면서도 기쁨과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진실한 마음? 화려한 용모? 거대한 자연? 이처럼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차은우는, 적어도 차은우는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 있다. 이러한 질문을 받는다면 그는 당당하게 이름 두 글자로 아름다움을 정의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언제나 제 곁에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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