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에서 새벽까지 상

2020 가을호
작성자
따란
작성일
2020-10-24 23:17
조회
45

계간은콩, 가을 : 반대, 불멸과 필멸

황혼에서 새벽까지 上

w.따란

 

 

 

 

 

“야 빈아. 너 집에 가서 좀 자라.”

 

 

 

창백한 안색을 보다 못한 명준이 등을 떠밀었다. 빈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쌓아놓은 노트와 참고서를 매만졌지만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다. 공부하던 자료들을 간신히 사물함에 집어넣은 문빈이 잠깐 휘청였다. 용케 쓰러지지 않고 버틴다. 명준이 혀를 찼다.

 

 

 

“운전하지 말고 택시 타.”

“괜찮아. 금방 가는데.”

“그러다 골로 간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색한 침묵이 돌았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 걸. 빈은 겨우겨우 미소를 입에 걸고 손을 흔들었다. 가볼게, 내일 봐.

 

시험 기간을 맞은 캠퍼스는 밤을 잊었다. 거기에 더해 공부량으로 어디에도 밀리지 않는 의대 예과생인 문빈은 오죽할까. 물론 시험 때문만은 아니었다. 빈이 집을 나선 지 이제 36시간쯤 지났고, 딱 그만큼 그는 잠을 자지 않았다. 무서웠다. 꿈에 엄마가 나올까 봐. 그러니까 일종의 도피였던 셈이다. 하지만 사람이 영원히 도망칠 수는 없고, 결국은 이렇게 패잔병처럼 집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혹사한 머리와 몸의 피로로 감정이 무뎌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뻑뻑한 눈가를 대충 문지르며 빈은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가장 작고 낡은 승용차에 올라탔다. 바깥과 단절된 공간에 홀로 남자 다시금 상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더 생각해서 뭘 어쩌겠어? 이미 하나뿐인 가족은 눈을 감았고 장례를 치른 지 2주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중간고사는 당장 내일모레다. 시동을 걸고 핸들을 돌리는 빈의 움직임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캠퍼스를 나서자 도로는 이상할 정도로 통행량이 없었다. 별일이네. 나야 좋지만. 빈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밀려들어와 빈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무거운 머리가 깨어나는 기분. 이윽고 자동차는 교차로에 진입했다. 마침 신호등이 노란불로 바뀌는 타이밍이었는데, 빈은 그걸 무시하고 그대로 액셀을 밟으며 좌회전했다. 과감함이 무모함이 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빈은 갑작스레,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게 된다. 문빈은 비명을 질렀다.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빛나고, 채 브레이크를 밟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가까워진 남자와 차가 부딪쳤다. 꽝, 하고 요란한 소리가 어둠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멈춘 차에서 빈이 비틀비틀 내렸다.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 차는 반파되었고,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에어백이 터지면서 더 큰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헉헉, 밭은 숨을 내쉬며 빈이 절뚝절뚝 앞으로 나왔다. 보통 세게 부딪친 게 아니었다. 운전자인 빈의 상태가 이 정도인데 상대방은... 빈의 눈이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아?

 

다음 순간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 만다. 검은 옷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마치 방금의 사고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태연히. 남자의 검은 옷 위로 박살 난 차 유리 조각이 붙어있지 않았다면 빈 역시 뭔가 착각한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아. 다행이야. 무사해서...

 

힘없이 중얼거린 빈은 맥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제야 통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피가 점점 더 많이 흘러나왔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안쪽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눈을 한번 깜박이는 사이 바닥에 스르르 쓰러졌다. 빈은 죽어가고 있었다. 옆으로 돌린 시선으로 다가오는 남자가 보였다. 점점 시야가 흐려졌다. 남자가 몸을 굽히고 얼굴을 가까이 대는데, 빈은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남자가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의 의식이 다시 돌아온 것은 병원이었다. 마치 메아리처럼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단어의 나열과 문장 하나하나를 흘려듣던 빈은 그것이 곧 의사의 목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트 왜 이래? 잘못 적은 거 아냐?”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히,”

 

 

 

빈이 눈을 떴다. 하얀 천장과 빛나는 형광등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빈은 조금 주저하다가 몸을 움직여보았다. 뜻밖에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진통제를 얼마나 쓴 거야? 거추장스러운 산소호흡기를 잡아당겨 떼어내고, 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에 아직도 차트를 가지고 옥신각신 중이던 의사와 간호사는 귀신을 본 것 마냥 놀라 비명을 질렀다.

 

빈은 새삼스럽게 그들을 훑었다. 의사의 덜 깎인 수염 자국과 차트를 쥐고 있는 간호사의 투명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 약간 바랜 벽, 한쪽이 어두운 형광등, 미미하게 남아있는 꽃향기, 소독약 냄새, 지울 수 없는 음울한 그림자...

 

이상했다.

 

 

 

“정말 이상할 정도로 다치신 곳이 없네요.”

 

 

 

조금 야박하게 들리는 의사의 그 말이 전부가 아니었다. 빈은 마치 장님이 눈을 뜨듯, 귀머거리가 소리를 듣게 되듯 새롭게 열린 감각에 놀란 상태였다. 이건 마치, 이건 마치... 새로 태어난 것 같았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가고 혼자 남은 빈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멀쩡했다. 빈은, 믿을 수 없는 회복력을 인정하는 대신 처음부터 다치지 않았다고 판단했던 아까의 그 의사처럼 사고가 실재한 일이었는지부터 의심하기 시작했다. 죽어간다고 생각했던 그 느낌은 사실 나의 엄살이 아니었을까? 사고같은 건 전부 나의 꿈이었고 그냥 운전하다 기절해서 실려온 게 아닐까?

 

바람이 불어 빈의 머리를 간질였다. 빈은 무심결에 다시 시선을 올렸다. 열린 창가에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그 남자가 기대 서있었다. 그랬다. 아까의 사고도, 죽어가던 그 느낌도 전부 현실이다. 그리고 빈에게 번개처럼 깨달음이 찾아왔다. 지금의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 너무나 멀쩡해서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몸, 극도로 예민해진 오감, 이 모든 게 저 남자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안녕.”

 

 

 

남자의 목소리는 권태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구세요?”

 

 

 

빈은 자신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딱딱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남자는 그 말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단순한 형태의 검은 코트를 멋진 핏으로 소화한 남자는 마치 금방 화보 촬영이라도 하고 온 모델 같았다. 그의 하얀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빈은, 정신을 잃기 전 감탄했던 외모가 헛것은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누구냐…. 라고 물어보니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어. 이름을 물어보는 건가? 아니면 당신과의 관계성에 입각한 대답을 원하는 건가? 혹은 단순히 나의 종 種을 묻는 건지, 여긴 어쩐 일이냐는 뜻의 관용적 표현인지...”

 

 

 

혼잣말이 익숙한 것처럼 빈의 질문에서 파생된 수많은 가능성을 제기한 남자는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빙긋 웃었다.

 

 

 

“전부 다 알려주면 되겠어. 시간은 많으니까...”

“저...”

“내 이름은 차은우. 당신은 나를 차로 쳤어. 나는 일단 네 보호자야. 널 보러왔고…. 그리고...”

 

 

 

남자는 아주 천천히, 빈이 앉아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매우 부드럽고 정중한 움직임이었지만 빈은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남자는 보면 볼수록 어딘가 이상했다. 멋진 인간의 껍데기를 쓴 아주 이상야릇한 존재 같았다. 문빈 같은 평범한 인간은 평생 상상도 못 해볼 그런 무언가. 인간 이상의, 그래, 포식자.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빈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 같은 그런 상위의 존재…. 남자의 눈이 빈을 똑바로 향하자, 반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남자의 입술이 좌우로 크게 열렸다. 유난히 송곳니가 길었다.

 

 

 

“나는 밤의 인간이야. 너희들 말로는, 그래. 흡혈귀라고 하나?”

 

 

 

빈은 지금 이게 꿈이었던가, 하고 아연실색한 얼굴로 눈앞의, 자신의 이름을 차은우라고 소개한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의 기억 속에 드문드문 공포영화의 몇 장면이 지나갔다. 이 잘생긴 남자가 흡혈귀라니, 지나치게 현실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아까의 사고부터 계속된 이 이상한 모든 것들은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하려고 하지 마. 그냥 받아들이면 돼.”

 

 

 

남자는 깔끔하게 훈수를 두었다. 그는 우아한 몸놀림으로 빈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결 좋은 까만 머리카락과 단순한 핏의 까만 코트, 까만 눈동자까지. 그는 밤의 한 귀퉁이를 떼어다 빚은 것 같은 남자였다. 밤의 인간.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였다. 뱀파이어라는 명칭보다 훨씬.

 

 

 

“나를 해칠 건가요...?”

“해칠 거냐고? 그건 바로 지금을 이야기하는 건가? 아니면 앞으로의 가능성을 묻는 건가? 너의 몸, 마음, 혹은 지금 네가 유지하고 있는 그 어떤 상태를 망가뜨릴 거냐는 질문인가? 글쎄. 너에게 그중 하나는 ‘그렇다’가 될 것 같아. 그게 무엇인지는 생각해보도록 해.”

 

 

 

차은우라는 남자의 화법은 상당히 독특했다. 그는 빈의 짧은 질문에서 대답할 수 있는 최대한을 끌어냈다. 그게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빈에게 가지는 관심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생각이 떠올라서 그런지는 몰랐다. 대답이 없자 남자가 빈 가까이 몸을 숙였다. 달빛처럼 하얀 살결에서 냉기가 훅 끼쳤다.

 

 

 

“대답해.”

 

 

 

당황한 빈이 네, 하고 작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유리 같은 눈동자 위로 빈의 얼굴이 비쳤다. 차은우는 그제야 만족한 것처럼 눈을 휘며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또 분위기가 다른걸. 빈은 도무지 남자에게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겉모습은 빈의 또래 같았다가, 입을 열자 영화 속에 나오는 뱀파이어처럼 아주 나이가 많아 보였다가, 방금은 또 천진한 소년 같다.

 

 

 

“네 목소리를 듣는 게 즐거워. 누군가와 대화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인데.”

“당신 몇 살인데요?”

 

 

 

빈의 대담한 질문에 은우는 정말이지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의 모습이 잠깐 흔들리는 것 같아서 빈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다음 순간은 차은우는 빈의 오른쪽에 앉아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의 모습보다도 특유의 냉기가 먼저 느껴졌다. 바싹 굳은 빈의 턱을 엄지로 쓸어내리며 은우의 낮은 목소리가 빈의 귓바퀴를 타고 흘렀다.

 

 

 

“곧 상관없게 될 거야.”

 

 

 

누가? 내가? 아니면 당신이? 빈이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은우는 사라지고 없었다.

 

 

 

 

 

 

 

 

 

 

빈은 바로 그다음 날 퇴원했다. 의사는 혹시 모를 후유증에 대비해 조금 더 입원할 것을 권했으나, 사실 그도 빈의 몸 상태가 전에 없이 건강하다는 데 동의했다. 충격적인 사고를 겪은 후 푹 잔 덕인지, 지금까지 쌓여있던 피로가 모두 날아가버린 빈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오감은 여전히 잘 벼려진 칼처럼 예민했다. 이틀간의 갑작스러운 결석 후, 그는 다시 학교로 복귀했다.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빈의 동기나 교수들은 그가 당했던 차 사고가 아주 경미한 줄로 안다. 굳이 나서서 반파된 차를 자랑하고픈 마음도 없어서 빈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당장의 시험에 집중했다. 그리고 수수께끼의 남자 차은우에 대해 생각했다.

 

죽어가는 중이라고 느꼈던 것은 과장이 아니다. 개인적인 감상뿐만 아니라 폐차할 수밖에 없을 만큼 크게 망가진 자동차만 봐도 그랬다. 쓰러진 자신에게 다가왔던 차은우. 그때 그는 빈에게 분명 무언가를 했다. 큰 키를 굽혀서, 쓰러진 자신에게 다가와 뭐라고….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붉은 입술이 움직이는 게 보였었는데...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책상 위에 이마를 쿵 하고 박았다. 사실 이대로 다시 차은우를 만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혼란만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가까이해서 좋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를 만날 때 온몸이 곤두서는 긴장감을 또 느끼기 싫었다. 인생에 한 번 정도 겪을만한 미스터리로 남겨두면 안 될까? 예민한 오감 정도야 아슬아슬하게 정상 범주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골똘히 생각에 잠긴 빈을 명준이 흔들었다.

 

 

 

“실습 가자.”

“엉 알겠어.”

 

 

 

잠시 후 빈은 웃음을 잃었다.

 

정상이 아니다. 식은땀을 흘리는 빈을 향해, 명준이 괜찮냐고 물어왔다. 빈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는 해부 실습 중이었다. 앞에서 설명 중인 교수가 그의 상태를 알았다면 절대로 빈을 순순히 실습실에 들여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빈은 겨우 해부학 교실을 빠져나와 땀에 젖은 가운과 실습복을 벗었다.

 

정상이 아니다.

 

차은우, 그는 빈에게 무슨 짓을 했다. 그것은 죽어가던 그를 살리고 오감을 인간 이상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해부용 시체를 보며

 

식욕을 느꼈다.

 

같은 종의 인간을 보며 식욕을 느끼는 게 정상인가? 나는 지금 정상인가? 인간은 맞나? 사실은 그날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차은우는 자신을 밤의 인간이라고 소개했지만 진짜 인간이라기보다는...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굽어보는 것 같았던 그 나른한 시선과 소름 돋던 냉기. 몹시 나쁜 예감이 들었다. 차은우를 만나야만 했다.

 

하지만 차은우는 그 뒤로 빈을 찾아오지 않았다. 빈은 그와의 알 수 없던 대화를 떠올리며, 그가 다음번의 만남을 시사했음을 눈치챘으나 이쪽에서 먼저 행동을 취할 방법은 없었다. 빈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다잡았다.

 

입원했던 병원을 찾아가 보았다. 보호자의 사인이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최면에라도 걸렸던 것처럼 빈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그에 관한 모든 것을 통째로 뽑아낸 것 같았다. 차는 이미 폐차했고, 경찰에 접수된 사건은 없었고, 빈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고가 났던 지점을 향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정말로 아무것도.

 

 

 

 

 

 

 

 

 

 

빈이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3주가 지난날이었다. 그동안 빈의 속은 하루하루 타들어 갔다. 해부 실습 때마다 시체의 맨몸, 살덩이, 절개된 내장을 보며 구역질이 나오는 대신 입안에 침이 고이는 현상은 계속되었다. 다행히 식욕은 빈이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날이 갈수록 갈망이 강해지고, 실습 때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 ‘식욕’이란 것이 돌기 시작한다면...

 

하루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기운 없는 빈이 멍하니 앉아만 있자 동기들이 그를 재촉했는데, 빈은 그냥 고개만 저었다. 좀 있다 나갈게. 빈 강의실에 앉아 있은 지 얼마나 지났을까. 빈은 문득 추위를 느꼈다. 에어컨을 안 껐나? 그리고 다음 순간, 빈의 책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차은우와 눈이 마주쳤다.

 

 

 

“......”

“안녕.”

 

 

 

너무 놀라면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빈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뛰어대는 심장 위를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차은우를 노려보았다. 제법 살벌하였으나 차은우는 여유만만하게 픽 웃으며 큰 손으로 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꽤 간절했나 보구나.”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 방금? 아니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방금이라 하면 난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이건 너에 대한 나의 호감과 애정을 나타내는 행동이지. 네가 귀엽다는 뜻이기도 하고.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개소리 집어치워.”

 

 

 

빈이 벌떡 일어났다. 바들바들 떠는 주먹이 금방이라도 차은우를 후려칠 것 같았지만 마지막 이성으로 폭력만큼은 참았다. 그러나 격앙된 겉모습과는 달리 연약한 속마음은, 가느다란 목소리를 끊어질 듯 말 듯 내보내고 만다. 

 

 

 

“그날 말이야... 내가... 당신을 처음 봤을 때. 나한테 뭔가 했지, 그렇지?”

 

 

 

차은우는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붉은 입술이 그리는 곡선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빛은 찬찬히 빈을 살피고 있었다. 빈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를 찾아 샅샅이 해부하는 것 같은.

 

 

 

“죽어가고 있어서 막았어.”

 

 

 

어떤 의미에서 그건 사실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잖아... 나를... 내가...”

“뭔가 변했어? 어떤 기분이 들어?”

 

 

 

은우가 바짝 다가와 캐물었다. 그는 빈을 마치 실험동물처럼 여기고 있었다. 차은우는 이해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절망하는 빈의 마음 같은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무언가를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이도 세상에 오직 차은우뿐이었다. 빈은 설움이 받쳐 울먹였다.

 

 

 

“사람 사체를 보고 먹고 싶다고 생각했어. 마치 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빈의 눈가를 쓸었다. 동그란 눈물방울이 반짝거리며 그의 손가락으로 옮겨갔다. 마치 손바닥이 연잎이라도 된 것 마냥, 눈물방울은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구슬처럼 그 위에서 이리저리 굴렀다. 차은우는 천천히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보았다. 새빨간 혀가 잠깐 나왔다가 사라졌다.

 

 

 

“걱정하지 마. 넌 아직 따뜻해.”

 

 

 

차은우는 마치 아쉬운 듯이 말했다.

 

 

 

 

 

 

 

 

 

 

빈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동행하게 되었다. 사고 이후 새 차를 아직 사지 않아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버스 안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람들은 차은우가 보일까? 문득 든 생각이다. 언제나 차은우는 빈이 혼자 있을 때만 찾아왔다. 외모도, 행동도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고 있어도 과연 차은우가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게 맞는지 불쑥불쑥 의문이 들곤 했는데, 그걸 확인받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차은우는 빈의 눈에만 보이는 걸 수도 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미쳐서 환상을 보고 있다는 게 그나마 말이 되었다.

 

그러나 빈의 바람과는 달리 차은우는 그를 따라 무사히 버스에 탔다. 과연 교통카드가 있을까 했는데 태연하게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어 요금통에 집어넣었다. 분명히 만 원짜리였다. 눈살을 찌푸리는 기사에게 우아한 어투로 잔돈은 됐다고 덧붙인 차은우는 얼른 빈의 곁으로 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훅 끼치는 냉기를 느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려 그 주변에 공간이 생겼다.

 

 

 

“굉장히 오랜만인데. 그래도 별로 변하진 않았네 이거.”

“버스 말하는 거예요?”

“응. 그런데 왜 다시 말을 높이는 거야? 아까처럼 편하게 해.”

 

 

 

빈은 항의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긴 해도 차은우는 겉보기에 빈의 또래처럼 보인다. 잠깐 고민하던 빈은 결국 끙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버스가 흔들리며 출발했다. 기사가 듣는 라디오에서 교통방송이 흘러나오고, 앞자리에 앉은 학생이 핸드폰 화면으로 아이돌 뮤직비디오를 봤다. 일상적인 소음이 주위를 가득 채웠다. 은우는 오랜만에 소음에 휩싸인 게 무척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문빈만 오로지 위화감을 느꼈다. 왜 다들 모를까. 여기 사람 아닌 것이 스며들었는데. 친절한 미소를 가장한다 해도 차마 가려지지 않는 흉포함이 살갗마저 저리게 하는데. 빈은 그 또한 극도로 예민해진 자신의 감각에서 기인한 판단임을 미처 몰랐다. 조금 떨어져 있던 은우가 빈과 눈이 마주쳤다. 빈이 흠칫하는 사이 정차한 정류장에서 더 많은 사람이 탑승했다.

 

 

 

“따뜻해...”

 

 

 

빈의 등 뒤로 바짝 붙으며 은우가 중얼거렸다. 빈은 곧장 긴장했다가, 다시 몸에 힘을 뺐다. 그가 내뿜는 냉기는 여전했으나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차은우는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미모라는 말이 어울리는 얼굴과 큰 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말투, 어린애 같은 칭얼거림과 다분히 꿍꿍이가 있는 웃음.

 

도대체 그는 뭘까?

나는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어디까지 따라올 거야?”

 

 

 

그 말에 차은우는 걸음을 멈추고 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알면서 뭘 물어보는 거냐고 하는 것 같았다. 빈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난 그쪽 우리 집에 초대한 기억 없어. 은우의 압도적인 분위기에 눌려 그나마 양순하게 반응했던 것을 생각하면 커다란 발전이었다.

 

 

 

“그럼 지금 초대해.”

 

 

 

그러나 차은우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빈은 거부할 엄두가 안 났다. 여전히 차은우가 조금 무서웠다. 인간이 아니라는 그 느낌 자체보다도, 알 수 없는 정체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릴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너무나 광활한 우주, 혹은 너무나 깊은 바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의 본능과 비슷했다.

 

의외로 그에 대한 미움은 별로 느끼지 않았다. 차은우는 그를 이상하게 변화시킨 장본인이지만 어쩐지 보고 있으면 마냥 미워할 수는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날 교통사고의 가해자는 빈이었으니까.

 

 

 

“내키지 않는데.”

“청소라도 해야 해?”

“...나 깔끔한 편이거든...”

“정리할 시간이라도 줘?”

 

 

 

빈의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차은우는 대답하지 않고 빙긋 웃으며 말해보라는 듯 턱짓했고, 빈은 한숨을 쉬고 작게 한 마디 덧붙였다.

 

 

 

“뭐…. 오늘 아침에는 좀 급하게 나와서...”

“흠.”

“...5분만...”

 

 

 

 

 

 

 

 

 

 

“깔끔한 편이라고?”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속옷이 차은우의 손가락에 걸려있었다. 저도 모르게 꽥 비명을 지른 빈이 황급히 그것을 빼앗아 빨래통에 던져버렸다. 쿡쿡 웃는 차은우는 코트를 벗어 한쪽에 걸어두고 마치 제집처럼 편하게 구경했다. 오로지 집주인만 안절부절못한다.

 

 

 

“뭐, 차라도 마실래?”

“그보다. 어디서 자?”

 

 

 

이제는 침실까지 개방하라는 건가. 빈은 기가 막혔지만, 당당한 은우의 태도에 위축되어 두말하지 않고 방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이제는 빈에게 작아진 책상과 옷장, 폭신해 보이는 침대가 있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은 은우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오래된 냄새가 나. 너 어렸을 때부터 이 방을 썼군? 어린아이의 젖내와 사춘기 남자애의 정액 냄새가 같이 나네.

 

 

 

“...냄새 한번 맡는 걸로 그걸 다 알아?”

“인간과 동일선상에 있지 않으니까. 기존 상식으로는 날 파악할 수 없을 거야.”

“너 꼭 약 올리는 것 같아.”

“맞아.”

 

 

 

은우는 빈의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더 내딛으려 했으나, 그 시도는 빈이 팔을 붙잡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군청색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드러난 팔뚝은 아주 희어서 푸른 혈관이 다 비쳐 보였다. 빈은 손에 닿은 그 팔의 감촉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적응 못 할 이 냉기와 약간 단단한 느낌이 드는 피부까지. 차가움이 뿜어져 나온다기보다는 이제 더 따뜻해질 수 없다는 쪽이 맞았다... 어 그러니까... 빈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마치 시체 같아.

 

빈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은우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왜 그래?”

“... 아무것도 아니야.”

 

 

 

눈앞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그를 시체 취급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시 원론적인 의문이 빈의 마음을 두드렸다.

 

차은우는 누굴까? 밤의 인간이 대체 뭔데?

내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흡혈귀’와 과연 같은 게 맞을까?

그는 지금 ‘의학적으로’ 살아있는 걸까?

나는? 그날 죽음에서 되살아난 게 맞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흐음?”

“당신은 그러니까... 대체 뭐야?”

 

 

 

차은우는 잠깐 시계를 보더니, 뭐 하루쯤은 늦게 자도 괜찮겠지? 하고 무성의하게 묻고는 빈을 거실로 휙 끌어당겼다.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빈은 아무 저항도 못 하고 그에게 끌려갔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소파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준비가 된 상태였다.

 

 

 

“아주 아둔한 질문이지만 동시에 명확해. 내가 뭐냐고. 밤의 인간. 그럼 밤의 인간은 무엇이냐 하겠지. 낯선가? 그럴 수 있어. 내가 만들어낸 개념이니까. 대부분의 인간은 밤에 자고 낮에 깨어나 ‘생활’을 해. 빛이 있는 시간 동안. 물론 빛이 있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모두 그 앞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뭐. 낮은 빛을 먹고 빛에 의지하고 빛에 힘을 얻는 생명이 사는 시간이야.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지. 난 빛이 필요가 없어. 먹지 않아도 돼. 잠을 자지 않아도 돼. 늙거나 죽지도 않아. 그래, 난 나이를 먹거나 죽을 수 없어. 인간들이 그렇게 꿈꾸는 불로불사지. 난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었어. 너희들이 아등바등하는 속도, 유연함, 신체적인 능력들은 힘들이지 않고 초월할 수 있지.

 

멋져? 네 표정은 그게 아닌데. 난 태곳적부터 인간들이 열망해온 끊임없는 젊음의 삶을 가졌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모습으로 있었지. 넌 정말 상상도 못 할 만큼 긴 시간이야. 그런데 그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젊은이의 외모로 천년을 살았다면 그건 과연 불로 不老인가? 육체의 젊음으로 영혼의 노화까지 막을 수 있을까? 비슷한 다른 이야기로, 죽음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생명체의 정당한 권리가 될 수 있을까?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인간들이 얼마나 열렬해지는지, 나는 많이 봐왔어. 셀 수도 없이 봐왔지. 아름다움과 추악함, 양극단으로 치닫는 에너지가 바로 죽음이야! 그 시간의 유한함, 그런데 나는 그게 없어. 죽음이 없지. 내 삶은 회색이야. 나는 살아있는 걸까? 인간이 가진 한계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된 내가, 여전히 인간일까?

 

자 봐. 내 팔목을 만져봐. 맥박이 느껴져? 그럴 리가 없지. 내 심장은 고요해. 마치 돌덩이처럼. 내 몸이 차가운 이유는 심장의 펌프질로 이곳저곳을 돌아야 할 피가 제자리에 멈춰있기 때문이야.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서 심장도 뛰질 않는 거지... 너의 손은 정말 따뜻하네. 떼지 말고 계속 내 팔을 잡고 있어 줘. 그래, 그렇게. 좋아.

 

...

 

물론 처음부터 내가 이랬던 건 아니야. 나도 보통 사람이었어. 그러니까 이만큼 클 때까지는 보통의 살아있는 사람이었지. 아주 옛날 일이야. 이 나라에 처음으로 외국인들이 들어왔을 때야. 서양인들, 그래 그 사람들. 그중에 이상한 녀석이 섞여 있었지. 영화에 많이 나오지 않아? 물렸어. 피를 쪽쪽 빨렸지.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 난 내가 그날로 죽은 죽 알았는데, 눈을 떴어. 그다음 날 밤에. 그 녀석이랑 비슷하게 변한 채로 눈을 떴어. 눈을 뜨자마자 난 내가 죽은 줄 알고 품을 뒤지던 부랑자의 목을 땄지... 자는 건가? 이봐, 지금 조는 거야? 바른 판단이야. 더 내 거짓말을 듣고 있는 것보다는 잠을 자는 게 현명한 일이지.“

 

 

 

빈이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차은우는 그의 곁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후에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묻자, 차은우는 코를 찡긋거리며 자지 않아도 되는 것이지 잘 수 없다고 뜻은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 차은우는 빈의 집에 머무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빈 또한 어느 순간부터 그 문제에 대해 따지고 드는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그날 밤 빈이 차은우를 집에 들여놓았을 때부터 예견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차은우가 곁에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많은 이점을 핑계 삼았다. 후에 스스로 감당 못 할 변화가 찾아왔을 때, 소식 없는 차은우 때문에 또다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이제 사양이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점심시간, 함께 모여 밥을 먹던 이들의 대화 주제는 흘러흘러 어느 순간 최근의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이르게 되었는데, 매일 자극적인 뉴스가 범람하는 요즘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체포된 용의자가 식인했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밥 먹는 데 이런 이야기 꼭 해야겠어?”

“의외로 사례가 많잖아. 야만적인 행위라고 기술하는 것과 달리 문명화된 세계에서도 제법 일어났었고.”

 

 

 

빈은 속이 불편해졌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게 주목받을까 봐 태연한 척 얼굴색을 갈무리했다. 실습 때마다 식욕이 돋는 것은 여전했다. 소름이 돋는 것은 그 식욕이라는 것이 빈에게 닥칠 변화의 시작이리라는 예감이다. 사실 그 정도의 충동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을 ‘식량’이라는 관점에서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자신을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로 인식함과 같다. 점점 그는 ‘사람’을 객관적으로 보는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갈수록 빈은 사고 전의 자신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주 조금씩, 잔잔한 연못에 먹물을 떨어뜨리듯.

 

 

 

“조난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사망자의 인육을 먹어야 했던 사건이 생각나네.”

“으…. 끔찍하네.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야?”

“그게 끝이 아니야. 조난된 지역이 워낙 오지인데다 인원이 많아서 순차적으로 구조작업을 진행했는데, 분명히 구조작업이 시작된 후부터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식량을 전달했단 말이지. 그런데 마지막으로 구조된 사람은 그 식량을 먹지 않고 여전히 사망한 여자의 살을 먹었다는 거야...”

 

 

 

괴담 같은 실화에 동기 여자애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반응에 신이 난 남학생이 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왜 예전에 아주 유명한 사건도 있었지. 일본인 유학생이 파리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여자애를 죽이고 시체랑 성관계를 맺은 후에 요리까지 해 먹은 거. 웃긴 건 심신상실 상태라고 판단돼서 무죄 판정 받았다는 거지. 정신병원에 좀 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서 사건에 대한 책도 쓰고 무슨 드라마에도 나왔을 걸?”

“와 그건 진짜 미친 새끼인데...”

“다른 것보다 무죄라는 게 끔찍하다.”

 

 

 

그 애는 의외로 이런 기괴한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 카니발리즘, 뉴질랜드 원주민의 식인 풍습, 종교의식, 설화 속 식인의 흔적…. 그는 점심시간이 다 가도록 세계 곳곳의 식인 사례와 역사적인 흐름에 대해 열변을 토했는데, 그 속에서 빈은 홀로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가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건 어디에도 자신은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 모든 이야기에 깔린 전제가 그랬다. 그 이유가 배고픔이든, 종교적이든, 증오 때문이든, 혹은 성적인 어떤 충동에 의해서든 인간이 인간을 먹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빈은 그게 아니었다. 더는 동족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마치 채식주의자가 생고기를 보듯, 가족처럼 소중한 반려견의 주인이 개고기를 보듯, 끝없이 뻗어나가려는 인간성으로부터의 탈피는 딱 그 정도의 자제로 늦춰지고 있었다.

 

Rrrr

 

엄마가 돌아가신 후 개인 휴대폰으로 SNS 메시지가 아닌 전화가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빈은 조금 낯선 기분으로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잠시 그 번호를 눈으로 읽은 빈이 조심스레 통화를 선택했다.

 

 

 

“여보세요?”

- 나야.

 

 

 

차은우의 목소리였다. 빈은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안심이라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는 빈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빈의 변화를 이해해줄 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아직 빈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렇게 죽어버리는 것과 지금처럼 천천히 이상한 존재로 변해가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휴대폰도 있었어?”

- 방금 샀어. 뭐라고 얘기해주던데 못 알아듣겠더라. 그냥 제일 좋은 걸로 해달라고 했어.

 

 

 

전화로 듣는 은우의 목소리는 또 새로웠다. 직접 듣는 것과는 다른 느낌. 목소리가 디지털신호로 변환되어 다시 이쪽에서 듣기까지 얼마나 많은 데이터가 손실되는가 같은 문제가 아니었다. 굉장히 친밀한 사이 같았다, 빈과 은우가. 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은우는 어딘가 사람을 홀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게 그만의 특색인지 혹은 종 種 자체의 특색인지는 알 수 없다.

 

 

 

“... 혹시 길거리에서 가게로 막 끌려들어 간 거야?”

- 내 팔을 잡고 낑낑 애쓰는 꼴이 불쌍해서 들어가 줬어. 왜?

“아니... 그냥 매달 나올 요금 생각하니까 어마어마해서...”

 

 

 

분명 약관이고 부가서비스고 하나도 읽어보지 않고 추천하는 대로 했겠지... 돈에 구애받지 않는 것 같았지만 쓸데없는 소비를 피하는 편인 빈은 듣는 것만으로 영 찜찜했다. 차은우는 별게 다 걱정이라는 듯 하하, 웃었다. 빈이 휴대폰을 조금 더 편하게 쥐며 자세에 힘을 뺐다. 손가락 사이로 볼펜이 휙휙 돌아갔다.

 

 

 

“그런데 웬일이야? 어차피 조금 있으면 집에서 볼 텐데.”

- 아. 말이 나와서 얘기인데, 나 지금 당신 학교 앞이야. 의과대 맞지?

 

 

 

그 말에 빈은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블라인드 사이를 손가락으로 벌리자 건물 앞 주차장에 우뚝 서 있는 하얀 남자가 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내다볼 줄 알았던 것처럼 구네. 빈이 허, 하고 숨을 뱉었다.

 

 

 

“나 끝나려면 멀었어.”

- 기다리지 뭐.

“오래 걸릴 텐데.”

- 시간의 상대적인 관점에서, 한두 시간은 나에게 찰나나 마찬가지야.

 

 

 

정확히 두 시간 후, 빈이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출입문 밖에 서 있던 차은우는 조금씩 떨어지는 가을비보다도 더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다가 빈이 다가오자 눈에 띄게 반색한다. 빈은 흩어지는 몇 무리의 여성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차은우의 얼굴. 아, 하고 빈이 납득했다.

 

 

 

“왜, 번호라도 물어봐?”

“요즘 애들이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그 얼굴로 세태 한탄하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참고할게.”

 

 

 

둘은 천천히 거리를 걸었다. 조금씩 내리던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며 한기가 몰려왔다. 빈은 잠깐씩 은우의 손등이 스칠 때마다 몸을 떨었다.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으... 택시 탈래?”

“흠, 그보다.”

 

 

 

은우가 갑자기 빈의 손을 확 잡아당겼다. 휙 돌려진 빈이 커다랗게 뜬 눈으로 은우를 쳐다보았다. 그는 약간 짓궂은 표정으로, 빈을 바짝 끌어안고 속삭였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얼빠져 보이는 빈이 비쳤다. 붉은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지며 하얀 이와 새빨간 혀가 드러난다.

 

 

 

“기분전환 할까.”

“... 기분전환?”

“보통은 이럴 때 드라이브를 한다지?”

 

 

 

빈의 몸이 휘청했다. 그는 반사적으로 은우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발밑에 감각이 없었다. 은우의 두 팔이 빈의 허리를 감았다. 약간은 세다 싶을 정도의 힘이었지만 빈은 평소와는 달리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쪽에서 은우에게 달라붙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어.”

 

 

 

마치 풍선처럼 그들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더 위로, 위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 즉시 이 마법이 풀릴까 봐 빈은 은우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간절한 시선이 기분 좋았는지 차은우가 쿡쿡 웃었다.

 

 

 

“이제 힘 빼도 돼. 이러다 내 코트에 구멍이라도 낼 것 같은데.”

 

 

 

은우는 아주 천천히 공중에게서 그를 돌려세웠다. 빈은 저도 모르게 팔을 허우적거렸다. 여전히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땅 위보다 거센 바람이 그들 주위에서 휘몰아쳤다. 빗방울은 무형의 막에 가로막힌 것처럼 둘 주위만 피해서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은우만을 보고 있던 빈의 눈이 넓디넓은 허공을 담기 시작했다. 위로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하늘과 귀갓길 차들의 헤드라이트로 번쩍거리는 지상. 그 사이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오직 차은우가 붙잡고 있는 허리뿐인 빈은 아이러니하게도, 안정을 찾았다. 그 자신도 모르게, 요즘의 변화에 대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마는.

 

 

 

“어떻게 안 거야?”

“무엇을?”

“내 기분, 안 좋았다는 거.”

 

 

 

차은우는 잠시 말이 없었다.

 

 

 

“...글쎄. 그냥 그렇게 들리던걸...”

“그렇게 들렸다고?”

“평소랑 좀 다른 것 같았어... 몰라.”

 

 

 

은우는 전에 없이 좀 당황한 것처럼 굴었다. 언제나 여유롭게 빈의 말꼬리를 길게 늘이던 말본새는 어디로 가고, 빈의 등 뒤에서 그냥, 예전에... 하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더듬더듬하는 것이다. 별말도 아닌데 왜 저런담. 빈은 몸을 조금 움직여 은우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고마워.”

 

 

 

은우는 말없이, 빈을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은우와 함께 사는 것은 당초의 걱정과는 달리 매우 편안했다. 차은우는 가끔 그가 집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조용했고, 빈이 말도 못 하게 바쁠 때는 집안일을 제법 도와주기도 했다. 의외로 음식 솜씨가 좋았다. 그는 빈이 없는 낮 동안 TV를 보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으며,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한밤중에 돌아올 때도 있었다. 어디 갔었는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빈도 그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빈은 그가 할 대답이 왠지 두려웠기 때문이고, 은우는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불규칙한 생활 속에도 그가 꼭 하나 지키는 것이 있다면 빈의 수업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그를 데리러 가는 것이다. ‘기분전환’을 시켜준 날부터였다. 귀가 시간이 날마다 들쭉날쭉한 빈이었지만 은우는 항상 그보다 일찍 도착했다. 빈은 처음엔 좀 어색해했으나, 곧 어스름한 저녁 건물의 유리문 밖 키가 큰 검은 코트의 남자가 서 있는 풍경은 그에게도 익숙한 나날이 되었다. 어쨌거나 빈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만큼 메마른 성정이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교수님이 좀 일찍 끝내주실 거 같은데. 그는 아까부터 계속 창밖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물론 차은우는 정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새 서 있고는 했지만.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 한번 차은우에게 문자를 보내볼까 고민하던 빈의 등을 누군가 뒤에서 '탁' 쳤다. 아니, 치기 전에 빈이 먼저 휙 몸을 돌렸다.

 

 

 

“아 깜짝아!”

 

 

 

놀라게 해주려고 했는데 내가 놀랐네. 언제 봤어? 명준이 투덜거렸다. 빈은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뭘 보고 반응한 게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 등 뒤에서 접근하는 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 것뿐이었다.

 

 

 

“밖에 누구 있어?”

“어? 아냐, 아무것도. 왜?”

“맞다 야 너 과팅 갈래?”

 

 

 

학기 다 끝나가는데 뭔 과팅이야, 하고 바로 거절하려는 문빈을 명준이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제발, 빈아 이 형이 부탁한다. 치대 애들이래. 너 본과 2학년에 경언 선배 알지? 그 선배가 자리만 채워 달랬어. 나머지는 자기가 알아서 다 할 거래. 해주면  6년 족보 그냥 다이렉트로 우리한테 꽂아준대!

 

 

 

“굳이 경언 선배 아니어두...”

“야이씨 경언 선배가 예과 때 과탑이었던거 모르냐.”

“그래도...”

“야아아아~”

 

 

 

어휴 징그러워. 빈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찡그렸다.

 

 

 

“알겠어. 그냥 앉아만 있다 가면 되는 거지?”

“어! 그럼 가자.”

“뭐?”

“오늘이야. 지금 가면 돼.”

 

 

 

이 대책 없는 형님 봐라. 자신을 채근하는 명준을 허망한 눈으로 쳐다본 빈은, 이럴 게 아니라 은우에게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짐을 챙겨 일어났다. 잠깐만, 양해를 구하고 뛰어나가자 역시나 차은우는 어느새 도착하여 빈을 기다리고 있었다. 빈은 그의 차디찬 손을 붙잡고 숨도 고르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저기 나 오늘...”

“문빈!”

 

 

 

기어코 따라 나와 자신을 부르는 명준의 목소리에 빈은 한숨을 쉬며 손에 힘을 뺐다. 스르르 미끄러지려는 걸 은우가 꾹 잡아 왔다. 고개를 올려 쳐다보자 은우가 응? 하며 싱긋 웃었다.

 

 

 

“너 이씨 그새 내빼려고...”

 

 

 

명준의 눈이 은우를 향했다. 은우는 명준을 향해 예의 바른 미소를 짓고는, 빈과 다정히 눈을 맞추었다. 아는 사람이야? 얘가 왜 이렇게 사람처럼 굴지…. 하고 빈은 당황했다. 방금의 제스처나 말투는 원래의 은우와 전혀 달랐다. 호감 가는 겉가죽을 쓰고 소름 끼치게 행동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터라 오히려 지금이 낯설었다. 설마 명준이 형에게 다른 마음이 있나…. 뭉게뭉게 드는 의심 때문에 좀처럼 빈이 말을 못 잇자 성질 급한 명준이 먼저 은우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빈이 동기 김명준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전 차은우입니다. 저는...”

 

 

 

은우는 잠깐 빈의 표정을 살피고, 무언가를 가늠해보는 듯 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요즘 빈이랑 만나는 사이에요.”

 

 

 

그건 상당히 모호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다. 그가 풍기는 뉘앙스의 달콤함에 빈이 눈을 크게 떴으나, 은우는 명준 몰래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 사실 명준에게 그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지 난감하기도 했다. 차은우 그는... 사실 빈도 차은우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오…. 야 헐 대박... 요즘 왜 바쁜가 했더니만... ”

“형 그런 게 아니라...”

“됐고, 차은우 씨? 오늘 빈이 좀 빌려 가도 되나요? 오늘 동기 모임이 좀 있어서.”

 

 

 

차은우는 쿡쿡 웃으며 그러세요, 하고 답했다. 명준이 너 쫓아오느라 가방도 못 챙겼다며 다시 자리를 뜨자, 빈이 미안한 표정으로 은우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괜찮아.”

“어... 다음으로 미룰까?”

“다음?”

 

 

 

조금 가소롭다는 듯이 그 말을 입속으로 중얼거린 차은우는 빈을 빤히 보았다. 아, 다시 원래의 차은우다. 사람 좋은 그의 남자친구인 척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싸늘함. 은우는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글쎄, 다음이라는 게 생각만큼 쉽게 오지 않아.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쩐지 그 말은, 지금이 아니라면 영원히 친구와의 갑작스러운 만남 같은 건 없을 거라는 예고처럼 들렸다.

 

 

 

“왜 그렇게 몸 사리나 했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냐.”

 

 

 

과팅 장소인 호프집으로 가는 내내 명준이 종알댔다. 어떻게 보면 아웃팅이나 다름없었지만 명준의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차은우는 아마, 그런 식으로 빈과의 관계를 둘러대기 전 이런 명준의 성격을 간파한 것 같았다. 

 

 

 

“어떻게 만났는데? 너 학교 집 학교 집이잖아.”

“그게... 어...”

 

 

 

거짓말에 서툰 빈이 눈을 굴리다가 대충 둘러대었다.

 

 

 

“전에 사고 난 날. 상대편이 걔였어.”

“대박... 그래서 한동안 정신이 없었고만? 사고는 누구 잘못이었는데?”

“어…. 내 잘못. 내가 갖다 박았지, 뭐..”.

“너 그때 피곤해 죽으려고 하더니. 그러게, 내가 택시 타라 그랬잖아.”

 

 

 

그러게. 형 말 들을걸. 빈이 쓴웃음을 지었다. 과팅은 순조로웠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경언선배는 자리만 채워 달라고 했으나 그 자리를 채울 이가 인기를 독차지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질문이 자신에게만 몰리자 빈은 예의 바르게 벽을 쳤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명준이 억지로 웃었다. 에이, 족보는 다 틀려먹었네.

 

주도자였던 경언 선배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술만 비워대자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식었다. 자리를 파하는 데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동의했다. 기쁜 마음으로 빈이 벌떡 일어났다.

 

 

 

“저 좀 데리다 주시면 안돼요? 지하철역까지만요.”

 

 

 

아까부터 적극적으로 빈에게 관심을 표하던 여성이었다.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의 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명준이 손바닥을 싹싹 비벼댔다. 활짝 웃는 여성의 표정에서 어떤 설렘을 본 빈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보답해줄 수 없는 호감은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걷는 내내 빈은 여자의 말에 적당히 대답하며 생각에 빠졌다. 원래도 술을 못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정말 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변화... 변하는구나. 그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몇 년 후 지구를 향해 날아오는 커다란 운석 때문에 종말이 예정된 세상에서, 그날을 하루하루 기다리며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평화와 여유를 가장한 그 체념이 빈의 속을 가득 채웠다. 사고 당일 죽는 대신 그는 매일 천천히 사람의 삶에서 멀어지는 중이다. 느리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착실하게.

 

 

 

“저, 번호 안 알려주실 거죠?”

“네? 아...”

 

 

 

빈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니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생긋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녀가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배웅하던 빈이 몸을 돌리자, 어느새 나타난 차은우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빈은 놀랐지만, 곧 빠르게 수긍했다. 그런 식으로 기척을 내지 않고 나타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니 적응할 만도 했다.

 

 

 

“많이 기다렸어?”

 

 

 

은우는 대답하지 않고, 굉장히 흥미로운 것을 보았다는 듯 흐음, 하고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지하철역 안쪽으로 사라진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갑자기 든 소름 끼치는 생각에 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친구를 만난다더니...”

“뭘 보고 있는 거냐고.”

 

 

 

천천히 빈에게 시선을 돌린 은우가 말했다.

 

 

 

“왜 그래?”

“너 혹시 저 사람한테... 무슨 짓 할 생각인 건 아니지?”

“불쾌한데.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네가 뭔데?”

 

 

 

공중에서 빈과 은우의 눈이 맞부딪쳤다. 서로 지지 않고 노려본다. 은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넌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다짐하듯이 재차 내뱉는 그 말에 빈은 잠깐 가슴이 쓰려왔지만, 곧 뾰족하게 묻는다.

 

 

 

“그런데 왜 화를 내?”

“내가? 난 화내지 않았어.”

“지금 화내고 있잖아.”

“그럴 리가.”

 

 

 

은우는 입매를 비틀며 웃곤 빈을 휙 지나쳤다. 그날 차은우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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