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2020 가을호
작성자
뉴문
작성일
2020-10-24 23:21
조회
47



  "은우야 너 노트북 비번 뭐냐."


  "0330AZ."


  "오 되게 복잡하게 해 놨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간단하네. 네 생일이랑... 알파벳 처음과 끝?"


  "...응 그냥 치기 편해서. 키보드에 가까이 배열되어 있잖아."


  "그렇고만.. 나 너 걸로 영화본다! 수업 끝나면 말해."


  "이따 끝나고 연락할게. 그리고 똑바로 앉아서 봐 빈아, 자세 나빠져."




  그리고 어차피 그렇게 단순하게 해 놔도 모르더라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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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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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차은우! 비품함에 있는 농구화 네 거야? 주인 없으면 버린다고 난리던데."


  "아 맞다... 알려줘서 고마워 우진아. 다음에 밥 살게!"


  "오냐. 간다! 빈이 너도 다음에 보자!"




  오늘은 간신히 바로 학교 탈출할 수 있나 했더니, 정문에서 잡힐 건 뭐람. 역시 차은우.




  "빈아, 미안 나......"


  "괜찮아 갔다 와."


  "진짜 미안. 오늘은 진짜 빨리 가려고 했는데.... 여기 내 카드 줄테니까 카페에서 뭐 좀 마시면서 시원하게 기다리고 있을래? 금방 다녀올게. 정말 미안.."


  "아니 네 카드까지는... 기다리는 거 괜찮으니까 내가 사 마실게. 과실에서 출발할 때 연락해."




  거절했는데도 굳이 내 손바닥에 학생증 카드를 쥐어주고 뛰어가는 우리 과, 아니 우리 학교 통틀어 최고 셀럽 차은우씨. 입학식 하기도 전부터 경영학과에 말로 감히 표현이 안되는 잘생긴 신입생이 있다며 에타가 난리난 덕분에 전화 추합으로 문닫고 들어온 나도 알았다. 정작 본인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하길래 양심이 있으면 사실대로 얘기하라고 팔꿈치로 쿡쿡 찔렀는데, 원래 익명이라는 가면 아래 남의 얘기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고, 되려 기분 나빠하는 걸 보고 그 뒤로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게 됐다. 재수없는 자식.




  옆구리 시리도록 추웠던 3월 초봄에, 청승맞게 검은 롱패딩에 고딩 티 못 벗은 채로 혼자 다니고 있을 내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서 개강이 부디 다가오지 않았으면 했다. 다행히도 은우랑 친해지고 나서는 선배 동기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인기스타를 불러내서 나는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어쩌다보니 쌍으로 같이 다녔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나는 오히려 이득 볼게 많으면 많았지 손해 보는 게 없다. 없는데. 나는 왜 이렇게 걔 앞에만 서면 꼭 뭔가를 따져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지. 머릿속에서 확인사살을 하자니 너무 쪽팔리지만... 투정을 부려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이렇게밖에 표현이 안된다. 문빈 드디어 미쳤냐고...




  "어 왔냐."


  "아까 연락하라더니 왜 전화 안 받아.. 가버린 줄 알았잖아."


  "미안, 잠깐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전화했었나보다."


  "그래도 나 빨리 왔지?"


  "그르게. 근데 언제 1시간이나 지났지."


  "아니.....선배들한테 잡혀가지고.....청소 도와드리고 나서 뒤풀이도 오라는 거 거절하고 온 거야...."


  "차은우, 장난은 장난으로 받아라.. 이러면 내가 무안해지잖아!"


  "..진짜지."


  "너 진심 왜 이렇게 단순하냐. 밥이나 먹으러 가자."




  같이 다녀보니까 비교 선상에도 오를 수 없는 경지라는 걸 깨달아서, 얘가 나랑 같이 다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생각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도 비슷한 느낌의 친구한테 꽤 길게 틱틱대다가 나중엔 좋다고 반지같은 것도 나눠끼던 시절도 있었는데 뭐... 걘 잘 사는지 모르겠다.








  평소엔 그냥 '그른갑다~'하고 넘어갔을텐데 요즘들어 차은우한테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생겼다.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신경도 안 쓰고 어떤 소문이 나든 말든 관심도 없는 애가, 오히려 누가 호감 갖고 고백하려고만 하면 아주 차갑게 거절하는 것 같다. 이 생각이 추측형으로 마무리되는 이유는, 분명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꽤 많은 사람들이 대시했다고 들었는데 거의 매일 같이 다니는 나는 그런 현장을 딱 두 번밖에 못 봤기 때문이다. 한 번은 나랑 있을 때였는데 그 때 반응을 보고 나서는 다른 날에도 목격했다는 얘기를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은우야, 내가 오랫동안 생각해봤는데, 난 네가 정말 좋은 것 같아... 나랑 만나볼래?"


  "아니요, 죄송하지만 전 선배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요."




  "...야, 니 너무 딱딱한 거 아니냐... 선배 상처받으셨겠다."


  "이렇게 하는 게 나한테도, 선배한테도 좋은 거야. 여지 남기면 안돼."




  모두에게 살가운 성격은 아니어도, 차갑게 대하지는 않는 은우였기에 낯설었다. 그리고 왜인지 내가 은우에게 아는 척을 할 수 없었던 다른 날은, 조금 다른 답변이었다. 내가 처음듣는, 그리고 조금은 놀라운 답변.




  "생각해볼 시간 주셔도 제 대답은 바뀌지 않을 거예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요. 가까운 사람이라 이런 얘기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거든요."




  차은우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가까운 사람? 정말 금시초문이다. 뭐야 나 왜 서운해?








  시험이 끝나고 마시는 술은 달다. 물론 몸 상태가 좋으면 언제 마셔도 맛있지만, 종강을 한 그날의 술은 시험공부로 찌든 피곤함 따위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듯 술술 들어간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나를 마시는 지경이 되는 거다. 맥주는 안 취해서 애들이 빨리 안 죽는다며, 초록병으로만 n차까지 승부를 보는 우리 학과 특성은 학기 초반에 맨날 불려다녔던 은우 덕에 적응한지도 오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경영 B반에 은우 없는 종강파티는 있을 수 없다는 듯 언제나처럼 모든 테이블에서 은우를 찾는 게 들려왔다. 쟨 오늘도 한 잔씩 다 받아마시고 오겠구나 싶어서 옆자리 동기들이랑 술잔을 나눠마셨다.




  "야 문빈 너 차은우랑 친하지."


  "어.. 그치."


  "쟤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 타과 친구가 소개해달라고 하던데 취향을 모르겠어서 못 물어보겠더라."


  "글쎄.. 근데 나도 쟤 거절하는 것만 봐서 잘 몰라."


  "아이, 빼지 말고! 맨날 붙어다니면서 들은 거 있을 거 아냐. 좀 알려주라 응? 걔가 잘 되면 걔네 과랑 과팅 잡아준다고 했단 말야."


  "아니......"


  "그걸 왜 얘한테 물어. 나한테 물어 봐야하는 거 아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저음에 뒤를 돌아봤다. 여기저기서 받아마신 술 때문인지 목소리가 한층 더 건조해보였다.




  "어.. 은우야."


  "빈아, 나가자. 나 술 깨고 싶어."




  술은 들어갔어도 정신은 똑바른 은우랑은 다르게, 정줄을 놓아버린 주위 동기들은 눈치도 없이 더 캐물을 생각인 거 같았다. 미친 놈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나 소개 받을 생각 없어. 간다."




  또 가차없이 거절. 역시 그때 그 말이 진짜인가.

  이건 정말 술김에 물어보는 거다. 그냥 단지 어지러워서. 가로등 불빛이 예뻐서.

  ......궁금해서.




  "너 좋아하는 사람 있지."


  "......어."




  서운한 거 아닌데, 그런 거 아닌데. 근데 자꾸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에는 나도 모르게 원망어린 감정이 섞여서 나왔다. 




  "나도 아는 사람이야? 가까운 사람이라며 나는 왜 몰라? 우리가 그 정도 사이밖에 안되냐.... 나쁜 챠우누...."




  그리고 우리 집 앞까지 같이 조용히 걸어오는 동안 술이 완벽하게 다 깨버렸다. 아까 말하지 말걸. 누가.... 시간 좀 돌려주세요..... 10분전에 내 입 좀 막아봐.... 




  "그....데려다줘서 고맙다... 나 술 다 깼어. 내일,"


  "내 비밀번호. 그게 힌트야."


  "응?"


  "내일 보자 빈아."




  머리를 감으면서 짱구를 굴렸다. 비밀번호? 0330AZ 그거? 본인 생일과 자판끼리 가까워서 정했다는 끝과 끝의 알파벳.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리면서 또 생각했다. 혹시 이니셜인가? A...Z..... 에이지... 예지? 우리 동기 중에 예지라는 사람이 있던가. 선배인가?


  이불 양 귀퉁이를 잡고서 팡하고 폈다.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궁금해하는 건데?! 아니, 뭐, 이건 단지 친구로서, 나만 모르고 있는 게 괘씸해서다. 절대 다른 마음이 아니고.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떴다. 다른 마음? 그건 또 뭔데 문빈.


  ......잠이나 자자.








  차은우랑 있으면 술만 마시게 되는 게 아니라, 술을 마셔도 성실한 생활을 하게 된다. 분명히 나 집까지 데려다주고 더 늦게 잔 거 같은데 얘는 대체 어떻게 일어나서 10시도 안 된 시간에 나를 깨우러 오기까지 하는 거냐... 술도 잘마시고 숙취도 없는 생활력 MAX인 인간이냐고.


  우리 집 비번도 다 알아서 그냥 척척 열고 들어온다. 벨 눌러도 내가 못들은 게 한 두번이 아니라서 처음 몇번은 현관 앞에 1시간 넘게 세워둔 적도 있었다. 그 뒤로는 미안해서 그냥 비번 알려줬는데 지 집 들락날락 하듯이 하고 있다. 




  "빈아 일어나."


  "....으누야아.......종강도 했는데 왜 그래.... 내 생활패턴으로는 지금 새벽이야..."


  "너 생활패턴대로 살면 나랑은 언제 놀아. 일어나자! 빈이 몸에서 잠이 달아나게 해주세요~"




  차은우는 꼭 이상하고 귀여운 소리로 나를 피식하게 만드는 데 도가 터 있었다. 눈도 못 뜨겠는데 일으켜 주는대로 기지개를 펴며 앉았다.




  "놀고 싶으면 다른 친구 찾아서 놀면 되잖아아...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 만나러 가든가...."




  합. 헛소리가 나오는 건 아직 해장을 안해서 그런거다.




  "...그래서 만나러 왔는데. 좋아하는 사람."


  "......그래 나도 너 좋아한다 친구야... 근데 내가 말한 건,"


  "어 그거 맞아. 어제 말했잖아 비밀번호가 힌트라고."




  숙취가 올라오는 거 같았다. 얘도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는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0330은 내 생일, AZ는 네 생일이야 빈아."


  "뭐...? 왜? 어떻게? 무슨 의미인데?"


  "A는 알파벳 첫 글자, Z는 스물여섯번째 글자거든. 0126."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얼굴이 달아오른 것도 못 느끼고 머리가 멍해졌다.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너 어렸을 때 나랑 결혼하겠다고 약속했잖아. 물론 그때의 나는 이동민이었지만. 기억 안나?"


  "......"


  "미리 말 못해서 미안. 네가 기억 못하는 게 미워서 그랬어. 물론 아주 조금이지만!"




  기억이 안난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때 당시 말도 없이 동민이가 이민 갔다고 엄마 앞에서 펑펑 울었던 6살의 내가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났다.




  "나 이 얘기 하려고 아침 일찍 찾아온 거야. 너 잠 많은 거 내가 왜 모르겠어.. 그치만 내가 비밀번호 얘기까지 했는데도 못 알아듣는 거 같아서. 문빈 이 바보야."


  "나 바보 아니야.. 니가 그때.... 아니 그리구 그게 너인지 어떻게 알아...나쁜 차은우야아!!!"


  "이제는 진짜 반지 끼워줄게. 나 잊어버리지마 빈아."




  푸시시 익어버린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올라가는 입꼬리는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이동민을 어렴풋이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지금의 차은우도 정말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나랑은 전혀 상관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정반대의 두 글자. 너와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나의 흔적. 가끔 회상하며 추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고 생각했는데.


  나한테 그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까.

  나한테 지금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까.


  끝과 끝이 이어져 결국 만났다.




***




  "엄마, 나 나중에 햇님반 친구랑 결혼할거다요?"


  "햇님반 친구? 누군데?"


  "돔미니! 힣 엄청 똑똑하구 음,, 그리구 저를 엄청 잘 챙겨조요! 아 마따 오늘 반지도 받았어요 짠~ 아아아 만지지는 말구 눈으로만 봐요오!"


  "알았어~ 동민이가 직접 만들어준거야?"


  "네!! 반에, 어, 예쁜 친구들 많았는데 내가 제일 예쁘다고 줬어요. 그래서 나아중에 제가 돔미니 색시 하기로 했어요."


  "와 우리 빈이 벌써 짝꿍 생긴거야?"


  "응!! 잊어버리지 말라고 새끼 손가락 걸구, 입술 도장도 찍어줘써요 비니 볼에!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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