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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in

더쿠

 

 

1.

멈춘 시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

빈은 전광판에 점멸하는 네 자리의 숫자와 손목에 단단히 맨 시계를 번갈아 보았다. 바짝 깎은 손톱 끝으로 용두 사이를 긁어 빼내 태엽을 돌린다. 싸구려 시계는 빈의 손톱으로 온통 닳고 닳은 지 오래인 모양새였다. 한 바퀴, 두 바퀴. 빈은 초침이 ‘12’라는 숫자에 정확히 닿는 순간에야 태엽을 눌러 넣었다. 그리곤 멈췄던 걸음을 뗀다. 가방을 크게 한 번 고쳐 매고, 다른 한 발도 마저 내딛는다. 의식하면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될지도 모른다고 자각한 순간, 손 안에 가득 들어찬 손잡이로 느껴지는 캐리어가 대단히도 무거웠다.

로비를 가로질러 나가자 대번에 습기가 온 몸에 달라 붙었다. 세단에 기대 서있던 준일이 크게 손을 흔들었다. 빈은 마주 손을 드는 대신 가볍게 웃고는 만다. 차에 올라타고, 인위적이지만 낯익은 방향제 향이 코에 맴돌자 그제서야 비로소 명치 근처로 잔뜩 경직되어 있던 긴장이 풀린다. 자리가 별로 안좋았어. 빈은 창가 측이라면 질색이었고, 기어이 비행의 시작부터 미약한 수면제 한 알을 삼키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손톱보다 작은 덩어리는 목으로 넘어가는 느낌조차 나지 않았음에도 효과는 명확했고, 그리고 비행의 끝자락, 상공에서 눈을 떴다.

아직 희부옇게 번진 시야를 채 추스르기도 전에 스치듯 담은 이 땅은 온통 밤이었다.

“어디로 갈래.”’

트렁크에 짐을 싣고 운전석으로 돌아온 준일이 백미러를 통해 물었다. 못 본 사이 짧게 친 머리가 그와 꽤나 잘 어울린다. 그러나 빈은 그 정도의 칭찬은 늘 그렇듯 혼자만의 시시한 감상 정도로만 간직한다.

“내가 갈 데가 어딨겠어.”

빈은 연극적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곧 차가 출발하고, 드높은 대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한다. 비행기보다도 빠른 것 같아.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에 시트에 뒤통수부터 허리 끝까지를 깊이 파묻는다. 그러자 곧 눈이 감길 듯 말 듯, 수마가 빈의 뒤를 바짝 좇기 시작한다. 아주 잠시, 꿈을 꾼 듯도 하다. 꿈 속에서 빈은 좁은 단칸방 안 아주 작은 쇼파 위에 구겨지듯 누워 있다. 그리고, 어디선가 누군가의 웃음 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파장처럼 울린다고 생각한 순간, 잠에서 깬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이 빠르게 달리던 차는 어느새 도시 외곽을 빠져 나가는 길에서야 멈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괜찮아.”

문득 운전석으로부터 준일이 말한다. 뜬금없는 내용에 빈은 그가 통화라도 하는 모양이라 생각한다. 시트에 머리를 좀 더 깊게 묻었다. 살짝 열린 창 틈으로 습한 향을 담은 바람이 불었다. 약효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건지, 긴장이 풀려서 인지 모를 잠이 다시금 쏟아질 것 같은 찰나, 이윽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 밖으로는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이 정체 정체된 차가 온통 빼곡했다. 수백 대의 차가 내뿜는 헤드라이트는 낮보다도 눈부시다.

햇빛과 소나기가 간헐적으로 이어지던 나날의 끝에, 올 여름 첫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라디오 캐스터의 목소리를 담으며 빈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1-1.

‘또 왔네요.'

불편하게. 종이뭉치를 한 다발이나 들고 와선 더듬더듬, 한참을 정신 사납게 굴던 준일이 불퉁하게 말했다. 이 당시만 해도 준일은 이 빌딩으로 발령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뒤에서 속삭이는 말들을 빌리자면 '불행히' 도 빈의 직속으로 배정된 인원이었다. 쇼파에 길게 누운 빈의 다리 언저리에서 자꾸만 몸을 들썩거리는 폼이, 아무래도 여간 불편한게 아닌 모양이다.

빈은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기이한 각도로 꺾어 준일이 토로하는 불만의 대상을 본다. 그러나 정작 책상 앞, 앉았다기보다는 파묻혔다고 해야 옳을 정도로 큰 의자에 앉은 은우는 눈을 내리 깐 채, 이쪽으로는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고 있다.

책에 박혀 차분히도 움직이는 눈동자. 그걸 멀뚱히 바라보던 빈의 머릿속으로 문득 생각 하나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세상 모든 일의 결점은 무뎌짐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빈은 개똥철학과도 같은 잠언을 경멸했지만 지금 떠오른 생각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빈은 은우를 처음 만났던 때를 떠올리려 애쓴다. 쇼파에서 정자세로 고쳐 일어나 한참을 고민해봐도,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한 감정은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굉장히 귀찮다는 것. 그 감정은 그리고 지금까지도 유효했다.

'과외 시간 다 됐는데 빨리 가지 그래?'

은우는 날이 갈수로 버릇없어져 갔다. '버릇없다' 는 표현이 동갑인 빈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빈이 오늘 처음으로 대화를 시도하며 물었음에도 은우는 손목에 찬 시계만 힐끔 볼 뿐 대답이 없었다. 되려 무시하고자 하는 것을 부러 티 내는 듯 고개마저 돌려버리는 몸짓에 기가 찼다. 질문을 빙자한 빈의 재촉이 허공에 맴돌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나뒹군다. 준일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 별 내용도 없는 종이 더미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자신의 말 한마디로 상황이 이렇게까지 변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겠지. 덕분에 조용해진 공간에는 은우가 필기구를 정리하고, 가방을 싸는 등 일련의 동작들이 일궈내는 소리만이 가득 울린다.

그 상황.

은우를 향한 짜증과 준일을 골려 주고 싶은 그 모든 상황. 그것이 하루 종일 변화 없이 일직선을 타던 빈의 감정 그래프를 단박에 지붕까지 치솟게 만들었다.

'준일이 형이 너 불편하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와.’
'싫어.'

대답은 간결했다. 단호한 대답은 시선도 없이 홀로 돌아온다. 은우는 가방을 단단하게 매고는, 빠트린 것이 없나 주위를 휘휘 살필 뿐이었다. 빈의 머리로는 단 한구석도 이해되는 부분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그러니까, 저렇게까지 자신을 무시하면서도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에 얼굴을 내비치는 그가.

이 건물에는 볕이 들지 않을뿐더러, 어쩐지 추운데다가 한기마저 도는 곳이 두 군데가 있었다. 한 곳은 이 건물의 4층 구석에 있는 창고와도 같은 공간으로, 그곳은 1년 전까지만 해도 빈의 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방은 빈의 부탁으로 이젠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도록 폐쇄시켰으며, 자신도 발길을 주지 않은지 오래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지금의 이 세 사람이 모여 기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지금 여기. 빈이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그런 장소에 은우는 얼추 1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드나들고 있다.

수업을 마치고 과외에 가기 전 짧은 그 틈에, 혹은 자율학습이 끝나고 난 뒤 거리에 간판 불마저 모두 꺼져버린 아주 늦은 시각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은 고사하고 하다 못해 넓디 넓은 집을 두고도, 작은 단칸방과 견주어 보아도 절대 뒤지지 않을 자신의 공간에 자꾸만 침입하는 그를, 빈은 처음에는 쫓아내려 부던히도 애썼더랬다.

하루는 한 손으로 들기도 벅찬 재떨이를 그의 발 언저리까지 던진 적도 있었다. '내 말 무시하지 마!' 라고 악을 쓰며. 우습게도 그 즈음에는 더 이상 그가 이곳에 드나드는 이유쯤이야 별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다만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는 그에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을 뿐. 사실은 빈은 언제나 은우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더 편하고, 또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가는 바운더리 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고, 그것에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의 수많은 시간과 끝없는 신경전의 끝에 빈의 생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바뀌고 만다. 그리고 어찌 되었든 그 사단이 나자, 은우는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대로 구색은 갖춘 대답을 제법 건네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건지 걸음을 옮기는 은우를 보자 오랜만에 부아가 치밀었다. 비록 오늘 은우가 한 일이라고는 가만히 책을 읽고, 연필을 들어 문제를 풀거나 가끔 두 눈을 감고 뒷목을 주무르는 등이 전부였지만. 당장이라도 달려가 허여멀건 한 얼굴에 붉은 생채기 하나라도 남겨야 성이 풀릴 것만 같다. 하지만 늘 그렇듯 빈은 어느 것 하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은우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빈과 비슷하던 키를 앞지르고, 선도 전과는 다르다. 비단 외관의 변화뿐은 아니었다. 날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그 어떤 것에도 미련 없는 듯한 분위기가 그를 감쌌다. 빈은 그걸 그저 '허세' 라고 격하했지만.

결국 애꿎은 종이를 구겨 등 뒤로 던지는 것이, 빈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아무런 해도, 위협도 못 되는 종이뭉치가 그의 발치에 맥없이 떨어진다. 빈은 문득 은우의 뒷모습이 무모해 보였다. 전에는 그저 끈질기다고만 생각했던 그에 대한 감상에 무모하다는 단어가 더해진 이 즈음은, 빈은 비록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어쨌든 은우와 빈의 나이가 아직은 고등학생이었던, 그 어느 여름이었다.



2.

차가 어둡고 긴 골목을 지나, 저택 앞에서 멈춘다. 라디오에서는 갑자기 시작된 비가 폭우로 변하는 것을 경계했다. 아닌 게 아니라, 와이퍼를 최대 속으로 올려도 속수무책이었다. 흡사 들이붓는 것처럼 쏟아지는 빗물은 시야를 온통 어지럽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로 보이는 풍경은 빈이 예상하던 것이 아니었다.

“왜 여기로 왔어?”
“그게, 공사가 좀 늦어지는 바람에…”
“그러게 멀쩡한 집을 왜 뜯어 고친다고 난리야.”

빈은 고개를 습관적으로 두어 번 끄덕이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래도 우산은 없는 듯 보인다. 빨리 뛰어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려는데, 그제서야 문득 아무 말이 없는 준일의 모습이 빈을 붙잡는다. 내심 무언가 신경 쓰이는 듯 전에 없이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린다. 빈의 촉으로 좋지 못한 예감이 스친다.

“뭐야, 그래서 집에 누구누구 있는건데?”
“…은우 있어, 갑자기 여행을 취소하는 바람에.”
“형 미쳤구나.”

그리고 그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빈은 대번에 그를 타박했고, 준일의 눈썹이 팔자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빈은 잠시 창 밖을 노려보았다. 준일은 별다른 첨언 없이 비상등을 켰다. 다시금 명치가 답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시간, 그렇게 얼굴을 구기고 있던 빈은 마침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우레와 같은 빗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딛은 발이 삽시간에 젖어 든다. 크게 숨을 들이 쉬고 열린 문 틈으로 달렸다. 내리치듯 몸에 박히는 빗방울은 곧 속눈썹 사이로 무서운 속도로 고여 들어와 시야를 가린다. 빈은 손등으로 빗물을 연신 찍어 눌렀다.

딱 숨이 차다 싶을 만큼의 계단을 오르고 고개를 들자, 넓은 정원이 눈앞에 대번에 펼쳐졌다. 정원에는 온통 빗소리가 가득 차 있다. 빈은 그 중, 가장 큰 나무 아래로 단숨에 뛰어갔다. 볼 때마다 새삼 놀랄 정도로 큰 나무 아래는 무성한 잎들이 비를 막아, 마치 딴 세상마냥 고요하다. 아직 채 젖지 않은 나무 기둥에 가만히 손을 댄다. 피아노를 두드리듯 손가락을 차례로 움직여 나무의 결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어깨를 쓰다듬듯 토닥인다. 차가웠다. 그 감촉을 손바닥에 아로새기듯 꾹 누른 후에야, 빈은 저택으로 향했다.

도어락을 풀고 집으로 들어선 빈의 등뒤로 문이 소리 없이 닫힌다. 시끄럽던 빗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지자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아니면, 반대로 이곳이 너무 조용해서 일지도. 집 안은 가득 불이 켜져 있음에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이미 다 젖어 소용없는 행동이었지만 빈은 어깨와 머리 끝에 매달린 빗방울을 손으로 털어내며 2층으로 향했다. 지나가며 쓸어낸 가죽 쇼파가 순식간에 습기에 젖는다. 나무 계단에는 젖은 발이 닿는 소리가 추적하게 울렸다. 빈이 지나간 발자국마다 작은 물웅덩이가 괸다. 자꾸만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짜증나, 손으로 쓸어 넘길 때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드디어 사람의 인기척이 나타난다. 빈은 계단의 마지막을 밟지 않고 그대로 멈췄다.

그도 어디선가 갑작스레 만난 비를 미처 피하지 못했던 걸까? 인기척의 주인인 은우도, 흠뻑 젖어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제야 빈은 남은 층계를 마저 올랐다. 그의 앞으로 가 서자, 은우가 머리를 털던 수건을 건넨다. 받아 들며 스친 손 끝이, 마치 조금 전 매만진 나무 껍질만큼이나 차갑다.

 "오랜만이네."
"...응."

두 방이 마주보고 있는 복도 사이, 창 밖 너머 아주 먼 곳에서 문득 천둥소리가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빈은 은우의 하얀 이마에 늘러 붙은 머리 끝을 본다. 잔뜩 젖은 손은 땀이라도 되는 양 연신 바지춤에 닦아냈다.

"얼굴 조금 탔다."
"거긴 더웠거든."

은우가 자신의 볼을 가리키며 말했다. 짧은 문장들은 대화라고 하기엔 지극히 어색하다.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은우로부터는 다시금 어떤 대답이나 질문이 돌아오지 않았다. 빈은 수건을 손에 쥐고, 마무리의 말없이 등을 돌렸다. 돌아서는 몸짓 하나하나에 신경이 곤두선다. 어느새 입가에는 쓴웃음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은 오랫동안 비워진 곳에서만 나는 황량한 냄새가 났다. 문을 닫고 가만히 기대선다. 문 너머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다.


2-1.

‘조금만 마셔.’

준일이 테이블 위를 물수건으로 가볍게 훑어내며 말했다. 빈은 그 말에 보란 듯이 잔에 술을 더 따른다. 긴 테이블은 일본식 다다미로 된 방 한가운데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현대식으로 개조된 덕에 테이블 아래 공간으로 다리를 길게 늘어뜨릴 수 있었기에, 빈은 두 다리를 팔랑거리며 잔에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넣는다.

독한 냄새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끼는데, 별안간 앞에서 큰 웃음이 터졌다. 은호와 은우가 일궈내는 소리였다. 대화를 주의 깊게 듣지 않아 무슨 내용진지는 알 수 없었지만,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웃는 낯과 그 검은 정수리들을 보자 맥이 빠졌다.

‘다음 주가 엄마 기일이네.’

젓가락 끝으로 복어회를 뒤지던 은호가 별안간 말한다. 빈 잔에 혼자 술을 가득 따르던 빈이 제법 큰 병을 내려 놓았다. 또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 저런 식으로 말을 돌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은호가 저렇게 이야기를 시작할 때면 빈은 은우가 저를 무시할 때보다는 배로 머리가 아파왔다. 되려 은우는 간단했다. 제가 있는 자리에서는 음료수 하나 먹겠다고 말하는 법이 없는 주제에, 잠시 외출을 한 사이 돌아와 보면 준일과 돈까스 따위를 시켜서는 나눠 먹고 있거나, 혹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질문을 해도 자신의 말에만 빙빙 돌아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은호의 말은, 빈의 머리로는 언제나 수없이 곱씹고 곱씹어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태반이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은우의 친모인 그녀의 기일에 대해서는 여태 단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부러 그것을 되짚는 은호의 말에 빈은 그제서야 그게 생각난 척,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같은 공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연이어 궤도를 튼다. 은호는 빈을, 준일은 은우를. 빈은 어느새 은호의 손 끝에서는 불이 붙어 발갛게 점멸하는 담배 불씨의 끝에서 은우를 향해, 그리고 은우 또한 빈을 향해.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시작하듯 천천히, 그리고 점점 빠르게. 어느새 침묵만이 맴도는 방 안에서 귓가로 피가 펌프질 하는 소리가 이명처럼 울릴 때까지 계속.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다 죽어가던 어린 소년을 은우의 친모가 찾아낸다. 무슨 연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으나 아주 어렸을 적 죽어서는 얼굴도 잘 모르는 아버지와 관련된 것임은 분명했다. 어찌 됐든 그녀는 빈을 매우 아껴 주었다. 마치, 자신의 친 아들이라도 되는 것 처럼. 다정한 시선과 말은 빈으로서는 생전 처음 겪어 보는 것이었다. 그녀는 빈을 서울로 데려와 간신히 이 건물에 가장 외진 곳에 방을 내었다. 그리고, 자주 그곳으로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빈의 아버지라던가 그녀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녀는 주로 은우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한 때 빈은, 그녀가 자신의 친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상상하자 가슴이 기대로 부풀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말도 안되는 상상이었다. 그랬다면 은호가 빈이 회사 건물 안 어디선가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방관할 리가 없다는 것을, 머리가 조금 자란 후에 여지없이 깨달았기 때문에.

마지막 겨울에 빈의 작은 사무실 안에 수시로 드나들던 그 즈음 그녀의 모습은 도통 산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병마는 몸에 번진 것인지, 아니면 정신 깊은 곳에 뿌리내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음을 목전에서 목격한 빈에게는 그 모습조차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니까, 너희의 구둣발을 혀로 씻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야. 빈은 가만히 말간 얼굴을 본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일한 말은 은우를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빈과 관련된 이야기는 끝끝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의 죽음을 끝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생전에 너무 지나친 걱정을 했다고 생각한다.

질투가 났던 걸까? 그녀가 언제나 사랑해 마지 않는 듯이 기쁨에 찬 표정으로 언급하던 그가. 좁은 방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도 결국에는 주제가 되던 은우가. 다른 사람을 향한 빈의 감정은 언제나 간단했음에도, 은우를 향해서는 늘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던 이유는 그래서였을까? 그래서 결국에는 그녀의 부탁대로 그의 친구처럼 도와 주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러면서도 떠나지도 않고 이렇게 남은 걸까. 아무 것도 아닌 채로. 모두가 무언가의 역할을 맡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혼자만 아무것도 아닌 채로.

3.

창 밖으로 끊임없이 비가 창문을 때린다. 빈은 푹신한 침대 위로 몸을 크게 움직이며, 그러나 종국에는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작게 구겨 말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리고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다. 지금이 낮인지도 밤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방은 어둡다.

누군가를 극도로 증오하는 일은 반대로 사랑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지만, 빈은 그것은 마치 곤충이나 동물이 싸울 때 거리를 두고 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감정에 블랭크를 두고, 상대방에 대한 감정과 자신이 가진 것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그 크기를 가늠한다.

잠결인지 알 수 없는 경계에서 실없는 생각을 더듬는 찰나, 문 밖으로부터 말소리가 들렸다. 퍽이나 다정하게 섞인 목소리는 멀리서부터 다가와 문 앞에서 멈춘다. 빈은 반사적으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는 눈을 감았다. 이불을 틈 없이 머리 근처로 틀어 막았지만 헛수고인 듯 되려 귀가 배로는 예민해진다.

“식사하셨어요? 안 그래도 저녁 차려 놓던 참인데.”
“…빈이는요?”
“오늘 하루 종일 방에서 안나오셨어요. 밥도 거르고.”

그들의 목소리가 방 문을 지나고, 두터운 장막까지 지나서는 비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빈이는요, 빈이는요. 아주 짧은 음절이 만들어내는 그 울림.

“그럼 그냥 치워주세요.”

은우의 목소리가 덧붙여진다. 그리고는 며칠 전 빈이 막 이곳으로 돌아왔던 그 날처럼, 문 밖으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온당히 들려야 할, 그게 제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그 때와 마찬가지로. 빈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의 방으로 오지 않기를 빌었다. 그러나 어김없이 문이 열린다.

조용한 발소리가, 문을 열고 잠시 멈춘다. 그리고 한 발자국을 내딛고는 또 잠시, 다른 발을 내딛고 다시 잠깐. 그 조심스러운 발걸음마다 빈의 숨도 따라 멈춘다. 이내 은우가 멈춰 섰을 때에는 달리기라도 한 마냥 숨이 차 가슴이 벅차 오를 지경이었다. 빈은 입술을 깨물며 숨을 틀어막듯 삼켰고, 그래서인지 조용한 방 안에는 빗소리와 은우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렸다. 곧 침대 한 켠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빈의 허리맡이었다.

“…자?”

대담하게도 말을 건다. 만약에, 정말로 잠에 들었던 빈이 목소리에 응답해 깨어나 마주했다면, 그는 과연 무어라고 말할까. 자는 척 하는 지금과는 다른 내용일까, 궁금하다. 물론 빈은 대답하지 않았고 은우는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몸을 기울인 건지, 아니면 반대로 일으킨 건지 침대가 흔들린다. 빈은 이불 속에서 눈을 떴다. 제 손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와의 거리를 가늠하던 찰나 바로 위에서 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떠나기 전에 나한테 그랬었지, 대체 어쩌려고 그러냐고.”

은우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낮고 음울했다. 그 기억은 아무래도 빈에게만 잊고 싶은 기억으로 남았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너 그렇게 가버리고 수도 없이 되짚어봤어. 왜 그랬었는지, 뭘 하고 싶었었는지 나도 잘모르겠어서…”

문득, 빈은 은우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음을 떠올린다. 그 때가 언제였더라.

“어제 다시 네 얼굴을 보고 나서야 알겠더라. 난 그냥 낫게 해주고 싶었어. 그냥… 아니 너무, 미치도록.”

은우는 말 끝에 다시금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짧은 숨을 덧붙이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망설임 없이 방을 나간다. 문이 닫히자, 빈은 덮었던 이불을 단숨에 끌어 내렸다. 금세 이마와 목 언저리에 땀이 가득 맺혀, 찬 공기가 닿자 소름이 돋았다. 아주 오랜 시간 잠수를 하고 물 밖으로 간신히 나온 사람처럼 숨을 몰아 쉰다. 방금 은우가 한 말보다, 끊이지 않는 빗소리 사이사이에 섞여 들려오는 그 언젠가 은우의 웃음소리가 빈을 더 괴롭힌다. 우리가 서로 마주보고 웃었던 적은 있었던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히.


3-1.

따끔한 감촉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빈을 깨운다. 억지로 밀어 올린 눈꺼풀보다 한 템포 느리게 돌아오는 정신에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준일이 잠시 나간 사이 눈을 붙인다는 것이, 해가 다 저물도록 자버린 모양이다. 좁은 공간 안 어둠 속에는 작은 스탠드만이 유일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가로막은 큰 그림자 하나가 빈을 향해서는 기울어져 있다. 잠이 덜 깬 빈이 반사적으로 준일의 이름을 부르려다가는 입을 꾹 다문다. 손을 들어 눈가에 닿아 있는 손을 쫓아내듯 쳐냈다.

‘뭐 하는거야?’

정확한 시점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은우는 언제부턴가 빈의 말에 대꾸를 삼갔다. 원체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날이 갈수록 칙칙해진다. 아니, 칙칙하다는 표현은 실언이다. 어쨌든 유독 제게만 그런 것인지를 모르겠으나, 빈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짐작할 수 없어 의아하고 답답했다. 처음에는 분명 그가 제게 어떠한 관심도 갖지 않아주길 바랐고, 빈 또한 무관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자의인지 어느새 제 삶에 끼어든 은우로 인해 빈의 그런 다짐은 자각하지 못한 사이 무너 진지 오래였다. 그래서 빈은 때로는 은우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지금 그 동그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알량한 자존심을 지지대 삼아. 빈은 다만 짜증을 담아 다시 한번 물었다. 지금 뭐 하는거냐고.

‘나이가 몇인데 맞고 다녀.’
‘…뭐?’
‘병신 같이.’

좀처럼 욕이라곤 들을 수 없던 은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직설적인 단어에 빈의 미간이 구겨졌다. 팔을 지지대 삼아 반쯤 몸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내 어깨 죽지로 날카롭게 번지는 통증에 힘이 빠져 쇼파로 뒤통수가 처박혔다. 은우가 웃는다.

‘똑같이 만들어주기 전에 웃지마.’
‘가만히 좀 있어. 이거 흉 지면 너 더 못생겨져서 안돼.’

다시금 일어나려는 빈의 어깨를 은우가 세게 쥐고 누른다. 그건 생각보다 억세서, 반항하려 더 움직였다가는 다친 부분이 더 아파올 것 같아 빈은 힘을 빼곤 고개를 돌렸다. 스탠드 불빛 아래로 늘어져 있는 약봉지들이 보인다. 빈의 입가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저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순간이다.

병신 같은건 너야. 중얼거렸다. 은우는 들은 채도 않는다. 다만 부산스럽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 손등에 약을 짠다. 이어 면봉의 끝을 살짝 대어 여러 차례 굴린다. 세심하고 꼼꼼하게 약을 묻힌 은우가 손을 뻗었다. 빈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곧 눈가로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빈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다. 은우는 이번 해 그런 쪽으론 무지한 빈이 듣기에도 제법 이름이 있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사무실과는 거리가 꽤 있는 곳이었다.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려다 관둔다.

‘아, 아파…’
‘그러게 누가 싸우래. 은호형한테 이른다.’
‘신경 꺼. 그리고, 싸운거 아니거든…’

면봉의 감촉은 간지러웠지만 상처로 스며드는 약은 제법 쓰라렸다. 빈이 말 끝을 늘어뜨리며 뭐라 덧붙이려는데 귀신같이 은우가 손바닥으로 빈의 입을 덮어 막았다. 조용히 하라는 건가. 눈을 굴렸지만 은우의 시선은 빈의 눈에서 조금 옆, 눈가로 비껴있다. 다른 한 손은 여전히 상처에 면봉을 굴린다. 어깨를 쥐었을 때나, 지금 입을 막은 손과는 다르게 부드럽고, 작게 움직인다. 쓰라림은 사라지고, 간지러움만이 남는다.

그 감촉이 빈의 마음을 순식간에 변덕에 타게 했다. 기억에도 없는 경험이 빈을 속이며 나타난 것이다. 날씨 좋은 어느 날, 누군가의 다리를 베고 누워 바람을 느끼는 듯한.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처럼. 빈이 자세를 조금 고쳐 편하게 눕자 상처를 호호, 불던 그가 잠시 기다려주더니 면봉을 떼내곤 약봉지를 정리한다.

여전히 허리 쪽은 은우의 온기로 묵직했다. 춥고 어두운 사무실 안에서 유일한 온기다. 밴드를 손가락 끝으로 떼내는 모습을 보며 빈은 눈을 감았다.

‘학교… 재밌냐.’
‘재밌으면? 너도 다니게?’
‘내가 미쳤냐.’

곧 상처 위로 밴드가 부드럽게 달라 붙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려면 검정고시도 봐야 되고 너처럼 주구장창 책만 들여다봐야 되는데. 눈을 감은 채로 투덜거리다가 빈은 제가 은우처럼 책상에 파묻혀 공부하는 모습을 떠올리곤 웃어버리고 만다. 진짜 안어울려.

‘그냥 그걸 뭐 하러 다니는건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야.’

말을 할수록 어쩐지 구차해 보일 까봐 빈은 그만 말을 줄였다. 어쩐지 은우는 별 말이 없었다. 빈이 의식적으로 웃던 입꼬리를 끌어 내리는데,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은우의 손이었다. 머리 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엉겨 들어온다. 마치 크게 머리채를 쥐기라도 할 것처럼. 빈이 놀라 눈을 뜨자, 시야 가득히 눈이 마주쳤다.

‘별로 재미없어.’

말문이 막혀 달싹거리는 빈의 입술을 보며 은우가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빈의 머리를 천천히 빗어 넘겼다. 그리고 눈을 내리 감는다. 그 속눈썹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빈은 마른 침을 삼켰다. 고요한 사무실에는 점차로 시계 초침 소리만이 커져갔다.


4.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쉬지 않고 이어지던 장마가 별안간 멈췄다. 날이 개고, 햇빛은 대기를 데워 젖은 땅을 말린다. 그 동안 빈은 집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식사는 종종 방으로 부탁했고, 혹은 먹지 않았으며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추운 것과 비등하게 비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날이 개는 것도 오늘 낮 잠시 뿐으로 다시금 밤부터는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를 보았다. 그래서 잠깐의 해가 더할 나위 없이 반갑다. 빈은 커튼 사이로 밀고 들어오는 빛에 단숨에 현관으로 뛰어 내려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 발을 잔디밭에 딛는다. 채 마르지 못한 물기가 차갑게 파고 들었다.

저택은 여전히 공허했다. 화사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기이하게 고요하다. 도착한 날 유일하게 반겨주던 나무 아래로 단숨에 간 빈은 젖은 땅은 개의치 않고 기둥에 등을 대고 누웠다. 바람이 분다. 시원했고, 머리를 기댄 나무 둥치는 누군가의 팔베개처럼 포근하다. 지난 이틀 내내 잠만 잤음에도 눈을 감자 금세 잠이 온다.

빈은 별장에서 지냈던 시간과, 며칠 전 공항에서 집으로 오던 길 대로 위에서 얼핏 잠이 들었던 그 순간이 오버랩 되는 것을 생생하게 본다. 라디오를 들으며 손가락으로 까딱까딱, 조용히 핸들을 두드리던 준일의 뒷모습. 형, 하고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낮게 허밍하며 대답 대신 고개를 튼다.

ㅡ 호주에 있는데, 갑자기 걔가 보고 싶었어.

보고 싶다는 감정이 그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가만히 누워 그 이목구비를 떠올릴라 치면 생각나지 않았고, 그래서 답답했다.

ㅡ 무서워서 도망갔던 주제에, 그러면 안되잖아.

분명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꿈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뜬금없는 제 말에도 준일은 놀라지 않았으니까. 마지막 말을 끝으로 눈을 떴을 때, 빈의 다리 근처에는 물기의 습함이 아닌 사람의 체온이 닿아 있었다. 눈을 감고 누운 그의 손에는 읽다 만 책이 펼쳐져 있다. 그 위로, 고여있던 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빈은 은우의 얼굴을 뜯어본다. 갸름한 얼굴선을 그리고, 그 안으로 수없이 배치하고자 노력했던 것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서히 열리는 것도.

“별장 앞에 있는 나무, 이거랑 같은 거야.”

은우가 눈짓으로 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빈이 지난 한달 여 동안 가 있던 호주의 별장에 있던 것과 같은 종이라는 말이다. 어렸을 적 은우가 그곳에서 잠시 살았을 때, 그의 친모가 직접 모종을 구해 와 심은 것이라 들었다.

“너 있었을 땐 꽃도 폈었겠다.”
“응. 근데 별로 안예뻐. 벌레만 잔뜩 꼬이던데.”
“꽃이 달아서 그래.”

은우가 싱겁게 대답했다. 이번엔 조금 더, 센 바람이 분다. 바람은 은우가 손에 쥔 책장의 페이지를 넘기고, 짙은 검은색 머리 끝을 지나 빈의 볼에 다 달아서야 내려 앉았다. 심장이 가볍게 뛰기 시작한다.

“난 널 하나도 모르겠어.”

은우가 책장을 의미 없이 넘기며 말한다. 빈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더 가까이,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형, 나 은우가 좋은가 봐. 한국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가 지척으로 가까워진 것을 피부로 느낀 순간에야 깨닫는다. 비에 잔뜩 젖어 수건을 건네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난 그냥 같이 있고 싶었어. 그래서 매일 말도 안되는 핑계로 찾아갔다. 넌 늘 비겁하게 반 발자국, 아니 한참 뒤에 멀리 떨어져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했으니까. 그래서 그 때는 그게 내 최선이었어.”

담벼락 너머로 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난다. 은우는 어느새 저 멀리 담벼락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코로 비에 젖어가는 모래흙이 말라가는 냄새가 난다.

“다시 돌아왔다는 건 넌 끝까지 엄마랑 한 그까짓 약속을 지키고 싶다는 거지?”
“…그래.”

빈은 웃고 싶은 기분이 되었지만 아무리 입꼬리를 들어올리려 해도 제 몸이 아닌 양 말을 듣지 않는다. 힘겹게 대답하자 은우가 짤막하게 소리 내어 웃는다. 빈은 차마 고개를 들어 그 표정을 볼 수가 없어서 그것이 마치 비웃는 듯이 들렸다. 제가 생각해도 충분이 우스웠다.

“엄마가 부탁한대로라면 친구여야 하는데, 넌 내 친구 아니잖아.”
“…….”
“난 필요 없어.”

은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저택이 아닌 문으로 향한다. 빈은 조용한 사무실 안에서 시간이 아무리 지남에도 넘어가지 않는 은우의 책장을 떠올렸다. 이제 와서 나도 네가 좋아졌다고 말하면 넌 더 크게 비웃겠지. 빈은 은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끝끝내 눈을 떼지 못했다.


4-1.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 바쁘다. 빈은 모호함의 경계를 밟고 걸었다. 황량한 주차장에 차를 내던지다시피 주차를 하고, 가로질러 계단을 오른다. 은호의 도움으로 구한 집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제법 소속감을 주어,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두운 복도를 걸으며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멀리서부터 보이는 그 인영에 단박에 그 주인을 떠올린다.

‘저번에 비밀번호 알려줬잖아. 왜 밖에 있어?’

빈은 은우의 옆에 바짝 서서 도어락을 풀었다. 문을 열자 아침에 켜고 나간 불빛이 복도로 쏟아져 나온다. 먼저 들어가도록 문을 잡고 비스듬히 서자, 은우가 기댔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앞선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은 은우가 식탁 위에 들고 있던 종이팩을 내려 놓는다. 빈은 포트에 물을 올리곤, 은우가 가져온 팩을 그대로 집어 냉장고에 넣었다. 얼마 전에도 그가 장을 봐왔던 기억이 있나 싶었더니, 바로 옆 칸에 같은 로고의 종이팩이 있다. 그 중 단 종류의 분말가루만 꺼내 찬장에 따로 넣는다. 그것들은 사시사철 내내, 여름에는 바뀔 만도 하건만 항상 그대로였다. 은우는 차가운 것이 싫다고 했다.

빈은 컵에 물을 따랐다. 갈색의 진한 가루가 녹아 내리며 단박에 단내가 올라온다. 은우의 앞에 놓아주자 그가 고개를 숙이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 본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뒤를 돌자 은우가 찻잔에 입을 대 삼켜내는 소리가 들렸다. 은우는 빈이 방을 구한 시점에서부터 늘 주기적으로는 무언가를 사와 빈의 오피스텔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사무실에는 더 이상 오지 않았고, 대신 빈이 타준 홍차나 코코아 따위를 조용히 마시고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떠나곤 했다. 마치 제 사무실에 찾아오던 고등학교 시절의 그 때처럼.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제는 모를 수 없었다. 문득 그가 쓰다듬던 머리 속 손가락의 감촉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날 새벽 내내 잠 들지 못했던 자신도.

‘불 또 안끄고 나갔네.’
‘어두운거 싫다니까.’

빈은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을 했다. 오늘따라 묘하게 불안한 기분에 부러 소리 내어 침대를 정리하는 빈의 등 뒤로 은우가 여상히도 말했다. 과일 같은 건 금방 상하니까 빨리 먹어야 한다거나, 청소 좀 하라고 타박하던 그 어투로.

‘좋아해, 빈아.’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간결한 문장이었지만 빈은 그걸 이해하지 못해 한참이나 멀둥히 서 있었다. 가만히 들고 있던 베개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곧 빈은 그만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당황한다. 그런 빈을 보며 은우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어투로 말을 잇는다.

‘계속 고민했는데, 답은 맨날 같더라고. 넌 내 질문에 수백 가지의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나한텐 결국 100이 아니면 0이니까...’
‘…….’
‘우리 엄마가 너한테 어떤 의미인줄 알아. 근데 내가 괜찮으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런건.’
‘…….’
‘내가 너 좋아하니까, 상관 없잖아.’
‘그만해.’

간신히 쥐어짜낸 목소리에 은우의 미소가 희미하게 번진다. 귓가로 그가 부른 제 이름이 나뒹군다. 빈은 순간 누군가 제게 답을 알려주길 바랐다. 웃고 있지만 어쩐지 여태껏 아무 표정이 없을 때보다 더 공허해 보이는 그 표정의 의미를.

‘이제야 겨우 말한 건데, 그만하라고 하면 난 어떡해.’

이내 고개를 떨군 그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제 마음을.

그리고, 그 이후에 준일에게 들었다. 은우가 은호를 찾아가 한참이나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그리고 또 무언가에 대한 허락을 받았다는 사실을. 빈은 같은 날 저녁 은호를 찾아가 부탁했다. 나 호주 별장에서 좀 쉬다 올게. 엄마 기일 전엔 돌아올 테니까 보내줘. 은호는 한참이나 그런 빈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 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5.

범람하는 홍수 속에서 멀어지는 빛에 손을 뻗고, 시린 눈을 감지 않는다. 검고 매서운 폭풍이 가득한 들판에 작은 나무처럼 맥없이 휘날렸다. 일어나.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결국에는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알면서도 힘껏 발버둥쳤다.

빈은 유영하듯 물 속을 가득 메운 검은 구름 사이로 헤엄쳤다. 끝도 없이 펼쳐진 앞을 내다보자 가슴이 불안함으로 옥죄었다. 다시 헤엄친다. 아니다, 무기력하게 잠겨 든다. 부족하다고 가슴에서부터 차오르는 숨을 가쁘게 끓어 냈다.

어느 순간 온 몸을 훑던 차가운 기운이 사라지고, 등 뒤로 축축히 젖은 이불이 느껴졌다. 더 이상 물 속이 아니다. 괴로운 악몽이었다. 누워 있는 몸이 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기분에 빈은 땀에 젖은 팔등으로 이마를 덮었다. 밤새 잠겨있던 탓에 어두웠던 시야가 서서히 트이기 시작하자, 제일 처음 보인 것은 새벽의 공기가 닿아 있는 푸른빛의 천장이었다. 멍하니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블라인드 그림자가 간간히 흔들렸다. 창 밖으로는 빛도 없는 천둥소리가 울린다. 방 안은 온통 눅눅했고, 습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방금 전 꿈의 물 속과도 같다.

그리고 눈을 돌리자, 그가, 은우가 거기 있었다.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숨을 참지도 않는다. 빈은 누운 채 가만히 그의 입술을 본다. 무어라 달싹이고 있는 그 입술을. 얼핏 술 냄새가 났다.

“그 나무, 죽어 버린 거 알아.”

그 말에, 호주의 별장에 갓 도착했을 때가 떠올랐다. 아주 먼 곳에서도 크게 그늘을 드리우던 것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큰 나무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빈은 가만히 서 한참이나 메마른 그 둥치를 내려다 보았었다. 꽃 따위는 피어날 리가 없다.

은우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진다. 앞머리로 그늘진 그의 얼굴이 온통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 채 돌아오지 못한 시야 때문인지, 은우의 형체 자체가 낯설었다. 빈은 힘겹게 목을 쥐어 짜냈다.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가 볼품없다고 생각한다.

“근데 왜 모르는 척 했어?”
“궁금했어. 네가 뭐라고 대답해줄지.”

조금 더, 가까워진다. 숨결이 얼굴에 흩어질 정도로.

“다 포기하자고 마음 먹었어. 그래서 그깟 거짓말쯤 아무 의미도 없는 거라고 계속 생각했고. 네 말 한마디에 다시 기대를 거는 내가 답 없다는거 너무 잘 알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또 거짓말처럼 되살아 나더라.”

입술이 닿기 직전이다.

“그래서 제발 한 발자국만 나한테 내딛어 달라고, 그럼 나는 다시 병신마냥 다 내던지고 매달릴 수 있다고, 말하려고 왔어.”
“…….”
“근데 이렇게 막상 다시 얼굴을 보니까, 그 때처럼 또 도망가 버릴까봐 무서워.”

아무 말이라도 건네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고장난 전구가 발악하듯 번개가 쳤다. 그리고 그제서야 은우의 얼굴이 보였다.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이 끊이지 않는 그 얼굴이.

“좋아해, 빈아. 이제 귀찮게 안해. 사무실이든 집이든 찾아가지도 않을게.”

그러니까 도망 가지마. 다음엔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속삭인다. 입술이 부딪혔다. 잔뜩 젖은 입술이 빈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머금는다. 물기를 머금은 혀가 조심스레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은우의 손 끝이 빈의 손가락 사이로 얽혀 들어온다. 마치 자기를 밀어내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처럼.


6.

장마가 끝났다. 참 지독했다고 생각한다. 영호가 출장에서 돌아왔고, 그러자 저택은 그제서야 사람이 사는 곳 마냥 북적이게 되었다. 내내 찾지 않았더니 먼저 나타나는 법이 없던 준일을 빈은 아침 일찍 정원을 산책하다가는 마주쳤다. 평소라면 놀리듯 먼저 말을 걸었을 빈이었지만 그저 눈인사를 하고는 말았다.

신기했다. 마치 바다와 맞닿기라도 한 양, 그래서 파도라도 치는 양 끝도 없이 비가 내리던 하늘이 이제는 뻥 뚫린 텅 비어 버린 것이. 별안간 천둥이 울릴 일도 없이 저 멀리 별까지 비출 기세로 맑은 것이. 장마 속에서의 한 방울 비는 때로는 채찍보다도 아팠지만 날이 갠 후 느린 속도로 걷는 빈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온통 가볍고 간지럽기만 하다.

빈은 정원 가장자리를 따라 오랜 시간 걸었다. 그리고는 문득 고개를 들어 은우의 방 창문을 보았다.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사이로 실루엣이 보였다. 흰 셔츠를 입은 그는 창문 사이로 간간히, 가만히 서서는 소매 단추를 꿰기도 했고 잠시간 누군가와 통화를 하기도 했다.

산책을 마친 후에는 긴 샤워를 했고, 그리고 오랜만에 정갈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었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신경 써 머리를 말렸다. 계단을 내려가 저택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식탁 앞에 섰다. 은호와 은우, 그리고 준일은 이미 착석해 있었다. 빈은 별다른 인사말을 건네지 않았고, 그들도 부러 이어가던 대화를 멈추지는 않았다.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밥을 먹었다. 대화의 주제는 은호의 출장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간간히 웃음이 터졌고 빈은 더 이상 그들의 면전에 술잔이라던가 무언가를 던지고 싶지는 않다는 걸 깨달았다. 대신, 빈은 조용히 따라 웃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거실에서 차를 마셨다. 은호와 준일은 커피를, 은우는 홍차를, 그리고 빈은 유자차를 부탁했다. 좀 달게, 진하게 타주세요, 하고는. 오랜 시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모두가 잠시간 조용해졌을 때, 은우가 말했다. 이번 여름 방학 때는 엄마 별장에서 쉬려고.

차는 빈의 입에는 역시나 달았다. 너무, 너무도 달아서 혀가 아렸다. 하지만 그건 까슬하게 마른 빈의 입안을 녹였고, 그건 무미한 물이나 씁쓸한 커피로는 안될 일이었다. 잔을 다 비운 빈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얼마 되지 않은 짐을 챙겼다. 그리고 그렇게 빈은 저택을 떠났다.


7.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창 하나를 경계로 보이는 밖은 이미 가을이다. 허공에 부유하는 먼지가 빛을 받아 눈 앞에서 반짝였다. 모든 것은 자각하지 못한 순간 너무나도 빠르게 스며든다. 빈은 몸에 맞지 않은 듯 불편한 정장 깃을 한창이나 만지작거린 후에야 손에 쥔 국화 다발을 고쳐 쥐었다. 고급스러운 건물 안은 지나치게 조용하다. 귀에 익은 음악이 들릴 듯 말 듯 숨죽여 연주되고 있다. 빈은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제가 찾는 함 앞으로 가 선다. 작은 사진 안에서 웃고 있는 여자의 미소를 마주하며 꽃을 내려 놓는다. 안녕하세요, 하고 마음 속으로 인사를 건네며.

사진 옆에는 돌로 된 화분 안에 가득 꽃이 핀 난이 놓여져 있었다. 생전에 그녀가 좋아하던 서양난이었다. 꽃잎에는 물기가 남아있다. 그걸 보자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무언가를 결심할 때면 이곳으로 오는 버릇이 어떤 이유로 같은지 알 수 없어서.

빈은 연신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다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소리 내어 말한다.

“죄송해요.”

그 말을 기점으로 주저함 없이 눈물이 고였고, 빈은 조금 더 깊이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한다. 죄송해요, 엄마. 눈물은 끝끝내 흐르지는 않았다. 빈은 걸음을 돌렸고, 건물 밖으로 나오자 지나치게 밝은 빛이 빈의 눈 위로 부서졌다.

아, 생각났다. 은우를 처음 만났던 그 때. 그건 빈이 처음 서울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밤에는 그 많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갔고, 그러면 그 넓은 곳에는 오로지 자신 혼자만이 남았다. 갑자기 건물이 무너져 내려도 나 하나 죽은 것쯤은 아무도 모를 거야. 키들거리며 불도 켜지지 않은 복도를 걸었었다.

그리고 방에 도착했을 때, 그 때 그를 처음 보았다. 지금처럼 갑자기 쏟아진 빛에 눈이 부셔 눈을 비볐다. 느리게 돌아오는 시야 사이로 은우는 방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뭐야, 너?’

빈이 묻자 그가 고개를 돌린다. 처음 보는 사람은 보통 경계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는 눈이 마주치자 마치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을 마주하듯 웃었고, 그리고, 또 웃었었다. 이거 엄마가 가져다 주라고 해서요. 쇼파 옆에는 큰 가방이 놓여져 있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의 길고 긴 여정에서 엄마로부터 반복해서 듣던 존재였다. 실제로 마주하니 기분이 묘해 입가를 매만지는데, 그가 짐을 내려놓더니 뒤로 맨 자신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한다.

‘이거 쓰세요.’

가는 손가락 사이에는 편의점에서 팔 법한 반창고가 있었다. 빈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은우가 소리 내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가를 짚었다.

‘여기 피나요.’

멈춘 시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있다. 제 시간은 언제 멈췄던 걸까. 빈은 차양을 만들던 손을 내려 오래도록 저장되어 있었지만 단 한번도 먼저 연락한 적 없던 번호를 찾는다.

웃는 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했었다. 빈은 통화 버튼을 누른다. 오랜 시간 멈춰 있던 시계가 두텁게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움직이는 소리를, 빈은 그 순간 명확히 듣는다. 두려움과 함께 심장이 가볍게 뛰기 시작했다. 0이 아니면 100일거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빈이 예상할 수 있는 은우의 대답은 언젠가 그의 말처럼 수백 가지씩이나 되지는 못했다. 그와는 달리 빈은, 이제 막 그를 향한 첫 발을 내딛는 것뿐이니까.

빈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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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pin> - 더쿠 / 첫 걸음 2017.06.30
<계절의 시작> - 이브 / 첫사랑 2017.06.30
<참회> - 새벽 / 첫 눈물 2017.06.30
<나를 구해줘> - 차이 / 처음 2017.06.30
<성에> - Autumn / 첫 기억 2017.06.30
계간은콩 2016 가을호 후기 2017.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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