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빈은 우성 알파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럴 것이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외가 쪽도 친가 쪽도 모두 우성 알파니까. 게다가 페로몬 향도 다 꽃향기랬다. 물론 가족들끼리 단체로 흥분해 본 적이 없어 맡아 보진 못했으나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그랬다.

 

처음엔 페로몬 그게 뭐 중요하다고- 하며 별생각 없던 빈이었지만 4년 전 형질 판정을 받은 옆집 형 명준의 하소연을 귀에 딱지가 앉게 들은 후부터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꽃 향기 아니고 이상한 거면 어떡하지. 명준의 페로몬은 캣닙 향이어서 애인이랑 분위기만 잡으면 온 동네 길고양이들이 몰려와 문을 박박 긁는 바람에 더운 여름에도 창문 한 번 못 연댔다. 그래도 방법을 찾긴 했네. 섹스가 그렇게 좋냐. 빈의 말에 명준은 답했다. 빈아, 노섹노랖 몰라? 형은 연하를 만나가지고 아주 그냥 매일매일이 별천지다.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식 겸 약 한 달 전 학교에서 단체로 실시한 형질 검사 판정 결과가 나오는 날. 대개 20살 생일에 진행되는 발현은 가끔 그 고통의 정도가 심해 죽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10년 전부터 WHO에서는 매년 전 세계 만 19세들을 대상으로 형질 검사를 했다. 그리고 최첨단 바이오 기술의 집약체라며 매우 허접해 보이는 알약을 세상에 소개했는데, 자랑스러운 빈의 조국 코리아에서 만든 그 이름도 찬란한 '발고줄', 풀네임 '발현 시 고통을 줄여주는 약'은 빈에겐 그냥 이름을 존나 이상하게 지은 진통제 같았다.

 

마침내 담임 선생님이 흰 봉투들과 함께 조그마한 약통 하나를 들고 들어와 아침조회를 시작했다. 졸업 전 마지막 순간이고 뭐고 빈의 눈에 들어오는 건 봉투뿐이었다. 곧 다시는 볼 일이 없기를 바라는 1년 동안 함께했던 칭구칭긔들이 번호 순서대로 교탁 앞으로 불려 나가 봉투와 약통 속 약 한 알, 졸업장을 받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김빈이고 싶은 문빈은 계속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장미? 아카시아? 아님 시원한 민트?

 

“8번 문빈.”

 

집에 가서 부모님 먼저 보여드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찢다시피 봉투를 연 빈은 떨리는 마음으로 위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저 약 3년 전부터 자취하는데용. 쌤 저한테 관심이 너무 없으시당. 3학년 3반 8번 문빈. 형질은 우성알파. 약은... 발현 날 하루 전에 드십숑. 예상 발현 날짜는 정확한 것이 아니므로 앞뒤로 하루씩의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케오케. 아 그래서 내 페로몬이 뭔데. 어디있냐... 오! 찾아쓰~! 귀하의 페로몬은....

 

"뭐????????????????????"

 

[무(蔔)향입니다.]

 

-개인 소견

[없을 무 아니고 땅에서 나는 하얀 거. 먹는 거. 뭔지 알죠?]

 

 

엄마.

엄마 아들.

무래.

먹는 무...

 

 

 

rush&cash

라멍 씀

 

 

사나이 문빈은 그날 집에 와서 울었다. 존나 울었다. 봉투는 갈기갈기 찢겨 쓰레기통으로 직진했다. 아무리 한문이랑 담을 쌓은 빈이었어도 무 옆에 붙은 한자가 없을 무가 아니라는 건 알았는데, 거기서 1차로 터진 멘탈은 바로 밑에 쓰인 개인 소견이 확인사살을 탕탕탕 해버리는 바람에 완전히 뒈져 버렸다.

 

페로몬이 무 냄새, 아니 무향이라니. 부모님이 예전부터 계획해왔던 세계 일주를 가야 한다며 사라져버린 중학교 졸업식 날 보다 더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전현무가 되어버리는 편이 훨씬 나았다. 전현무는 돈이라도 많지. 이래서는 별천지고 뭐고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다가 그림책 커다란 순무 끌어안고 고독사로 발견되기 딱 좋겠네요, 시발.

 

꿈속에서 존나게 커다란 무가 저를 쫓아오는 꿈을 꾼 빈은 헉헉대며 일어나 이를 갈았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가 그랬냐. 그래도 한 숨자고 나니 좀 나아져서 뒤져버린 멘탈에 호흡기 달아주고 눈에는 마카롱을 만든 채로 거실로 나갔는데 명준이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혀엉. 나 걱정돼서 와 줬구나.

 

응애응애 하며 요람에 누워 있을 적부터 알아 온 명준은 사실상 근 3년간 빈의 보호자나 다름없었다. 아파트 구조 상 빈의 방이 명준의 방과 딱 붙어 있어서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 탓에 게임하다 욕하는 소리부터 섹스 중 신음까지 죄다 들렸는데, 명준이 집에서 갈 데까지 갈 때마다 빈이 거실에서 잠을 청하는 대신 빈이 어제처럼 혼자 울고 있으면 명준은 다음 날 아침에 둘의 최애음식 매운 떡볶이를 사 들고 와 위로해주곤 했다.

 

"...왔네, 형."

"야. 세상천지 스무 살 먹고 그렇게 집이 떠나가라 우는 애는 너밖에 없을 거다. 이번엔 또 뭔데?"

"그게,"

"일단 저거부터 세팅해. 나 뱃가죽이 등짝에 붙겄어 아주. 누구누구 씨가 해가 중천이든 하천이든 아랑곳 않고 주무시는 바람에."

 

빈은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형은 그냥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내가 우는 날마다 아싸라비야콜롬비아 개다리 댄스를 추며 이때다 싶어 건너왔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30분째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있는데 티비에만 눈을 고정한 채 떡볶이를 입에 욱여넣고 있을 리가 없잖아. 요즘 명준이 즐겨본다는 예능프로는 빈이 보기엔 재미가 단 1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명준은 입안에 떡볶이를 가득 채운 상태로 이상하게 웃었다. 형. 으흐흐. 형. 으흐흐흐흫. 형. 아하하하하핳아핳아핳.

 

"형!!!!!!!!!!!!!!!!!!"

 

아씨 깜짝이야. 명주니 깜놀했쪄. 왜용 우리 빈이, 형아가 떡볶이만 먹고 있어서 습습해쪄용? 입술 양옆에 떡볶이 소스를 잔뜩 묻히고 제 엉덩이를 툭툭 쳐오는 명준의 모습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이 쳐다보던 빈이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아 내 고민 언제 들어줄 건데에!!!!!!!!!!!!

 

"아 맞다맞다. 까먹을 뻔했네. 말해봐말해봥."

"...나 어제 형질 검사 결과 나왔어."

"근데 그게 왜."

"페로몬이..."

"페로몬이 왜."

"...페로몬이 무향이래."

"무향? 향이 없을 수도 있나."

"시발..."

"왜? 무향인 게 마음에 안 들어? 특별하고 괜찮지 않아?"

 

어! 존나! 없을 무가 아니라 무라고 무! 먹는 거! 무를 주세요 할 때 그 무라고! 갈갈이 몰라 갈갈이? 소고기 뭇국 모르냐고오! 길길이 날뛰는 빈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다시 티비에 눈을 고정하고 의식의 흐름대로 튀어나오는 빈의 말을 해석하던 명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 잠깐만.

 

"...저 무라고?"

 

명준의 오른손 검지 끝이 가리킨 티비에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무가 옹알이를 하며 활짝 웃는 모습이 송출되고 있었다. 이런 시발. 무과장님 아빠 되셨네요. 축하드려요. 전현무 돈 많다는 거 취소. 우리 무과장님이 훨씬 많겠네. 무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하.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그 날 이후 명준의 핸드폰 속 빈의 저장명은 무과장이 되었고, 거기서 한술 더 뜬 명준은 아침마다 빈이 알바하러 현관문을 열고 나오기만 하면 무과장 잘 다녀와~! 라고 아파트 복도가 다 울리게 인사를 해 댔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사정사정을 해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명준에 빈은 협박을 하기로 결심했다. 형 자꾸 그러면 진우 형한테 형 예전에 만났던 남자들 다 말할거임. 형 이상형이 키 180 넘는 남자라는 것두. 조금 쪼잔한 방법이긴 했지만 먹히긴 먹혔는지 툴툴대면서도 명준은 아침 배웅을 멈췄다. 우리 진우는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걸랑? 참 내, 웃겨 증말.

 

 

발현은 오차 없이 빈의 생일날 진행되었고, 검사 결과에 오류는 없었다. 이런 시발...

 

 

 

대망의 신입생 오티 날. 빈은 일주일 전 무신사에서 구매한 옷을 풀착장하고 신발장 앞 전신 거울에서 연신 빙그르르 돌았다. 무향 그까이거 대충 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이 말이야! 나도 이제 대학생이고! 나도 연애할거다! 대부분의 새내기가 그러하듯 단단한 착각에 빠진 빈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와 버스에 올랐다. 오늘의 곡은... 베이비 복스의 우연이다. 우연처럼 존잘남을 만나는 거지. 발라 발라 꼬미꼬~ 라 발라 발라 보니따~ 발라 발라 무에뻬~라 치카 발라 보니따~ 우여니라 하기엔~ 너무도 심가켔지~

 

오티 하면 술, 술 하면 오티. 오티 장소에 들어선 빈은 명준의 조언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뚱뚱한 성시경 비쩍 꼴은 성시경 그냥 성시경 안경 벗은 성시경 밖에 없는 게 대학이어도 잘 찾아보면 어? 한 학교에 한 명씩은 잘생긴 애가 있단 말이야. 그런 애들이 오히려 게이일 확률이 높다니까? 알파건 오메가건 일단 얼굴이 괜찮아야 될 거 아녀. 빈아, 내 말 잘 들어. 얼굴 딱 스캔하고! 잘생긴 놈 찾고! 눈도장 딱 찍어 놔! 근데 딱 봐도 뼈테로 상이면 그냥 접어. 괜찮은 게이바 알려줄게. 나 울 진우 거기서 만났쟈나~ 우리 빈이 홧팅!

 

"문!빈!입니다! 술...은 잘 마시진 못하지만 불러주시면 언제든지 가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빈은 주량이 그렇게 세지 않았다. 그러니 주량 쎈 사람도 작정하고 먹여서 기어 다니게 만드는 술판에서 빈이 살아남을 리 없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2, 3학년 사이에 끼게 된 빈은 여자 선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가끔가다 말꼬리를 자르고 끼어드는 남자 선배가 있었으나 이내 여자 선배들의 따가운 눈초리에 다른 원을 찾아 길고 긴 여정을 떠났다.

네에? 어! 저 수울 모ㅅ 마시는데ㅇㅢㅣ? 이르ㅋㅔ 자꾸 주시며ㄴ능 또 마셔야 대자나여~! 아녀! 마시ㄹ수 잇어영! 주십ㅂ셔! 헤ㅎㅔㅎ! 긍디 승배리믄 왜 손끄ㆍ락이 여서께에여? 에헿헿헿헿!

 

그렇게 존잘남과의 운명적 만남은 커녕 주는 대로 받아먹으며 점점 흐려져가는 정신줄을 겨우겨우 붙잡던 빈의 겨드랑이의 누군가의 손이 끼워졌다. 착ㅏㅂ다! 차가븝니다! 하핳! 그렇게 일으켜진 빈이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향했다. 순간 오바이트가 쏠렸으나 다행히 찬 바람을 맞으니 술이 좀 깼다. 읏추읏추.

 

"괜찮아요?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순간 빈은 제 귀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명주ㄴ이형... 나 찾앗다. 내가 찾던 싸랑. 이거 츃ㅐ서 헛것이 보이는거ㄴ 아니것지? 얼굴ㄹ이 약깐 흐릿한디 그래두 잘쌩겻다! 긍데 이게... 반존데라는겅ㅇ가? 아 쬐끔 선ㄹ레네? 심장이 막 뜨ㅣ느데? 리쓴투마핥빝포윤데 완저니?

 

"나 제대로 보여요? 일단 이거부터 마셔요."

 

올~~~~여ㅁㅕㅇ 808~~~~얼굴도 백쩜인대 센수도 백쩜인네! 옷 입는 것뚜 밲쩜! 도합 삼백쩌메 인쌩을 사시능구나~~! 빈은 어느새 제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존잘남의 손에서 여명 808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원샷. 긍데 나는 사실 컨딧션판댕. 마이너수 일쩜이다~! 아무리 찬바람을 맞고 약간의 정신이 돌아왔어도 지금의 빈에게 정상적인 사고회로의 작동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다음엔 컨디션 사 줄테니까 마이너스 일점 다시 더해주면 안돼요?"

"에? 왜여? 저항ㅌ데 관심이쓰세여?"

 

네. 근데 빈 씨가 싫으면 안 할게요. 내 이름은 차은운데, 내일 기억할 수 있겠어요? 핫씨 그럼여, 내가 딴거능 못 외어도 잘생긴 사라ㅁ들 이르믄 잘 외우걸랑여~! ㅋㅋㅋ나 잘생겼어요? 그럼 합격인가... 막 들이대도 돼요? 오브콜ㄹㄹ스땡큐땡큐! 막 드리대애! 이름두 자알 생겻네!

 

 

 

 

 

 

 

 

 

그리고 블랙아웃.

 

 

 

 

 

 

 

 

 

 

다음 날 아침, 호텔 침대마냥 깔끔하게 각 잡힌 침대에서 눈을 뜬 빈은 어리둥절했다. 어? 요즘 대학 시체 방은 이렇게 잘 되어있나? 1인 1실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휑한 느낌에 이불을 들춰보니...

 

"...미친 놈."

 

나체. 빈은 팬티 한 장 걸친 나체 상태였다. 사실 빈은 술을 각 잡고 마신 적이 별로 없어 제 주량을 정확히 알지 못했다. 1월 1일에 진우와 단둘이 포장마차에서 깡소주를 들이붓고 필름이 끊긴 채 일어난 다음 날 너는 절대 어디가서 소주 한 병 이상 마시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들은 게 다였다. 그 때 이유도 말해줬던 것 같은데...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싶은 안일한 마음에 무작정 잔이 채워지는 대로 마셔버렸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빈이 제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생각해보니, 누가 봐도 이곳은 시체 방이 아니었다. 조금 전엔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뇌가 재부팅이 안 됐었던 게 분명했다. 그럼 선배나 동기들 중 누군가의 집이라는 건데, 동기들과 말 좀 섞어보기도 전에 픽 당해 선배들의 원으로 빠진 빈에게 친해진 동기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내려 노력해봐도 어제의 마지막 기억은 '선배님은 왜 손가락이 여섯 개예요?' 였다. 그리고 나서 순간적으로 겨드랑이가 차가웠던 것 같기도 한데, 누가 내 겨드랑이에 아이스팩이라도 끼웠던 거야 뭐야. 아무튼 이 방은 선배들 중 누군가의 집이 분명했고, 그렇다면 어서 빨리 옷을 주워 입어야 했다. 멀리도 던졌네, 문빈. 아주 투수해도 되겠어. 말 나온 김에 자세 한번 잡아 봐? 내가 또 중딩 때는 학교 대표 구원투수였지. 투수 제자리에. 와인드 업- 던졌습니다!

 

"술은 좀 깼,"

 

 

 

스트라이크!

 

 

 

 

 

 

 

 

 

 

"진짜 진짜 진짜 죄송해요 진짜로..."

"뭘 또 그렇게까지 미안해해요. 괜찮아요."

"...정말요?"

"네. 술 취한 후배 재워주고 깨우러 들어갔다가 방 문 앞에서 맨투맨으로 복부를 강타당한 적은 처음이지만 뭐. 신선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렇게 웃지 말고 차라리 존나 짜증난다고 말하라고요, 이 완식선배님아. 약 5분 전 빈이 입으려다 말고 문 쪽으로 집어던진 맨투맨은 직구로 날아가 마침 빈을 깨우러 들어오던 은우의 배에 퍽- 소리를 내며 부딪히곤 스르르 떨어졌다. 놀란 마음에 곧장 문 쪽으로 뛰어가자 눈에 띄게 굳는 은우의 얼굴에 빈은 대학 생활 한번 거하게 꼬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냥 저가 웃통을 까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그 와중에 젠틀하게 문을 닫아주고 나간 은우에 빈은 생각했다.

 

저 남자 놓치면 나... 분명 혼자 딸치며 후회한다.

 

그렇게 머쓱하게 옷을 주워 입고 나갔는데 이 완식선배는...  콩나물국까지 끓여놓았다. 이게 뭐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완식남에게 개똥같은 첫인상을 안겨준 나를 불쌍히 여겨 처음이자 마지막 신혼 생활 시뮬레이션을 시켜주는 걸까. 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국을 이리저리 헤집고 있는 빈의 모습에 은우는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곤 혹시 콩나물국을 싫어하는 거냐고 물어왔다. 아니 제발 깜빡이 좀 켜고 들어오시면 안 될까요. 길바닥에 붙은 껌딱지 같은 남자새끼들이 설치는 꼴만 보다가 갑자기 님 같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숨 쉬기도 힘든 게 정상이라고요. 차마 밖으론 꺼낼 수 없는 말을 삼키며 하하 웃은 빈이 국그릇을 들고 쭉 들이켰다. 미친 두부가 없잖아? 이건 운명이야.

 

"다행이다. 입에 맞는구나. 걱정했잖아요. 일부러 두부도 안 넣었는데."

"네? 두부, 두부요?"

"ㅋㅋㅋ네. 어제 나한테 업혀 오는 내내 콩 싫어 팥 싫어 두부 싫어 근데 무가 제일 싫어, 막 그랬으면서."

 

...별소릴 다 했다 진짜. 무 얘긴 왜 했는데.

 

"아니 뭐... 제가 얻어먹는 입장인데..."

"얻어먹는 입장인 사람한테 내가 호감이 있으면 상황이 달라지잖아요."

 

잘했어, 문빈. 이번에 뿜었으면 넌 그냥 캠퍼스 내 영구매장이었어. 근데... 방금 뭐라고?

 

"왜요. 어제 분명히 안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했으면서."

 

제가, 제가요? 당황한 나머지 말이 나오지 않아 눈만 동그랗게 뜬 빈의 얼굴을 본 은우가 작게 푸스스- 웃었다. 진짜 푸스스-. 완전 인터넷 소설 그 자체네. 아니, 그래서 나... 나한테 호감이 있다고? ...진심으로?

 

“일단 밥부터 먹고 얘기해요.”

 

 

할 얘기 많잖아요, 우리.

 

 

 

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급하게 식사를 끝마친 빈이 거실 소파에 앉아 설거지하는 은우를 기다렸다. 아 나 너무 이미지 관리 안하고 게걸스럽게 먹은 것 같은데. 자기 그렇게 미친놈처럼 게걸스럽게 콩나물국 먹는 게 그게 정상이야? 어? 거지도 아니고? 얼마 전 뉴스에서 들은 주옥같은 대사가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오렌지 주스라도 줄까요?”

 

아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왜 저 완식선배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설거지를 하는 걸까. 나중에 해도 되는 거 아녀? 잘생겨서 봐 준다. 은우가 물 한 잔과 함께 켜 준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던 중 마주한... 무과장님. 맨 몸에 넥타이를 매고 활짝 웃는 그의 모습에 나중에 대출받을 일 있으면 꼭 ok저축은행에서 받겠노라 다짐하는 빈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완식남은 없었다. 이 사람은 완식남인가 가정부인가. 어느새 토끼 모양으로 사과를 깎아 포크로 쿡- 찍어 빈의 손에 쥐여 준 은우에 또 한 번 놀란 빈은 일단 한 입 베어 먹긴 했으나... 할 얘기 많잖아요, 우리-라며 드라마 명대사 감인 말을 던져놓고 아까 전부터 제 옆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은우에 식은땀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냥! 말을! 걸라구요! 나 답답해 뒤질 것 같다고! 본인 이름이라도 물어보라고요!

 

"빈 씨."

"네, 네."

"내 이름 모르죠."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직격타를 날리면...

 

"...네."

 

사실대로 말해야지 뭐 어떡해. 사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은우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보여서 구라를 깔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빈은 은우와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혼자 딸치며 후회하긴 싫었으니까. 그래서 솔직하게 깔 건 까고! 사과할 건 하고! 그럴 생각이었다.

 

"...이런 말 좀 오지랖일 수 있는데,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줄래요?"

"뭐, 뭔데요?"

"앞으로 술 마실 때 나랑 같이 마셔요. 좀 취하게 마실 것 같다- 싶은 자리엔 무조건 나 불러요."

"네?"

"그게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뭐가요?"

"어제 우리 집이... 빈 씨 페로몬으로 가득했었거든요? 아니 근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왜 아무 일도 없었죠?"

"...네?"

 

아 잠시만요 아 진짜 제가 방금 뭐라고 했죠? 약간 지금 말풍선과 생각 풍선이 바뀐 그런 클리셰적 상황인 것 같은데. 저 변태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구요. ...말실수라고요 말실수. 저스트 미스테잌...

 

"아니에요, 그래서요?"

"그래서... 물론 빈 씨 우성 알파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완전히 취했을 땐 위험하니까..."

"...그래서 선배님이 지켜주신다고요?"

"지켜...준다기보다는, 어, ...뭐 그런 셈이죠. 또 이름도 모르는 사람 앞에서 그러면 어떡해요."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뭐예요?"

"음..."

 

 

내가 빈 씨 좋아하니까?

 

 

 

당황하는 빈에 하하 웃은 은우가 일단 서로 아는 게 너무 없으니 통성명부터 하자고 했다. 빈은 속으로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웃으면 저의 완식선배가 삐칠까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소개팅도 아니고, 개웃기다 진짜.

 

저는 문빈이에요. 알아요. 나는 차은우에요. ...이름 예쁘네요. 그것도 알아요. 어제 빈 씨가 이름도 잘 생겼다고 그랬거든요. 제가요? 네. 헐. ㅋㅋㅋ왜요. 진짜 별소릴 다 했네요. 빈 씨는 경영학과죠? 나는 통계학관데. 그럼 수학 잘 하겠네요? ...뭐, 그렇죠? 근데 그건 왜요? 그럼 더 게임 오브 데스도 잘 해요? ㅋㅋㅋㅋ그게 궁금했어요? ...네. 필승전략 하나 알려줄까요? 헐헐 뭔데요?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 수보다 더 큰 소수를 부르면 나는 안 걸려요. 와, 대박이다. 근데 빈 씨, 우리 이런 거 말고 다른 거 물어보면 안 돼요? ...어떤거요? 뭐 생일이라던가... ...전 이런 것도 궁금했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빈 씨가 내 마음 받아주려면 나에 대해 잘 알아야 될 거 아니에요. 네? ...안 받아주려고 했어요? 아뇨? 근데 왜 놀라요. 아니 그냥... 전 이미 오케이 준비 완료라서요. ㅋㅋㅋㅋ이미 준비 완료에요? 네. 선배가 완전 제 스타일이라. 우리 둘 다 우성 알판데, 그것도 상관없어요? 그건... 제가 노력해볼게요. ㅋㅋㅋㅋ뭘 노력해요. 진짜 귀여워.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빈을 집 앞까지 데려다 준 은우는 들어가려는 빈을 붙잡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빈 씨가 저장하고 싶은 걸로 저장해요. 나도 그렇게 할게. 그리고 우리 다음부터는 말 놔요. 좀 더 가까워져야죠. 연인 사인데.

 

 

 

 

형 내가 진짜를 만났어. 게다가 나한테 관심도 있대. 그날 밤 명준을 제 집으로 부른 빈은 열변을 토했다. 게이바? 필요없어 꺼지라고 해. 아니 글쎄 내가 취해가지고 페로몬이 슬슬 개방됐다는 거야! 대부분 베타라 잘 모르는 상태였는데 그 진짜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가지고 밖으로 데리고 나갔대! 내가 걱!정!돼!서!

 

"시끄럽고, 잤어?"

"형은 그거밖에 몰라? 그 진짜는 내가 완전 무방비 상태였는데도 털끝 하나 안 건드렸다니까?"

"그냥 걔도 알파라서 그런 거 아니고?"

"뭐?"

"개도 알파라며. 너 같으면 같은 우성 알파랑 자고 싶냐?"

"아니거든?"

"아님 뭐, 니 페로몬 때문이던가."

"페, 페로몬?"

"그래, 무과장아. 김장하는 날도 아니고 집에 무 냄새가 진동한다니, 어후. 차라리 캣닙이 훨 나은 듯."

"헐 시발."

 

 

그걸 생각 못 했네. 내가 내 페로몬을 생각 못했네. 이제야 생각나는 진우의 말. 너 술 마시면 페로몬 장난 아니다. 우성 알파가 그렇게 풀어버리면 오메가들은 어떡하냐? 열성들은 어떡하고? 순간 말이 없어진 빈에 말이 조금 심했나 싶은 명준이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는 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으나 빈은 흔들리지도 않고 계속 멍했다. 야... 내가 말이 좀 심했다 미안... 은근 소심한 명준의 사과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계속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결국 뜯던 닭다리를 내려놓고 조용히 무릎을 꿇으려는 명준을 빈이 불렀다.

 

"형."

"...엉. 내가 미,"

"차은우는 진짜야."

 

명준은 잠시 떼었던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였다.

 

 

 

 

근데 형 아까 뭐 하려고 했어? 어, 어 암것도 아냥. 1인 1닭을 클리어 하고 명준을 보낸 빈이 침대에 누워 방금 전 명준의 말을 곱씹었다. 페로몬 때문이던가... 페로몬... 내 그지같은 페로몬을 느꼈는데도! 좋대! 내가! 차은우가! 동네 사람들! 차은우가 내가 좋대요! 내가 좋대! 하하하하하하하! 나 사랑받는 무과장이야!

 

 

 

다음 날, 그러니까 일요일은 빈이 오후에 기상하는 날이었다. 평소처럼 늘어지게 자고 2시쯤 일어났는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누구지? 혹시 내가 알바를 띵까먹었나? 간담이 서늘해져 확인한 통화목록에는 '♥'가 찍혀 있었다. 하트ㅋㅋㅋㅋ하트다 하트ㅋㅋㅋ 은우, 은우 선배가 왜 나한테 전화를 했을깡? 그것도 아침 일찍? 급하게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고 건 전화는 구라 약간 보태서 1초만에 연결됐다. 완벽하다 진짜. 준비된 남자.

 

"선배, 전화하셨어요?"

'응. 아침 산책 겸 운동하다 보니까 빈이 네 집 쪽이길래, 혹시나 해서 얼굴 잠깐 보려고 전화했는데. 잤지?'

"헐. 뭐야 어떻게 알았어요?"

'어제 그랬잖아. 알바 없는 날에는 늦게까지 잔다고. 주말엔 알바 없다면서.'

"그걸 다 기억해요?"

'그럼. 근데 어제 우리 말 놓기로 했잖아.'

"어... 그게 그러니까요..."

'ㅋㅋ불편하면 천천히 해. 나부터 할게.'

"네, 네."

'빈아, 보고 싶은데 잠깐 나올래? 사실 나 아직 집에 안 들어갔어.'

 

 

진짜다. 차은우는... 진짜야.

 

 

 

꽃샘추윈지 뭔지 아직까진 추운 날씨에 혹시 우리 진짜선배가 감기라도 걸릴까 급하게 세수와 양치만 끝낸 다음 롱패딩 주워입고 집을 나선 빈은 위 아래 세트인 하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은우를 발견했다. 뭐야, 트레이닝복 존나 예쁘잖아? 스파이더? 오늘부터 내 최애 브랜드다. 당장 서패위에 올려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저를 향해 화사하게 웃는 은우에게 한 번 웃어준 빈이 바로 어젯밤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을 던졌다.

 

"선배는 내 페로몬 알죠."

"그럼, 그 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근데도 내가 좋아요?"

"네 페로몬이 왜?"

"...무잖아요. 무가 뭐야, 무가. 나 진짜 내 페로몬 알았을 때 엄청 속상했단 말이에요."

"무가 뭐 어때서? 내 페로몬은 더 특이해."

"...뭔데요?"

 

 

 

 

그날 저녁 빈은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을 다시 했다. 차은우는... 진짜야.

 

 

 

 

 

 

 

 

 

 

 

 

 

 

 

 

 

 

 

내 페로몬은 돈 냄샌데? 신권 냄새.

 

빈은 이제 진정한 무과장이 되었다.

 

 

 

 

계간은콩 2019 봄호 line up list
<밤바다> - SIN / 바다향
<종이의 무게> - 빵구 / 종이향
<열 번째 겨울> - 딸기우유 / 겨울향
<Take Me Away> - 꼬꼬지 / 흙향
<spring> - 헏쟝 / 딸기향
<어서 내게> - 확대경 / 벚꽃향
<향수> - 풍선 / 시프레향
<짝사랑> - 퐁 / 국화향
<꾐> - 틈 / 매화향
<Chocolate Box> - 콘 / 와인향
<츄파춥스와 담배사이> - 코코콩 / 츄파춥스향
<멍청이> - 컬러 / 눈물향
<마지막 키스> - 초록 / 튤립향
<5242> - 차주 / 오이비누향
<무색무취> - 제니 / 무(無)향
<다시 이별> - 은죽빈살 / 기름냄새
<향수(鄕愁)> - 원 / 헌 책 냄새
<파란 늪> - 우주대통합 / 베이비파우더향
<동화 속 해피엔딩> - 우주대통합 / 금작화향
<What Is Love?!> - 온기 / 풍선껌향
<금단> - 얌 / 담배향
<마고> - 야옹멍 / 용연향
<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 야옹멍 / 사향
<yellow and mellow> - 앙꼬 / 레몬향
<고양이로소이다> - 슈가빈 / 감귤향
<방과후> - 손질 / 초콜렛향
<찾아줘> - 소빈/ 커피향
<MOONWALK X ROLEPLAY> - 베디 / 박하향
<숨결을 그리다> - 뷰길리 / 숨결향
<복숭아> - 물뿌 / 복숭아향
<semen> - 몽 / 밤꽃향
<The name> - 망간 / 잉크향
<탈출> - 리콜라 / 염향향
<마니또> - 로빈 / 체향
<rush&cash> - 라멍 / 무향
<욕(欲)> - 달함 / 백단향
<봄이에게> - 다로 / 비냄새
<α> - 날주 / 세이지향
<서로에게는 달콤한 따가움> - 나비담 / 살구향
<소잃고 뇌약간 고친다> -결절 / 섬유유연제향
<피는 안 나도 땀은 나더라> - 김오이 / 땀내음
<fall in love> - 그믐 / 새벽향
계간은콩2019 봄호 후기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