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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by. 야옹멍

 

 

 

 

 

 “선비님.”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바깥에서 바람과 함께 달달한 아이의 향이 나를 감쌌다. 바깥 공기가 제법 따뜻했다.

 

 

 “선비님, 봄이 왔나 봅니다. 들꽃이 이만큼이나 피었답니다.”

 

 

 코 끝에 달큰한 봄 향기가 아른거렸다. 유독 추워 길게만 느껴졌던 겨울이 가고, 또 다시 만물이 소생(蘇生)하는 봄이 왔다. 사계(四季)는 끝도 없이 돌고 돌아, 겨울이 지나가면 다시금 봄이 온다. 죽음이 있으면, 태어남도 있는 법. 그것이 자연의 섭리(攝理)이듯이.

 

 

 “그러니. 네게 들꽃 향이 묻어 왔나 보구나.”

 “선비님께서는 집 밖으로 잘 안 나가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들꽃을 꺾어왔답니다.”

 

 

 아이의 수줍은 웃음소리가 귀에 맺혔다. 아이의 미소를 눈에 담지 못함이 한스럽다. 육안(肉眼)으로 볼 수는 없어도 마음으로 아이를 담았다. 아이의 웃음은 봄처럼 싱그럽고 어여쁠 것이 자명(自明)했다. 그 웃음에서 들꽃의 향기가 느껴졌다. 아이야, 내 너를 눈에 담게 된다면, 그 날이 오게 된다면

 

 아이는 어느 새 방 안에 들어앉아 콧노래를 불렀다. 길거리에서 숱하게 들려오는 뻔하디 뻔한 사랑 노래였다. 화병(花甁)에다 꺾어온 들꽃을 꽂아 두겠다며 손질하고 있는지 분주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노랫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빈아.”

 

 

 나는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감히 입에 담기조차 과분(過分)한 그 이름을, 내가 직접 네게

 

 

 “네, 선비님.”

 “고맙구나.”

 “아이, 별 말씀을요. 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육안으로 직접 보지 않더라도,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마음이라면, 나는 네 마음을 마음으로 전해 받았다. 눈이 마주 닿는 대신에, 마음과 마음이 마주 닿았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언젠가 더 이상 내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어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할 지 알 수 없으나, 그 순간까지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길 염원(念願)했다. 나는 옛날부터 탐(貪)이 많았다.

 

 

 

 

*

 

 

 

 

 나는 사람을 굳이 가까이 하지 않았다. 깊은 산 속의 외딴 집에 홀로 사는 것도 다 그런 연유(緣由)였다. 가끔 찾아오는 심부름꾼들만 제외하면 나는 오롯이 혼자 있을 수 있었다. 그 분과의 추억이 가득한 이 곳에서 그 분을 기다리며. 당신께서 부여(附與)하신 이 생(生)을 제가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오랜 세월을 버텨내어 이제는 낡고 허름해진 집에서 저는 당신의 영자(影子)를 찾아 헤맵니다. 흘러가는 시간만큼 당신의 종적(踪迹)도 바래어져 저는 삼백예순날 눈물을 흘립니다. 지나가는 시간은 화살보다 빨라 제가 감히 붙잡아 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 분의 온기(溫氣)가 점점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가린 천이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일월(日月) 속에서, 봄과 같이 아이가 찾아왔다.

 

 

 “선비님, 앞으로 이 아이가 심부름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몇 번째 심부름꾼이었는지 셈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소년은 제법 나이를 먹어 마을을 떠나게 되었다며 어린 아이를 대신 데려왔다. 많아 봤자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직접 보지 않아 알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아직 앳된 것으로 어림짐작하였다. 열 살 아래였다면 이 인적 드문 산 속 깊은 곳까지 홀로 왕래(往來)하기 어려울 것이니, 열 살을 갓 넘긴 아이가 아닐까 요량(料量)했다.

 

 

 “그렇구나. 그 동안 고생 많았다.”

 

 

 이제 막 성년(成年)이 된 소년에게 약간의 여비(旅費)를 쥐어주었다. 산 아래 마을이 작다 보니 나이가 차면 많은 청년들이 마을을 떠났다. 워낙 산세(山勢)가 험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이라 농사를 짓기도 어렵고, 혼기(婚期)가 차더라도 적당한 짝을 찾기도 어려우니,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당연지사(當然之事)였다.

 

 

 “가는 길 힘들지 않게 잘 챙겨 먹고.”

 “네, 선비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청년이 된 소년은 아이를 남겨두고 산을 내려갔다. 나와 둘만 남게 되자 아이는 내 눈치를 보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아이가 앉아있을 쪽으로 몸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그래, 아이야, 내 너를 어떻게 부르면 좋겠니?”

 “네?”

 “네 이름이 무어냐고 물은 거란다.”

 

 

 아이가 살짝 머뭇거렸다. 고작 이름을 물은 것이 민감한 질문은 아니지 않은가 싶어 말을 하려 입을 여는데, 아이의 대답이 조금 더 빨랐다.

 

 

 “선비님, 저는 이름이 없어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나는 입 안에서 맴도는 언어의 파편(破片)들을 곱씹었다.

 

 

 “그렇구나.”

 

 

 내뱉은 말이라고는 고작 그것. 대답 같지 않은 대답에 아이는 웃으며 제 과거지사(過去之事)를 늘어놓았다. 그 웃음이 웃음이 아니라는 것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는 부모님도 없고, 제게 이름을 지어줄 만한 사람도 없었어요. 아주 어릴 적에 보부상(補負商)을 따라 이곳저곳을 전전(轉轉)하다 이 마을로 오게 된 것이구요.”

 “힘들었겠구나.”

 “괜찮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선비님도 만나 뵙게 되었잖아요.”

 

 

 아이가 웃었다. 아이는 빛이 났다. 육안(肉眼)으로 보지 않아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평생을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암흑(暗黑) 속에서 살아왔다. 오로지 그 분의 앞에서만 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둠에 익숙해진 나에게 아이는 빛을 내었다. 아이의 빛이 내게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렴.”

 

 

 나는 아이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아이가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손을 더듬어 아이의 작은 머리를 찾아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그 옛날, 그 분이 내게 하셨던 것처럼.

 

 

 “아이야, 내가 네 이름을 하나 지어줘도 괜찮겠니?”

 “네, 그럼요!”

 

 

 신이 났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져 절로 웃음이 났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넣어 두었던 그 이름을 기억 속에서 꺼내었다. 아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던 그 이름, 가슴 속에 아로새긴 그 이름을. 목 놓아 불러도 대답 않는 당신께 감히 묻습니다. 제게 돌아오신다 하셨지요? 이 아이입니까? 제게 이 아이를 통해 빛을 보여주시는 연유(緣由)가 무엇인지요? 제가 감히 당신의 깊은 뜻을 엿보아도 되겠습니까?

 

 

 “빛날 빈(彬) 자를 써서, 빈이라고 불러도 괜찮으냐?”

 

 

 너는 어둠 속에서도 내 앞을 환하게 밝히고 있지 않니. 아이는 신이 나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는 아이야, 빛이 나는 아이야. 나는 너에게서 그 분을 떠올린단다

 

 

 

 

*

 

 

 

 

 아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그러하듯 지나가며 보이는 들풀 하나에도 호기심(好奇心)이 가득했다. 선비님, 바람은 왜 부는 것이어요? 선비님, 계절은 왜 바뀌나요? 선비님, 겨울은 왜 이렇게 추워요? 선비님, 꽃들은 봄이 오는 것을 어찌 알고 저렇게 피어나나요? 선비님, 선비님, 선비님. 이름 하나 지어줄 이 없었던 아이는 나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말수가 늘었다. 꽃이 개화(開花)하듯 아이도 피어났다. 아이가 내게 물었다.

 

 

 “선비님, 선비님은 왜 눈을 가리고 계셔요?”

 

 

 같이 지낸 시간도 제법 지났건만 아이는 한 번도 묻지 않았던 질문을 내게 던졌다. 제 딴에는 예의가 없어 보이지 않을까 그동안 고심(苦心)한 듯 했다. 아이의 물음에 내 눈을 가리고 있는 몇 겹의 천을 손으로 매만졌다.

 

 

 “보면 안 되는 것을 보기 때문이란다.”

 

 

 볼 수 있음에도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볼 수 있다 해서 모든 것이 다 보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벽안(碧眼)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숙명(宿命)을 타고났다. 내 명(命)이 다 할 때까지 그 분을 모셔야 하는 것이 나의 정명(定命)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분이 운명(殞命)하고 나의 명이 붙어있는 것인지. 어찌하여 나의 운명(運命)이 그 분을 기다리는 것으로 바뀌었는지. 미천(微賤)한 나는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손 끝에 느껴지는 천이 부드럽게 바스락거렸다.

 

 

 “보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인데요?”

 “범인(凡人)이라면 보아선 안 되는 것들이지.”

 “그럼 그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가리고 계시는 것이어요?”

 “남들이 내 눈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아이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 것을 물은 게 아닐까 걱정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을 테였다. 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가까이로 불러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고 있자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 옛날, 당신도 제 머리를 쓰다듬기를 좋아하셨지요. 당신도 그러셨던 걸까요. 당신께서 돌아오시면 묻고 싶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또 궁금한 것은 없니?”

 

 

 아이는 언제 걱정했냐는 듯 금세 풀어져서는 또 다시 와르르 질문을 쏟아냈다.

 

 

 “선비님, 그러면 와룡산(臥龍山)은 왜 와룡산이어요?”

 “누울 와(臥)에 용 용(龍)자를 써서, 용이 누워있는 산이라는 뜻이란다.”

 

 

 보지 않아도 아이의 눈이 빛이 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아선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나는, 보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것이 행운(幸運)인지 불운(不運)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것에 당연하게 익숙해져 있었다. 떼어 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정말로 이 산에 용이 누워 있는 것이어요?”

 “아주, 아주 먼 옛날에는.”

 

 

 나는 아이를 내 무릎에 앉혔다. 옛날 조모(祖母)께서 살아계실 적에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신 적이 있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살았기에 서책(書冊)을 쉽사리 접할 수 없었던 나는 누군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로만 수학(受學)할 수밖에 없었다. 조모께서는 마을의 가장 연장자(年長者)로 가장 많은 설화(說話)와 민담(民譚) 뿐만 아니라 풍문(風聞)까지도 꿰고 계신 분이셨다. 어린 나에게는 조모께서 들려주시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세상이었다.

 

 

 “혹자(或者)는 와룡산이 그 생김새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그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단다.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주 먼 옛날 옛적에, 와룡산에는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살았어. 들어 보았니?”

 “아니요, 처음 들어봅니다.”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와룡산의 이룡(螭龍)은 더 이상 입에서 입으로도 전해지지 않는 잊혀진 이야기일 뿐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이야기도 그 생(生)을 다한다. 세상 만물(萬物) 중에 생사(生死)가 없는 것은 없다. 태어난 모든 것은 죽기 마련이다. 그것이 순리(順利)임을 알건만 더 이상 그 분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이 애석(哀惜)하기 그지 없었다.

 

 

 “이무기는 대망(大蟒)이라고도 하지만, 이룡이라고도 부른단다. 그러니 와룡산은 실제로 용이 누웠던 곳인거지.”

 “선비님은 이무기를 보신 적이 있으셔요?”

 “그럼.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이셨단다.”

 

 

 눈을 감아도 아른거리는 당신의 사영(射影)을 좇아 꿈을 꾸듯 말했다. 꿈결에라도 좋으니 내게 찾아와 주시라 그렇게 빌고 빌었건만, 내 소원 한 번을 들어주지 않는 당신을 무정(無情)하다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제게 당신을 책망(責望)할 자격이나 있던가요. 당신의 무정이 저를 위한 것임을 압니다. 당신의 무정이 저에게서 말미암은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무기는 용이 되었나요?”

 “아마도. 그랬을 거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이 되셨으리라. 반쯤은 나의 염원(念願)이었다. 사룡(蛇龍)이 되어 저 하늘을 훨훨 날아 이 세상을 굽어 살피기를, 그리하여 영원(永遠) 속에서 비천(卑賤)한 저와 함께하여 주시기를. 내가 본 당신의 마지막이 정말로 당신의 끝이 아니기를 그것이 불가(不可)한 바람이라 할 지라도 나는 끝없이 끝없이 열망(熱望)했다. 나는 타고 나기를 탐(貪)이 많았다.

 

 

 

 

*

 

 

 

 

 “선비님, 선비님.”

 

 

 아이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문을 열자 순식간에 한기(寒氣)가 나를 감싸 안았다. 눈이라도 내리고 있는 것인지 얼굴에 차가운 것이 느껴졌다.

 

 

 “선비님, 밖에 눈이 잔뜩 내리고 있으니 밖에 다니실 때 조심하시어요.”

 “고맙구나. 추울 텐데 옷 단단히 입고 다니렴.”

 

 

 아이는 항시(恒時) 내 곁에서 지내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마을에서는 차(車)씨 가문이 여전히 무당(巫堂) 일을 하고 있었고, 나의 생계(生計)에 필요한 금전(金錢)은 그 곳에서 나왔다. 그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기 때문에, 그들을 마주하는 것은 서로에게 제법 거북한 일이었다. 때문에 심부름꾼 아이가 대신 그들에게 나의 성문(聲問)을 전하고, 필요한 돈이며 물품들을 받아왔다. 하필이면 아이가 마을로 내려가는 날, 눈이 온다는 소식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아니하였다. 기거(起居)하는 곳이 산 깊숙이 위치해 있어 오늘처럼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산길에 익숙한 장정(壯丁)이라 할지라도 오가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이다.

 

 

 “선비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 있어 보거라.

 

 

 채비를 단단히 하고 일어서려는 아이를 붙잡았다. 산은 해가 빨리 지는 까닭에 아이가 조금이라도 서둘러 출발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하였다. 손을 더듬어 내 뒤에 놓여진 함(函)을 찾았다. 함 안에 곱게도 모셔놓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향낭(香囊)을 꺼내었다. 향낭에서는 진한 사향(麝香)이 진동했다. 분명히 멀리서도 그 향취(香臭)를 맡을 수 있을 테였다.

 

 

 “빈아, 선물이다.”

 

 

 아이에게 향낭을 건네자 아이가 받기를 머뭇거리며 물었다.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자수가 놓여진 데다 사향이 귀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이 무엇이옵니까, 선비님?”

 “향주머니란다. 나는 앞을 볼 수가 없으니, 집 근처에 온 사람이 너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가 없지 않느냐. 혹시 향이 부담스러우면

 

 

 아이는 킁킁 냄새를 맡는 듯 하더니 환하게 빛을 내었다.

 

 

 “아닙니다, 선비님. 항상 지니고 다닐 거여요!”

 “그래, 고맙구나.”

 

 

 아이는 혹시라도 냉기(冷氣)가 방 안으로 들어올까 싶어 문을 단단히 닫고는 길을 나섰다. 빈에게서 빈으로, 빛에서 빛으로. 당신의 유품(遺品)이라 모셔 놓기만 했던 것이 제 새로운 주인을 찾아 갔습니다. 당신의 이야기조차 명(命)을 다했건만, 미련하게도 저는 당신이 품었던 향(香)조차 저버리지 못한 채로 살았습니다. 당신의 품에서 사는 것은 과거(過去)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 오랜 시간을 저는 한 발자국도 미래(未來)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고 과거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만, 그럼에도 감히 바라옵건대 저의 마지막만큼은 당신의 안에서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

 

 

 

 

 아이가 없는 겨울은 추웠다. 아이가 산을 내려간 뒤로 폭설(暴雪)이 내려 어디를 오도가도 못한 채 홀로 집을 지켰다. 거의 허리께까지 쌓인 눈이 녹으려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릴 테였다. 조용한 방 안에서 오랜만에 그 분의 물건들을 꺼내 늘어놓았다. 혹여나 먼지라도 쌓일세라 비단에 곱게 감싸 함에 넣어둔 것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자니 감회(感懷)가 깊었다. 금방이라도 당신께서 저 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만 같은데, 당신이 쓰시던 물건에는 이미 녹(綠)이 슬었습니다.

 

 그렇게 물건을 모두 꺼내서 깨끗이 닦고, 다시 비단으로 감싸 넣어놓는 따위의 일을 매일 반복했다. 눈은 진즉 그쳤고, 구름에 가리지 않은 햇살이 뭉근히 쌓인 눈을 녹여 내렸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가 집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냄새로 먼저 알았다. 달콤한 아이의 체향(體香)과 섞이는 사향(麝香)의 진한 향취(香臭)가 코 끝에 맺혔다. 아이는 문 밖에서 선비님, 하고 몇 번 부르고는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선비님. 그 동안 별일 없으셨는지요?”

 

 

 일상적인 질문을 하는 아이의 발음이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물어 보려다 네게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아이는 익숙하게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였으면 수고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었을 터인데, 오늘은 머리 대신 얼굴로 손이 향했다.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어보니 곳곳에 딱지가 앉아 있었다.

 

 

 “빈아, 다치었느냐? 어찌 얼굴이 성한 곳이 없구나.”

 “아이 그것이

 “왜 그러니.”

 

 

 아이는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걱정되고 염려스러운 마음에 몇 번을 다그치듯 되묻고 나서야 아이는 입을 열었다.

 

 

 “저 같이 가난한 꼬마가 사향이 들어간 향낭(香囊)을 들고 있다고 도둑놈이라고 오해를 받았지 뭐에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품을 뒤져 향낭을 꺼내 내게 쥐어주며 아이는 웃었다.

 

 

 “그래도 선비님께서 주신 향주머니는 지켰답니다.”

 

 

 아이의 웃음은 여전히 밝게 빛이 났지만, 나는 무슨 연유(緣由)에서인지 그것이 애통(哀痛)했다. 천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두 눈을 꾹 감은 채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내 거기까지 생각지 못하고

 “아닙니다, 선비님. 저는 선비님께서 제게 선물을 주셔서 너무나 기쁜걸요.”

 

 

 달콤한 아이의 향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이의 얇은 팔이 내 목에 감기고, 아이의 작은 몸이 내 품 안으로 들어왔다. 아이는 작고, 따뜻하고, 달콤했다. 한 손으로는 아이의 등을 받친 채로, 다른 한 손으로는 아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 분이 어린 내게 그러셨던 것처럼.

 

 

 “누군가 제게 선물을 준 것이 선비님이 처음이어요.”

 

 

 아이가 내 품으로 파고들며 말했다. 아이의 쌔근거리는 숨에 맞춰 등을 토닥이자니 옛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기억하십니까? 당신께서 제 등을 토닥여 주실 때면 저는 쉽사리 잠에 빠져 들곤 했었지요. 그 때 당신은 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저는 너무도 궁금합니다. 당신께 쏟아낼 질문들이 이 산을 가득히 채우고 있건만, 당신은 언제쯤 제게 돌아오시는지요? 저는 그것이 제일 궁금합니다

 

 

 

 

*

 

 

 

 

 “선비님, 선비님.”

 

 

 아이는 끝없이 끝없이 나를 불렀다.

 

 

 “왜 그러니, 빈아.”

 

 

 대답하고 또 대답하고, 끝없이 대답해도 아이는 듣질 않았다.

 

 

 “선비님, 저를 봐 주셔요.”

 “볼 수 없다 했지 않니.”

 “선비님, 제발 저를 좀 봐 주셔요.”

 

 

 아이야, 내 너를 눈으로 담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날은 내 마음이 터져 흘러 나오는 순간일 것이라고, 그 순간에도 네가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고 아이야, 빛이 나는 아이야, 내 삶의 빛이 되어준 아이야 너는 정말로 내 곁에 있어줄 것이니?

 

 

 “선비님, 저를 봐 주셔요.”

 

 

 끝끝내 모르는 척하고 넘기기에는 네 목소리가 너무도 간절하고, 또 달콤하다는 핑계를 대며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겹겹의 천을 조심스레 걷어 내었다. 그 분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보아서는 안 되는 나의 벽안(碧眼)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이것이 얼마만인지 알지 못한다.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여전히 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선비님, 선비님, 제발 저를 봐 주셔요.”

 

 

 향낭(香囊)이 말을 한다. 짙은 사향(麝香)을 내뿜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향낭이 말을 한다. 있어야 할 아이는 없고, 미련스러운 향낭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제 주인처럼 미련하게도 떠나지를 못한다. 향낭이 말을 한다. 향낭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아, 아이야. 너는 내 미련이구나. 평생을 놓지 못할 미련이구나. 나는 과거에 붙잡혀 끝끝내 너를 보지 못하였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내 눈은 푸르지 않았다.

 

 

 

 

 

계간은콩 2019 봄호 line up list
<밤바다> - SIN / 바다향
<종이의 무게> - 빵구 / 종이향
<열 번째 겨울> - 딸기우유 / 겨울향
<Take Me Away> - 꼬꼬지 / 흙향
<spring> - 헏쟝 / 딸기향
<어서 내게> - 확대경 / 벚꽃향
<향수> - 풍선 / 시프레향
<짝사랑> - 퐁 / 국화향
<꾐> - 틈 / 매화향
<Chocolate Box> - 콘 / 와인향
<츄파춥스와 담배사이> - 코코콩 / 츄파춥스향
<멍청이> - 컬러 / 눈물향
<마지막 키스> - 초록 / 튤립향
<5242> - 차주 / 오이비누향
<무색무취> - 제니 / 무(無)향
<다시 이별> - 은죽빈살 / 기름냄새
<향수(鄕愁)> - 원 / 헌 책 냄새
<파란 늪> - 우주대통합 / 베이비파우더향
<동화 속 해피엔딩> - 우주대통합 / 금작화향
<What Is Love?!> - 온기 / 풍선껌향
<금단> - 얌 / 담배향
<마고> - 야옹멍 / 용연향
<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 야옹멍 / 사향
<yellow and mellow> - 앙꼬 / 레몬향
<고양이로소이다> - 슈가빈 / 감귤향
<방과후> - 손질 / 초콜렛향
<찾아줘> - 소빈/ 커피향
<MOONWALK X ROLEPLAY> - 베디 / 박하향
<숨결을 그리다> - 뷰길리 / 숨결향
<복숭아> - 물뿌 / 복숭아향
<semen> - 몽 / 밤꽃향
<The name> - 망간 / 잉크향
<탈출> - 리콜라 / 염향향
<마니또> - 로빈 / 체향
<rush&cash> - 라멍 / 무향
<욕(欲)> - 달함 / 백단향
<봄이에게> - 다로 / 비냄새
<α> - 날주 / 세이지향
<서로에게는 달콤한 따가움> - 나비담 / 살구향
<소잃고 뇌약간 고친다> -결절 / 섬유유연제향
<피는 안 나도 땀은 나더라> - 김오이 / 땀내음
<fall in love> - 그믐 / 새벽향
계간은콩2019 봄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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