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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아 ..........? 꽃에는 .....이 살고 있대. ..........한테 이름을 지어주면 ..... 만날 수 있어.

 

거짓말 아닌데? 엄마는 ...............

 

아니, 엄마는 못 만났어. .......... 어른이 되면 안 보이는데, 엄마는 깜박하고 어른이 되기 전에 이름을 못 지어줬어. 빈이는 꼭 어른이 되기 전에 ..........한테 이름 지어줘.

 

글쎄.. 어른이 되면 다들 .......... 않게 돼서 그런 거 아닐까?

 

, .................... 상처 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거든. .................... 마음의 문을 닫고, ............... 눈 감아 버리는, 그런 나쁜 마음을 아는 게 아닐까..

 

..............................? 나중에 꼭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 까먹으면 안 된다?

 

, 엄마랑 약속해. ..................................................

 

 

우리 빈이는 좋은 어른이 될 거야.

 

 

 

 

 

 

 

 

 

 

우리 빈이는 좋은 어른이 될 거야.’

 

엄마의 음성이 시끄러운 알람에 묻히며 눈을 떴다. 또 엄마가 나오는 꿈을 꿨다. 엄마는 항상 같은 말을 하지만, 눈을 뜨면 내가 기억하는 말은 한 마디밖에 없다.

 

우리 빈이는 좋은 어른이 될 거야.’

 

좋은 어른이 되기는, 누가. 좋은 사람도 못 되는 내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 리가..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 꿈을 꿀 때마다 매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제 정말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일부러 더 바쁘게 움직이며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 정말 불쾌하다. 바깥 공기를 마시면 상쾌하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늘도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학교로 가는 더 빠른 길이 있지만 자연스럽게 다른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맘때 이 근처를 지나면 항상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난다. 마치 미인의 향. 굳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한 이유다.

 

넌 무슨 꽃이니.”

 

금작화.”

 

혼잣말에 대답이 들려왔다. 너무 티 나게 놀라 버렸다.

 

금작화야. 어때?”

 

, 뭐를?”

 

마음에 들어?”

 

... 마음에 들어.”

 

다행이다.”

 

우리 학교 교복. 같은 색 이름표. 차은우. 우리 학년에 저런 애가 있었나?

 

근데 너, 빨리 안 가면 지각이야.”

 

그 말을 듣고 시간을 확인해보니 확실히 위기다.

 

, 그럼 너는? 되게 여유롭다?”

 

나는 괜찮아.”

 

무슨 소리일까.

 

뭐야..”

 

나한테 빨리 가라고 하면서 자기는 안 가도 된다니. 이상한 애다. 날라리인가. 그래서 내가 잘 모르나? 학교를 잘 안 와서? 아니, 이럴 시간이 없다. 일단 학교에 도착해서 생각해봐도 되는 일이다.

 

그럼 난 간다? , 무슨 꽃인지 알려줘서 고마워.”

 

옆을 지나쳐 뛰어가는데 언뜻 서운한 얼굴이 보였다. 착각일까. 내가 뭘 했다고 저런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상한 애라고 생각하며 학교로 뛰어갔다.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하필 오늘 교문담당이 완전 칼 같은 선생님이다. 솔직히 초 단위로 자르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 도움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이름을 적고, 교실로 올라갔다.

 

 

너 또 그 꽃 때문에 지각했냐.”

 

자리에 앉으니 앞자리 민혁이 웃으며 말을 건다. 건성으로 대답하고 엎드렸다. 아까 걔가 자꾸 신경 쓰인다.

 

꽃에 제대로 홀렸구만. 연애를 안 해서 그렇다니까? 학기 초만 되면 맨날 지각하고, 어쩌려고 그러냐?”

 

맨날 아니거든.”

 

고개를 들지도 않고 조금 귀찮다는 뜻을 내비췄다. 갑자기 머리가 아픈 것 같다.

 

나 양호실 좀.”

 

, 곧 담임 들어올 텐데.”

 

민혁의 말을 뒤로 하고 뒷문을 나왔다. 3이 학교 오자마자 양호실이라고 글렀니 어쩌니 하는 담임이 안 봐도 뻔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대학도 안 갈 거고. 담임은 늘 그렇다. 넌 공부해도 안 된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 걸어봐라, 같은 짜증나는 말들을 수도 없이 뱉으면서 고3이면 고3답게 행동하란다. 뭔 개소리인지.

 

선생님, 저 여기서 쉬고 갈게요.”

 

어느새 도착한 양호실 문을 열고 말했다.

 

요새 좀 자주 오는 거 같다?”

 

침대로 직행해서 누워 있는 나에게 다가와 넌지시 타이른다.

 

자주 아프니까요. 오늘은 더 아프고.”

 

머리?”

 

. 어지럽고.”

 

무슨 일 있어?”

 

양호쌤은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쌤이 말하기론 내가 아픈 건 신경성이랬다. 그래서인지 양호실에 오면 쌤은 내 이야기를 물어봐준다. 그나마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어른이다.

 

그 꽃이요.”

 

1 때 발견했다던?”

 

, 오늘 이름을 알았어요. 금작화라는 꽃이래요.”

 

어떻게 알게 됐어? 2년 간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다며.”

 

누가 알려 줬어요.”

 

누가?”

 

아까 봤던 얼굴이 떠오른다. 이상한 애. 여러모로 이상한 애였다. 그 한적한 곳에 나타난 것도 이상하고, 나한테만 빨리 가라고 한 것도 이상하고, 서운한 표정을 한 것도 이상하고, 얼굴도...... 얼굴이 제일 이상하다. 사람이 아닌 것처럼 잘생긴 얼굴.

 

이상한 애가요.”

 

걔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야?”

 

아니요, 그냥 신경 쓰여서.”

 

어떤 애였는데?”

 

이상한 애요. 이상할 정도로 잘생기고, 키도 컸고, 왠지 다정했는데..”

 

그러고 보니 왜 그렇게 다정했지? 다정하고 애틋한 눈빛이었던 것 같다. 아까는 놀라고 당황해서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도대체 뭐지?

 

키 크고 잘생기고 다정하면 좋은 거 아니야? 니가 항상 말하던 이상형이네.”

 

네에?! 누가 이상형이에요!”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아이.. 그냥, 갑자기 그러시니까. 진짜 이상한 애였어요.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었는데 발자국 소리도 안 나고, 갑자기 나타나고, 저보고 지각한다고 얼른 가라면서 자기는 안 가도 된대요.”

 

걔도 우리 학교 학생이야?”

 

, 이름표 보니까 같은 학년이던데.”

 

그럼 교무실 가서 물어보면 되잖아.”

 

저 쌤들이랑 안 친한 거 알잖아요.”

 

그럼 행정실.”

 

행정실, 행정실 괜찮다. 전화로 대충 뻥치고 물어보면 되겠지.

근데.. ?

 

아니 근데 제가 걔를 찾아야 돼요?”

 

아 찾고 싶은 거 아니었어?”

 

아니거든요.”

 

쌤을 등지고 홱 돌아눕는다. 내가 걔를 왜 찾아?

 

 

 

 

 

 

 

 

 

 

*

, 제가 지갑을 주웠는데, 그 학교 학생인 거 같아서요. 차은우라는 학생 있나요?”

 

결국 집에 와서 행정실에 전화를 걸었다.

 

없어요? 분명 교복이.. , 아니에요. 수고하세요.”

 

차은우가 없다고? 그럼 내가 이름표를 잘못 봤나.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니면서 교복을 입고 있었을 리는 없고. 점점 더 이상한 기분이 든다.

 

 

 

 

 

 

 

 

 

 

*

오늘은 일찍 집을 나왔다. 그 꽃이 있는 골목에서 기다리면 어제 그 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그 애는 나타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고도 한참을 서 있었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우연이었나?

 

나는 그 뒤로도 3일 간 그 짓을 반복했다. 여전히 그 애는 보이지 않고, 주말이 됐다. 주말은 집에 붙어 있는 게 정석이지만, 나는 홀린 듯 그 골목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작화는 오늘도 예쁘게 피어 있었다.

 

금작화야. 걔는 여기 다시 안 온대? 넌 걔가 누군지 알아?”

 

혹시 나 기다렸어?”

 

그때처럼 혼잣말에 들려온 대답.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 애다.

 

계속 나 기다린 거야?”

 

? , 누가 기다려. 그냥 아무 말이나 한 거야. 꽃이나 동물한테 그냥 혼잣말도 하고 그러잖아.”

 

말 처음 걸었잖아.”

 

?”

 

“2년 동안 말 한 마디도 안 걸어줬잖아.”

 

, 저 표정.. 그때 봤던 서운한 표정이다. 근데 얘는 어떻게 아는 걸까. 내가 이 꽃에게 이번에 처음 말을 걸었다는 걸.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스토커, 그런 거야?”

 

아니야. 나는 너 못 따라다녀.”

 

못 따라다닌다고?

 

차은우. 기억 안 나?”

 

너 이름이 차은우 맞아?”

 

.”

 

우리 학교에 그런 애 없다던데.”

 

나는 학교 안 다니니까.”

 

근데 교복을 왜 입고 있었지? 신종 또라이인가. , 지금 잘못 걸린 거야? 인상 좋은 사람을 더 조심하라고 했는데. 물론 얘는 인상이 좋아도 너무 좋지만. 내가 경계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한 눈망울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불쌍한 표정으로.. 내가 나쁜 사람 되는 기분이다.

 

우리, 아는 사이야?”

 

내 말에 더 울상이 된다.

 

기억 못하는구나..”

 

우는 건가..? 푹 숙인 고개가 안쓰럽다.

 

내가 원래 사람 얼굴 기억을 잘 못해! 이름도! 미안.. 우리 언제 봤었지?”

 

10살 때. 울면서 여기 앉아 있었잖아.”

 

너무 옛날이잖아. 10살 때 나는 어쩌다가 얘를 만났을까.

 

 

그 당시 나는,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충격을 먹고 한참 우울했었다. 어떻게 깨달았냐는.. 모르겠다. 어느 날 문득 알았다. 혼자 있을 때면 곧 잘 울곤 했는데, 내가 이 골목에서도 운 적이 있나 보다.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10, 그 해는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고 지워졌다. 11살이 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고, 이 동네는 고등학교를 올라오며 돌아왔다. 얘는 나한테 어떤 존재였던 걸까.

 

 

미안한데, 내가 그때 기억이 별로 없어서.. 우리 어떻게 만났었지?”

 

.... 그건.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었는데, 니가 와서 울길래 내가 위로해줬었어.”

 

그리고? 한 번 만난 거야?”

 

아니. 2달 정도? 그 후에는 내가 없었어서.. 근데 내년이 되니까 너도 안 오더라.”

 

이사했었어. 겨울에.”

 

그랬구나.”

 

정적이 일었다. 난 여전히 얘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잠시 동안 내 위안이 돼 준 사람이라는 거니까, 앞으로라도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우리 앞으로는 자주 보자. 학교 끝나고 한 5시쯤?”

 

그래!”

 

계속 시무룩하던 얼굴이 환하게 웃는다. 웃는 얼굴에서 오는 해사함과 살짝 붉어진 뺨은, 노랗고 붉은 금작화를 닮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면서 금작화의 향이 퍼진다. 미인의 향. 향도 이 애와 닮아 있다.

 

 

 

 

 

 

 

 

 

 

*

우리는 매일 만났다. 이상하고도 당연하게. 주말에도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5시면 은우를 만나러 갔다.

 

안녕? 오늘도 예쁘네.”

 

고마워.”

 

뭐야, 금작화한테 한 말이거든?”

 

은우는 내게, 먼저 도착하면 금작화에게 말을 걸어달라고 했다. 여기 혼자 피어 있어서 쓸쓸할 거라고. 그렇게 항상 내가 먼저 도착하고, 금작화한테 말을 걸고 있으면 은우가 나타났다. 우리는 만나면 골목에 아무렇게나 부서진 돌담 위에 앉아 한참을 떠들다가, 노을이 예쁠 즘에 헤어진다. 주말에 좀 더 일찍 만나서 다른 곳에 놀러 가자고 해봤었지만, 은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안 된다고 했다. 아니 못 간다고.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거라고. 이유를 물으면 곤란한 듯 슬쩍 웃어 넘겼다. , 상관없나. 그냥 둘이 나란히 앉아 얘기하는 것으로도 좋았다.

 

 

근데 너 열아홉 맞아?”

 

, 너랑 동갑이야.”

 

학교는 왜 안 가도 돼? 그거 봤나, 검정고시?”

 

아니, 나는 좀 달라서.”

 

대한민국의 열아홉이, 검정고시도 아닌데, 학교를 안 가도 되는 건.... 너 재벌이야?”

 

은우는 내 말에 웃음이 터졌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자꾸 어깨를 들썩인다.

 

.. 너무 웃는 거 아니야?”

 

미안미안, 귀여워서.”

 

어쨌든 부럽네. 나도 학교 안 가고 싶다.”

 

나는 학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너랑 더 많이 얘기하고, 더 많은 걸 할 수 있잖아.”

 

잔뜩 웃고 있던 은우의 표정은, 금세 쓸쓸해졌다. 괜히 미안하게..

 

학교 거기 별 거 없어.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다. 따분하고. 여기 골목에서 만나는 게 훨씬 재밌어!”

 

정말?”

 

정말이지!”

 

은우가 다시 웃는다. 은우에 대한 의문들은 언제쯤 풀릴까. 매일매일 수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

이제 제법 더워졌다. 벌써 하복을 입는다. 사실 학교에서는 춘추복 기간으로 정해놨지만, 애들은 하복 셔츠마저도 단정하게 입고 다니지 않는다. 날씨 탓에 학교가 끝나면 꼭 음료수든 아이스크림이든 시원한 걸 사서 은우를 만나러 간다. 오늘도 금작화는 예쁘게 피어 있다.

 

너도 덥겠다. 물 좀 줄까?”

 

들고 있던 생수를 금작화가 피어 있는 바닥에 부어줬다. 한동안 계속 비가 오지 않아서 걱정이다. ,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금작화는 한 달이 넘게 조금도 시들지 않고 예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금작화라는 이름을 알고 인터넷으로 열심히 찾아본 바로는, 신경을 많이 써서 가꿔야 된다고 했는데.. 얘는 정말 튼튼한 것 같다.

 

넌 다른 금작화들보다 튼튼한가봐.”

 

올해가 마지막 기회니까.”

 

?”

 

은우다.

 

올해가 마지막 기회라서 오래 피어 있어야 돼.”

 

뭐가 마지막이라는 거지?

 

마지막 기회라는 게 무슨 말이야?”

 

이제 한 달 정도 후면 못 피니까.”

 

내년 되면 또 필 텐데 뭐..”

 

안 돼. 꽃은 피지만, 너랑 얘기할 수 없어.”

 

얘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은우는 처음부터 이상한 애였지만, 지금 하는 말은 좀체 알아들을 수가 없다. 금작화가 피는 것과 너랑 얘기하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너 이사 가?”

 

아니.”

 

그럼 왜? 나는 너 계속 만나러 올 거야.”

 

고맙지만.. 못 만날 거야.”

 

무슨 소리야?”

 

은우는 입을 다문다. 답답하다. 왜 말을 안 해주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줄 수 없어?

 

무슨 소리냐고. 왜 항상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 왜 항상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해?”

 

그럴 수밖에 없어.”

 

어째서?”

 

미안해..”

 

미안해. 나는 그 말이 싫었다.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럴 수밖에 없고, 미안하고 싶지 않지만 미안하다고 하는. 이게 뭐야.

 

미안하면 말해주면 되잖아.”

 

나는 또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어딨어?”

 

어느 곳에서든, 누구한테든, 겉돌며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너한테는 내가, 그냥 그 정도인 거겠지.”

 

그러나 나는 또, 이 차은우라는 존재와 얽혔다.

 

오늘은 가볼게. 내일..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가지 마.”

 

무시했다. 은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가지 마, 빈아.”

 

옆을 지나칠 때 은우가 내 팔을 잡았다.

 

.”

 

뿌리치지는 못한다. 그럴 용기가 없다. 문빈, 너 진짜 비겁해.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 싫어?”

 

놓으라고.”

 

나 보고 얘기해. 내가 싫은 거 아니잖아.”

 

은우를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싫어. 나한테 거짓말하는 사람, 싫어.”

 

거짓말한 적 없어.”

 

숨기는 거 싫다고. 이거 좀 놔.”

 

그럴 수밖에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잘 기억해봐. 차은우라는 이름, 생각 안 나?”

 

생각 안 나! 그냥 너 이름일 뿐이잖아!”

 

감정에 못 이겨 홧김에 쳐다본 은우의 얼굴은 내가 감당할 만한 감정이 아니었다.

 

“......은우야..”

 

왜 기억 못하는데. 나 보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큰 잘못을 했다. 소중한 무언가를 잊어 버렸다. 그건 내가 내 10살의 기억을 지워 버렸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내가 얼룩도 남지 않게 열심히 지워 버린 그 기억 속에, 차은우가 있다.

 

...”

 

은우가 내 팔을 놓는다. 미련이 잔뜩 느껴지는 움직임에 은우의 손을 내려다 봤다.

 

은우의 손끝이.. 희미해..?

 

뭐지? 내 눈이 갑자기 이상해졌나? 믿기 힘든 상황에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은우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판타지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보다도, 은우의 표정이 더 놀라웠다. 저게 바로 말로만 듣던 세상이 무너진 표정이구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은우의 감정으로부터 도망쳤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은우가 가라고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책임을 회피했다.

 

얼마나 빠르게 달린 걸까. 순식간에 집에 도착했다. 어떡하지. 이제 어떻게 하지. 실컷 도망쳐 와 놓고 현관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집에 들어갈까, 아니 은우는 왠지 하루 종일 그곳에 있을 것 같다. 그럼 다시 가볼까, 아니 어차피 또 도망칠 게 뻔하다. 정말 어리석다. 겉돌았어야지. 마음 쓰지 말았어야지. 그저 그런 시간 때우기였어야지. 나는 정확히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뒤틀린 자책만 할 뿐이다. 늘 그랬다.

 

 

 

 

 

 

 

 

 

 

*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이른 아침에 눈이 떠졌다. 학교를 가야겠다 싶었다. 일주일 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쓴 결과, 나는 다시 반투명한 비닐을 뒤집어썼다. 보이지만 선명하게 보지 못하고, 내가 완전히 들어나지 않는, 거대한 반투명 비닐.

 

생각 없이 또 한 주가 갔다. 꿈을 꾸거나 뒤척이는 일 없이 잠을 자고, 알람이 필요 없을 정도로 눈이 잘 떠졌다. 몸이 가벼웠고, 밥도 잘 먹고, 귀찮게 하거나 거슬리는 것도 없었다. 담임이 성적 안 좋은 애들만 골라서 별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 시키던 청소도, 요즘 들어 나한테는 시키지 않는다. 청소를 안 하던 날이 없었던 나는 고3이 되고 처음으로 종례 후 바로 하교를 한다. 장애물이 없는 여유로운 하루. 마치 무엇을 하라는 듯이.

 

 

그렇게 한 달이 더 지났다. 이제는 에어컨을 안 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더워졌다. 교실은 아주 시원했지만, 역시 더우면 공부할 맘이 안 든다. 안 덥다고 할 것도 아니지만.. 점심시간 직후 수업은 깨어 있어 본 적이 없다. 오늘도 밥을 먹고 나른하게 잠을 청했다.

 

 

 

..........빈아, 그거 알아? 꽃에는 요정이 살고 있대. 그 꽃의 요정한테 이름을 지어주면, 요정을 만날 수 있어.

 

거짓말 아닌데? 엄마는 빈이한테 거짓말 안 해.

 

아니, 엄마는 못 만났어. 꽃의 요정은 어른이 되면 안 보이는데, 엄마는 깜박하고 어른이 되기 전에 이름을 못 지어줬어. 빈이는 꼭 어른이 되기 전에 좋아하는 꽃한테 이름 지어줘.

 

글쎄.. 어른이 되면 다들 요정을 믿지 않게 돼서 그런 거 아닐까?

 

, 사람들은 점점 어른이 되면서 상처 받지 않으려고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거든. 요정들은 그걸 아는 게 아닐까? 마음의 문을 닫고, 중요한 것을 보지 않고 눈 감아 버리는, 그런 나쁜 마음을 아는 게 아닐까..

 

미안해, 우리 빈이한테는 아직 어렵지? 나중에 꼭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엄마가 해준 얘기 까먹으면 안 된다?

 

, 엄마랑 약속해. 엄마 말 까먹지 말고, 어른이 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약속, 도장 찍고, 복사!

 

우리 빈이는 좋은 어른이 될 거야.

 

 

 

!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마지막 말밖에 기억할 수 없었던 꿈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좋아하는 꽃, 꽃의 요정, 이름,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 마지막 기회. 차은우, 설마 그 애..

 

! 너 어디 가!”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수업 중이었던 교실 안은 나로 인해 소란스러워졌고, 그 무엇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달렸다.

 

벌써 6월이다. 3달 가까이 피어 있을까? 재작년과 작년에 금작화는 2달을 피고 져 버렸다. 지금은 너무 늦었을까? 머리와 심장이 터질 것 같다. 하지만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달음질을 멈출 수 없었다. 뜨거운 날씨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나 자신보다 연약한 금작화가 걱정됐다.

 

저 멀리 금작화가 피어 있어야 할 곳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던 예쁜 노란색이 보이지 않는다. 내 다리는 더 빨라졌다. 제발. 제발, 제발! 신 같은 거 한 번도 믿은 적 없지만, 신이 있다면 이번만 제발 도와주세요.

 

하아.. 하아..”

 

가까이 왔지만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지, 2달을 피고 지던 꽃이 갑자기 3달을 필 리가 있나. 꽃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은 정말 긴 시간일 거다. 눈 앞이 흐려진다. 결국 눈물이 바닥을 적신다. 내가 왜 몰랐을까. 왜 그 기억마저 지워 버렸을까.

 

은우야.. 차은우....”

 

너무 서러웠다. 나는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더니 잠이 들었던 걸까.

 

빈아.”

 

따뜻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은우..?”

 

이런 날씨에, 너 더위 먹어서 쓰러진다.”

 

, 너 어떻게 여기 있어?”

 

너 기다렸지. 꼭 기억해줄 거라고 믿으면서.”

 

은우의 품에 안겼다. 다시 눈물이 났다.

 

빈아, 기억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먼저 말 못해줘서 미안해. 이름을 지어준 사람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면 나는 사람의 형체를 가질 수가 없어. 그래서 그랬어. 힘들게 해서 미안해.”

 

나는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내가 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은우는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등을 토닥여준다.

 

빈아. 나는 너랑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데, 너는 어때? 그래 줄래? 내가 정말 잘할게.”

 

흐르는 눈물을 필사적으로 닦고 심호흡했다. 그 말의 대답은 직접 내 목소리로 하고 싶다.

 

.. 내 곁에, 계속 있어줄 거지?”

 

당연하지.”

 

나 싫어하지 않을 거지?”

 

물론. 절대 그럴 일 없어.”

 

근데 너.. 내가 어른 되면 안 보이는 거 아니야?”

 

.... 동화에 나오는 진정한 사랑에 대한 전설을 알아?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나는 완전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

 

앞뒤 잴 거 없이, 은우에게 바로 입을 맞췄다.

 

모든 동화는 진정한 사랑의 입맞춤으로 해피엔딩이니까.

우리의 이야기도 언제까지나 해피엔딩일 거라 믿는다.

계간은콩 2019 봄호 line up list
<밤바다> - SIN / 바다향
<종이의 무게> - 빵구 / 종이향
<열 번째 겨울> - 딸기우유 / 겨울향
<Take Me Away> - 꼬꼬지 / 흙향
<spring> - 헏쟝 / 딸기향
<어서 내게> - 확대경 / 벚꽃향
<향수> - 풍선 / 시프레향
<짝사랑> - 퐁 / 국화향
<꾐> - 틈 / 매화향
<Chocolate Box> - 콘 / 와인향
<츄파춥스와 담배사이> - 코코콩 / 츄파춥스향
<멍청이> - 컬러 / 눈물향
<마지막 키스> - 초록 / 튤립향
<5242> - 차주 / 오이비누향
<무색무취> - 제니 / 무(無)향
<다시 이별> - 은죽빈살 / 기름냄새
<향수(鄕愁)> - 원 / 헌 책 냄새
<파란 늪> - 우주대통합 / 베이비파우더향
<동화 속 해피엔딩> - 우주대통합 / 금작화향
<What Is Love?!> - 온기 / 풍선껌향
<금단> - 얌 / 담배향
<마고> - 야옹멍 / 용연향
<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 야옹멍 / 사향
<yellow and mellow> - 앙꼬 / 레몬향
<고양이로소이다> - 슈가빈 / 감귤향
<방과후> - 손질 / 초콜렛향
<찾아줘> - 소빈/ 커피향
<MOONWALK X ROLEPLAY> - 베디 / 박하향
<숨결을 그리다> - 뷰길리 / 숨결향
<복숭아> - 물뿌 / 복숭아향
<semen> - 몽 / 밤꽃향
<The name> - 망간 / 잉크향
<탈출> - 리콜라 / 염향향
<마니또> - 로빈 / 체향
<rush&cash> - 라멍 / 무향
<욕(欲)> - 달함 / 백단향
<봄이에게> - 다로 / 비냄새
<α> - 날주 / 세이지향
<서로에게는 달콤한 따가움> - 나비담 / 살구향
<소잃고 뇌약간 고친다> -결절 / 섬유유연제향
<피는 안 나도 땀은 나더라> - 김오이 / 땀내음
<fall in love> - 그믐 / 새벽향
계간은콩2019 봄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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