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ve

 

 

 

 

 

spring

 

w. 헏쟝

 

 

 

 

 

 

 

  아, 재미없다,

 

  지금 상황에 딱 어울리는 문장 하나. 순간순간의 정적이 혼자 삼켜내는 한숨으로 메워졌다. 눈앞에 놓인 애꿎은 쇼트 케이크만 뒤적거렸다. 케이크 위에 살포시 얹힌 딸기가 이 감정을 못 이겨 금방 물러 터질 것만 같았다. 과제 보내야 되는데. 며칠 안 남았는데.

 

  “빈아, 그래서 어때? 여기?”

 

  “어? 뭐, 마음대로 해”

 

  아, 또. 무안하지만 않을 정도로 짓는 웃음은 습관이 됐다. 달콤하거나 듣기 좋았던 음성은 너무나도 익숙하게 귓가에 꽂혔다. 금새 다시 쥔 포크는 이번엔 딸기 옆구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흘러나오는 노래가 한 번 두 번 바뀔 때마다, 접시에 나뒹구는 딸기를 한 번 두 번 찌를 때마다 흐르는 시간이 마치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 같았다.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다시 삼켜내려던 찰나였다. 드르륵 끌리는 의자 소리에 포크를 내려 놨다. 그리고 네게로 옮기라도 한 듯, 한숨을 쉬어댔다. 됐다, 빈아.

 

  “가자, 그냥.”

 

  “어디를 가.”

 

  “집에. 피곤해 보여 너.”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곤한 것도 틀린 건 아니었기에 굳이 사족을 달진 않았다. 새벽까지 뚜들기고도 끝을 보지 못 한 자료 조사가 잠깐 스쳐지나갔다. 자연스레 의자를 넣어 준 네가 또 자연스레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곧 카페를 나섰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헤어지는 시점이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라는 것 정도. 주머니에 처박아 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네가 잡은 손 탓에 전원 키를 한 손으로 눌러야 하는 게, 괜히 성질이 났다.

 

 

  -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게 잘 버틴 걸지도 모르겠다. 하얀 티에 튄 빨간 자국은 집에 와서야 알았다. 아까 찔러 대며 괴롭힌 딸기가 복수라도 한 건 지 여기저기 튀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바닥에 대충 널린 스크랩 용지들을 툭 툭 치우곤 침대에 드러누웠다. 오늘도 차은우는 날 집 앞까지 데려다 주곤 짧게 입을 맞췄다. 커튼 새로 밀려들어오는 햇빛이 짜증 나 눈을 가렸다. 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가 너무 긴 탓에 자꾸만 예전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그 날들이 자꾸만 비집고 들어왔다.

 

 

 

  -

 

  벚꽃의 꽃말은 대체 누가 정의했단 말인가.

 

  첫 날 시험은 완전히 망쳤다. 자기 이름도 없다는 고삼을 놀리기라도 하듯 줄을 지어선 벚꽃 나무가 야속하기만 했다. 사실 열심히 공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망친 사람 치고 속이 좋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걸 일부러 더 겉으로 티냈다. 뭐가 좋다고 실실 웃으면서 걸어가는 차은우 때문에.

 

  “똑같은 수업 들었는데, 똑같이 야자 했는데

 

  “못 하는 게 없나 봐, 내가.”

 

  “와. 어떻게 눈도 깜짝 안 하고

 

  사람이 괜히 심술을 내면 그게 그대로 돌아온다. 차은우는 아까보다 더 속 좋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이따금 섞여 있던 장난이 기가 차서 사라졌다. 한참을 어이없어 하던 참에 내 손에 들려 있던 시험지가 납치당했다. 벙쪄 있던 잠깐의 순간에 저기 까진 언제 뛰어 간 건 지, 내 이름이 적힌 비 내리는 시험지가 먼 발 치에서 팔랑 거렸다. 이럴 때만 날렵해지는 차은우가 죽도록 미웠다. 한 번 건드려 보려다 역으로 당하는 게 억울했지만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 뿐이었다. 소리 지르기, 쫓아가기.

 

  “아 차은우 진짜!!!”

 

  “문고삼 안 되겠는데 이거?”

 

  문고삼이 고른 건, 둘 다. 시험을 뒤지게 잘 본 건 지 잔뜩 신이 난 차은우는 저 한 마디를 남기고 그대로 집까지 달렸다. 그리고 그걸 냅다 쫓아간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대로 뒀다간 봄비 내리는 시험지라는 이름으로 학우들에게 소개될 것만 같았다. 현관문 앞에서 멈췄을 땐 허벅지가 터질 것 같았다. 정신없이 뛰다 벗어낸 마이를 한 손에 들고 거친 숨만 몰아쉬었다. 또 당했다. 또.

 

  “줄 때까지 안 나가.”

 

  날름 혀까지 내밀어 보이곤 현관문을 닫는 사이를, 눈부신 민첩성으로 막아냈다. 지박령이라도 내린 듯 침대 헤드에 기대어 팔짱까지 꼈다. 이젠 시험지 따윈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냥 저 놈이 얄미워서라도 받아 내겠다는 심산으로 눌러 앉은 것이다. 난처하게 쳐다보던 차은우는 곧 뭐라도 결심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무언의 꿍꿍이가 잔뜩 담긴 손길이 교복 블라우스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래도?”

 

  “아 차은우 너 뭐 해?”

 

  항복의 대답이 떨어지지 않아서인지 그 손길은 멈추지 않고 점점 더 위로, 계속해서 밀려 들어왔다. 채 마르지 못 한 땀방울이 차은우 손에 의해 지워진다. 그게 단추에 걸려 막히자 아래부터 하나씩 풀어나갔다. 툭, 툭, 툭. 힘없이 풀어지는 단추가 세 개 정도 되었을까 너는 다시 물어왔다.

 

  “이래도? 마지막이야 문빈.”

 

  “아니, 은우야 잠깐만

 

  “마지막이라고 했는데.”

 

  바보같이 물음표만 띄워 대다 네 손목을 잡았을 때, 입술이 닿아 왔다. 아 이래서 마지막이라고. 잠깐 놀랐지만 말 그대로 잠깐이었다. 동그랗게 떴던 눈을 감았다. 어차피 항상 졌다. 차은우에겐.

 

 

 

  -

 

  아까와 같은 한숨을 푹 내쉬곤 커튼을 고쳐 쳤다. 더 이상 햇빛이 들지 않을 때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적으로 켠 핸드폰 잠금 화면엔 차은우에게 온 메시지 몇 개가 다였다. 잘 들어갔냐, 과제 적당히 하고 잠 좀 자라. 안 봐도 뻔한 내용이 눈에 훤했다.

 

  서랍을 열어 너덜너덜한 시험지를 꺼냈다. 몇 번의 고민 끝에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한 쪽 모퉁이가 멋대로 찢겨져 나간 수학 시험지. 그 날 네가 고작 동그라미 몇 개 쳐진 시험지를 탐냈던 것은 빈 칸에 적힌 차은우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20분 만에 대충 풀고는 끄적여 댔던 낙서. 고작 그것 때문이었다. 차은우는 결국 그 작은 부분을 찢어갔다. 우습게 생각할 뜻은 없다. 비록 연장선은 우습도록 빈약하지만, 그럴 나이였다.

 

  또 다시 간밤에 시작된 과제는 오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노트북을 열어 뭔가를 써 내려가곤 있지만, 머릿속은 따로 놀기 바빴다. 낮에 미리 할 걸. 아 그땐 차은우 만났지. 예전 같았으면 차은우 만나기 전 날 그렇게 날밤을 까진 않았을 텐데. 사소한 게 틀어지다 보면 곧 균열이 되어 갈라진다. 그래서 새삼 와 닿았다. 진짜 식었다는 게.

 

  간만에 막힘없이 써 내려가던 손이 저절로 멈췄다.

 

 

 

  -

 

  문빈은 매일 똑같은 립밤을 들고 다녔다.

 

  드럭 스토어 가장 바깥쪽에 있는 딸기향 립밤. 제 입술이 얼마나 빨간 줄도 모르고 덧발라대는 탓에 그게 항상 놀림거리였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남고여서 그랬는지 이상한 애들도 많이 꼬였더랬다. 그 중 하나가 차은우였으려나. 입을 맞추면 빨간색 딸기향이 그대로 물들어왔다. 그리고 그 장소도 매일 똑같았다. 체육관 창고.

 

  “빈아 여기 앉아 봐.”

 

  “여기 책상? 불편한데

 

  “들어 줄게 내가.”

 

  “꼭 이렇게 앉아야 돼?”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상 위에 먼지를 털었다. 읏차. 하고 올려 앉히자 눈은 못 마주치곤 뒷목만 긁적였다. 책상을 짚고 살짝 올려다 본 곳엔 어김없이 빨간 입술이 보였다. 그게 좋아서 또 입술만 맞춰 댔다. 진짜 너를 어쩌지. 짧은 입맞춤이 계속 되면 꼭 키스가 됐다. 누가 문고리만 돌리면 들키는 걸 알면서도 그만 둘 수 없는 게, 꼭 고딩이었다.

 

  “입술 다 지워졌어.”

 

  “너 때문이잖아. 나쁜 차은우야.”

 

  “내가 다시 발라 줘도 돼?”

 

  짠. 하고 콩알만 한 마이 주머니에서 새로 산 립밤을 꺼내 보였다. 또 샀냐며 어린 아이 마냥 눈을 크게 뜨고 물어오는 빈에, 가만히 있어 보라며 대답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익숙한 딸기향이 코끝에 맺혔다. 턱 끝을 받치곤 정성스레 꾹 꾹 눌렀다. 가까워진 얼굴이 부끄러웠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려댔다. 나중에 놀려 줄 생각에, 웃음이 새어나오는 걸 힘들게 참았다.

 

  “다 됐어. 예쁘다.”

 

  뚜껑을 닫고, 버드 키스까지 맞춘 뒤에 흐뭇하게 바라봤다. 딸기향이 립밤에서 나는 건지, 빨개진 문빈 얼굴에서 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제 내려 줘 은우야.”

 

  “조심해 조심. 조심.”

 

  얇은 허리를 감아 책상에서 내려 주곤 주머니에 립밤도 챙겨 줬다. 체육관을 빠져 나올 때 쯤 쉬는 시간 끝나는 종이 울려 댔다.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마주쳤다. 망했다는 생각은 같지만, 고양이 같이 놀란 것만 보면 웃음이 나는 건 주책이었다. 손을 잡고 무작정 교실로 달렸다. 나중에 안 소문이 또 있는데, 차은우가 문빈이 바르는 거 따라 샀다더라.

 

 

 

  -

 

  네가 바르는 게 습관이었다면, 나는 그걸 사는 게 습관이었다,

 

  다 써가는 듯싶으면 매번 똑같은 매장 똑같은 코너에서 그 딸기향이 나는 립밤을 사다 쥐어 주었다. 일학년 때부터 줄곧 문빈은 그래 왔다. 그리고 그걸 멈춘 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은우야 나 이제 이런 거 안 발라. 동아리 선배가 알려 줬어 색깔 없는 걸로.”

 

  따위의 이유였다 아마도. 갈색 머리였던 네가 새까만 색으로 염색한 날이기도 했다. 동아리 선배라는 사람한테 무언가 뺏긴 느낌이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과거에 사는 건지, 강요할 이유는 없었다. 전하지 못 한 채 미련만 잔뜩 묻은 립밤을 코트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우리는 다른 대학에 진학했고, 그때부터 만남은 뜸해졌다. 만남이 뜸해지면, 마음도 멀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네 마음이 멀어졌다. 하루에도 수십 번 키패드에 보고 싶다는 문자를 적었다. 그리고 문자에 담긴 애정이 허공에서 구르고 굴러 흉이 질 때 쯤 문빈은 외마디의 답을 적었다. 그게 도착하면 나는 또 좋다며 웃었다. 외줄 타는 것만도 못 한 관계이지만 어쨌든 이어져 있으니까.

 

  겨울이 지나고 꽃샘추위도 살갗을 스쳐 가 자취를 감출 때쯤이었다. 정확히 2주일 만에 만난 날. 영화 보고 카페. 그게 다였다. 밥 먹을 시간도 없다기에 아메리카노 두 잔과 딸기 쇼트 케이크. 또 그게 다였다. 예전엔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 쓰던 게 문빈이었는데, 어쩐지 깨작거리기만 했다. 흥미를 끌고 싶어서, 신나서 얘기하는 눈이 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시답잖은 이야기만 늘어놨다. 아까 본 영화가 어땠다느니, 요즘 듣는 수업 교수가 어쨌다느니 의미 없는 이야기들은 모두 아래로 곤두박질 쳐 케이크와 함께 부셔지기만 했다.

 

  “빈아.”

 

  “

 

  “빈아. 문빈.”

 

  “아, 어 은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벚꽃 보러 가자. 마지막으로 본 거 2년도 더 됐잖아.”

 

  한껏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끊어질 듯 말 듯 한 외줄 위에서 한 마디 한 마디 건네는 심정을 네가 알 리 없었다. 문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네 포크에 찔리는 게 딸기인지 차은우인지 의문이 들었다. 오늘따라 더 저기압인 것 같았다. 도대체 우리가 이렇게 된 게 시간 탓인지, 거리 탓인지. 그래서 거절할 줄 알았다. 혹여 네가 마음을 바꿀까 다시 묻지 않았다.

 

  근데 빈아.

 

  “듣고 있는 거 맞아?”

 

  

 

   가자, 그냥.

 

  

 

  -

 

  결국 우리는 시험을 망쳤다.

 

  마지막 날까지 나뿐만 아니라 ‘차은우’도 망쳤다. 마킹을 밀렸댔다. 13번부터 쭉. 첫 날 그렇게 놀리더니, 솔직히 좀 쌤통이었다. 어제는 비가 왔다. 내 시험지가 아니라, 진짜로 소나기가 내렸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고, 하굣길엔 거짓말 같이 앙상한 나뭇가지만이 줄을 지었다. 힘없이 떨어지는 벚꽃 잎이 그저께 차은우 만큼 얄미웠다. 잔뜩 울상을 짓고 교문을 나서는 네가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그래서 또 감당 못 할 위로 아닌 장난을 던졌다.

 

  “은우야, 울지 마. 형이 있잖아.”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바닥만 보고 걷다시피 하는 네 앞을 가로 막았다. 그래도 기분은 풀어 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걸 안다는 듯 눈을 맞춰오던 너는 그저께 본 벚꽃보다 더 예쁘게 미소를 머금었다. 별안간 씁. 하며 마주보던 시선을 돌렸다.

 

  “아 지금 울게 생긴 게 누구 때문이더라 어제 새벽까지 못 잔 게 누구 때문에

 

  “야! 차은우 미쳤나 봐!”

 

  두 손을 모아 차은우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까지 울상 짓던 사람 맞냐고. 숨 막혀 바보야. 곧 제 손을 끌어내리곤 소리 내며 웃었다. 그리곤 자연스레 깍지를 껴 왔다. 심각했던 얼굴이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

 

  마지막 카페를 기점으로, 또 정확히 2주가 흘렀다. 처음 일주일은 잠수 이별을 당한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여태 상상한 수많은 이별 방식 중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과거에서 끌어온 미련을 쌓아두고 살더라도 그게 부패하기 마련인데, 어쩐지 그 반대였다. 아련하다 못해 애틋했다. 얼마 못 가 끊어질 외줄 아래에 감당도 못 할 감정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8일 째 되는 날 드디어 답장이 왔다. 띵. 하고 울리는 알림에 무의식 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이내 땅이 꺼져라 내쉰 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잠수 이별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내용은 두서도 없었을 뿐 더러 일주일 동안 쏟아 부었던 질문에 대한 답도 없었다. 그저 과제 때문에 바빴다며. 벚꽃 보러 가자며. 그 뿐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불안했다.

 

 

 

   -

 

  사람의 직감은 모두 근거가 있더랬다.

 

  오늘따라 문빈이 호의적이었던 것도, 답지 않게 웃음이 많았던 것도 모두 그 직감에 포함했다. 예전부터 시간 지키기란 손에 꼽을 만큼인 문빈이 먼저 도착한 날이기도 했다. 그것 또한 별안간 있을 본편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예고를 보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는커녕, 계속 환하게 웃어 주던 네 모습을 더 열심히 머릿속에 눌러 담았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네가, 그 본편이겠다.

 

  “미안해, 차은우.”

 

  “뭐가 미안한데.”

 

  구질구질하게 되물었다. 몇 번이나 상상하고 되뇐 상황인데, 이렇게 마주하는 건 처음이라 마음이 서툴렀다.

 

  “우리 너무 컸잖아 이제.”

 

  그렇게 눈물이 많던 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표정이 네가 찔러대던 포크 마냥 날 찔러댔다. 듣고 있자니 눈시울이 붉어졌다. 컸지, 컸는데.

 

  “너는 그게, 어린 애들 장난이었어?”

 

  떨리는 입가를 티내지 않으려 입술을 세게 물었다.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를까 봐 더 꿋꿋 하려 했다. 문빈은 당황하지도 않았다. 과거에 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은우 뿐이었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바쁘기도 하고, 지루하더라.”

 

  “

 

  “상처 줄 거 알아 아는데

 

  난생 처음 보는 네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뚫어져라 응시하던 시선도 어느새 벚꽃 잎과 함께 바닥에 내리 꽂혔다. 붉어졌던 눈시울에 맺힌 눈물은 비수가 되었다. 새까맣게 물든 네 머리카락 같이, 너는 내 기억 속에도 까만 펜을 쥐고 선을 그어댔다.

 

  “미안해, 은우야.”

 

  “문빈.”

 

  “지워도 돼, 내 번호.”

 

  갈게.

 

  돌아선 뒷모습은 네가 사라질 때까지도 볼 수 없었다. 감당도 못 할 무거운 감정을 주렁주렁 매달은 것도, 멋대로 외줄에 올라탄 것도 모두 내 탓이었다. 널 탓하는 건 죽어도 불가능했다. 줄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추락하는 감정들은 썩은 미련이 되어 쌓였으니, 그건 죽어도 불가능했다. 고개를 떨구고는 한참을 훌쩍였다. 벅차오르는 설움을 억누르는 것도, 나쁜 놈이라며 널 욕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몇 십 번이고 몇 백 번이고 예상해 봤자 눈앞에 닥쳐오는 상황은 상상할 수도 없이 잔인했다.

 

  그 후의 일상이라곤 별로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안다. 평소와 똑같이 등교하고, 평소와 똑같이 집에 오고. 그게 다일 것을 안다. 몇 달 동안이나 그랬으니, 어쩌면 네가 후벼 팔 그 자리에 비상구를 만들어 준지도 모르겠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종이 쪼가리를 말아 쥐었다. 눈물을 닦아내곤 고개를 들었다. 가슴 깊숙이부터 올라오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다 끝났다.

 

  

 

  -

 

  차은우는 일부러 시험을 망쳤다.

 

  첫날 찢은 종이에 적혀 있던 것은 차은우 이름 석 자 뿐만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호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리치는 문빈을 무시한 채 종이에 쓰인 것을 읽어 나갔다.

 

  [차은우랑 같은 대학교 가게 해 주세요. ]

 

  [차은우 시험 망치게 해 주세요.]

 

  [ㅜㅜ]

 

  시험지 구석에 잔뜩 졸음 섞인 글씨체가 미칠 듯이 귀여웠다.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냅다 뛰었다. 이대로 지구 한 바퀴도 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때 결심했다. 빈이 소원 이뤄 주기로.

 

  중간고사 마지막 날, 19살 차은우는 한계를 느꼈다. 담임에게 불려 가는 건 고사하고 부모님에게까지 미친 듯이 부재중이 울렸다. 차은우가 마킹을 밀렸다고.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 거짓말을 믿는 건 문빈 하나뿐이었다. 그거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년이면 이 길을 같이 걸을 수 없다는 게, 눈앞이 캄캄했다.

 

  문빈은 벚꽃이 필 때마다 꽃말을 묻고 툴툴거리곤 했다. 매가리 없이 떨궈져 땅바닥에 나뒹구는 벚꽃 잎을 으레 지르밟았다. 흙탕물에 적셔져 새까맣던 꽃잎이 늘러 붙었다. 깊게 내쉰 한숨 끝에 말아 쥔 종이 쪼가리를 꺼내 들었다. 알아보긴 힘들어도 선명했던 글씨가 다 바래져서는 힘없이 찢겼다.

 

  

 

 

  제작년도, 작년도 그리고 올해도.

 

  벚꽃의 꽃말은 이별이었다.

 

 

 

계간은콩 2019 봄호 line up list
<밤바다> - SIN / 바다향
<종이의 무게> - 빵구 / 종이향
<열 번째 겨울> - 딸기우유 / 겨울향
<Take Me Away> - 꼬꼬지 / 흙향
<spring> - 헏쟝 / 딸기향
<어서 내게> - 확대경 / 벚꽃향
<향수> - 풍선 / 시프레향
<짝사랑> - 퐁 / 국화향
<꾐> - 틈 / 매화향
<Chocolate Box> - 콘 / 와인향
<츄파춥스와 담배사이> - 코코콩 / 츄파춥스향
<멍청이> - 컬러 / 눈물향
<마지막 키스> - 초록 / 튤립향
<5242> - 차주 / 오이비누향
<무색무취> - 제니 / 무(無)향
<다시 이별> - 은죽빈살 / 기름냄새
<향수(鄕愁)> - 원 / 헌 책 냄새
<파란 늪> - 우주대통합 / 베이비파우더향
<동화 속 해피엔딩> - 우주대통합 / 금작화향
<What Is Love?!> - 온기 / 풍선껌향
<금단> - 얌 / 담배향
<마고> - 야옹멍 / 용연향
<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 야옹멍 / 사향
<yellow and mellow> - 앙꼬 / 레몬향
<고양이로소이다> - 슈가빈 / 감귤향
<방과후> - 손질 / 초콜렛향
<찾아줘> - 소빈/ 커피향
<MOONWALK X ROLEPLAY> - 베디 / 박하향
<숨결을 그리다> - 뷰길리 / 숨결향
<복숭아> - 물뿌 / 복숭아향
<semen> - 몽 / 밤꽃향
<The name> - 망간 / 잉크향
<탈출> - 리콜라 / 염향향
<마니또> - 로빈 / 체향
<rush&cash> - 라멍 / 무향
<욕(欲)> - 달함 / 백단향
<봄이에게> - 다로 / 비냄새
<α> - 날주 / 세이지향
<서로에게는 달콤한 따가움> - 나비담 / 살구향
<소잃고 뇌약간 고친다> -결절 / 섬유유연제향
<피는 안 나도 땀은 나더라> - 김오이 / 땀내음
<fall in love> - 그믐 / 새벽향
계간은콩2019 봄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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