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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벽하게 건조한 날이었다. 축 처진 빨래도 반나절이면 서늘한 햇빛 냄새가 진동할 만큼 말간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저도 봄의 것이라고 손이 시리지 않았다.

  외롭지가 않았다.

 

 

 

봄이에게

w.다로

 

 

 

  늘 내리던 곳에서 두 정거장 지나쳤더니 작은 개울가로 벚꽃과 이름 모를 노란 애기꽃들이 너도나도 움트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춘곤증인지 꿈벅꿈벅 졸리운 기분에 잠깐 눈을 감았던 게 그대로 잠이 들어 내릴 곳을 지나쳐버렸지만 기분이 간지러워지는 길을 발견했으니 그리 나쁘지도 않은 하굣길이었다.

 

  대충.. 이쪽으로 가면 되겠지?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 동네 지리가 헷갈리지만, 이 날씨에 이 거리를 굳이 버스를 타고 싶진 않아 느낌대로 되짚어갔다. 길을 바지런히 걷는 동안 내 안에 눅눅하게 고여 있는 것들을 모두 쨍쨍 말려버리고, 아직 새 냄새가 덜 빠져 낯설지만 나에겐 유일하게 돌아갈 곳인 침대에 널려서 오래오래 잠을 자고 싶었다. 아무 걱정 없는 빨래처럼.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눈을 뜨니 정말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급하게 머리를 감고 어제 벗어놓은 교복을 그대로 꿰어 입었다. 무슨 열다섯 시간을 잤어.. 고양이야?

 

  새 학기 시작한지 며칠이나 됐다고 지각하기 싫은데- 아파트 로비 문을 열며 달릴 준비를 하느라 큰 숨을 들이키는데 뱃속까지 비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아, 우산.

 

  엘리베이터는 막 떠나갔고 23층까지 다시 갔다 오면 틀림없이 지각일 것이었다. 이제 그친 것도 같은데.. 샴 고양이를 칠하던 붓을 아무렇게나 씻은 듯 흰색인지 회색인지 흐리멍텅한 하늘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학교 갈 때까진 다시 안 오겠지, 멋대로 생각해 버리고 힘차게 발을 내딛자마자 정수리를 적시는 보슬비에 그제서야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자잘하게 자국을 내는 빗방울들이 보였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완벽하게 건조한 날이었는데.. 알고 보니 열다섯 시간이 아니라 서른아홉 시간을 잔 걸까. 잘 마른 빨래가 되고 싶었던 나는 축축한 머리칼을 매만지며 조금 외로워졌다.

 

 

 

 

 

  이슬 내린 잔디밭에 굴려진 듯 비린 풋내는 덜 마른 머리카락과 피부 속 겹겹이 스며 머리를 아프게 했다. 케일 주스에 빠져 익사하면 이런 기분이지 않을까. 숨을 내쉴 때마다 초록색을 토하는 기분이었다. 책상에 엎드려서 떠드는 소리들 중 영양가 있는 게 없나 골라 들어 보니 오늘은 목요일이었고 애석하게도 나는 열다섯 시간만 잔 게 맞았다. 주말은 다들 저만 기다린다는 걸 알고 점점 천천히 다가오는 저주를 스스로에게 걸었나 보다. 내가 너라면 그렇게는 안 했어..

 

 

  그 좋아하는 밥도 한 판밖에 먹지 못하고 내내 교복 깃만 꾹꾹 쥐어짜며 멍 때리는 나를 몇 몇 아이들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야, 너 오늘 왜 그래? 매점 안 가냐?"

"당연히 밥 더 받으러 일어난 줄 알았더니 왜 교실 와 있냐."

"그러고 보니 오늘 목소리를 한 번도 못 들은 거 같은데. 어디 아프냐?"

 

"나 옷이 젖어서.. 못 가겠어. 이거 짜서 말려야 돼.."

 

"젖긴 뭐가 젖어? 아침에 비 맞은 거 말해? 마른지가 언젠데.."

"야, 얘 좀.. 이상하지 않냐? 뭔가.. 기분 나빠."

"야,"

'야!..'

 

 

  듣기 싫은 소리들로부터 도망치려 깊은 잠에 들었고 곧 오래된 꿈을 꾸었다. 깨어나면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 또 그 꿈이구나. 하게 되는 꿈을.

  이게 내 원인 모를 우울의 시작일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 들었지만, 남들처럼 하루를 지내는 것조차 벅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루 종일 머리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인지 어깨가 무거웠다. 아침에 머리를 못 말리고 나오면 몇 배로 무거워진 그 물방울들을 도로 집까지 업고 가야 하는 구나. 난 정말 물이 싫어. 푸른 별 같은 거, 다 말라버렸으면 좋겠어.

  보이지 않는 것에 시비를 거느라 허공을 향해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빈아."

"..."

"왜 여기 서있어. 집에 안 가?"

"..."

"우산 없구나?"

 

  얘가 누구더라. 일주일 안에 본 애일텐데 기억에도 안개가 찬 것처럼 뿌옇다.

 

"같이 쓰고 가자. 집도 가는 길이니까 데려다 주고 갈게."

 

  차은우? 명찰을 보니 기억이 난다. 1반 임시반장. 곧 진짜 반장. 아마 내년에도. 졸업해도 각종 장, 대표, 1등, 수석 같은 단어들은 다 달 것 같은 애.

 

  이 따뜻한 호의에 너도 어서 기쁘게 동조해 줘, 하는 눈망울이 나를 향했지만 그냥 흙탕물이 조금 튄 운동화 앞코만 툭툭 쳐댔다.

  걷는 동안 의아한 눈길이 이따금 따라왔지만 모른 채 하자 곧 그 아이도 조용해졌다.

 

  그래, 사실 기억이 안 난 게 아니라 잠시 모르고 싶었어. 지금은 어엿하게 뽀송한 빨래가 아니라 세탁기에서 막 나와 쭈글텅한 상태란 말야. 너 같은 애 앞에선 더 초라해져.

 

 

  새 학교 첫 주에 옆 반 애랑 집까지 아는 사이가 될 일이 뭐가 있나 싶지만 시작은 별 거 없었다. 등교 첫 날 새 교복에 새 가방, 쨍한 날씨까지. 설레는 맘으로 등교하던 나는 길 한복판에서 뜬금없이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나 멈춰서고 말았다. 뒤에서 오던 은우가 말을 걸며 학교까지 태워줬었고.. 그 후는 뭐, 비 오듯 자연스러웠었다.

  속수무책으로 그 애를 좋아하게 된 건.

 

 

 

 

 

  한 우산 안에 건장한 남학생 둘이 들어왔으니 좁은 건 당연했고, 자연히 냄새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난 지금 싱싱한 브로콜리가 다발로 열린 축축한 흙밭에 찜질한 냄새가 난다고. 열네 시간 반만 잤으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반의 반 발짝 슬쩍 떨어지면 금세 알아채고 몸을 붙여 오는 은우가 야속하기만 했다. 나, 지금 냄새나.. 떨어져.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은우다.

 

"응. 그거 좋아서 붙는 건데?"

"뭐??!"

"장난이야. 이제야 목소리 좀 들어보네. 무슨 일 있었어?"

"역시 그렇지? 나 젖어서.. 아니 비를 맞은 것도 맞는데 일단 아침에 머리를 못 말려서, 왜냐면 열다섯 시간을 글쎄, 고양이도 아니고. 그랬다니까. 냄새가 너무 나서, 집에 가서 빨리 머리 말리고 싶어.. 보송보송하게, 바짝."

 

  머리카락 끝을 마구 만지며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 리가 없게 엉망진창으로 말하는데 은우는 조금 웃으며 듣다가 축축하지도 않은 내 머리를 한 번 만져보곤 그래, 가서 말리자. 불편했겠다.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내 취향인데, 나 비 냄새 되게 좋아해."

"..."

"너한테 지금 그 냄새가 나."

 

 

  내가 하루 내내 빠져죽을 케일주스라고, 초록색 토라고, 브로콜리 흙밭이라고 했던 그게, 네가 좋아하는 비 냄새였구나.

 

  순식간에 외롭지 않아졌다.

 

 

  잘게 잦아드는 비처럼 발걸음도 아쉬움을 담아 느려졌지만 딱 붙은 어깨는 잠시도 어긋날 생각이 없었다. 티끌 아무리 모아도 태산이 안 되던데 이 자그마한 발걸음은 왜 벌써 나를 집 앞에 데려다 놨는지.

 

"빈아. 머리가 아직도 안 말랐네. 괜찮으면 내가 말려줄까?"

 

 

 

 

 

  온기가 텅 빈 집은 웅웅- 기계 다섯 대가 돌아가는 소리로 오히려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다 제습기야? 축축한 거 엄청 싫어하는 구나.”

“응. 이거 다 나 때문에.. 근데 은우야, 넌 어떻게 비 냄새를 좋아해? 난 아직도 내 머리에서 잔디가 자라는 것 같아서,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파.”

“드라이기 어디 있어?”

 

진짜 말려준다는 건가? 굳이? 친구 머리를 직접?

 

“아이.. 근데 이거 내가 해도 되는데..”

“내가 해줄 거야. 앉아 봐.”

 

위잉-

 

  이제 이 집은 기계 여섯 대가 돌아가는 소리와 둘 곳 못 찾은 내 눈이 굴러가는 소리로 넘쳐흘렀다.

 

 적당히 따스하고 건조한 바람을 뒤따라 기다란 손가락이 바스락 거리며 머릿길을 헤치고 지나갔다. 괜스레 귀 뒤쪽이 찌르르 울리고 신경이 곤두섰다. 내 뒤에 앉아 있는 녀석의 표정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눈이 이왕 두 개일 거면 하나는 뒤통수에 달 걸 그랬어. 그런데-

 

“으앗!”

“어? 미안. 뜨거웠어?”

 

  아니. 너무 좋아서.

  머리칼을 지나 귓바퀴를 스치는 손길과 뒷목을 적시는 따뜻한 바람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으며 소리가 새어나갔다. 아, 쪽팔려..

 

“뒤에 다 마른 것 같은데 돌아 봐.”

“어어? 어..”

 

  무릎을 세우고 앉아 깍지 낀 손으로 다리를 모아 잡고 은우와 마주했다. 이렇게 가까이 눈을 맞추는 건 처음이라 에라 모르겠다 눈을 꼬옥 감으니 가까이에서 푸스스 바람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나뭇잎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좋아서 좋아해.”

“...”

“푸석하던 흙도 생기를 되찾으니까 좋아해.”

“...”

“맡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좋아해.”

 

  창밖을 보며 하는 말일까, 다시 눈을 떴다.

 

“...비 말이야?”

“너 말이야.”

“...”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제 머리 괜찮아?”

“..응.”

“그럼 이것도 괜찮아?”

 

  커다란 눈은 굴러가는 소리도 나나, 긴 속눈썹은 내리까는 소리도 내나, 데구르, 사락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순간 은우의 시선이 내 둥근 콧대를 타고 내려와 입술에 머무르는 것이 보였다.

 

  대답 대신 눈꺼풀을 눌러 감자 곧 맞닿아 오는 따스한 것이 있었다. 이게 다 꿈이면 어쩌지? 아니, 이게 꿈이 아니면 어쩌지?

  사람들이 가장 여린 피부를 서로에게 내어주며 사랑을 표현하는 이유를 입술이 닿는 순간 알 것 같았다. 떨리는 숨결은 그 사람의 진심을, 온도는 마음의 크기를, 움직임으로는 애틋함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잔뜩 불어터진 씨앗들이 해가 들이치자 기다렸다는 듯 금세 사이가 벌어지며 싹을 틔울 채비를 했다.

 

  은우야, 이제 내 비는 모두 너에게로 내릴게. 너에게만 내릴게.

 

 

 

  비가 오는지 개었는지 헷갈린다면, 비가 오는 하늘이 아닌 비가 내리는 땅을 봐.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아닌 너를 봐 줘.

 

 

  내 첫 봄비가 향하는 곳을.

 

 

 

 

 

계간은콩 2019 봄호 line up list
<밤바다> - SIN / 바다향
<종이의 무게> - 빵구 / 종이향
<열 번째 겨울> - 딸기우유 / 겨울향
<Take Me Away> - 꼬꼬지 / 흙향
<spring> - 헏쟝 / 딸기향
<어서 내게> - 확대경 / 벚꽃향
<향수> - 풍선 / 시프레향
<짝사랑> - 퐁 / 국화향
<꾐> - 틈 / 매화향
<Chocolate Box> - 콘 / 와인향
<츄파춥스와 담배사이> - 코코콩 / 츄파춥스향
<멍청이> - 컬러 / 눈물향
<마지막 키스> - 초록 / 튤립향
<5242> - 차주 / 오이비누향
<무색무취> - 제니 / 무(無)향
<다시 이별> - 은죽빈살 / 기름냄새
<향수(鄕愁)> - 원 / 헌 책 냄새
<파란 늪> - 우주대통합 / 베이비파우더향
<동화 속 해피엔딩> - 우주대통합 / 금작화향
<What Is Love?!> - 온기 / 풍선껌향
<금단> - 얌 / 담배향
<마고> - 야옹멍 / 용연향
<상사몽(相思夢) : 개화(開花)> - 야옹멍 / 사향
<yellow and mellow> - 앙꼬 / 레몬향
<고양이로소이다> - 슈가빈 / 감귤향
<방과후> - 손질 / 초콜렛향
<찾아줘> - 소빈/ 커피향
<MOONWALK X ROLEPLAY> - 베디 / 박하향
<숨결을 그리다> - 뷰길리 / 숨결향
<복숭아> - 물뿌 / 복숭아향
<semen> - 몽 / 밤꽃향
<The name> - 망간 / 잉크향
<탈출> - 리콜라 / 염향향
<마니또> - 로빈 / 체향
<rush&cash> - 라멍 / 무향
<욕(欲)> - 달함 / 백단향
<봄이에게> - 다로 / 비냄새
<α> - 날주 / 세이지향
<서로에게는 달콤한 따가움> - 나비담 / 살구향
<소잃고 뇌약간 고친다> -결절 / 섬유유연제향
<피는 안 나도 땀은 나더라> - 김오이 / 땀내음
<fall in love> - 그믐 / 새벽향
계간은콩2019 봄호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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