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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지(徒長枝):헛가지, 열매나 꽃이 맺지 않는 가지.

 

 

 

 

 

 

 

 

은우가 이 곳에 온 지 삼주가 흘렀다. 한달이 조금 안되는 시간동안 은우는 시골 생활에 꽤 잘 적응했다. 아침에 일어나 화원의 온실기 온도를 맞추고, 스프링쿨러를 틀어 물을 주고, 묘목들에 생기는 해충들을 잡아내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 아침 드세요."

 

빈과 함께하는 생활도 어느 새 익숙해졌다. 화원에 닿는 빈의 목소리에 비닐하우스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나와 집에 들어서자, 고소한 냄새가 퍼져왔다.

 

민소매 차림의 빈은 까치집같은 머리를 하곤 계란 프라이-를 하려했지만 스크램블이 되버린 무언가- 와 냉장고에서 꺼낸 각종 반찬들을 식탁에 차려놓았다. 은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빈에게 말했다.

 

"아침 아닌데. 지금 열한시에요."

 

은우의 말에 빈이 머쓱한 듯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이, 일어나면 그게 아침이지. 밥 먹어요 밥."

 

고개를 주억거리며 자리에 앉는 빈을 보며 피식 웃은 은우가 빈을 따라 식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우는 이렇게 빈이 귀엽게 굴 때마다 곤란했다. 입 안으로 밀어넣는 밥에선 죄책감의 맛이 났다. 스크램블에 잘못 들어간 계란 껍질처럼 마음 한켠 낀 작은 양심에 까득, 하고 찝찝함이 씹혔다.

 

 

 

 

 

빈은 은우와 첫만남을 가지기 전부터 은우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은우가 저를 응용식물학과 대학원생이라 소개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선생님이라는 대단한 호칭으로 불리기 위함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가 둘러댄 신분이 모두 거짓이었으니, 은우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부답스럽고 거북했다.

 

"저 그냥 석사 공부하고 있는거지 선생님 아니에요. 그냥 이름 부르세요."

 

"그래두 저 가르쳐주시니까 저한테는 선생님이잖아요."

 

"제가 불편해서 그래요."

 

"우음...그럼 쌤이라고 부르는 것도 안돼요? 짧게 줄여서 쌤! 짧줄쌤!"

 

별 걸 다 줄여 부르는 빈의 말에 웃음이 픽 터졌다.

 

"그게 편하시면 쌤이라고 부르세요. "

 

"네 쌤!"

 

활짝 웃는 빈의 얼굴을 보자 은우는 폐부가 간질거렸다. 아마 은우는 이미 이 때부터 이 일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리란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은우의 목적은 분명했다. 사람을 꼬여 내는 건 은우에게 밥 먹기보다 쉬웠다. 돈 많은 인간들의 환심을 사 적당히 털어먹고 떠나는 것이 이른바 은우가 가진 직업이었다. 선천적인 외모에 후천적인 재능이 더해져 부자들을 홀리는 건 은우에겐 천직과도 같았다. 빈은 은우의 이번 타겟이었다.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 막내 손자. 문 가 후계자 중 유일한 남자라 상속받을 추정 재산은 몇백억 혹은 플러스 알파. 경영권에 관심없음. 할아버지가 사다 준 경기도 몇만평 땅에 화원을 지어 나무나 키우며 사는 중. 달리 말하면,

 

"세상 물정 모름..."

 

은우가 볼펜으로 빈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여러번 치며 중얼댔다. 은우의 입장에선 이렇게 알짜배기에다 작업하기 쉬운 타겟도 없었다.

 

 

 

은우가 공사를 치기 시작한 건 이 촌구석에 오기 약 두 달 전부터였다. 은우는 태생이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아예 없다는 건 아니고. 욕심이 과해 일을 섣불리 그르치는 타입이 아니었다. 빠져야 할 때 빠질 줄 아는, 선을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은우에게 의심을 품기 전에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인 냥 잠적해 버리는 것이 은우의 작업 스타일이었다. 그렇기에 은우는 사기꾼이라는 거창한 이름표를 단 것 치곤 수입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은우는 상대에게서 등쳐먹는 양에 비례하는 만큼의 양심만 소모했다. 멍청한 피해자에 대한 애도. 딱 거기까지. 이 일에 동정심은 독이다. 은우는 남들보다 미안함을 느끼는 것에 둔하다, 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빈을 만나기 전까지.

 

맹세코 단 한번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은우가 조금 털어먹는다고 해서 빈이 큰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은우는 전에 없던 찝찝함을 느꼈다. 제가 얼마를 등쳐먹든, 빈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은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빈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제게 살갑게 굴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콕콕 찌르는 듯이 따가웠다. 십수년 전에 가출한 양심이 제 멋대로 다시 심장에 자리를 잡은 것만 같았다.

 

이번 달 안에 떠야지. 은우는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을 빨리 진행해야 했다. 화원에 식물학 지식을 자문해준다는 명분으로 받고 있는 수업료는 목표했던 금액에 비해 턱없이 적었다. 얼른 빈을 꾀어 더 큰 수익을 내야만 했다.

 

 

 

 

 

 

*

 

햇살을 받으며 나무 뿌리에 흙을 덮는 빈의 관자놀이에는 땀이 송글했다. 은우는 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다시 죄책감이란 놈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이 놈의 숨통을 끊어야만 했다. 은우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애써 빈이 토닥대고 있는 땅으로 시선을 옮겼다.

 

흰 목장갑을 끼고 흙을 매만지던 빈이 말갛게 웃으며 은우를 향해 물었다.

 

"흙 냄새 좋죠?"

 

빈의 말이 무색하게 화원은 퇴비 냄새가 가득했다. 퇴비 냄새는 너무나도 지독해서 이 곳에서 시체가 썩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은우는 오른손으로 코를 쥐며 장난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빈은 은우의 반응에 웃기다는 듯 빼족한 입꼬리를 한 껏 올리며 다시 제가 매만지던 흙으로 시선을 옮겼다.

 

 

"빈 씨는...화원 일이 재밌나봐요."

 

은우는 제가 뱉은 말에 스스로 당황했다.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비꼬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은우가 정정하려는 찰나, 빈이 대답했다.

 

"손으로 생명을 길러낸다는 게, 참 대단한 것 같아요."

 

빈의 시선은 여전히 제 손의 흙더미를 향하고 있었다. 빈은 진갈색의 흙을 한움큼 퍼 엄지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느리지만 확실히 공들인 만큼 성과가 보이잖아요. 노력하면 되니까. 성실히, 열심히, 애정으로 하면 열매가 예쁘게 맺잖아요. 요즘 세상엔 그런 일이 드물잖아요. 열심히 한다고 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은우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물조물 예쁜 말을 하는 예쁜 입에 제 입술을 대고 싶었다.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삼키느라 대답 같은 건 하지 못했다. 빈은 대꾸없이 저만 바라보는 은우에 머쓱해졌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뒷말을 덧대었다.

 

"아니 사실, 몸 쓰는 게 체질이거든요. 머리 쓰는 건 적성에 안 맞아요. 저 어렸을 때도 체육만 잘하고 다른 과목은 잘 못했어요. 큭큭"

 

민망함에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게 귀여웠다. 그러면 안되는데 은우는 자꾸 마음이 동했다. 다 큰 남자가 귀여워 보이고 예뻐보였다. 작업을 떠나서 그저 빈과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다. 자꾸만 모든 걸 때려치우고 빈과 함께 화원에서 나무나 키우고 싶다는 허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빈의 앞에 서 있는 은우는 거짓말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은우가 처음 화원에 들어왔을 때부터 빈의 곁에 머물 자격 따위는 없었다.

 

함께 할 수 없다면, 최대한 빨리 떠나야했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빈이 모든 걸 알아채기 전에 도망가야했다. 그러려면 서둘러 작업을 마무리 지어야했다.

 

"그래도, 집안에서 반대 안하세요?"

 

"약은 잘 몰라서요. 나무랑 꽃은 많이 아는데. 약국 손자라고 약에 빠싹한 건 아니잖아요."

 

"그건, , 그렇죠."

 

은우는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약국 손자라니. 대기업을 약국이라 표현한 본인은 정작 무엇이 우스운 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식물용 약제는 연구하고 있어요. 회사에 안 들어가는 조건으로 여기서 제초제나 영양제 같은 거 개발하기로 해서. "

 

핏줄 어디 안가네. 은우는 속으로 애써 빈정거렸다. 숨이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후우- 하고 숨을 내쉬자 빈이 눈썹 앞머리를 올리며 은우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다시 호흡이 가빠져왔다. 심장이 명치로 옮겨간 듯 명치에서 쿵쿵 울림이 느껴졌다. 빈은 은우가 작업한 목표물들 중 가장 어수룩한 사람이었다. 동시에 은우에게 가장 위협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구나. 그러다가 빈 씨 화원일 그만두고 회사로 아예 가버리면 어떡해요."

 

은우가 부러 속내를 드러내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차라리 알아채줬으면 했다. 제 검은 속내를 알아채곤 저를 쫓아내든, 책망하든,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이 관계를 끝내주었으면 했다. 부풀어가는 제 마음을 빈이 터뜨려주었으면 했다.

 

"에이 제가 왜 그만둬요."

 

"그래도 뉴스에 막 나오던데. 최대 주주 어쩌구 하면서."

 

하지만 이런 노골적인 떠보기에도,

 

"주식이요? 에이 많으면 뭐해요 진짜 돈도 아니고....쌤 좀 드릴까요?"

 

이렇게 순진하게 구는 사람을 어떡하면 좋을지 은우는 감도 잡히질 않았다.

 

 

 

 

 

 

*

 

웬일로 이른 아침부터 화원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시간에 은우 말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빈은 아침잠이 많았다. 은우는 조금 긴장한 채로 화원 입구에 잠시간 서 있었다. 여차하면 몸싸움을 할 기세로 반투명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인영이 제 키보다 좀 작은 묘목 앞에 서서 위로 뻗은 잔가지들을 죄다 쳐내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빈에게 다가가자, 빈이 은우를 발견하곤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쌤 저 오늘 일찍 일어났어요."

 

은우는 어린 아이처럼 칭찬을 바라는 모양새로 자랑하는 빈을 보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은우는 빈의 발치에 쌓여있는 나뭇가지들을 보고 빈에게 다가가 물었다.

 

"이걸 왜 다 잘라내요?"

 

", 이거 다 도장지에요."

 

"도장지가 뭐에요?"

 

"쓸모없는 가지요. 열매 못맺는 것들. 꼬박꼬박 걷어내야 새로운 아이들이 나거든요."

 

 

은우는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 도장지들을 보며 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은우는 도장지들이 제 몸에 자라난 같은 착각이 들었다. 피우지 못할 사랑을 품은 쓸모없는 가지들이 온 몸에 삐죽빼죽 돋아난 것만 같았다.

 

환상속의 가지들이 뿌리를 내린 제 팔뚝을 쓸며 은우는 빈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건 무슨 나무에요?"

 

"블루베리요. 요기 흰 꽃 보이죠. 이게 블루베리 꽃이에요. 그리고 이거. 쪼그만 이거. 이게 자라면 블루베리 열매가 되는 거에요. 쌤 어떻게 블루베리도 못알아봐요! 대학원생 맞아요? 큭큭큭"

 

빈의 말에 뜨끔한 은우가 대충 둘러댔다.

 

"아 그렇구나. 전 다 책으로만 봐서..."

 

"그래요? 블루베리는 1년이 지난 가지에서는 열매가 안맺히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자주 잘라줘야해요."

 

"열매 맺는 가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해요?"

 

"이렇게 하늘로 뻗은 가지들, 수직으로 난 가지들은 다 도장지에요. 얘네는 열매도 못 맺으면서 다른 애들이 먹을 양분을 뺏어먹으니까 발견하면 바로바로 잘라줘요."

 

꼬리가 하늘로 향한 가지들이 빈의 손에 몽땅 잘려나갔다. 원예용 가위가 서걱대며 은우의 마음을 도려냈다.

 

 

 

 

 

 

*

  

화원 구석에 쌓아놓은 비료 포대가 두어 개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은우는 창고 열쇠를 챙겨 비료를 가지러 창고로 향했다. 한 달에 한 두번 들어올까 말까 한 창고의 철문은 꽤나 뻑뻑했다. 열쇠를 넣고 손잡이를 돌리자 끼긱-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주변에 울려퍼졌다. 무거운 철문을 어깨로 세게 밀어넣자 퀘퀘한 공기의 창고가 은우를 맞았다.

 

비료 포대를 찾는 은우의 눈에 낯선 플라스틱 통들이 눈에 띄었다. 선반 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농약품들은 이전에 은우가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아마 창고 구석의 박스 안에 있던 농약품들을 빈이 꺼낸 모양이었다. 각종 농약품 이름이 쓰여진 플라스틱 통들이 일정하지 않게 놓여있는 것이 빈이 해놓은 모양새가 맞는 듯 했다. 은우는 이마저도 귀여워보여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빈이 어질러놓은 것들을 대충 정리하려 선반에 가까이 가니 멀리서는 보이지 않던 얇은 투명파일에 종이 한 장이 끼워진 채 한 농약품 통에 깔려 있었다. 통을 치워내고 파일을 들어보니 종이에는 표가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 늘어선 약품들로 추정되는 약품명들이 적혀있었고 그 옆 칸엔 동그라미, 세모, 엑스 모양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식들이 있었다.

 

"..이건 뭐지?"

 

"! 비료 같이 옮겨요!"

 

때마침 빈이 창고로 들어왔다. 벽에 걸어놓은 창고 열쇠가 사라진 것을 보고 은우를 찾아온 듯 했다. 은우는 손에 쥐고 있던 투명 파일을 흔들며 빈을 향해 물었다.

 

"빈 씨, 이거 뭐에요?"

 

"~ 그거요? 테스트한 농약품 리스트에요. 동그라미는 테스트완료, 엑스는 아직 실험체 없어서 안된 거."

 

"이거는요?"

 

은우가 표에 딱 하나 있는 빨갛게 표시된 세모 모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 그건 실험 예정이요. 저번에 본 블루베리 나무 있죠? 그거에 해보려구요. 이번 거 성공하면 진짜 엄청날 거에요. 그러니까 쌤이 많이 도와줘야해요."

 

빈이 은우의 손을 잡아오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빈의 손가락이 닿은 곳이 간지러우면서도 따가웠다. 허나 은우는 빈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뿌리치지 못했다.

 

은우의 마음이 평생선을 벗어나 수직으로 자라났다.

 

 

 

 

 

 

 

*

 

", 그래주시면 저야 고맙죠. 네 그럼 그 때 뵐게요."

 

빈이 통화하는 내내 귀를 열고 있던 은우가 빈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기가 무섭게 물었다.

 

"무슨 전화에요?"

 

빈이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연구 기관인데, 저희 묘목보러 오신대요."

 

은우는 빈의 통화 상대가 저와 같은 부류의 인간인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모른 척 하면 그만이었다. 빈이 또 다른 사기를 당하던 말던, 제 목표만 달성하고 빠지는 게 당초의 시나리오였다. 은우는 빈에게 조심하라 말할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빈씨."

 

""

 

"...사람들, 너무 믿지 마요. 요즘 세상엔 너무 착한 것도 죄에요."

 

빈이 그대로 당하는 걸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뜬금없는 은우의 말에 빈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저 안 착한데."

 

말의 내용과는 달리 툭 튀어나오는 순진한 말투에 은우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아하하 소리를 내며 웃는 은우를 향해 빈이 갸우뚱대며 한마디 덧붙였다.

 

"진짠데. 저 하나도 안 착한데."

 

"알겠어요. 빈씨 안 착한데, 더 안 착한 사람들 많으니까 조심해요. 남의 말 덥썩 믿지 말구요."

 

"에이, 세상에 쌤 같이 착한 사람도 많잖아요. "

 

신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빈에 은우는 절로 고개를 떨구었다. 차마 빈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니요. 저도 안 착한 사람이에요나쁜 사람...에 가깝죠. 저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바닥을 향해 얘기하는 은우에게 빈은 장난스러운, 그러나 꽤나 수줍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 괜히 잘해주는거 아닌데."

 

"?"

 

"쌤은 저 어떻게 생각해요?"

 

붉어진 얼굴로 물어오는 노골적인 질문을 은우는 피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둘의 관계를 시작해버리면 나중에 상처입을 사람은 빈이었다. 여기서 더 마음을 열면 끝은 뻔했다. 더 이상 빈이 상처받을 여지를 만들어서는 안되었다. 나중에 은우가 여느때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후에, 혹은 일이 잘못되어 빈이 모든 걸 알아챘을 때 빈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딱 여기까지의 관계가 바람직했다.

 

"...빈 씨 좋은 사람이죠. 친절하고, 따뜻하고, 재밌고..."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얼굴에 서운함이 역력했다. 앙증맞은 윗입술이 평소보다 더욱 튀어나왔다. 

 

세상에 참을 수 없는 세 가지가 기침,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 했던가. 한 번 소용돌이 친 감정은 은우가 손을 쓰기도 전에 휘몰아쳐 빈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붙잡았다. 그리고 얇고 통통한 입술에 조심스레 입을 맞추었다. 

 

끝이 보이는 사랑이라 해도 멈출 수 없었다.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갈 지라도 빈과의 추억을 쌓을 수 있다면 괜찮을 것만 같았다. 설령 제 손으로 빈의 가슴에 커다란 생채기를 낼 지라도, 이미 쏟아지기 시작한 사랑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

 

 

블루베리 나무에 짧은 도장지가 또 자라났다. 이번엔 은우가 가지치기를 하러 원예용 가위를 챙겼다. 또각또각 잘라내는 은우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과실을 맺지 못하는 가지라도 같은 나무에 뿌리를 내린 생명이었다. 허투루 잘라내고 싶지 않았다. 손목에 힘줄이 불거지도록 가위를 꽈악 잡고 있는 은우의 손 위에 조금 작은 손이 겹쳐졌다.

 

", 너무 힘주지 말구요."

 

빈이 오는 것도 모른 채 열중한 은우의 관자놀이에 땀이 송글히 맺혀있었다. 빈은 소매를 끌어올려 은우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는

 

", ."

 

네 손가락을 모아 까딱까딱하며 귀를 대보라고 손짓했다. 영문을 모른 채 은우가 빈의 입가에 귀를 갖다대자 빈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요."

 

 

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드넓은 화원에 단 둘만 있는데도 굳이 귓속말로 사랑을 속삭이는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뿌리치려 해도 뿌리칠 힘이 은우에게는 없었다. 머리가 지끈하게 아파왔다.

 

은우는 '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빈에게 '나도 사랑해요.' 라고 답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우 자신은 어떤 결말을 맞던 상관이 없었다. 애초에 해피엔딩을 바랄 수 없는 시작이었다. 허나 진실을 마주하게 된 후 빈이 받을 상처가 두려웠다. 할 말을 고르지 못한 입술은 결국 말없이 빈의 입술에 맞닿았다.

 

 

 

*

 

 

뜨거운 감정은 병이 되어 감기처럼 몸을 녹진하게 만들었다.

 

"어디 아파요?"

 

빈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머리가 좀 띵하네요. 요새 좀 피곤했나봐요. 감기기운도 있는 것 같고."

 

"감기요? 쌤 무리하지 말고 가서 누워요. 잠시만요, 감기약이 여기 어디 있을건데."

 

빈이 찬장을 뒤지는 사이 소파에 머리를 뉘인 은우는 눈을 감고 메슥거리는 속을 부여잡았다. 빈이 거실로 오는 소리가 들리자 은우는 힘겹게 일어나 빈이 건넨 조그만 알약을 받아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두통 때문인지 울렁거리는 시야 속의 빈의 얼굴이 묘하게 웃고 있는 듯 했다. 은우는 눈을 비볐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크게 흔들렸다. 감기 기운 치고는 몽롱함이 과했다.

 

"왜 그렇게 정신을 못 차려?"

 

눈 앞이 어지러웠다. 빈이 뜬금없이 말을 놓은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갑작스레 졸음이 쏟아졌다.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휘청거리는 은우를 보며 빈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고작 자낙스 한 알 가지고."

 

눈 앞에서 웃는 사람은 은우가 알던 빈이 아니었다.

 

","

 

은우가 대꾸하기도 전에 시야가 암흑처럼 어두워지며 은우는 정신을 잃었다.

 

 

 

 

 

 

 

*

 

은우가 정신을 차렸을 땐 창고의 허름한 철제의자에 손발이 결박되어있는 상태였다.

 

"잘 잤어요?"

 

은우의 현상태와는 아이러니하게도 은우를 향해 묻는 목소리는 퍽 다정했다.

 

"빈씨, 이게 무슨..."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목소리는 까끌한 목구멍에 걸려 퍽퍽히 갈라져 나왔다.

 

빈은 손에 든 작은 주사기를 흔들며 은우를 향해 방긋 웃었다. 예의 그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 사람들 너무 믿지 마요."

 

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던 달콤한 목소리는 싸늘했다.

 

"요즘 세상엔 너무 착한 것도 죄에요. , 우리 쌤은 안 착하지. 큭큭큭."

 

빈은 앉아있던 철제 테이블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전에 은우가 정리해놓은 농약품들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곤 블루베리 나무에 쓸 것이라 말했던 약품에 주사바늘을 대고 피스톤을 죽 잡아당겼다.

 

주사기에 들어차는 약물은 은우의 머리속처럼 희뿌연 색이었다.

 

 

 

"내가 여기서 진짜로 나무나 심고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너무 순진하시네."

 

은우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손이 벌벌 떨렸다.

 

"은우쌤같은 사람들 많아요. 알잖아요. 불순한 의도로 찾아오는 사람들, 나도 불순한 의도로 응해주는 거에요. 그쪽은 등쳐먹을 사람 필요하고, 난 임상실험 대상자가 필요하니까. 쌤쌤. 윈윈. 오키? 아니다. 결국 등쳐먹지는 못했으니까 윈윈은 아닌가."

 

빈이 피식 웃었다. 비웃음을 띈 빈의 얼굴이 생경했다. 은우는 이 상황 자체가 믿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빈은 불투명의 액체가 담긴 주사기를 들고 은우에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너무 겁먹지 마요. 그냥 마약이에요."

 

마약, 이라는 단어에 은우가 놀라 몸을 파드득 움직였지만 단단히 결박된 신체에 도망갈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빈은 덜덜 떨리는 은우의 팔뚝을 부여잡으며 속삭였다.

 

"이번 거 성공하면 진짜 엄청날 거에요 이거. 그러니까 쌤이 많이 도와줘야해요. 알죠?"

 

은우는 빈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대사에 뒷통수를 세게 후려맞은 듯 했다.

 

흰 액체가 주사기의 눈금을 하나씩 지나쳐 모조리 은우의 몸 속으로 주입되었다. 혈관이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의 떨림은 어깨까지 번져 은우는 온 상체를 벌벌 떨었다. 공포, 그 이상의 감정이었다.

 

금세 약효가 돌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발끝이 나른해졌다. 마치 온 몸이 성감대가 된 듯 민감해졌다.

 

"좋죠?"

 

빈이 이죽거리며 은우에게 물었다. 은우는 입을 벌리고 있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몽롱한 느낌에 취해 침이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마약에 푹 빠진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며 어른어른한 느낌이 사라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빈이 은우의 상태를 확인하곤 두번째 주사를 놓았다.

 

두번째 주사의 약효가 돌기 시작하자 은우의 몸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술에 취한 듯 잠에 취한 듯 나른했던 느낌은 사라지고 땅으로 고꾸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심장에 확성기를 단 듯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귓가에 두근대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제 심장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두 눈을 질끈 감은 은우에게 빈이 주사기를 들어보이며 물었다.

 

"하나 더?"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도 아니었다. 그저 통보였다. 은우는 들을 수 없는 통보. 제 심장소리에 묻혀 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은우는 제 팔에 따끔하게 꽂히는 주사바늘을 느끼고 나서야 제게 세번째 마약이 주입된 것을 알아챘다.

 

마약은 더 이상 은우에게 쾌락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미 은우가 느끼고 있는 쾌락은 치사량이었다.

 

미상의 액체가 몸을 타고 돌아다니며 불을 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은우는 너무 고통스러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소리는 고사하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꺼억꺼억 숨이 넘어가는 은우를 빈은 팔짱을 끼고 응시했다.

 

겨우 숨이 트이자, 데인 뜻 뜨거웠던 체온은 빠른 속도로 식어갔다. 손끝부터 감각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고통에서 벗어나 무감각을 알아챈 은우가 몸을 휘적댔을 땐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몸이 돌덩이로 변한 듯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 사람의 신체라기보다는 고깃덩이에 지나지않았다. 이제 은우가 제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호흡기관과 눈알 뿐이었다.

 

은우의 근육이 경직된 것이 보이자, 빈은 팔짱을 풀고 은우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나 보여요? 내 말 들려요?"

 

은우는 눈물고인 눈으로 눈동자만 돌려 빈을 바라보았다. 목이며 어깨며 빳빳하게 굳어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있는 힘껏 빈을 노려보려고 해도 눈꺼풀이 굳어 메말라버린 눈동자를 눈물샘이 적셔줄 뿐, 은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이번 거는 좀 세다더니 진짠가보네, 대박."

 

빈이 예의 그 장난스런 표정으로 킬킬대며 말했다. 그리고는 이미 생명을 잃은 은우의 팔뚝에 주사 한 대를 더 놓았다. 은우는 주사바늘이 제 팔에 꽂히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수 밖에 없었다.

 

근육이 모두 굳어버리자 이젠 시신경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고장난 눈꺼풀은 깜빡일 수 없는데도 시야가 깜빡거렸다.

 

멀쩡한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 은우의 눈 앞에 스쳐갔다. 빈과의 첫 만남, 까치집을 지은 머리로 졸린 눈을 꿈뻑대던 모습, 흙을 만지며 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 함께 심었던 묘목, 수줍게 제게 고백하던 입모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눴던 사랑, 빈의 조그만 입술이 뱉었던 사랑한다는 말...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은우의 귓가에는 빈의 목소리만이 웅웅댔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마른 장작처럼 굳은 은우의 얼굴 위로 축축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

 

 

타칵.타칵.

빈은 빠른 손놀림으로 썩은 나뭇가지를 잘라내었다.

 

삐익-!

 

화원 입구의 현관벨이 공기가 찢어지도록 울려퍼졌다.

 

", 잠시만요~"

빈이 경쾌하게 대답하며 원예용 가위를 들고 화원을 나섰다.

 

 

 

비닐하우스의 문을 쾅-하고 닫자 반동으로 잎과 열매들이 잘게 떨렸다. 결국 작은 흔들림을 견디지 못한 블루베리 열매 한 알이 툭, 은우의 싸늘한 주검이 잠들어있는 땅 위로 떨어졌다.

 

 

 

 

 

 

 

 

 

 

 

 

 

 

 

도장지(徒長枝)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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